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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2화)
“되먹지 못한 놈 밑에서 있다 보니까 귓구멍도 다 막혔나 보지?”
얼얼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놀드를 향해 한이 한 발자국 다가섰다.
“지금부터 삼 개월 전에 수호위원회에서 모든 헌터를 대상으로 지령이 내려왔지.”
한은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휘어진 날은 매섭게 번뜩였다.
“성산 일출봉 근처에 서식하던 강철 톱니가 박멸된 게 확인됐으니 경보를 해제한다고 말야. 수호위원회 공식 지령도 체크하지 못하는 놈이 B랭크 헌터라고?”
“아니, 이봐, 형씨.”
“헌터 입문서 2장 3절. 사막 몬스터 항목 제1항. 자이언트 웜. 사막 지역에 서식하는 길이 15m, 무게 3톤의 대형급 몬스터. 불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으며 약점은 물과 얼음.”
“…….”
“강철 톱니라고 하면 보통 강철로 된 어금니를 가진 괴물을 생각하지. 하지만 말야. 강철 톱니는 이빨이 없어.”
강철 톱니는 군집 생활을 하는 몬스터. 무리 지어서 인간을 습격하는 그 모습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이 정밀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자이언트 웜도, 강철 톱니도 헌터 입문 과정을 정식으로 수료한 자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기초 몬스터였다.
뿌드득.
아놀드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기본적인 헌터 네트워킹 정보도 확인 안 하고, 자이언트 웜이 뭔지도 모르는 머저리가 설귀를 잡겠다고?”
잔잔하던 한의 검은색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에드문드는 저열하기는 해도 멍청이는 아니었지. 그런데 부하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해 빠진 놈들뿐인 걸 보니 에드문드도 죽을 때가 됐나.”
“…닥쳐라, 반역자 새끼야.”
잠잠하던 아놀드가 돌연 고함을 내질렀다.
“그 더러운 입으로 에드문드 장군님의 존함을 담지 마라, 반역자 새끼야!”
사람 좋던 아놀드의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며 빛을 발했다.
“반역자라고?”
한은 씹어 뱉듯이 말을 토해냈다. 더 이상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한의 손에 들린 유선형의 나이프가 긴 호를 그리며 핑그르르 회전했다.
“덤벼, 심장을 찢어발겨 주지.”
한이 막 달려드려는 순간, 아놀드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뿜었다. 그 기이한 현상에 한은 잠시 멈칫했다.
“제법 눈치는 빠른 것 같다만… 이건 몰랐을 거다.”
아놀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네놈을 잡으러 간다고 하니, 요제프 경이 이걸 주더군.”
아놀드의 손바닥 위로 붉은 구슬이 하나 떠올랐다.
“영성의 비약.”
아놀드는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도약을 실현시켜 줄 전사들을 위한 영광의 증거.”
아놀드의 입가가 히죽 하고 벌어지더니 구슬을 꿀꺽 삼켰다. 아놀드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놀드의 몸에서 믿기지 않으리만큼 위압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크아악……!”
아놀드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기운이 점차 광기어린 빛을 띠기 시작했다.
아놀드가 자신의 털옷을 부욱 잡아 뜯었다. 그러자 털옷 아래 숨겨져 있던 검은색의 판금갑옷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판금 갑옷 좌상단에 새겨진 황금색 뱀의 휘장. 에드문드의 소속임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는 증거였다.
“이봐, 한. 원래대로라면 네놈은 산산이 조각나 차원의 틈새에 뿌려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에드문드 장군님은 자비로운 분이시지. 출발하기 전에 그분이 나를 불러 명하셨다.”
아놀드가 한을 향해 오른쪽 손가락을 뻗었다.
“네놈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대도약에 협조한다면 네놈과 네 애비가 지은 죄를 묻지 않고, 앞으로의 공적에 따라 후하게 대접하겠다고 말이지.”
에드문드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아놀드의 표정은 한껏 격앙되었다.
“자, 마지막 기회다, 류 한.”
아놀드가 두 손을 양쪽으로 뻗었다. 자기 딴에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한 건지 아놀드의 표정에는 강자의 여유가 묻어나왔다.
한이 대답했다.
“영성의 비약이라고 했나? 그런 거 함부로 먹으면 몸에 안 좋을 텐데?”
기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놀드. 하지만 그런 아놀드를 바라보는 한의 표정에는 위기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 점이 아놀드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대답해라, 류 한. 죽여 버리기 전에.”
아놀드의 목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놀드라는 남자가 임무를 위해서라면 목숨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신념을 가진 군인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한을 더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싫다면?”
뿌득.
아놀드가 거칠게 이를 갈았다. 더 이상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니라 응징이라 생각한 아놀드는 눈앞에 있는 반역자를 상대로 몸을 띄웠다.
느껴진다. 온몸에 흐르는 맹렬한 힘이…….
반역자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아놀드는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의 두 손에는 대지를 찢어발길 수 있는 힘이 맺혀 있다는 것을.
콰아아앙!
대지를 찢어발기는 괴력이 담긴 두 주먹이 대지에 내리꽂혔다. 대청봉 전체가 몸서리쳤다.
“크르륵…….”
어느새 인간이 아닌 형상을 하게 된 아놀드는 흩날리는 눈발로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며 한을 찾았다.
방금 전의 일격은 빗나갔다. 하지만 다음번 주먹은 반드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제야 조금 들어줄 만하네.”
갑자기 아놀드의 등 뒤에서 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의 대충돌에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나지 않은 깔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크르르…….”
경계 태세를 취한 아놀드가 다시 한 번 도약의 준비를 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저 반역자의 심장에 손톱을 박아 넣으리라. 아놀드의 입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짖어 대는 게 어울리지.”
“크아아아!”
아놀드의 눈가에 다시 한 번 강렬한 살기가 맺혔다. 아놀드는 다시 한 번 대청봉을 반으로 쪼개 놓을 기세로 한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아앙!
조금 전 그 이상의 충격음이 다시 한 번 대청봉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놀드의 주먹은 이번에도 빗나가고 말았다. 아놀드의 주먹이 닿은 곳엔 뿌연 눈발만 흩날릴 뿐, 한은 온데간데없었다.
“크으윽…….”
아놀드의 입이 벌어지며 입가를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그 순간, 한은 또다시 아놀드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아놀드는 한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의 오른팔이…….
“너는 아직 요제프가 어떤 놈인지 모르는구나.”
등 뒤에서 아놀드의 심장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저승 가는 선물로 하나 가르쳐 주지. 요제프는 이런 놈이야.”
“커억!”
아놀드의 입에서 뜨거운 피거품이 솟아올랐다.
한이 반대쪽 손으로 아놀드의 복부에 손을 쑤셔 넣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그 손을 그대로 뽑아내었다. 들어갈 때는 빈손이던 한의 왼손에는 새카맣고 주먹만 한 구체가 들려 있었다. 그 구체를 목격한 아놀드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사냥을 떠나는 부하의 심장에 폭탄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쑤셔 박을 수 있는 놈. 표정을 보아하니 이건 몰랐던 모양인데?”
“크르륵… 크악!”
아놀드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이 한 층 더 진해졌다.
“듣기 거북한 소리는 그만.”
한은 복부에서 뽑아낸 폭탄을 아놀드의 입에 쑤셔 박았다.
아놀드와 한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푸른빛을 내며 타오르는 한의 눈동자를 보며, 아놀드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한은 아놀드의 터진 복부 사이로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흠뻑 찍었다. 그러고는 아놀드의 가슴팍에 어떤 복잡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놀드는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문양이 뭔지 알고 있었다.
강제 송환 마법.
째깍째깍.
폭탄의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폭발까지는 앞으로 30초.
강제 송환 마법은 차원 이동이 일어났던 그 장소로 차원 이동자를 다시 돌려보내는 마법. 그 얘기인즉, 자신은 자신이 차원 이동을 했던 에드문드군 막사로 강제 송환된다는 뜻이고, 막사 한가운데서 이 폭탄이 터진다는 뜻이었다.
“돌아가거든 에드문드에게 전해. 이 세상을 가지려면…….”
“읍읍, 읍!”
입에 폭탄이 쑤셔 박힌 아놀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절망에 물든 아놀드의 눈동자가 실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나부터 쓰러뜨려야 할 거라고.”
한의 말을 끝으로 아놀드의 몸이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췄다. 마치 허공의 작은 바늘구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아놀드가 있던 허공은 금세 거센 눈보라로 가득 채워졌다.
“후우…….”
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차원 이동으로 인해 뒤틀렸던 영혼도, 그 육신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영혼이 뒤틀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 또한 피해자일 뿐.
하지만 한은 그런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생각도, 슬퍼할 마음도 없었다. 놈들에게 칼을 겨누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비는 무의미한 선택지였다.
뒤틀린 영혼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들을 구원해줄 뿐이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도살자라면, 그 이름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외면할 마음은 없다.더불어 뒤틀린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척을 하는 위선자가 될 마음 역시 추호도 없었다.
“에드문드…….”
한이 내뱉은 이름. 그러나 그 이름은 곧 설원의 눈발에 휩쓸려 흩어졌다.
한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오늘밤에도 뜨지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뒤틀린 영혼을 아무리 많이 베어 내봤자 별은 뜨지 않는다. 갑작스레 몰아닥친 서글픔에 한은 옷깃을 여몄다.
잠시 잠잠하던 눈보라가 다시 거세게 몰아쳤다. 대청봉의 밤바람은 눈물이 날 정도로 시렸다.
***
“거기, 거기 잠깐.”
대청봉을 내려오는 한을 털외투로 몸을 감싼 두 명의 남자가 멈춰 세웠다.
“거기 젊은이, 어디서 오시는 길이요?”
두 남자 중 상급자로 보이는 남자가 한에게 말했다.
“나는 제37섹터 경비대장입니다. 조금 전에 대청봉 쪽에서 들린 폭발음을 조사 중인데, 실례지만 성함과 어디서 오는 길인지를 말씀해 주실 수 있소?”
설산을 누비는 경비대원들을 향해 한은 고개를 숙여 목례를 건넸다.
“추운 날씨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하긴, 그 정도로 큰 소리가 났는데 경비대원이 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 한은 신분증 대신, 코트에서 헌터 자격증을 꺼내 경비대원들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한의 헌터 자격증을 살폈다.
코드 명 : 류 한
등급 클래스 : SS
“지금 당장 너무 가까이는 접근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꼭대기 쪽 흐름이 굉장히 불안한 상태거든요. 섣불리 접근하지 마시고, 수호위원회에 연락하셔서 지원을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시 사항 하달 받았습니다. 제37섹터 6경비초소, 인원 보고…….”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그럼 날이 추우니 몸조심하시길.”
한의 자격증을 확인한 두 경비대원은 부동자세를 취한 채, 멀어져 가는 한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국경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프롤로그 ― 남방한계선 End.
“되먹지 못한 놈 밑에서 있다 보니까 귓구멍도 다 막혔나 보지?”
얼얼한 얼굴을 하고 있는 아놀드를 향해 한이 한 발자국 다가섰다.
“지금부터 삼 개월 전에 수호위원회에서 모든 헌터를 대상으로 지령이 내려왔지.”
한은 품속에서 나이프를 꺼내 들었다. 거센 눈보라 속에서도 휘어진 날은 매섭게 번뜩였다.
“성산 일출봉 근처에 서식하던 강철 톱니가 박멸된 게 확인됐으니 경보를 해제한다고 말야. 수호위원회 공식 지령도 체크하지 못하는 놈이 B랭크 헌터라고?”
“아니, 이봐, 형씨.”
“헌터 입문서 2장 3절. 사막 몬스터 항목 제1항. 자이언트 웜. 사막 지역에 서식하는 길이 15m, 무게 3톤의 대형급 몬스터. 불에 강한 내성을 가지고 있으며 약점은 물과 얼음.”
“…….”
“강철 톱니라고 하면 보통 강철로 된 어금니를 가진 괴물을 생각하지. 하지만 말야. 강철 톱니는 이빨이 없어.”
강철 톱니는 군집 생활을 하는 몬스터. 무리 지어서 인간을 습격하는 그 모습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 같이 정밀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
자이언트 웜도, 강철 톱니도 헌터 입문 과정을 정식으로 수료한 자라면 모르려야 모를 수 없는 기초 몬스터였다.
뿌드득.
아놀드의 입에서 거친 소리가 들려왔다.
“기본적인 헌터 네트워킹 정보도 확인 안 하고, 자이언트 웜이 뭔지도 모르는 머저리가 설귀를 잡겠다고?”
잔잔하던 한의 검은색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뿜기 시작했다.
“에드문드는 저열하기는 해도 멍청이는 아니었지. 그런데 부하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해 빠진 놈들뿐인 걸 보니 에드문드도 죽을 때가 됐나.”
“…닥쳐라, 반역자 새끼야.”
잠잠하던 아놀드가 돌연 고함을 내질렀다.
“그 더러운 입으로 에드문드 장군님의 존함을 담지 마라, 반역자 새끼야!”
사람 좋던 아놀드의 눈에서 붉은빛이 뿜어져 나오고, 날카로운 송곳니가 드러나며 빛을 발했다.
“반역자라고?”
한은 씹어 뱉듯이 말을 토해냈다. 더 이상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한의 손에 들린 유선형의 나이프가 긴 호를 그리며 핑그르르 회전했다.
“덤벼, 심장을 찢어발겨 주지.”
한이 막 달려드려는 순간, 아놀드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뿜었다. 그 기이한 현상에 한은 잠시 멈칫했다.
“제법 눈치는 빠른 것 같다만… 이건 몰랐을 거다.”
아놀드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네놈을 잡으러 간다고 하니, 요제프 경이 이걸 주더군.”
아놀드의 손바닥 위로 붉은 구슬이 하나 떠올랐다.
“영성의 비약.”
아놀드는 득의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도약을 실현시켜 줄 전사들을 위한 영광의 증거.”
아놀드의 입가가 히죽 하고 벌어지더니 구슬을 꿀꺽 삼켰다. 아놀드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더욱더 짙어졌다. 그와 동시에 아놀드의 몸에서 믿기지 않으리만큼 위압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크아악……!”
아놀드의 몸 안에서 소용돌이치던 기운이 점차 광기어린 빛을 띠기 시작했다.
아놀드가 자신의 털옷을 부욱 잡아 뜯었다. 그러자 털옷 아래 숨겨져 있던 검은색의 판금갑옷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판금 갑옷 좌상단에 새겨진 황금색 뱀의 휘장. 에드문드의 소속임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는 증거였다.
“이봐, 한. 원래대로라면 네놈은 산산이 조각나 차원의 틈새에 뿌려져야 마땅하다. 하지만 에드문드 장군님은 자비로운 분이시지. 출발하기 전에 그분이 나를 불러 명하셨다.”
아놀드가 한을 향해 오른쪽 손가락을 뻗었다.
“네놈이 지난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대도약에 협조한다면 네놈과 네 애비가 지은 죄를 묻지 않고, 앞으로의 공적에 따라 후하게 대접하겠다고 말이지.”
에드문드라는 이름을 입에 담는 것만으로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아놀드의 표정은 한껏 격앙되었다.
“자, 마지막 기회다, 류 한.”
아놀드가 두 손을 양쪽으로 뻗었다. 자기 딴에는 자비를 베풀었다고 생각한 건지 아놀드의 표정에는 강자의 여유가 묻어나왔다.
한이 대답했다.
“영성의 비약이라고 했나? 그런 거 함부로 먹으면 몸에 안 좋을 텐데?”
기의 폭풍을 일으키고 있는 아놀드. 하지만 그런 아놀드를 바라보는 한의 표정에는 위기감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고, 그 점이 아놀드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대답해라, 류 한. 죽여 버리기 전에.”
아놀드의 목적에는 동의할 수 없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놀드라는 남자가 임무를 위해서라면 목숨쯤은 얼마든지 버릴 수 있는 신념을 가진 군인이라는 사실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한을 더없이 불쾌하게 만들었다.
“싫다면?”
뿌득.
아놀드가 거칠게 이를 갈았다. 더 이상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지금 이 순간 필요한 건 대화가 아니라 응징이라 생각한 아놀드는 눈앞에 있는 반역자를 상대로 몸을 띄웠다.
느껴진다. 온몸에 흐르는 맹렬한 힘이…….
반역자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진다. 아놀드는 양손을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자신의 두 손에는 대지를 찢어발길 수 있는 힘이 맺혀 있다는 것을.
콰아아앙!
대지를 찢어발기는 괴력이 담긴 두 주먹이 대지에 내리꽂혔다. 대청봉 전체가 몸서리쳤다.
“크르륵…….”
어느새 인간이 아닌 형상을 하게 된 아놀드는 흩날리는 눈발로 가득한 주위를 둘러보며 한을 찾았다.
방금 전의 일격은 빗나갔다. 하지만 다음번 주먹은 반드시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이제야 조금 들어줄 만하네.”
갑자기 아놀드의 등 뒤에서 한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금 전의 대충돌에도 불구하고 상처 하나 나지 않은 깔끔한 모습 그대로였다.
“크르르…….”
경계 태세를 취한 아놀드가 다시 한 번 도약의 준비를 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저 반역자의 심장에 손톱을 박아 넣으리라. 아놀드의 입에서 인간이 아닌 짐승의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다.
“개새끼는 개새끼답게 짖어 대는 게 어울리지.”
“크아아아!”
아놀드의 눈가에 다시 한 번 강렬한 살기가 맺혔다. 아놀드는 다시 한 번 대청봉을 반으로 쪼개 놓을 기세로 한을 향해 도약했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주먹을 내리쳤다.
콰아앙!
조금 전 그 이상의 충격음이 다시 한 번 대청봉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아놀드의 주먹은 이번에도 빗나가고 말았다. 아놀드의 주먹이 닿은 곳엔 뿌연 눈발만 흩날릴 뿐, 한은 온데간데없었다.
“크으윽…….”
아놀드의 입이 벌어지며 입가를 타고 검붉은 피가 흘러 나왔다. 그 순간, 한은 또다시 아놀드의 등 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
그 모습을 볼 순 없지만, 아놀드는 한이 어디에 있는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왜냐하면 한의 오른팔이…….
“너는 아직 요제프가 어떤 놈인지 모르는구나.”
등 뒤에서 아놀드의 심장을 꿰뚫었기 때문이다.
“저승 가는 선물로 하나 가르쳐 주지. 요제프는 이런 놈이야.”
“커억!”
아놀드의 입에서 뜨거운 피거품이 솟아올랐다.
한이 반대쪽 손으로 아놀드의 복부에 손을 쑤셔 넣었던 것이다. 그러고는 그 손을 그대로 뽑아내었다. 들어갈 때는 빈손이던 한의 왼손에는 새카맣고 주먹만 한 구체가 들려 있었다. 그 구체를 목격한 아놀드의 눈이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크게 떠졌다.
“사냥을 떠나는 부하의 심장에 폭탄 하나쯤은 아무렇지도 않게 쑤셔 박을 수 있는 놈. 표정을 보아하니 이건 몰랐던 모양인데?”
“크르륵… 크악!”
아놀드의 입가를 타고 흐르는 핏물이 한 층 더 진해졌다.
“듣기 거북한 소리는 그만.”
한은 복부에서 뽑아낸 폭탄을 아놀드의 입에 쑤셔 박았다.
아놀드와 한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푸른빛을 내며 타오르는 한의 눈동자를 보며, 아놀드는 죽어가는 순간에도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한은 아놀드의 터진 복부 사이로 흐르는 피를 손가락으로 흠뻑 찍었다. 그러고는 아놀드의 가슴팍에 어떤 복잡한 문양을 그리기 시작했다.
아놀드는 무력하게 그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그 문양이 뭔지 알고 있었다.
강제 송환 마법.
째깍째깍.
폭탄의 타이머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폭발까지는 앞으로 30초.
강제 송환 마법은 차원 이동이 일어났던 그 장소로 차원 이동자를 다시 돌려보내는 마법. 그 얘기인즉, 자신은 자신이 차원 이동을 했던 에드문드군 막사로 강제 송환된다는 뜻이고, 막사 한가운데서 이 폭탄이 터진다는 뜻이었다.
“돌아가거든 에드문드에게 전해. 이 세상을 가지려면…….”
“읍읍, 읍!”
입에 폭탄이 쑤셔 박힌 아놀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절망에 물든 아놀드의 눈동자가 실핏줄이 터질 듯 부풀어 올랐다.
“나부터 쓰러뜨려야 할 거라고.”
한의 말을 끝으로 아놀드의 몸이 순식간에 그 자취를 감췄다. 마치 허공의 작은 바늘구멍으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 것처럼.
아놀드가 있던 허공은 금세 거센 눈보라로 가득 채워졌다.
“후우…….”
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차원 이동으로 인해 뒤틀렸던 영혼도, 그 육신도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갔다.
영혼이 뒤틀린 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 또한 피해자일 뿐.
하지만 한은 그런 자들을 위해 눈물을 흘릴 생각도, 슬퍼할 마음도 없었다. 놈들에게 칼을 겨누기로 마음먹은 이상, 자비는 무의미한 선택지였다.
뒤틀린 영혼은 다시 되돌릴 수 없다. 오로지 죽음만이 그들을 구원해줄 뿐이다.
나에게 주어진 운명이 도살자라면, 그 이름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외면할 마음은 없다.더불어 뒤틀린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척을 하는 위선자가 될 마음 역시 추호도 없었다.
“에드문드…….”
한이 내뱉은 이름. 그러나 그 이름은 곧 설원의 눈발에 휩쓸려 흩어졌다.
한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오늘밤에도 뜨지 않았다.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 아닌가.
뒤틀린 영혼을 아무리 많이 베어 내봤자 별은 뜨지 않는다. 갑작스레 몰아닥친 서글픔에 한은 옷깃을 여몄다.
잠시 잠잠하던 눈보라가 다시 거세게 몰아쳤다. 대청봉의 밤바람은 눈물이 날 정도로 시렸다.
“거기, 거기 잠깐.”
대청봉을 내려오는 한을 털외투로 몸을 감싼 두 명의 남자가 멈춰 세웠다.
“거기 젊은이, 어디서 오시는 길이요?”
두 남자 중 상급자로 보이는 남자가 한에게 말했다.
“나는 제37섹터 경비대장입니다. 조금 전에 대청봉 쪽에서 들린 폭발음을 조사 중인데, 실례지만 성함과 어디서 오는 길인지를 말씀해 주실 수 있소?”
설산을 누비는 경비대원들을 향해 한은 고개를 숙여 목례를 건넸다.
“추운 날씨에 노고가 많으십니다.”
하긴, 그 정도로 큰 소리가 났는데 경비대원이 오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 한은 신분증 대신, 코트에서 헌터 자격증을 꺼내 경비대원들에게 보여주었다.
두 사람은 조심스레 한의 헌터 자격증을 살폈다.
코드 명 : 류 한
등급 클래스 : SS
“지금 당장 너무 가까이는 접근하지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꼭대기 쪽 흐름이 굉장히 불안한 상태거든요. 섣불리 접근하지 마시고, 수호위원회에 연락하셔서 지원을 기다리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지시 사항 하달 받았습니다. 제37섹터 6경비초소, 인원 보고…….”
“아뇨,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그만 가봐야 할 것 같군요. 그럼 날이 추우니 몸조심하시길.”
한의 자격증을 확인한 두 경비대원은 부동자세를 취한 채, 멀어져 가는 한의 뒷모습을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국경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프롤로그 ― 남방한계선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