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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멘션 워커 1권 (1화)
프롤로그 - 남방한계선
“크륵…….”
피가 끓는 가래 소리와 함께 가시 불곰의 커다란 몸이 산사태가 발생하듯 허물어졌다.
쌍두 늑대의 몸은 무쇠도 녹여버리는 강산액을 뿜으며, 자로 잰 것 마냥 정밀하게 반쪽으로 찢어졌다.
강철 같은 뿔을 앞세워 달려드는 거대한 순록의 목이 잘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바탕 피의 활극은 그 종말을 고했다.
“후우…….”
설원의 한복판, 피의 향연을 연출한 주인공. 검은 머리의 남자가 뿜은 입김이 허옇게 피어올라 한 송이 꽃을 피웠다.
남자는 나이프를 품 안에 집어넣고는 널브러진 시체의 중심으로 다가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기원’의 주문을 읊었다.
우우웅.
남자를 중심으로 묘한 울림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시공간이 뒤틀리고, 남자가 밟고 있던 땅이 이전과는 다른 곳으로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고, 보이되 보이지 않으며, 들리되 들리지 않는 모호한 차원의 경계.
잠시 후, 남자는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이미 생명의 불꽃이 꺼졌을 터인 마물들의 시체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화의 시간이다.
“나의 뜻이 이곳에 머물지니…….”
남자의 나지막한 기도와 동시에 마물들의 시체에서 배어 나오던 푸른빛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영롱하고 눈부신 빛 무리로 변해갔다.
“그대의 영혼은 가야 할 곳으로…….”
영혼들이 돌아가야 할 곳. 그곳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차원 문이 열렸다.
“그대, 부디 편히 쉴지어다.”
길을 잃은 가련한 영혼들은 차원 문을 통해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귀환을 마쳤다.
“후우…….”
진혼가를 끝마친 검은 머리의 남자, 류 한은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마물의 시체를 분해할 준비를 시작했다.
영혼을 돌려보낸 시체는 껍데기일 뿐. 껍데기를 자신이 취한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터다. 한은 몬스터의 시체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순록의 거대한 뿔을 베어내는 한의 손놀림은 마치 기계처럼 정밀하고도 정확했다. 순식간에 순록의 뿔을 잘라낸 한은 이번엔 반으로 갈린 쌍두 늑대의 상반신에 나이프를 꽂았다.
쌍두 늑대의 심장은 죽은 직후 부패가 시작된다. 최대한 빨리 처리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부스럭.
설원의 반대편에서 눈에 덮인 나뭇가지가 한차례 흔들렸다. 한은 그쪽 방향을 주시했다. 이 근방의 몬스터는 싹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은 놈들이 있었나?
“이야, 이거 아주 장관이구만!”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손님은 몬스터가 아니라 두꺼운 털옷으로 온몸을 감싼 중년 남자였다.
털모자로 감싼 귀 양옆으로 삐져나온 갈색의 억센 머리카락,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짙은 수염, 그리고 털옷 너머로도 짐작이 가는 탄탄한 몸매. 키는 크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당당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남자였다.
중년 남자는 얼굴에 살가운 미소를 띤 채 한에게 다가왔다.
“허허, 가시 불곰에, 쌍두 늑대에, 강철 발굽 순록까지……. 형씨, 아주 대박을 치셨소. 젊어 보이는 양반이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중년 남자는 과장된 손동작으로 한에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얼굴을 가득 덮은 억센 수염과 우렁우렁한 목소리와는 달리, 무척이나 살가운 성격의 남자인 듯했다.
“형씨, 이 근방에서는 영 못 보던 얼굴인데? 나는 ‘푸른 수염’ 소속의 아놀드요. 형씨는 어디 소속이신가?”
‘푸른 수염’이라 하면 설악산 대청봉 일대를 양분하고 있는 길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곳은 남방한계선 너머 대청봉 한복판. 갑자기 나타난 낯선 남자의 말을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
한은 대답 대신 자신의 이름을 아놀드라 밝힌 중년 남자를 묵묵히 바라봤다.
한의 묵묵부답을 본인에 대한 경계라고 파악했는지, 아놀드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여기, 이걸 보면 믿을 수 있겠지.”
아놀드는 품속에서 자격증과 길드 배지를 꺼내 보였다. 한은 남자의 자격증과 배지를 면밀히 살폈다. 수호위원회에서 발급한 헌터 자격증이 확실했다. 등록 코드명은 아놀드, 등록된 랭크는 B.
그제야 한은 나지막하고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프리랜서, 류 한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그나저나 소속도 없는 양반이 솜씨가 무시무시하구먼. 허 참, 이게 다 얼마야.”
아놀드는 한이 도륙한 마물들의 시체를 뒤적거리며 연이어 감탄사를 터뜨렸다.
“필요하다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으,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아놀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한을 바라봤다.
“제가 필요한 건 다 챙겼습니다. 거기 있는 것들은 저는 쓸 일이 없는 물건들이니 원한다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니, 그럼 이 가죽이랑 발톱을 죄다 두고 간다고?”
“네, 저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요. 그럼 이만.”
한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눈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저기, 형씨! 잠깐만 기다려 봐. 어이, 형씨!”
아놀드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한의 어깨를 붙들었다.
“형씨, 보아하니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랭크가 어찌 되시우?”
“…….”
하지만 한은 아놀드를 조용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아놀드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봐서 알겠지만, 난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랭크가 겨우 B밖에 안 된다우. 그런데 보아하니 형씨는 나이도 젊은 양반이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수다. 그래서 말인데, 내 좋은 생각이 있는데 내 제안 한 번 들어보지 않으실라우?”
“제안이요?”
“응, 들어보면 형씨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거요. 여기 대청봉 꼭대기 근처에 설귀가 한 마리 있거든. 놈을 잡으려고 오긴 왔는데, 도저히 멀쩡히 잡을 엄두가 안 난단 말이지.”
“설귀요?”
한의 오른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설귀라면 자색 구역에서 주로 서식하는 고위급 몬스터였다. 눈처럼 하얀 가죽 역시 고가에 거래가 되고 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그렇다네. 난 잘 모르지만 상급 랭크의 헌터들 사이에서는 설귀의 심장이 아주 요긴하게 거래된다면서?”
아놀드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러니까 내가 형씨를 그곳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형씨가 설귀를 잡는 게 어떻겠냐, 이 말일세. 물론 설귀의 심장은 형씨 몫이고. 나한테는 그냥 그 가죽이나 넘겨줬으면 하는데 말야. 어찌 생각하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몬스터들의 심장이면 전부가 귀하지만, 설귀의 심장이라면 특히 더 귀했다.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다른 찌꺼기 부산물은 충분히 양도해 줄 수 있었다. 자신은 심장만 챙기면 되니까.
하지만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한이 대답을 망설이자, 아놀드가 재촉하듯 말했다.
“내가 비록 랭크는 높지 않지만, 이 대청봉 근처에서만 20년 넘게 구른 놈이라우. 직접 잡긴 힘들어도 딱 보면 알아. 이놈이 대박인지 아닌지. 장담하는데 이 설귀 놈은 대박 중에 대박일 걸세. 어떤가? 좀 구미가 당기지 않으신가?”
한은 보통 혼자 사냥하는 것을 선호한다. 동행인이 있으면 정화의 의식을 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함께 움직여도 좋을 법했다.
“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군요.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좋아. 고맙수다. 그럼 난 저기 저놈들 가죽 좀 벗기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슈. 금방 끝나.”
아놀드가 마물의 시체 쪽으로 가버리자 홀로 남은 한은 옷깃을 여미었다. 남방한계선을 돌파해 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바람은 유달리 싸늘했다.
“어이구, 이놈의 눈보라. 잠깐 멈추나 했더니 또 옘병이네.”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아놀드는 고개를 돌려 한을 바라봤다.
“어이, 형씨. 그런데 어디서 오시는 길이우? 여기 설악산 근처에서는 통 못 보던 얼굴인데.”
“작년까지는 킬리만자로 근처에 있었습니다. 지난달까지는 제주도 일출봉 근방에서 강철 톱니를 잡고 있었죠.”
“이야, 킬리만자로에 일출봉이라니. 아주 빡센 구역만 골라 다니셨구만. 그나저나 강철 톱니라니, 이것 좀 만지셨겠어?”
아놀드가 엄지와 검지를 모아 원을 만들며 히죽였다.
“제법 짭짤하기는 했죠. 그런데 사냥 중에 함께 다니던 친구가 강철 톱니의 주둥이에 물려서 한쪽 팔을 잃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니 더 이상 그곳에 있기가 싫더군요.”
“씁쓸한 얘기로구만. 그놈들 이빨이 그렇게 지독하다면서?”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하긴, 원체 이 바닥이 목숨 내놓고 하는 장사기는 하다만, 그래도 적당히 사릴 줄도 알아야지. 그런데 강철 톱니를 피해서 온 친구를 설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다니, 내가 실례를 저지르는 게 아닌지 모르겠수다.”
“괜찮습니다. 얼음 계열 마물들 상대로는 제법 자신 있거든요. 지난번에는 자이언트 웜도 잡아본 적 있습니다.”
“어이쿠, 자이언트 웜을 잡으셨어? 이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양반이었구만. 어마어마한 양반이야. 자네랑 동행하게 되니 내 속까지 든든해지는 기분일세.”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르고 더 거세어졌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흩날리는 눈발 너머로 대청봉 꼭대기가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휘유, 이제야 다 왔네. 형씨, 저기 저 동굴 보이시나?”
아놀드는 손가락을 들어 꼭대기 근방의 바위 동굴을 가리켰다.
“저기 저 안에 그 설귀가 살고 있거든. 지금부터 내가 저 안에 들어가서 설귀를 유인할 테니까 그놈이 모습을 드러내거든 젊은 친구가 확 잡아버리라고. 알겠지?”
아놀드는 메고 온 가방을 풀고 그 안에 담긴 전투 장비들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말 안 해도 잘 알겠지만, 나는 얼마 버티지 못하는 거 잘 알지? 형씨가 타이밍 잘 맞춰서 들어와야 돼. 알겠지? 자네가 늦으면 나는 이렇게 된다고.”
자신의 목 근처를 긋는 시늉을 하며 아놀드는 히죽 웃었다. 목숨을 건 유인 작전을 앞두고 웃음을 짓는 베테랑 헌터의 여유는 주변 사람마저 안심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데 너무 늦은 거 아닐까요?”
아놀드가 무장을 갖추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던 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늦기는. 오늘 아침에도 내가 설귀의 흔적을 확인했다고. 저 안에 분명히 설귀가 있다니까. 나만 팍 믿고 늦지 않게 들어오기나 하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아놀드는 한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동굴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런 아놀드의 등 뒤로 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라 네가 삼 개월 늦었다는 거야. 머저리 새끼야.”
“응……?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갑자기 돌변한 한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아놀드가 한을 돌아보았다. 정중하던 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을 뿐.
프롤로그 - 남방한계선
“크륵…….”
피가 끓는 가래 소리와 함께 가시 불곰의 커다란 몸이 산사태가 발생하듯 허물어졌다.
쌍두 늑대의 몸은 무쇠도 녹여버리는 강산액을 뿜으며, 자로 잰 것 마냥 정밀하게 반쪽으로 찢어졌다.
강철 같은 뿔을 앞세워 달려드는 거대한 순록의 목이 잘리는 것을 마지막으로 한바탕 피의 활극은 그 종말을 고했다.
“후우…….”
설원의 한복판, 피의 향연을 연출한 주인공. 검은 머리의 남자가 뿜은 입김이 허옇게 피어올라 한 송이 꽃을 피웠다.
남자는 나이프를 품 안에 집어넣고는 널브러진 시체의 중심으로 다가가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기원’의 주문을 읊었다.
우우웅.
남자를 중심으로 묘한 울림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시공간이 뒤틀리고, 남자가 밟고 있던 땅이 이전과는 다른 곳으로 점차 변하기 시작했다.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고, 보이되 보이지 않으며, 들리되 들리지 않는 모호한 차원의 경계.
잠시 후, 남자는 눈을 떴다. 그와 동시에 이미 생명의 불꽃이 꺼졌을 터인 마물들의 시체에서 푸른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정화의 시간이다.
“나의 뜻이 이곳에 머물지니…….”
남자의 나지막한 기도와 동시에 마물들의 시체에서 배어 나오던 푸른빛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곧 영롱하고 눈부신 빛 무리로 변해갔다.
“그대의 영혼은 가야 할 곳으로…….”
영혼들이 돌아가야 할 곳. 그곳과 이 세상을 연결하는 차원 문이 열렸다.
“그대, 부디 편히 쉴지어다.”
길을 잃은 가련한 영혼들은 차원 문을 통해 그들이 원래 있던 곳으로 귀환을 마쳤다.
“후우…….”
진혼가를 끝마친 검은 머리의 남자, 류 한은 품에서 나이프를 꺼내 마물의 시체를 분해할 준비를 시작했다.
영혼을 돌려보낸 시체는 껍데기일 뿐. 껍데기를 자신이 취한다고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을 터다. 한은 몬스터의 시체를 분해하기 시작했다,
서걱서걱.
순록의 거대한 뿔을 베어내는 한의 손놀림은 마치 기계처럼 정밀하고도 정확했다. 순식간에 순록의 뿔을 잘라낸 한은 이번엔 반으로 갈린 쌍두 늑대의 상반신에 나이프를 꽂았다.
쌍두 늑대의 심장은 죽은 직후 부패가 시작된다. 최대한 빨리 처리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부스럭.
설원의 반대편에서 눈에 덮인 나뭇가지가 한차례 흔들렸다. 한은 그쪽 방향을 주시했다. 이 근방의 몬스터는 싹 다 정리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남은 놈들이 있었나?
“이야, 이거 아주 장관이구만!”
하지만 모습을 드러낸 손님은 몬스터가 아니라 두꺼운 털옷으로 온몸을 감싼 중년 남자였다.
털모자로 감싼 귀 양옆으로 삐져나온 갈색의 억센 머리카락, 얼굴의 절반을 뒤덮은 짙은 수염, 그리고 털옷 너머로도 짐작이 가는 탄탄한 몸매. 키는 크지 않으나, 전체적으로 당당한 분위기를 풍기는 중년 남자였다.
중년 남자는 얼굴에 살가운 미소를 띤 채 한에게 다가왔다.
“허허, 가시 불곰에, 쌍두 늑대에, 강철 발굽 순록까지……. 형씨, 아주 대박을 치셨소. 젊어 보이는 양반이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닌데?”
중년 남자는 과장된 손동작으로 한에게 다가와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얼굴을 가득 덮은 억센 수염과 우렁우렁한 목소리와는 달리, 무척이나 살가운 성격의 남자인 듯했다.
“형씨, 이 근방에서는 영 못 보던 얼굴인데? 나는 ‘푸른 수염’ 소속의 아놀드요. 형씨는 어디 소속이신가?”
‘푸른 수염’이라 하면 설악산 대청봉 일대를 양분하고 있는 길드 중 하나였다. 하지만 이곳은 남방한계선 너머 대청봉 한복판. 갑자기 나타난 낯선 남자의 말을 섣불리 믿을 수 없었다.
“…….”
한은 대답 대신 자신의 이름을 아놀드라 밝힌 중년 남자를 묵묵히 바라봤다.
한의 묵묵부답을 본인에 대한 경계라고 파악했는지, 아놀드는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여기, 이걸 보면 믿을 수 있겠지.”
아놀드는 품속에서 자격증과 길드 배지를 꺼내 보였다. 한은 남자의 자격증과 배지를 면밀히 살폈다. 수호위원회에서 발급한 헌터 자격증이 확실했다. 등록 코드명은 아놀드, 등록된 랭크는 B.
그제야 한은 나지막하고 정중한 어투로 대답했다.
“프리랜서, 류 한이라고 합니다.”
“반갑네. 그나저나 소속도 없는 양반이 솜씨가 무시무시하구먼. 허 참, 이게 다 얼마야.”
아놀드는 한이 도륙한 마물들의 시체를 뒤적거리며 연이어 감탄사를 터뜨렸다.
“필요하다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으, 응? 그게 무슨 소린가?”
아놀드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서 한을 바라봤다.
“제가 필요한 건 다 챙겼습니다. 거기 있는 것들은 저는 쓸 일이 없는 물건들이니 원한다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니, 그럼 이 가죽이랑 발톱을 죄다 두고 간다고?”
“네, 저한테는 필요 없는 물건이니까요. 그럼 이만.”
한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몸을 돌려 눈발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저기, 형씨! 잠깐만 기다려 봐. 어이, 형씨!”
아놀드가 허겁지겁 달려와서 한의 어깨를 붙들었다.
“형씨, 보아하니 솜씨가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랭크가 어찌 되시우?”
“…….”
하지만 한은 아놀드를 조용한 눈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그러자 아놀드가 황급히 말을 덧붙였다.
“봐서 알겠지만, 난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랭크가 겨우 B밖에 안 된다우. 그런데 보아하니 형씨는 나이도 젊은 양반이 솜씨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수다. 그래서 말인데, 내 좋은 생각이 있는데 내 제안 한 번 들어보지 않으실라우?”
“제안이요?”
“응, 들어보면 형씨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일 거요. 여기 대청봉 꼭대기 근처에 설귀가 한 마리 있거든. 놈을 잡으려고 오긴 왔는데, 도저히 멀쩡히 잡을 엄두가 안 난단 말이지.”
“설귀요?”
한의 오른쪽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설귀라면 자색 구역에서 주로 서식하는 고위급 몬스터였다. 눈처럼 하얀 가죽 역시 고가에 거래가 되고 있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건…….
“그렇다네. 난 잘 모르지만 상급 랭크의 헌터들 사이에서는 설귀의 심장이 아주 요긴하게 거래된다면서?”
아놀드는 여전히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한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그러니까 내가 형씨를 그곳으로 안내해 줄 테니까, 형씨가 설귀를 잡는 게 어떻겠냐, 이 말일세. 물론 설귀의 심장은 형씨 몫이고. 나한테는 그냥 그 가죽이나 넘겨줬으면 하는데 말야. 어찌 생각하나?”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몬스터들의 심장이면 전부가 귀하지만, 설귀의 심장이라면 특히 더 귀했다. 정보를 제공한 대가로 다른 찌꺼기 부산물은 충분히 양도해 줄 수 있었다. 자신은 심장만 챙기면 되니까.
하지만 몇 가지 걸리는 게 있었다.
한이 대답을 망설이자, 아놀드가 재촉하듯 말했다.
“내가 비록 랭크는 높지 않지만, 이 대청봉 근처에서만 20년 넘게 구른 놈이라우. 직접 잡긴 힘들어도 딱 보면 알아. 이놈이 대박인지 아닌지. 장담하는데 이 설귀 놈은 대박 중에 대박일 걸세. 어떤가? 좀 구미가 당기지 않으신가?”
한은 보통 혼자 사냥하는 것을 선호한다. 동행인이 있으면 정화의 의식을 할 수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만큼은 함께 움직여도 좋을 법했다.
“저로서는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이군요. 안내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 좋아. 고맙수다. 그럼 난 저기 저놈들 가죽 좀 벗기고 올 테니까 잠깐만 기다리슈. 금방 끝나.”
아놀드가 마물의 시체 쪽으로 가버리자 홀로 남은 한은 옷깃을 여미었다. 남방한계선을 돌파해 본 적은 여러 번 있었다. 하지만 오늘 바람은 유달리 싸늘했다.
“어이구, 이놈의 눈보라. 잠깐 멈추나 했더니 또 옘병이네.”
앞장서서 걸음을 옮기던 아놀드는 고개를 돌려 한을 바라봤다.
“어이, 형씨. 그런데 어디서 오시는 길이우? 여기 설악산 근처에서는 통 못 보던 얼굴인데.”
“작년까지는 킬리만자로 근처에 있었습니다. 지난달까지는 제주도 일출봉 근방에서 강철 톱니를 잡고 있었죠.”
“이야, 킬리만자로에 일출봉이라니. 아주 빡센 구역만 골라 다니셨구만. 그나저나 강철 톱니라니, 이것 좀 만지셨겠어?”
아놀드가 엄지와 검지를 모아 원을 만들며 히죽였다.
“제법 짭짤하기는 했죠. 그런데 사냥 중에 함께 다니던 친구가 강철 톱니의 주둥이에 물려서 한쪽 팔을 잃는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런 일을 겪으니 더 이상 그곳에 있기가 싫더군요.”
“씁쓸한 얘기로구만. 그놈들 이빨이 그렇게 지독하다면서?”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하긴, 원체 이 바닥이 목숨 내놓고 하는 장사기는 하다만, 그래도 적당히 사릴 줄도 알아야지. 그런데 강철 톱니를 피해서 온 친구를 설귀가 있는 곳으로 안내하다니, 내가 실례를 저지르는 게 아닌지 모르겠수다.”
“괜찮습니다. 얼음 계열 마물들 상대로는 제법 자신 있거든요. 지난번에는 자이언트 웜도 잡아본 적 있습니다.”
“어이쿠, 자이언트 웜을 잡으셨어? 이거 생각보다 더 대단한 양반이었구만. 어마어마한 양반이야. 자네랑 동행하게 되니 내 속까지 든든해지는 기분일세.”
눈보라는 그칠 줄 모르고 더 거세어졌다. 그렇게 얼마를 더 걸었을까. 흩날리는 눈발 너머로 대청봉 꼭대기가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왔다.
“휘유, 이제야 다 왔네. 형씨, 저기 저 동굴 보이시나?”
아놀드는 손가락을 들어 꼭대기 근방의 바위 동굴을 가리켰다.
“저기 저 안에 그 설귀가 살고 있거든. 지금부터 내가 저 안에 들어가서 설귀를 유인할 테니까 그놈이 모습을 드러내거든 젊은 친구가 확 잡아버리라고. 알겠지?”
아놀드는 메고 온 가방을 풀고 그 안에 담긴 전투 장비들을 장착하기 시작했다.
“말 안 해도 잘 알겠지만, 나는 얼마 버티지 못하는 거 잘 알지? 형씨가 타이밍 잘 맞춰서 들어와야 돼. 알겠지? 자네가 늦으면 나는 이렇게 된다고.”
자신의 목 근처를 긋는 시늉을 하며 아놀드는 히죽 웃었다. 목숨을 건 유인 작전을 앞두고 웃음을 짓는 베테랑 헌터의 여유는 주변 사람마저 안심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의 표정은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데 너무 늦은 거 아닐까요?”
아놀드가 무장을 갖추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던 한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늦기는. 오늘 아침에도 내가 설귀의 흔적을 확인했다고. 저 안에 분명히 설귀가 있다니까. 나만 팍 믿고 늦지 않게 들어오기나 하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으며 아놀드는 한의 가슴팍을 두드렸다. 그리고 크게 심호흡을 하고는 동굴 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런 아놀드의 등 뒤로 한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게 아니라 네가 삼 개월 늦었다는 거야. 머저리 새끼야.”
“응……? 자네 지금 뭐라고 했나?”
갑자기 돌변한 한의 태도에 당황했는지 아놀드가 한을 돌아보았다. 정중하던 한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온몸으로 살기를 뿜어내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