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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근데 쟤 부모님이 이혼하신 거야? 아까 언뜻 새엄마라고 들은 것 같은데.’
‘새엄마’라는 신파극의 흔한 소재 중 하나에 꽂혔는지 준석이가 질문을 던졌다. 하긴 나도 그 부분이 궁금하긴 했다. 새엄마라는 존재들이 많은 세상이긴 한 모양이다. 그 흔한 유행에 동참하고자 우리 집에도 ‘새엄마’가 한 분 계시니.
‘이혼 아니고 사별. 큰형수님이 아빈이가 열 살 때 간암으로 돌아가셨어. 나도 잘 기억은 안 나는데, 아마 암인 거 알고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돌아가셔서 모두 충격이 컸었지. 그리고 형님이 3년 전에 재혼하셨고.’
‘그랬군. 열 살 때면 참 힘들었겠네. 너무 어렸어.’
아까 친척들이 저 꼬맹이를 왜 그렇게 둘러싸고 있었는지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저 꼬맹이도 겪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법한, 어떤 과정을 겪고 자랐다. 나보다 한참이나 더 빨랐군. 그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동질감이 생겼다.
‘그런데 증조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건데 애가 캐나다에서 한국으로 곧바로 날아와? 보통 증조할아버지는 살아 계셔도 그리 크게 정을 못 느끼지 않나?’
명훈이의 질문도 일리가 있었다. 생각해 보니 증조할아버지의 죽음에 저렇게 슬퍼하는 건 살짝 드문 일이기도 했다.
‘뭐냐, 왜 그렇게 궁금한 게 많아? 그 짧은 시간에 친해진 거야?’
‘말했잖아. 네 조카 재미있다고. 한동안 수육 보면 쟤 생각 날 것 같아.’
‘어, 나도 그 생각 했는데!’
다들 한 번 씨익 웃었다. 그러게, 어쩌다 보니 꼬맹이는 수육을 보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애가 되어 버렸다.
‘아빈이 엄마, 그러니까 형수님이 그렇게 되고 아빈이가 한국에 한 2년 동안 있었어. 큰형님이 외교관이라 많이 바쁘시기도 했고, 뭐 남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혼자서 아빈이를 돌볼 여력이 없으셨던 거 같아.’
어쩐지 공감이 되는 이야기가 태준의 입에서 나왔다.
‘그렇다고 아빈이가 홀로서기를 할 수 있는 나이도 아니었으니 큰아버님 내외분이 아빈이를 데리고 계셨던 거지. 아빈이한테는 조부모님이니까. 그리고 그동안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와도 한집에서 함께 살았으니까 나름 정이 많이 들었겠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이야기였다.
‘다른 형제는 없고?’
‘없어. 그게 문제였지. 형님이 어쨌거나 장남인데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이유로 늘 가족들 입방아에 오르곤 했어. 정작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는 크게 문제 삼지 않았는데. 아빈이가 한국에 있었던 그 2년 동안 나도 쟤랑 많이 친해질 수 있었어. 우리 집은 큰집이랑 꽤 가까운 편이었으니까.’
태준의 잔이 빈 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조용히 태준의 잔을 채워 주었다.
‘뭐 가지 많은 나무 바람 잘 날 없다고, 다른 친척들이 아빈이네와 어떻게 엮였는지 이야기를 다 하자면 속 시끄럽고. 지금 아빈이 새엄마로 계시는 분이 아빈이보다 세 살 어린 남자애를 데리고 형님이랑 재혼을 하셨어. 그쪽도 사별인 것 같아. 드라마에 나오는 새엄마들과 다르게 아빈이랑 정말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긴 한데, 형수님이 외국인이라 그때도 좀 시끄러웠지.’
‘국제결혼? 어느 나라?’
‘일본. 그런데 아빈이 친엄마도 일본 사람이었어.’
‘뭐야? 쟤 혼혈이야?’
‘응. 근데 태어난 곳은 미국이라 독수리 여권이야. 그런데 전혀 티 안 나지? 말투도 그냥 한국 사람이랑 다를 게 전혀 없지 않아?’
태준의 설명 덕분에, 저 아빈이라는 아이가 살면서 겪었을 다사다난함이 더 크게 와 닿았다. 저 어린아이는 도대체 어른들의 세상을 어디까지 미리 보고, 어디까지 버텨 가며 스무 살까지 왔을까? 그런데 내가 너무 지나치게 저 꼬맹이 입장을 생각하고 있긴 했다. 하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두 가지가 나와 비슷했어야 말이지.
‘그래서 김태준 너는 계속 그 연예계 일 할 거야? 군대 갔다 오면 안 할 줄 알았는데.’
명훈이가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려 꼬맹이에 대한 이야기는 멈췄지만, 내 눈은 자꾸 그 아이를 찾고 있었다. 그냥 이상하게 자꾸 그렇게 됐다. 어딘가 모르게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아이여서 그런지 더 알아보고 싶었다. 유치하게 누가 더 힘들었는지 무용담을 나누는 게 아닌, 그냥 얼마나 무덤덤한 척 어른놀이를 하며 살아왔는지를 공감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다 잠시 꼬맹이와 둘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생겼을 때, 연락처를 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가끔 먼 나라에서 힘들거나 기댈 곳이 없을 때, 연락을 해도 좋다고. 그만큼 모든 정황상 그 꼬맹이는 외로워 보였고, 나같이 타인을 신경 쓰지 않는 사람까지 자극할 만큼 보호본능을 일으켰다.
대단한 걸 해 줄 수는 없겠지만, 가끔은 누군가가 내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을 얻을 때가 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고3, 흔들리는 집안 문제로 내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김태준이 나에게 그걸 알려 줬다. 적어도 그런 김태준의 조카라면 나도 그런 식으로 도움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꼬맹이와 인사도 없이 헤어지고 말았다. 괜찮은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태준을 통해 들었을 때, 그 꼬맹이가 그래도 꽤 강한 아이구나 하고 안심했다. 그리고 속으로 더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랐다. 마치, 내 인생에 대한 주문을 거는 것처럼.



그런데 6년 뒤 지금, 내가 그렇게 궁금해했던 꼬맹이가 내 눈앞에 있다. 두꺼운 안경을 벗고, 치아 교정기를 뗀 꼬맹이를 나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검은 코트에 카멜색 캐시미어 머플러를 목에 걸친 꼬맹이는, ‘반전’이라는 표현을 써도 좋을 만큼 정말 예쁜 어른이 되어 있었다. 믿기지가 않아서, 내 손으로 만져 가며 확인해 보고 싶을 정도로.
“많이 아파?”
“네, 아파요.”
“그러게 앞을 잘 보고 다녔어야지, 이 꼬맹아!”
이 녀석, 지난 6년 동안 어디서 어떻게 살아온 것일까? 겉모습은 너무나 예쁘고 단정해 보이긴 하는데, 울어서 그런 건지 어딘가 모르게 슬퍼 보였다. 증조할머니께서 돌아가셨으니 예전처럼 많이 울었겠지. 또 다른 면에서는 어린 날 철없이 웃던 모습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6년 전에도 묘하게 신경이 쓰이고 궁금했던 애였는데 눈앞에서 잘 큰 것을 확인하니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목덜미부터 얼굴까지 뜨거운 피가 도는 것이 느껴졌다.



W.Bin


지금도 잊지 못한다. 6년 전, 증조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났던 권선빈이라는 사람을.



6년 전, 증조할아버지의 발인 날. 전날과 마찬가지로 태준 삼촌 친구들은 정말 쉬지 않고 열심히 일하며 우리 가족을 도와주었다.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친구의 부모님도 아닌 조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렇게 정성을 다해 도와주는 친구들이 흔하지 않다는 것을. 삼촌들은 마지막 날 장지까지 따라와 정말 헌신적으로 일해 주었다.
그들은 검은 정장이 흙으로 더럽혀지는 것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산을 오가며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나가고 있었다. 만약 내가 아들이었다면 저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열심히 일을 했겠지. 마냥 고마웠다.
그런 마음과 별개로 증조할아버지를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생각에 나는 하염없이 내내 울기만 했다. 그런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셋째 할머니는 어떻게든 나를 붙잡고 자신의 호기심을 채우기에 급급했다.
새어머니는 어떤 사람이니?, 그래서 아빠는 행복하니?, 이복동생은 공부를 잘하니? 단 한 번도 나는 내 동생을 ‘이복동생’이라고 표현해 본 적이 없는데. 너무나 쉽게 ‘배다른 동생’,‘이복동생’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 사람들이 정말로 가족이 맞는 걸까?
그나마 우리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나서면 상황이 정리되었지만 두 분과 내내 붙어 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라 나는 자꾸만 움츠러들고 있었다. 내 문제라면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겠지만, 그건 우리 가족의 문제여서 당돌하게 굴 수 없었다. 그렇게 증조할아버지의 장례식은 끝이 났다.

터덜터덜, 할머니와 함께 산을 내려올 때였다. 누군가가 내 등을 툭 쳤다.
‘희준 삼촌?’
‘힘내. 말씀은 그렇게 하셔도 모두 너를 아껴. 그리고 걱정해.’
그랬다. 이 많은 사람들 중, 몇 사람만이 그럴 뿐, 모두 몇 년 만에 한국에 온 나를 위해 많은 배려를 해 주고 있었다. 아픈 구석이 너무 커서 그걸 보지 못하고 있었다.
‘내일 캐나다로 가?’
‘응, 학기 중이니까.’
‘이번 방학 때 한국에 와. 아 젠장. 그때는 내가 군대에 있겠구나. 어쨌든 이제 한국에도 좀 오가면서 살아. 적어도 우리 가족하고는 자주 좀 봐.’
엄마가 그렇게 하늘로 가신 뒤, 아빠는 유독 한국에 오는 것을 어려워했다. 어떻게든 해외 근무만을 고집하셨고,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 근무하는 기간 동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 외에 다른 가족들과의 교류에 있어서 늘 숨어 있는 쪽을 택하셨다.
아빠는 누구보다 엄마를 사랑했고, 다른 가족들도 처음의 반대와는 달리 엄마에게 호의적이었다. 일본 사람인 엄마는 서툰 한국어로 어떻게든 가족들과 화목하게 어우러지기 위해 노력했고, 그런 엄마에게 가족들도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다. 우리 가족이 한국에 들어오면 다 함께 짧은 여행을 가기도 하면서 서로의 정을 쌓아 갔다.
그랬다. 가족들은 엄마와 함께 있는 아빠의 모습이 더 익숙한 거였고,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이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싫을 뿐이었다. 가족들의 눈에 엄마가 없는 지금의 아빠는 어딘가 모르게 이질감이 느껴지는 사람이었을 테니까. 아빠 입장에서도 가족들의 그런 마음을 정면으로 받아들일 용기가 없었을 것이고.
그나저나 고관절을 다치셔서 장지에 올 수 없으셨던 증조할머니가 걱정이었다. 여기서 내려가는 대로, 바로 증조할머니를 뵙고 캐나다로 가는 것이 맞겠구나 싶었다.
‘그리고 네가 불편할 거 같으니까, 어제 봤던 태준이 형 친구들 기억나지? 그 형들한테 말해 뒀으니 그 차에 타. 괜히 버스에 타면 또 몇몇 친척들이 쓸데없이 말 섞을 거야.’
‘아, 고마워.’
나를 위한 배려에 정말로 고마웠다. 안 그래도 선산으로 오는 길, 마냥 울고 싶은 내 마음과는 상관없이 친척들은 나에게 아빠의 안부를 물어 적지 않게 성가셨기 때문이다.
산을 내려가니 어제 봤던 태준 삼촌의 친구 세 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안 힘들어?’
안 힘들어? 이런 인사는 참 오랜만에 듣는 듯한데. 그 질문을 한 사람을 쳐다봤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나에게 궁금한 게 많았던 친척들 사이에서 나를 구해 준 사람이었다. 크게 티 나지 않게 한마디로 상황을 깨끗하게 정리해 준 고마웠던 사람. 그리고 내가 너무 슬퍼하면 증조할아버지가 나를 뒤돌아보느라 빨리 좋은 곳에 가시지 못한다며 위로해 주기도 했다. 어딘가 모르게 특이한 위로여서 기억에 남아 있었다.
어제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밝은 햇빛 아래서 보니 큰 키에 어깨가 굉장히 넓은 호남이었다. 선이 굵은 미남이 아닌, 선한 눈빛에 가식 없이 웃는 입 모양을 가지고 있었고 무엇보다 운동을 많이 한 건지 타고난 건지, 건장한 체격이 인상적이었다. 어제는 왜 몰랐지? 이 정도로 멋진 사람이라는 걸. 갑자기 내 눈에 꽃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송홧가루 때문에 눈이 따갑고 몸이 간질거렸는데.
‘안 힘들어요.’
‘희준이가 너 좀 태워 주라고 하더라고. 우리랑 같이 가.’
감사한 일이었다. 적어도 크게 머리 아플 일은 한 시간 안에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이런 상황을 만들기 위해 희준 삼촌이 이 삼촌들에게 나에 대해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네. 감사합니다. 그런데 삼촌들은 이름이 뭐예요?’
‘야, 여기가 미팅 장소도 아니고 우리가 너한테 우리 이름 이야기해야 돼? 하긴 태준이 조카니까 이야기해 줘야겠네. 또다시 만날 수도 있으니까. 나는 김준석, 얘는 유명훈, 그리고 운전할 얘는 권선빈. 특히 선빈 삼촌한테 잘 보여. 한국에서는 차 몰고 다니는 대학생 오빠가 최고 인기가 많은 법이야.’
권선빈이라……. 어? 나와 똑같이 ‘빈’이 들어가는 이름이었다. 그마저도 굉장한 인연 같았다.
‘아, 물론 권선빈 얘가 이름이랑 좀 안 어울리게 생기긴 했지? 이름만 봐서는 예쁘게 생긴 남자 같은데 체격이 건장해서 반전 아니야?’
그러게. 참 듬직하네. 저건 절대로 살이 아니라 근육일 텐데. 한번 꽂힌 다음부터는 나도 모르게 선빈 삼촌의 넓은 어깨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
‘선빈 삼촌은 어깨가 굉장히 크네요. 백화점만 해요!’
결국 나도 모르게 선빈 삼촌이라는 사람에 대한 감탄사가 입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런데 내 말이 뜬금없었을까? 그냥 내가 생각하기에는 한국에서는 백화점이 비교적 큰 건물이라 그렇게 말했을 뿐인데.
‘뭐? 백화점? 하하하하하하.’
삼촌들은 또 뭐가 그리 웃긴지 크게 웃기 시작했다.
‘외국에서 왔다고 해도 전혀 못 느끼고 있었는데 표현력이 참신하긴 하네. 아무튼 타.’
‘네.’
어쩌다 보니 내가 조수석에 앉았다.
‘거기에 앉아. 우리는 밤을 새웠더니 피곤하니까 뒷좌석에서 편하게 좀 자야겠어. 조카님, 조수석에 앉는 사람의 매너가 뭔지 알아? 운전하는 사람이 절대로 졸지 못하게 계속 떠들어야 돼. 조카님이 우리보다 어리니 체력도 좋을 테니까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어.’
농담인 줄 알았는데 정말로 삼촌 두 명이 뒷좌석에서 코를 골며 잠이 들었다. 출발한 지 5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하긴 어제 우리들 전부 장례식장 바닥에 쭈그린 상태로 쪽잠을 자긴 했다. 잠든 삼촌들을 뒤돌아보고 나니 나도 슬쩍 잠이 왔다.
‘졸리지? 좀 자도 돼. 아까 쟤들이 한 말 마음에 담아 두지 말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이 꽤 컸다. 크게 고생하지 않은 듯한 고운 손이었지만 체격에 맞게 커다란 손이기도 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삼촌도 피곤하죠?’
‘괜찮아. 밤새우는 건 시험 기간에 자주 하는 일이라.’
‘여러모로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그건 네가 인사할 일이 아니야. 너희 삼촌이 크게 쏠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밤을 자주 새우는 사람이라도 피곤하긴 한지 목을 오른쪽, 왼쪽으로 움직여 가며 운전하고 있었다.
‘삼촌, 피곤하면 제가 운전할게요.’
‘뭐? 네가? 하하하.’
나는 진심으로 한 말인데 선빈 삼촌은 또 크게 웃었다.
‘진심인데요?’
‘그 정도로 졸리지 않으니까 걱정하지 마. 하긴 외국에서 오래 살았으면 10대 때부터 운전했겠네. 그런데 꼬맹아, 나는 원래 절대로 내 차 남한테 안 맡겨.’
당연히 나는 남이었다. 어제 만난 남이 맞았다. 그런데 이 삼촌이 ‘남’이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어딘가 모르게 가슴 한구석이 서운해졌다. 왜 그랬을까? 그런데 잠깐만, 꼬맹이? 이 호칭은 뭐지? 평생 들어 보지 못한 호칭인데.
‘그래서 꼬맹이 너는 전공이 뭐야?’
‘마케팅이요.’
‘졸업하고 뭐가 되고 싶은데?’
‘전공 그대로 가고 싶어요.’
‘하긴 갈수록 마케팅이 중요해지긴 하지. 좋은 전공이야. 졸업하면 외국에서 일하는 거야?’
‘가능한 한국에 오고 싶지 않아요.’
‘그렇군.’
‘왜?’라는 질문을 할 법도 한데 선빈 삼촌은 그러지 않았다.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인지, 사람이 어떤 질문을 싫어하는지 아는 사람인 듯했다. 그리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생각보다 피곤했던가? 절대로 졸지 말아야지 했던 의지가 바닥이 나고 나도 모르게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고개를 몇 번 끄덕인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졸다가 눈뜨기를 반복할 때, 왼쪽 귓가에 노랫소리가 들렸다.
‘이제 나 알게 됐죠. 늘 부족했던 나를 감싸 준 당신이죠. 기다림에 지쳐 있던 그대 내 손을 잡아 봐요.’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는 선빈 삼촌의 목소리였다. 우리가 모두 자고 있다고 생각하고 부르는 것 같았다. 괜히 내가 깨면 곤란할까 봐, 눈을 감고 자는 척하는 쪽을 택했다.
‘힘겨웠던 우리 지난날 모두 다 잊을 수 있죠. 쓸쓸하게 혼자였던 그 길도, 이젠 내가 함께할게요.’
온몸이 다 녹아 버릴 것 같았다. ‘함께할게요’라는 가사가 어쩐지 나에게 하는 말 같아서 묘하게 마음이 간지러웠다. 가사도 가사였지만,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목소리가 너무 근사해서 나도 모르게 눈을 떠 버리고 말았다. 그러다 선빈 삼촌과 눈이 마주쳤다. 역시나 삼촌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입을 다물었다.
‘미안, 시끄러워서 깼어? 모두 다 자니까 나도 졸리더라고. 잠을 깨려면 이런 방법밖에 없어서.’
‘노래를, 잘하네요.’
진심이었다.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고 분명히 노래를 굉장히 잘하는 사람이었다.
‘고마워.’
선빈 삼촌이 웃었다. 양쪽 입꼬리를 올리고 미소를 띠고 있었다.
쿵쿵쿵.
쿵쿵쿵.
뭐지? 이건 내 심장이 뛰는 소리인가? 왜 또 내 눈앞에 꽃비가 내리지? 아, 이 삼촌 치사하게. 저 정도의 외모를 가진 남자가 운전대를 잡고 훌륭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반하지 않을 스무 살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 내 심장의 반응은 지극히 정상인 게 맞았다. 잠깐만, 어쨌거나 결론은 내가 이 삼촌에게 반했다는 건가?
‘더 자. 조용히 해 줄 테니까.’
‘괜찮아요. 듣기 좋아요.’
예상 못 한 순간에 심장이 쿵쿵거리기 시작해서 이미 잠은 다 달아난 뒤였다.
‘원래 혼자 있을 때 말고는 노래 잘 안 해. 다 깊게 자는 거 같아서 그런 거야. 그런데 꼬맹이 너는 언제 돌아가?’
‘내일이요.’
‘오, 정말 짧게 한국에 온 거구나?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네?’
‘네, 아직 2학년이고, 사실 한국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그냥 삼켜 버렸고 상대방도 더 묻지 않았다. 나에 대해 궁금한 게 없어서인지 혹은 배려를 하고 있는 것인지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부분 같지는 않았다.
‘삼촌은 학생인가요?’
‘응, 학생.’
‘태준 삼촌 친구들이면 다 공부를 잘했을 것 같아요.’
‘글쎄다. 제일 공부를 잘한 건 명훈이지. 지금 의대 다녀. 그리고 저 준석이 삼촌도 나름 괜찮은 대학에 가기는 했는데 모 아니면 도인 위험한 전공을 택했지. 뭔지는 나중에 네가 물어봐.’
나는 선빈 삼촌이 궁금했던 거였는데, 이 삼촌은 눈치 없이 다른 친구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언뜻 보니 여자 이름이었다.
‘어 여보세요? 응, 이제 서울로 가고 있어. 생각보다는 빨리 끝났어. 오늘은 도저히 내가 못 볼 것 같아. 집에 가는 대로 일단 좀 자야겠어. 휴대폰 꺼 두고 잘 것 같으니까 걱정하지 마. 일어나는 대로 연락할게.’
조금 전, 나에게 했던 말투와는 다르게 어딘가 다정한 말투였다. 하지만 대화 내용을 생각해 보니 또 그리 다정하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 했다.
‘여자 친구예요?’
‘응.’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단호한 대답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구나. 예뻐요?’
선빈 삼촌이 잠시 나를 쳐다봤다. 그러고는 이내 다시 크게 웃기 시작했다.
‘뭐? 하하하. 너 정말 재미있는 애구나?’
진지한 내 물음에 상대방이 자꾸 웃으니 나는 이상한 사람이 되어 가는 것 같았다. 정말 궁금해서 물은 건데 이 삼촌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 것일까? 심장은 여전히 강하게 뛰고 있었지만,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너무 어리게만 나를 쳐다보는 눈빛 때문이었는지 내 얄팍한 자존심에 그냥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