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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M.Bin


나를 삼촌이라고 부르는 유일한 사람. 비록 이 꼬맹이에게는 많은 삼촌들이 존재하지만 적어도 내 스물아홉 인생에서 나를 삼촌이라고 불렀던 사람은 이 꼬맹이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어떤 마법을 부렸던 것일까? 왜 사탕을 문 것처럼 통통한 볼이 인상적이었던 꼬맹이가 갑자기 어른이 되어 나타난 거지?
몇 년 전의 모습을 떠올리기에는 지금의 모습이 너무 예뻤다. 그냥 예쁜 게 아니라, 누가 봐도 한 번쯤은 시선이 머물 법한 도시 한가운데서 자신의 일을 착실하게 해 나가는 성공한 여자들만이 가지는 도회적인 이미지였다.
“설마…… 너 그 수육이야?”
말을 하면서도 너무나 어이가 없었지만, 꼬맹이는 내 친구들 사이에서 ‘김태준의 조카’라는 표현보다 ‘수육’이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그리고 종종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수육이 잘 있냐는 안부를 묻는 것이 우리의 개그이기도 했다. 단 한 번 만난 것이 다였지만, 그만큼 우리에게는 이 꼬맹이의 인상이 너무나 강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는 지난 몇 년간 가끔씩 이 꼬맹이를 생각하곤 했다. 그 감정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늘 있었다. 그리고 별다른 이유 없이, 그저 다시 보고 싶다는 마음도. 그랬던 꼬맹이가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내 기억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내가 스물셋이었으니 예과 2학년이었을 것이다. 중간고사를 막 끝냈을 무렵 준석의 전화를 받았다. 본인이 아무리 부정해도 군대를 갓 제대한 준석의 목소리에는 군필자만이 느낄 수 있는 각이 잡혀 있었다.
― 태준이 할아버지 어젯밤에 돌아가셨대. 아무래도 태준이 아버지가 형제가 워낙 많다 보니 문상객도 어마어마한 것 같아. 우리가 도와줘야 될 것 같은데?
별다른 고민 없이 친구들을 만나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조부상이라고 하면 어쩐지 멀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태준의 집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우리가 졸업한 동명고등학교. 입학 자체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소위 뺑뺑이를 돌려서 가는 일반 남자 고등학교였다. 하지만 근방 어느 학교보다도 재학생들의 성적이 우수했다. 그 비결은, 수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우리 학교가 꾸준하게 밀어붙이는 수준별 수업 덕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늘 비인간적이라는 비난이 수반되었지만, 사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본능을 자극하는 최고로 인간적인 시스템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더 높은 세상에 대한 열망이 있다. 비록 일찍이 현실에 안주하며 자신만의 행복을 찾는 학생들도 많았겠지만 나와 내 친구들은 그런 부류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저 간이 작은 사람들일 뿐이었지만, 우리는 ‘공부 잘하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놓기 싫어하는 부류였다.
2학년 1반. 이과에서 최상위권만 모인 그 반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다들 키가 컸고 남자 형제들만 있는 집안에서 거칠게 컸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 덕분에 제일 뒷자리에 모여 자연스럽게 말을 섞고, 코드를 맞춰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친구들 그대로 3학년도 함께했다.
실컷 이과에 와 놓고 신문방송학과로 간 김준석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에 맞는 전공을 찾아갔다. 공대를 간 김태준과 의대를 간 유명훈, 그리고 한의대를 간 나. 다정함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화법을 구사하며 항상 서로를 비난했지만, 사실은 그게 우리들만의 친밀한 표현이었다.
학창 시절, 태준의 집은 학교 바로 코앞에 있었다. 접근성이 좋다 보니 태준의 집은 우리의 아지트였다. 지금 생각하면 우리도 꽤 모범생이긴 했나 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일탈은 겨우 야자 시간에 도망가 게임방에서 한 시간 남짓 게임을 하고 태준의 집에서 라면을 끓여 먹는 것 정도였다. 게임방마저도 귀찮은 날에는 태준의 방에서 내내 뒹굴며 만화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며, 냉장고에 있는 식량을 양심 없이 축냈다.
태준의 어머니는 야자를 빼먹었다는 꾸중 한 번 없이 언제나 우리를 반겨 주셨고, 간식을 정성껏 준비해 주시는 수고로움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태준의 생일이나 혹은 태준의 동생 희준이의 생일, 또 태준의 아버지 생신날에는 항상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 놓고 짧은 저녁 시간 허기진 고등학생들에게 최고의 대접을 해 주곤 하셨으니, 우리에게 태준의 어머니는 늘 감사한 존재였다.
하긴, 고3 때는 그 누구도 챙겨 주지 않았던 내 생일상까지 차려 주셨구나. 내 인생에 있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최악의 날이라 송두리째 다 뽑아내 버리고 싶지만, 태준의 어머니께서 차려 주신 그 생일상만큼은 참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어쨌건 그런 태준의 집안일이라면 마음부터 움직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더 자연스러웠다.
막내아들이신 태준의 아버지도 현직에서 한자리를 하시는 데다가 8남매가 있는 집안이니 문상객이 정말 끝없이 밀려왔다. 특실 두 개를 빌렸지만 부족한 듯했다. 상조 회사의 직원분들이 열심히 일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일손은 턱없이 모자랐다. 우리도 그 틈에서 밥상을 나르고 치우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밤 열한 시가 넘었을까? 그쯤 되니 문상객의 수가 확 줄어들었고, 여느 초상집이 그러하듯 듬성듬성 앉아 있는, 사람들이 밤을 새울 모양으로 화투를 치거나,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우리도 이제 뭐 좀 먹자. 아 진짜 다리 아파.’
그러고 보니 모두 저녁도 먹지 못하고 일했다. 몸이 한가해지니 그제야 허기가 느껴졌다. 각자 자신의 밥을 나르고 종이컵에 소주를 채웠다.
‘만약 이틀 전에 돌아가셨다면 이렇게 못 도왔을 거야. 중간고사가 어제 끝났거든.’
그랬다. 시험 기간이면 누구나 폐인이 된다. 공부만으로 밤을 새워도 모자란 마당에 이런 비보를 접했다면, 이도 저도 못 해서 마음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아, 나는 군대 제대하면 다 좋을 줄 알았는데, 학교 가서 시험 치고 할 생각 하니 그건 또 싫다. 군대에서 머리가 다 굳어서 예전처럼 공부할 수 있을지 벌써 걱정이야.’
엄살 하나는 최강인 김준석.
‘하면 해. 나는 군대에서 휴가 나와 수능도 봤잖아.’
‘그건 네가 또라이니까 가능한 거고.’
하긴, 나도 정상은 아니지. 열아홉, 사실 내가 수능을 잘 보는 것 자체가 이상했을지도 모른다. 뒤늦은 사춘기를 어찌나 혹독하게 겪었는지. 역시나 예상대로 수능을 완전히 망치고 도망치듯이 곧바로 군대에 갔다. 그 끔찍한 집단에서 내 스무 살과 스물한 살을 보내며 다시 수능을 준비했다. 그리고 스물한 살 11월, 휴가를 나와 수능을 치르고 스물둘 3월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어찌 보면 스무 살, 당연하게 곧바로 왔어야 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똑바로 나 있는 길만 걸으며 살아왔던 나에게, 군대라는 공간을 거쳐서 한의대에 가게 된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공중 보건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외딴섬이나 시골에서 한량처럼 보내야 하는 남자 동기들을 볼 때마다, 어쩌면 내가 저 사람들보다 시간을 더 잘 썼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만족감이 들기도 했다.
‘그거 알지? 또라이 옆에는 또라이만 있는 거. 우리야 다 이제 군필자인데 명훈이 얘는 어쩌냐. 언제 졸업해서 인턴 끝내고, 레지던트에 전공의에……. 참 너도 갑갑하다.’
‘그래도 너랑 쟤는 어쨌건 전문직이잖아. 나는 벌써 걱정이야.’
‘그러게 누가 신방과 가랬냐? 중앙 방송국에서 19금 프로 만드는 PD를 따로 뽑지 않는 한, 미래가 안 보여.’
흔한 스물셋, 남자들의 이야기를 하며 잔을 비워 갈 때였다.
‘아빈아, 여기 앉아.’
태준이 어떤 여자애 하나를 우리 옆에 앉혔다. 아빈이? 이름이 참 예쁘네, 라고 생각하며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떻게 생겼는지, 몇 살인지 제대로 눈에 보이기도 전에 태준의 친척들이 그 여자애 주변을 둘러싸고 인사를 하기 시작했고 태준은 누군가의 부름에 자리를 떴다.
‘그래도 너는 왔구나. 비행기 오래 타고 와서 피곤하겠다.’
‘괜찮아요.’
‘아빠는 여전히 바쁘고?’
‘네 지금은 모로코에 계세요.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겠다고…….’
‘집안 종손인데 얼굴 한번 보기가 그렇게 힘들어서야. 아예 그냥 한국에 안 올 생각인가? 그래서 새엄마는 잘해 주셔?’
쳐다보지 않으려고 해도 시끄러운 대화 소리에 자꾸만 그쪽으로 시선이 향했다. 그 여자애에게 질문을 건네는 말투는 아주 다정하고 교양이 넘쳤지만 대답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리 유쾌할 것 같지 않은 내용이 오가고 있었다. 나부터도 ‘새엄마’라는 단어가 귀에 꽂히자 이상하게 몹쓸 호기심이 생겼으니까. 여러모로 저 여자애는 불편한 상황임이 분명하다.
시력이 나쁜지 두꺼운 안경을 썼고 치아 교정기를 한 1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애였다. 그 두 가지를 장착(?)한 여자애들 대부분이 그렇듯 예쁘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태준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사촌 동생쯤 되는 듯한데. 소란스러운 친척들 틈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안경 아래로 손수건에 눈물을 찍어 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저 아주머니들도 정도껏 좀 하시지. 결국 내 급한 성격이 오지랖을 떨고 말았다. 다시 생각해도 그건 좀 이상한 일이었다. 성격이 급하긴 해도 남 일에 쉽게 끼어드는 성격은 아닌데.
‘이 아이, 밥 좀 편하게 먹도록 내버려 두는 건 어떨까요? 밥 다 먹고 질문 시간을 가져도 될 것 같아요. 언뜻 듣기로는 비행기를 오래 타서 배고플 것 같은데.’
내 말이 그렇게 강했나?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이 ‘저 애는 누구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지만 그 정도 반응에 일일이 신경 써 가며 살기에는, 나는 참 남에게 무관심한 사람이었다. 어쨌거나 그 어른들도 어딘가 뜨끔하긴 했었나 보다. 이내 여자애에게 밥을 잘 먹으라는 말을 남기고 금세 자신들의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그 상황이 꽤 만족스러웠다.
‘먹어. 밥, 오랜만이지 않아?’
고개를 끄덕이며 여전히 울고 있는 여자애에게, 어느새 다가온 희준이 숟가락을 쥐여 줬다.
‘고마워 삼촌.’
삼촌? 전혀 예상치 못한 의외의 호칭이 나오자, 준석이 희준에게 말을 걸었다.
‘삼촌이라니? 조카야?’
‘네, 형. 우리 큰아버지 연세가 사실 우리한테 할아버지뻘이잖아요. 큰 사촌 형이 저희 아버지랑 동갑이셔서 얘는 촌수로 우리한테 조카예요. 아빈아 인사해. 태준이 형 친구들이야.’
‘안녕하세요.’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듯했지만 공손한 말투를 보니 성격이 꽤 착한 애인 것 같았다. 조금 전 친척들 사이에서 오갔던 대화 내용이 심상치 않다는 느낌을 받아서일까? 모두 본능적으로 그 여자애를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평균 신장 183인 우리와는 정말 안 어울리는 눈빛이었다.
‘형들이 아빈이 좀 챙겨 줄 수 있어요? 아빈아, 필요한 건 저 형들한테 달라고 해. 저는 저기에 인사드리러 가 봐야 해서.’
희준이 자리를 떠났다. 태준의 조카라면 우리에게도 조카와 다름없다는 무언의 마음가짐이 오갔기 때문인지, 모두 그 여자애에게 뭔가 해 주고 싶어 고민하고 있었다.
‘원래 상갓집에 오면 고기를 많이 먹는 거야. 이 수육 좀 먹어 봐. 새우젓 잘 얹어서 먹어. 안 그러면 체한다.’
준석이 수육 접시를 여자애 앞으로 밀어 줬다.
‘콜라 마실래? 아니면 사이다?’
‘야, 소주 먹고 싶어 할 수도 있는데 왜 음료수만 물어봐?’
‘아 그런가? 요즘은 고등학생들도 술 먹지? 소주로 줄까 맥주로 줄까?’
역시. 스물셋 남자들의 배려심은 늘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이내 우리는 장난스럽게 여자애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고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만 있던 그 여자애의 표정도 잠시 밝아졌다.
‘고등학생…… 아닌데요? 한국 나이로 스무 살인데…….’
당연히 고등학생일 거라 생각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스무 살들은 저렇게 두꺼운 안경을 쓰고 다니지 않는다. 어설프게 멋을 부리거나 조절이 안 되는 짙은 화장을 한 스무 살들만 주로 봐 왔던 우리였기에 저런 모범생 느낌을 가진 스무 살이 참 어색하게 느껴졌다.
‘한국 나이? 그럼 지금 외국에 있는 거야?’
‘네. 캐나다에서 대학 다니고 있어요.’
‘오, 유학파구나?’
대답 없이 아빈이라는 여자애가 젓가락을 들고 수육 한 점을 먹었다. 웃기게도 우리 세 명의 시선도 그 아이가 든 수육으로 자연스럽게 향했다. 고기라는 것은 항상 옳다. 그 순간에도 고기는 옳았나 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표정으로 그 어떤 음식도 먹을 생각이 없어 보이던 아이가, 고기 한 점에 입맛이 돋았는지 젓가락을 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긴 언뜻 듣기로는 캐나다에서 바로 여기로 왔으니 배가 고프기도 했을 것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자니 슬쩍 우스운 마음이 들었다.
‘천천히 먹어. 여기 물도 좀 마시고.’
‘감사합니다.’
잘 먹는 것을 확인했으니 우리도 잔에 소주를 다시 채웠다. 그러고 나서 시선을 돌리자 이미 수육 접시는 비어 있었다.
‘야, 너 이거 언제 다 먹었어?’
부끄러운지 그 꼬맹이가 시선을 잠시 다른 쪽으로 뒀다.
‘더 줘?’
‘괜찮아요.’
‘에이 아닌 거 같은데?’
언제 일어났는지 명훈이 수육 두 접시를 더 가지고 왔다. 이런 면을 봤을 때, 각자 사람 냄새 나는 따뜻한 구석들은 가지고 있는 놈들이었다.
‘사실 수육이 너무 오랜만이라…… 맛있네요. 증조할아버지 초상집에서 이렇게 먹는 게 웃기긴 한데…….’
본인도 멋쩍은지 가벼운 변명을 하고는 새로 가지고 온 접시로 다시 젓가락을 가지고 간다.
‘초상집이라고 굶어야 되는 건 아니니까. 많이 먹어 유학생. 증조할아버지께서도 증손녀가 잘 먹는 걸 좋아하실 거야.’
그저 잘 먹었으면 좋겠다고 건넨 가벼운 말이었는데, 어느 부분이 문제였을까? 갑자기 꼬맹이가 다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야 너 왜 애를 울려?’
명훈이 내 등을 툭 쳤다. 이 녀석도 뭔가 무안해진 것이다.
‘왜 그래? 울지 말고 밥 먹어. 네가 너무 울면, 돌아가신 증조할아버지가 너 뒤돌아보시느라 빨리 극락에 못 가셔. 설마 우리가 술 안 줘서 우는 거 아니지?’
여자를 달래는 것은 내가 잘하는 부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를 건네며 이 상황을 수습해 보려고 했다. 어떻게 해야 이 애가 울음을 그칠까, 모두 눈치를 보는 상황에 가볍게 머리를 저으며 꼬맹이가 고개를 들었다. 제대로 보니, 안경 너머로 꽤 귀여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요. 그냥, 이유 없이 자꾸 눈물이 나서 그런 거예요. 삼촌 때문은 아니에요.’
‘삼촌?’
하긴 꼬맹이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삼촌이었다. 보통 세 살 차이면 오빠, 선배라는 호칭이 가장 자연스럽겠지만 어쩌다 보니 자연스럽게 족보가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졸지에 우리 세 사람은 삼촌이 되었고, 조카가 생겼다. 삼촌이라……. 그 호칭이 굉장히 신선하긴 했다.
‘저도 소주 좀 주시면 안 돼요?’
허이고! 이제 좀 편해졌는지 녀석이 소주를 달라고 했다. 울고 먹고 울고 먹고를 반복하는 이 스무 살이 왜 이리 자꾸 헛웃음을 짓게 하지? 어쨌건 한 번도 보지 못한 캐릭터였다.
‘그래, 스무 살이면 마실 때도 됐지. 외국은 소주도 비싸지 않아? 마셔 둬.’
준석이 소주 한 잔을 꼬맹이 앞에 놔 줬다.
‘아직 캐나다에서는 술을 못 먹는 나이긴 해요. 그런데 가끔 한국 동문 오빠들이 소주를 한 잔씩 주는데 맛있더라고요. 굳이 저 챙겨 줘서 고마워요 삼촌들. 수육 더 준 것도 고맙고.’
‘태준이 조카면 우리가 잘해 줄 필요가 있지. 그런데 그만큼 갈굴 수도 있으니 조심해.’
‘아,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요. 오늘 잘 대해 주신 거 꼭 기억할게요. 그런 의미에서 짠!’
……?
이걸 외국에서만 지내서 몰라서 그런 거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스무 살이라 어려서 그런 거라고 해야 하나. 우리 셋은 결국 서로 눈을 쳐다보다 어이없는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어딘가 모르게 주눅 들어 있어 잘해 줘야 될 것만 같았던 어린 영혼이 갑자기 명랑한 모습으로 돌변해 소주가 든 종이컵을 쭉 내밀며 우리를 웃겼다. 얘, 참 보통이 아니네.
‘태준이 조카님, 몰라서 그러는 거 같은데 상갓집에서는 건배하는 게 아니야.’
지적질의 총대는 내가 멨다. 그리고 이내 얼굴이 새빨개져서 당황하는 스무 살의 모습을 즐겁게 감상했다. 얼굴이 하얘서인지 빨개지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게 눈에 들어왔다. 예상한 모습이었는데도 참 웃기긴 했다.
‘아 죄송합니다. 몰랐어요. 저는 그저…….’
‘다음에 안 그러면 되지. 네 나이엔 모르는 게 어쩌면 당연하겠다.’
‘삼촌들 그래 봤자 저보다 겨우 세 살 많잖아요.’
‘야 3년이면 군대를 다녀오고도 남을 시간이고 회사면 대리로 진급할 시간이야.’
명훈이 빈 잔을 다시 채우기 시작하더니 웃긴 스무 살에게 ‘너도 더 줘?’라고 물었다. 그다지 싫은 내색이 없어 보여 잔을 채워 줬다.
‘뭐야 술 잘 먹어? 혹시 이러다 휙 쓰러지는 거 아니지?’
그때 김태준이 우리 자리로 왔다. 그리고 상황을 한 번 휙 둘러보더니 살짝 흥분하는 듯했다.
‘뭐야, 김아빈, 미성년자가 왜 술을 먹어!’
‘뭐? 미성년자?’
순간 싸한 공기가 몇 바퀴 돌았다. 다들 뭔가 크게 잘못한 것처럼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마치 순진한 친구 조카에게 억지로 술을 먹인 듯한 분위기가 된 것 같아 제 발이 저렸다고 할까?
‘나 스무 살이야. 삼촌보다 세 살, 희준이 삼촌보다 한 살 어리잖아.’
‘아 그렇구나. 착각했네.’
휴우……. 그게 뭐라고 다들 긴장을 풀었다. 아 진짜 오늘 여러 번 황당하군. 하긴 미성년자들도 다 술 마시는 세상인데, 설령 얘가 미성년자였다 해도 뭐가 그리 큰 잘못을 했다고.
‘아빈아, 이리 좀 와 봐!’
그때 저쪽에서 할머니인 듯한 분이 꼬맹이를 불렀고 ‘네.’ 하는 대답과 함께 꼬맹이가 사라졌다.
‘쟤, 캐릭터 재미있는데?’
‘상갓집이라 자제하는 거야. 원래는 진짜 재미있는 애인데. 본인은 전혀 모르는 것 같지만, 아무튼 엄청 웃겨.’
‘오늘도 충분히 웃겼어. 수육을 세 접시나 드시더라.’
‘그러고도 남을 애지.’
태준이 목이 탔는지 맥주 한 잔을 꿀꺽 삼켰다. 이 녀석도 오늘 하루 종일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태준 역시 갓 제대한 예비역 특유의 각이 잡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