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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둘만의 세상에서 1
1화
프롤로그
M.Bin


토요일은 나를 제외한 많은 직장인들에게는 그야말로 가뭄 속 단비 같은 휴일이지만 나에게는 평소보다 세 시간 빠른 퇴근을 하는 대신 밀도 있는 노동을 요구하는 날이었다. 물론 일하는 동안 점심시간은 애초에 잡혀 있지도 않았다. 그것에 대한 억울함은 전혀 없었다. 어차피 내가 선택한 일이고 큰 이변이 없는 한, 평생 이런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토요일은 진료실에 머무는 시간보다 침구실에 머무는 시간이 훨씬 더 많은데 환자는 주로 어깨나 팔의 통증을 호소하는 직장인들이 대부분이었다. 늘 컴퓨터 앞에서 하루 열 시간 이상을 보내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목, 어깨가 정상일 리 없었다. 그들이 쉬는 날과 내가 일하는 날의 교집합인 토요일에 내가 더 집중해야만 하는 이유였다. 진료실과 침구실을 오갈 시간도 부족해서 약을 짓는 환자가 없는 이상 주로 침구실에 머물며 진맥을 하고 침을 놓았다.
“살짝 아플 수도 있습니다. 어깨 쪽에 제대로 담이 왔어요. 침 맞으시고 물리치료도 받고 가세요.”
몇 명의 환자가 거쳐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컴퓨터 의자에 앉아서 차트를 확인할 여유 따위는 없었으니까. 컴퓨터 앞에 서서 허리를 숙이고 클릭을 하고 차트를 적는 것을 수십 번 반복하니 나야말로 허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내가 침구실 컴퓨터는 위치를 눈높이에 맞춰 놔 달라고 그렇게 부탁했거늘.
“권선빈 원장님, 8번 자리 환자분 어깨가 아프대요. 참고로 오늘 마지막 환자입니다.”
박 간호사님이 싱긋 웃으며 나에게 소리쳤다.
“그거 듣던 중 제일 반가운 소식이네요.”
나 역시도 그런 박 간호사님의 말에 호응하는 표정을 지으며, 세상 가장 가벼운 발걸음으로 환자에게 다가갔다.
“오늘 마지막 환자분이네요. 저도 이 일만 마치면 휴일이라 기분이 좋으니 더 신경 써서 놓을게요. 그러면 더 아플지도 모릅니다.”
가볍게 맥을 짚은 뒤 침을 준비했다.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살살 놔 줘요.”
내 또래쯤 되어 보이는 남자 환자가 침을 놓기도 전에 엄살을 부렸다. 이 정도 반응은 그냥 일상적인 수준이었다. 제 발로 침을 맞겠다고 찾아와서는 침을 놓기도 전에 무섭다며 도망가는 환자도 꽤 많았다. 주로 설득을 해 가며 진료하는 편이지만 죽을힘을 다해 도망가는 환자의 경우는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제 마음입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내 일을 시작했다. 생각보다는 아프지 않은지 환자도 몇 번 움찔거린 뒤 곧 평온을 찾았다.
“박 간호사님, 20분 뒤에 침 제거해 주세요.”
오, 드디어 끝났다. 아픈 허리를 스트레칭하며 진료실에 들어왔다. 아마 오늘 처음 진료실로 돌아온 듯했다. 휴대폰에는 몇 통의 부재중 전화와 몇 통의 메시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재중 통화 목록에 김준석과 유명훈의 이름이 번갈아 가며 쭉 떠 있었다. 오늘 저녁에 고등학교 친구들끼리 급번개 모임이 있으려나 보다 생각하며 몇 개의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내 예상이 맞았다. 다만 장소가 조금 특이할 뿐.
[태준이 할머니 어제 밤늦게 돌아가셨대. S요양병원 장례식장 특실 1호. 저녁 일곱 시까지 장례식장으로 집합 요망. 발인은 내일.]
예전에 만났을 때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님의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고 하더니 결국 하늘로 가신 모양이다. 아흔이 훨씬 넘은 연세였으니 남들은 호상이라고 할 법도 하지만 그래도 할머님의 정을 어느 정도 받고 자란 김태준의 경우는 기분이 가라앉을 일일 것이다.
2년 전, 태준의 매니저 승수 형이 교통사고로 떠난 뒤부터, 그 녀석은 어딘가 모르게 마음이 많이 약해져 있었다. 그 사건 하나만 놓고도 충분히 충격적이었을 텐데, 그 당시 사귀던 여자의 끔찍한 뒷모습까지 확인했던 그때는 태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뼈아픈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쨌건 그 이후, 그런 태준의 심리 상태와는 다르게 녀석이 하는 작품마다 하나같이 다 호평을 받았다. 어쩌면 승수 형이 하늘에서 돕는다는 말을 우리끼리 종종 하게 될 정도로.
“흐음…….”
죽음이라는 그늘에서 아직 채 벗어나지도 못했을 녀석이 또다시 장례식장에서 손주의 도리를 해야 한다 생각하니 신경이 좀 쓰였다. 한편으론 내가 아무 약속 없는 주말에 이런 일이 생긴 게 잘됐다 싶기도 했다.
부재중 통화 목록에 있는 명훈의 번호를 꾸욱 눌렀다.
― 메시지 봤지?
“어쩌지, 곧바로는 못 가. 저녁에 선배 결혼식이 있어.”
어쩌다 보니 요즘 한의사들의 결혼 트렌드는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 저녁 예식이 일반화되어 가고 있었다. 그래야 최대한 같은 직종을 가진 하객들의 시간을 덜 잡아먹기 때문이다. 대부분 토요일까지 일하고, 일요일 하루를 쉬다 보니 그 소중한 시간을 결혼식장에서 다 써 버리게 하지 않으려는 서로를 위한 배려였다.
― 그렇군, 나는 오늘 오프라 지금 와 있어. 준석이도 급한 편집 끝냈다고 곧 온대. 그런데 우리 둘 다 내일 장지에는 못 가. 준석이도 녹화 있다고 하고, 나도 내일 새벽부터 응급실 달려야 돼.
“응, 나는 아무 일 없으니까 내가 가 보지 뭐. 조금 있다가 봐.”
김태준은 늘 완벽한 놈이었다. 남자가 봐도 잘생긴 외모에 반장과 회장을 놓치지 않는 리더십 넘치는 성격과 우수한 성적까지. 경화대 공대 입학 이후 학벌까지 완벽해진 그런 놈이, 스무 살의 어느 날 길거리에서 캐스팅이 되었고, 용돈벌이 삼아 하던 일이 천직이 되어 결국 아시아가 사랑하는 톱 배우가 되었다. 그런데 만인의 연인이면 뭐 하나. 썩어 가는 제 속을 시원하게 누군가에게 드러내 보일 줄도 모르는 놈인데. 태준은 그냥 무식할 정도로 혼자 삭이는 것에 익숙한 놈이라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녀석이었다.

“어, 나 도착해서 주차하고 있어.”
장례식장에 도착했을 때, 준석에게서 어디냐는 전화가 걸려 왔다. 집에서 옷을 갈아입고 결혼식장에 들렀다 장례식장에 도착하니 이미 밤 열 시가 훨씬 넘어 있었다. 한동안 잘 안 보이던 김준석을 모처럼 보겠군. 유부남의 세상에 대한 푸념을 엄청 늘어놓겠지.
결혼식장에 하고 갔던 푸른빛 넥타이를 풀고 검은색 넥타이로 바꾼 뒤, 장례식장을 향해 가던 길이었다. 아, 역시 나는 넥타이랑은 좀 안 맞는다. 어딘가 잘못되었는지 유독 넥타이가 불편해서 느슨하게 풀던 순간이었다.
‘퍽.’
내 오른쪽 어깨에 무엇인가 강하게 부딪혔다. 나는 큰 타격이 없었지만 분명히 부딪힌 상대방에게는 큰 충격이 간 듯했다. 굳이 뒤돌아보지 않아도 이내 그 대상이 넘어지는 소리와 느낌을 내 머리가 정확하게 인지했다. 이런, 누군지 몰라도 오늘 운수가 사납군. 내가 좀 단단한 편인데.
한 박자 늦게 뒤돌아보니 여자 하나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아마 급하게 달려가다 나와 부딪힌 듯했다. 눈이 있는데 왜 나를 못 본 걸까? 내가 그리 작은 체격은 아닌데.
“괜찮아요?”
괜찮지 않은 듯하다.
“아…….”
나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소리. 아픈 사람이 내는 얕은 신음을 저 여자가 내뱉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나와 부딪친 충격을 감당하기에는 타고난 골격이 너무 가늘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검은 코트의 주인을 계속 쳐다보고 있었지만, 한쪽 발목을 손으로 쥐고 도통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발치에는 이 여자의 것임이 분명한 검고 긴 가방이 하나 떨어져 있었다. 저건 바이올린인 것 같은데.
“도와 드릴 테니 일어나시죠.”
어쩔 수 없이 한쪽 팔을 잡고 부축했다. 그제야 여자도 일어나려는 시도를 하는 듯했지만 발을 땅에 디디는 순간 다시 악 소리를 내며 주저앉았다. 발목을 삐었나?
“발목이 아파요?”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자가 얼굴을 들었다. 가까운 누군가가 돌아가신 것일까? 얼마나 울었는지 이미 빨갛게 충혈된 눈도 모자라, 눈언저리에는 눈물을 닦은 흔적이 뚜렷하게 보였다.
이런……. 한의사임에도 사상 체질로 사람을 나누는 걸 그리 즐겨 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여자는 전형적인 소음인의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뽀얗고 동글동글한 얼굴형에 강아지 상, 커다란 검은 눈동자와 발그레한 뺨까지. 흔한 남자라면 누구나 마음이 움직일 만큼, 착하고 예쁜 얼굴이었다. 게다가 건강하게 윤기가 흐르는 검은 머리카락이 어깨를 훌쩍 넘기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완벽한 조합이었다. 장례식장에서 만나기엔 너무 후광이 비치는데, 이거 큰일이군. 그러면서도 여자의 얼굴을 다시 한번 구석구석 살폈다. 아직은 젊고 건강한 나에게 그건 너무나 자연스러운 거였다.
하지만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온 한마디가 나의 모든 행동을 정지시켜 버렸다. 그리고 진심으로 나를 놀라게 했다.
“아…… 정말. 아파요, 선빈 삼촌.”



W.Bin


[아빈아, 증조할머니가 돌아가셨대. 아빠가 발인 날 새벽에 도착할 거 같은데 네가 곧바로 가 볼 수 있을까?]
한국에 돌아와 휴대폰을 켜자마자 증조할머니의 소식을 접했다. 사실 그 메시지를 다 읽기도 전에 나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지.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게 조금만 더 참아 주시지. 뜨거운 눈물이 두 볼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어쩐지 출장 전 마지막으로 증조할머니를 만났을 때,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서늘해지더라니. 이런 것이 혹시라도 암시일까 싶어 애써 그 느낌을 털어 냈었는데.

‘할머니, 내가 누군지 알아보시겠어요?’
증조할머니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노환이긴 했지만, 단 한 번도 치매 같은 정신 질환을 앓으신 적이 없었던 분이셨다.
‘아빈이, 참 예쁘다.’
‘그럼, 이제 돈도 벌고 하니까 이렇게 멋도 부리고 다니잖아요. 할머니 보러 오느라 더 예쁘게 입고 왔는데, 진짜 예뻐요?’
희미하게 웃으시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시는 증조할머니. 마지막 순간까지 증조할머니는 모든 것을 기억하고 계셨다. 8남매와 그들의 배우자, 그리고 그들의 자녀들, 또 나 같은 증손녀까지도. 그러고 보니 어쩌면 그때, 그 한마디가 유언이 된 것 같았다.
‘네? 어머니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할아버지께서 증조할머니의 입술 앞으로 귀를 가까이 가져가셨다. 그리고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빈아, 여자는 세련되고 예쁘게 살아야 된다고 하셔.’
하아……. 역시 우리 증조할머니는 대단한 양반이셨다. 아흔일곱의 연세에 죽음을 앞두고 그런 멋진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항상 느끼며 살아왔지만 새삼 다시 한번 더 증조할머니의 위대함을 느낀 순간이었다.
‘지금처럼 정말 멋지게, 세련되게 살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아요.’
앙상한 증조할머니의 손을 꼭 붙잡았다.
‘할머니, 나 출장 가요. 한 달은 있어야 오니까, 그때까지 기다려요. 내가 할머니가 원했던 거, 그거 꼭 해 줄 테니. 나 기다려 주셔야 돼요.’

결국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사실 그때도 나는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증조할머니와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의 여지를 두고 싶어서 고심 끝에 다음으로 미루었다. 어쩐지 우리 증조할머니라면 나를 기다려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사실 그렇게라도 증조할머니와의 이별의 순간을 애써 부정해 보고 싶었다. ‘강한 양반이니 나를 기다려 주실 거야.’ 혼자서 주문을 외웠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죽음 앞에서는 결국 그 누구도 강하지 못했다. 그건 정말로 예외가 없었다. 16년 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잡아탄 뒤 일단은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로 향했다. 최대한 빨리 장례식장으로 갈 준비를 마쳤다. 사실 준비라고 할 것도 없었다. 검은 옷을 차려입고 증조할머니께 드릴 선물을 위한 도구만 챙기면 끝이었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그때 해 드릴 것을, 결국 이걸 장례식장에서 하게 되는 구나. 또 한 번 눈물샘이 터져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눈을 감으시는 순간도, 입관식도 보지 못했고 내일이 아침이 발인이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그리고 시간은 벌써 밤 열 시가 넘어 있었다. 서둘러야 했다.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최대한 깨끗하게 씻어 내고 편한 구두를 챙겨 신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태준 삼촌의 이름을 꾹 눌렀다.
― 여보세요?
“삼촌, 나야 아빈이.”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배경 소리가 딱 장례식장이었다. 역시, 태준 삼촌은 그 자리에 있었다.
― 어, 그래. 한국 도착했어? 소식 들었구나?
“가고 있어. 삼촌은 괜찮아?”
― 괜찮아. 예상 못 한 일 아닌데 뭐. 지난 주말에 어쩐지 느낌이 이상해서 얼굴도 뵀고.
“응, 곧바로 갈게. 조금 있다 만나.”
김태준. 정확하게는 나의 5촌 당숙. 하지만 서로 편하게 그냥 삼촌이라는 호칭을 썼다. 우리나라의 복잡한 촌수가 낳은 참사였다. 겨우 세 살 많은 삼촌이라니.
돌아가신 증조할머니와 증조할아버지는 그 시대의 어르신들이 그러하였듯, 다산을 하셨다. 조금 어이없기는 하지만 태준 삼촌의 아버지, 즉 나의 작은할아버지는 우리 아빠와 동갑내기였다. 우리 할아버지가 장남이시고, 태준 삼촌의 아버지가 막내아들이신데 두 분의 나이 차이가 무려 스물세 살이나 차이가 나서 가능한 일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증조할머니와 우리 할머니가 사이좋게 한 해에 각각 작은할아버지와 우리 아빠를 낳으셨다. 우리 아빠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일이었을 것이다. 동갑내기에게 평생 작은아버지라는 호칭을 부르며 살아오셨으니.
김태준이라는 사람이 여심을 쥐고 흔드는 워낙 유명한 배우이다 보니, 삼촌과 나의 관계를 주변 지인들은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삼촌을 어릴 때부터 종종 봐 왔던 나는, 삼촌이 인성이 좋고 반듯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내게 늘 다정하게 말을 걸어 주는 태준 삼촌이었지만, 이상하게 나는 삼촌과 쉽게 친해지지 못했다.
2년 전, 내가 홀로 한국에 와서 정착하던 시기. 삼촌에게는 여러모로 힘든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쉽게 적응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 덕에 조금 더 가까워질 수는 있었지만, 여전히 삼촌은 어딘가 모르게 살짝 멀고 어려운 사람이었다. 그 이유는 지금도 알 수가 없다.
택시비를 계산하고 내리자 장례식장 특유의 검은 분위기가 나를 에워쌌다. 사회생활을 하느라 몇 번이나 장례식장을 와 봤지만, 여전히 이 느낌은 참 적응이 되지 않는다. 유독 한국의 장례식장이 더 그런 것 같았다.
빈소로 향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 아빈아 도착했어? 출장 다녀와서 곧바로 온 거면 짐 많은 거 아니야? 삼촌이 나갈까?
희준 삼촌이었다. 김태준의 동생 김희준. 태준 삼촌에 비해 만만한 건지 이상하게 나는 한 살 차이인 희준 삼촌이 더 편했다.
“아니야. 집에 짐 놓고 왔어. 지금 막 택시에서 내렸으니 1분 안에 도착해.”
― 오 그래? 알겠어.
이미 다 알고 온 장소인데도 막상 장례식장 입구에 달린 화면에서 증조할머니의 성함을 확인하는 순간, 갑자기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이 상태로는 곤란한데. 마음껏 슬퍼해도 전혀 부끄럽지 않은 공간이었지만 어쩐지 지금 내 모습을 감추고 싶어져서 걸음이 빨라졌다. 어딘가로 숨어서 한번 원 없이 울고 나면, 증조할머니의 영정 사진 앞에서는 담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숨을 공간을 찾기 위해 주변을 살피지 않고 사정없이 걸어서일까?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갑자기 누군가와 아주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나는 순간 발목을 접질리며 그대로 나가떨어졌다. 아, 이게 무슨 망신이지. 절대로 누군가가 봐선 안 되는 상황인데. 스물여섯이나 먹고도 칠칠맞지 못하게. 이 무슨. 증조할머니가 보고 계신다면 분명히 혀를 끌끌 차시겠지.
“괜찮아요?”
아마 나와 충돌한 남자인 듯했다. 괜찮을 리가 없잖아요. 아픔도 아픔이지만 일단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대한 빨리 일어서야 했다.
“아!”
이런,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 발을 제대로 삔 것 같았다. 학창 시절, 체육 시간에 달리기를 하다 오른쪽 발목을 한 번 접질린 이후 이렇게 종종 발목을 삐끗하곤 했다. 그런데 왜 그게 하필이면 지금이냐고.
“도와 드릴 테니 일어나시죠.”
감사하게도 남자가 손을 내밀었다. 이미 내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건 겸손하게 받아들였고, 그렇다면 저 손을 잡고 일어나는 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다. 그런데 잠깐만 저 손, 어디서 많이 봤던 손인데? 긴 손가락과 반듯한 손톱 그리고 전체적으로 커다란 손. 내가 저 손을 어디서 봤더라? 아, 6년 전에 봤었지! 그렇다면 설마…….
고개를 번쩍 들었다. 와, 역시 우리 증조할머니는 대단한 분이셨다. 그리고 나를 굉장히 아끼셨음이 분명하다. 그것도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나를 보지 못한 미안함을 이런 식으로 달래 주시는 걸까?
어떻게 지금 내 앞에 이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거지? 넉넉하게 10분 뒤면 충분히 볼 수 있는 얼굴이었는데, 그 시간마저 단축시켜 주신 듯했다. 이미 눈물로 얼룩진 얼굴은 수습을 할 수 없는 단계임이 분명했고, 굉장히 보기 싫은 자세로 주저앉아 있는 스스로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우연이 너무나 감격스러워 나도 모르게 6년 동안 머릿속으로만 종종 떠올렸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아…… 정말. 아파요, 선빈 삼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