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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22화)
8. 너 나 그리고(3)
팔에 문질러지듯 착 달라붙는 폭신한 무엇인가가 내 마음에 불을 지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럴수록 자라나는 이성.
마음 속는 이성을 부정하며,
‘안 돼.’
라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너도 남자냐∼∼’
‘너가 언제 이런 행복을 누려보겠냐∼!’
하는 외침도 있었다.
그러나 내 이성은 지나치게 냉정했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여자아이를 엄하게 바라보았다.
내 눈빛이 너무 무서웠는지 흠칫 하며 팔에 힘이 빠졌다. 나는 슬쩍 팔을 빼고는 주위를 한번 둘러보았다.
그리곤 말했다.
“내가 가는 길에 왈가왈부만 하지 않는다면 따라와도 좋아.”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리고 덧붙여 이성은 여자아이를 바라보며 엄격하게 말하도록 했다.
“대신 스스로 걸어오도록 해. 나에게 기대지 말고.”
냉정하게 돌아서는 나의 감성은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오늘 처음으로 내 장점이 단점임을 인정해야만 했다.
언덕 위로 올라와서 소희를 다시 주섬주섬 업고 있을 즈음 기철이가 다가왔다.
“우와∼∼! 나 너를 대장으로 모시길 너무 잘했다고 다시 한 번 생각하고 있어. 대장∼ 존경해∼”
기철이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태도로 다른 사람이 들을까 걱정하듯 주위를 살피며 조용히 말했다.
“왜?”
물었다.
별로 궁금하진 않았지만 물어봐 줘야 할 듯했다.
“천하의 나휘한테 그렇게 대한 사람은 대장밖에 없을걸?”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나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없기 때문에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나휘가 누군데?”
그래서 그냥 물어봤다.
물어봐서 손해 볼 건 없을 것 같았다.
“도휘 동생.”
뜬금없는 대답이 돌아왔다. 도휘라는 이름을 듣고 떠오르는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유명인 이름도 아닌 듯했다.
“도휘가 누군데?”
결국 또 물었다.
“대장! 대장은 진짜 아무것도 모르구나?”
울컥 올라왔다. 기철이가 아는 것을 나라고 다 안다는 보장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괜히 물어봐서 손해 봤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다시 묻지 않기로 했다.
기철이를 조용히 무시해주고는 다시 한 번 소희를 제대로 묶어 고정했는지 확인한 다음 걷기 시작했다. 소희가 계속 열이 내리지 않는 것이 걱정이었다.
말없이 걷기 시작하자 내가 무시하던지 말든지 기철이가 쫄래쫄래 쫓아와서는 주변을 돌아보더니 나에게 딱 붙어 조용히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학생회장이 가자는 쪽으로 간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결국 학생회장도 버티고 버티다가 윤환이의 설득에 마지못한 듯 내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따라오는 중에도 계속 무엇인가 중얼거리는 것이 불만이 가득한 모양이었지만 그러든 말든 모두들 말없이 내 뒤를 따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듣는 귀가 많아져서 기철이가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런 것에 좌우될 녀석이 아님에도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나휘는 도휘 쌍둥이 동생인데. 도휘가 누구냐면 저 재수 없는 학생회장이야.”
그래서 기철이가 목소리를 낮추며 이야기했구나 하고 나름 납득했다. 기철이는 학생회장에 대해 험담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학생회장의 이름이 도휘였다는 것도 떠올렸다. 학생회장 선거 때 지겹도록 들으면서 남자애들 이름치고는 예쁜 이름이구나 하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물론 선거가 끝난 뒤 관심도 끊었기 때문에 이미 기억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 이름이었지만 말이다.
“솔직히 도휘는 저렇게 싸가지가 없잖아. 그래도 저 녀석이 왕따를 당하지 않고 살아남은 이유가 바로 나휘 때문이야.”
그 말은 정말로 금시초문이었다. 내가 워낙 세상에 관심을 끊고 살아서 심지어 같은 반 사람들조차도 이름을 다 알지 못하는 나였던 터라 학교 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까지 알 리가 없었던 것이다.
“…….”
아무런 대꾸도 해주지 않았지만 점점 내가 관심을 보이는 것처럼 느껴지자 뭔가 자랑스러운 태도로 열심히 이야기를 이어갔다.
“나휘가 저렇게 여신급으로 예쁘잖아. 그러니 나휘한테 말 한번 붙여 보려고 도휘 주위에 남자애들이 우글우글 모이기 시작한 거지. 그걸 도휘는 지가 잘나서 그런 거라고 생각하는 듯하고 말야. 천하의 검도 천재 윤환이도 홀라당 넘어가서리 저렇게 꼬봉 역할이나 하고 있고 말야∼∼ 진짜 불쌍한 인생들이야! 아무리 도휘한테 알랑 방구를 껴도 나휘는 상대도 안 해줄 텐데 말이징∼”
기철이가 비꼬듯 말했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솔직히 전 세상에서는 윤환이의 절대 충성이 돈 때문인가 생각했다. 운동을 하는 사람은 돈이 많이 든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었고 도휘는 친구들에게 꽤 많은 돈을 쉽게 쓰는 것으로 유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도휘가,
‘스폰서 같은 것.’
이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이런 세상까지 와서 돈 때문에 휘둘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서 돈 따위는 휴지보다 못한 것 아닌가?
나 살기도 바쁜데 의리 지키느라 저 재수 없는 녀석의 주위를 맴돈다는 것이 솔직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렇게 도휘를 감싸던 녀석들이 지금은 자기 살기 바빠 보이고 도휘 곁에는 지금 윤환이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뭔가 다른 이유가 있을 것 같았다.
윤환이 같은 녀석이 도휘 곁에 있는 이유를…….
물론 도휘 곁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다고 주장하기에는 좀 과장될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나 역시도 그 재수 없는 자식을 참아주는 이유로 나휘가 있기 때문이라면 좀 이해가 됐다.
그 강력한 여신급 외모, 특히 폭신하고 커다란 S라인, 마지막으로 애간장 녹이는 콧소리…… 남자라면 누구나 넘어갈 만했다.
왠지 진심으로 더더욱 윤환이가 불쌍해졌다.
뒤를 돌아보니 도휘가 나휘를 부축하고 있고 그 뒤로 윤환이가 따라오고 있었다.
윤환이는 겉 표면으로는 단정한 몸가짐이지만 눈빛 속에서 안타까워 미치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양이 눈에 빤히 보여서
‘기철이의 말이 사실이구나.’
하고 확신했다. 내가 빤히 바라보고 있자 윤환이가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괜히 민망해져서 시선을 자연스럽게 주위로 향하게 하여 둘러보는 척했다.
그러다 둘러본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어서 좀 놀랐다. 그보다 더 마음을 불편하게 한 것은 그 시선의 끝에는 묻어나는 불만과 두려움이었다.
나는 시선을 피했다. 내 어깨에 걸린 기대를 너무 만만하게 본 대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9. 밤과 낮에 대한 서로 다른 이야기(1)
“으으음∼∼”
등 뒤에 있던 소희의 신음이 들렸다. 아직 아파 보였지만 정신이 들고 있는 듯했다.
“여기 어디야?”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
언제나 그 질문에 대답해 줄 말이 없다는 것이 왠지 미안했다. 미안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그냥 그런 기분이 들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깨어났으면 그만 내려오지?”
기철이가 퉁명스럽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응?”
기철이의 소리에 반응하듯이 소희가 말했다.
“언제까지 업혀 있을 생각인 거냐?”
업고 있는 건 난데 왜 기철이가 짜증을 내며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 기철이 등에 지워진 기철이에 비해 커다란 내 배낭에 시선이 가며 그 이유를 추측했다.
“저기, 미안해. 이제 괜찮으니까 내려주지 않을래?”
말투에서 민망함과 미안함이 동시에 느껴졌다. 여전히 열이 나는 소희를 걷게 하는 것이 무리일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소희 말을 거절할 이유를 찾지 못해 그 말에 따르기로 했다.
다른 다친 아이들도 많은데 소희만 업고 다닌다는 것도 이상했다. 그렇다고 내가 소희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여기까지 데려온 것에 대한 왠지 모를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조금 더 배려하게 되었다.
나는 소희를 내려놓으면서 기철이를 향해 말했다.
“가방 무겁지 않아?”
그러자 배낭도 무거운데다 많이 걸어서 지치고 힘든 게 빤히 보이는데도 기철이가 씩씩하게 말했다.
“아니, 하나도 안 무거운데!”
나는 그 말을 낚아채듯 냉큼 말했다.
“알았어.”
기철이의 표정이 ‘헉’하고 변했다. 그때 무슨 말을 더하기 전에 한마디 덧붙였다.
“그럼 더 믿고 맡겨도 될까?”
믿는다는 말에 강조를 두며 말했다. 그러자 기철이의 표정이 확 변하며 무슨 사명을 받은 것처럼,
“응! 믿고 맡겨줘!”
라며 경례까지 붙이며 말했다.
‘역시. 계획대로야.’
라고 생각하며 속으로만 씩 웃었다. ‘채찍과 당근’을 적절히 배분한 새로운 기철 조련법 터득에 스스로 만족해하고 있었다.
“저! 고마워.”
내가 내려주자 선한 얼굴에 미안함을 띄고 소희가 말했다.
“응.”
소희가 나를 보며 수줍게 웃더니 머리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내 등에 있으면서 뒤로 묶어 놓았던 포니테일 머리가 흩트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런 소희를 빤히 바라보다 문득 소희의 이마에 시선이 갔다. 붉은색과 노란색 중간 정도 되는 실선이 양쪽 관자놀이 위쪽에서부터 이마의 중간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뭔가 묻었나 싶어 손으로 살짝 지워 보려 했다.
“어, 왜? 뭐 묻었어?”
소희가 당황하며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그때 난 또 다른 무언가를 보았다. 이마와 같은 색깔이 실선이 양손 중심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이상한 모양을 그리며 뻗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뭔가 붉은 점 같은 것이 보였다. 붉은색은 손등을 통과하듯 손바닥에도 있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그 붉은색을 가만히 만져 보았다. 부드럽고 따뜻한 살결에 비교했을 때 완연히 이질적인 차갑고 딱딱한 느낌이 들었다.
“어? 손에도 묻었어?
소희가 자신의 손을 만져 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표정이 딱딱하게 변했다.
“이거 뭐지?”
불안한 표정이었다.
“아퍼?”
내가 물었다.
“응. 조금.”
소희가 대답했다.
“뭐긴? 어디서 비접이라도 들었나 보지. 어디 안전한 곳에 다다르면 빼 줄게.”
나는 일부러 아무것도 아니라는 식으로 둘러댔다. 소희는 나를 한 번 더 바라보더니,
“응.”
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겪으면 겪을수록 기특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는 아이었다. 자신의 미묘한 변화에 두려움이 일 텐데도 나를 배려한 것인지 억지로 웃음을 짓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가자.”
나는 소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응. 고마워.”
소희는 나의 손을 순순히 잡으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휘청거렸다.
“괜찮아?”
“응.”
웃어보였다. 그러더니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근데 벌써 밤인가 봐. 미안, 내가 너무 오랫동안 신세를 져서.”
나는 놀라서 소희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응? 내가 너무 오랫동안 신세를…….”
소희가 당황해하며 말을 되풀이 했다.
“아니, 그거 말고 그 전에.”
“벌써 밤이 되어서?”
“지금이 밤이야?”
나는 그 말에 놀라서 다시 물었다.
이상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