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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21화)
8. 너 나 그리고(2)


“풋.”
그러나 남이 그렇게 비웃듯 웃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게 학생회장이면 말이다.
나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의 중심에 그것도 여자아이들에 둘러싸여 벌벌 떨고 있었던 모습을.
적어도 목숨을 걸며 최전선에서 방어한 최대 공로자를 그렇게 비웃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가 거만하게 말한 그 감사의 말에 조금이라도 진심이 담겨 있었다면 말이다.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학생회장을 행해 한발 내딛었다.
내가 한발 내딛자 기철이가 내 낌새를 읽었는지 학생회장을 바라보며 혀를 쏙 내밀었다.
“너는 죽었어∼∼”
기철이가 학생회장을 위협하듯 주먹을 내밀어 놀리더니 깡총깡총 뛰어 숨듯이 내 뒤로 쏙 빠졌다. 중간에 서있던 기철이가 빠지자 학생회장과 마주본 상태가 되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는지 나를 본 학생회장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 있었다.
한발 더 내딛었다.
“히익∼!”
아무 짓도 안했는데, 손을 치켜든 것도 아닌데 학생회장이 두렵다는 듯이 몸을 움츠리며 머리를 감쌌다. 정말 꼴불견이었다. 저런 게 어디서 학생회장이라고 튀어나왔을까 할 정도였다.
그때 누군가 우리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만둬.”
역시나 윤환이었다.
학생회장의 보디가드처럼 붙어 있다는 이야기는 늘 들어 알고 있었고 내 눈으로도 직접 목격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우리 사이에 끼어든 윤환이가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평소와 좀 달랐다. 손을 활짝 펴서 학생회장을 보호하듯 서있는 윤환이를 보며 더 이상 다가갈 수가 없었다. 화도 낼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윤환이의 손에는 늘 분신처럼 들고 다니던 죽도가 없었던 것이다. 만약 죽도가 있었다면 좀 더 다르게 반응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나와 다툴 의사가 없다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사람과 굳이 대적할 필요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윤환이는 나에게 있어 생명의 은인과 같았고(물론 나도 그들을 지켜 줬으니까 동격이라면) 적어도 같은 전장에 있었던 전우로서의 의리라는 것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런 것한테 붙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동시에 다 나름의 사정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저런 녀석이 학생회장이 되었듯이 말이다.
참고로 나도 투표했었다.
저 녀석에게…….
내 손가락이지만 분질러 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치였다.

2학년으로 막 진급한 3월이었다.
우리학교는 전교 학생회장이라고 해서 꼭 3학년에서 나와야 한다는 규칙은 없었다. 공평한 선거를 해야 한다는 학교 재단의 이사장 및 교장, 교감선생님의 강력한 주장 아래 모든 학생들이 후보이자 투표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렇게 치러진 선거는 공평하고 거리가 멀었다.
다른 사람은 직접 손으로 그린 엉성한 포스터를 복사해서 붙이고 친구들을 동원하여 엉성한 율동과 함께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선거운동을 했다.
반면에 전혀 차원이 다른 사람이 등장했다. 디자이너가 만든 듯한 세련된 선거 벽보, 아침등교 때 전교생에게 나누어 주는 봉지에 이름이 쓰인 사탕, 볼펜, 예쁜 언니들까지 동원된 선거 유세 등.
엄청난 물량이 동원된 화려한 선거운동에 나를 포함한 대다수가 그저 홀라당 넘어갔다. 그리고 바로 눈앞에 저 사람이 당선됐다.
정말 잘못 뽑았다는 것은 첫 당선 소감 때 알게 됐다.
지루하게 끝없이 이어지는 소감 내내 노골적인 잘난 척과 고압적인 명령조가 이어져 마음과 귀가 불편해졌던 것이다. 모두가 야유를 퍼부을 때까지도 끝나지 않아 소감 발표가 끝날 때에는 모두가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후회하는 때는 언제나 너무 늦은 것이었다.
솔직히 저쪽 세상에 있었을 때는 학생회장 하나 가지고 내 학교생활이 크게 변하는 것은 없었다. 만날 일도 그다지 없었고 가끔 학교 행사 때 조금 재수 없는 일을 보거나, 듣는다 해도 무시하면 그만이었다. 다른 누가 학생회장을 했다고 해도 그다지 신경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게 이쪽 세상이라고 해서 크게 달라질 것 같진 않았다. 그냥 하던 대로 무시하면 그만인 걸 윤환이와 얼굴 붉히면서까지 따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굳은 얼굴을 풀고 학생회장을 남겨둔 채 뒤로 돌아섰다.
세 걸음 정도 걸어갔을 때였다.
“하하하하.”
곧이어 상큼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학생회장이었다.
“무슨 구경거리 났다고 다들 바라보고 있는 것인가? 괴물을 다 해치웠으면 자 이제 다 같이 치우자!”
녀석의 말에 얼굴이 확 구겨졌다.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곳에서 계속 머물러 있겠다니,
‘미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다.
거기다가 청소까지 하겠다니 안 그래도 치열한 전투에 지쳐 있는데 이 괴물을 치울 힘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는 소풍을 나온 게 아니었다. 놀고 난 곳을 당연하게 치우고 와야 하는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다 다른 괴물이라도 나타난다면…….
안 그래도 실컷 소리를 지른 사람들 때문에 다른 괴물이 나타날까 봐 전전긍긍하는 나였다. 그런데다 여기는 평평해서 숨을 곳도 마땅하지 않았다. 어떻게 저런 판단력을 가지고 여기까지 살아왔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나는 모두가 들을 수 있도록 기철이에게 말했다.
“어서 여기서 벗어나자. 여기 더 있으면 죽어.”
내려왔던 언덕 쪽으로 걸어갔다. 싸움이 잦아들던 즈음에 소희도 그쪽으로 옮겨 두었던 터였다. 전장의 한복판보다 거기가 더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차피 괴물이 정리되면 그쪽으로 돌아갈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발걸음은 똑바로 소희가 있는 경사 위 나무 쪽으로 향했다.
“어? 같이 가, 대장.”
평소 같으면 기철이의 대장 소리가 귀에 거슬렸겠지만 이번엔 그렇지 않았다. 마치 나의 판단에 힘을 실어주는 느낌이 들어 듣기에 괜찮게 느껴졌던 것이다.
전에 세상에서는 평범한 나 자신에게 불편함을 느낀 적이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에 섞여 조용히 세상을 그냥 저냥 살아갈 수 있는 아주 편한 위치라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살려 했다.
그러나 이쪽 세상에선 그렇지가 않았다. 내가 생각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알릴 필요성이 있었다. 조금이라도 좋은 길로 인도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이 나도 살고 다른 사람도 살아 나갈 수 있는 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남을 설득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의 문제는 생각보다 어려운 것이었다.
‘왜?’
라고 물었을 때 대답해줄 말이 있어야 했지만 ‘감’ 만으로 움직이는 나는 그 ‘왜’에 대한 대답해 줄 말이 궁했던 것이다.
이럴 때 뭔가 권위적인 무엇인가가 있었으면 했다. 적어도,
‘네가 뭔데?’
라고 했을 때 대답할 말이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것도 없는 나에게 적어도 기철이가 대장이라고 말해주고 따라 주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물론 나에게 권위가 있든 없든 다른 아이들에게 이 이상 권할 수도 없었다. 강요할 수도, 해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올 생각이 있다면 따라올 것이고 아니면 남으면 되었다.
스스로 판단하길 바랐다.
누구도 이 위험한 세상에서 지켜 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내가 감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다른 아이들도 다른 감이든 계산이든 학생화장처럼 아무 생각 없든 누구든 자신이 생각한 최선의 방법으로 살아남아야 당장 죽는다 해도 후회가 남지 않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야? 어디 가?”
학생회장 목소리였다. 설마 나를 부를까 해서 뒤돌아보지도 않았다.
“너 말이야, 너.”
혹시나 해서 뒤돌아 봤다가 역시나 후회했다. 어느새 회복한 자만심이 가득한 얼굴에 손가락으로 까딱 까닥하며 나를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말투는 물론이고 그 예의를 무시한 태도에 화가 확 밀려왔다.
그러나 바로 뒤에 윤환이가 학생회장을 보호하듯 서있었기 때문에 화를 누그러뜨려야만 했다.
물론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저런 것을 지키고 서있는 윤환이가 불쌍해서였다.
“왜?”
나는 예의상 대답해 주었다.
“어디 가냐고 물었잖아?”
“도망가고 있다.”
내가 대답하자 물은 상대방이 비웃듯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어디로?”
“어디든.”
“뭐?”
“여기가 아닌 데로.”
또다시 학생회장이 피식 웃었다.
정말 웃음 하나로 사람을 이렇게 화나게 할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재주라고 느껴질 정도의 비웃음이었다.
솔직히 나는 달변가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말주변도 없는 편에 속했다.
하지만 나름 열심히 대답해 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나의 의견이 하찮기 그지없다는 것처럼 넘기는 학생회장의 태도는 묻는 사람과 답하는 사람 둘 다에 대한 예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밀려오는 화를 그냥 꾹꾹 눌러 삼켰다. 내 목숨을 노리는 괴물들과 싸우는 것만으로도 충분이 죽을 만큼 힘든 나였다. 여기에서 굳이 같은 사람끼리 싸울 이유는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왜 그렇게 험한 길로 가냐? 이쪽으로 가자 이쪽으로 가면 평평한 길이니까 훨씬 걷기 편하다구.”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말할 가치도 없었다. 설명할 수도 없거니와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앞만 보고 걸었다.
또 불러도 앞만 보고 걸을 생각이었다.
“모두 나를 따라와!”
거만하게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서 버렸다.
마음속에서 동요가 일었다.
‘이래도 좋은 것인가?’
‘재수 없는 학생회장은 그렇다 치지만 다른 죄 없는 학생들까지 저 생각 없는 학생회장에게 맡겨도 좋을 것인가?’
그때였다.
“난 이 애 따라갈래.”
어떤 아이가 나에게 다가와 오른쪽 팔에 자신의 팔을 감아 기대며 말했다. 오른쪽 팔에 닿는 푹신하고 풍만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두근거려 버렸다.
나름 침착함을 유지하며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헉.’
나도 모르게 숨을 꿀꺽 삼켰다.
나를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 오똑한 코, 진부한 표현이지만 앵두 같은 입술, 어떻게 저런 작은 얼굴에 눈코입이 다 들어가 있을까 의심스러운 작은 얼굴, 과연 땀구멍이라는 게 있을까 싶은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그런데다 이렇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곳에서조차도 전혀 퇴색되지 않는 은은한 비누향. 묶어도 묶여 질 것 같지 않은 찰랑 찰랑한 검고 긴 머릿결이 바람에 따라 내 팔을 간질이고 있었다.
그런 여신 같은 여자아이를 눈앞에서 그것도 나에게 안겨 있는(물론 내 팔이 안겨있는 것이지만) 포즈로 대면하자 이성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의 최대의 장점.
‘가장 핀치에 몰렸을 때 더 냉정해진다.’
가 발동했다.
물론 내 감성은 간절히 이성을 몰아내려 노력했지만 여자아이가 지나치게 예쁜 탓에 핀치에 몰리고 몰린 내 이성이 승리하고야 말았다.
“이것 좀 놓아 줄래?”
여자아이에게서 잡혀 있는 내 팔을 빼내려고 했다.
“나 여기 다촛쏘∼∼”
여자아이가 콧소리를 섞은 말투로 다친 다리를 보여주면서 올려다보았다. 어디가 다쳤는지는 보이지 않고 ‘꿀벅지’만 커다랗게 보였다.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몰라서 여자아이의 눈을 보았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은 큰 눈이 더 두드러지게 크게 보이게 했다. 눈꼬리가 살짝 올라간 것이 마치 슈렉에 나오는 고양이 눈동자 같이 애틋하고 귀엽게 보였다.
평소에 여자아이들의 콧소리나 애교 섞인 행동을 보면 솟아오르는 닭살에 온몸이 간지러워져 참지 못하는 부류였다. 그런데 평생 처음으로 여자아이의 콧소리가,
‘교태스럽구나.’
또는,
‘애간장을 녹이는구나.’
하고 느꼈다.
그러나 나의 이성은 철저히 그 팔을 부정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 주장에 따라 내가 팔을 빼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내 팔을 붙잡고 늘어지며 말했다.
“나 아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