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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17화)
6. 미묘한 변화 그리고 멈춰 있는 시간(4)
내 입을 틀어막느라 더 이상 기철이에게 저항하지 못하고 안겨 버렸다. 어린 아이처럼 나를 안고 얼굴을 비벼대는 기철이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애완동물과 동격, 애완동물과 동격.’
을 세뇌시켜야 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원래 기철이는 나보다 작은 편이었지만 그래도 코나 입 주변 정도에 닿을 정도의 차이였다.
그런데 나에게 안겨 있는 기철이는 내 가슴께밖에 키가 오지 않았다.
“잠깐 똑바로 서 봐!”
기철이가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내가 시키는 대로 바르게 섰다.
조금 커진 것처럼도 보였다.
‘내 과민 반응인가?’
라고 생각했다. 나는 기철이 바로 앞에 서서 키를 비교해 보았다. 똑바로 서니 내 턱 한참 밑이었다. 확실히 기철이의 키가 줄어들어 있었다.
기철이가 얼마나 줄어들었는지 교복 바짓단을 보았다. 그런데 그대로였다.
나는 내 키가 커진 걸까 생각되어 내 바짓단도 보았다. 그러나 역시 그대로였다.
“왜? 나 이상해? 뭐가 이상해?”
기철이는 겁에 질려서 나에게 물었다.
“…….”
내가 아무 말도 안한 상태에서 아마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테니 불안하기도 할 터였다. 털어놓을까 하다가 괜히 걱정만 끼칠 것 같아서 일단은 입 다물기로 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기철이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왜? 뭐가 이상한데?”
기철이는 자신의 몸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아니, 그냥 잘생겼다고!”
내가 그냥 둘러대려 한다는 것을 기철이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쉬! 좀 제대로 말해주지 말도 안 해주고. 그러면서 자기만 알고! 도대체 뭐가 이상한 거지?”
불만이 가득 찬 표정으로 중얼거리면서 자기 몸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그냥 억지 미소라도 지어 보내 주었다. 미묘하게 변하고 있는 주변이 불안하게 만들었지만 그렇다고 불안해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이런 작은 것에 호들갑 떨 수도 없는 일이었다.
나는 생각을 전환하기 위해 다시 주변에서 먹을 것을 찾기 시작했다. 물론 먹을 것이 쉽게 발견될 리 없었다. 그렇다고 시험 삼아 아무거나 먹어보기에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결국 우리는 물로 배를 채우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준비해 놓은 물도 거의 떨어져 가고 있었다.
소희의 열을 식히기 위해 생각보다 많은 양의 물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힘이 있을 때 조금이라도 이동해서 물과 음식, 그리고 안전한 장소도 찾아야 했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고 있는 소희를 업어야 해서 배낭은 기철이에게 맡겼다.
기철이는 내가 배낭을 맡기자 뭐가 좋은지 싱글벙글해졌다. 왠지 처음으로 엄마 심부름을 하게 돼 뿌듯해하는 어린아이 같았다.
기철이는 가볍게 배낭을 짊어졌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배낭이 기철이보다 훨씬 커 보였다.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전에는 이렇게 차이가 나진 않았던 것 같았다.
키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전보다 줄어든 느낌이었다.
두려움이 밀려왔다.
이상한 곳에 와서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면 생각은 가장 최악의 방향으로 치닫기 마련이었다. 나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기 위해 괜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배낭 잃어버리면 안 돼.”
“맡겨 줘. 목숨 걸고 지킬게.”
기철이는 주먹을 꼭 쥐고 눈에 힘까지 주면서 단호하게 말했다. 왠지 대답에 너무 힘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의욕 과잉이 되어 쓸데없는 일을 벌일까 봐 걱정이 되었다.
“배낭 하나에 목숨을 걸지는 마라. 목숨이 위험에 지면 배낭은 버려도 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배낭이 중요하긴 하지만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나라도 배낭을 지키려고 내 목숨을 걸지는 않을 테니깐 말이다.
“헤헤, 응!”
내 말을 무슨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기철이는 얼굴을 붉히고는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뭔가 찝찝하고 미심적은 대답이었지만 어쨌든 대답을 들었으니 됐다고 생각했다.
소희를 천으로 싸고 혹시 떨어질지도 몰라 긴 끈으로 묶어 등에 고정했다. 어머니들이 아기를 업는 포대 모양이 되었다. 혹시 또 괴물들에게 쫓기게 된다면 두 손을 쓸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음∼!”
내가 너무 꼭 조였는지 소희가 신음 소리를 냈다. 그리고 깨어났는지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여기가 어디야?”
내 등에 업혀서 주위를 살피는 듯했다. 그러나 얼마나 힘이 없는지 고개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손으로 토닥이며 말했다.
“내 등 뒤! 그냥 좀 더 자둬!”
“응.”
역시나 고열에 제정신이 아니었는지 더 물을 생각도 하지 않고 내 등에 얼굴을 파묻는 것이 느껴졌다.
옆에 서있는 기철이가 나와 소희를 번갈아서 보더니 부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조용히 무시해 주고는 힘차게 걸어 나갔다.
7. 가장 중요한 것(1)
방향을 결정하는 데는 또 감이라는 것이 동원되었다.
한참을 가고 있는데 기철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데 대장, 우리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 거야?”
“너 대장이란 소린 빼라!”
일단 기철이의 말에 딴죽을 걸어주었다. 그래 놓고 나서 기철이에게도 설명을 해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곰곰이 생각해야 했다.
사실 방향을 이쪽으로 정한 이유는 아까 꾼 꿈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었다.
‘꿈에 공기처럼 이 대지를 날고 있더라.’
‘그런데 이쪽으로 가면 물이 보이더라.’
란 이야기를 듣고 납득해 줄 사람이 과연 있을까 생각했다.
사실 꿈속에서 꿈이라는 자각을 너무 늦게 한 탓에 제대로 관찰하지도 못했다.
‘일찍 깨달았다면 좀 더 정보를 모을 수 있었을 텐데.’란 후회도 들었지만 어차피 꿈이란 자각이 생기면 잠에서 깨는 게 정석이라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터였다.
남들은 꿈에서 깨고 나면 꿈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다행히도 나는 꿈속에 있었던 일을 잘은 아닐지라도 희미하게나마 기억하는 편이었다.
때론 어떤 꿈들은 실제로 본 것처럼 기억해 내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기억에 남아 있어 그저 그때 얼핏 본 기억만으로 물을 찾아가고 있었다. 물에 도착하면 식량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란 막연한 생각 때문이었다.
나조차도 확신이 없건만 단지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이런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분명 오해의 소지가 될 듯했다. 꿈에 의지해서 이렇게 위험한 세계를 헤매는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생각될 것 같았다.
난감한 기분으로 기철이를 빤히 바라보았다.
왠지 이럴 때 성현이가 있으면 이해도 해주고 나 대신에 충분히 설명도 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 가는데?”
기철이가 나에게 대답을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결국 나는 편한 답을 택했다.
“그냥!”
과연 납득해 줄까 기철이의 얼굴을 보며 걱정을 해야 했다.
“헤헤! 그렇구나아.”
마음속으로 ‘헉’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기철이를 보면서 머리 아프게 고민한 내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지는 동시에 기철이의 대범함이 놀라워해야 했다.
정말로 기철이는 그것만으로 납득을 했는지 한참을 걷는 동안에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냥 걷고 또 걸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가 없었다.
일부로 험한 길만을 골라서 갔기 때문에 힘이 들어서 말하는데 쓸 힘이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는 산속 험하고 외진 곳을 들어가야 야생 동물이 더 많은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되는 세상에 살았었다. 그러나 이 곳 세상에서는 편하고 나무가 없는 길에 오히려 더 많이 나타났다.
괴물을 만나 희생자가 발생한 곳은 항상 인간이 다니기에나 쉬기에 편해 보이는 곳들뿐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편한 길을 피해 험한 길만 돌아다닌 때는 괴물 구경을 안 해도 됐었다. 그러니 힘들어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참을 걷고 있을 때였다.
“꺄아아아아악!”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울렸다.
요즘 따라 자주 듣는 날카로운 비명 소리였다. 핀치에 몰려야만 낼 수 있는 위협적인 목소리였다.
두려움에 나도 모르게 그대로 멈춰버렸다.
기철이가 귀를 쫑긋 세우며 말했다.
“무슨 소리지?”
그러더니 말릴 새도 없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덤벙덤벙 뛰어가 버렸다. 웬만하면 그쪽으로 가지 않으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기철이의 뒤를 쫓아갔다.
‘위험한 곳으로는 가지 않는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나는 당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 까지가 나답지 않게 지나치게 오지랖이 넓었던 것이었다.
나는 원래부터 기사도 같은 것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그러나 기사도 정신이 없어도 막상 눈앞에서 불구덩이로 들어가려는 사람을 말리는 것도 보통 사람의 당연한 선택이라는 것을 이곳에 와서 깨달았다.
그렇기에 위험할 것이 뻔한 길로 가는 기철이도 말리고 싶었다.
순식간에 멀리 뛰어가 버리는 녀석을 소리라도 질러서 말리고 싶었지만 어떤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큰소리를 낼 수는 없었다. 따라잡아 보려 했지만 소희를 업고 있던 탓에 자꾸 뒤쳐졌다.
멀어지는 뒤통수를 바라보며 한 대 치고 싶다고 절실히 생각했다.
어느새 그 뒤통수도 나무 사이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되었다.
‘놔두고 가 버릴까?’
라고 마음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울리자 깊은 고민이 되었다. 그러나 망설이고 있는 사이 다리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을 달렸을 때였다.
다행히도 다른 선택을 하기 전에 멀리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는 기철이의 뒷모습이 보였다. 기철이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로 밑을 주시하고 있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평소와 다른 기철이의 신중함에 긴장이 되었다.
달려가던 속도를 늦추고 천천히 다가갔다. 비명 소리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소리 좀 지르지 말라고 뒤통수를 갈겨 버리고 싶을 만큼의 큰 소리였기 때문에 짜증과 분노가 올라왔다.
기철이의 뒤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가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내가 온 기척을 느꼈는지 기철이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보며 도와 달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물론 무시했다.
우리는 비교적 절벽이라고 하기에는 완만하고 낮은 가파른 경사면을 끼고 언덕의 위쪽에 있었다.
뛰어내려 달려도 50M도 되지 않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공터처럼 보이는 탁 트인 장소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공터에서 피비린내 나는 장면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이들 50여명 정도가 우리도 만난 적이 있는 하얗고 귀여운 그 짐승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피해자가 다수 발생했는지 구석구석에서 괴물들이 뭔가를 먹어 치우고 있었고 그 주변은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가 위쪽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세히 관찰할 수 있었다.
굳이 자세히 관찰하지 않아도 척보기에 위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쉽게 전멸하지 않은 이유는 아이들이 스스로 진을 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포위된 사람 중에서 윤환과 검도부 다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원 바깥쪽으로는 윤환을 비롯한 검도부와 사이사이 남자아이들이 방망이를 들어 방어하고 있었고 감싸안듯 원 안으로 여자아이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남자아이들의 기사도 정신에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그러다 원 중심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눈살이 찌푸려졌다.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원의 한 가운데에서 나무 막대기를 꼭 끌어안고 안절부절 못하는 인영을 발견한 것이다.
학생회장 도휘였다.
잘 모르는 녀석이었지만 결코 녀석을 좋아할 수 없겠다는 확신이 들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