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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16화)
6. 미묘한 변화 그리고 멈춰 있는 시간(3)


나의 시선은 빠르게 바닥으로 추락했다. 떨어지는 아찔함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감기지가 않았다. 세상을 눈꺼풀이 없는 눈으로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의 눈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 이물감과 느껴지지 않는 것을 밀어내는 저항감에 알 수 없는 두통이 밀려왔다. 시선이 빨려들어가듯 어떤 곳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시선 끝에 내가 있었다.
나는 기철이와 기대어 자고 있었다. 그러나 시선은 내가 아니라 소희에게 향하고 있었다.
소희는 아직도 열에 붉어진 얼굴로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시선은 소희의 눈 속으로 향했다.
주변이 깜깜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엄청나게 시끄러워졌다.
사람의 목소리였다. 그러나 많은 사람의 여러 소리가 섞여 있어서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성황께서 쓰러지셨다!”
“성황께서 쓰러지셨다!”
한 사람이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만이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말에 전부였다.
그 사람의 목소리가 워낙 우렁차고 또렷했기 때문에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자 머릿속으로 울리듯 내 목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소리가 들렸다.
“이 녀석은 아닌가?”
나는 너무나 낯선 내 목소리에 정신이 확 들었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다.

내가 얼마나 요동을 치며 깨어났는지 내 옆에 기대어 자고 있던 기철이가 같이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벌떡 일어나서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서성거리며 주위를 살펴보는 기철이 때문에 나도 현실감각이 돌아왔다.
잠도 덜 깬 상태에서 놀란 마음만 있는지 어쩔 줄 모르고 서성대고 있는 기철이를 내버려 두고는 소희의 상태를 돌아보았다.
열은 많이 내렸지만 자고 있는지 정신을 잃어버린 건지 여전히 눈을 뜨지 않았다. 깨워 볼까 하다가 그러지 말기로 했다. 숨은 쉬고 있으니 죽은 것은 아니었고 충분히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늘 그렇듯이 습관처럼 시계를 보았다. 시간은 2시를 향하고 있었다. 잘못 본 게 아닐까 하고 다시 유심히 들여다보였다.
이상했다.
마지막에 본 시간이 12시였다.
그런데 그렇게 많이 걸었고, 많이 쉬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부터 2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믿을 수 없었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시간을 재고 있지 않았다지만 그냥 상식적으로도 2시간 동안에 벌어진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을 많은 일들이 있었다.
우리가 꼬박 하루를 자고 다시 24시간을 지나 2시에 깨지 않은 한 이럴 수 없었다. 아마 많은 일이 있었기 때문에 생각보다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진짜로 너무 피곤해서 밤이 오고 다시 아침이 오는 것을 못 느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도 없었다.
그만큼 지쳐 있기도 했었다.
너무 감정적으로 치우치고 있는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냉정한 마음가짐으로 돌아와서 다시 한 번 자세히 시계를 관찰했다.
역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초침이 거의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었다. 아예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정말 미세한…….
내가 미세한 떨림이 있다고 느끼기 때문에 보인다고 착각할 정도의 움직임은 있었다. 처음에는,
‘시계가 고장이 났나?’
하고 생각했다.
이세계에 들어갈 때 나침반이나 시계고장이 잦다는 이야기는 수도 없이 들어 보았기 때문이다.
시계와 하늘을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왠지 태양의 위치가 2시 때와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태양의 위치로 시간을 알아낼 정도의 천문학에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냥 상식적으로 머리 위에 태양이 있을 때는 오후가 아니겠는가 생각한 것뿐이었다.
가만히 생각을 정리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되 이곳이 이세계란 사실을 덧붙여 고정관념을 갖지 말고 추리해 보자고 생각했다.
냉정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한 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단 가장 현실성 있는 결론부터 냈다.

첫째 시계가 고장났다.
지금은 오후 2시가 아닐 수도 있다.
초침이 잘 움직이지 않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초침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시계가 고장났다고 인정해 버리기에는 이곳이 이세계라는 변수가 너무도 컸다.

둘째 우리는 진짜 24시간을 자고 2시에 일어났다.
솔직히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지금 24시간이 지났는지 측정해줄 도구가 마땅치 않았다.
그러나 잠이 들기 전 불을 피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할 때 하늘을 보았었다.
그때도 태양의 위치가 지금과 과히 다를 게 없었다.
그럼 우리가 잠든 시간도 이때 즈음일 것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잠든 시간에 저녁이 지나가고 아침이 왔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이렇게 불편한 자세로 하루 온종일 잠들 수 있다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오늘이 다 지나가지 않았다는 것에 더 신빙성이 있을 정도였다. 가끔 낮잠을 자고 일어나면 하루 온종일 잔 것처럼 개운할 때가 있다. 그렇다 보니 시간은 많이 지나지 않았는데 많이 지났다고 착각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셋째 이곳의 시간은 내가 살던 시간과 시간의 흐름이 다를 수 있다.
우리가 하루에 24시간 단위를 쓴다고 해서 여기도 하루가 24시간이라는 보장은 없다. 하루가 우리시간으로 48시간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시계가 고장 났다는 가설을 간단히 뒤집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이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과 같을까?’
즉 우리는 진짜 시간의 흐름에 벗어나 오후 2시에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한없이 헤맸던 시간은 사실 아주 긴 시간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나도 헤매지 않은 것과 같을 수도 있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심결에 턱을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수염이 자라지 않았다.’
그랬다.
나는 수염이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중학교 2학년 때부터 턱밑에 조금 나기 시작한 수염은 밀면 밀수록 거칠어져서 이제는 매일 아침에 밀지 않으면 거뭇하게 티가 날 정도였다.
그런데 턱밑은 오늘 아침에 민 그대로 보송보송했다.
결론.
시간이 흐르고 있지 않았다.
흘러도 2시간 정도였다.
그러나 이것은 생물학적 시간일 뿐 실제로 얼마나 오래 이곳에 머물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꼬르르륵.”
마치 내 추리를 뒷받침하듯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들렸다.
적어도 김밥을 먹은 지 2시간 만에 이렇게 배가 고파지지는 않을 것이었다.
많이 뛴 것도 사실이고 내가 성장기여서 많이 먹는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정도의 공복은 근 하루를 굶어야 생기는 정도의 것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간이 내 안에서 모순을 가지며 뒤틀려 있다는 것은 사실인 것 같았다.
“꼬르르륵.”
다시 한 번 뱃속이 요동을 쳤다.
수염이 자라지 않는다고 해서 배까지 안 고파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곧이어 그 사실은 전혀 좋아할 게 없다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우리는 먹을 것이라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털썩.’
한참을 배회하던 기철이가 완전히 잠에서 깼는지 내 옆으로 와 털썩 주저앉았다.
“배고프다.”
내 생각을 대변하듯 기철이가 중얼거렸다.
“그러게.”
내가 답했다. 그러자 기철이가 놀랍다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 눈빛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내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기철이의 수다가 터져 나왔다.
“아니! 나는 너를 잘 모르잖아. 그도 그럴 것이 우리가 저번 세상에 있을 때는, 저번 세상 알지? 그 학교에 있을 때 말야! 별루 안 친했잖냐? 그런데 여기 와서 너랑 다녀보니깐 말야. 나는 네가 슈퍼맨이나, 초인과 동격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러니깐 내 말은 네가 배가 고프다는 지극히 평범한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 못했는데…….”
흥분해서 말하는 기철이를 진정 시키면서 다시 물었다.
“내 어딜 봐서 슈퍼맨이나 초인과 동격이라고 생각한 거냐? 그 근거를 좀 듣고 싶다?”
“아니, 그럴 것이 다른 아이들은 괴물을 만나서 도망가기 바쁘잖냐? 근데 너는 괴물과 맞장도 뜨고…….”
나는 점점 흥분하려는 기철이를 또 만류하며 물었다.
“내가 언제 맞장을 뜨던? 나도 도망가기 바빴거든?”
기철이의 목소리는 좀 작아졌다.
“대천이한테 한방 맞았는데도 멀쩡하고.”
“멀쩡 안하거든 엄청 아펐거든?”
“괴물 속을 뚫고 사람도 구해오고…….”
기철이의 점점 작아지는 말에 역시나 나는 딴지를 걸듯 소희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 애가 괴물 속을 뚫고 나한테 왔을걸?”
기철이가 내말에 삐친 듯이 확신하는 말투로 말했다.
“그래도. 너 쫌 보통 사람하고 달러!”
보통 사람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관찰해 본 적이 없어서 뭐가 다른 건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내가 보통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다고는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그냥 늘 그렇듯 기철이가 좀 오버한다고 느낄 뿐이었다. 단지 오버가 지나쳐서 나를 지나치게 믿다가 큰 코 다칠 까봐 더 걱정이었다.
저번 대천이와 대결할 때처럼 아찔한 순간이 또 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니 앞으로 그럴 일이 매우 많아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나에 대한 기대를 초반에 꺾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냉철하게 딴지를 걸어 주었던 것이었다.
뭔가 더 말하고 싶어서 삐쭉 삐쭉하는 기철이를 가볍게 무시해 주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먹을 것이 있는지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유심히 주위를 둘러보며 나무에 달린 이상한 모양의 버섯이라든가 서로 다른 모양의 풀을 뜯어서 살펴보았다.
기철이가 말했다.
“봐 봐! 너는 이런 이상한 세계에서 너무 잘 적응하는 거 같아. 나는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얼떨떨하구만. 너는 마치 이런 세계에 올 것이라고 예상한 듯이 배낭을 가득 채워서 준비하고 있고, 괴물이 나타날 것도 미리 알고. 지금도 너 지금 식량 구하려고 생각하고 있지?”
“응? 응.”
배가 고프면 식량을 찾는 것이 당연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는 기철이를 보며 그저 무성의하게 대답해줬다.
“너 쫌 달라.”
기철이가 투정부리듯이 말했다.
“그게 나쁘냐?”
기철이의 투정 섞인 말에 좀 기분 나빠진 내가 따지듯 반문했다.
“아니!”
기철이는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럼?”
의외로 부정의 단어가 나오자 나는 다시 물었다.
“대단해, 존경해, 너를 평생 따르기로 결정했어!”
기철이가 마치 소녀같이 두 손을 곱게 모은 포즈로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뭐?”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다.
“나 너를 대장으로 섬기기로 했다. 대장이라고 부르게 해줘.”
“뭐?”
“대자아앙!”
기철이가 나에게 달려들며 말했다.
“너, 하지 마!”
나는 두 손으로 기철이가 가까이 오지 못하도록 방어해야 했다. 그리고 그 호칭도 솔직히 너무 쑥스러웠다.
“대자아앙!”
기철이가 나의 저항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두 팔을 뻗어 안으려고 덤비며 말했다.
“하지 마∼!”
순간 너무 큰 소리가 나와서 나도 모르게,
‘헉.’
하고 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