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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15화)
6. 미묘한 변화 그리고 멈춰 있는 시간(2)


‘파삭.’
어디선가 내 발자국이 아닌 다른 것의 풀이 밟히는 소리가 들려 소스라치게 놀랐다. 소리에 모든 오감을 집중하던 터라 더욱 그랬다.
‘파삭 파삭.’
거침없이 풀을 밟고 있는 소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너무 거침없는 발걸음이라 이 숲에서 최고 강자가 아니라면 분명히 사람 소리라고 확신이 들 정도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몸은 최대한 낮춘 상태였다.
“흐이이잉∼”
사람 소리가 분명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소리였다.
발걸음을 빠르게 해서 소리가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흐이이잉∼!”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헉!’
기철이었다. 기철이는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로 혼자서 방황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야! 너?”
내가 부르자 기철이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허어어어어엉!”
흐느낌이 대성통곡으로 변했다. 소희를 업고 있느라 움직임이 둔한 나는 빠르게 이동하지 못했다.
그러자 나를 발견한 기철이가 한걸음에 달려와서 나에게 와락 안겼다.
“왜? 뭐야?”
소희를 업고 있느라 거부하지도 그렇다고 마주 안아주지도 못하는 나에게 기철이가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부비며 말했다.
솔직히 두 손이 멀쩡했다면 본능적으로 밀어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막상 서럽게 매달려 오는 상대를 매몰차게 거절하는 것도 인정상 안돼 보였다.
“허어엉∼! 어디 갔었어?”
솔직히 좀,
‘오버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철이가 평소에도 그렇게 어른스러운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철없는 어린 아이처럼 구는 녀석도 아니었다. 물론 아무도 없는 이세계에 홀로 버려진다면 울고 싶어질 만큼 두려워지는 심정은 이해가 되지만 말이다.
“어디 가다니?”
내가 반문하자 기철이가 반박했다.
“왜 곧바로 안 따라왔냐구!”
마치 떼쓰는 어린 아이 같은 말투라 다시 한 번 놀랐다.
“나도 도망 다녔는데?”
너무 놀란 나머지 나조차도 뜬금없는 답을 해버렸다. 그러자 기철이가 울음을 뚝 그치고는 자신의 눈가를 거칠게 닦아내고는 나를 확 째려봤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내 등 뒤로 이동했다.
나에게 업혀 있는 소희를 보는 것 같더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납득이 간다는 듯이 말했다.
“아! 너 진짜 좋은 사람이구나아!”
“뭐? 뭐가?”
나를 존경한다는 듯이 바라보는 기철이의 눈빛에 쑥스러워서 반문으로 대답하자 기철이가 곧바로 말했다.
“아니, 우리랑 같이 도망가던 애가 갑자기 자기 친구 찾는다면서 돌아가 버리잖아! 그래서 죽었을 꺼라 생각했거든. 근데 네 등 뒤에 있잖아. 그러니깐…….”
“야! 그런다고 보내 주냐? 말려야지!”
내가 탓하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줄 알고 성현이에게 특별히 맡겼건만 그런 것도 소용없이 위험에 휘말려 버린 것이다.
“그럴 상황이 아니었어.”
기철이가 어느새 어리광이 사라진 말투로 말해서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다 큰 녀석이 그것도 여자 아이도 아닌 남자 아이가 어리광 부리며 매달리면 왠지 주먹이 나가려고 하는 것은 단지 내 성격 탓만은 아닐 것이었다.
“……?”
“하얀 괴물 무리가 사방에서 쫓아왔거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중인 것 같았어!”
“뭐?”
나는 몰랐던 사실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도망갈 때 즈음에는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앞에 도망간 사람을 쫓아간 후인 모양이었다.
“진짜 간발의 차이었어. 우리보다 늦게 도망간 몇 명은 당했을걸? 진짜 네가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다면 우리 모두 당할 뻔했어.”
“다른 녀석들은?”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정신없이 도망치느라 뿔뿔이 흩어졌어. 나는 너 찾느라고 더 헤맸어! 흐어엉!”
나를 찾아 헤매느라 혼자가 돼서 고생했다는 것이 서러운 모양인지 결국에는 울음을 터트렸다. 커다란 울음소리가 산속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안 그래도 조용한 산속에 이렇게 커다란 울림이 퍼지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담할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조용히 시켜야겠다는 일념 하에 일단 소희를 내려놓고 기철이를 달래야 했다.
“흐윽 흐윽. 딸꾹!”
얼마나 서럽게 울었는지 확인하듯 딸꾹질까지 시작했다. 그나마 조용해졌지만 딸꾹질하는 소리까지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그만큼 이 숲은 지나치게 조용했다.
나는 한참동안이나 사방을 둘러보며 주위를 점검해야 했다.
“야! 고만해라!”
여자애라도 된다면 다정하게 안아주면서 다독여 주었겠지만 시커먼 사내 녀석을 상대로는 도저히 그럴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냥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보다 작은 녀석이 고개까지 숙이고 울고 있으니 딱 쓰다듬기 좋은 위치에 있었기 때문인 이유도 있었다.
“헤헤헤.”
뭐가 좋은지 실없이 웃는 녀석을 바라보며 이제부터 기철이를 애완동물처럼 생각해야겠다고 마음속 깊이 생각했다.
귀여워서라기보다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대했다가는 화병이 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완동물과 동격으로 생각하면 왠지 귀여운 구석이 있어서 조그마한 실수 정도는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물론 이 살벌한 세상에서 조그마한 실수도 죽음이랑 직결될 테지만 말이다.
기철이가 어느 정도 진정되자 이제는 소희가 좀 걱정되었다. 나무 둥치에 기대어 놓은 소희가 어느새 옆으로 완전히 기울어져 거의 맨바닥에 누워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상태가 무척 안 좋아 보였다.
소희에게 다가가 살짝 일으켜 세웠다.
“소희야! 소희야!”
조용히 이름을 불렀지만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마를 짚어 보니 열이 펄펄 끓고 있었다.
의학에 대하여는 문외한인 내가 봐서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지금까지 도망치기에 급급해서 어디가 다친 건지도 살필 겨를이 없었다.
“소희야!”
단지 정신을 놓으면 안 될 것 같아서 일단 이름을 부르며 뺨을 살짝살짝 때려보았다.
“음∼!”
소희가 신음을 흘리며 눈을 살짝 떴다.
“미안…….”
처음으로 한 이야기가 사과의 말이라 내가 더 미안해졌다. 상태를 살피지 못하고 무리하게 강행군을 시킨 나의 탓이라고 생각되는데 오히려 사과를 받아 버렸기 때문이었다.
“정신 차려.”
“응.”
소희는 거의 꺼질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다쳤어?”
내 말에 소희가 살짝 팔을 손으로 가렸다. 내가 손을 강제로 치우자 찢어진 옷이 보였다. 팔에는 손톱으로 죽 그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피가 많이 난 것도 아니고 깊은 상처도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세계의 동물들에게 어떤 바이러스가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일단 배낭에서 소독약을 꺼내 소독하고 약을 발라 주었다. 피가 나지 않는지라 붕대로 감을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여자애라 몸 전체는 살펴볼 수 없었지만 일단 보이는 곳만 자세히 관찰했다. 다리 곳곳에 역시나 손톱으로 그은 듯한 상처가 작게 많이 나 있었다.
내가 열심히 하얀 작은 괴물을 쳐내는 동안에 역시나 협공을 당한 듯했다.
꼼꼼하게 치료를 했다.
그러나 도대체 열이 펄펄 끓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모두 잔 상처일 뿐 큰 상처는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단 해열제를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손에 해열제를 쥐어 주자 빤히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먹어! 해열제야.”
소희가 살짝 웃었다. 예쁜 얼굴은 아닌데 선한 느낌이 두근거리게 만들었다.
“고마워.”
선선히 감사의 말을 던지는 소희를 보며 기철이를 돌볼 때 느끼지 못한 보람이라는 감정이 솟아올랐다.
왠지 그냥 억울한 마음이 들어 살짝 기철이를 째려봐 줬다.
“왜?”
내 눈빛에 기철이가 찔끔하며 되물었다.
“아니 그냥, 너 이쁘다고.”
나는 그냥 대충 이야기 해버렸다. 대신 마음속으로,
‘애완동물과 동격, 애완동물과 동격.’
을 외치면서 말이다. 말한다고 해서 알아들을 기철이도 아니라고 나 자신을 설득하고 있었다.
“헤헤헤.”
내 말을 있는 그대로 알아들은 기철이가 또 실없이 웃었다.
마음속으로 하는 세뇌가 성공적이었는지 그런 생각 없는 면이 나름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알 수 없는 보람의 근거인 소희는 어느새 색색거리며 잠이 들어 있었다. 깨울까 하다가 숨소리가 고르게 들리고 있어서 자도록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김에 좀 쉬었다 가기로 결정해 버렸다. 내가 업고 간다고 해도 몸이 아픈 소희를 이동시키는 것이 별로 안 좋을 것 같았다.
평생 야영이란 걸 해 본 적이 없는 터라 어느 곳에 자리를 펴야 하는지도 전혀 몰랐고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그냥 대충 자리를 펴기로 했다.
자리라고 해봤자 일단 배낭에 든 것 중에서 제일 넓은 천을 바닥에 깔고 그 위에 소희를 눕히고 수건처럼 보이지만 보통 수건보다는 큰 전신 타월을 덮어 준 것뿐이었다.
그리고 나랑 기철이는 아무 데나 주저앉았다.
아직 해가 지지도 않은지라 따뜻한 편이어서 불을 피우거나 하지는 않았다. 불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불침번을 세우기에는 나도 기철이도 지쳐 있었기 때문에 그냥 자버리기로 했다.
어차피 불침번을 세워도 여차할 때 도망가지 못하면 당하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처음에는 불안해서 잠이 올까 했지만 얼마나 치쳐 있었는지 나나 기철이나 머리를 댄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잠에 골아 떨어져 버렸다.

꿈을 꾸었다. 평소에 꾸던 사실적인 꿈이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그 붉은 망토의 사람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늘 꿈속의 모습은 노을 지는 언덕이었다. 그러나 이번 꿈속에는 태양이 머리 위에 있는 오후였다.
나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눈 밑으로는 세상 모든 것이 파랗게 만 보일 정도로 펼쳐진 넓은 숲이었다. 세상 모든 걱정을 떨쳐 버린 것처럼 시원하게 하늘을 날아올랐다.
그러다 문득 밑으로 펼쳐진 숲에 눈길이 머물렀다.
숲이 낯익었다. 특히 잎사귀의 모양이 그랬다.
어디서 보았는지 곰곰이 떠올렸다. 하지만 생각이 나지 않았다.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생각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숲 가운데에 커다란 언덕이 솟아 있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언덕이라기보다는 높은 산이었다. 산은 회오리 모양으로 위로 올라가는 길이 나 있었다. 왠지 그것도 어디서 본 듯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산 중턱 쯤에 뭔가 길쭉한 것 5개가 삐뚤삐뚤 길게 늘어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 맨 앞쪽 길쭉한 것에 하얀 커다란 공 같은 두개의 물체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보였다.
뭘까 하고 들여다보고 싶었다.
‘뭘까?’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말이 커다랗게 울렸다.
‘뭘까?’
내 목소리인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한 다른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너 지금 어디?’
순간 ‘내가 지금 어디 있지?’라고 무의식이 물었다.
그리고 나서 내가 어디 있는지 떠올렸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내가 누군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다.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이것이 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치 찬바람이 들어오듯 하나 둘 떠올랐다.
이곳은 내가 있는 곳이란 것을…….
내가 얼마나 험한 일을 겪었는지도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