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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14화)
5. 포기하는 자와 뛰어드는 자(4)


“뭐?”
나는 민영이를 놓아 버렸다.
“차라리 미쳤으면 좋겠다고.”
민영이가 나를 째려보며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내 정신은 멀쩡해. 그런데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멀쩡할 수가 있지? 이건 꿈인가? 그래서 멀쩡한가?”
“무슨 소리야?”
“새 같이 생긴 것이 사람을 잡아먹고 땅 밑에서 괴물이 사람을 끌고 들어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몰라. 너가 검은 머리카락이라고 그랬지? 내 눈앞에서 내 친구를 끌고 들어가 머리카락만 토해 놨을 때도, 그 머리카락에 내가 생일 선물한 머리핀이 여전히 예쁜 빨간색을 띄고 있는 것을 봤을 때도, 어떻게 미치지 않았는지 모르겠어. 차라리 미쳐 버렸으면 좋겠어. 왜 내 친구는 잡아가고서 나는 이렇게 내버려둔 걸까? 나도 잡아가지!”
민영이는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횡설수설 하듯이 말했다.
“그래서 미친 척한 거야?”
“아니, 척한 거 아니야. 나 미치고 싶다구!”
나는 화가 났다.
“너 그러면 죽어.”
“차라리 죽고 싶어.”
민영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때까지 힘없이 누워 있었던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만큼 말 하나하나에 힘이 담겨 있었다.
“너 살고 싶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내가 물었다.
“필요 없어. 다 필요 없어.”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몰아넣어 버린 걸까?
단지 다른 사람의 죽음 자체가 스스로를 버릴 수도 있게 만들어 버린 걸까?
단지 슬픔이……?
단지 고통이……?
나는 다시 한 번 말했다. 하지만 다시 손을 내밀지는 않았다.
“일어나.”
손을 내밀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비록 친구의 슬픔이 너무 커서 정신을 못 차린다 할지언정 나까지 위험에 몰아넣을 권리가 그녀에게는 없었다. 이미 그녀를 여기까지 옮기기 위해 너무 많은 힘을 써 버렸다.
축 처진 사람을 옮긴다는 것은 매달려 주는 사람을 옮길 때보다 배의 힘이 든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더 힘을 썼다가는 도망갈 힘도 남지 않을 지경이었다.
“싫어!”
“일어나. 네가 일어나지 않으면 우린 여기서 둘 다 죽어, 알아?”
“웃기지 마. 그냥 나를 나두고 도망가면 되잖아! 너 나 알아? 왜 모르는 사람한테 이래? 나 너 모르거든.”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면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라는 회의가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랬다. 나조차도 죽을지 살지 모르는데 남까지 살려준다는 것은 과욕일지 몰랐다.
하지만 처음부터 나두고 도망갔다면 모르겠지만 기껏 남았고 이렇게까지 됐는데 나만 도망간다는 것은 나의 자존심이 용납할 것 같진 않았다.
언제부터 생긴 자존심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버스의 일이 떠올랐다.
한 명쯤은 더 살릴 수도 있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 아이들 중 몇 명은 나 때문에 죽었을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한 명이라도 더 내 힘으로 살리고 싶었다.
그러면 속죄가 될 것 같기도 했다.

“민영아∼∼ 민영아∼∼”
여자아이의 조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느다랗게 끊어질 듯 들리는 그 목소리는 안타까움이 묻어 있었다. 그 목소리는 멀리서 들리다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리고 지척에 이르렀다고 생각했을 때 그쪽을 바라보았다.
소희였다.
“민영아!”
소희가 조그맣게 말했다. 소희는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이 이해가 됐는지 사색이 되었다.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지 괴물들과 많이 떨어진 곳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일루 와∼∼ 거기 있으면 안 돼!”
“소희야!”
민영이는 아주 반갑게 큰소리로 소희를 불렀다. 나와 소희는 눈을 마주치며 정말 깜짝 놀랐다.
다 죽어가는 듯이 있던 민영이가 그렇게 큰소리를 낼 수 있을 거라 생각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자지러지는 듯한 비명을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목숨이 경각에 달린 심각한 상황에 어떻게 이런 생각 없는 짓을 할 수 있을지 상상도 못했다는 편이 맞을 것이다.
다 죽이려고 마음먹지 않은 한은…….
그 큰소리에 반응하듯 동호에게 붙어 있던 괴물들이 일제히 내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겁에 질려 버렸다.
나도 모르게 민영이를 놔둔 채로 한발 자국 물러섰다.
그때였다.
지척에 다가온 괴물들이 날아오르듯 점프해 우리 쪽으로 쇄도해왔다. 반사적으로 바로 앞으로 날라 오는 녀석 하나를 들고 있던 방망이로 쳐냈다.
얼마나 세게 날아왔는지 쳐낸 손목이 얼얼해질 정도였다. 아주 오래전에 아빠와 함께 갔던 야구 배팅 연습장이 떠올랐다.
그때 아빠가 말씀하기로,
“공은 힘으로 치려고 하면 안 돼. 허리와 손목 힘으로 치는 거야. 공이 다가오는 반동을 이용해야지.”
아빠의 충고를 기억해 내며 충고대로 자리를 잡고 다리에 힘을 꽉 주었다. 내가 치려는 자세를 잡자 녀석이 위협적으로,
“캬∼!”
소리 지르며 날아왔다.
동요하지 않으려고 다시 한 번 나무 막대기를 꽉 쥐었다. 그리곤 녀석의 입을 피해 안면을 목표로 잡고 허리힘과 손목 스냅의 반동을 이용하여 쳐냈다.
‘깡!’
하는 소리가 들리며 제대로 맞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뭔가 터지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세 번째 날아오는 것까지 정확하게 쳐내자 놈들이 주춤 물러서기 시작했다.
빈틈이 생겼다. 이 틈을 이용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내 앞에 있을 만한 녀석을 찾았다.
그런데…… 없었다.
어느새 민영이는 조금 떨어진 곳에 질질 끌려가고 있었다.
협공이었던 것이다. 그 녀석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나를 노리는 듯 내 시야를 뺏고 실제로는 민영이를 노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악! 놔, 놔! 이거 놔!”
민영이가 소리를 지르며 자신을 끌고 가려 하는 작은 물체들을 향해 손을 휘졌고 있었다. 왠지 멍하게 있을 때보다 실제로 죽음에 가까워진 지금이 훨씬 정상적으로 보였다.
물론 그 모습을 바라보며 구해야 한다는 자각은 있었다.
그러나 두 눈 뜨고 바라보면서도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발 앞에 검은 안개가 낀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저번에 버스 앞에서도 느낀 그 감각이었다. 한발자국만 앞으로 나아가면 죽음으로 직결될 것 같다고 강하게 느꼈다.
예언과는 다른 아주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물론 확신도 아니고 단순히 겁먹은 것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 감각을 믿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때,
“민영아∼!”
멀리 있던 소희가 끌러가는 친구를 보다 못해 달려오고 있었다. 손에 든 나무 막대기를 앞으로 내밀어 휘휘 젓고 있었다.
휘두르려고 노력하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에는 본인이 막대기를 흔드는지 막대기가 소희를 흔들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방어적으로도 공격적으로도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뒤로 돌아 소희가 있는 쪽으로 달려갔다.
구하지 못하는 한 명보다 구할 수 있는 한 명의 목숨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했다.
민영이도 동호도 더 이상 가망이 없었다.
나 역시도 더 이상 있다가는 빠져 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전히 민영이가 지르는 비명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미련 두지 않기 위해 뒤를 보지 않고 소희 쪽으로 달려갔다. 민영이 쪽으로 다가가려는 소희의 손을 잡아채고는 반강제로 끌어당기듯 뛰었다.



6. 미묘한 변화 그리고 멈춰 있는 시간(1)


등 뒤로 뭔가 날아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소희를 등 뒤로 숨기듯 세웠다. 그리고 빠르게 자세를 잡고 공을 친다는 감각으로 날아오는 것을 쳐냈다.
‘깡!’
역시 뭐가 터지는 감각이 들었다.
두 번, 세 번, 똑같은 감각으로 쳐내고 또 소희의 손을 잡고 달리고 또 쳐내고…….
그렇게 한참을 달렸다.
달리고 또 달렸다.
녀석들은 적극적으로 우리를 쫓아오는 것 같지 않았다. 먹이 전쟁에서 밀린 몇몇 마리가 마지못해 쫓아오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도망갈 수 있었다.
아마 제대로 붙는다면 1초도 버틸 수 없을 것이었다.
기철이와 함께 달린 거리의 세 배는 뛰었다고 생각되었다. 힘이 들어 숨이 턱까지 올라와 뱃속에서 신물이 넘어올 정도였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힘이 들었는지 주저앉으려는 소희를 몇 번이나 일으켜 세워서 달리고 또 달렸다. 뛰고 있는 소희의 숨소리가 심상치 않다고 느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내가 그 손을 놓으면 소희를 그 녀석들의 뱃속에 집어넣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주저앉으려는 소희을 일으켜 세우고 다시 달리고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나 한참을 달린 끝에 결국 소희는 주저앉고 말았다.
손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미안, 나 때문에. 먼저 가 조금만 쉬고 곧 따라갈게. 우리를 쫓아오지 않으니 괜찮을 거야!”
자꾸만 나를 밀어내는 소희가 안타깝게 느껴졌다. 민영이와 똑같은 상황인 것 같지만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똑같이 밀어내는 상황인데도 나를 위해 그런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적어도 소희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나려고 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었기에 오히려 내가 무리하게 끌고 온 것이 미안해졌다.
나는 배낭을 앞으로 짊어졌다. 그리고 등을 소희 쪽으로 내밀었다.
“업혀.”
소희가 안 그래도 열 때문에 붉은 얼굴이 더 붉어지는 것이 보였다.
“나 무거워.”
“지금 그게 문제냐!”
내가 따지듯, 야단치듯 말하자 소희가 움찔 놀란 것 같았다.
“어서.”
내가 재촉하자 마지못해 소심하게 손을 뻗어 왔다. 나는 그 손을 잡아 얼른 목에 두르고는 번쩍 들어 올렸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평소보다 힘이 세진 것 같았다.
이 정도 달렸는데도 아직까지 여자아이를 업을 힘이 남았다는 것이 평소와 비교해 봤을 때 상상이 가지 않았다. 앞에 배낭, 뒤에 여자아이를 업었는데도 그렇게 힘들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여자는 위기 상황에 평소의 5배의 힘을 발휘하고 남자는 20배의 힘을 발휘한다고 하는데 아마도 내가 최대 위기 상황에 최대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듯했다.
여자아이를 업고 있는 자세가 그렇게 좋지 않아서 놈들이 우리를 추적해 오면 어떻게 반격해야 할지 암담했다. 빨리 먼저 도망간 아이들을 만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생각이 들었다.
막상 다른 사람을 찾으려 하니 정신없이 도망 다닌 탓에 여기가 어딘지 전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귀를 기울여 물소리를 찾았다.
물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바스락.”
그러다 이상한 것 하나를 알아냈다.
내 발자국 소리 외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심지어 새소리조차도 들리지 않았다.
어디든 물이 있고 나무가 있으면 시끄러울 만큼 들리던 새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별로 실감하고 싶지 않았던 이곳이 이세계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러나 아무리 이세계라지만 새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 좀 이상했다. 아니 새소리를 비롯해 뭔가 살아 있는 생물의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점이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