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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12화)
5. 포기하는 자와 뛰어드는 자(2)
“…….”
잠시 정적이 흘렀다. 처음 말이 터진 쪽은 성현이었다.
“에이, 진짜? 거짓말∼ 그 오뚝이란 사람이 18 대 1로 싸웠다는 것도 순 뻥 아니야?”
성현이가 내 맘속에 든 말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이 이야기했다. 나는 성현이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야아! 이런 세상 물정 모르는 녀석들을 봤나! 너 우리 학교 앞에 다른 학교 애들 지나다니는 거 봤냐?”
갑자기 기철이가 화를 버럭 내며 말했다.
“……그게 왜?”
우리는 모두 기철이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평소에 주위를 둘러보며 걷는 편이 아니기 때문에 진짜 우리 학교 주위에 다른 애들이 오는지 안 오는지는 알 수 가 없었다. 그때 성현이가 말했다.
“우리 학교가 시 외각 산 중턱에 있잖아. 다른 학교 애들이 지나다니기 힘든 곳에 있으니까 그래서 안 오는 거겠지!”
“야! 동산 중학교 봐라. 우리 학교보다 더 높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거기에서 삥 뜯는 다른 학교 애들이 얼마나 많은지 아냐? 더 좋은 거야, 한적하니까!”
“듣고 보니 그렇네.”
찬석이가 기철이의 말에 동의했다.
“왠지 아냐! 대천이가 그 날 이후로 서쪽 짱 먹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다른 학교가 우리 학교는 안 건드는 거라구.”
기철이의 열변에 우리가 모두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 뭐하냐? 어차피 대천이에게 다 뜯기고 있는데…….”
찬석이의 시크한 답에 역시 모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런데 얘는 뭐지?”
찬석이가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뭐가?”
내가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찬석이의 손가락을 슬쩍 밀며 말했다.
“그 대단하신 분도 한방이라는데 너는 멀쩡하잖아. 나 맞아봐서 알거든. 그거 한방에 갈 만해.”
찬석이가 말을 이었다.
“글쎄.”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말했지만 나도 의문이 들었다.
“그치 대단하지? 대단할 만해!”
기철이가 마치 자신의 일인 듯 뻐기듯 말했다.
우리는 한참동안 내가 쓰러지지 않은 까닭과 대천이가 그냥 물러선 이유에 대하여 진지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한참을 열변을 토하고서는 그제야 배가 고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을 뒤적여서 엄마가 아침에 싸준 도시락을 꺼냈다. 거의 찬합과 같은 도시락 크기에 3명의 남자들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다들 나와 같은 입장이었는지 내가 도시락을 펴기도 전에 식탐으로 반짝반짝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평소에는 엄마가 싸주는 큰 도시락이 창피하다고 느껴졌었다. 요즘에 도시락을 못 싸오는 아이들도 없을뿐더러 있다고 해도 내 차례까지 돌아오지도 않았다.
보통은 같이 몰려다니는 주변 친구들과 십시일반으로 나눠먹는 것으로 충분했던 것이다.
물론 나도 같은 반 아이들과 같이 밥을 먹지만 그것은 그저 같이 먹는다는 의미일 뿐 나눠먹는다거나 하는 흐뭇한 광경은 좀처럼 없었다. 그러니 친구들과 나눠먹으라는 어머니의 의지가 담긴 도시락은 그 의지와는 다르게 늘 남았고 남은 것은 쓰레기통 행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쓰레기통으로 향하는 도시락을 보며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드디어 눈앞의 세 남자들의 얼굴 표정에서 처음으로 이 도시락의 존재 가치가 빛을 발하고 있는 듯했다. 아까는 햄 같은 고기류는 보지도 못 볼 줄 알았는데 거침없이 날아드는 6개의 손들과 경쟁적으로 먹다 보니 못 먹을 것 같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맛있게 먹는 친구들을 보면서 엄마가 보고 싶어져 눈물이 날 뻔한 것을 겨우 씹어 삼켰다. 우리는 주위의 눈치를 보면서 빠르게 도시락을 비웠다.
한 사람의 것보다는 크지만 그렇다고 십여 명의 다른 사람과 나누기에는 도시락의 크기가 너무 작았다. 이런 식사를 언제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다른 사람들과 감히 나눌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나 비어가는 도시락을 보며 마음에 걸리는 두 사람이 생각났다.
나는 3명의 남자들의 거친 손놀림을 피해 김밥 몇 개를 꿍쳤다. 내 손에 남아 버린 김밥을 보며 아직 허기가 가시지 않은 표정으로 세 명이 아쉬운 듯 바라봤지만 가볍게 무시해 주었다.
뒤를 돌아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에게로 갔다.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여자아이의 무릎에 친구인 듯한 아이가 머리를 베고 누워 있었다.
얼굴이 창백한 것이 어딘가 다친 것 같았다.
“괜찮아?”
나는 다가가서 물었다. 아까 대천이하고 대결할 때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아이가 발작처럼 소리를 질러서 티를 낼 수 는 없었지만 속으로 깜짝 놀랐었다.
대천이를 위협하려고 한 말이었는데 본의 아니게 충격을 준 것 같아 걱정되었다.
“응.”
대답은 안경을 쓴 아이에게서 나왔다.
“이거.”
김밥 통 뚜껑에 가져온 김밥 몇 개를 내밀었다.
“고마워.”
또 대답을 한 사람도 나에게서 김밥을 건네받은 사람도 안경 쓴 아이였다.
“좀 먹어 봐. 금방 좋아질 거야.”
여자아이는 자신도 배가 고플 텐데도 자기 무릎에 있는 친구의 입에 김밥을 넣어주려 했다.
하지만 친구는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 얼굴을 피했다.
“싫어.”
힘없이 거부하는 친구의 입에 어르고 달래면서 겨우 한 개 넣고서는 자신이 먹은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세 남자들의 아쉬운 눈빛을 뿌리치며 가져온 보람을 느끼며 뒤돌아서서 친구들에게 돌아가려 했다.
그때,
“저…… 저기.”
수줍게 부르는 소리가 났다. 안경 쓴 여자 아이었다.
“저기…… 나는 소희, 박소희. 이 애는 민영이야!”
나는 자신을 소희라고 밝히며 새빨갛게 붉힌 여자아이 얼굴을 바라보자 당황하고 말았다.
주변에 이렇게 여성스러운 캐릭터가 없어서인지 여자아이들에 대한 내성이 없어서인지 그저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어? 나는 기철이, 얘는…… 음? 근데 너 이름이 뭐였지?”
내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갈팡질팡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다가온 기철이가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며 허물없이 소희를 바라보며 대답했다.
나는 되돌아온 질문에 어이가 없어졌다.
어떻게 1년간이나 같은 반에서 생활해 놓고도 내 이름조차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지나가는 나그네.”
나는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뒤돌아섰다.
멀리서 성현이와 찬석이가 놀리는 듯 재미있다는 미소를 띠고 우리 쪽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마도 여자애들을 챙기는 나를 놀리려는 모양이었다.
후환이 두려워 나는 그들에게 가려는 것을 포기하고 물가로 향했다. 어차피 비어 있는 물통을 채워야 하기도 했다.
물가에서 물통을 채우고 있는데 어디선가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보아하니 대천이 일당이 찬석이의 가방을 뒤져 우리가 챙겨 넣었던 닭튀김을 먹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불길한 느낌과 함께 헛구역질이 나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욱!”
버스 옆에 떨어져 있던 팔 한 조각을 떠올렸다.
보충한 물을 황급히 챙기며 가방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기철이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
다짜고짜 사과를 하는 것을 봐서 내 이름을 결국 못 알아낸 모양이었다. 성현이와 찬석이가 싱글싱글하며 기철이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마 나 대신에 기철이를 실컷 놀린 듯했다. 그 놀림의 일환으로 이름도 절대 안 가르쳐 줄 생각인 듯했다.
“응.”
나는 대충 대답하고는 가방을 챙긴 후 황급히 등에 짊어졌다.
“왜 그래?”
나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지고 긴장한 듯한 얼굴로 질문을 해오는 찬석이를 보면서 뭐라고 답해야 할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너 좀 이상해! 전에도 이해하기 쉬운 편은 아니었지만, 무엇을 알고 있는지 왜 그러는지 우리한테 좀 설명해주면 안 되냐?”
기철이와 똑같은 질문을 찬석이에게도 받고 나니 내가 정말 이상하긴 하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뭐라고 답해주기가 정말 애매했다.
“감…… 인가?”
망설이며 답했다.
“뭐?”
찬석이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그런 거 있잖아. 느낌, 감각……. 뭐 그런 거!”
“무슨 소리야?”
찬석이가 여전히 어이없다는 얼굴을 굳히며 되물어왔다. 나도 내가 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는데 찬석이가 알아들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뜬금없는 질문은 성현이로부터 나왔다.
“응?”
너무도 갑작스런 질문이었기에 나도 모르게 되물어 버렸다.
“그 감각이라는 게 예전부터 그런 편이었어? 아니면 여기 와서부터 생긴 거야? 어떤 느낌인데?”
나는 성현이의 말에 곰곰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어떤 느낌인지 곰곰이 생각하려 했다. 성현이의 말에 조금쯤 생각을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세 명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모두 진지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였다.
“으악∼!”
우리 넷은 정말 화들짝 놀라버렸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 나로 인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대천 일당이었다.
대천 일당은 손에 닭튀김을 들고 있었다.
“이거 뭐야.”
그들은 자신들이 펼쳐 놓은 닭튀김을 너무도 당연하게 빼앗아 먹는 하얀 물체를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귀엽다.”
여자아이들의 탄성소리가 들렸다.
“와, 귀엽다…….”
얼굴이 풀린 기철이가 하얀 물체에 다가가려 했다.
닭튀김에 얼굴을 처박은 체 무방비하게 엉덩이를 들어낸 하얀 물체에는 존재감이 작은 꼬리가 살랑 살랑 흔들리고 있었다.
포동포동하고 부드럽게 보이는 털을 가진 작은 동물은 누가 보기에도 너무 귀여워 보였다.
하지만 나는 달랐다. 오히려 그런 귀여움이 더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처음에 나타났던 새가 떠올랐다.
우리가 그 새를 발견하고 처음부터 도망가지 않았던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천진하면서 귀여운 그 외관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름답게만 보이던 눈처럼 하얀 털 색깔…….
그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이제는 알 것 같았다.
모든 것이 파랗다 못해 검은 이 숲에서 하얀 털을 가진 의미를.
대부분의 동물은 보호색으로 천적에게 자신을 보호한다. 그리고 그 보호색이란 자연과 똑같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는 전혀 이질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무슨 뜻이겠는가?
적어도…….
천적이 없단 뜻이다.
그만큼 강하거나…….
그만큼 위험하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