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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11화)
4. 포식자와(야생동물과) 인간의 차이(4)
“그런 짓을 하면 너도 죽을걸?”
대천이가 애써 평정을 유지하며 위협하듯 말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아. 못할 건 없지!”
대천이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단호한 의지로 역시나 그를 똑바로 쏴보아 주었다.
그때였다.
“그러지 마아∼! 그러지 마∼∼! 무서워∼∼! 무서워∼∼!”
갑작스런 소리에 대천이가 움찔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소리는 대천이의 등 뒤에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다친 것인지 창백한 얼굴로 힘없이 친구의 무릎을 베고 누워 있던 아이의 것이었다.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지만 고통이 담긴 외침은 모든 사람의 시선을 모았다.
“조용히 해!”
대천이가 소리 나는 쪽을 째려보며 낮고 위협적인 어조로 말했다. 다친 아이를 간호하고 있던 친구가 그 의미를 알아듣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고 있는 아이를 달래기 시작했다.
아이는 곧 조용해졌다.
나는 여전히 대천이를 대항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대천이는 다시 나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비웃는 웃음은 아니었다.
그리곤 똑바로 바라보던 내 눈을 피하며 말했다.
“사소한 것에 목숨 거는 녀석이군.”
그러더니 나를 피하듯 자신의 똘마니를 데리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
5. 포기하는 자와 뛰어드는 자(1)
대천 일행은 자리를 정해놓은 듯한 그늘 밑으로 가서 앉았다. 그곳은 사람이 쉬기에 적절한 그늘이었지만 아무도 가까이 가지 않았다. 암묵처럼 녀석들의 구역으로 정해진 모양이었다.
그를 경계하며 바라보다 우연히 강태 옆에 있던 어떤 물체가 눈에 들어왔다. 눈길이 저절로 그쪽으로 향했다.
성현이와 찬석이의 배낭이었다.
“……?”
갑자기 억눌러져 있던 분노가 갑자기 튀어나왔다. 나는 가만두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대천이를 향해 한발 내딛었다. 그때였다.
“어이!”
누군가 나의 팔을 붙잡았다.
나는 기철이라고 생각하고 화난 얼굴을 풀지 않은 채 휙 뒤돌아보았다.
순간 나의 분노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성현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찬석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쑥스러운 듯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살아 있었네.”
“너희들…….”
사실 대천 일당 옆에 있는 가방을 본 순간 성현이와 찬석이를 그들이 해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성현이와 찬석이가 그들에게 가방을 맡길 일이 만에 하나라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당사자들이 나타나서 불길에 물을 확 끼얹듯 화가 수그러들어 버렸다.
“어디 다친 데는 없고?”
성현이가 다정하게 물어왔다.
“응. 너희는?”
내 물음에 다시 성현이가,
“우리도 보다시피 이렇게 멀쩡하지. 한참 도망치다가 너가 없어서 놀랐어. 그래도 다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더라.”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래, 너는 도대체 어디로 갔었던 거냐? 우리가 여기 도착한 지 두 시간이나 됐는데 이제야 도착하고 말이야!”
찬석이가 퉁명스런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말투에 걱정이 담겨 있어서 좀 감동했다.
찬석이와 성현이는 서로 친한 관계일지 몰라도 나와는 친하다고 할 만큼은 아니었다.
같은 반이다 보니 숙제를 빌리거나 가끔 쉬는 시간에 잡담을 할 정도이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위험한 상황에서 나를 구하겠다고 도망치다 말고 고민할 정도의 사이는 아니었다고 느끼고 있었다.
솔직히 나도 둘을 전혀 걱정하지 않았고 말이다.
그러고 보니 기철이야 말로 나와 전혀 친한 친구라고 할 수 없었다. 같은 반인데 가끔도 말해 본 적이 없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싫어하는 것도 아닌데 그랬던 것 같다.
그런데도 내 목숨도 아깝지 않아 할 정도로 헌신적으로 구하고 있는 걸 보니 사람을 구하고 걱정하는 것을 친함의 정도로 재기에는 좀 무리가 있는 듯하다.
‘위험 속에서 자라난 우정.’
이라는 간질간질하면서 나하고 영 인연이 없을 것 같던 따뜻한 느낌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혼자인 게 좋고 편해서 사람들과의 관계를 깊게 유지해 보려 하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 상처 받거나 주거나 하는 것이 거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막상 이렇게 어려움에 처해 보니 사람이라는 존재 자체에 안심이 되기도 하고 작은 관심에 감명 받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아아, 그래. 좀 일이 있었어.”
나는 쑥스러운 느낌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슨 일?”
“응, 그게 말이야…….”
나는 차분히 설명하려다가,
‘헉!’
하는 기분이 되어 그 질문을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기철이가 순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
너무도 순진하고 천진한 물음에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어이가 없었다.
“너 때문이잖아, 너!”
목소리 톤이 높아지는 것은 단지 내 성질이 다혈질이기 때문이 아니라고 마음속으로 열심히 변명하고 있었다.
“어엉? 나 때문에 거기 있었던 거였어?”
엄밀히 따지자면 기철이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차에 몰려든 사람을 구하기 위해 도망가는 것을 포기하고 그 위험을 겪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위험 속에서 내 손으로 직접 구해온 건 기철이 한 명이었다. 그러니 기철이 때문이라 해도 과언은 아니지 않겠는가?
목숨 걸고 구해온 사람이 자신을 구해준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어이가 없어졌다. 물론 알아주라고 한 일은 아니지만 대놓고,
‘니가 한 게 뭐냐?’
라는 눈빛으로 바라본다면 좀 상처 받게 된다.
그 위험한 일을 함께 겪으면서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지 기철이의 뇌구조가 궁금해지는 순간이었다.
“아∼! 그랬구나. 헤헤, 땡큐!”
“그래, 알아줘서 고맙다.”
나는 그냥 어이없어 웃었다.
“무슨 일인데?”
이제는 성현이가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며 물었다. 기철이가 뻐끔거리며 뭔가를 설명하려는 것을 내가 막았다.
생각해 보니 자랑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구하지 못했던 사람이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기철이를 막은 손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찬바람과 함께 냉정이 돌아왔다.
갑자기,
‘그때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 때문에 죽은 것일 수도 있었다.
마지막에 차 문을 열어버리라고 시킨 것은 나…… 였다.
‘내가 왜 그랬을까?’
‘어떻게 그렇게 냉정해 질 수 있었을까?’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졌다.
“왜 그래? 얼굴이 파래졌는데?”
성현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니! 별로.”
나는 성현이의 손을 피해 두 발자국 물러섰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난감해졌다.
그때였다.
“어? 근데 여기 왜 이렇게 파랗냐? 여기는 좀 부은 것도 같고. 너희들 맞았구나? 근데 누구한테 맞았냐?”
기철이가 대뜸 나서더니 성현이의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기철이의 말을 듣고 성현이의 얼굴을 보니 왼쪽 얼굴이 부어 있었다.
보니 찬석이의 얼굴도 똑같이 왼쪽이 부어 있었다.
“너희야 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나는 대답이 궁색하던 차에 잘 됐다는 생각이 들어 되물었다.
“…….”
그러자 성현이는 주위를 둘러보더니 주위에 사람이 없는 나무 밑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물론 사람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여기 있는 사람은 우리 4명과 대천 일행 4명, 다른 반 아이들로 물가에서 자기들끼리 모여 있는 아이들 5명과 다친 듯한 아이 2명, 총 15명뿐이었다.
우리는 나무 밑에 모여 앉았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성현이었다.
“여기 도착하자마자 한 방 맞았다.”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는 태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대충 짐작이 갔다. 나와 비슷한 일이 벌어 졌었을 것이었다.
“그래서…… 그래서 어쨌는데?”
기철이가 무슨 뜻이 담긴지는 몰라도 기대가 가득한 표정으로 천진하게 되묻자 안 그래도 어이없어 하던 성현이의 말투가 더 시무룩해 졌다.
“그냥 뻗었지 뭐.”
“엥.”
기철이가 김 빠졌단 표정으로 성현이를 바라보았다.
“나두 마찬가지다.”
찬석이가 성현이를 두둔하듯 말했다.
“왜? 왜 그랬는데?”
역시나 기철이가 천진하게 되물었다.
“뻔하지. 한 대 맞고 뻗었는데 우리 배낭이 저기 있더라.”
그러면서 찬석이가 대천 일행 쪽을 가리켰다. 더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대천이는 우리에게 했었던 것처럼 성현이와 찬석이의 배낭을 빼앗기 위해 다짜고짜 사람을 쳤다는 이야기였다.
“진짜? 암말 없이 그냥 날렸단 말야?”
기철이가 오른팔로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하며 물었다.
“너하고 비슷한 상황이었어. 별 이야기 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기습이 들어왔지. 우리는 어떻게 해 볼 방법도 없었어. 한방에 갔거든.”
찬석이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먹을 것은 다 찬석이 가방에 들어 있는데…….”
성현이는 깊은 한 숨을 쉬며 말했다. 동시에 찬석이에게서도 깊은 한숨 소리가 나왔다. 성현이가 미안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야∼! 당연하지! 대철이 저 자식이 선빵 원킬로 유명하다는 거 몰랐냐?”
성현이와 찬석이가 기철이의 얼굴을 동시에 바라보며 물었다.
“선빵 원킬?”
기철이가 마치 자기의 무용담처럼 으스대듯 말했다.
“그게 말야! 서문고에 오뚝이라는 녀석이 있었는데. 참고로 오뚝이라는 별명은 때려도 때려도 다시 오뚝이처럼 일어나서 덤비는 녀석으로 쓰러진 적이 없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인데. 18 대 1로 싸워도 끄떡없는 녀석이라고 정평이 자자한 쌈짱이었어. 서쪽 일대를 완전 장악하고 있었다니깐. 근데 어느 날 대천이랑 붙었지. 그때 대천이는 막 고등학교를 들어온 신삥이었는데 학교 짱하고 붙어서 학교 짱을 곤죽을 만들어 놨다는 걸로 유명해졌거든.”
우리 셋은 처음 듣는 것처럼 기철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근데 학교 짱하고 오뚝이하고는 형님 동생 하는 사이였었나 봐. 그러니 오뚝이가 복수한다고 대천이한테 먼저 들이댄 거지. 둘이 붙는다고 소문이 나니까 사람들이 창과 방패의 대결이라고 난리가 났는데 말이야. 오뚝이가 몇 번이나 일어나서 대천이를 족칠지 다들 궁금해 했지. 솔직히 대천이는 평판에 있어서는 많이 밀리고 있었거든. 근데 말이야!”
기철이가 몸을 숙이면서 마치 비밀을 말하듯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덩달아 우리로 몸을 숙였다.
“오뚝이가 먼저 대천이한테 ‘어린 녀석하고 싸우니 한 대는 양보하마.’라고 멋지게 말하면서 들이대는데, 대천이가 ‘사양하지 않으마.’이러면서 퍽!”
다시 기철이가 주먹을 날리는 시늉을 했다.
“딱 한 방이었어.”
“…….”
우리는 숨을 죽이며 다음 설명이 나오길 기다렸다.
“오뚝이를 쓰러뜨리는데…….”
기철이가 의미심장한 어투로 말을 끝맺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