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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10화)
4. 포식자와(야생동물과) 인간의 차이(3)
“…….”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배낭을 고쳐 메고는 그저 걷기 시작했다.
“야! 어디 가?”
물론 대답하지 않았다.
“야! 같이 가!”
기철이가 서둘러 일어났으며 나를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뒤를 돌아보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다.
“화났어?”
내가 대꾸도 하지 않고 걷자 기철이가 옆으로 다가와 알짱거리며 내 안색을 살피는 듯했다.
“…….”
물론 그냥 무시했다.
“있잖아. 나는 그냥…….”
뭔가 변명을 하려 하는 것 같았지만 역시나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모르는 녀석은 무엇을 미안해해야 하는 지도 모르고 무엇을 변명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있잖아, 나는…….”
한참을 그냥 걷기만 했다. 기철이는 고개도 들지 못하고 내내 땅바닥만 바라보고 있었다.
솔직히 축 쳐진 기철이를 보는 건 좀 힘들었다. 평소에 발랄하다 못해 산만한 녀석을 이렇게까지 조용하게 만들면 그렇게 만든 내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처럼 나쁘게 생각 되는 것이다.
“화 안 났어.”
딱 그 한 마디만 했다. 그래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역시나,
“헤헤, 그럴 줄 알았어. 너는 참 좋은 사람이야, 헤헤. 그치? 내가 쫌 사람 보는 눈은 있거든. 너가 쫌 차갑게 보이더라도…….”
그 한마디로 내 찬사가 쏟아져 나온 것은 의외였지만 그가 따발총처럼 말을 늘어놓으리란 건 충분히 예측한 것이었다. 그래도 차라리 기죽은 기철이 보다는 좀 시끄럽고 무신경하지만 이쪽이 훨씬 견디기 쉽게 느껴졌다.
그때였다.
나는 오른손을 빠르게 올렸다. 멈추라는 신호였다.
“……!”
정말 따발총처럼 쏟아지던 말이 내 손짓 하나에 딱 그쳤다. 나는 대견하다는 듯이 기철이를 바라보았다. 내 눈빛을 읽었는지 또,
“헤헤.”
웃었다.
물소리가 들렸다. 모든 생존의 첫걸음은 물을 찾는 것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정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우리는 산 위에 있었고 물은 산 위에서 아래로 이끌어 주는 길잡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물론 물이 있는 곳에는 위험이 존재할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상황에서 그 정도 모험도 안 할 순 없었다.
“가자.”
역시나 기철이는 무슨 소린지 모르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별말 하지 않았다. 나는 걷기 시작했고 녀석은 조용히 내 뒤를 따라왔다.
한참을 걸었을 때였다. 어디선가 물소리와 함께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오른손을 빠르게 올렸다. 그리고 몸을 낮추고 수풀 속에 몸을 숨겼다. 그러자 내 뒤로 기철이가 딱 붙어 오는 것을 느꼈다. 낮선 감각에 뒤를 돌아보았다.
기철이는 여전히 무슨 일인지 영문 모를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에게 묻지 않았다. 다만 내 행동 하나하나를 관찰하고 충실하게 따르고 있을 뿐이었다.
평소에 철없이 나대던 기철이를 떠올리며 대견하게 느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다시,
“헤헤.”
웃었다. 왠지 좀 산만하고 시끄러운 개 한 마리를 길들인다는 느낌이 들었다. 별로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렇게 수풀에 몸을 숨긴 채로 웅성거리는 소리 쪽으로 나아갔다. 지나칠 수도 있었지만 자칫 돌아가려다가 물소리마저도 놓칠 위험이 있었다.
“야! 일루 좀 와 봐!”
“이것 좀 도와줘.”
가까이 다가가자 웅성거리는 소리는 뚜렷한 사람 소리로 바뀌었다. 그제야 안심이 되었다.
숨겨두었던 몸을 일으켜 세우고 사람들 틈으로 걸어 들어갔다. 상당히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때였다.
“이게 누구야.”
등 뒤에서 누군가 비꼬는 소리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반갑지 않은 목소리였다.
대천이었다.
“이야! 이 녀석도 배낭을 가지고 있잖아?”
강태가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뭐 좀 들었냐?”
대천이의 똘마니 중의 한 명인 동호가 다가왔다. 그러더니 내 배낭을 잡아당겼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녀석의 손을 뿌리쳤다.
“쳇!”
그때였다. 갑자기 얼굴에서 화끈 달아오르는 고통이 느껴졌다. 주먹이 내 얼굴을 강타한 것이었다.
심장이 두근거릴 정도로 놀랐다. 물론 남자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맞아보지 않을 만큼 곱게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순간 이런 폭력을 당할 것이라곤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너무 놀라 버린 것이었다.
나는 주먹을 날린 장본인을 째려봐 주었다. 대천이었다. 녀석은 기분 나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분 나쁜 예감이 온몸을 훑고 지나갔다.
“아악!”
나 대신 소리를 지른 것은 기철이었다. 나 대신 호들갑을 떠는 것도 기철이었다.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애들이 왜 이러니? 미쳤냐?”
기철이의 호들갑에,
“카악! 죽을래?”
강태가 위협적으로 주먹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기철이가 내 뒤에 쏙 숨었다.
“너나 죽어라!”
내 뒤에 숨어서 위협하는 강태에게 혀를 쏙 내밀었다. 왠지 느낌이 엄마 뒤에 숨어서 친구를 놀리는 어린아이의 행동 같았다.
과연 나라는 방패막이 얼마나 기철이를 보호해 줄 수 있을 것인지 나조차도 확신할 수 없건만 기철이는 나를 상당히 믿는 듯했다.
솔직히 내가 싸움에 능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맞고 다니는 편이었다. 아니 맞고 다닌다는 표현은 옳지 않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맞고 다니기라도 했다면 맷집이라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평범 그 자체로 오히려 눈에 띄지 않아서 맞지도 때리지도 못하는, 싸움에 있어서 어정쩡하기 그지없는 존재였다. 그것을 강태가 모를 리가 없었다.
우리는 몇 달 모자라지만 근 1년을 같은 반에서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강태가 나를 향해 덤벼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데 의외로 강태도 대천이 뒤에 서서 그저 단순히 위협하는 태도만 취하고 있었다.
그것도 나를 위협한 다기보다는 내 눈을 살살 피하면서 기철이와 말로 드잡이 질을 하고 있었다.
“저게 코끼리 간땡이를 삶아먹었나. 어디서 말대답이야, 말대답이.”
“내가 코끼리 간땡이만 삶아 먹은 줄 아냐? 소랑 돼지랑 맷돼지 간땡이도 삶아 먹었다. 넌 먹어본 적 있냐. 맷돼지 간땡이. 꼭 니 간땡이 같이 생겼다. 꼭 맷돼지 같이 생긴 게.”
내가 생각해 봐도 뭘 믿고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도발하는 것인지 걱정될 정도였다. 그게 날 믿고 그러는 것이라면 더 걱정이었다.
“내가 저 자식을…….”
강태가 눈을 부라리며 으르렁 댔다. 그러나 더 가까이 올 생각은 없는 듯했다.
순간,
‘사나운 개는 짖지 않는다.’
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가 정말로 우리를 어떻게 할 작정이었다면 벌써 몇 번은 주먹이 오고 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위협을 하는 이유는 이미 우리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짖기만 하는 개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조용히 공격의 때를 살피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자가 더 무서운 것이었다.
나는 몸을 꼿꼿이 세우고 바로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대천이의 눈에서 싸움판에서 많이 놀아 본 듯한 먹이를 노리는 날카로운 야수의 무엇인가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무섭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나는 진짜 야수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그것도 두 마리와.
오히려 야수의 눈동자는 깨끗하고 맑았다.
순수하게 먹이를 쫓는…….
나를 담은 눈동자.
그때를 떠올렸다.
내가 어떻게 행동했었는지를 생생하게 기억해 냈다.
나는 무척이나 냉정해져 있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고 했다. 그 쥐의 기분을 그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무서울 게 없는 죽음의 공포였다.
눈앞의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역시 그 검은 눈동자에 내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그때와는 달랐다.
포식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무엇인가가 그 눈동자 깊숙한 곳에 담겨 있었다.
‘두려움…….’
그도 인간이었다.
이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을 인간은 없었다.
그리고 야수와는 근본적으로 그런 점이 달랐다.
그렇게 한참 동안이나 대천이와 나는 그저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탐색하고 있는 중이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것이다.
현실에서, 아니 평범한 다른 세상에서 그는 그저 피하기만 하면 되는. 무서워서 피하는 것이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그런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나를 향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집요하게 사람을 궁지로 몰고 가는지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눈이 있고 귀가 있는 이상 녀석에게 재수 없게 찍히는 바람에 당하고 사는 아이들이 있음을 모를 리 없었던 것이다.
각오를 굳히고 이곳에 도착해 언젠가부터 깨어나기 시작한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분노 같은 감정을 깊이 누르며 말했다.
“건드리지 마라.”
나는 위협적으로 말했다.
“뭐?”
녀석은 입 끝을 올리며 비웃듯 말했다.
“건들면 어쩔 건데?”
건들건들한 태도로 녀석은 한번 도발해 본다는 듯이 손가락 끝으로 나를 툭 쳤다. 순간,
“야아! 그러지 마.”
기철이가 대천이를 향해 말리듯이 말했다. 목소리가 좀 떨리는 것이 나름 무서운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철이는 나를 보호하듯 한걸음 나아가려 했다. 나는 오른손을 들어 그런 그를 막았다. 기철이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솔직히 기철이를 보호할 자신이 없었기에 그가 나서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기에 단호하게 그에게 살짝 고개를 흔들어 나서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그렇다고 그 대신 내가 맞아주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그에게 지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그는 야수가 아니었고 포식자도 아니었다. 그저 사람일 뿐이었다.
나는 다시 당당하게 앞을 바라보았다. 그런 나를 바라보며 대천 일행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낮고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
“소리를 질러 주겠다.”
녀석들은 내가 무슨 말을 할지 몰라 기다리고 있다가 어이없는 대답을 들은 것처럼 비웃으며 말했다.
“큭큭큭, 그래라. 우리가 밟아 줄 테니까. 기집애처럼 소리를 지르든지 말든지!”
그러면서 네 명은 주먹을 우두둑 소리를 내며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여유롭다는 듯이 말했다.
“여기는 뭐가 살고 있을까? 사람을 먹는 새? 사람을 삼켜 놓고 머리카락만 뱉어놓고 사라지는 이름 모를 괴물?”
순간 녀석들이 움찔 멈춰 섰다.
“뭐?”
나는 최대한 여유롭게 그리고 위협적으로 들릴 수 있도록 말을 이었다.
“난 소리를 지르겠다고 했다. 지금까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는 않겠지? 그리고 내가 소리를 지르게 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만큼 어리석지도 않겠지? 적어도 여기까지 살아서 왔다면 말이야.”
마지막 말에 힘을 주어 말하자 네 명의 무법자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는 것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