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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9화)
4. 포식자와(야생동물과) 인간의 차이(2)
내버려뒀던 배낭을 재빠르게 챙기곤 아직도 물을 마시는 데 심취한 나머지 병속에 있는 물방울 하나에 집착하고 있는 녀석에게 들린 물병을 빼앗아 배낭 안에 넣었다.
물병을 빼앗긴 기철이는 억울한 표정으로 항의를 하려 했다. 하지만 잠시 마주친 나의 표정이 어땠는지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어 버렸다.
“어이, 왜?”
수다를 터트리려는 신호를 보내자마자 나는 그것을 끊어버리 듯 다시 녀석의 손을 붙잡고는 빠르게 그 자리를 벗어났다.
녀석이 잠시 멈칫하며 내가 무엇을 보고 그러는 것인지 궁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느낌이 났지만 굳이 말리진 않았다.
일단 길을 벗어나는 것이 우선이었다. 나는 오솔길을 벗어나 험한 산길로 빠르게 걸어 들어갔다. 뒤를 돌아보는 바보 같은 짓은 하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이나 말없이 걷던 중이었다. 갑자기 나의 오른손이 휙 하고 끌어 당겨졌다.
갑작스런 힘에 밀려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렸다. 쓰러질 뻔한 것을 무게중심을 잡아 꼴사납게 넘어지는 것을 겨우 방지할 수 있었다.
안 그래도 힘들어 죽겠는데 더 힘들게 하는 무엇인가가 다 짜증나게 느껴졌다. 화난 표정으로 끌어당긴 당사자를 무섭게 째려봐주었다.
당사자도 자신이 잘못한지 아는지 흠칫하고 놀라는 표정이었다.
“왜?”
딱딱한 말투로 쏴붙여 주였다. 그러자 주눅 든 게 분명하게 보이지만 비굴하지는 않은 말투로 기철이가 대꾸했다.
“나야말로 묻고 싶다. 왜 좋은 길 놔두고 이렇게 험한 길로만 가는 거냐. 이거 봐라, 이거.”
그러면서 이미 헐거워질 대로 헐거워진 자신의 발에 감겨진 수건을 가리켰다.
수건에 진물과 핏자국이 드문드문 찍혀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아파보였다. 그런 줄도 모르고 짜증부터 낸 것이 미안해졌다. 여기까지 아무 말도 않고 따라와 준 것도 고마웠다.
“미안.”
나는 솔직하게 사과했다. 그러자 기철이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미안하지? 미안할 거야. 미안해해야지!”
너무도 당당하게 사과를 받아들이는 기철이를 보며 과연,
‘솔직한 게 좋은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근데 왜 이렇게 자꾸 험한 길로 가는 건지 이유나 들어 보고 가자. 아무리 나라도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는 것은 알고 있거든. 그리고 왜 무서운 영화 같은데서 보면 꼭 ‘왜 그래?’라면서 진행을 방해하는 캐릭터는 꼭 젤 먼저 뒈지더라. 그래서 조용히 있으려고 그랬는데 지금은 좀 아닌 것 같지 않냐? 우리 너무 평온하게 산속을 해매고 있고. 말 그대로 해매고 있는 건데, 너는 더 헤매려고 기를 쓰는 거 같단 말야!”
그의 말 중에서 ‘아무리 나라도’ 부분에서 피식하고 웃음이 나왔다. 나는 기철이가 늘 철없고 생각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남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기철이도 알고 있는 것 같아서 철없다는 부분은 어쩔지 모르겠지만 생각 없다는 부분은 좀 수정해야 할 듯했다. 그리고 그런 면에서 내 태도도 바뀔 필요가 있었다.
솔직히 아무 설명도 없이 끌고 다닌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런 것이 얼마나 불안할 것인지 굳이 물어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왜냐하면 알 수 없는 이 상황이 나 역시 너무도 불안하고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조용히 있는 것은 물어볼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기철이는 달랐다. 물어볼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나였다.
그렇기에 나는 대답할 의무가 있었다. 위험을 함께하는 사람으로서.
“아까 그 길…….”
생각을 조금 정리하기 위해 뜸을 들였다.
그러는 사이 기철이는 내 말을 듣는 건지 안 듣는 건지 주위를 뚤레뚤레 둘러보더니 앉을 만한 돌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중에 그리고 시작 단계에서부터 산만해져 버린 단 하나뿐인 청자가 불만스러워서 말을 할까 말까 다시 고민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단 그 상대가 기철이라는 생각에 참기로 했다. 나도 주변에 앉을 자리를 찾아 앉고는 말을 이었다. 어떻게 변할지 모르는 이런 상황에 좀 쉬어 두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듯했다.
“아까 그 길…….”
말의 서두가 반복되었지만 기철이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물론 내 말에도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했지만 늘 따발총 같던 기철이가 조용히 있는 것만으로 내 말을 경청하려는 태도로 보기에는 충분했다.
“오솔길이었지. 그런데 사람 손이 닿은 것으로는 안 보였어. 그보다 네가 그랬지? 왜 먼저 도망간 친구들이 보이지 않냐고. 갈림길도 몇 개 없었다고 했잖아. 그럼 그 많은 아이들 중에 한 명이라도 만나야 했어. 여자애들이야 우리보다 체력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니까 어딘가에서 쉬고 있는 남자애들이라도 만났어야지. 그런데 우리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지. 그 이유 생각해 봤어?”
“글쎄. 더 멀리 갔거나 우리와 다른 길로 갔거나……. 솔직히 우리 좀 많이 늦게 도망치기 시작했잖아.”
“그래, 그랬지. 하지만 다른 이유가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해 봤어?”
“어? 무슨 이유?”
“이 세상에 우리가 만났던 그 새, 아니 괴물…… 만 있을까? 다른 괴물은 없을 까? 아니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지 않을까?”
“무슨 소리야?”
“아까, 그 오솔길…….”
다시 말은 원점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또 다시 생각을 정리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언젠가 들어본 적이 있어. 동물은 자기가 다닌 길로만 다닌다고. 그래서 사냥꾼들은 산속에서 특별한 도구를 사용하지 않고도 동물이 어디 있는지 쉽게 찾는다고 해. 그런데 그 오솔길은…… 사람이 만든 것 같지 않았어.”
“어떻게 알아?”
“그냥 직감적으로. 인위적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 인간은 길을 만들 때 인간에게 필요 없는 자연물은 제거하면서 좀 더 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지만 동물은 자신에게 필요 없는 자연물은 피하면서 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거든.”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다.”
“그럼 그냥 직관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고 생각해줘. 하지만 더 확실한 게 있었어.”
“…….”
이번에는 기철이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무엇인가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네 뒤에 검은 흙더미가 있었어. 그게 그냥 눈에 들어 왔어. 그런데…… 그 속에 플라스틱으로 만든 빨간색 하트 모양의 핀이 섞여 있더라.”
“에? 그게 뭐야? 여자애들이 도망가면서 흘리고 갔겠지. 넌 별걸 가지고.”
기철이의 말을 끊고 말했다.
“아니 그게, 묶여 있었어.”
“뭐가?”
“머리카락이…… 뭉텅이로…….”
나는 파랗게 변한 기철이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검은 흙더미가 진짜 흙더미였는지 의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마음속으로만 존재하던 결론이 말이 되어 나오자 마음속에 담고 있을 때보다 더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로는 하나도 알지 못한 것 같은 심란한 기분이 되었다.
진정하기 위해 배낭 안에서 새 생수통을 꺼내 조금 마신 후 기철이에게 내밀었다.
기철이는 생수통을 멍하게 바라만 볼뿐 받아들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강제로 그의 손에 물통을 쥐어 주고는 한참 동안이나 배낭 안을 뒤적거렸다.
처음에는 정리 되지 않은 나의 마음 때문에 아무 의미 없이 뒤적거렸고 나중에는 기철이의 발에 감아줄 알맞은 천조 각을 찾기 위해 뒤적거렸다.
생각보다 이렇다 할 것이 없어서 한참동안이나 뒤적여야 했다. 붕대도 있었지만 얇아서 오래 동안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러다 눈에 띈 것이 있었다. 바로 노란 색의 압박붕대였다. 압박붕대는 재질이 튼튼하고 질겨서 수건보다 더 좋을 터였다.
붕대와 함께 솜과 소독약 등등을 꺼냈다. 그리고 기철에게 내밀었지만 멍한 상태의 녀석은 내손을 슬쩍 보기만 할뿐 그저 멍할 뿐이었다.
“발.”
나는 무뚝뚝하게 다시 슬쩍 다시 내밀어 봤다.
“어…….”
여전히 멍하게 대답만 했다. 그 상태를 만든 것은 내 충격 발언 때문이기 때문에 녀석을 탓할 수 없었다.
결국 녀석의 발을 치료하는 것은 또다시 내 역할이 되었다. 어쩔 수 없었기에 좀 비위가 상했어도 참기로 했다.
대신 마음속으로,
‘이것은 김태희 발, 이것은 김태희 발.’
을 중얼거렸다. 암시가 잘 먹힌 건지 정말 발이 예뻐 보였다. 순간 그 생각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되어 고개를 흔들어 망상을 털어냈다.
그리고 그냥 돌덩이로 생각하기로 했다. 왠지 이런 상황에서 발 때문에 고민하는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졌다.
치료하려고 살펴본 기철이의 발은 생각했던 것보다는 심각하지 않았다. 발바닥이 까져서 수포가 생기고 그게 터지면서 진물과 피가 조금 났던 것이었다.
그래도 치료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소독을 하고 약도 발라 주었다. 그리곤 일단 수건으로 감고 그 위를 압박 붕대로 감싸는 형식으로 다시 덧감아 풀어지지 않게 했다.
잘못하면 피가 안 통할 것 같아 적당히 감고는 기철이를 바라보았다.
기철이의 눈이 완전히 풀어져 있었다. 여전히 물은 그냥 손에만 쥐어져 있었다. 이렇게까지 충격 받을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데 꽤 큰 충격이었던 모양이었다.
“그 검은색 흙더미…… 어떻게 생긴 거였냐?”
“글쎄? 내 허리 정도 오는 높이로 그냥 보기엔 평범한 흙더미처럼 보였지?”
“나, 나 말야. 거기에 내가 기대거나 하진 않든?”
멍한 눈빛에 기철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솔직히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잘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 모르겠기에 그냥 조용히 있었다.
“혹시 내가 그 흙더미 가지고 장난을 쳤다거나…….”
“뭐……?”
나는 이상한 쪽으로 흐르는 질문에 반문할 할 수밖에 없었다.
“나, 아까 막 흙 가지고 놀고 그랬거든. 근데 혹시 그게 그렇고 그런 거면 어떻게? 무서워이!”
나는 이상한 쪽으로 고민이 진행되고 있는 녀석에게 장단을 맞춰줄 정도로 섬세하진 않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사람이 죽고 사는 이 상황에서 걱정하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것에 한심함을 넘어 분노를 느끼고 있었다.
“네가 걱정하는 게 그거냐?”
녀석에게 꿀밤을 날렸다.
“야, 아프잖아. 나한테는 심각한 거라고. 너라면 괜찮겠냐?”
꿀밤을 한 대 더 날리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나라면…… 괜찮은가……?’
괜찮지 않았다. 꿀밤을 올리려고 든 손을 무안해하며 주저하며 내렸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가자.”
거칠게 배낭을 짊어졌다.
“어디로?”
기철이는 멍하게 질문했다.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채였다. 나는 기철이를 내려보고 있었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 기철이의 표정이 주눅 들며 나와 마주치고 있던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좋은 표정은 아니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기철이가 했던 질문은 계속해서 내 자신에게 하고 있었던 질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 밖에 낼 생각은 없었다.
그 질문의 대답이 어떤 것인지 너무도 뻔했다.
나라고 기철이와 다를 리 없었다.
나에게도 이상한 나라였고 이런 일은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다른 결론이 날 리 없었다. 그것을 채근하듯 물어 온다면 짜증 외에 더 말해줄 것이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