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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월드 오브 쉐도우 1권(8화)
4. 포식자와(야생동물과) 인간의 차이(1)
얼마만큼 달렸는지 생각도 안날 정도로 달렸을 때였다. 오른쪽 손목이 뻐근하게 당겨오기 시작하자 그때서야 누군가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많은 일들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어서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아니 생명이 위협당하는 순간에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이 있을 리가 없었다.
“하아…… 하아…….”
내 손에 매달려 있던 사람은 허리를 무릎까지 숙인 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멍한 머릿속을 헤집어 잠시 동안 생각한 후에야 그 사람이 ‘기철이었지.’하고 떠올릴 수 있었다. 그만큼 그 존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무리하게 탈출시키고 끌고 오다시피 한 사람을 잊어버리고 있었다는 사실이 좀 미안해졌다.
기철이의 손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으로 머리를 긁적임으로 그 미안함을 표현했고 그게 끝이었다.
그것 말고는 뭐라 해줄 말도 없었다. 그러다 내려다본 시선 끝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바로 발이었다. 기철이는 신발을 신고 있지 않았다.
그제야 여기까지 어떻게 도망 왔는지 떠오르기 시작했다. ‘차 안에서의 밀고 당기는 그 과정에서 신발이 없어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발이 벗겨지고 챙겨올 시간도 없을 만큼 온 힘을 다해 도망가지 못하게 막고 있었을 그 차 안의 검은 그림자들을 떠올리니 분노가 끌어 올랐다.
그 사건의 당사자였던 기철이가 불쌍하게 느껴졌다. 여전히 잡고 있던 오른손을 끌어당겨 가까운 바위에 앉게 했다. 얼마나 지쳐 있는지 기철이는 쓰러지는 듯이 주저앉았다. 배낭을 뒤져서 수건 하나를 꺼내 기철이에게 내밀었다.
“땡큐.”
내가 내만 수건을 들더니 땀을 닦기 시작했다.
“그게 아니라…… 발!”
나는 녀석의 너덜너덜해진 양발을 가리켰다.
“아하, 그게 뭐?”
기철이는 만사가 귀찮다는 표정으로 말해서 나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결국 크게 한숨을 쉬고는 직접 해주기로 결정했다.
일단 땀으로 축축해진 수건을 기철이 손에서 거칠게 빼앗아 길게 조각을 냈다.
철이의 발바닥은 아무리 부드러운 흙이었다고 해도 심하게 달리는 바람에 까져서 피가 나고 있었다. 태어나 문명의 이기에 길들여진 탓에 한 번도 맨발로 달려본 적이 없는 연약한 발바닥이었던 것이다.
일단 발에 묻은 흙을 거칠게 털어 냈다. 아플 것 같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 써줄 정도로 내 손이 섬세하진 못했다.
“야! 아! 아퍼, 아퍼.”
아프다고 징징 대긴했지만 평소에는 쓸데없이 활발한 기철이가 축 쳐져선 내가 하는 대로 얌전히 앉아 있었다.
나는 기철이의 발을 붕대로 감듯이 감아주었다. 물론 신발 보다 못하겠지만 그것이라도 없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감싸는 것을 끝내자 내 솜씨라고 할 수 없게 매우 그럴 듯하게 보였다.
“괜찮냐?”
기철의 물음이었다.
“뭐가?”
무엇을 묻는지 몰라서 다시 되물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보다 훨씬 힘들어 보이는 기철이가 내가 묻고 싶었던 걸 당연하게 물어오자 좀 퉁명스런 답변이 나왔다.
솔직히 그런 물음보다 좀 더 다른 말이 나올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시커먼 사내자식의 발까지 주물러 가면서 이렇게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 냈다면 말이다.
“헤헤! 야아! 똑같이 뛰었는데 왜 너는 그렇게 멀쩡하고 나는 이렇게 파김치가 되어야만 하는 거냐? 네가 생각해 봐도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어느새 기운을 되찾은 기철이가 평소와 같이 쓸데없이 헤헤거리며 건강한 어조로 빠르게 말을 이었다.
“별로!”
“뭐가? 너는 하나도 안 지쳐 보이고만. 우리가 몇 시간이나 달렸지? 여기는 어딜까? 아까하고 별로 많이 온 것 같지도 않다. 여기 산이야? 들이야? 산일 것 같은데. 다른 애들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하고 다른 길로 간 걸까? 우리가 달려오는 데 갈림길도 몇 개 없었는데 어차피 이쪽으로 왔을 거 아냐? 다른 애들도 우리처럼 달려서 도망갔으면 여기쯤 같이 만나야 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아무도 없지? 네가 생각했을 때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냐?”
숨도 안 쉬고 말을 늘어놓는 기철이 때문에 달릴 때보다 훨씬 숨이 가빠오는 것을 느꼈지만 피로가 이제야 몰려오는 것 같아 이렇다 할 대꾸를 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많은 질문 중에 하나정도는 답해줘야 한다는 의무감이 무럭무럭 자라나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글쎄.”
내가 대답해 놓고도 좋은 대답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솔직히 그가 쏟아 놓은 많은 질문들에 대한 모든 대답은 이 말 한마디 밖에 해줄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도 이곳은 처음이고 아이들의 행방을 알 리 없으며, 도망가는 데만 신경 쓴 나머지 갈림길이 얼마나 있었는지 파악할 정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사이에 갈림길까지 둘러볼 여력이 있었다는 기철이가 참 대단하게 느껴졌다. 나보다 더 지쳐 있는 기철이의 상태가 납득이 갔다.
내가 달리는 데 모든 기운을 다 쓰고 있는 때에 기철이는 아마도 별걸 다 챙기고 있었을 것이었다.
기철이의 발에서 겨우 시선을 떼고는 바위를 바라보았다. 거기에 앉아야겠다고 머릿속으론 생각했지만 1초 만에 포기하고는 기철이 바로 앞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깨끗한 곳을 찾아 움직이기에는 너무 지쳐 있는 탓이었다.
그래도 마음을 푹 놓을 수는 없어 긴장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푹신한 바닥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아까보다는 훨씬 아래쪽인 듯 나무도 더 무성하게 덮여 있었다.
여기가 어디인지 짐작하려 했지만 자연에 대한 지식이 너무나 부족했다.
“근데 여기 좀 이상하다. 우리 아빠랑 여기저기 다녀 봤지만 진짜 이런 나무는 처음 봐. 기둥이 저렇게 두꺼운 나무는 우리나라에서 자라기 힘들거든. 그리고 침엽수도 아닌 것이 활엽수도 아닌 것이 나무 잎이 너무 크잖아. 잎은 야자순데 기둥은 침엽수처럼 단단한 게 말이 되냐?”
속으로 ‘그럼 아까 봤던 그 새는 우리나라 새냐?’ 하고 대꾸하려다가 그만두었다. 농담으로 말하기에는 아직까지 충격이 너무 큰 탓이었다.
당연한 말을 꺼내는 것 같은 기철이의 말에 새삼스럽게 주위를 둘러보게 되었다. 정말 그랬다. 여기는 내가 살던 곳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시 땅으로 시선이 갔다.
그리고 기철이와 함께 달려 내려왔던 길을 돌이켜 보았다. 어느 샌가 낭떠러지 길이 끝나고 다니기 쉬운 곳으로 길을 만든 듯한 자연스러운 오솔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른 곳은 나무가 무성히 자라나 있는데 완만한 곳으로 길이 나 있듯 나무가 없었고 여러 사람이 자주 밟아놓은 것처럼 길에는 풀이 드문드문 나있었다.
고운 흙이 깔려 있었지만 인간이 인위적으로 깔아 놓은 것 같지 않았다. 길 바깥쪽도 부드러운 흙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목적에 의해 생겼다기보다 동물들이 만드는 오솔길 같은 투박한 느낌이 강했다.
갑자기 무서운 생각들이 떠올랐다.
‘이런 곳으로 다닐 인간이 있을 것인가?’
물론 우리 세상과 다르니 정말 무시무시한 인간이 다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인간이 우리에게 호의를 보일 것인가 하는 것은 별도의 문제였다. 결론이 어찌되었든 부정적으로만 흐르는 생각이 멈추질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여기에 도착하자마자 만난 것은 귀여운 얼굴을 가진 새였다. 그리고 그 새는 그 순진한 얼굴로 아무렇지도 않게 인간을 동강내고 먹어 치웠던 것이다.
그 광경을 생각해 내자 두려움보다 역겨움이 몰려왔다. 눈앞에 떨어진 주인과 분리된 팔 한 조각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자 지쳐 있었던 것도 잊어버리고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 멀리 떨어지기 위해 달려 나가서는 뱃속에 있는 것을 게워내기 시작했다.
앞으론 고기처럼 생긴 것은 절대 못 먹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니 고기를 먹는 생각만으로도 불편해지는 느낌이었다.
조금 헛구역질을 하고 있자 어느새 다가온 기철이가 다정하게 내 등을 두드리고 있었다. 등을 두드리는 기철이의 손길을 느끼며 혼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이야! 너두 힘들었구나아∼! 그래, 그렇겠지. 인간이라면 힘들지. 그렇게 오랫동안 달렸는데 힘든 게 당연하지 않겠냐. 그래, 그렇게 토해서 편해진다면 마음껏 토해라. 에궁, 너 아침에 햄 먹었냐? 아! 너두 아침에 햄 먹었구나. 나두 아침에 햄 먹었는데. 너희 엄마도 김밥 싸주셨냐? 나두 김밥 쌌는데. 우리 엄마는 내가 아직도 앤 줄 안다니깐. 어떻게 김밥 안에 햄을 두 줄씩 넣을 생각을 하냐! 물론 내가 어릴 땐 햄을 엄청 좋아했지만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진 않거든. 지금은 조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왜냐? 야채와 고기의 조화가 김 안에서 밥을 만나 사랑스럽게 어울려지면서 진정한 김밥의 맛을 내는 거거든. 거기서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아야 진정한 김밥인거야. 거기에 새콤달콤한 단무지가 곁들여져야 진정한 김밥이라고 할 수 있지. 안 그러냐? 그게 캘리포니아 롤이나 스시하고 다른 점이라고. 그것들은 조화가 없어서 우리의 미묘한 미각을…….”
녀석의 끊임없는 음식에 대한 의견과(특히 햄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리드미컬한 등을 두드리는 손길에 정말 원없이 오바이트를 했다. 아까 둘이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깨끗하게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더 이상 나올 것이 없게 된 후에야 기철이의 음식 이야기가 끝이 났다. 그리고 나의 인내심도 끝을 보였다.
“그만해!!”
벌컥 짜증을 내며 그의 두드리는 손길을 뿌리쳤다. 더 이상 나올 것도 없었지만 더 나와서도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기철이가 움찔하며 표정이 변하는 것이 느껴졌다. 미안해하는 듯했다. 하지만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나도 왜 미안해해야 하는지 별로 설명하고 싶지는 않았고 설명한다 해도 알아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조금쯤은 계속 미안해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들어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정말로 나는 그의 햄 이야기가 괴로웠던 것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서 배낭 속에 들어 있던 물통을 꺼내 입을 헹궈냈다.
여전히 미안한 듯 기철이가 자신의 손을 만지작거리며 어물쩍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좀 불쌍해졌다. 화해할까 해서 손에 들고 있는 물통을 기철이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폴짝폴짝 뛰어오더니 내 손에 있는 물통을 부끄러운 듯이 받아들었다. 한 대 때려 주고 싶은 귀염질에 물통을 쥐고 있던 손이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렸다.
손을 내민 것을 급히 후회 했지만 맛있게 벌컥 벌컥 물을 마시기 시작하자,
‘저 녀석도 마음고생이 심하겠구나!’
하는 딱한 마음이 들어 그냥 피식 웃을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기철이 뒤에 있는 커다란 검은 흙더미에 시선이 미쳤다.
왠지 다가갈 엄두가 나지 않아 제자리에 그냥 서서 잠시 그 흙더미를 살펴보듯 바라봤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특정한 부분에 눈길이 갔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되자 다시 뱃속에 있는 것이 울컥 올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더 이상 나올 것이 없는지 숨을 크게 쉬고 침을 삼키자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뱃속에서 나올 것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자 역겨움보다 두려움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