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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9화
11. 잠 못 이루는 밤 (2)


호진이 역삼동에 간신히 도착하자, 연희는 열쇠를 한참 동안 부스럭대며 찾았다. 찾고 나서도 열쇠 구멍에 제대로 꽂지 못하고 계속 달그락거렸다. 아아, 이것 참. 이것 참……. 연희는 뒤에서 기다리고 있는 사내를 계속 돌아보며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호진이 그의 손에서 열쇠를 받아 문을 열었다.
연희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굵은 손가락이 가물가물하는 눈자위를 세게 문질렀다.
호진은 문가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넓고 휑한 집은 온통 도깨비 소굴이다. 온 집 안은 팽개쳐 놓고 간 가구와 잡동사니로 어수선했다. 선 사장이 심술부리고 갔다더니 정말이었나 보다.
새로 들여온 듯한 킹사이즈 침대와 큼직한 옷장만 안방 한쪽에서 생경하게 반들거렸다. 침대에는 아무 무늬도 없는 이불이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다른 곳은 컨테이너 사무실보다 나을 게 없었다.
연희는 무겁게 몸을 일으켜 방바닥에 지저분하게 굴러다니는 것을 발로 밀어 치웠다. 우물쭈물하는 낯이 붉었다. 호진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사장은 최근 자신 앞에서 자잘한 실수가 많았고, 웃고 넘길 일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유를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했으나, 호진은 의도적으로 생각을 덮었다. 무의식은 감정을 캐지 말라 말하고 있었다.
“음. 이 실장. 미안…… 미안한데 커피 한 잔만 타 주고 가시겠습니까? 할 일이 남았는데 졸려서 정신이 없습니다.”
뭐가 어째? 호진은 기가 막혀서 그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이렇게 취하셨는데 커피는 무슨 커핍니까. 주무셔야 합니다.”
“아, 내, 내일 매장 매니저들 면접일정 연락……. 오늘 이력서랑 최종 서류 봐야 합니다. 은행에도 가 봐야 하고. 왜 지점장이 보류시키라고 했을까요? 왜 최종 결재가 안 나……. 만나 주지도 않고. 아, 제기랄. 돈이 왜 이렇게 없어……. 조금만 더 버티면 현금 도는데, 아 빌어먹을…….”
역시 취한 와중에도 그 걱정이다. 연희의 자금 사정이라면 뻔했다. 한 발이라도 삐끗하면 이젠 선우순 사장 대신 연희가 같은 꼴을 당하게 될 것이다. 쉴 때조차 마음 편히 쉬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마음 편히 쉬라는 건 애초부터 무리였다.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좀 씻고 나오겠습니다.”
취한 사내는 그래도 점퍼를 벗어 용케 모양을 잡아 옷걸이에 걸고, 양말을 벗어 욕실의 바구니에 보이지 않게 넣었다. 호진은 그의 발가락을 바라보는 순간 어깨를 움찔했다.
나무뿌리처럼 넓게 벌어진 발가락은 마디가 굵고 옹이가 져 있었다. 바오밥, 나의 바오밥. 굵은 바오밥의 뿌리에도 툭툭 마디가 불거져 있었다. 며칠 전 술김에 혼자 뇌었던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심장이 쿵쿵 무겁게 울렸다.
갈아입을 옷을 들고 망설이는 연희를 보고 호진은 침실 밖으로 나갔다. 그는 연희가 소탈하긴 하지만 도를 넘을 정도로 털털한 성격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사업가가 아닌 개인으로서의 윤연희는 오래 묵은 열등감을 끌어안고 사는, 조심스럽고 가리는 게 많은 사내였다. 잠시 현기가 일어 머리를 짚던 호진은 연희의 부탁을 떠올렸다. 커피를 타 달라 했다.
주방 역시 무언가 요리해 먹을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저분한 잡동사니가 발에 치일 만치 굴렀지만 정작 먹거리는 한참을 찾아도 눈에 띄지 않았다. 커피포트와 회사에서 갖다 놓은 듯한 커피믹스 박스는 있었지만 다른 주방기기는 없었다. 새로 들인 듯 반들거리는 냉장고에도 사 온 지 며칠 된 우유 한 팩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호진은 방으로 돌아가 욕실 앞에서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지금 커피 드시면 속 버리실 텐데요. 잉글리쉬브렉퍼스트…… 홍차가 있는데, 차라리 이걸 진하게 끓여 드리겠습니다. 카페인 효과는 커피하고 비슷할 겁니다.”
샤워를 대충 마쳤는지, 연희가 급히 배스가운을 입으며 욕실 문을 열었다.
“홍차……가 맛이 좋습니까? 이 실장 매일 마시는 게 홍차 맞습니까?”
“맞습니다. 커피하고 다른 깊은 맛이 있습니다.”
연희는 별것 아닌 일로 이마를 찌푸린 채 한참 생각했다.
“이 실장은 홍차 좋아합니까?”
“예, 좋아합니다, 특히 밀크티로 마시는 걸 좋아합니다.”
피곤에 잠긴 커다란 눈이 호진의 얼굴을 가만히 훑더니 갑자기 벙긋 웃는다.
“아, 예. 그러면 홍차로 해 주십시오. 저도 우유 잔뜩 넣어서.”
홍차에 우유 넣는 것을 보고 음식 갖고 장난하냐고 묻고서 창피해하던 사내가 조금은 발전했다. 그러고 보면 호진은 연희가 커피 말고는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홍차 한잔 마시는 게 무슨 중차대한 일이라고 이마에 주름까지 잡아 가며 고민을 할까. 그래 놓고 웃기는 또 왜.
하지만 어쨌든 저 사람이 웃는 모습을 보니 흐뭇하고 좋았다. 호진은 차를 우리며 싱긋 웃었다.
잠시 후 호진은 손을 멈추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웃었는지 모르겠다.

호진은 우유를 넣은 홍차 두 잔을 들고 들어오다 입을 벌렸다. 은사로 화려한 패턴이 수놓인 짙은 남색 실크 파자마를 입은 연희가 욕실 앞에 서서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고 있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집에서 저런 옷을 입고 있단 말인가?
낮에 지독하게 숫내를 피우던 사내는 지금, 화려하면서도 무겁고 나른한 분위기를 쏟아 내고 있다. 피곤이 가시지 않은 눈꺼풀이 움직이자 긴 속눈썹에 맺힌 물방울이 눈 속으로 스며들었다.
저 사람, 저렇게 길고 짙은 속눈썹을 갖고 있었나?
굽슬굽슬한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이마와 뺨을 타고 턱에서 맺혀 발 위로 떨어졌다. 굵은 다리와 어깨의 굴곡이 부드러운 옷감에 감겨 더 확연하다. 수건을 쥔 손으로 머리카락을 문지를 때마다 팔의 근육이 솟았다 풀렸다 꿈틀거렸다. 그의 미세한 움직임조차 프레임으로 빼둔 영상 사진처럼 명료했다.
호진은 입을 벌린 채 허, 흡, 짧게 숨을 뱉었다. 연희가 젖은 머리카락을 뒤로 걷어 낸다. 물기가 남은 얼굴이 싱싱해서 숨이 턱 막힌다. 연희는 호진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하고 미간을 찡그렸다.
“왜 두 잔입니까?”
“아, 도와 드릴 게 있으면 해 놓고 가겠습니다.”
호진의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연희의 목소리가 갑자기 콱 올라왔다.
“호진 씨! 과로사하려고 작정했습니까? 얼른 들어가세요!”
“혼자 하시는 것보다 나을 겁니다. 저 술 안 마셨습니다. 내일 사장님께서 처리하실 일도 많고.”
호진은 간신히 웃어 보였다. 크고 깊은 눈동자가 호진의 눈을 가만히 응시했다. 검고 짙은 동자는 가늘게 흔들리고 있었다. 호진은 깜박거리지도 않고 그의 시선을 받았다. 웅웅웅, 목소리가 조금 더 강경해졌다.
“돌아가십시오, 호진 씨.”
채근하는 목소리가 낮게 흔들거렸다.
“마치시는 거 보는 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책상도 없습니다.”
“책상 필요합니까? 의자만 있으면 됩니다.”
연희는 눈썹을 찡그리고 한참 침묵했다. 호진은 조용히 기다렸다. 숨 막히는 시간이 지난 후 연희는 벌그데데 변한 목덜미를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무슨 부하 직원이라는 사람이 고집이 이렇게 셉니까? 사장 말도 이렇게 안 듣다가 나중에 해고당하면 어쩌려고.”
“강남 학원가에서 저 인기 많을 거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돌아가세요. 제발 부탁입니다. 더 늦으면 가라고도 못 합니다.”
덩치 큰 사장의 요청은 절박하게 들렸다. 호진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저를 꼭 쫓아내려는 이유가 있습니까?”
“아니…… 아닙니다. 쫓아내다뇨.”
연희는 깊이 한숨을 쉬었다. 깊은 날숨에는 감정이 짙게 실렸다. 기꺼운 것도 같고 괴로운 것도 같았다.
결국 연희는 호진에게 작은 보조 의자를 밀어 주고 자신은 침대에 주저앉아 헤드에 등을 기대었다. 거북하고 편치 않아 보였지만, 결국 포기한 듯 커다란 눈을 끔벅끔벅하더니 우유가 들어간 홍차를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층별 매니저들의 지원 서류들을 분류하고 추려 두는 일이었다. 직급이야 과장급이라지만 매장에서 한 분야를 총괄하는 책임자를 뽑는 것이기에 경력 사항 검증이 중요했다. 간단한 기준으로 일차 서류 심사는 끝냈고, 2차로 거르는 과정이다. 여기서 통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연락을 넣어 개별 면접을 보게 될 것이다.
특이한 경력이군요. 이런 이력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내용은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할 것 같은데요. 이 매출액은 아무래도 허위 같은데, 내일쯤 체크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호진이 말하면 연희는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뜨고는 음, 그래요, 그래요, 그렇군요, 하며 웅얼거렸다. 워낙 진한 커피에 단련이 되어 홍차의 카페인 정도는 효과가 없는 모양이다. 그래도 용케 곯아떨어지지 않고 버티고 있다.
얼추 솎아 놓으니 2시가 되어 가고 있었다. 연희는 여전히 반쯤 취한 상태로, 몹시 피곤한지 가끔 꾸벅, 고개를 박았다.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에 느른하게 기대 있는 덩치 큰 사내를 볼 때마다 심장이 둥둥, 북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긴장한 게 아니다. 홍차 때문일 거다. 밤에는 홍차 따위 마시는 게 아닌데.
정신을 산만하게 하는 저 빌어먹을 은사의 패턴. 끝없이 돌아가는 아라베스크. 몸에 부드럽게 휘감긴 실크가 드러낸 굵고 둔중한 육체의 선. 거대하게 꿈틀대는 바오밥의 선과 닮았으면서도 물결치는 천의 질감 덕에, 그것은 지독하게 육감적이다.
호진은 시선을 돌렸다. 며칠 전 간신히 잠재운 혼란이 다시 부옇게 일어났다. 징징징. 현기와 두통이 함께 일었다. 속에서 열기가 폭폭 치미는 것도 같고 이마로 끈끈하게 진땀이 흐르는 것도 같다. 맘이 안 좋은 건지 몸이 안 좋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서류철을 정돈해 놓은 호진이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들어가겠습니다. 사장님.”
“몇 십니까……. 아, 2시 반? 늦었어요. 제기랄, 이럴 줄 알았어. 이럴 줄. 너무 늦어서 이거……. 자고 가세요. 여, 여기서.”
연희는 엉거주춤 일어나 장을 열고 새로 이불을 꺼냈다.
“제 침대에서 주무세요. 내가 바닥에서 자면 됩니다. 다른 방들이 먼지 구덩이라.”
“사장님!”
“하여간, 여기서 자고 가요. 내 차 운전해 온다고 당신 차, 회사에…… 놓고 왔잖습니까……. 지, 지금 이 시간엔 택시도…… 잘 없어요. 택시 교대시간이 새벽인 거 같은데. 어어…… 내, 내가 아침에 술 깨면 집에 데려다줄게. 가서 하루 쉬어요.”
연희는 아까와는 달리 이제 자고 가라고 고집이다. 졸음기가 슬쩍 가신 눈에 어떤 열렬한 감정이 스멀스멀 기어 나온다. 술기운과 피로에 잠식당한 사내는 감정과 욕구에 맞설 기력이 없어 아까보다 훨씬 무방비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거절하는 게 맞다. 다른 방을 치우고 잘 수도 있고, 택시를 타고 들어가도 괜찮고, 정 급하면 본가의 기사를 불러도 상관없을 것이다.
하지만 호진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짧은 시간 동안 심장이 폭발할 정도로 부글거렸다. 속에서 누군가가 충동하며 속살거리기 시작한다. 그래. 그의 말대로 해. 너도 피곤하지 않아? 저 사람이 내게 무슨 흑심이 있어서 그러는 게 아니라니까. 그냥 피곤하니까 자고 가라는 것뿐인데.
호진이 고개를 젓지도 끄덕이지도 못하며 입술을 말아 넣고 있는 동안, 연희는 서둘러 바닥에 요를 깔고 자리를 잡고 앉았다.
“바닥에서 주무셔 본 적 없을 거 아닙니까. 난 바닥에서 자는 게 더 편해요.”
고개를 수그린 사내에게 흘러나온 낮은 목소리가 바닥에 습하게 스며들었다. 진한 감정이, 간절함이 있었다. 미친 듯이 왕왕대던 호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툭, 끊어졌다. 호진은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샤워를 마치고 연희가 내준 잠옷을 펴 본 호진은 난감했다. 애초에 잘 때는 속옷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입지 않지만, 물론 여기서 그러기는 곤란했다. 하지만 이게, 좀 어지간해야지.
짙은 자주색에, 연희가 입었던 것과 비슷한 디자인이 이번엔 금사로 둘렸다. 아라베스크 패턴. 끝없이 돌아가는 갈고리 모양의 원들. 매끈한 실크의 질감, 숨 막힐 정도로 농밀한 자주색. 저 사람이 이 잠옷을 입고 있으면 퍽 볼만하겠는데. 생각하던 호진은 갑자기 얼굴을 찡그리더니 머리를 확확 흔들었다.
질질 끌리는 바짓단을 어쩌지 못하고 헐렁한 상태로 주저하며 나타난 호진을 보자 연희의 입술과 눈동자가 한꺼번에 벌어졌다. 하지만 연희는 한참 동안 넋을 빼고 바라보았던 호진과 달리 냉큼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꾹 감아 버렸다. 어찌나 꽉 감았는지 콧등에 주름이 두세 겹 잡혔다.
“주무십니까?”
“잡니다.”
“아, 예. 주무시는군요.”
호진은 혼자 웃었다. 목에서 울리는 웃음을 참아 보려니 크륵크륵, 고양이가 목을 긁는 듯한 소리가 났다. 연희는 여전히 눈을 꽉 감은 채 누구 들으라는 듯 중얼거렸다.
“잡니다. 정말.”
호진의 웃음이 가만가만 퍼진다. 연희의 커다란 등이 더욱 움츠러든다. 한참 만에야 연희가 이불 속에서 목쉰 소리를 냈다.
“다음엔 손님 방 하나 치우고 침대 들여놓겠습니다. 이런 일 없을 겁니다.”
호진은 대답하지 않고 조금 더 길게 미소했다. 연희는 여전히 혼잣말하듯 궁시렁이다.
“내가 원래 이렇게 지저분하진 않은데, 이 집, 혹시 팔게 될지도 몰라서 아직 정리 안 시킨 겁니다. 그리고 어차피 나중에 리노베이션 할 거면 지금 청소해야 소용도 없고…….”
저런, 저런. 지저분한 사람으로 보일까 봐 어지간히 신경 쓰이는 모양이다. 그의 변명에 결국 호진은 고개를 돌리고 키들키들, 소리 내어 웃었다.
호진의 웃음에 연희가 한쪽 눈을 실눈으로 뜨고 눈동자를 돌렸다. 호진이 헐렁한 잠옷을 입은 채 이불을 휘감고 있는 모습을 본 사내가 다시 어깨를 움찔 떨며 긴장했다. 시선이 다시 반대쪽으로 돌았다. 호진은 그의 종잡을 수 없는 반응이 의미하는 바를 헤아려 보려 했으나 확실하게 짐작할 수는 없었다.
“제가 내일 사람 보내서 여기 정리하라고 하겠습니다, 사장님.”
“어, 이 실장은 내일 나하고 은행 돌아야 해요……. 명동에 가 볼까. 아냐……. 혹시 이 실장, 투자할 만한 사람 아는 사람 있어요? 한 500억 정도? 허허, 참 간도 크네 누군지. 그 정도만 있으면 딱 좋겠어. 음…… 음, 지금 집 정리가 급한 건 아니고, 리노베이션을 해도 나중에 여유 있을 때……. 서현이도 데려와서 봐야 하고……. 걔는 자기 취향도 확실하고, 또 가끔 자고 간다고 할지도 모르니까.”
“서현이가 누굽니까?”
한참 동안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호진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연희의 넓고 미끈한 이마에 주름이 조금 잡혀 있었다. 하지만 끝까지 숨길 생각은 없는 듯했다.
“내 딸이에요. 열두 살짜리…… 아가씨.”
호진은 머리를 얻어맞은 듯 멍청해졌다. 딸? 윤연희 사장이 기혼자였던가? 지금 집 상태를 보니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 가족이 있다면 집을 이렇게 몇 달씩 방치해 둘 턱이 없다. 가족이 외국에 나가 있나? 내색을 하지 않아 전혀 몰랐다. 호진은 입술만 달싹거렸다.
젊은 사장은 호진과 동갑이라 했다. 올해 겨우 서른이다. 열두 살짜리 딸이라면? 고등학생 때 애가 생겼다는 말인가? 아, 그렇다면 고등학교도 마치지 못했다는 소문이 사실인가? 그게 이 일 때문이었나? 호진의 머릿속이 훅, 헝클어졌다.
윤연희 저 사람, 그렇게 방종하고 막된 사람으로 보지 않았는데.
“따님은…… 그럼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습니까? 여기 정리되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건가요?”
이런 걸 물어도 되나? 호진은 조심스러웠다. 연희의 대답은 점점 느려지고 가라앉았다.
“이혼……한 아내하고 같이 살아요. 가끔 일이 주에 하루 정도, 주말에만…… 같이 지냅니다.”
호진은 연희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혼? 이혼이라. 그랬구나. 연희는 눈을 감은 채 덤덤했다. 바닥에서 일어난 사내, 자랑스러울 것이 많지만 겁 많고 소심하며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내에게는 사적으로도 구절구절 숨은 사연이 있었나 보다.
이런 것까지 물으면 안 된다, 무례한 짓이다 뇌면서도 호진의 입에서는 얼빠진 소리가 흘러나갔다.
“무슨 일로 이…… 아,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호진이 급히 말을 주워 담자 연희는 누워서 손으로 눈을 덮은 채 비죽 웃었다. 술인지, 잠인지, 혹은 짙고 숨 막히는 분위기엔지 깊이 취한 사내는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말을 고해하듯 어름더듬 털어놓았다.
“괜찮습니다. 별것도 아닌데요, 뭘.”
“…….”
“3……년도 못 갔어요. 못나고, 무능하고, 볼 것 없는 남자였어……. 난 선자가 다른 남자한테 한눈판 거 욕할 수 없었어요. 3년이면 걔도 정말 많이 참은 거니까.”
호진은 대놓고 눈썹을 찌푸렸다. 이해할 수 없다. 열등감, 자괴감도 어느 정도까지라야 들어 주는 것이다. 못나고 무능하다? 사업가로서 신화에 가까운 행보를 이어 가고 있는 사람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지.
게다가 연희는 상식선에서 보아도 점잖고 신사다운 사람이었다.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권위 의식으로 사람을 무시하거나 허세를 부리는 일도 없었고 기형이라는 어린 소년에게 마음 쓰는 것을 보면 배려심도 있고 다감했다. 허우대 좋고, 얼굴도 사나이답게 잘생긴 축이다. 능력 좋고, 성격도 괜찮다. 어떤 여자든 그에게 혹할 법한데 못나고, 무능하고, 볼 것 없다? 남들이 들으면 사람 놀리는 줄 알 것이다.
“말도 안 됩니다. 대체 사장님이 무능하면 대한민국에 있는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살라는 겁니까? 헤어진 분이 무슨 마음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전 이해가…….”
아, 이런. 스치듯 지나간 어떤 생각에 호진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연희는 지금 자신의 사업적인 성공을 말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이런, 이런! 묻지 말아야 할 걸 물은 게 아닐까? 호진이 당황한 표정을 짓자 연희는 눈을 감은 채 싱긋 웃었다.
“……그냥, 아내하고 이상하게 그게…… 안 되더라고요.”
역시 그 문제였구나. 호진은 낯을 돌린 채 고개를 수그렸다. 그 문제라면 남이 이러니저러니 끼어들 수 없는 부분이다. 호진은 무렴해서 사과조차 하지 못하고 자리에 누웠다. 바닥에 누워 있던 사내는 등을 잔뜩 우그린 채 긴장하고 있다가 낮은 소리로 혼잣말처럼 중얼댔다.
“아, 이런 젠장. 내가 무슨 말을. 너무 마셨어…….”
호진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한참 동안 뒤척였다. 정말 취한 걸까? 아니면 취한 척 속마음을 흘려 보는 걸까? 그럴 이유가 없는데? 그의 심중을 헤아리려니 머리가 끝없이 뒤엉킨다. 그의 옷깃에서 보이는 현란한 아라베스크의 끝없는 물결이 눈앞에 계속 일렁인다.
왜 당신은 섹스가 안 되었지? 이십 대의 혈기 왕성한 사내가. 그리고 왜 그걸 나에게 말하는 건가? 사내라면 큰 치부가 될 만한 이야기인데. 당신 성격이라면 누구에게도 절대 말하고 싶지 않았을 텐데.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는 너무 넓고, 이불과 베개는 너무 새것이라 움직일 때마다 버석거렸다. 금사로 장식된 화려한 자주색 실크 파자마는 움직일 때마다 몸에 휘감겨 거북한 감촉을 만들어 냈다. 그가 입었을 옷, 입게 될 옷. 품이 크고 고무줄이 헐렁한 잠옷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다.
협탁에 놓인 사진 속에 있는, 노란 유치원 모자를 쓴 아이가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눈이 작고 얼굴이 둥그런 계집아이는 화려한 옷을 입고 한껏 새침했다. 사진이 거슬렸고, 그가 한 말이 거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