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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20화
11. 잠 못 이루는 밤 (3)
왜 저렇게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내와 섹스가 안 되었을까? 아내가 지독하게 추한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도 그렇지만 미진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저 정도 사람이면 얼마든지 좋은 조건으로 재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그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단정하고 깔끔했고, 여직원들에게 추근대는 말 한마디 한 적도 없었다. 따로 만나거나 여자를 부르는 일이 없는 것도 확실했다.
……여자에 관심이 없나?
하긴. 이상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나한테 손닿는 것에 굉장히 과민하게 반응했잖나.
그럼…… 혹시?
호진은 실쭉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여긴 영국이 아니다. 한국에서 동성애란 길가에 치이도록 흔한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냉정한 생각과는 달리 시선은 저절로 아래쪽으로 꺾여 내려갔다. 눈을 감고 고르게 숨을 쉬는 사내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굵고 진한 눈썹이 새삼 길어 보인다. 큼직한 안구와 둔중한 턱선, 크고 선이 굵은 콧마루. 견고하고 단정한 얼굴이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았는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습하게 보였다. 그가 고르게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덮고 있는 얇은 이불자락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으으으! 잠든 사내가 기분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이맛살을 확 구기며 꿍꿍, 앓는 소리를 했다. 웅얼대는 소리는 의미를 알 수 없이 흩어졌다.
호진은 운동장만큼이나 너른 그의 침대 위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당신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지? 아까 내내 고민하던 대출 문제로 꿈속에서도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닌가? 호진은 조용해진 사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참 만에 호진은 이를 지그시 물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협탁에 켜 둔 작은 수면등이 깊이 잠든 사내의 얼굴을 노랗게 비추었다. 호진은 소리 나지 않게 그의 머리맡으로 가서 무릎을 접고 앉았다. 얼굴의 굴곡이 더 뚜렷하게 보인다.
당신, 대체 뭐야. 대체 뭔데 내 속을 이렇게 뒤집어.
두통이 끈질기다. 호진은 망연히 선이 굵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습한 머리카락이 베개에 약간 흩어져 있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더듬는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짓이야, 이호진! 이게 무슨!
그렇게 긴 세월 몸을 섞고 살았던 케빈에게도 한 번도 이런 흥분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심장이 미친 듯이 들뛴다.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카페인, 심장에 좋지 않은 차, 현란한 아라베스크, 이, 이 천박하기 그지없는 실크의 감촉. 매끄러운 실크 밑에서 연희의 근육은 느리게 움직였고, 호진의 피부 아래서 날뛰는 피는 펄펄 끓었다.
호진은 이를 물고 고개를 수그렸다. 입술 위로, 그의 머리카락이 머금은 습기가 옮겨졌다. 저 선이 뚜렷한 입술, 기가 막힌 각도로 올라선 선이 굵은 코, 입술에 물면 살집에 제법 느껴질 법한 큼직한 귀.
……당신은 왜 섹스가 되지 않았나.
제기랄, 호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움켜진 주먹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소리 나지 않게 욕실로 들어갔다. 제기랄. 여기서 이게, 이게 대체 무슨! 호진은 허리를 수그린 채 이를 물었다. 이마가 있는 대로 구겨진다. 숨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사이, 묽은 액체가 변기 안으로 주르르, 짧게 흘렀다.
밖으로 나온 호진은 속에서 들끓는 피가 간신히 잠잠해진 것을 깨닫고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섹스 파트너가 필요해. 욕구 불만에 시달린 게 틀림없다. 내가, 이호진이 이따위 얼빠진 짓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순간 호진은 눈썹을 가만히 꿈틀거렸다. 예전에, 집으로 불렀던 여자와 섹스에 실패했다. 침대 위에서 내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저 사람이었다.
제기랄. 섹스 파트너가 문제가 아닌 건가?
호진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크게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영국에서도 지독하게 피곤하거나 우울할 땐 발기가 되지 않았었다.
호진은 약간 편해진 마음으로 아래에 누운 사내를 다시 살펴보았다.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이 가끔 찡그려진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종종 나오는 표정이다. 낮에 짓눌리는 것으로도 부족해, 꿈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가? 하긴, 고민이 될 법도 하지. 나 같으면 아마 잠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 당신 같은 상황이라면.
500억. 그 정도 자금이 확보되면 1호점에서 현금 돌 때까지 넉넉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선네이션을 인수하는 게 출혈이 크긴 했다. 이번 공사에 들어간 자재비야 몇 달 미룰 수 있다 해도 작년에 미뤄 두었던 만기 어음을 막고, 밀린 성과급을 처리하고, 이자를 돌려 막고, PL 상품을 만들기 위해 바닥에 깔고 시작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맞다. 그 금액은 있어야 할 것이다. 공사비를 절약했다지만 후폭풍이 쉬운 건 아니다.
내일 C은행에서 애초에 언질 줬던 대로 융자가 나오면 괜찮지만 은행 분위기가 엉망이니 지금 저렇게 노심초사하고 있는 거지. 내일 은행 일이 꼬이면 어찌 되는 건가? 건물까지 새로 올려놓은 회사가 순식간에 공중분해 되는 꼴을 지켜봐야 하나? 나는 그걸 적당한 가격에 낚아채 형님 앞으로 대령하면 되는 거고? 그러면 이 사람이 아니라 당장 내가 그 매장을 맡아서 경영을 하게 되는 건가?
호진은 쓰게 웃었다. 좋군. 아주 좋아.
호진은 자신이 가진 주식을 재차 떠올렸다. K마트. 유통계의 선도주. 2,000만 주 중에서 2.5%. 50만 주였다. 지금 시세가 어떻더라? 구재선 그 인간이 푸드에서 죽을 쑤지만 않았어도 주당 10만 원은 넘겼을 텐데. 지금 9만 4천 원 가까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한꺼번에 풀면 조금 더 떨어진다 가정해서 대략 460억 정도?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얼추 되진 않을까? 아냐. 주식은 반절 정도만 털어 낼까?
호진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니. 그걸로는 불을 못 끈다. 차라리 몽땅 투자해서 연희유통의 엔젤 투자자가 되는 게 어떠냐니까?
호진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파묻고 지그시 움켜쥐었다. 지긋지긋하다. 이 생각은 왜 이렇게 끈질긴지.
내가 K마트에서 가지고 있는 건 알량한 2.5% 지분뿐이다. 그 지분마저 없으면, 나는 그야말로 K마트에서 완전히 밀려나는데. 경영권 참여는 고사하고 아예 지분도 없는 생판 남으로 내쳐질 게 뻔한데? 잘못되면 난 그야말로 개털이 되는 거야. 돈 한 푼 없이.
나는 당신처럼 배짱 있게 올인하는 스타일은 못 돼. 나에겐 그보다는 안전하면서 더 큰 파이를 얻을 수 있는 선택지가 있어.
온몸은 까라지는데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 구석구석이 쿡쿡 쑤시고 따가웠다. 며칠 전부터 있던 몸살기가 심해지려나 보다.
바닥에 누워 자는 사내는 잠결에 베개를 있는 힘껏 끌어안더니 표정을 풀고 스르르 미소하기 시작했다. 웃음은 점점 커져, 아예 흠뻑 웃음 짓는다. 아아, 좋아요……. 좋습니다. 무엇이 좋다는지 호기심만 불러일으킨 채, 대가리가 잘린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호진은 귀를 세웠으나 더 이상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취한 사내의 코 고는 소리가 우르릉우르릉했다. 실크로 만들어진 잠옷의 감촉이 다시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호진은 억지로 등을 돌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연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집 안에는 북엇국 냄새가 가득했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편의점에서 사 왔습니다. 인스턴트 국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지 싶어서요. 밥은 새로 했고요. 해장이라도 하고 출근하십시오.”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고 넥타이까지 바투 올려 맨 사내가 쟁반을 내밀었다. 자신보다 훨씬 늦게 잠든 비서실장이다. 눈에는 핏기가 남아 있고,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어 와이셔츠에 약간 구김이 가 있었지만 그래도 샤워까지 마친 사내에게선 청량한 향이 났다.
아아. 큼직한 눈이 둥그렇게 벌어지더니 이내 끔벅끔벅했다. 어어. 이거 참. 이거 참. 연희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은 채 멀거니 이불 속에서 쟁반을 받았다. 그는 머뭇머뭇하면서도 뜨거운 국에 밥을 말아 후룩후룩 먹었다. 커다란 사발 안에 있던 밥과 대접을 채웠던 3인분에 가깝던 국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맛있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요리 잘하시는군요, 이 실장.”
“인스턴트 국이라고 실토했지 않습니까. 물론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집에 재료가 아무것도 없어서요.”
“허허. 좋은 집안 아들처럼 보여서 요리 같은 거 안 해 봤을 줄 알았습니다.”
호진의 입이 살짝 벌어지더니 피싯,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었다.
“다른 유학생들보다 더 궁상이었습니다. 집에서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해서 고생을 했어요. 돈 아끼느라고 룸메이트 찾아 빈대 짓도 꽤 했습니다. 돈 덜 내려니 요리라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죠.”
“빈대라니, 이 실장하고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인데요. 의외입니다.”
“요리 솜씨 덕에 룸메이트한테 인기 좋았습니다.”
진실은 꽤 달랐지만 호진은 그렇게 말을 덮었다. 연희가 그것을 따지고 캘 것도 아니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진의 섹스 편력은 화려하다면 화려할 수도 있었다. 영국은 동성애자가 의외로 많았다. 그가 사귀었던 다섯 명의 파트너 중 두 명이 남자였다. 남자가 더 좋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얻어걸린 인간들의 비율이 그랬을 뿐이다. 취향 따위 가릴 계제도 아니었으니 상대의 성격, 외모, 지적 수준들도 죄다 중구난방이었다.
그중 가장 길게 관계를 맺었던 것이 케빈 윈저 맥스웰이었다. 왕가와 연결된 혈통이라 윈저라는 미들 네임을 썼다. 폴로와 승마를 즐겼고, 주말이면 지중해에 요트를 띄워 놓고 난교파티를 벌이던 녀석이었다. 방학이면 아버지가 소유한 숲으로 가 사냥을 하거나 소문난 식도락가답게 맛있는 음식을 찾아 오지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네가 마음에 든다니까. 내 취향이야. 밤에 완전히 녹여 줄 수 있어.’
‘밤에는 아르바이트해야 해서 바빠.’
호진의 무심한 대답에 새파란 눈이 성큼 다가왔다.
‘학비와 숙식을 해결해 준다면?’
‘몸을 팔라는 말로 들리는데?’
‘아니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돕는 거지. We are the World!’
어차피 비역질 따위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뭐 그리 귀한 몸뚱이라고. 그리고 다행히 녀석은 바텀이었다. 포지션을 바꿔야 했다면 호진은 꽤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자신이 처음 안았던 이름도 모를 고등학교 후배보다 케빈이 훨씬 색기 넘치는 몸매를 갖고 있었다는 건 일종의 보너스였다.
어미와 의절하고 케임브리지에 입학한 직후부터 호진은 비참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낮 가리지 않는 아르바이트로 건강과 공부할 시간을 축내느니, 부잣집 도련님의 같잖은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호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계약 동거 제의를 수락했다.
‘한 가지만 더 추가해서 부탁하자면.’
부탁은 부탁이 아니었지만 후배는 새파란 눈을 반들반들 빛내며 그리 말했다. 아시안 푸드를 일주일에 한 가지씩 만들어 줘. 많이 바라지 않아. 제의한 사내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괭이처럼 웃었다.
제니 리 대신 식탁을 책임져야 했던 소년은 아비의 집에서 5년간 먹어 본 음식의 맛을 떠올렸다. 가사 도우미를 총괄하는 본가의 신 여사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손맛이란 결국 혀끝의 기억이다. 레시피야 원한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재료나 제대로 공수해.’
케빈은 나를 사랑했다. 그건 맞아. 나도 처음 2년은 그에게 빠져 지냈던 것 같고. 그런 걸 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녀석과의 섹스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때도 분명 있었다.
20대 초반,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리던 호진에게 섹스는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는 방편이기도 했고, 케빈이란 연인은 침대 위에서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한 자극을 선사했다.
호진의 첫 번째 섹스 파트너였던 그는, 가학과 피학의 취향을 동시에 가졌다. 호진은 가끔 그에게 얻어맞아 시커멓게 얼룩진 팔을 숨기고 다녀야 했고, 가끔은 하얀 피부에 핏자국이 남을 때까지 깔린 사내를 후려갈기며 자신이 이 괴이한 정신세계에 잠식당하지 않기를 미친 듯이 되뇌어야 했다.
케빈이 자신과 동시에 다른 사내들과도 관계를 이어 왔다는 것을 알기까지 호진은 나름대로 그에게 심적으로도 의지하고 있었다. 케빈의 행동이 아니라 ‘케빈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자신’에게 더 놀란 호진은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결별을 통보했다.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통보에 케빈은 모두 정리하겠노라 애걸했지만, 감정으로 얽혀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 생각했다.
호진은 두 번째로 동거할 여자, 걸레인지 암캐인지 하는 별명을 갖고 있던 전지영이라는 유학생을 잡은 직후 아무 말 없이 그의 저택을 나왔다. 그녀에게 붙은 별명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마찬가지로 걸레였고, 수캐였고, 남창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 관계는 그녀가 4선 국회의원의 딸이며, 호진이 구형선의 아들임을 알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챌 때까지 6개월 남짓 지속되었다.
살인적인 임대료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호진이 다른 사람들과 짧은 동거와 이사를 숱하게 반복하는 동안 케빈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겨울 방학 때 세렝게티로 여행이나 가자고, 그냥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라던 케빈의 청을 들어준 것은 지쳐서였을 것이다.
적도 이남 아프리카는 여름이고, 건기였다. 몹시 더웠다. 케빈은 거대한 나무 그늘에서 무릎을 접고 빌었다. 눈물과 땀이 그의 턱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호진은 그때의 감정을 기억할 수 없었다. 너무 더웠고, 그저 그늘에 들어가 있으니 살 것 같았다. 아아, 살 것 같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필요해서 간 건데, 잡다한 감정 따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호진은 땀으로 뒤발한 후배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키스의 맛은 짜고 서걱서걱했다.
케빈과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한 자각은 확실했다. 주고받는 공생, 혹은 기생 관계. 둘의 사이를 정의하는 낱말이 사랑이라 해도 좋았고 사랑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감정이 똑같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가 원할 때마다 옷을 벗고 섹스에 응하는 것이야 괴로울 것도 없었다. 암고양이 같은 섹스 중독자는 자신에게 박아 넣는 사내가 자신보다 먼저 절정에 도달하면 불같이 화를 냈지만,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꺼지는 그를 위해 사정을 늦추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 볼 만한 일이었다. 밤 시간만큼은 그들의 천칭이 확실한 수평을 이루었다.
그래도 케빈에게 인스턴트 북엇국 따위는 끓여 준 적이 없었지. 제대로 된 아시안 푸드, 일주일에 한 번. 학비와 등가교환으로 이루어진 대가치고는 빈약했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동등한 계약이었으니까.
그들의 동등한 관계는 일전에 대한민국의 호텔 스위트룸 화장실 앞에서 따귀 몇 대로 마감되었다. 필요가 소멸한 후 나오게 된 당연한 귀결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연희는 눈을 끔벅거렸다. 저럴 것 같더라. 3시 가까이 돼서 잤을 텐데 또 일찍 일어나서 뭔가를 사 와서 먹을 것을 만들어 놨으니 피곤하기도 하겠지.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호진은 안경을 쓴 채 그대로 옆으로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숨소리가 식식 힘겹게 올라왔다.
이거 걱정인데.
그러잖아도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안 좋은지 운전을 하다 말고 가만히 관자놀이를 누르기도 했고 이마에 맺힌 진땀을 닦으며 등을 벽에 기대기도 했다. 연희는 호진이 만성적인 편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연희는 호진의 이마에 살그머니 손을 대 보았다. 미열이 있는 것도 같다.
연희는 잠든 사내의 얼굴에서 안경을 빼어 탁자에 올려놓은 후 가만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선이 매끈한 사내의 입가 근육이 살짝 꿈틀한다. 연희가 이불자락을 여며 주려고 손을 대는 순간 잠에 떨어진 사내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으, 으으. 음.
“이, 이런 제기랄.”
속이 크게 울렁였다. 뒤이어 밀려들어 온, 잠든 사내를 꽉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인지하는 순간 연희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미쳤다. 지금 멀쩡한 사람을 어쩌려고.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사람한테 왜 자꾸 이렇게 얼빠진 생각을 해. 이래선 안 된다. 절대 안 돼.
연희는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어 움킨 후 입술을 말아 넣었다. 호진을 볼 때마다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이젠 거북할 지경이 되었다. 잠들기 직전, 5분의 시간을 벗어나면 안 되는 망상 역시 이제는 낮에도 무시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증세가 이따위로 점점 심해지는 건 곤란하다.
그러잖아도 머리 터질 일이 산적해 있다. 이렇게 얼빠진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야. 은행에 가서 오늘 결판을 보아야 하는데.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약속했던 융자 승인이 나지 않고 판이 뒤집어진다면?
연희의 입매가 딱딱해진다. 상상조차 두려운 결말이라 계속 덮고만 있던 시나리오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왔는데. 이번만 제대로 넘기면 되는데. 하지만 속으로 스며드는 불안감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다. 왜 하필 이 실장까지 이렇게 아파서 속을 말짱 뒤집어.
연희는 곁의 의자에 주저앉아 이마를 수건으로 닦았다. 잠깐만 쉬었다 가자. 어차피 오늘은 신촌 현장이 아니고, 은행에 가서 결판을 보는 게 시급했고, 호진도 함께 가야 할 일이었다.
돈이 잘 풀려야 할 텐데.
무릎이 쿡쿡 쑤셨다. 연희는 무방비하게 잠든 사내의 얼굴을 끝없이 바라보았다. 그 역시 깊은 근심에 짓눌린 듯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공기는 점점 짙고 무거워졌다. 시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두 사람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12. 열병, 40.8 (1)
연희는 C은행 VIP룸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아무래도 분위기가 안 좋았다. 넓은 이마 위로 진땀이 솟았다.
“지난번까지는 다 된 것처럼 말씀하셨잖습니까! 추가 서류만 가져오시면 도장 찍어 드린다고! 그런데, 말씀하신 서류는 다 됐는데! 왜 갑자기 말이 뒤집힌 겁니까?”
“지점장님께서 당분간만 보류로 묶어 놓는 거라고 하시긴 했는데, 사실은 갑자기 대출 심사가 강화된 게 맞습니다. 지난 2분기에 대출 회수율이 큰 폭으로 하락해서, 대출 심사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라고 금감원에서 바짝 조이고 있거든요. 안 그러면 대놓고 불이익을 주겠다고 하고 있어요. 부동산 담보 대출 부실률이 높아진 영향이 컸습니다. 가계 대출을 주로 했던 은행들은 지금 거의 줄초상 분위기예요. 그 덕에 저희처럼 기업 대출을 주로 했던 은행들까지 덩달아 된서리 맞은 상태입니다.”
설명이 길었지만 결론은 위에서 쪼고 있으며 대출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출 심사를 담당하는 정 과장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출 심사 기준이란 것이 상황에 따라 죄였다 풀렸다 하는 일이지만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뭐가 문제가 된 겁니까?”
“연희유통은 자기자본 비율이 심사 기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건 애초부터 알고 있던 사실 아닙니까!”
“다만 그동안 점장님께서 윤연희 사장님의 신용도와 장외 시장에서의 거래 실적을 참고해서 융자승인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려해 보겠다고 하셨던 겁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에서 공문이 내려온 이상은 저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금감원은 은행 경영평가 때 건전성 관리 현황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협박하는 거예요. LTV(담보 인정 비율), DTI(총부채 상환 비율), 대출 과정, 내부규정, 담보가치 적용, 작정하고 걸고넘어지면 은행부터 벼락 맞는 겁니다. 위반 사례가 적발되면 전 목이 잘릴 수도 있어요.”
연희의 얼굴이 납빛으로 가라앉았다.
11. 잠 못 이루는 밤 (3)
왜 저렇게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이 아내와 섹스가 안 되었을까? 아내가 지독하게 추한가? 마음에 들지 않았나? 사랑이 없는 결혼을 한 걸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것도 그렇지만 미진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저 정도 사람이면 얼마든지 좋은 조건으로 재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그가 여자를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단정하고 깔끔했고, 여직원들에게 추근대는 말 한마디 한 적도 없었다. 따로 만나거나 여자를 부르는 일이 없는 것도 확실했다.
……여자에 관심이 없나?
하긴. 이상한 점이 없는 건 아니다. 나한테 손닿는 것에 굉장히 과민하게 반응했잖나.
그럼…… 혹시?
호진은 실쭉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여긴 영국이 아니다. 한국에서 동성애란 길가에 치이도록 흔한 취향은 절대 아니었다.
냉정한 생각과는 달리 시선은 저절로 아래쪽으로 꺾여 내려갔다. 눈을 감고 고르게 숨을 쉬는 사내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굵고 진한 눈썹이 새삼 길어 보인다. 큼직한 안구와 둔중한 턱선, 크고 선이 굵은 콧마루. 견고하고 단정한 얼굴이다. 머리를 제대로 말리지 않았는지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습하게 보였다. 그가 고르게 숨을 쉴 때마다 가슴을 덮고 있는 얇은 이불자락이 오르락내리락했다.
으으으! 잠든 사내가 기분 나쁜 꿈이라도 꾸는지 이맛살을 확 구기며 꿍꿍, 앓는 소리를 했다. 웅얼대는 소리는 의미를 알 수 없이 흩어졌다.
호진은 운동장만큼이나 너른 그의 침대 위에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당신은 지금 무슨 꿈을 꾸고 있지? 아까 내내 고민하던 대출 문제로 꿈속에서도 고민하고 있는 건 아닌가? 호진은 조용해진 사내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한참 만에 호진은 이를 지그시 물고 침대를 빠져나왔다. 협탁에 켜 둔 작은 수면등이 깊이 잠든 사내의 얼굴을 노랗게 비추었다. 호진은 소리 나지 않게 그의 머리맡으로 가서 무릎을 접고 앉았다. 얼굴의 굴곡이 더 뚜렷하게 보인다.
당신, 대체 뭐야. 대체 뭔데 내 속을 이렇게 뒤집어.
두통이 끈질기다. 호진은 망연히 선이 굵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습한 머리카락이 베개에 약간 흩어져 있다. 의식하지도 못한 사이, 손가락이 머리카락을 더듬는다. 그는 눈을 크게 뜨고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짓이야, 이호진! 이게 무슨!
그렇게 긴 세월 몸을 섞고 살았던 케빈에게도 한 번도 이런 흥분을 느껴 본 적이 없다. 심장이 미친 듯이 들뛴다.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카페인, 심장에 좋지 않은 차, 현란한 아라베스크, 이, 이 천박하기 그지없는 실크의 감촉. 매끄러운 실크 밑에서 연희의 근육은 느리게 움직였고, 호진의 피부 아래서 날뛰는 피는 펄펄 끓었다.
호진은 이를 물고 고개를 수그렸다. 입술 위로, 그의 머리카락이 머금은 습기가 옮겨졌다. 저 선이 뚜렷한 입술, 기가 막힌 각도로 올라선 선이 굵은 코, 입술에 물면 살집에 제법 느껴질 법한 큼직한 귀.
……당신은 왜 섹스가 되지 않았나.
제기랄, 호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움켜진 주먹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그는 소리 나지 않게 욕실로 들어갔다. 제기랄. 여기서 이게, 이게 대체 무슨! 호진은 허리를 수그린 채 이를 물었다. 이마가 있는 대로 구겨진다. 숨소리가 나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쓰는 사이, 묽은 액체가 변기 안으로 주르르, 짧게 흘렀다.
밖으로 나온 호진은 속에서 들끓는 피가 간신히 잠잠해진 것을 깨닫고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섹스 파트너가 필요해. 욕구 불만에 시달린 게 틀림없다. 내가, 이호진이 이따위 얼빠진 짓을 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순간 호진은 눈썹을 가만히 꿈틀거렸다. 예전에, 집으로 불렀던 여자와 섹스에 실패했다. 침대 위에서 내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저 사람이었다.
제기랄. 섹스 파트너가 문제가 아닌 건가?
호진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크게 걱정이 되는 건 아니었다. 영국에서도 지독하게 피곤하거나 우울할 땐 발기가 되지 않았었다.
호진은 약간 편해진 마음으로 아래에 누운 사내를 다시 살펴보았다. 무방비하게 잠든 얼굴이 가끔 찡그려진다. 스트레스를 받을 때 종종 나오는 표정이다. 낮에 짓눌리는 것으로도 부족해, 꿈에서까지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건가? 하긴, 고민이 될 법도 하지. 나 같으면 아마 잠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새웠을 것이다. 당신 같은 상황이라면.
500억. 그 정도 자금이 확보되면 1호점에서 현금 돌 때까지 넉넉히 버틸 수 있을 것이다. 선네이션을 인수하는 게 출혈이 크긴 했다. 이번 공사에 들어간 자재비야 몇 달 미룰 수 있다 해도 작년에 미뤄 두었던 만기 어음을 막고, 밀린 성과급을 처리하고, 이자를 돌려 막고, PL 상품을 만들기 위해 바닥에 깔고 시작하는 비용을 생각하면 맞다. 그 금액은 있어야 할 것이다. 공사비를 절약했다지만 후폭풍이 쉬운 건 아니다.
내일 C은행에서 애초에 언질 줬던 대로 융자가 나오면 괜찮지만 은행 분위기가 엉망이니 지금 저렇게 노심초사하고 있는 거지. 내일 은행 일이 꼬이면 어찌 되는 건가? 건물까지 새로 올려놓은 회사가 순식간에 공중분해 되는 꼴을 지켜봐야 하나? 나는 그걸 적당한 가격에 낚아채 형님 앞으로 대령하면 되는 거고? 그러면 이 사람이 아니라 당장 내가 그 매장을 맡아서 경영을 하게 되는 건가?
호진은 쓰게 웃었다. 좋군. 아주 좋아.
호진은 자신이 가진 주식을 재차 떠올렸다. K마트. 유통계의 선도주. 2,000만 주 중에서 2.5%. 50만 주였다. 지금 시세가 어떻더라? 구재선 그 인간이 푸드에서 죽을 쑤지만 않았어도 주당 10만 원은 넘겼을 텐데. 지금 9만 4천 원 가까이 떨어졌을 것이다. 그러면, 그러면…… 한꺼번에 풀면 조금 더 떨어진다 가정해서 대략 460억 정도? 조금 모자라긴 하지만 얼추 되진 않을까? 아냐. 주식은 반절 정도만 털어 낼까?
호진은 고개를 느리게 저었다. 아니. 그걸로는 불을 못 끈다. 차라리 몽땅 투자해서 연희유통의 엔젤 투자자가 되는 게 어떠냐니까?
호진은 머리카락에 손가락을 파묻고 지그시 움켜쥐었다. 지긋지긋하다. 이 생각은 왜 이렇게 끈질긴지.
내가 K마트에서 가지고 있는 건 알량한 2.5% 지분뿐이다. 그 지분마저 없으면, 나는 그야말로 K마트에서 완전히 밀려나는데. 경영권 참여는 고사하고 아예 지분도 없는 생판 남으로 내쳐질 게 뻔한데? 잘못되면 난 그야말로 개털이 되는 거야. 돈 한 푼 없이.
나는 당신처럼 배짱 있게 올인하는 스타일은 못 돼. 나에겐 그보다는 안전하면서 더 큰 파이를 얻을 수 있는 선택지가 있어.
온몸은 까라지는데 그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몸 구석구석이 쿡쿡 쑤시고 따가웠다. 며칠 전부터 있던 몸살기가 심해지려나 보다.
바닥에 누워 자는 사내는 잠결에 베개를 있는 힘껏 끌어안더니 표정을 풀고 스르르 미소하기 시작했다. 웃음은 점점 커져, 아예 흠뻑 웃음 짓는다. 아아, 좋아요……. 좋습니다. 무엇이 좋다는지 호기심만 불러일으킨 채, 대가리가 잘린 말은 허공으로 흩어졌다.
호진은 귀를 세웠으나 더 이상 다른 말은 나오지 않았다. 취한 사내의 코 고는 소리가 우르릉우르릉했다. 실크로 만들어진 잠옷의 감촉이 다시 불쾌해지기 시작했다. 호진은 억지로 등을 돌리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연희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집 안에는 북엇국 냄새가 가득했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편의점에서 사 왔습니다. 인스턴트 국이라도 없는 것보단 낫지 싶어서요. 밥은 새로 했고요. 해장이라도 하고 출근하십시오.”
옷을 단정하게 갈아입고 넥타이까지 바투 올려 맨 사내가 쟁반을 내밀었다. 자신보다 훨씬 늦게 잠든 비서실장이다. 눈에는 핏기가 남아 있고, 어제 입은 옷을 그대로 입어 와이셔츠에 약간 구김이 가 있었지만 그래도 샤워까지 마친 사내에게선 청량한 향이 났다.
아아. 큼직한 눈이 둥그렇게 벌어지더니 이내 끔벅끔벅했다. 어어. 이거 참. 이거 참. 연희는 고맙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은 채 멀거니 이불 속에서 쟁반을 받았다. 그는 머뭇머뭇하면서도 뜨거운 국에 밥을 말아 후룩후룩 먹었다. 커다란 사발 안에 있던 밥과 대접을 채웠던 3인분에 가깝던 국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맛있습니다! 정말 맛있어요. 요리 잘하시는군요, 이 실장.”
“인스턴트 국이라고 실토했지 않습니까. 물론 요리를 못하는 건 아니지만 집에 재료가 아무것도 없어서요.”
“허허. 좋은 집안 아들처럼 보여서 요리 같은 거 안 해 봤을 줄 알았습니다.”
호진의 입이 살짝 벌어지더니 피싯,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었다.
“다른 유학생들보다 더 궁상이었습니다. 집에서 도움을 전혀 받지 못해서 고생을 했어요. 돈 아끼느라고 룸메이트 찾아 빈대 짓도 꽤 했습니다. 돈 덜 내려니 요리라도 잘해야 살아남을 수 있었죠.”
“빈대라니, 이 실장하고 정말 안 어울리는 말인데요. 의외입니다.”
“요리 솜씨 덕에 룸메이트한테 인기 좋았습니다.”
진실은 꽤 달랐지만 호진은 그렇게 말을 덮었다. 연희가 그것을 따지고 캘 것도 아니니.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호진의 섹스 편력은 화려하다면 화려할 수도 있었다. 영국은 동성애자가 의외로 많았다. 그가 사귀었던 다섯 명의 파트너 중 두 명이 남자였다. 남자가 더 좋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얻어걸린 인간들의 비율이 그랬을 뿐이다. 취향 따위 가릴 계제도 아니었으니 상대의 성격, 외모, 지적 수준들도 죄다 중구난방이었다.
그중 가장 길게 관계를 맺었던 것이 케빈 윈저 맥스웰이었다. 왕가와 연결된 혈통이라 윈저라는 미들 네임을 썼다. 폴로와 승마를 즐겼고, 주말이면 지중해에 요트를 띄워 놓고 난교파티를 벌이던 녀석이었다. 방학이면 아버지가 소유한 숲으로 가 사냥을 하거나 소문난 식도락가답게 맛있는 음식을 찾아 오지로 여행을 다니기도 했다.
‘네가 마음에 든다니까. 내 취향이야. 밤에 완전히 녹여 줄 수 있어.’
‘밤에는 아르바이트해야 해서 바빠.’
호진의 무심한 대답에 새파란 눈이 성큼 다가왔다.
‘학비와 숙식을 해결해 준다면?’
‘몸을 팔라는 말로 들리는데?’
‘아니지, 사랑하는 사람끼리 서로 돕는 거지. We are the World!’
어차피 비역질 따위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나. 뭐 그리 귀한 몸뚱이라고. 그리고 다행히 녀석은 바텀이었다. 포지션을 바꿔야 했다면 호진은 꽤 심각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자신이 처음 안았던 이름도 모를 고등학교 후배보다 케빈이 훨씬 색기 넘치는 몸매를 갖고 있었다는 건 일종의 보너스였다.
어미와 의절하고 케임브리지에 입학한 직후부터 호진은 비참할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낮 가리지 않는 아르바이트로 건강과 공부할 시간을 축내느니, 부잣집 도련님의 같잖은 제의를 받아들이는 것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호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계약 동거 제의를 수락했다.
‘한 가지만 더 추가해서 부탁하자면.’
부탁은 부탁이 아니었지만 후배는 새파란 눈을 반들반들 빛내며 그리 말했다. 아시안 푸드를 일주일에 한 가지씩 만들어 줘. 많이 바라지 않아. 제의한 사내는 혀로 입술을 핥으며 괭이처럼 웃었다.
제니 리 대신 식탁을 책임져야 했던 소년은 아비의 집에서 5년간 먹어 본 음식의 맛을 떠올렸다. 가사 도우미를 총괄하는 본가의 신 여사는 음식 솜씨가 좋았다. 손맛이란 결국 혀끝의 기억이다. 레시피야 원한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것이고.
‘재료나 제대로 공수해.’
케빈은 나를 사랑했다. 그건 맞아. 나도 처음 2년은 그에게 빠져 지냈던 것 같고. 그런 걸 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녀석과의 섹스 없이는 잠들지 못하던 때도 분명 있었다.
20대 초반, 불면증과 두통에 시달리던 호진에게 섹스는 모든 것을 잊게 해 주는 방편이기도 했고, 케빈이란 연인은 침대 위에서 모든 것을 잊게 할 만한 자극을 선사했다.
호진의 첫 번째 섹스 파트너였던 그는, 가학과 피학의 취향을 동시에 가졌다. 호진은 가끔 그에게 얻어맞아 시커멓게 얼룩진 팔을 숨기고 다녀야 했고, 가끔은 하얀 피부에 핏자국이 남을 때까지 깔린 사내를 후려갈기며 자신이 이 괴이한 정신세계에 잠식당하지 않기를 미친 듯이 되뇌어야 했다.
케빈이 자신과 동시에 다른 사내들과도 관계를 이어 왔다는 것을 알기까지 호진은 나름대로 그에게 심적으로도 의지하고 있었다. 케빈의 행동이 아니라 ‘케빈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자신’에게 더 놀란 호진은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모하는 대신 결별을 통보했다. 변명의 여지가 있을 수 없는 통보에 케빈은 모두 정리하겠노라 애걸했지만, 감정으로 얽혀 자신에게 좋을 것이 없다 생각했다.
호진은 두 번째로 동거할 여자, 걸레인지 암캐인지 하는 별명을 갖고 있던 전지영이라는 유학생을 잡은 직후 아무 말 없이 그의 저택을 나왔다. 그녀에게 붙은 별명 따윈 신경도 쓰이지 않았다. 어차피 자신도 마찬가지로 걸레였고, 수캐였고, 남창이라 해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 그 관계는 그녀가 4선 국회의원의 딸이며, 호진이 구형선의 아들임을 알고 접근했다는 것을 알아챌 때까지 6개월 남짓 지속되었다.
살인적인 임대료와 생활비를 아끼기 위해 호진이 다른 사람들과 짧은 동거와 이사를 숱하게 반복하는 동안 케빈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겨울 방학 때 세렝게티로 여행이나 가자고, 그냥 친구로서 부탁하는 거라던 케빈의 청을 들어준 것은 지쳐서였을 것이다.
적도 이남 아프리카는 여름이고, 건기였다. 몹시 더웠다. 케빈은 거대한 나무 그늘에서 무릎을 접고 빌었다. 눈물과 땀이 그의 턱을 타고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호진은 그때의 감정을 기억할 수 없었다. 너무 더웠고, 그저 그늘에 들어가 있으니 살 것 같았다. 아아, 살 것 같다. 나머지는 아무래도 좋다. 어차피 필요해서 간 건데, 잡다한 감정 따위 느낄 이유가 없었다. 호진은 땀으로 뒤발한 후배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댔다. 키스의 맛은 짜고 서걱서걱했다.
케빈과의 두 번째 만남에 대한 자각은 확실했다. 주고받는 공생, 혹은 기생 관계. 둘의 사이를 정의하는 낱말이 사랑이라 해도 좋았고 사랑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두 사람이 생각하는 감정이 똑같을 필요는 없었으니까.
그가 원할 때마다 옷을 벗고 섹스에 응하는 것이야 괴로울 것도 없었다. 암고양이 같은 섹스 중독자는 자신에게 박아 넣는 사내가 자신보다 먼저 절정에 도달하면 불같이 화를 냈지만, 쉽게 달아오르고 쉽게 꺼지는 그를 위해 사정을 늦추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해 볼 만한 일이었다. 밤 시간만큼은 그들의 천칭이 확실한 수평을 이루었다.
그래도 케빈에게 인스턴트 북엇국 따위는 끓여 준 적이 없었지. 제대로 된 아시안 푸드, 일주일에 한 번. 학비와 등가교환으로 이루어진 대가치고는 빈약했지만 어쨌든 겉으로는 동등한 계약이었으니까.
그들의 동등한 관계는 일전에 대한민국의 호텔 스위트룸 화장실 앞에서 따귀 몇 대로 마감되었다. 필요가 소멸한 후 나오게 된 당연한 귀결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연희는 눈을 끔벅거렸다. 저럴 것 같더라. 3시 가까이 돼서 잤을 텐데 또 일찍 일어나서 뭔가를 사 와서 먹을 것을 만들어 놨으니 피곤하기도 하겠지. 잠시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호진은 안경을 쓴 채 그대로 옆으로 드러누워 잠이 들었다. 숨소리가 식식 힘겹게 올라왔다.
이거 걱정인데.
그러잖아도 며칠 전부터 컨디션이 안 좋은지 운전을 하다 말고 가만히 관자놀이를 누르기도 했고 이마에 맺힌 진땀을 닦으며 등을 벽에 기대기도 했다. 연희는 호진이 만성적인 편두통과 불면증에 시달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을 깨우지 않도록 조심하며 연희는 호진의 이마에 살그머니 손을 대 보았다. 미열이 있는 것도 같다.
연희는 잠든 사내의 얼굴에서 안경을 빼어 탁자에 올려놓은 후 가만히 이불을 덮어 주었다. 선이 매끈한 사내의 입가 근육이 살짝 꿈틀한다. 연희가 이불자락을 여며 주려고 손을 대는 순간 잠에 떨어진 사내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나직한 신음이 흘렀다. 으, 으으. 음.
“이, 이런 제기랄.”
속이 크게 울렁였다. 뒤이어 밀려들어 온, 잠든 사내를 꽉 안아 주고 싶은 마음을 인지하는 순간 연희는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미쳤다. 지금 멀쩡한 사람을 어쩌려고. 손끝 하나 댈 수 없는 사람한테 왜 자꾸 이렇게 얼빠진 생각을 해. 이래선 안 된다. 절대 안 돼.
연희는 머리카락 사이에 손을 넣어 움킨 후 입술을 말아 넣었다. 호진을 볼 때마다 신경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이 이젠 거북할 지경이 되었다. 잠들기 직전, 5분의 시간을 벗어나면 안 되는 망상 역시 이제는 낮에도 무시로 출몰하기 시작했다. 증세가 이따위로 점점 심해지는 건 곤란하다.
그러잖아도 머리 터질 일이 산적해 있다. 이렇게 얼빠진 감정에 휘둘릴 때가 아니야. 은행에 가서 오늘 결판을 보아야 하는데.
만에 하나, 천에 하나, 약속했던 융자 승인이 나지 않고 판이 뒤집어진다면?
연희의 입매가 딱딱해진다. 상상조차 두려운 결말이라 계속 덮고만 있던 시나리오다. 지금까지 어떻게 버텨 왔는데. 이번만 제대로 넘기면 되는데. 하지만 속으로 스며드는 불안감을 도무지 진정시킬 수가 없다. 왜 하필 이 실장까지 이렇게 아파서 속을 말짱 뒤집어.
연희는 곁의 의자에 주저앉아 이마를 수건으로 닦았다. 잠깐만 쉬었다 가자. 어차피 오늘은 신촌 현장이 아니고, 은행에 가서 결판을 보는 게 시급했고, 호진도 함께 가야 할 일이었다.
돈이 잘 풀려야 할 텐데.
무릎이 쿡쿡 쑤셨다. 연희는 무방비하게 잠든 사내의 얼굴을 끝없이 바라보았다. 그 역시 깊은 근심에 짓눌린 듯 이마에 주름이 잡혀 있었다. 공기는 점점 짙고 무거워졌다. 시계의 째깍거리는 초침 소리가 두 사람의 심장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12. 열병, 40.8 (1)
연희는 C은행 VIP룸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래. 아무래도 분위기가 안 좋았다. 넓은 이마 위로 진땀이 솟았다.
“지난번까지는 다 된 것처럼 말씀하셨잖습니까! 추가 서류만 가져오시면 도장 찍어 드린다고! 그런데, 말씀하신 서류는 다 됐는데! 왜 갑자기 말이 뒤집힌 겁니까?”
“지점장님께서 당분간만 보류로 묶어 놓는 거라고 하시긴 했는데, 사실은 갑자기 대출 심사가 강화된 게 맞습니다. 지난 2분기에 대출 회수율이 큰 폭으로 하락해서, 대출 심사 기준을 엄격하게 적용하라고 금감원에서 바짝 조이고 있거든요. 안 그러면 대놓고 불이익을 주겠다고 하고 있어요. 부동산 담보 대출 부실률이 높아진 영향이 컸습니다. 가계 대출을 주로 했던 은행들은 지금 거의 줄초상 분위기예요. 그 덕에 저희처럼 기업 대출을 주로 했던 은행들까지 덩달아 된서리 맞은 상태입니다.”
설명이 길었지만 결론은 위에서 쪼고 있으며 대출이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출 심사를 담당하는 정 과장도 곤혹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대출 심사 기준이란 것이 상황에 따라 죄였다 풀렸다 하는 일이지만 지금은 좋은 때가 아니었다.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뭐가 문제가 된 겁니까?”
“연희유통은 자기자본 비율이 심사 기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건 애초부터 알고 있던 사실 아닙니까!”
“다만 그동안 점장님께서 윤연희 사장님의 신용도와 장외 시장에서의 거래 실적을 참고해서 융자승인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고려해 보겠다고 하셨던 겁니다. 하지만 금융감독원에서 공문이 내려온 이상은 저희도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금감원은 은행 경영평가 때 건전성 관리 현황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그걸로 협박하는 거예요. LTV(담보 인정 비율), DTI(총부채 상환 비율), 대출 과정, 내부규정, 담보가치 적용, 작정하고 걸고넘어지면 은행부터 벼락 맞는 겁니다. 위반 사례가 적발되면 전 목이 잘릴 수도 있어요.”
연희의 얼굴이 납빛으로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