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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8화
10. 거대한 나무의 그늘 (3)


그가 소파에서 피곤한 얼굴로 자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속이 욱신욱신했다.
윤연희 씨, 당신 좀 대단해. 지금 내 머릿속을 아주 제대로 뒤집어 놓고 있어. 내가 왜 K마트 대신 연희유통 자금 걱정을 하고 있어야 해?
아냐. 생각 좀 해 봐, 연희유통은 이번 고비만 넘기면 크게 일어날 거야. 그러니 지분을 좀 받고 엔젤 투자자가 되어 보는 건 어떨까?
호진은 얼빠진 표정으로 눈을 감고 웃었다. 정신 차립시다. 내 살을 뜯어 먹는 경쟁자가 될 사람을 키우자고? 주식 말고 현금 가진 것도 없는데?
K마트에서 지분을 빼야 돈이 나올 것이다. 경쟁업체에 엔젤 투자 따위 짓거리를 하려고 지분을 팔았다는 건 K마트를 포기하겠다는 말로 읽힐 것이다. 재영 형이 재선 누나를 찍어 낸 일 따위보다 훨씬 확실하게 내쳐질 방법이다.
그래도 단기로 연희유통에 투자를 한다 하면?
글쎄. 단기매매차액 반환의무에 걸리지 않으려면 6개월 이상은 묻어 두어야 할 것이다. 호진은 이마를 찌푸렸다.
호진의 예상대로라면 연희유통은 몇 년 내로 증권거래소에 입성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관찰한 바, 윤연희는 빠르고 단호하게 치고 들어가는, 전형적인 공격형 경영자였다. 궤도에 오르자마자 자금 확보를 위해 기업 공개를 준비하기 시작할 것이고 조건만 된다면 바로 상장할 것이다. 지금 투자했다가 상장한 후에 빼면 훨씬 이익이다. 그때 K유통 지분을 대거 늘릴 수도 있다.
아니 그보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K유통이고 나발이고 다 떠나서 정말 연희유통의 가능성을 보고 투자하는 입장이 된다면? 비서가 아니라 동업자처럼, 함께 사업을 키워 나가는 파트너가 된다면 어떨까? 사장과 직원이라는 관계 대신 사업 파트너로 만났어도 참 좋았을 것 같은데.
자문자답하던 호진은 뒤죽박죽 얽힌 생각을 집어치우고 기운 없이 클클거렸다. 흐하. 이호진. 오늘 정말 취했구나. 만취했구나. 고작 술 한 병으로 별 지랄 같은 망상을 다 해 보는구나!
될 말이 아니다. 윤연희와 나. 뒤를 캐기 위해서 시작한 이 관계가 길게 가 봐야 어디까지 가겠는가? 아니 길게 가기는 할까? 내가 스파이로 심어진 사람이라는 게 들통이 나면 그 사람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나는 어쨌든 K마트의 구형선의 아들이며 간자로 잠입했다. 빼도 박도 못 하는 사실 아닌가.
그리고 어차피, 내가 꿈꾸어 왔고 승부를 보아야 할 곳도 업계 수위 자리를 선점한 K마트다. 이성적으로 따지면 재론의 여지가 없다. 연희유통은 너무 작고 위험하다. 인생을 걸어 승부할 만큼 든든하지 않아. 호랑이 앞에 놓인 작은 강아지 같았다. 강아지는 아무리 용감해 보아야 강아지일 뿐이다.
그래. 모험을 할 이유가 없다. 형제들과 경쟁하는 것이 더 성공 가능성이 높다. 재선 누나, 재영 형도 떨어져 나간 판에.
호진은 눈을 감고 두 손등으로 눈을 덮었다. 만화경처럼 움직이는 그의 편린들이 두서없이 호진을 점령했다.
먼지 덮인 그의 넓은 어깨와 굽슬굽슬 이마로 흘러내린 새까맣고 윤기 있는 머리카락, 큼직한 구두, 짜장면의 기름 냄새, 달달한 커피 향, 옅은 향수 냄새와 섞인 땀내, 가끔 주변 사람을 당혹스럽게 하는 파스 냄새, 크고 두툼한 손, 굵고 길게 뻗은 손가락, 깊은 먹색의 큼직한 눈, 짙고 긴 눈썹, 우렁우렁 동굴에서 울리는 듯한 목소리, 당황할 때마다 자신의 앞에서 더듬대는 말투, 목을 뒤로 젖히고 껄껄 웃는 모습, 어색하게 코에 주름을 잡으며 눈치채일세라 짧게 웃는, 호진만 알아볼 수 있는 그 웃음.
생각이 점점 선명하고 날카로워진다. 호진은 머릿속을 점령한 덩치 큰 사내의 모습에 당혹하면서도 그것을 밀어 낼 수 없었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냐. 애써 부인할 때마다 속으로 후끈한 바람이 휘몰아쳤다. 사막의 열풍처럼 뜨거운 바람. 기억의 끝은 다른 기억과 이어졌다.
겉과 속을 지글지글 익혀 버리는 듯한 열기. 그는 케빈과 함께 여행했던 세렝게티의 건조한 초지, 그리고 그곳에서 불어 대던 뜨거운 바람을 떠올렸다. 12월 한여름에 불던 열풍으로, 건기를 맞은 초원의 기온은 50도까지 치솟곤 했다.
심장까지 한꺼번에 구워 버릴 듯한 오후 2시의 폭염은 모든 이성을 마비시키고 생존 욕구만 남겼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그늘 밑에만 들어가면 거짓말처럼 시원했다. 건조한 지역에서의 넓은 그늘이란 시원한 생수만큼이나 청량했다.
그래, 기억난다. 그곳에는 아주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는 거대한 나무가 있었다. 바오밥. 어린 왕자에서 별을 쪼개는 악의 축으로 취급되었던 그 나무.
‘이 나무는 신의 실수로 땅에 거꾸로 박힌 거라지. 그래서 가지가 뿌리처럼 빡빡하고 난잡스러워.’
케빈의 목소리가 희미했다. 치밀하고 빡빡한 가지. 잎이 아닌 가지만으로도 그늘이 짙었다. 건조한 초지에서, 뿌리 같은 가지를 아프게 들어 올린 채 몸을 뒤틀며 억겁의 세월을 버티던 나무.
그 못생기고 뒤틀린 나무엔 그래도 초지에서 팍팍하게 살아가는 작고 여린 동물들이 쉽게 깃들였다. 아래는 건조한 땅의 작은 벌레와 동물들이, 가지에는 크고 작은 새들이 날개를 접고 있었다.
태생부터 겸허를 강요받았던 나무는 결국 장대해져 땅과 하늘을 덮어 버린다. 작고 아름다운 것들을 사랑하여 무엇이든 품에 들이려는 거대한 의지가 만 갈래의 가지로 형상화된 듯했다.
호진은 누워서 조용히 웃었다. 어린 왕자, 넌 잘못 알았다. 바오밥은 작고 애달픈 소행성 B-612 따위를 집어삼키려는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아. 꽉 끌어안다가 짜부라뜨리는 거라면 모를까.
그의 앞에는 굵고 단단한 몸통, 거칠고 옹이진 껍데기를 지닌 나무가 땅을 집어삼키듯 뿌리를 박고 서 있었다. 숱하게 많은 가지 속으로 초원의 뜨거운 바람이 흘러들었다가 빠져나갔다. 비스듬하게 만들어진 그늘은 거대하여, 건조하고 뜨거운 초지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호진은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입속으로 읊조렸다.
……윤연희, 당신을 닮았어.
나의 나무, 나의 바오밥.
왜 내 시선은 항상, 거대한 나무의 그늘에만 머무를까.
이제는 그런 겁 없는 망상에도 더 이상 소스라치지 않는다. 덩치 크고 뼈가 굵은, 대호의 목소리를 지닌 그 사내는 이미 호진의 머릿속에 둥지를 틀어 버렸다. 이 지경까지 방치하면 안 되었는데. 몰아내야 했는데. 지금이라도 몰아내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 않다. 어쩌면 좋을까. 생각이 점점 두서없이 흩어졌다.
바오밥의 그늘에선 뜨거운 바람 소리가 났다. 그가 만들어 내는 거대한 그늘이 자꾸 생각나고, 매일 조금씩 더 좋아지고 있다. 연희유통이라는 그의 분신이 어떻게 자라는지도 지켜보고 싶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나는, 나는.
호진은 옷도 갈아입지 않고 침대에 누운 채 입으로 나직하게 거대한 나무의 이름을 뇌었다. 되풀이할수록 방 안 가득 거대한 그림자가 들이차는 것 같았다.

***


연희는 역삼동 집으로 들어섰다. 일단 안방에 침대와 옷장이 들어와 있어 자고 옷 갈아입는 데는 별 지장이 없었지만 정돈되지 않은 집은 을씨년스러웠다. 넓이가 아래위층 합쳐 200여 평에 이르다 보니 집에 들어서면 허허벌판이 따로 없었다. 선 사장의 가족과 몇몇 고용인들이 살기에도 지나치게 넓었을 것 같다. 그러니 딸린 가족도 없는 연희가 혼자 지내기에는 억지스러울 만큼 넓었다.
이 집을 길게 갖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팔려면 진작 팔았어야 맞는데 연희는 내내 망설이는 중이었다. 부동산 가격이 너무 폭락해서 그 값으로는 팔 수 없다는 현실과 조만간 폭등세가 한 번쯤 올 거라는 예감, 그리고 1층에 있는 작은 방 때문이었다.
연희는 안방에 들어가기 전, 발걸음을 돌려 작은 방의 문을 열어보았다.
벽지가 너덜대고 잡동사니와 먼지로 뒤덮인 작은 방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딸과 작은 소년이 머리를 맞대고 즐겁게 놀던 곳이었다. 이 방의 주인이었던 소년의 반질반질한 머리칼이 생각났다. 병아리 두 마리처럼 귀엽던 아이들. 그 위로 쏟아지던 노란 햇빛, 민들레 홀씨처럼 퐁퐁 날리던 소년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앙칼지고 고집 있는 딸을 잘 달래 가며 재미있게 놀아 주던 소년은 자신을 몹시 좋아하고 따랐다.
그때는 이 집이 넓다는 생각이 안 들었었는데.
역시 넓은 집엔 아이들이 있어야 하는 건가?
어쩌다가 나처럼 단출한 사람의 손에 이 큰 집이 떨어졌는지 얄궂다. 이럴 땐 애들이 대여섯 명쯤 있으면 퍽 좋을 것 같은데. 온 집 안이 좁다 하고 뛰어다닐 가족들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연희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가족이라니. 혼자 산 지 벌써 십 년이 되어 가는데 무슨 뜬금없는. 내 주제에 가족처럼 인연이 없는 말이 있을까.
그는 방으로 들어와 옷을 정리해서 걸고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취하기도 했거니와 피곤해서 꼼짝할 기운도 없었다. 베개에 고개를 푹 파묻고 이불을 뒤집어썼다. 연희에게 불면증은 없었다. 오늘같이 피곤하고 술까지 들어간 날이면 2~3분, 길어야 5분 내로 잠이 들 것이다. 연희는 자기 전에 이런저런 기분 좋은 상상을 즐겨 하는 편이었고, 너무 빨리 잠드는 것을 아쉬워하곤 했다.
물론 상상이 매번 사업의 확장이라든가 딸아이와 있었던 일처럼 건전한 것으로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었다. 신체 건장한 서른 살 사내의 그것은 민망한 망상으로 연결되는 일이 잦았고, 그럴 때마다 그는 옆에 있는 큼직한 쿠션을 꽉 끌어안고 낯을 붉혔다.
“……이호진.”
끌어안은 팔에 근육이 솟았다.
“……호진 씨. 이호진. 호진 씨.”
괜찮다. 아무도 모르는 시간, 아무도 모르는 생각이니까 괜찮다. 연희는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심장이 소르르 녹는 듯한 감각을 난생 처음 느끼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에 구태여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저 멋대로 가지를 치는 생각을 아주 잠시만 풀어 놓을 뿐이었다.
하루 5분. 겨우 하루에 딱 5분에 불과하다. 가장 나른하고 행복하게 즐길 수 있는 시간에, 이렇게 누워서 조금쯤 당신을 상상한다 해서 죄가 될 일은 아니겠지. 그래도 미안하고 속이 후끈거렸다.
그는 베개에 고개를 묻은 채 눈을 감고 계속 뇌까렸다. 입술이 조금 꿈틀거렸다. 베개에 얼굴을 누르고 부볐다. 이호진. 호진 씨. 호진 씨. 부를수록 감질나고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의 이름은 5분의 시간과, 침대 위의 공간에서 결코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이 시간과 침대라는 공간을 벗어나는 순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일이 꼬여 버릴 것이다.
되풀이해서 부르던 그는 얕게 신음하며 이맛살을 구겼다. 언제부터인지 그를 생각하는 것만으로 온몸이 꿀에 절어 붙은 듯했고, 입에 담기만 하면 가벼운 흥분이 일었다. 하지만 그는 욕실로 달려가거나 하는 대신 눈을 지그시 눌러 감고 욕망이 스러질 때까지 참았다.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내색도 하지 않는다. 드러낼 일 따위는 절대 하지 않는다. 욕구를 키우지도 않아. 하루 5분, 그저 속으로만 상상하는 거다. 난 욕구 해결을 위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즐기는 밤 시간도 허락받지 못한 사람이다. 그 정도는 봐주어도 괜찮잖아.
연희가 스스로 ‘비정상’이라 결론지은 성적인 취향은 열네 살부터 확고했지만 그는 지금까지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살았다. 인생의 절반은 그것을 모르고 지냈고, 나머지 절반은 그것을 모르는 척 누르면서 지냈다.
덮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해서 처음 관계를 맺었던 여자, 그래서 자신에게 소중한 딸을 안겨 준 여자와 결혼이란 것도 해 보았다. 결국 최악의 결말로 그 여자와의 관계를 막음한 후, 그는 인생의 가장 큰 희락을 남들과 같은 방법으로 누리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 일로 평생 아는 사람에게 상처를 받으며 살 자신이 없었다. 소심하다 해도 할 수 없다. 연희는 스스로를 무르고 약한 사람이라 여겼다. 크고 작은 불이익과 손가락질은 또 오죽할 것인가. 연희는 자신을 잘 알았다.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욕구는 만만치 않았고 그는 그때마다 자신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그래도…… 길바닥이나 바에서 알지도 못하는 섹스파트너를 찾아 욕정을 푸느니 차라리 이를 물고 죽어 버리겠어.
호진이 그렇게 쉽게 마음을 차지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다. 어울리지도 않게 그렇게 학벌이 좋은 사람을 뽑는 게 아니었다. 이런 곳에서 재능을 낭비할 사람이 오래 일할 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냥 돌아가라고 보냈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가 습기가 많은 눈을 가늘게 하고 싱긋 웃을 때, 그의 후릿한 몸매에서 대밭에서 이는 듯한 서늘한 바람을 느꼈을 때, 그 웃음과 시원함에 혹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의 재능에 반하지 말아야 했다. 그가 입속의 혀처럼 나를 빈틈없이 돕는 일에 섣불리 기대지 말아야 했다. 그에게 상가 퇴거 문제같이 힘든 일을 맡기는 게 아니었다. 촬영 따위 일을 시키는 게 아니었다.
그래, 맞다. 촬영 따위를 시키는 게 아니었다.
자신을 감싸 안고 땀인지 핏물인지를 뚝뚝 떨어뜨리던 사내의 체온이 생각났다. 그를 통해 둔탁하게 타격이 전달되었고, 그는 짧게 신음하며 몸을 비틀었다. 그때마다 자신을 안은 팔에 힘이 꽉꽉 들어갔다. 핏자국이 얽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급하게 뒤돌아선 호진이 손가락으로 눈가와 뺨, 턱을 훑어 바지 자락에 문지르던 움직임이 아직도 생생했다.
……신음이 섞인 나직한 흐느낌도.
“이런, 제기랄!”
속으로 불덩이가 치밀었다. 주먹을 꾹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잠시 후 베개를 집어 팽개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 문이 요란하게 열렸다. 샤워기에서 물줄기가 쏟아졌다. 연희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밭게 숨을 뱉기 시작했다.
이렇게 멍청하게 넋을 놓는 게 아니었다. 이제는 보고만 있어도 숨이 막혀.
……대체 어떡할 셈인가.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점점 식었다. 연희는 그것도 자각하지 못한 채 오랫동안 물줄기를 맞았다. 악문 이 사이로 한탄 같은 신음이 흘렀다. 5분이란 시간은 진작 지나 있었다. 탁한 액체가 물줄기에 뒤섞여 배수구로 빠르게 빠져나갔다.



11. 잠 못 이루는 밤 (1)


내장 공사까지 완료되던 날, 선네이션과 연희유통 연합 회식이 있었다. 분위기가 적당히 점잖은 고기뷔페 식당을 통째로 예약했다. 술까지 무제한 제공이라는 말에 다들 환성을 질렀다.
엄청난 양의 고기와 말술이 모인 사내들의 입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오후 5시에 들어간 사람들은 그곳에서 아예 밤을 새울 기세였다. 호진은 술을 잘 마시지 못하는 연희가 걱정스러워 그를 자주 흘끔거렸다.
그가 웃는다. 몇 번씩 되풀이해서 웃는다. 그의 웃음은 대부분 이를 보일 듯 말 듯 드러내고 소리 없이 벌어지는 입술 모양만으로 이루어진다. 바라보는 사내의 혈관에서도 따뜻한 물이 찰랑였다.
이 감정은 당신에게 감염된 것인가?
조금은 행복한가, 당신?
호진의 부드러운 시선이 닿자 깊고 검은 눈에도 흐뭇한 웃음이 얹혔다.
현장의 관리자들처럼 ‘연희유통’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인디고 색 점퍼를 입고, 연희는 인부들처럼 많이 먹고, 자신의 양보다 많이 마셨다. 10시가 되어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그동안 고생 많았다고 직원들을 치하했다.
내장이 끝났다는 말은, 이제 이 지겨운 현장에서 먼지를 마실 일은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는 뜻이다. 준공이 떨어지고 나면 바로 입점업체들을 관리하는 일로 바빠지겠지만 지금처럼 먼지 구덩이에서 전쟁을 치르는 상황은 끝난 것이다.
문제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추가 대출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는데, 대출 담당자의 언질도 받았는데, 은행 쪽에서 자꾸 미적거렸다. 선네이션 쪽의 사람들에게 약속한 성과급과 3개월 추가로 미루어 놓은 어음의 만기가 코앞으로 닥쳐 있었다. 연희는 불안을 내색하지 않았지만 호진은 그의 얼굴에서 언뜻언뜻 근심을 읽었다.
선네이션 쪽 직원들은 아직까지 연희에게 그리 호의적인 편은 아니었다. 강성 노조가 해체되었고, 월급이 깎인 데다 공기를 단축했음에도 아직 성과급은 받지 못했다. 선네이션 쪽의 전병철 부장과 현장소장 박경우 부장이 그러잖아도 몇 번 상여금에 대해 연희에게 언질을 주었다.
더는 미룰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약속한 것을 받지 못하면 거의 완성된 건물을 때려 부술 수도 있고, 드러나지 않게 해찰을 부려 최종 마감을 엉망으로 해 놓을 수도 있다. 머리를 쓴다면 준공 떨어지자마자 압류해서 경매에 부쳐 버릴 것이다.
시급한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연희는 술기가 오르는 중에도 내일쯤 은행에 다시 가 보아야 할까, 투자자를 어떻게 잡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했다.
결국 연희는 흠뻑 취하고 난 후에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비틀비틀하는 모습을 본 호진이 황급히 따라 일어났다.
“아냐, 아니에요. 호진 씨는 더 있다 와요. 택시 타고 들어가면 돼…….”
“아닙니다. 오늘은 저 술 안 마셨으니까, 사장님 차로 제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엇!”
호진은 연희를 부축하다가 주저앉을 뻔했다. 연희가 기대면서 누르는 힘이 생각보다 너무 셌다. 호진의 허리를 틀어잡은 손아귀 힘도 대단했다. 호진이 크게 휘청이며 한쪽 무릎을 바닥에 박자 덩치 큰 사내는 몹시 당황해하며 황급히 팔을 떼어 냈다.
“미안합니다. 괜찮습니까?”
“아, 예, 괜찮습니다.”
“내, 내가 무슨 실수를. 호진 씨. 괜찮습니까? 정말 괜찮습니까? 이 실장. 진짜 실수로 미끄러진 겁니다.”
연희는 호진의 앞에 쭈그리고 앉아 무릎이 괜찮은지 바지를 걷어 보려고 손을 댔다가 갑자기 후다닥 몸을 움츠렸다. 연희의 종잡을 수 없는 반응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호진 쪽이었다. 괜찮다는 말을 되풀이해도 연희는 아예 고개까지 돌린 채 급히 물러서 허청허청 혼자 걷기 시작했다.
비틀대는 뒷모습을 보는 호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실수로 여자 허리춤이라도 잡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잘 먹겠습니다. 사장님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뒤에 남은 직원들은 제대로 2라운드 시작이라며 기세 좋게 고함이다. 호진은 취하지는 않았으나 몸의 컨디션이 그리 좋은 것도 아니었다. 집에 들어가서 얼른 쉬고 싶었다. 하지만 연희가 저 꼴로 택시를 잡겠다고 휘적대는 꼴을 보니 발이 땅에 들러붙은 듯 무거웠다.
결국 호진은 연희를 따라가 팔을 붙잡았다. 팔을 뿌리치려던 사내는 호진의 얼굴을 보고 놀란 얼굴로 눈을 끔벅였다.
“역삼동으로 들어가시죠. 요새 계속 현장 사무실에서 주무셨잖습니까.”
“집, 아아…… 정, 정리가 안 되었어요. 지저분해요. 선 사장, 심통을 부리고…… 갔어…….”
“침대만 제대로 있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오늘은 좀 편히 주무십시오.”
“이 실…… 실장. 이 실장? 손 놓으십시오. 걸을 수, 걸을 수 있어요. 손 놓으세요. 놓으라니까! 괜찮아요.”
연희는 과민할 정도로 부축을 사양하다가 결국 손을 뿌리쳤다. 호진은 눈썹을 지그시 찡그리고 연희를 바라보다가 기척 없이 물러섰다. 최근 연희의 과민한 반응은 예측 가능한 수준을 벗어났다. 잠시 후 연희의 차가 식당 앞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