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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7화
10. 거대한 나무의 그늘 (2)
“음…… 지금 솔직히 갈 집도 없습니다. 어, 이 실장, 농담 아닙니다! 오피스텔의 계약이 지난달에 만료됐잖아요. 이삿짐센터에 부탁해서 짐 대충 빼서 창고에 박아 두긴 했는데, 김치 남은 거 안 버리고 밀폐용기에 넣어 두고 온 게 제일 걱정입니다. 어머니가 신김치 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놔두었는데 몰래 버릴걸. 이 더위에 폭발했으면 어쩌죠?”
이젠 주변에 모인 사람들까지 폭소를 터뜨렸다. 호진은 그게 아주 흰소리는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선우순 사장에게 압류한 역삼동 저택으로 이사를 갈 계획이었는데 돈이 하도 말라붙다 보니 그것까지 팔아서 발라 쓸까 말까 궁리하는 눈치였다.
모자란 돈에 빡빡하게 밀어붙이는 작업이었다. 시간이 돈이라는 말이 그대로 체감이 되는 현장이었다. 다들 꼬락서니가 볼만했다. 사장부터 시작해서 경리과 직원 김영미 주임, 말단 박연수 씨까지.
덩치 큰 사내는 아침마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머리를 빗고 반듯하게 다려 놓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타났으나, 오후가 되면 머리카락은 먼지 폭격을 맞은 듯 허옇게 덮였고 와이셔츠 깃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호진도 점차 연희처럼 컨테이너 사무소 안에 갈아입을 여벌 옷과 구두, 넥타이, 속옷 등을 갖다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연희처럼 사무실에 구겨 박혀 토막잠을 자거나 부스스한 얼굴로 세면장에 가서 세수를 하거나 수건을 목에 걸고 다니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거참. 어떻게 사람이 한결같이 말끔합니까?”
“사장님은 어떻게 매일 한 가지씩 망가지십니까?”
연희와 호진은 진지한 어조로 서로에게 물었다. 연희는 대답 대신 껄껄 홍소했고, 호진은 눈을 가늘게 하며 싱긋 웃었다.
“이 실장은 웃는 게 참 보기 좋습니다.”
연희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호진의 웃음이 잦아진 것, 그리고 그 웃음에 솔직한 감정이 실리기 시작한 것을 연희는 퍽 좋게 여겼다.
그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상대에게 내 보이고 공유하기 시작했다.
딱히 의도해서 이루어진 행동은 아니었다. 자금을 융통하느라 교대로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기도 했고 매시간 스케줄을 체크하고, 서로의 끼니를 챙겨 주기도 했다. 호진이 피곤에 겨워 의자에 앉은 채 깜박 잠들면 연희는 부채질을 해 주거나 담요를 덮어 주었다. 날이 흐려 연희가 왼쪽 다리를 몰래 쥐어뜯고 있으면 호진은 슬그머니 파스나 진통제를 내밀었다.
연희가 파티션 뒤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서랍에 양말이나 와이셔츠 따위를 숨겨 두었다가 잊어버리면 호진은 그것을 집에서 세탁해서 따로 건네주었다. 이런 일 시키려고 뽑은 거 아닙니다, 연희가 종이가방을 받으며 낯을 붉히거나 이마를 찡그리면 호진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두 사람은 사장과 비서실장이라기보다 어느덧 함께 사업을 하는 동료, 친구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감이라는 감정은, 모두에게 그렇듯이 너무 폭넓고 애매했다.
***
본가로 들어온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연희는 그래도 일요일은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며 시간을 뺐고, 호진은 대체로 주말 내내 틀어박혀 잠을 자는 편이었다.
강무영 실장의 전화번호가 한꺼번에 대여섯 개 찍힌 후에야 호진은 방배동 본가로 들어갔다. 옅은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 재철은 최근 들어 밭은기침이 잦았지만 본인이든 형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면 나오는 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재철은 호진이 무심해진 것을 딱히 트집하지 않았다. 큰형의 말이 아니더라도 호진은 정말 마음대로 알아서 할 참이었다.
당분간 윤연희 곁에 머무르기로.
언제 그렇게 결정했는지 모르는 사이에, 호진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옆자리에 있는 자신이 너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가끔 불쾌했다. 호진이 당분간 연희유통에서 추이를 지켜보겠노라 했을 때 재철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달 말에 임시 주총이 있다. K마트에서 출자한 K푸드 문제 때문에 재영이가 소집했다. 재선이를 몰락시킬 생각인 거야. 알고 있지? 큰일이 터지지 않으면 재선이도 대충 버티겠지만 잘못되면 우리 회사로 똥물이 튈 거다.”
큰형도 골치 아프겠어. 호진은 쓰게 웃었다.
“압니다.”
“하여간, 와서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인사해라.”
형제들은 호진이 어디 박혀 무엇을 하며 굴러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재철의 입단속이 철저하여 그저 일반 기업에 취직했다고 알고 있었다. 어디서 엄부렁한 짓이나 하고 다니겠지, 하는 게 그네들의 삿된 희망이 담긴 추측이었다.
그가 경영권 분쟁에 끼어들기를 포기했다고 지레짐작한 그들은 차츰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다만 임시 주총이 다가와서인지 속을 떠보려는 듯, 다들 한 차례씩 연락을 해 찌르는 말을 던진 것이 전부였다.
“많이 바쁜가 보구나.”
재철은 동생의 그늘진 눈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호진은 대답할 기력도 없이 소파 위에서 까라졌다.
“희마트 신촌 1호점, 내년 설 대목 한 달 전에 물건 깔아 놓을 겁니다. 내장은 올가을에 끝낼 거고요. 그 사람 해낼 겁니다.”
“……지독한 놈.”
재철은 얼굴을 찡그렸다. 담배 연기가 그들의 주변을 무겁게 감쌌다.
“선네이션 직원들하고 윤연희 그 사람하고 관계는 어떠냐?”
“직원들이요? 하! 치를 떨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연희와 손발을 맞추게 된 선네이션 직원들과 인부들은 겨울, 봄, 여름 세 계절 동안 새로운 사장에게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 선네이션의 주인이었고, 구제 금융 시절, 망해 가는 회사를 인수해서 일거리를 만들어 내 일당과 월급을 주는 사람이었다. 노조가 해산되고 인원이 감축된 데다 받는 돈까지 줄었지만, 그래도 월급은 꼬박꼬박 제날짜에 지급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새로운 사주에게 불만을 말할 계제가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재계순위 수위(首位)를 차지하던 D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것을 보면서도 마냥 고자세일 수는 없었다. 연희는 적어도 그들에게 해야 할 일과 월급을 보장했다.
“그런데 형님, 우습죠. 사람을 기가 막히게 다룹니다. 일이 그 사람 페이스대로 진척이 됩니다.”
협상 자리에서 으르대고 무섭게 협박할 줄 알던 사내는 현장에서 당근으로 어르고 잡아끌기도 제법이었다. 그는 십장들에게 자주 술을 샀고, 아쉽지 않을 정도의 봉투도 몇 번씩 찔러 넣어 주었다.
공사의 속도를 밀고 당기는 것은 현장소장만이 아니다. 공사판의 허릿심은 십장, 목수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현장의 거친 사내들조차 덩치 큰 사내에게 한풀 꺾여 잠잠해진 상태였다.
“말했다시피, 그 사람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끌어요. 그 사람이 옳다고 우기는 일에 얼떨결에 휘말리는 그 웃기는 기분 아십니까? 처음에는 기분이 더러웠는데 요새는 그런 것도 없어요.”
호진은 말을 하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재철이 비스듬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도 휘말렸나?”
“……형님. 무슨 말을…….”
뒤에 서 있던 키가 크고 마른 사내의 입술이 얇게 꿈틀거렸다. 강 실장이 또 뭔가 나에 대해 뒷조사를 해서 형에게 들이박았나.
“너하고 그 사장하고 요새 손발이 잘 맞는 것 같다고, 평이 좋은가 보더군. 가끔 네 거취가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혹시 그에게 관심 있나?”
“형님!”
호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는 입술 선이 속으로 깊이 말려들어 갔다. 급작스럽게 확산되는 냉기에도 재철은 태연하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썩 나쁜 방법도 아니지 않아?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건.”
이가 부득 갈리는 것을 호진은 내색 없이 참았다.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다시 매끈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럼 형님도 그 자리 물려받을 때 강무영 실장하고 혹시 배라도 맞추었나요?”
재철의 이마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호진은 기어이 송곳니를 박았다.
“아, 자폐인 형님 딸…… 영주였던가, 그 애를 시설에 처박아 놓고 이혼한 다음에 지금 형수랑 결혼한 것도 참 멋진 방법이었어요. 마땅한 후계자도 없으니 괜찮지 않냐고 들이댄 것도.”
“이호진! 이 개……!”
벌떡 일어난 사내가 주먹을 움켰다. 뒤에 서 있던 비서실장의 이마도 확 구겨졌지만 그는 급하게 재철의 팔을 잡았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회장님. 늙은 사내가 속삭였다. 호진은 끝까지 차분하게 공격을 돌려보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고 하시기에 형님도 그러신 줄 알았지.”
손을 부들부들 떨던 사내가 천천히 의자 위로 주저앉았다. 한참 만에야 길게 한숨이 쏟아졌다.
“내가 실언을 했다.”
재철이 새로 담배를 물었다. 그가 뿜는 연기는 항시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호진은 담배 연기를 피하는 척하며 몸을 일으켰다. 속이 부글부글했다.
어디 내 앞에서 그따위 이야기를.
호진은 잠깐 멈춰 서서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의 속을 숨기는 건 미련한 짓이다. 사실 내가 이렇게 불쾌한 이유는 큰형의 말에 부인할 수 없는 요소가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호진은 거칠게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 큰 저택은 괴괴했다. 저택이 완전히 가려질 만큼담장이 높았고, 담의 능선에는 유리조각과 철조망이 포진해 흉흉해 보였다. 집을 따뜻하게 해 주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형수조차 집에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대문까지 따라나선 강 실장에게 조용히 내뱉었다.
“강 실장.”
“예, 도련님.”
“그때 그 여자 우리 집으로 보내세요. 피곤해. 잠 좀 제대로 자야겠어.”
짜증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 음색에 강 실장은 지긋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구씨 집안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개처럼 복종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종류의 일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개처럼. 정말 개처럼.
호진은 그날 손톱 발톱을 발갛게 물들인 여자에게 발정하지 못했다. 지독한 피로 때문이었다. 이 미칠 듯한 두통이라니! 그는 샅에 매달려 애를 쓰던 여자를 밀어 내고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거 왜 이러지? 그동안 호진에게 섹스는 피곤을 없애고 숙면을 보장하는 도구였다. 말을 하지 않도록 경고를 받은 여자는 조용히 옆으로 굴러 속옷을 주워 입는다. 맨살에 와 닿는 밤의 공기가 선뜻했다.
왜 지금 여기서 당신이 생각나는 걸까? 왜 하필 여기서. 당신은 왜 여기까지 날 따라와서 내 머릿속을 뒤집어?
좋지 않다. 그는 서랍을 열고 평소의 두 배가 되는 양의 진통제를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
거푸집을 떼어 낸 것은 장마가 휩쓸고 간 후, 삼복더위가 기승하던 때였다. 칙칙한 회색의 철근 콘크리트 몸뚱이가 둔중하게 맨살을 드러냈다. 인부들은 소금기로 얼룩진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같이 현장에서 굴러다니며 일하던 직원들은 손뼉을 쳤다.
“이제부터 얘도 화장발 세우는 겁니다. 뽀얗고 발그레하니 아주 예뻐질 겁니다!”
키가 작고 똥똥한 박 소장이 턱을 들고 큰 소리로 웃었다. 직원들의 입에서도 저절로 웃음이 일었다. 남자건 여자건 휴가도 없이 지독한 여름을 지낸 그들은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어 있었다.
연희는 덤덤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함께 회식을 가자고 했다. 그는 술을 조금 마셨고 많이 웃었다. 경리과 최고참인 김영미 주임이 울먹이는 소리를 했다.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했어요.”
“미안합니다. 그래도 그만두지 말아 주세요. 이제 회사도 많이 클 겁니다. 나중에 부장도 되고, 이사도 되고, 그럼 스톡옵션도 많이 받고 그렇게 될 겁니다. 스톡옵션 행사하면 김 주임이 그렇게 갖고 싶다던 정원 딸린 집도 살 수 있을 겁니다.”
연희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진심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은 K마트의 임시 주주총회가 있던 날이었다. 호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월차를 내지도 않았고, 대리인이나 위임장을 별도로 보내지도 않았다. 뒤엉켜 부옇게 된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는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연희를 대신해서 거푸 술을 들이켰다. 연희가 근심 서린 표정으로 그의 잔을 엎어 놓을 때까지, 그는 과하게 마셨다.
연희가 그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호진은 잠자코 뒷좌석에 앉았다. 미안합니다, 사장님.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거듭되는 사과는 주정이라기엔 퍽 이상했다. 연희는 연신 수건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방배동까지 차를 몰았다.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넘어 있었다.
재철에게 전화가 왔다. 숱하게 전화를 했던 모양인지 그답지 않게 곤두선 목소리였다. 주총에서 구재선의 K푸드에 출자했다가 100억 원 이상 날린 일로 똥물을 잔뜩 뒤집어썼다고 했다.
K푸드는 학교 급식 들어가는 라인에서 식중독 사건이 터져서 그러잖아도 연일 뒤숭숭하던 주가가 진창으로 내리꽂혔다. 구재영을 위시한 반대 주주들이 재선 누나의 퇴진을 요구한다고 했다.
일주일 후 열릴 K푸드 주총에선 재선의 불신임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가 있을 것이다. 반대 세가 만만찮아 큰 변수가 없는 한 재선은 잘려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본가는 살얼음판이었다.
-총회에도 안 나오고, 연락 한 번 없고, 이호진 넌 거기서 대체 뭐하는 거냐? 오늘 총회인 거 몰랐나?
“공사 때문에 바빠서요, 형님.”
-공사? 연희유통 신축 공사? 그게 주주총회보다 중요해?
기가 막혔는지 재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술에 젖은 호진은 약간 말이 많아졌다.
“형님 지령받고 온 건데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런데 형님, 정말 보고할 게 없어서 유감입니다만 나중에 특별한 일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너무 피곤해서…….”
-이호진! 누가 지금 연희유통 이야기 듣겠대? 재선이가 하는 K푸드가 지금 날아가게 생겼는데. K마트에서 출자해서 간신히 코스닥에 상장해 놨더니 1년 반 만에 반 토막이 났잖아! 재영이가 결국 큰누나를 찍어 낼 참이야. 괘씸한 녀석. 그렇다고 우리 발등까지 찍는 자충수를 둬? 이호진! 듣고 있나? K푸드 상장 폐지될지도 몰라! 대체 얼마를 출자했는지 알아? 지금 공사가 문제야? 이호진!
큰형답지 않게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호진은 몸이 까마득하게 가라앉았다.
“형님, 그게 제 탓입니까? 재선 누나 능력 얼추 알면서 겁도 없이 대규모로 순환출자를 합니까. 지분 방어는 무슨. 저도 재선 누나 불신임에 찬성표 던지고 싶어요. 그거 살려 놨다 돈 먹는 하마가 되면 어쩌시려고. 처바른 돈 신경 썼다간…… 같이 망해……. 진담입니다……. 그나저나 저 지금 피곤해서 좀 자야겠습니다. 재선이, 재영이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술도 좀 마셨어요.”
-이호진!
“나중에 통화하겠습니다.”
재철은 낮은 목소리로 몇 번 욕을 씹어뱉더니 전화를 끊었다. 호진은 벌렁 누운 채 타이도 풀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한 명 탈락. 아니, K마트까지 똥물을 끼얹은 재영 형도 낙점받기는 글렀으니 두 명 탈락 확정.
하는 짓 봐서는 진작 탈락했어야 할 사람들이 이제야 떨어져 나가는군. 재선 누나는 사업 수완은 부족한 주제에 입만 열면 남을 깔아뭉개기 바쁘다.
누님, 괜히 주둥이질해서 적 만들지 마시고 일이나 좀 열심히 하시지. 아, 그래. 열심은 둘째 치고 옛날부터 기본적인 일을 할 만큼 대가리도 안 돌아갔고 일을 진창으로 밀어 넣는 감이 아주 탁월했었지. 그럼 밑의 사람 의견이라도 좀 들으면서 배워 가며 해 보든가. 그거 배울 만큼도 대가리가 안 따라 주면 그냥 누구처럼 농장 사고 말 사서 맘에 맞는 남자랑 하하호호 돈지랄이나 하시고 경영은 전문 CEO한테 넘기시든가. 그게 주가에 훨씬 도움이 될 텐데 왜 용감하게 경영을 해 보시겠다고 지랄이신가.
재영 형도 권모술수 정치꾼 노릇 말고는 볼 게 없었지. 나이는 오십이 다 되어 가면서 욕심만 더글더글하지 변변한 실적을 보여 주진 못했잖아. 남들 하는 절반만 해도 어화둥둥 해 줬을 텐데 대체 매출을 어떻게 죽을 쒀 놓으면 K마트 강동지역 본부장 자리에서 3년을 못 버티고 밀려나. 그럴 거면 형도 물러나서 집에서 살림하면서 애나 보는 게 회사에 훨씬 도움이 될 텐데. 그 집 아들놈도 싹수 노란 개새끼로 벌써 소문이 자자하던데 형님 성질대로 애나 확 잡아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라도 좀 하지.
다른 사람들은 나도 진작 탈락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럼 넷째 재진 형이나 다섯째 재희 누나만 기가 살아서 들떠 있을 테고. 미리 마신 김칫국 토해 내게 하려면 재철 형도 참 골치 아프겠어. 나이 먹어서 무슨 고생이야.
그러고 보니 재철 형이 벌써 환갑이 다 되어 가던가.
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형한테 이를 박을 때 괜한 말까지 했다고 이제야 후회가 된다. 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았을걸.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재철 형의 외딸은 열다섯 살 때부터 시설에 들어가 있었다. 완전 보호급은 아니지만 또 교육 가능급도 아닌 자폐. 그녀를 낳은 재철의 첫 번째 아내는 이혼을 당했다. 두 번째 형수와 재철 형은 한집에서 남남처럼 지내는 눈치였지만 속사정을 아는 이는 없었다.
자신의 속을 흘리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재철은 호진과는 또 다른 의미로 차가운 사내였다. 형의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긴 세월 보좌해 온 강무영 실장 정도라면 모를까.
과연, 재철 형이 언제까지 K마트 항해사 노릇을 하게 될까.
형 걱정할 때인가 지금?
실소는 입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한숨이 대신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연희유통 같은 곳에 처박혀서 시간을 허송할 때는 아닌데.
난 왜 여기서 떠나지를 못하는 걸까. 뭐 볼 게 있다고.
윤연희. 30세. 할인점 업계에 아직 명함도 내밀지 못한 사업가, 아직 1호점도 내지 못한 유통업체 대표. 배움이 짧은, 시장바닥 장사꾼 출신 젊은 사장. K유통의 거대한 아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람.
천착(穿鑿)할 이유가 없다. K마트와 연희유통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잖아.
호진은 손을 들어 눈을 훅 덮었다.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목에 홀쳐진 타이를 풀었다. 연희가 셔츠와 함께 선물한 남청색의 실크 타이에 자주 손이 갔다. 연희는 그가 자신이 선물한 타이를 두른 모습을 보면 코를 한 번 실룩하며 웃곤 했다.
그는 타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마음에 들어. 호진은 중얼대다 말고 킬킬 웃었다. 실크 타이가 마음에 드는 건지, 그가 코를 실룩하며 짧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 건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제기랄.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요새는 연희유통 신축 작업과 윤연희 그 인간의 작업스타일에 휘말려서 다른 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도무지 딴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이다.
아까 회식자리에서 웃던 그의 얼굴까지 한꺼번에 생각났다. 아까의 웃음, 기꺼워서 웃은 것은 아니다. 이제 그 정도는 보기만 해도 안다. 모르긴 해도 속이 바작바작 타고 있었을걸.
한꺼번에 돌려 막아 놓은 6개월 어음 만기일은 벌써 지났다. 윤연희는 그중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 반절은 연 12%로 추가해서 다시 3개월 뒤로 미뤘다. 그 만기일마저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미루지는 못할 거다. C은행이 약속대로 대출을 해 줄까? 지금 은행권 분위기가 꽤 살벌한데. 융통이 안 되면 그 사람은 어쩌려나?
10. 거대한 나무의 그늘 (2)
“음…… 지금 솔직히 갈 집도 없습니다. 어, 이 실장, 농담 아닙니다! 오피스텔의 계약이 지난달에 만료됐잖아요. 이삿짐센터에 부탁해서 짐 대충 빼서 창고에 박아 두긴 했는데, 김치 남은 거 안 버리고 밀폐용기에 넣어 두고 온 게 제일 걱정입니다. 어머니가 신김치 버리면 안 된다고 해서 놔두었는데 몰래 버릴걸. 이 더위에 폭발했으면 어쩌죠?”
이젠 주변에 모인 사람들까지 폭소를 터뜨렸다. 호진은 그게 아주 흰소리는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선우순 사장에게 압류한 역삼동 저택으로 이사를 갈 계획이었는데 돈이 하도 말라붙다 보니 그것까지 팔아서 발라 쓸까 말까 궁리하는 눈치였다.
모자란 돈에 빡빡하게 밀어붙이는 작업이었다. 시간이 돈이라는 말이 그대로 체감이 되는 현장이었다. 다들 꼬락서니가 볼만했다. 사장부터 시작해서 경리과 직원 김영미 주임, 말단 박연수 씨까지.
덩치 큰 사내는 아침마다 나름대로 깔끔하게 머리를 빗고 반듯하게 다려 놓은 와이셔츠 차림으로 나타났으나, 오후가 되면 머리카락은 먼지 폭격을 맞은 듯 허옇게 덮였고 와이셔츠 깃은 새까맣게 변해 있었다.
호진도 점차 연희처럼 컨테이너 사무소 안에 갈아입을 여벌 옷과 구두, 넥타이, 속옷 등을 갖다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연희처럼 사무실에 구겨 박혀 토막잠을 자거나 부스스한 얼굴로 세면장에 가서 세수를 하거나 수건을 목에 걸고 다니는 짓 따위는 하지 않았다.
“거참. 어떻게 사람이 한결같이 말끔합니까?”
“사장님은 어떻게 매일 한 가지씩 망가지십니까?”
연희와 호진은 진지한 어조로 서로에게 물었다. 연희는 대답 대신 껄껄 홍소했고, 호진은 눈을 가늘게 하며 싱긋 웃었다.
“이 실장은 웃는 게 참 보기 좋습니다.”
연희의 눈가가 부드럽게 풀렸다. 호진의 웃음이 잦아진 것, 그리고 그 웃음에 솔직한 감정이 실리기 시작한 것을 연희는 퍽 좋게 여겼다.
그들은 매일매일 조금씩 자신의 영역을 상대에게 내 보이고 공유하기 시작했다.
딱히 의도해서 이루어진 행동은 아니었다. 자금을 융통하느라 교대로 발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기도 했고 매시간 스케줄을 체크하고, 서로의 끼니를 챙겨 주기도 했다. 호진이 피곤에 겨워 의자에 앉은 채 깜박 잠들면 연희는 부채질을 해 주거나 담요를 덮어 주었다. 날이 흐려 연희가 왼쪽 다리를 몰래 쥐어뜯고 있으면 호진은 슬그머니 파스나 진통제를 내밀었다.
연희가 파티션 뒤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서랍에 양말이나 와이셔츠 따위를 숨겨 두었다가 잊어버리면 호진은 그것을 집에서 세탁해서 따로 건네주었다. 이런 일 시키려고 뽑은 거 아닙니다, 연희가 종이가방을 받으며 낯을 붉히거나 이마를 찡그리면 호진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조용히 서 있기만 했다.
두 사람은 사장과 비서실장이라기보다 어느덧 함께 사업을 하는 동료, 친구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호감이라는 감정은, 모두에게 그렇듯이 너무 폭넓고 애매했다.
본가로 들어온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연희는 그래도 일요일은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며 시간을 뺐고, 호진은 대체로 주말 내내 틀어박혀 잠을 자는 편이었다.
강무영 실장의 전화번호가 한꺼번에 대여섯 개 찍힌 후에야 호진은 방배동 본가로 들어갔다. 옅은 담배 냄새가 훅 들어왔다. 재철은 최근 들어 밭은기침이 잦았지만 본인이든 형수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시간 낭비라고 생각하면 나오는 건 네가 알아서 할 일이지.”
재철은 호진이 무심해진 것을 딱히 트집하지 않았다. 큰형의 말이 아니더라도 호진은 정말 마음대로 알아서 할 참이었다.
당분간 윤연희 곁에 머무르기로.
언제 그렇게 결정했는지 모르는 사이에, 호진은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의 옆자리에 있는 자신이 너무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가끔 불쾌했다. 호진이 당분간 연희유통에서 추이를 지켜보겠노라 했을 때 재철은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이달 말에 임시 주총이 있다. K마트에서 출자한 K푸드 문제 때문에 재영이가 소집했다. 재선이를 몰락시킬 생각인 거야. 알고 있지? 큰일이 터지지 않으면 재선이도 대충 버티겠지만 잘못되면 우리 회사로 똥물이 튈 거다.”
큰형도 골치 아프겠어. 호진은 쓰게 웃었다.
“압니다.”
“하여간, 와서 사람들에게 정식으로 인사해라.”
형제들은 호진이 어디 박혀 무엇을 하며 굴러다니는지 알지 못했다. 재철의 입단속이 철저하여 그저 일반 기업에 취직했다고 알고 있었다. 어디서 엄부렁한 짓이나 하고 다니겠지, 하는 게 그네들의 삿된 희망이 담긴 추측이었다.
그가 경영권 분쟁에 끼어들기를 포기했다고 지레짐작한 그들은 차츰 안도하는 기색이었다. 다만 임시 주총이 다가와서인지 속을 떠보려는 듯, 다들 한 차례씩 연락을 해 찌르는 말을 던진 것이 전부였다.
“많이 바쁜가 보구나.”
재철은 동생의 그늘진 눈가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호진은 대답할 기력도 없이 소파 위에서 까라졌다.
“희마트 신촌 1호점, 내년 설 대목 한 달 전에 물건 깔아 놓을 겁니다. 내장은 올가을에 끝낼 거고요. 그 사람 해낼 겁니다.”
“……지독한 놈.”
재철은 얼굴을 찡그렸다. 담배 연기가 그들의 주변을 무겁게 감쌌다.
“선네이션 직원들하고 윤연희 그 사람하고 관계는 어떠냐?”
“직원들이요? 하! 치를 떨고 있습니다.”
처음으로 연희와 손발을 맞추게 된 선네이션 직원들과 인부들은 겨울, 봄, 여름 세 계절 동안 새로운 사장에게 치를 떨었다.
하지만 그는 어쨌든 선네이션의 주인이었고, 구제 금융 시절, 망해 가는 회사를 인수해서 일거리를 만들어 내 일당과 월급을 주는 사람이었다. 노조가 해산되고 인원이 감축된 데다 받는 돈까지 줄었지만, 그래도 월급은 꼬박꼬박 제날짜에 지급되기 시작했다.
직원들은 새로운 사주에게 불만을 말할 계제가 아니란 것을 알아차렸다. 재계순위 수위(首位)를 차지하던 D그룹이 공중분해 되는 것을 보면서도 마냥 고자세일 수는 없었다. 연희는 적어도 그들에게 해야 할 일과 월급을 보장했다.
“그런데 형님, 우습죠. 사람을 기가 막히게 다룹니다. 일이 그 사람 페이스대로 진척이 됩니다.”
협상 자리에서 으르대고 무섭게 협박할 줄 알던 사내는 현장에서 당근으로 어르고 잡아끌기도 제법이었다. 그는 십장들에게 자주 술을 샀고, 아쉽지 않을 정도의 봉투도 몇 번씩 찔러 넣어 주었다.
공사의 속도를 밀고 당기는 것은 현장소장만이 아니다. 공사판의 허릿심은 십장, 목수들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는 듯했다. 현장의 거친 사내들조차 덩치 큰 사내에게 한풀 꺾여 잠잠해진 상태였다.
“말했다시피, 그 사람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끌어요. 그 사람이 옳다고 우기는 일에 얼떨결에 휘말리는 그 웃기는 기분 아십니까? 처음에는 기분이 더러웠는데 요새는 그런 것도 없어요.”
호진은 말을 하다가 눈썹을 찡그렸다. 재철이 비스듬하게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도 휘말렸나?”
“……형님. 무슨 말을…….”
뒤에 서 있던 키가 크고 마른 사내의 입술이 얇게 꿈틀거렸다. 강 실장이 또 뭔가 나에 대해 뒷조사를 해서 형에게 들이박았나.
“너하고 그 사장하고 요새 손발이 잘 맞는 것 같다고, 평이 좋은가 보더군. 가끔 네 거취가 이해가 안 갈 때가 있다. 혹시 그에게 관심 있나?”
“형님!”
호진은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가는 입술 선이 속으로 깊이 말려들어 갔다. 급작스럽게 확산되는 냉기에도 재철은 태연하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썩 나쁜 방법도 아니지 않아? 쓸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는 건.”
이가 부득 갈리는 것을 호진은 내색 없이 참았다. 조용히 주먹을 움켜쥐었다가 서서히 힘을 풀었다. 다시 매끈한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럼 형님도 그 자리 물려받을 때 강무영 실장하고 혹시 배라도 맞추었나요?”
재철의 이마가 심하게 일그러졌다. 호진은 기어이 송곳니를 박았다.
“아, 자폐인 형님 딸…… 영주였던가, 그 애를 시설에 처박아 놓고 이혼한 다음에 지금 형수랑 결혼한 것도 참 멋진 방법이었어요. 마땅한 후계자도 없으니 괜찮지 않냐고 들이댄 것도.”
“이호진! 이 개……!”
벌떡 일어난 사내가 주먹을 움켰다. 뒤에 서 있던 비서실장의 이마도 확 구겨졌지만 그는 급하게 재철의 팔을 잡았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회장님. 늙은 사내가 속삭였다. 호진은 끝까지 차분하게 공격을 돌려보냈다.
“모든 방법을 동원하라고 하시기에 형님도 그러신 줄 알았지.”
손을 부들부들 떨던 사내가 천천히 의자 위로 주저앉았다. 한참 만에야 길게 한숨이 쏟아졌다.
“내가 실언을 했다.”
재철이 새로 담배를 물었다. 그가 뿜는 연기는 항시 날카롭고 공격적이다. 호진은 담배 연기를 피하는 척하며 몸을 일으켰다. 속이 부글부글했다.
어디 내 앞에서 그따위 이야기를.
호진은 잠깐 멈춰 서서 눈썹을 찡그렸다. 자신의 속을 숨기는 건 미련한 짓이다. 사실 내가 이렇게 불쾌한 이유는 큰형의 말에 부인할 수 없는 요소가 있어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호진은 거칠게 몸을 돌려 문을 나섰다. 큰 저택은 괴괴했다. 저택이 완전히 가려질 만큼담장이 높았고, 담의 능선에는 유리조각과 철조망이 포진해 흉흉해 보였다. 집을 따뜻하게 해 주는 요소는 아무것도 없었다. 형수조차 집에서 한 번도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는 대문까지 따라나선 강 실장에게 조용히 내뱉었다.
“강 실장.”
“예, 도련님.”
“그때 그 여자 우리 집으로 보내세요. 피곤해. 잠 좀 제대로 자야겠어.”
짜증을 구태여 숨기지 않는 음색에 강 실장은 지긋한 시선을 거두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구씨 집안사람들에게 말 그대로 개처럼 복종했다. 언제나, 어디서나, 무슨 종류의 일이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개처럼. 정말 개처럼.
호진은 그날 손톱 발톱을 발갛게 물들인 여자에게 발정하지 못했다. 지독한 피로 때문이었다. 이 미칠 듯한 두통이라니! 그는 샅에 매달려 애를 쓰던 여자를 밀어 내고 머리를 움켜잡았다.
이거 왜 이러지? 그동안 호진에게 섹스는 피곤을 없애고 숙면을 보장하는 도구였다. 말을 하지 않도록 경고를 받은 여자는 조용히 옆으로 굴러 속옷을 주워 입는다. 맨살에 와 닿는 밤의 공기가 선뜻했다.
왜 지금 여기서 당신이 생각나는 걸까? 왜 하필 여기서. 당신은 왜 여기까지 날 따라와서 내 머릿속을 뒤집어?
좋지 않다. 그는 서랍을 열고 평소의 두 배가 되는 양의 진통제를 입 속으로 밀어 넣었다.
거푸집을 떼어 낸 것은 장마가 휩쓸고 간 후, 삼복더위가 기승하던 때였다. 칙칙한 회색의 철근 콘크리트 몸뚱이가 둔중하게 맨살을 드러냈다. 인부들은 소금기로 얼룩진 얼굴을 문지르며 한숨을 쉬었다. 같이 현장에서 굴러다니며 일하던 직원들은 손뼉을 쳤다.
“이제부터 얘도 화장발 세우는 겁니다. 뽀얗고 발그레하니 아주 예뻐질 겁니다!”
키가 작고 똥똥한 박 소장이 턱을 들고 큰 소리로 웃었다. 직원들의 입에서도 저절로 웃음이 일었다. 남자건 여자건 휴가도 없이 지독한 여름을 지낸 그들은 얼굴이 새까맣게 그을어 있었다.
연희는 덤덤한 표정으로 오랜만에 함께 회식을 가자고 했다. 그는 술을 조금 마셨고 많이 웃었다. 경리과 최고참인 김영미 주임이 울먹이는 소리를 했다.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했어요.”
“미안합니다. 그래도 그만두지 말아 주세요. 이제 회사도 많이 클 겁니다. 나중에 부장도 되고, 이사도 되고, 그럼 스톡옵션도 많이 받고 그렇게 될 겁니다. 스톡옵션 행사하면 김 주임이 그렇게 갖고 싶다던 정원 딸린 집도 살 수 있을 겁니다.”
연희는 그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진심이 담긴 그의 목소리에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애매한 표정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날은 K마트의 임시 주주총회가 있던 날이었다. 호진은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월차를 내지도 않았고, 대리인이나 위임장을 별도로 보내지도 않았다. 뒤엉켜 부옇게 된 마음은 도무지 진정되지 않았다.
그는 술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연희를 대신해서 거푸 술을 들이켰다. 연희가 근심 서린 표정으로 그의 잔을 엎어 놓을 때까지, 그는 과하게 마셨다.
연희가 그를 부축해 차에 태웠다. 호진은 잠자코 뒷좌석에 앉았다. 미안합니다, 사장님.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거듭되는 사과는 주정이라기엔 퍽 이상했다. 연희는 연신 수건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방배동까지 차를 몰았다. 도착했을 때는 자정이 넘어 있었다.
재철에게 전화가 왔다. 숱하게 전화를 했던 모양인지 그답지 않게 곤두선 목소리였다. 주총에서 구재선의 K푸드에 출자했다가 100억 원 이상 날린 일로 똥물을 잔뜩 뒤집어썼다고 했다.
K푸드는 학교 급식 들어가는 라인에서 식중독 사건이 터져서 그러잖아도 연일 뒤숭숭하던 주가가 진창으로 내리꽂혔다. 구재영을 위시한 반대 주주들이 재선 누나의 퇴진을 요구한다고 했다.
일주일 후 열릴 K푸드 주총에선 재선의 불신임 여부를 결정하는 투표가 있을 것이다. 반대 세가 만만찮아 큰 변수가 없는 한 재선은 잘려 나갈 가능성이 높았다. 본가는 살얼음판이었다.
-총회에도 안 나오고, 연락 한 번 없고, 이호진 넌 거기서 대체 뭐하는 거냐? 오늘 총회인 거 몰랐나?
“공사 때문에 바빠서요, 형님.”
-공사? 연희유통 신축 공사? 그게 주주총회보다 중요해?
기가 막혔는지 재철은 말을 잇지 못했다. 술에 젖은 호진은 약간 말이 많아졌다.
“형님 지령받고 온 건데 열심히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음, 그런데 형님, 정말 보고할 게 없어서 유감입니다만 나중에 특별한 일 있으면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너무 피곤해서…….”
-이호진! 누가 지금 연희유통 이야기 듣겠대? 재선이가 하는 K푸드가 지금 날아가게 생겼는데. K마트에서 출자해서 간신히 코스닥에 상장해 놨더니 1년 반 만에 반 토막이 났잖아! 재영이가 결국 큰누나를 찍어 낼 참이야. 괘씸한 녀석. 그렇다고 우리 발등까지 찍는 자충수를 둬? 이호진! 듣고 있나? K푸드 상장 폐지될지도 몰라! 대체 얼마를 출자했는지 알아? 지금 공사가 문제야? 이호진!
큰형답지 않게 목소리가 컸다. 하지만 호진은 몸이 까마득하게 가라앉았다.
“형님, 그게 제 탓입니까? 재선 누나 능력 얼추 알면서 겁도 없이 대규모로 순환출자를 합니까. 지분 방어는 무슨. 저도 재선 누나 불신임에 찬성표 던지고 싶어요. 그거 살려 놨다 돈 먹는 하마가 되면 어쩌시려고. 처바른 돈 신경 썼다간…… 같이 망해……. 진담입니다……. 그나저나 저 지금 피곤해서 좀 자야겠습니다. 재선이, 재영이가 누군지도 모르겠습니다. 술도 좀 마셨어요.”
-이호진!
“나중에 통화하겠습니다.”
재철은 낮은 목소리로 몇 번 욕을 씹어뱉더니 전화를 끊었다. 호진은 벌렁 누운 채 타이도 풀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한 명 탈락. 아니, K마트까지 똥물을 끼얹은 재영 형도 낙점받기는 글렀으니 두 명 탈락 확정.
하는 짓 봐서는 진작 탈락했어야 할 사람들이 이제야 떨어져 나가는군. 재선 누나는 사업 수완은 부족한 주제에 입만 열면 남을 깔아뭉개기 바쁘다.
누님, 괜히 주둥이질해서 적 만들지 마시고 일이나 좀 열심히 하시지. 아, 그래. 열심은 둘째 치고 옛날부터 기본적인 일을 할 만큼 대가리도 안 돌아갔고 일을 진창으로 밀어 넣는 감이 아주 탁월했었지. 그럼 밑의 사람 의견이라도 좀 들으면서 배워 가며 해 보든가. 그거 배울 만큼도 대가리가 안 따라 주면 그냥 누구처럼 농장 사고 말 사서 맘에 맞는 남자랑 하하호호 돈지랄이나 하시고 경영은 전문 CEO한테 넘기시든가. 그게 주가에 훨씬 도움이 될 텐데 왜 용감하게 경영을 해 보시겠다고 지랄이신가.
재영 형도 권모술수 정치꾼 노릇 말고는 볼 게 없었지. 나이는 오십이 다 되어 가면서 욕심만 더글더글하지 변변한 실적을 보여 주진 못했잖아. 남들 하는 절반만 해도 어화둥둥 해 줬을 텐데 대체 매출을 어떻게 죽을 쒀 놓으면 K마트 강동지역 본부장 자리에서 3년을 못 버티고 밀려나. 그럴 거면 형도 물러나서 집에서 살림하면서 애나 보는 게 회사에 훨씬 도움이 될 텐데. 그 집 아들놈도 싹수 노란 개새끼로 벌써 소문이 자자하던데 형님 성질대로 애나 확 잡아서 국가와 사회에 기여라도 좀 하지.
다른 사람들은 나도 진작 탈락했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그럼 넷째 재진 형이나 다섯째 재희 누나만 기가 살아서 들떠 있을 테고. 미리 마신 김칫국 토해 내게 하려면 재철 형도 참 골치 아프겠어. 나이 먹어서 무슨 고생이야.
그러고 보니 재철 형이 벌써 환갑이 다 되어 가던가.
호진은 씁쓸하게 웃었다. 형한테 이를 박을 때 괜한 말까지 했다고 이제야 후회가 된다. 딸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게 좋았을걸.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재철 형의 외딸은 열다섯 살 때부터 시설에 들어가 있었다. 완전 보호급은 아니지만 또 교육 가능급도 아닌 자폐. 그녀를 낳은 재철의 첫 번째 아내는 이혼을 당했다. 두 번째 형수와 재철 형은 한집에서 남남처럼 지내는 눈치였지만 속사정을 아는 이는 없었다.
자신의 속을 흘리는 일이 없다는 점에서 재철은 호진과는 또 다른 의미로 차가운 사내였다. 형의 속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긴 세월 보좌해 온 강무영 실장 정도라면 모를까.
과연, 재철 형이 언제까지 K마트 항해사 노릇을 하게 될까.
형 걱정할 때인가 지금?
실소는 입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다만 한숨이 대신 흘러나왔다.
내가 지금 연희유통 같은 곳에 처박혀서 시간을 허송할 때는 아닌데.
난 왜 여기서 떠나지를 못하는 걸까. 뭐 볼 게 있다고.
윤연희. 30세. 할인점 업계에 아직 명함도 내밀지 못한 사업가, 아직 1호점도 내지 못한 유통업체 대표. 배움이 짧은, 시장바닥 장사꾼 출신 젊은 사장. K유통의 거대한 아성에 비하면 초라하기 그지없는 사람.
천착(穿鑿)할 이유가 없다. K마트와 연희유통은 비교 자체가 되지 않잖아.
호진은 손을 들어 눈을 훅 덮었다. 손이 스르르 미끄러져 목에 홀쳐진 타이를 풀었다. 연희가 셔츠와 함께 선물한 남청색의 실크 타이에 자주 손이 갔다. 연희는 그가 자신이 선물한 타이를 두른 모습을 보면 코를 한 번 실룩하며 웃곤 했다.
그는 타이를 위로 들어 올렸다. 마음에 들어. 호진은 중얼대다 말고 킬킬 웃었다. 실크 타이가 마음에 드는 건지, 그가 코를 실룩하며 짧게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드는 건지 아무래도 잘 모르겠다.
제기랄.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다. 요새는 연희유통 신축 작업과 윤연희 그 인간의 작업스타일에 휘말려서 다른 일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 도무지 딴생각을 할 수 없게 만드는 인간이다.
아까 회식자리에서 웃던 그의 얼굴까지 한꺼번에 생각났다. 아까의 웃음, 기꺼워서 웃은 것은 아니다. 이제 그 정도는 보기만 해도 안다. 모르긴 해도 속이 바작바작 타고 있었을걸.
한꺼번에 돌려 막아 놓은 6개월 어음 만기일은 벌써 지났다. 윤연희는 그중 절반만 지불하고 나머지 반절은 연 12%로 추가해서 다시 3개월 뒤로 미뤘다. 그 만기일마저 다가오고 있었다. 다시 미루지는 못할 거다. C은행이 약속대로 대출을 해 줄까? 지금 은행권 분위기가 꽤 살벌한데. 융통이 안 되면 그 사람은 어쩌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