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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6화
9. The Hunter (3)


그날, 우순이 가진 것과 갚아야 할 것들은 모조리 연희에게 넘어갔다. 연희는 인사하러 나온 기형을 보고도 일찍 자야지, 한마디만 했다. 보는 눈이 많아서 저번처럼 쓰다듬어 주거나 꾹 안아 줄 수 없었다. 하지만 기형의 눈에 담긴 감사의 인사는 충분히 알아들었다. 약속을 지켜 주셔서 고마워요. 문제를 해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저씨.
연희는 쓸 만한 회사를 좋은 가격에 건졌다는 사실보다, 자신을 열심히 쳐다보는 꼬마가 더 이상 배고픔과 추위에 벌벌 떨며 밖에서 헤맬 일이 없어졌다는 사실에 더 안도했다.
하지만 집을 나서면서 소년을 돌아보았을 때, 연희는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처럼 주춤거렸다. 아이가 걱정스러워서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그래도 현관에 비슬비슬 서 있던 소년의 구부러진 눈에는 웃음이 걸렸다.
괜찮아요, 아저씨,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용감한 사나이라고요. 아저씨 덕에 용감 레벨이 몇 단계 업그레이드한 걸요. 기형의 웃음에 연희는 그제야 희미하게 미소했다.

아저씨들이 없어지면 어머니가 돌아올까? 기형은 조금 기대했지만, 어머니는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우순은 더 이상 울지도 웃지도 않았고, 말도 한마디 않은 채 며칠 동안 술을 더 퍼마셨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온 기형을 보고 그렁그렁 가래 낀 목소리를 내뱉은 건 회사가 넘어간 지 딱 일주일 후의 일이었다.
“씨발, 야, 거제도로 갈 거다.”
“……네?”
“네놈 형들 있잖냐. 안 보고 싶냐? 새끼가 정도 없어. 셋째 형이 ‘엄마가 남은 돈 털어 가지고 오면 밥은 주겠다.’고 했다더라. 그리고 윤 사장이 너 학비라도 하라고 3,000만 원 남겨 놓고 갔다. 지가 애비라도 돼? 별 웃기는 새끼가 다 있어. 하지만 뭐, 안 준 거보단 낫지. 그거라도 들고 거제도에 가서…… 야 인마, 네 큰엄마 말야.”
앞이 노래졌다. 기형의 큰어머니는 당연히 기형을 좋아하지 않았다. 우순도 아주 싫어했다. 그런데도 오라고 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더 믿을 수 없는 것은 연희가 기형을 위해 돈을 남겨 놓고 갔다는 것이다. ‘기형이 19세 이상 되어서 본인이 직접 사용한다.’는 조건까지 달아 놓았다고 했다. 그 살벌하던 밤, 우순에게 이제는 추가로 동전 한 푼도 더 넘기지 않는다고 고함치던 연희가 남긴 놀라운 배려였다.
정말, 순전히 나를 위해서?
며칠 전 느꼈던 뜨끈한 감정과 비슷한 열기가 속으로 밀려들었다. 눈이 빡빡해진다. 갑자기 아저씨가 미칠 듯이 보고 싶었다. 소곤소곤, 귀에 속삭이던 목소리가 자꾸 떠올랐다. 커다란 손과 굵은 팔이 온몸을 꾸욱 감싸 안아 주던 감촉이 얼굴에서, 허리에서 따끈따끈 되살아났다.
아버지는 집도 회사도 홀랑 가져가 버린 아저씨를 날강도 취급하며 이를 갈았지만, 그때 모였던 아저씨들은 나가면서 ‘선 사장, 이렇게 넘긴 덕에 당신 목숨이라도 건진 줄 알아.’라고 했다. 아마 그게 사실일 것이다. 집 앞에서 어슬렁대던 아저씨도 사라졌고, 이제 아버지는 밖에 마음대로 나갈 수도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게 다였다.
이젠 그 아저씨를 보지 못하게 되는 건가? 거제도로 가야 하니까?
“아빠, 거, 거기 꼭 가야 해요? 나…….”
“씨발 새끼! 싫어? 가기 싫어? 이 개호로 새끼가 애비가 간다는데 싫어? 그럼 이 집에서 썩 나가. 아니면 네 엄마란 년 좀 잡아끌고 오든가. 그년 찾으면 내가 배창세기를 콱! 칼로 자근자근 육시를 해 젓갈을 만들어 버릴라! 더러운 년! 이번엔 어떤 놈하고 눈이 맞아서! 찢어 죽일 년!”
기형은 덜덜 떨면서 아빠가 욕하는 소리를 견뎠다. 엄마를 찢어 죽인다는 것보다 거제도에 내려가서 큰어머니나 배다른 형들과 산다는 것이 더 끔찍했고, 아저씨를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는 사실이 제일 마음 아팠다.
서현과 통화를 해서 거제도로 내려간다고 하니 서현은 쟁쟁대는 음성으로 우는소리를 했다. 기형은 여전히 서현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얌통머리 없는 아가씨가 아저씨와의 유일한 연결 통로였다. 반 친구들은 커다란 카드에 작별 인사말을 빼곡하게 적어서 내주었다.
“전화하면 되는데, 뭐! 가면 새 전화번호 알려 줘!”
친구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지만 기형은 목이 아파서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가서 전화나 할 수 있을까? 큰어머니나 형들이 나를 좋아할 리 없다. 나는 그곳에서 어떻게 지내야 하는 걸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내일이었고, 기형은 입맛을 잃고 바싹 야위었다.
아저씨가 주고 간 돈으로 슈퍼에서 라면을 사고 중국집에서 짜장면과 짬뽕을 시켰다. 아버지는 돈이 어디에서 났는지 묻지도 않았다.

아저씨가 다녀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기형은 아버지를 따라 거제도로 이사했다. 가면서 혹시나 아저씨가 오지는 않을까 계속 주변을 흘끔거렸지만 곰을 닮은 램프의 요정은 이번엔 오지 않았다.
너저분하게 비어 버린 집은 을씨년스러웠다. 우순은 심술스럽게 집 정리도 하지 않고 엉망이 된 상태 그대로 트럭에 올라탔다. 기형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눈을 깜박거렸다.
기형이 챙길 수 있는 건 몇 개 없었다. 교과서와 공책, 학용품, 옷과 양말, 신발, 책들은 가져갈 수 없었다. 가서 놓을 곳도 없다고 했다. 그래도 연희에게 처음 선물 받았던 공룡도감은 챙겼다. 보물 1호. 두꺼운 도감이 들어가 있어서인지 가방은 무거웠다.

***


“선네이션, 설계팀 건축사들, 실력은 좋습니다. 그동안 시공했던 물건들 보면 아주 덩어리 큰 건 많지 않지만 평들이 좋았어요. 골조도 실하게 하는 것 같고, 마감도 깔끔하고, 설비 쪽에서도 잡소리 안 나고. 현장소장하고 밑의 직원들하고 손발도 잘 맞는다고 하더군요. 선 사장이 나중에 다른 데 정신 빼놓지만 않았으면 좋았을걸.”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희타운 팔기 훨씬 전부터요. 찍어 놓고 노리고 있었던 게 맞습니다.”
커다랗고 새까만 눈이 장난스럽게 찡긋했다.
“오래전부터 할인점 사업을 염두에 두고 있었습니다. 공기가 길고 규모가 적지 않은 공사들이 계속 이어질 거라고 생각했고요. 선네이션을 비교적 쉽게 손에 넣긴 했지만 사실, 이제부터가 전쟁이겠죠.”
“사장님. 매 순간 아슬아슬 숨 막혀 죽을 지경입니다. 이런 스타일의 올인은 위험합니다.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면 버틸 여력이 없습니다. 이러다 한 방에 다 잃게 되는 수가 있어요.”
호진의 얼굴에는 기꺼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오히려 무겁기까지 했다. 커피를 마시던 연희가 어색한 듯 무릎을 주물렀다.
“궤도에 올라가면 수성 체제로 돌입하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넘어가는 건 한순간입니다. 미래가 예측이 안 되는 시기 아닙니까.”
“하지만 회사든 사람이든,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가 있지 않습니까. 혼란한 시기가 바로 기회이기도 하고. 올라타는 타이밍을 놓치면 기회는 다시 오지 않아요. 안정기는 기업이 크게 성장하기에 적당한 때가 아닙니다.”
“…….”
“문제를 두려워하면 안 된다, 등을 보이면 안 된다. 항상 그렇게 생각했어요. 정면으로 돌파하면 어쨌든 길은 생길 거라고 믿었습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어서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고요. 이번에…… 빈손으로 쫓겨난 선 사장, 너무 후려 깎았다고 우는 게 좀 딱하긴 했지만 어쩌겠습니까. 불쌍하다고 봐줄 문제가 아니니까. 놔두면 기업은 공중분해에, 본인은 평생 사채업자에게 쫓겨 다녀야 했겠죠. 빈손으로라도 털고 가는 게 나았을 겁니다.”
엄청난 일을 해치우고 나온 사내답지 않게 연희는 덤덤했다. 사업과 관련해서 그는 극히 실리적인 사람이었다. 정에 휘둘려 쓸데없는 비용을 들이는 짓 따위는 절대 하지 않았다. 그는 덩어리 큰 매매와 거래에서도 늘 동전 한 푼까지 악착같이 깎아 내렸다. 이번 선네이션의 매수 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호진은 연희가 미미하게 이맛살을 찌푸리는 것을 발견했다.
“어느 정도는 더 얹어 주는 게 좋았을까 싶었는데.”
호진은 의아한 눈으로 연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연희는 잠시 뒤통수를 긁으며 눈을 끔벅거렸다.
“그 집의 꼬마, 본 적 있죠? 선기형이라고. 올해 열한 살인가 그런데…….”
“예. 작고 마른 꼬마 말이죠? 봤습니다.”
“별명이 하늘을 나는 멸치랍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멸치 같은 꼬마였는데 도무지 키가 안 크더라고요. 이런, 내가 별말을 다…….”
연희는 호진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말끝을 흐렸다.
“있을 곳이 없어서 거제도에 있는 이복형들하고 그 집 엄마, 그러니까 선 사장 본처죠, 그 집에 얹혀살게 되었다더군요.”
“그게 신경이 쓰이십니까? 선 사장이 저질러 놓은 일이니 저희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죠.”
연희는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래도 애가 아직 어린데. 심성도 곱고 속도 깊은 앤데. 가서 몸 고생 맘고생 할 생각하니, 작은 집 한 칸 얻을 돈이라도 얹어 주는 게 좋았을까 싶었어요. 하긴, 엄마가 나간 상태라 별 소용이 없긴 하겠습니다만…….”
호진은 눈을 가늘게 뜨고, 커피를 마시는 사내를 곁눈질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저 사람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했다 생각했는데 난데없이 모르는 얼굴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아이 따위를 신경 쓰고 있었단 말인가? 속에서 갉작갉작 무언가 거슬렸지만 왜 거슬리는지는 알 수 없어서 더 짜증스러웠다.
“그 꼬마와 꽤 친분이 있으신 모양입니다.”
“……썩 자주 보던 꼬마는 아닙니다.”
“그런데요.”
“그래도 특별한 사이인 건 맞습니다.”
뭐라고 설명할 길이 없어 연희는 입을 다물었다. 거래처 사장의 아들. 딸의 친구. 드러난 관계는 그것이 전부였지만 아이를 만날 때마다 속으로 들어차는 온기는, 애잔함은, 안타까움은, 놀라운 공감의 경험은 어떻게 표현할 재간이 없었다.
겁먹고 떨고 있던 아이는 자신의 얼굴의 멍 자국과 휘청대는 다리를 먼저 걱정했다. 꼬마의 시선은 항상 자신의 눈을, 얼굴을, 그리고 마음을 좇고 있었다.
“뭔지 모르겠는데, 하여간 꼬마하고 저하고 보통 인연은 아닌 것 같습니다. 나중에 계속 만나게 될 것 같습니다.”
호진은 창가로 다가가 찻잔을 입술에 댔다. 우유 대신 레몬을 넣은 홍차는 선명하게 붉은 색깔이 되어 찻잔에 자국을 남겼다.
꼬마와 특별한 사이라. 보통 인연이 아니라. 선 사장 앞으로 매수 비용과 상관없이 따로 3천만 원을 책정해서 보낸 것의 정체는 그 집 아들의 학비 용도라고 했다. 이해할 수 없다. 인수비용에 비하면 푼돈에 불과하지만 그래도 뜬금없는 돈이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인연이라.
묘하게 불쾌해진 호진은 고개를 살짝 수그리고 한꺼번에 홍차를 마셨다. 레몬즙이 너무 우러나와 홍차는 시고 떫었다.



10. 거대한 나무의 그늘 (1)


연희는 선네이션 건설사를 인수하고 보상과 철수 작업을 마무리하자마자 바로 신촌 그랜디스 건물을 밀어 내기 시작했다. 그쪽으로 이력이 났던 선네이션의 현장소장급 직원들마저 무시무시한 속도라고 혀를 내둘렀다.
연희는 공사현장에서 진척 상황을 매일 눈으로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박경우 현장소장은 처음엔 싫은 내색도 못 하고 담배만 뿍뿍 피웠지만, 나중에는 연희와 그의 조용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하면 묻기도 전에 작업현황에 대해 속사포처럼 보고했다.
연희와 호진은 훨씬 바빠졌다. 호진은 애초부터 점잖은 비서 자리를 예상하지 않았고 과중한 업무도 대충 손에 붙었다 생각했건만, 이젠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을 틈조차 없었다.
연희는 아침 일찍이 현장을 한 바퀴 돈 후, 호진을 끌고 서울 구석구석 매장 부지를 물색하러 다녔다. 신촌 1호점의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그는 벌써 서너 군데의 매장 자리를 점찍어 놓고 인근 상권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땅값, 몇 년 안에 폭등합니다. 아, 이거 참. 이렇게 훤히 보이는데 왜 사람들은 여기에 투자를 안 할까요?”
매장 부지를 낙점하기 전, 주변 상가와 소비자의 반응을 직접 관찰하는 것은 그의 오랜 습관이었다. 키가 크고 덩치가 좋은 사내와 훤칠하고 후리후리한 귀공자 같은 사내가 나란히 커다란 쇼핑 카트를 밀고 다니며 식자재 매장이나 의류 코너를 쑤석거리니 사람들 눈에 안 띌래야 안 띌 수가 없었다. 장을 보던 사람들은 한 번씩 뒤를 돌아 흘끔거렸다.
“대형 할인점이면 식자재 매장이죠.”
검지를 살랑살랑 흔들며 단언하는 사내의 얼굴은 진지했다.
“어어, 여사님. 이 원 플러스 원 고등어 기획 언제까지 합니까? 며칠 동안 하는 행사예요? 국산? 에이, 중국산 아니고? 하하하, 농담입니다. 너무 싸서 그러지요. 국산이면 어디서 올라오는 건데요? 전 매장 다 하는 건가요? 아, 우리 어머니가 김포 사시는데 그 동네에도 이 행사 하면 알려 주려고.”
호진은 기가 막혀 옆에서 카트 손잡이를 붙잡은 채 픽 웃었다. 순간 호진의 코앞으로 일회용 포크에 찍힌 고등어살이 둥실 떠올랐다.
“호진 씨. 이것 좀 먹어 봐요. 맛이 기가 막혀요. 하나 더 먹어 봐요. 괜찮지 않습니까?”
불곰처럼 덩치가 커다란 사내는 외모와 달리 판매 코너의 ‘여사님’들에게 시시콜콜 물어보는 짓이 아주 틀이 잡혔다. 판매 여사님들에게 애교랍시고 활짝 웃고 눈을 찡긋대기도 하는데 그것도 잘 봐주면 아주 가끔은 귀엽기도 했다.
문제는 그 불곰이 제가 먹어 보고 맛있다고 느낀 것들은 기필코 호진에게도 먹이려 든다는 점이었다. 주전부리를 즐기지 않는 호진은 식품매장을 도는 것이 가장 곤욕이었다. 게다가 연희는 가끔 시식만으로 끼니를 해결하려 들었다.
“사장님, 요기가 되겠습니까? 제가 점심 사 드릴까요?”
호진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져야 그는 움찔하며 포크를 내려놓곤 했다.
“아, 나 혼자만 먹고 있었나? 호진 씨도 시장하시죠? 미안합니다. 좀 드시지.”
연희는 멋쩍게 뒤통수를 긁으며 식당가로 걸음을 옮겼다. 여사들과 떠들 때 내내 실없이 벙글벙글하던 사내는 어느덧 골똘한 생각에 잠겼는지 눈을 반짝반짝 빛내기 시작했다.
연희를 하루 종일 따라다니노라면 다리가 뻣뻣해졌다. 화장품 매장, 의류, 가구, 전자 제품 매장들까지 구석구석 돌아다녔고,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며 동선을 계산했다. 머릿속에서 입구와 매장, 매대 위치를 재배치라도 하는지 연희는 지나가는 사람들과 숱해 부딪쳤다―물론 덩치가 있다 보니 함부로 시비를 거는 사람은 없었다―. 계단 구석에 기대서 수첩에 무언가를 적어 넣고, 고치고, 그리고, 지우고 하면서도 새까만 눈동자에선 항상 불이 형형했다.
호진은 자신의 체력이 부실하다 여겨 본 적이 없었는데 연희를 따라다니는 것은 항상 벅찼다. 벌써 저만치 앞장선 사내가 호진이 뒤처진 것을 보고 쿵쿵대며 달려와 고개를 기웃하고 호진의 얼굴을 살폈다.
“괜찮습니까? 피곤해 보이는데. 영양제 챙겨 먹는 거 있습니까? 없으면 지금 당장 하나 사러 갑시다.”
호진이 조금이라도 미소를 짓고 괜찮다고 해야만 덩치 큰 사내는 허리를 펴고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연희는 입점을 원하는 업체 담당자들과 만날 때도 항상 호진을 데리고 다녔다. 상황에 따라서 호진은 비서실장이기도 했고, 기획실 실장 역을 하기도 했고, 혹은 인사 관리과의 우두머리로 여겨지기도 했다.
상호, 아이템, 사업자 등록과 판매 실적 등을 확인하는 입점 업체 심사 과정이 착착 진행되었다. 품평회는 추석이 지나서 할 것이고, 그전에는 층별 매니저의 인선이 끝나 있을 것이다. 그 후로도 면접을 줄줄이 보아야 할 것이다.
연희는 많은 것을 직접 확인해야 직성이 풀렸다. 하지만 혼자 하기에는 벅찬 일이었고, 또 이제는 그래서도 안 되었다. 호진은 연희의 손이 닿지 않는 빈틈을 꼼꼼하게 메우기 위해 그의 또 다른 손발처럼 움직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일은 아니지만 빠지면 바로 공백이 느껴지는 그런 일들. 연희뿐 아니라 연희의 측근, 거래처 사람들도 조용한 호진의 존재를 점점 크게 느끼기 시작했다.
연희는 감이 좋고 대범하며 일면 그악하다 할 만큼 끈덕진 데가 있었다. 반면, 호진은 감을 믿지 않았으나 찬찬하고 꼼꼼했으며, 손해를 줄이기 위해 잘라 내는 것에 결코 미련을 두지 않았다. 연희는 사람을 다루고 밀어붙이는 능력부터 상권 분석과 수요 예측 능력이 좋았고, 숫자 계산에 밝은 호진은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구석을 귀신같이 찾아냈다.
직원들은 사장과 비서실장이 서로 상생하는 좋은 관계라 여겼다. 이제는 어느 누구도 호진을 비서실장이라는 직함에 한정해 생각하지 않았다. 적어도 연희의 측근들은 호진을 덩치 큰 사장의 사업 파트너로 여겼다.
터가 닦이고 골조가 빠른 속도로 올라갔다. 연희는 공기 단축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했다. 주말에도 정신없이 일을 독촉했고, 일정을 단축하면 줄어든 비용의 30% 내에서 상여금을 지급하겠노라 재차 확인했다. 일을 지연시킬 만한 문제가 있다고 보고하면 꾸물대는 법 없이, 한밤중이라도 뛰쳐나가 속전속결 처리했다.
호진은 진종일 먼지로 뒤발하며 연희를 따라다녀야 했다. 연희가 왜 영어 능통자를 원했는지 알 수 없었다. 영어 따위는 써먹은 적이 없고 현장 심부름꾼 노릇만 실하게 하고 있었다.
“사장님, 영어 능통자 대신 차라리 힘 좋은 사람이나 건설 인부 출신을 구하시는 게 나았을 겁니다.”
“공사 끝나면 저녁때마다 영어 가르쳐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영어 과외 강사가 필요하셨던 겁니까? 학원가에 전단을 붙이시지 그러셨습니까. 저 학원가에선 몸값 비쌀 것 같습니다만.”
“비싸 봐야 학원 강사 아닙니까?”
“원어민 고액 과외라면 사정이 다르겠죠. 뭐, 아무려면 연봉이 연희유통만 하겠습니까? 황송할 따름입니다.”
연희는 입술을 찡그리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긴. 연봉이 짜긴 짜다. 대기업 사원 초봉의 2/3가 조금 넘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고생스러워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금방 건물 올라갈 겁니다. 현금 돌면 연봉 대폭 인상하겠습니다.”
고생 많이 하는 거 안다. 과중한 업무를 마다치 않는 이유를 속단하기는 어렵지만, 알량한 연봉에 목을 매어 그리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놓치고 싶지 않은 사람,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곁에 붙잡아 두고 싶다.
연희는 먼지가 보얗게 얹힌 호진의 머리카락과 짙은 회색 정장, 금테 안경을 보며 미안한 낯을 했다. 가끔 먼지를 털어 주고 싶어 손이 저절로 움질거렸으나 항상 중간에 손을 내리고 고개를 돌렸다.
호진은 그럴 때면 한 걸음 물러서 머리와 옷을 툭툭 털고 매무시를 다듬었고, 연희는 그제야 느리고 순하게 웃어 보였다.
연희는 성격이 소탈해서 말단 여직원과도 격의 없이 지내는 편이었지만 저속한 농담이나 손으로 집적대는 일은 극도로 피했다. 동성 간의 스킨십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여서 어떤 때는 과민하다 싶을 정도로 접촉을 꺼렸다.
연희는 나중에는 현장 곁에 차려진 사무실에서 살다시피 했다. 야간 공사를 강행할 때는 인부들과 함께 잠을 자는 경우도 있었다. 회사 대표라는 사람이 현장 직원들 틈에서 잠을 잤다고? 호진은 기가 막혀 말을 잃었지만 연희는 세면장에서 머리를 감고 이를 닦으면서도 아무렇지도 않은 낯이었다.
“선네이션 직원하고 친해지니 좋고, 사람들 딴짓 안 하니 일 쭉쭉 진행되어서 좋은데 뭘 그러십니까. 여긴 그래도 샤워시설도 있잖습니까. 중국 돌아다닐 땐 말입니다, 여관에서 세수할 곳이 없었습니다. 황사가 지독했는데 세수를 못 해서 얼굴이 누렇게 덮였어요. 나중엔 손가락에 찻물 묻혀서 얼굴에 윤연희, 이름도 써 봤습니다. 뚜렷하게 써지더군요.”
호진의 입술이 실룩, 움직였다. 다 큰 사람이 별짓도 다 해 본다. 재밌습니까, 그런 거? 여긴 중국이 아니잖습니까, 반박하기엔 사장의 얼굴이 너무 태연했다. 킬킬, 결국 호진은 솔직하게 웃었다. 연희는 조그만 의자에 걸터앉아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