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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5화
9. The Hunter (2)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렇게 멋지고 힘세고 든든하며, 힘든 어린이를 위해 쪽팔린 쫄쫄이 옷을 껴입고 뛰쳐나올 맨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아, 안다니까. 중얼거리는 순간, 기형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래.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힘세고 든든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어.
키가 엄청 크고 눈도 코도 귀도 크고, 손발도 큼직한 사람.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사람. 웅웅웅 굵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 든든한 팔과 부드럽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한 눈을 가진 사람. 말하지 않아도 내 속에 든 이야기를 알아듣고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
우루사 아저씨.
조그만 머리통이 쪼그려 붙인 무릎 사이로 폭 파묻혔다. 눈물이 배어 나와 청바지 무릎 부분에 얼룩이 만들어졌다. 소년의 중얼거림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와서 저 좀 도와주세요. 무서워요.
잠시 후 새까맣고 반들반들한 자동차가 기형의 앞에서 멈췄다. 문이 덜컥 열리고 자동차처럼 반들거리는 검은 구두가 기형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 실장 잠깐만 저 앞에 주차해 놓고 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기형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목소리? 기형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우루사 아저씨…….”
이건 거짓말이다. 지금, 여기에 우루사 아저씨가 있을 리가. 아저씨는 꽤 오랫동안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었는데. 하필 지금, 내가 도와 달라고 소원을 비니까 마술처럼 나타나다니. 램프의 요정이 튀어나온 것만큼이나 믿을 수 없었다.
기형은 눈물이 함빡 괸 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긴 그림자가 기형의 온몸을 완전히 덮었다. 커다란 몸이 둥글게 구부러졌다. 무릎을 접고 눈높이를 맞춘 아저씨는 한참 만에야 입을 떼었다.
“너, 기형이구나. 선기형. 왜 여기서…….”
기형은 목이 꽉 막혀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무언가 물으려는 듯 입술을 들썩이다 기형의 집 앞을 먼발치로 살펴보더니 말을 삼켰다. 기형은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눈에 힘을 꾹꾹 주었다.
“저녁때 다 되어 가는데 춥지 않니? 일어나라. 감기 걸린다.”
기형은 고개를 수그리고 일어나서 엉덩이의 먼지를 털었다. 바위에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엉덩이가 얼얼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인사만 하는데도 목구멍이 몹시 쓰렸다. 눈을 깜박거리면 안 되는데, 그러면 눈물이 내려갈 텐데. 아저씨 앞에서 눈물을 쏟는 꼴은 죽여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기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꼴로 멀뚱거리자 우루사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얼굴에 먼지 묻었다. 이런 데 앉아 있으니까 그렇지.”
커다란 손에 잡힌 손수건이 먼지가 아닌 기형의 눈가를 닦아냈다. 그제야 기형은 안심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마음이 뜨끈해지면서 확 풀렸다. 죽었다가 살아난 느낌이 이런 걸까? 눈물이 자꾸 새로 흘러나왔고,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수건을 눈에 대 주었다.
덩치가 태산 같은 사내가 아이를 끼고 들어서자 집 앞에서 서성대던 이들은 흘끔대기만 할 뿐 섣불리 집적대지는 못했다. 당신 이 집 사장하고 무슨 관계요, 으르렁대는 사람들에게 연희는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따라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애꿎은 초인종만 퍽퍽 때렸으나, 선이 끊어진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기다리던 이들은 따라 들어오지 못해 분했는지 앞에 놓인 짜장면 그릇을 발로 걷어찼다. 에이 씨발, 돈 안 주는 놈은 냅두면서 겨우 남의 집에 억지로 들어간 것 가지고 왜 콩밥이야! 에이 썅! 빌어먹을 새끼들! 경찰도 돈 먹었지! 빌어처먹을! 그들이 집 안으로 함부로 들오지 못하는 대신 우순은 마음대로 밖에 나오지 못했다.
“엄마 아빠는 안에 계시니?”
“엄만 나가셨어요.”
“저녁 늦게 오시니?”
“이제…… 안 들어……오실 거 같아요.”
연희는 눈을 끔벅끔벅하며 아무 말 없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번쩍 안아 올렸다. 아이는 일곱 살이나 열한 살이나 여전히 깃털처럼 가벼워 애처로웠다. 엄마가 집을 나간 건가? 이 아이는 그걸 알아차린 걸까? 하긴, 눈치 빠르고 감이 좋은 아이였으니까.
소년의 하회탈 같은 눈에 다시 물이 괴었다. 연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가만히 쉬고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꽉 물고 참는 게 사나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힘내라.”
작은 소년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어깨가 꿈틀거렸지만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우순은 세수도 며칠 안 한 듯 버짐이 허옇게 뜨고, 수염이 지저분한 꼴로 연희를 만났다. 몇 번 이야기가 오가기도 전에 우순은 떨리는 소리로 고함쳤다.
“거 사람이! 내가 사정 좀 급하다고 그렇게 돈 좀 돌리라고 부탁할 때는 없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뭐가 어째? 회사를 내놓으라? 이렇게 똥값으로? 윤 사장 의뭉스러운 거 알고 있었지만 이건 날로 먹겠다는 거 아닌가!”
그 말을 들은 호진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들릴락 말락 웃음소리를 냈다. 연희는 비웃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하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선 사장님. 사채까지 돌리기 시작했으니 이번에 막으셔도 오래 못 버티십니다. 현재 수주량 바닥인 거 압니다. 넘기십시오. 체불 임금하고 어음 돌아오는 거 급하지 않습니까? 내일 오후까지 2차 못 막으면 선네이션 그대로 공중분해 됩니다. 그때는 이 가격도 못 받을 겁니다. 외국계 M&A 회사들은 설비, 자잿값 수준으로 후려칠 겁니다. 내일 만기 어음, 융자분, 사채 안은 거, 체불 임금, 세금 밀린 것들, 모조리 정산하거나 해결하겠습니다.”
탁자 위로 숫자가 빼곡한 종이가 한 장 놓였다. 우순은 한참 동안 눈을 찡그리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이게 다야?”
“더는 못 드립니다. 그 이상 뭘 바라십니까?”
“그 위로는 한 푼도 못 얹겠다는 말이지? 이봐! 지금 선네이션이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이게 얼마나 알짜 그룹인지 알아? 어디 털도 안 뽑고 날로 먹으려고 들어?”
“알짜요? 빚더미에 올라앉은 회사가?”
연희는 입술을 실룩대며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 주거래은행인 기업은행 이자율이 23%던가요? 더 올라갈 거라 들었습니다. 1금융권이 그런데, 2금융권이나 사채 쪽은 얼마나 더 높을지 모르겠군요. 일찍 결정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이 날도둑놈 같은 새끼!”
“지금 선 사장님은 저희 사장님께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호진의 음성은 차분했지만, 연희는 그가 우순을 신랄하게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순도 그것을 눈치챘다. 목소리가 화르르 높아졌다.
“비서 새끼가 어디서 끼어들어!”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선 사장님. 그리고 이 실장도 그만하십시오.”
기형은 그때 오갔던 자세한 대화는 기억하지 못했다. 대략의 분위기만 알 수 있었다. 우루사 아저씨는 아버지의 회사를 사려고 한다. 아버지는 돈을 더 많이 받고 싶어 하고. 아저씨는 빚이 너무 많아 그건 불가능하다고 하는 거다.
기형이 듣기에 아버지는 떼를 쓰며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고, 이 실장 아저씨라는 사람은 아버지를 몹시 한심해하며 비웃는 듯했다. 그 이상은 기형이 알 수 없었다.
“꺼져, 꺼져!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 새끼한테는 안 팔아! 어디 시장통에서 장사하던 새파랗고 무식한 게 날 만만하게 보고 집적거려! 내 나이 육십 여섯이야! 내 평생 키워 온 회사야! 컥 목매 죽는 한이 있어도, 내 회사가 공중 분해되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거저 넘기진 않아! 안 팔아!”
우순이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자 연희와 호진은 노여운 내색도 없이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호진은 차게 웃었다.
“아직 발등에 불이 안 떨어졌나 봅니다. 외국계 회사 손에 걸려서 설비, 자재 값만 받고 넘겨 봐야 정신을 차릴까요.”
문틈으로 엿보던 기형이 비척비척 방문을 열고 나서자 연희는 손을 들어서 호진의 말을 막았다. 기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까 느꼈던 안도감이 생생한 만큼 연희가 그냥 가 버리는 상황이 두려웠다. 까맣고 짙은 눈이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기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형은 한참 동안 눈을 깜박였다.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우루사 아저씨.
가지 마세요.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아빠 좀 설득해 주세요. 아저씨, 난 무서워요.
하지만 기형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것을 물었다.
“아저씨, 어디 많이 다치셨어요?”
“음?”
“다리도 전보다 더 많이 아프신 거 같고, 팔도 그렇고, 얼굴에 멍 자국도 있어요. 괜찮으세요?”
아저씨의 눈이 놀란 듯 벌어졌다.
“아아, 괜찮다. 좀 다쳤는데 거의 다 나았어. 걱정해 줘서 고맙다.”
아저씨는 허리를 구부리고 귓가에 대고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형이 너야말로 괜찮니?”
“네.”
“정말 괜찮니?”
“……네.”
“기형아.”
새까만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큼직한 손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저씨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 괜찮아. 도와주마. 해결될 거다. 눈과 손의 움직임에서 아저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큼직한 손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따끈따끈한 열기가 퍼져 나갔다. 아저씨가 기형을 번쩍 안아 올렸다. 온몸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용감한 사나이로구나. 그래도 많이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는 게 좋다.”
커다란 손이 기형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기운 내라, 일이 빨리 해결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소년은 아저씨를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집어 눌렀다. 우순은 끝까지 나와 보지 않았고, 연희는 기형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다가 집을 나섰다.
우루사 아저씨, 가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소년의 마음속을 크게 채우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덩치 큰 사내는 현관에서 두 번이나 뒤를 돌아 기형의 얼굴을 살폈다.
안다, 아저씨가 내 속에서 울리고 있는 불쌍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하지만 기형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아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인사말이 자꾸 목구멍에 걸렸다. 아저씨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옆에 서 있는 비서 아저씨의 재촉에 떠밀리듯 집을 나섰다. 밖의 사람들과도 이야기할 게 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잡아끌 듯,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는 든든한 아저씨. 커다란 눈에 까맣게 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아저씨. 기형은 연희가 해 준 말을 입에서 굴려 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꽉 물고 참는 게 사나이다. 힘내라. 기형이 너야말로 괜찮니, 정말 괜찮니. 용감한 사나이로구나. 그래도 많이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는 게 좋다. 아저씨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돼. 괜찮아, 도와주마. 해결될 거다.
특히, 마음속으로 들리지 않게 전해지던 마지막 말이 가장 따뜻했다.
“괜찮아, 도와주마. 해결될 거다…….”
기형은 속에 남은 말을 가만히 되풀이했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온기가 점점 온몸으로 퍼져 가는 것 같았다.
사실 우루사 아저씨는 아버지의 거래처 사람일 뿐인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생판 남인데. 아저씨가 날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해 줄 필요가 있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 정도는 기형도 잘 알았다. 그래도 자신에게 신경 쓰고 위로해 주고 잘될 거라 말해 준 것이 고마웠다.
울지 말아야지. 이제는 힘들다고 하지도 않을 거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우루사 아저씨에게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는 건 창피하고 비겁한 일이다. 그래. 내가 용감한 사나이인 게 낫다. 게다가 아저씨는 무슨 일인지 다치기까지 했잖아. 난 그래도 아픈 건 아니잖아.
이제는 말하지 않을 거다. 아저씨처럼,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참아 볼 거다. 나, 선기형은 용감한 사나이니까.
눈물이 다시 나오려는 걸 꽉 참고 기형은 주먹을 꾹 쥐었다. 갑자기 아저씨가 툭툭 쳐 주었던 엉덩이 쪽 주머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뒤져 보니 반으로 접힌 만 원짜리가 열 장 넘게 들어 있었다. 언제, 누가 몰래 넣었는지는 뻔했다.
밥 못 먹은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혹시 마음속으로 배고프다고 했던 이야기까지 알아들은 걸까? 에이 씨. 소년은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 상할까 봐 몰래 넣어 준 걸 텐데, 그래도 속상했다. 억지로 참았던 눈물이 양말 끝으로 퉁퉁 떨어졌다.
집을 나간 기형의 어머니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기형은 놀라지 않았으나 우순은 믿지 않았다. 연락이 아주 끊어졌다고 이를 갈던 우순은 화를 내며 여기저기 전화를 했지만 연락은 끝까지 되지 않았다.
남겨 두었던 보석과 통장 바닥에 남은 돈을 닥닥 긁어 들고 그녀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의 쓸 만한 옷들까지 전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우순은 흥분해서 술을 잔뜩 마시고 그녀가 남겨 두고 간 것들을 찢고 부수기 시작했다.
기형은 우순이 잠들 때까지 밖에서 돌아다니다가 늦게야 들어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은 최종부도가 났다며 집을 때려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흉흉한 말을 뱉었다.
며칠 후 기형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안에 있는 옷장과 우순의 골프채와 백자 항아리와 소파와 탁자 같은 것에 빨간색 종이가 온통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압류물표목,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관. 이 표목을 파괴하거나 무효케 한 자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형은 조그만 목소리로 천천히 읽었다.
우순은 넋을 빼놓은 얼굴로 빨간 딱지가 붙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기형이 종이를 떼어 내려 하자 떼지 마라, 떼지 마, 하고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
연희는 일주일 후에 호진을 대동하고 역삼동을 다시 찾았다. 선네이션의 직원들과, 어음을 받았던 하청업체 사장들도 함께 선우순 사장을 만났다. 기형은 겁에 질려 방에 박혀 있었고, 연희는 내내 차고 살벌했다.
그날 우순은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큰소리치지도 않았다. 시장통에서 장사하던 놈, 따위의 말도 더 이상 내뱉을 수 없었다. 기형은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방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빚잔치, 사채, 대출이율, 융자, 이자 부담, 구조조정, 노조해산, 임금 및 상여금 삭감. 기형이 알 수 없는 낱말들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벼락같이 화를 냈고, 연희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맞받아쳤다. 기형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지금 당신들 내 앞에서까지 시위하나? 당신들이 지금 나한테 큰소리쳐서 얻을 게 뭐야? 판이 깨지면 나는 손해 볼 게 없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난 당신들한테 자선 사업하러 온 게 아니란 말야! 떼쓰고 데모하면 다야? 월급 받고 싶으면 노조 데모 풀고 해산해. 그게 조건이야. 단체 의결권? 좋아! 그럼 회사 공중분해 된 다음에 거리로 나앉아서 단체로 의결하든지 다시 이력서부터 써 보든지 맘대로 하라고. 나중에 내가 해산하라 했다고 트집 잡고 고소할 거면 지금 아예 판 접어. 언제든지 회사 뒤집어엎고 팔아 버릴 거니까.”
“윤 사장님!”
“더 들어! 당분간 상여금 없어. 본봉 2/3, 정규직 인원 절반 워크아웃시키고 필요하면 계약직으로 돌려. 그거라도 받고 살아남을 건가, 여기서 고집 피우다가 개털 되어서 거리로 나앉을 건가 알아서 결정해! 자본 잠식 상태에 부도 맞은 조그만 회사 따위 누가 거들떠볼 거 같나?”
현장에서 뼈가 옹근 이들은 흉험한 기세로 욕을 씹어뱉었지만 소리는 훨씬 작아졌다. 연희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천장을 울렸다.
“날 뜯어먹을 대상으로 보고 왔으면 당장 판 접어. 나도 급해. 다른 회사 찾아보려면 바쁘다고. 내 앞에서 되지도 않는 자료 들이대면서 큰소리치지 마. 월급 세게들 받았던데 그 돈 받는 값은 했던 거 같아? 이 회사는 몇 년 전부터 생산성이 바닥이었어! 영업이익 대비 일 인당 생산성이 3천이 안 되는데, 매출 대비로 따져도 일 인당 7천이 안 되고. 그걸 어디 내 앞에 들이밀 생각을 해?”
울근불근하던 사내들이 갑자기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난 다른 M&A하는 놈처럼 설비 팔아 돈 챙기고 튀려는 생각은 없어. 난 써먹으려고 사는 거니까, 생산성 높여서 살리겠다는 거야. 그래도 고마운 거 모르겠으면 이쯤에서 판 엎자고. 알아들어?”
호진은 뒤에 서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지켜보았다. 생산성을 높여서 기업을 회생시킨다라. 저 사람이 하는 말에는 허언이 없었다. 회사는 살아날 것이다. 저 사람이 끌고 가는 대로, 고된 재정비와 뼈를 깎는 시간을 이겨 낸 후에 그와 함께 성장할 것이다.
윤연희라는 사람을 만난 것은 이 회사의 운이다. 어쩌면 저 피해자인 척하는 늙은 사장에게도. 연희는 다른 쪽에 포진하고 있는 사람들로 몸을 돌렸다.
“6개월 어음 연장 새로 못 받으신다? 그래! 줄줄이 많이도 걸렸던데, 그럼 당장 연쇄부도 한번 맞아 보든가.”
그쪽에 있던 양복 차림의 사내들은 허옇게 질렸으나 점퍼 차림의 소장, 십장들처럼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연희는 목소리를 슬쩍 누그러뜨렸다.
“힘든 거 나도 알아. 나도 자금 피 마르게 돌려 봤던 사람이야. 하지만 같이 사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 건물 빨리 올릴 거야. 상가 철수 작업 끝났고, 설계도 초안 빼놓은 것도 있어. 오케이만 하면 바로 건물 밀어 내고 공구리 타설 들어가면 돼. 만기된 어음들, 같은 금액으로 6개월만 더 뒤로 돌릴게. 그때는 어떻게든 막아 줄게. 현금 흐름이 좋은 목이니까, 불황 때 시작하는 거 걱정 안 해도 돼.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은 오래 안 갈 거라고. 경기 살면 대박 나는 곳이니까 조금만 참고, 자재도 조금만 더 믿고 대 줘.”
“하지만 윤 사장, 직원 월급도 지금 몇 달째 못 주고 있단 말입니다. 일부라도 융통 좀 해 줘야 삽니다. 우리도 물건 공짜로 갖다 대는 거 아니에요.”
“직원들 설득해. 지금 떼이고 나앉는 거보단, 그래도 6개월 후에라도 받는 게 낫지 않겠나.”
“버틸 수 없어요. 그 전에 우리가 주저앉을 겁니다.”
“그러면 명동 바닥에 가서 뚝 까고 어음깡 하든가.”
연희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주 앉은 사내들은 사색이 되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키 작은 사내가 떨리는 소리로 응수했다.
“윤 사장! 지금 어음 할인율 어느 정도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34% 불러요! 저희는 죽고 말 겁니다!”
“박 사장, 어음 연장 못 하면 나도 포기하고 입찰 공고해서 외주 맡기는 수밖에 없어. 나도 살인적인 이자 감수하면서 추진하는 거야. 당신들은 그럼 어쩔 건데? 지금 욕심내면 당신들 다 죽어! 지금 상황 알잖아. 대기업도 다 넘어가는 거. 살아남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난 돈 긁어서 여기 걸린 사채부터 털어야 해.”
윤연희식 설득은 스펙트럼이 넓었다. 호진은 반말을 하며 사람들을 협박하는 연희가 생소하긴 했지만, 억센 사내들에게는 그 방법이 효과가 좋아 보였다.
모인 사람들은 밤 12시가 될 때까지 싸웠고, 우순은 제대로 된 대거리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우순이 말 한마디만 하면 모인 다른 사내들은 악머구리처럼 들러붙어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말아먹어 놓고도 그따위 말이 나와? 반반한 계집 밑구멍으로 돈 다 쓸어 넣고 해롱해롱 정신 못 차릴 때부터 알아봤어. 그러더니 결국 오쟁이지고 회사까지 말아먹은 거 아냐.
우순은 그런 말을 듣고도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화를 냈다간 모인 사람들한테 린치라도 당할 분위기였다. 방에 숨어 있는 기형은 쉼 없이 몸을 떨었다.
연희는 초장에 사정없이 퍼부어 대며 협박하더니 끝판에 가서는 모인 이들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일만 잘되면 상여금도 넉넉하게 주겠다. 공기만 단축해 주면 단축해서 나온 이익금의 30%를 모조리 상여금으로 돌리겠다. 지금만 버티면 된다. 힘든 거 나도 잘 안다. 같이 해 보자. 그게 서로에게 더 낫지 않겠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따로 없다. 근사해. 호진은 진심으로 경탄했다.
9. The Hunter (2)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그렇게 멋지고 힘세고 든든하며, 힘든 어린이를 위해 쪽팔린 쫄쫄이 옷을 껴입고 뛰쳐나올 맨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알아, 안다니까. 중얼거리는 순간, 기형의 머릿속에 희미하게 어떤 얼굴이 떠올랐다.
아, 그래.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힘세고 든든한 사람을 하나 알고 있어.
키가 엄청 크고 눈도 코도 귀도 크고, 손발도 큼직한 사람. 커다란 그림자를 만들어 내는 사람. 웅웅웅 굵은 목소리를 가진 사람. 든든한 팔과 부드럽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기도 한 눈을 가진 사람. 말하지 않아도 내 속에 든 이야기를 알아듣고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
우루사 아저씨.
조그만 머리통이 쪼그려 붙인 무릎 사이로 폭 파묻혔다. 눈물이 배어 나와 청바지 무릎 부분에 얼룩이 만들어졌다. 소년의 중얼거림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아저씨, 도와주세요. 와서 저 좀 도와주세요. 무서워요.
잠시 후 새까맣고 반들반들한 자동차가 기형의 앞에서 멈췄다. 문이 덜컥 열리고 자동차처럼 반들거리는 검은 구두가 기형의 앞으로 다가왔다. 이 실장 잠깐만 저 앞에 주차해 놓고 오세요, 하는 목소리가 기형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익숙한 목소리? 기형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우루사 아저씨…….”
이건 거짓말이다. 지금, 여기에 우루사 아저씨가 있을 리가. 아저씨는 꽤 오랫동안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었는데. 하필 지금, 내가 도와 달라고 소원을 비니까 마술처럼 나타나다니. 램프의 요정이 튀어나온 것만큼이나 믿을 수 없었다.
기형은 눈물이 함빡 괸 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긴 그림자가 기형의 온몸을 완전히 덮었다. 커다란 몸이 둥글게 구부러졌다. 무릎을 접고 눈높이를 맞춘 아저씨는 한참 만에야 입을 떼었다.
“너, 기형이구나. 선기형. 왜 여기서…….”
기형은 목이 꽉 막혀서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아저씨는 무언가 물으려는 듯 입술을 들썩이다 기형의 집 앞을 먼발치로 살펴보더니 말을 삼켰다. 기형은 눈물이 흐르지 않도록 눈에 힘을 꾹꾹 주었다.
“저녁때 다 되어 가는데 춥지 않니? 일어나라. 감기 걸린다.”
기형은 고개를 수그리고 일어나서 엉덩이의 먼지를 털었다. 바위에 오래 앉아 있어서인지 엉덩이가 얼얼했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인사만 하는데도 목구멍이 몹시 쓰렸다. 눈을 깜박거리면 안 되는데, 그러면 눈물이 내려갈 텐데. 아저씨 앞에서 눈물을 쏟는 꼴은 죽여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데. 기형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꼴로 멀뚱거리자 우루사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얼굴에 먼지 묻었다. 이런 데 앉아 있으니까 그렇지.”
커다란 손에 잡힌 손수건이 먼지가 아닌 기형의 눈가를 닦아냈다. 그제야 기형은 안심하고 눈을 깜박거렸다. 마음이 뜨끈해지면서 확 풀렸다. 죽었다가 살아난 느낌이 이런 걸까? 눈물이 자꾸 새로 흘러나왔고, 아저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한참 동안 수건을 눈에 대 주었다.
덩치가 태산 같은 사내가 아이를 끼고 들어서자 집 앞에서 서성대던 이들은 흘끔대기만 할 뿐 섣불리 집적대지는 못했다. 당신 이 집 사장하고 무슨 관계요, 으르렁대는 사람들에게 연희는 일언반구하지 않았다. 눈 한 번 마주치지 않고 성큼성큼 들어섰다. 따라 들어가지 못하는 이들은 애꿎은 초인종만 퍽퍽 때렸으나, 선이 끊어진 초인종은 울리지 않았다.
기다리던 이들은 따라 들어오지 못해 분했는지 앞에 놓인 짜장면 그릇을 발로 걷어찼다. 에이 씨발, 돈 안 주는 놈은 냅두면서 겨우 남의 집에 억지로 들어간 것 가지고 왜 콩밥이야! 에이 썅! 빌어먹을 새끼들! 경찰도 돈 먹었지! 빌어처먹을! 그들이 집 안으로 함부로 들오지 못하는 대신 우순은 마음대로 밖에 나오지 못했다.
“엄마 아빠는 안에 계시니?”
“엄만 나가셨어요.”
“저녁 늦게 오시니?”
“이제…… 안 들어……오실 거 같아요.”
연희는 눈을 끔벅끔벅하며 아무 말 없이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다가 번쩍 안아 올렸다. 아이는 일곱 살이나 열한 살이나 여전히 깃털처럼 가벼워 애처로웠다. 엄마가 집을 나간 건가? 이 아이는 그걸 알아차린 걸까? 하긴, 눈치 빠르고 감이 좋은 아이였으니까.
소년의 하회탈 같은 눈에 다시 물이 괴었다. 연희는 무슨 말을 하려다가 한숨을 가만히 쉬고는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꽉 물고 참는 게 사나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힘내라.”
작은 소년은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어깨가 꿈틀거렸지만 입 밖으로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다.
우순은 세수도 며칠 안 한 듯 버짐이 허옇게 뜨고, 수염이 지저분한 꼴로 연희를 만났다. 몇 번 이야기가 오가기도 전에 우순은 떨리는 소리로 고함쳤다.
“거 사람이! 내가 사정 좀 급하다고 그렇게 돈 좀 돌리라고 부탁할 때는 없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뭐가 어째? 회사를 내놓으라? 이렇게 똥값으로? 윤 사장 의뭉스러운 거 알고 있었지만 이건 날로 먹겠다는 거 아닌가!”
그 말을 들은 호진은 입술을 움직이지 않고 들릴락 말락 웃음소리를 냈다. 연희는 비웃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대신 상황을 조곤조곤 설명하며 압박하기 시작했다.
“선 사장님. 사채까지 돌리기 시작했으니 이번에 막으셔도 오래 못 버티십니다. 현재 수주량 바닥인 거 압니다. 넘기십시오. 체불 임금하고 어음 돌아오는 거 급하지 않습니까? 내일 오후까지 2차 못 막으면 선네이션 그대로 공중분해 됩니다. 그때는 이 가격도 못 받을 겁니다. 외국계 M&A 회사들은 설비, 자잿값 수준으로 후려칠 겁니다. 내일 만기 어음, 융자분, 사채 안은 거, 체불 임금, 세금 밀린 것들, 모조리 정산하거나 해결하겠습니다.”
탁자 위로 숫자가 빼곡한 종이가 한 장 놓였다. 우순은 한참 동안 눈을 찡그리며 종이를 들여다보았다.
“이게 다야?”
“더는 못 드립니다. 그 이상 뭘 바라십니까?”
“그 위로는 한 푼도 못 얹겠다는 말이지? 이봐! 지금 선네이션이 조금 흔들리긴 하지만 이게 얼마나 알짜 그룹인지 알아? 어디 털도 안 뽑고 날로 먹으려고 들어?”
“알짜요? 빚더미에 올라앉은 회사가?”
연희는 입술을 실룩대며 소리 없이 웃었다.
“지금 주거래은행인 기업은행 이자율이 23%던가요? 더 올라갈 거라 들었습니다. 1금융권이 그런데, 2금융권이나 사채 쪽은 얼마나 더 높을지 모르겠군요. 일찍 결정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이 날도둑놈 같은 새끼!”
“지금 선 사장님은 저희 사장님께 고마워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호진의 음성은 차분했지만, 연희는 그가 우순을 신랄하게 비웃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우순도 그것을 눈치챘다. 목소리가 화르르 높아졌다.
“비서 새끼가 어디서 끼어들어!”
“말 함부로 하지 마십시오, 선 사장님. 그리고 이 실장도 그만하십시오.”
기형은 그때 오갔던 자세한 대화는 기억하지 못했다. 대략의 분위기만 알 수 있었다. 우루사 아저씨는 아버지의 회사를 사려고 한다. 아버지는 돈을 더 많이 받고 싶어 하고. 아저씨는 빚이 너무 많아 그건 불가능하다고 하는 거다.
기형이 듣기에 아버지는 떼를 쓰며 화풀이를 하는 것 같았고, 이 실장 아저씨라는 사람은 아버지를 몹시 한심해하며 비웃는 듯했다. 그 이상은 기형이 알 수 없었다.
“꺼져, 꺼져!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네놈 새끼한테는 안 팔아! 어디 시장통에서 장사하던 새파랗고 무식한 게 날 만만하게 보고 집적거려! 내 나이 육십 여섯이야! 내 평생 키워 온 회사야! 컥 목매 죽는 한이 있어도, 내 회사가 공중 분해되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거저 넘기진 않아! 안 팔아!”
우순이 안방 문을 쾅 닫고 들어가자 연희와 호진은 노여운 내색도 없이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호진은 차게 웃었다.
“아직 발등에 불이 안 떨어졌나 봅니다. 외국계 회사 손에 걸려서 설비, 자재 값만 받고 넘겨 봐야 정신을 차릴까요.”
문틈으로 엿보던 기형이 비척비척 방문을 열고 나서자 연희는 손을 들어서 호진의 말을 막았다. 기형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아까 느꼈던 안도감이 생생한 만큼 연희가 그냥 가 버리는 상황이 두려웠다. 까맣고 짙은 눈이 복잡한 감정을 담은 채 기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형은 한참 동안 눈을 깜박였다.
아저씨.
아저씨.
……아저씨, 우루사 아저씨.
가지 마세요. 어떻게 좀 해 주세요. 아빠 좀 설득해 주세요. 아저씨, 난 무서워요.
하지만 기형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아까부터 눈에 거슬리던 것을 물었다.
“아저씨, 어디 많이 다치셨어요?”
“음?”
“다리도 전보다 더 많이 아프신 거 같고, 팔도 그렇고, 얼굴에 멍 자국도 있어요. 괜찮으세요?”
아저씨의 눈이 놀란 듯 벌어졌다.
“아아, 괜찮다. 좀 다쳤는데 거의 다 나았어. 걱정해 줘서 고맙다.”
아저씨는 허리를 구부리고 귓가에 대고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형이 너야말로 괜찮니?”
“네.”
“정말 괜찮니?”
“……네.”
“기형아.”
새까만 눈동자가 가까워졌다. 큼직한 손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저씨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된다. 괜찮아. 도와주마. 해결될 거다. 눈과 손의 움직임에서 아저씨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큼직한 손이 닿은 부분에서부터 따끈따끈한 열기가 퍼져 나갔다. 아저씨가 기형을 번쩍 안아 올렸다. 온몸이 가볍게 위로 올라갔다.
“용감한 사나이로구나. 그래도 많이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는 게 좋다.”
커다란 손이 기형의 엉덩이를 툭툭 쳤다.
“기운 내라, 일이 빨리 해결되도록 노력하고 있다.”
소년은 아저씨를 붙잡고 싶은 마음을 억지로 집어 눌렀다. 우순은 끝까지 나와 보지 않았고, 연희는 기형의 머리를 한참 쓰다듬다가 집을 나섰다.
우루사 아저씨, 가지 마세요. 도와주세요. 소년의 마음속을 크게 채우고 있는 사람 앞에서, 그 말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덩치 큰 사내는 현관에서 두 번이나 뒤를 돌아 기형의 얼굴을 살폈다.
안다, 아저씨가 내 속에서 울리고 있는 불쌍한 목소리를 들었다는 걸. 하지만 기형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 아까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인사말이 자꾸 목구멍에 걸렸다. 아저씨는 무슨 말을 하려는 듯 눈썹을 찡그렸지만 옆에 서 있는 비서 아저씨의 재촉에 떠밀리듯 집을 나섰다. 밖의 사람들과도 이야기할 게 있는 것 같았다. 아저씨는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잡아끌 듯, 천천히 걸음을 떼었다.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는 든든한 아저씨. 커다란 눈에 까맣게 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 아저씨. 기형은 연희가 해 준 말을 입에서 굴려 보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꽉 물고 참는 게 사나이다. 힘내라. 기형이 너야말로 괜찮니, 정말 괜찮니. 용감한 사나이로구나. 그래도 많이 힘들 땐 힘들다고 말하는 게 좋다. 아저씨한테는 숨기지 않아도 돼. 괜찮아, 도와주마. 해결될 거다.
특히, 마음속으로 들리지 않게 전해지던 마지막 말이 가장 따뜻했다.
“괜찮아, 도와주마. 해결될 거다…….”
기형은 속에 남은 말을 가만히 되풀이했다. 마음 한구석에 있던 온기가 점점 온몸으로 퍼져 가는 것 같았다.
사실 우루사 아저씨는 아버지의 거래처 사람일 뿐인데. 나와 아무 상관없는 생판 남인데. 아저씨가 날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까? 아니, 무엇을 해 줄 필요가 있을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 정도는 기형도 잘 알았다. 그래도 자신에게 신경 쓰고 위로해 주고 잘될 거라 말해 준 것이 고마웠다.
울지 말아야지. 이제는 힘들다고 하지도 않을 거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 우루사 아저씨에게 힘들다고 엄살을 부리는 건 창피하고 비겁한 일이다. 그래. 내가 용감한 사나이인 게 낫다. 게다가 아저씨는 무슨 일인지 다치기까지 했잖아. 난 그래도 아픈 건 아니잖아.
이제는 말하지 않을 거다. 아저씨처럼,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참아 볼 거다. 나, 선기형은 용감한 사나이니까.
눈물이 다시 나오려는 걸 꽉 참고 기형은 주먹을 꾹 쥐었다. 갑자기 아저씨가 툭툭 쳐 주었던 엉덩이 쪽 주머니에서 이물감이 느껴졌다. 뒤져 보니 반으로 접힌 만 원짜리가 열 장 넘게 들어 있었다. 언제, 누가 몰래 넣었는지는 뻔했다.
밥 못 먹은 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혹시 마음속으로 배고프다고 했던 이야기까지 알아들은 걸까? 에이 씨. 소년은 갑자기 자존심이 상했다. 자존심 상할까 봐 몰래 넣어 준 걸 텐데, 그래도 속상했다. 억지로 참았던 눈물이 양말 끝으로 퉁퉁 떨어졌다.
집을 나간 기형의 어머니는 들어오지 않았다. 다음날도, 또 다음날도. 기형은 놀라지 않았으나 우순은 믿지 않았다. 연락이 아주 끊어졌다고 이를 갈던 우순은 화를 내며 여기저기 전화를 했지만 연락은 끝까지 되지 않았다.
남겨 두었던 보석과 통장 바닥에 남은 돈을 닥닥 긁어 들고 그녀는 종적을 감추었다. 그녀의 쓸 만한 옷들까지 전부 없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린 우순은 흥분해서 술을 잔뜩 마시고 그녀가 남겨 두고 간 것들을 찢고 부수기 시작했다.
기형은 우순이 잠들 때까지 밖에서 돌아다니다가 늦게야 들어갔다.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내들은 최종부도가 났다며 집을 때려 부수기라도 할 것처럼 흉흉한 말을 뱉었다.
며칠 후 기형이 학교에서 돌아오니 집 안에 있는 옷장과 우순의 골프채와 백자 항아리와 소파와 탁자 같은 것에 빨간색 종이가 온통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압류물표목, 서울중앙지방법원 집행관. 이 표목을 파괴하거나 무효케 한 자는 형벌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기형은 조그만 목소리로 천천히 읽었다.
우순은 넋을 빼놓은 얼굴로 빨간 딱지가 붙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기형이 종이를 떼어 내려 하자 떼지 마라, 떼지 마, 하고 멍청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연희는 일주일 후에 호진을 대동하고 역삼동을 다시 찾았다. 선네이션의 직원들과, 어음을 받았던 하청업체 사장들도 함께 선우순 사장을 만났다. 기형은 겁에 질려 방에 박혀 있었고, 연희는 내내 차고 살벌했다.
그날 우순은 술에 취하지도 않았고 큰소리치지도 않았다. 시장통에서 장사하던 놈, 따위의 말도 더 이상 내뱉을 수 없었다. 기형은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방문에 귀를 바짝 붙였다.
빚잔치, 사채, 대출이율, 융자, 이자 부담, 구조조정, 노조해산, 임금 및 상여금 삭감. 기형이 알 수 없는 낱말들이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벼락같이 화를 냈고, 연희는 주먹으로 탁자를 내리치며 맞받아쳤다. 기형은 움찔움찔 몸을 떨었다.
“지금 당신들 내 앞에서까지 시위하나? 당신들이 지금 나한테 큰소리쳐서 얻을 게 뭐야? 판이 깨지면 나는 손해 볼 게 없어!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 난 당신들한테 자선 사업하러 온 게 아니란 말야! 떼쓰고 데모하면 다야? 월급 받고 싶으면 노조 데모 풀고 해산해. 그게 조건이야. 단체 의결권? 좋아! 그럼 회사 공중분해 된 다음에 거리로 나앉아서 단체로 의결하든지 다시 이력서부터 써 보든지 맘대로 하라고. 나중에 내가 해산하라 했다고 트집 잡고 고소할 거면 지금 아예 판 접어. 언제든지 회사 뒤집어엎고 팔아 버릴 거니까.”
“윤 사장님!”
“더 들어! 당분간 상여금 없어. 본봉 2/3, 정규직 인원 절반 워크아웃시키고 필요하면 계약직으로 돌려. 그거라도 받고 살아남을 건가, 여기서 고집 피우다가 개털 되어서 거리로 나앉을 건가 알아서 결정해! 자본 잠식 상태에 부도 맞은 조그만 회사 따위 누가 거들떠볼 거 같나?”
현장에서 뼈가 옹근 이들은 흉험한 기세로 욕을 씹어뱉었지만 소리는 훨씬 작아졌다. 연희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천장을 울렸다.
“날 뜯어먹을 대상으로 보고 왔으면 당장 판 접어. 나도 급해. 다른 회사 찾아보려면 바쁘다고. 내 앞에서 되지도 않는 자료 들이대면서 큰소리치지 마. 월급 세게들 받았던데 그 돈 받는 값은 했던 거 같아? 이 회사는 몇 년 전부터 생산성이 바닥이었어! 영업이익 대비 일 인당 생산성이 3천이 안 되는데, 매출 대비로 따져도 일 인당 7천이 안 되고. 그걸 어디 내 앞에 들이밀 생각을 해?”
울근불근하던 사내들이 갑자기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그래도 난 다른 M&A하는 놈처럼 설비 팔아 돈 챙기고 튀려는 생각은 없어. 난 써먹으려고 사는 거니까, 생산성 높여서 살리겠다는 거야. 그래도 고마운 거 모르겠으면 이쯤에서 판 엎자고. 알아들어?”
호진은 뒤에 서서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지켜보았다. 생산성을 높여서 기업을 회생시킨다라. 저 사람이 하는 말에는 허언이 없었다. 회사는 살아날 것이다. 저 사람이 끌고 가는 대로, 고된 재정비와 뼈를 깎는 시간을 이겨 낸 후에 그와 함께 성장할 것이다.
윤연희라는 사람을 만난 것은 이 회사의 운이다. 어쩌면 저 피해자인 척하는 늙은 사장에게도. 연희는 다른 쪽에 포진하고 있는 사람들로 몸을 돌렸다.
“6개월 어음 연장 새로 못 받으신다? 그래! 줄줄이 많이도 걸렸던데, 그럼 당장 연쇄부도 한번 맞아 보든가.”
그쪽에 있던 양복 차림의 사내들은 허옇게 질렸으나 점퍼 차림의 소장, 십장들처럼 소리를 지르지는 않았다. 연희는 목소리를 슬쩍 누그러뜨렸다.
“힘든 거 나도 알아. 나도 자금 피 마르게 돌려 봤던 사람이야. 하지만 같이 사는 방법은 이 방법밖에 없어. 건물 빨리 올릴 거야. 상가 철수 작업 끝났고, 설계도 초안 빼놓은 것도 있어. 오케이만 하면 바로 건물 밀어 내고 공구리 타설 들어가면 돼. 만기된 어음들, 같은 금액으로 6개월만 더 뒤로 돌릴게. 그때는 어떻게든 막아 줄게. 현금 흐름이 좋은 목이니까, 불황 때 시작하는 거 걱정 안 해도 돼.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은 오래 안 갈 거라고. 경기 살면 대박 나는 곳이니까 조금만 참고, 자재도 조금만 더 믿고 대 줘.”
“하지만 윤 사장, 직원 월급도 지금 몇 달째 못 주고 있단 말입니다. 일부라도 융통 좀 해 줘야 삽니다. 우리도 물건 공짜로 갖다 대는 거 아니에요.”
“직원들 설득해. 지금 떼이고 나앉는 거보단, 그래도 6개월 후에라도 받는 게 낫지 않겠나.”
“버틸 수 없어요. 그 전에 우리가 주저앉을 겁니다.”
“그러면 명동 바닥에 가서 뚝 까고 어음깡 하든가.”
연희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주 앉은 사내들은 사색이 되었다. 머리가 반쯤 벗겨진 키 작은 사내가 떨리는 소리로 응수했다.
“윤 사장! 지금 어음 할인율 어느 정도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34% 불러요! 저희는 죽고 말 겁니다!”
“박 사장, 어음 연장 못 하면 나도 포기하고 입찰 공고해서 외주 맡기는 수밖에 없어. 나도 살인적인 이자 감수하면서 추진하는 거야. 당신들은 그럼 어쩔 건데? 지금 욕심내면 당신들 다 죽어! 지금 상황 알잖아. 대기업도 다 넘어가는 거. 살아남고 봐야 하는 거 아닌가? 지금 난 돈 긁어서 여기 걸린 사채부터 털어야 해.”
윤연희식 설득은 스펙트럼이 넓었다. 호진은 반말을 하며 사람들을 협박하는 연희가 생소하긴 했지만, 억센 사내들에게는 그 방법이 효과가 좋아 보였다.
모인 사람들은 밤 12시가 될 때까지 싸웠고, 우순은 제대로 된 대거리를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우순이 말 한마디만 하면 모인 다른 사내들은 악머구리처럼 들러붙어 욕설을 퍼부었다.
당신이 말아먹어 놓고도 그따위 말이 나와? 반반한 계집 밑구멍으로 돈 다 쓸어 넣고 해롱해롱 정신 못 차릴 때부터 알아봤어. 그러더니 결국 오쟁이지고 회사까지 말아먹은 거 아냐.
우순은 그런 말을 듣고도 더 이상 화를 내지 못했다. 그 상황에서 화를 냈다간 모인 사람들한테 린치라도 당할 분위기였다. 방에 숨어 있는 기형은 쉼 없이 몸을 떨었다.
연희는 초장에 사정없이 퍼부어 대며 협박하더니 끝판에 가서는 모인 이들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일만 잘되면 상여금도 넉넉하게 주겠다. 공기만 단축해 주면 단축해서 나온 이익금의 30%를 모조리 상여금으로 돌리겠다. 지금만 버티면 된다. 힘든 거 나도 잘 안다. 같이 해 보자. 그게 서로에게 더 낫지 않겠나.
지킬 박사와 하이드가 따로 없다. 근사해. 호진은 진심으로 경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