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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4화
8. 철거 현장 (4)
“그래요, 짜장면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의리! 사나이라면 의리! 충성! 애국심! 살신성인! 주인 의식!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이제부터 호진 씨를 연희유통 사나이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전치 6주 나왔는데 그 정도 인심은 쓸 수 있지요. 나중에 몸 좀 좋아지면 사장님 빼고 사나이들까지 거하게 한잔합시다! 아, 사장님한테 보약 값이나 톡톡히 받아 챙기시고. 술값으로 개평도 좀 떼 두시고.”
그는 호진에게 ‘라이방(RayBan)’이라는 본때 나는 별명이 생겼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다.
철거가 시작되면서 현장에 현장 사무소와 연희유통 일반 사무실이 같이 차려졌다. 연희는 멍 자국이 조금 가시자마자 팔다리에 깁스를 두른 채 임시로 만든 컨테이너 사무실로 복귀했다.
깁스를 풀고도 그는 한참 동안 다리를 절었다. 애초부터 좋지 않던 왼쪽 다리가 발목까지 부러져, 덩치 큰 사내는 죽을상을 하고 끙끙거렸다. 오른손을 쓰는 잡다한 일에도 호진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도움을 청할 때마다 조금씩 머무적거렸다.
그러면서도 매일 철거 현장을 돌아다니며 진척 상황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얼굴이 시커멓게 멍든, 멀리서 보면 판다곰 같은 목발 사나이와 검은 레이밴의 사나이 둘이서 ‘바바리 옷자락’을 휘날리며 현장을 쑤석대는 꼴은 퍽 볼만했다. 무쇠 팔 무쇠 다리, 일명 마징곰과 라이방은 협잡질에서도 비주얼에서도 시너지 효과가 좋은 파트너였다. 직원들은 낄낄거리며 대놓고 흉을 보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말 연휴가 끼어서 사무실은 한껏 들떴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사람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빨리 건물 올려서 사장실을 만들어야지 퇴근마다 눈치 보여 죽겠다. 직원들의 얼굴은 불만스러웠다.
“다들 들어가세요. 연휴 잘 보내십시오. 화요일에 봅시다.”
연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원들이 표정을 확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사장과 사이가 좋아도 오늘 같은 날까지 퇴근 시간을 잘라먹는 윗대가리란 그저 방자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실장은 잠시 남으세요.”
덩치 큰 사내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덩치가 좋고 키가 몹시 큰 체형이라 트렌치코트를 입으면 중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팔이 불편한지 어깨를 한참 들썩이자 호진은 가까이 가서 소매를 바로잡아 주고 얇은 목도리를 목에 걸어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렸다. 연희는 훅, 크게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사장님?”
“……아, 아닙니다.”
연희가 망설이는 동안 호진은 조용히 기다렸다. 전광석화, 속전속결, 빛의 속도라 불리는 사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참 꾸물거렸다. 시선을 아래로 약간 어긋나게 돌린 다음에야 낮은 목소리가 느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뭐야. 이 말을 하려고 남으라고 한 건가? 호진이 가볍게 웃는 순간 연희는 책상 밑에 숨겨 두었던 종이가방을 꺼냈다. 가방을 내밀어 놓고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호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받자 연희는 가타부타 없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연휴 때 푹 쉬십시오, 이 실장. 먼저 갑니다.”
복도를 빠져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어쩐지 황급한 듯했다. 호진은 얼빠진 표정을 지우지도 못한 채 가방을 열었다.
“이게…….”
연한 보라색 스트라이프가 든 드레스 셔츠가 실크 타이와 함께 포장되어 있었다. 뜬금없이 이게 뭔가 싶던 호진은 문득 핏물이 들고 찢어져 못쓰게 된 셔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떠올렸다.
이거 참.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
카드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거 압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鍊熙.」
호진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연희는 글씨를 느리게 쓰는 편이었다. 그것도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쓰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그가 쓴 글자들은 한글이든 한문이든 한결같이 부드럽고 단아하여 글씨 자체가 예술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성도 빼놓고 이름만. 연희, 연희, 연희…….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어감이 고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호진은 오랫동안 서서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왜…… 이렇게 글씨까지 예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난방이 과해서였는지 이마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9. The Hunter (1)
“차라리 재미없는 학원이라도 돌아다닐 때가 좋았어.”
기형은 벽에 등을 기대고 쪼그리고 앉아 중얼거렸다. 지금은 학원비가 몇 달째 밀려 학원은 한 군데도 가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
집에 있는 건 그래도 운이 좋은 거다. 집 밖에는 기형이 ‘힘센 삼촌’이라 부르던 선네이션의 직원들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몇 명씩 무리지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깜깜해질 때까지 밖에서 빙빙 돌아다녀야 했다.
기형의 귀에 자주 들린 단어는 부도, 체불임금, 사채, 콩밥, IMF 따위의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기형이 어머니는 아빠 회사가 예전부터도 그렇게 튼튼하진 않았다 했다. 아들에게 아빠 회사에 빚이 많다고 설명해 주며 한탄하던 여자는 통장을 들여다보며 이를 갈았다.
기형의 큰형 기원을 위시한 배다른 형들은 애초부터 선네이션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했다. 형들은 기형의 어머니를 경멸하고 증오했고, 그 때문에 아버지와 자주 싸워 거의 인연을 끊고 살고 있었다.
눈치 빠른 기형은 형들의 폭풍 같은 감정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기형이 큰어머니라고 부르는 거제도 친어머니 곁을 지켰다. 기형은 형들이 아빠 회사가 깡통이라는 걸 알고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안방에서 와장창, 요란하게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형은 황급히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독기 오른 걸걸한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다른 집 여편네들은 땅 사고 아파트 사서 이럴 때 척척 잘도 내놓는다던데 당신은 뭐 없어? 똑똑한 여자들은 남편이 사업 어려울 때 돈 턱턱 벌어서 비상금 잘도 찔러 준다는데, 이건 어째 이래 새대가리야! 당신은 옷이나 보석밖에 안 샀나? 에이 썅! 개 같은 년! 내놔! 돈 모아 놓은 거 내놔!”
“무슨 떼돈을 안겨 줬다고 이 지랄이야? 이 손 안 치워?”
“이거 봐라? 어디서 감히 눈 새파랗게 뜨고 대들어? 눈깔에 힘 안 빼?”
기형은 귀를 틀어막았다. 이제 어머니는 고분고분 맞는 대신 늙은 아버지와 드세게 몸싸움을 했다. 사실 어머니의 앙칼진 대응은 아버지가 사업을 말아먹는다는 말이 자주 나오던 때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아직 피부에 주름 하나 없는 어머니의 힘은 검버섯에 굵은 주름투성이가 된 아버지의 힘에 그다지 꿀리지 않았다. 왜 그동안 맞고 살았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전세가 역전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최근 집을 자주 비웠다. 아침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아버지는 보기만 하면 소리나 지르고, 예전에 사모님, 사모님 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이던 덩치 큰 직원들, 소장들, 돈을 떼인 거래처 사장들이 살기등등하게 몰려와 험한 소리를 해 대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형은 그런 식으로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 썅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이, 밥 안 해 놓고 싸질러 다니다 늦게 기어들어 온 주제에 어디서 눈 똑바로 뜨고 지랄이야?”
“돈이나 넣어 주고 소리 지르지? 돈 갖다 준 게 백 년 전이야!”
“지금 나만 이래? 대기업들 다 죽어 나가는 거 몰라? 실업자 거리로 다 쏟아져 나오는 거 안 보여? 따라지 계집년이 나 만나서 그동안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호강한 생각 안 해? 쌀말이나 걷어 먹는 거 고마워하지 않고 이년이!”
“당신 회사는 IMF 전부터 잘 안 굴러갔잖아! 그걸 모를 줄 알아? 사모님 좋아하시네! 늙어빠진 개새끼가 쥐어 패기나 했지 호사는 무슨 호사야? 내가 속았어, 속았어! 아주 이가 박박 갈려! 지금 우리 굶어 죽게 생겼어! 집에서 담배 좀 고만 펴! 숨 막혀 뒈지겠어!”
기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진땀을 흘렸다. 숨 막히게 더웠지만 등줄기로 돋은 소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요새 아버지만큼이나 소리를 잘 질렀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는데 숨기고 참고 살았는지,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성격이 변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았다. 제발 어떻게든 이 상황이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최근 들어 싸움의 양상은 심각해졌다. 성질 급한 아버지가 곁에 놓인 것을 집어 던지면 어머니는 커다란 장식용 항아리나 쌓아 놓은 접시 더미를 번쩍 들어 집어 던졌고, 그럴 때마다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주먹질을 할라치면 어머니는 골프채를 붕붕 휘둘렀다. 죽여 이 개새끼야. 마누라 패는 새끼, 돈도 안 주면 네깟 새끼 죽어도 아쉬울 거 없어. 이제 더 때리면 너 잘 때 목에 칼 꽂을 줄 알아.
기형은 싸움이 길어질 때마다 이불 속에서 덜덜 떨다가 배를 앓았다. 공포는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화장실 가기도 두려웠다. 마루에 나가면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훨씬 생생하게 들렸다.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지만 안방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치더라도 싸움을 말릴 수만 있으면 기형은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싸움에서 아이가 끼어들어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기형은 이내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소리 나지 않게 박혀 있는 것, 정 위험할 것 같으면 밖으로 도망 나가서 집 안의 사금파리가 치워진 다음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배고파.
쌀값을 받지 못했다 악을 쓰는 어머니는 밥도 제대로 해 놓지 않았다. 대체 밥을 언제 해 줄까? 아니 해 주기는 할까? 접때처럼 밤새 싸우다가 말까? 차라리 밥 안 해 준다고 처음부터 말했으면 일찍 자기라도 하잖아.
사나이가 부엌에 들어가면 불알 떨어진다고 큰소리하던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밥하는 법이라도 배워 놓았으면 좋았을걸. 싸움이 끝나고 밥이 되길 기다리는 것은 숨 막히도록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가사도우미 순영 아줌마나 정원사 아저씨가 오지 않게 된 것도 벌써 오래전이었다. 기형은 아침을 거르기도 했고 저녁을 굶기도 했다. 휴일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학교에서 먹는 점심마저 못 먹게 될까 봐.
엄마 아버지가 저렇게 무섭게 싸우는데 밥 생각이 난다는 것이 너무 한심하고 슬펐지만 발동이 걸린 배고픔은 질겼다. 기형은 냉장고를 뒤져 멸치가 든 반찬통을 꺼냈다. 밥솥에는 찬밥이 반 공기쯤 남아 있었다. 모조리 품에 넣고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입이 짧고 밥 먹는 속도가 늦었던 소년은 조금씩 키가 자라는 중이었고 예전과 달리 음식마다 입에 달았다. 엄마가 예전에 많이 먹으라고 할 때 진작 먹어 둘걸. 세상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이럴 줄 알았나.
요새 나라가 발칵 뒤집혀서 멀쩡한 회사가 넘어가고 거리로 쫓겨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아버지도 나도 그 행렬에 들어간 걸까? 그 행렬이 길다 해서 비참함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안방에서 무엇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기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차가운 밥과 멸치를 씹었다. 그렇게 매일 뭐가 깨져도 깨질 것은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배가 고픈 것도 같고, 아픈 것도 같았다. 목이 아픈 것도 같고, 눈이 아픈 것도 같았다. 그래도 밥과 멸치가 너무 맛있어서 기형은 괴로웠다.
***
“역삼동 뱅뱅 사거리 쪽으로 갑시다. 선네이션 건설사 선우순 사장 자택입니다.”
연희는 뒷좌석에 앉자마자 가방에 든 서류뭉치를 꺼내서 빠르게 훑었다. 확인은 이미 끝났다. 선네이션 건설사. 오늘 기업은행 강남점으로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1차 부도 소식이 알려질 것이고, 내일 영업시간까지 돈을 넣지 못하면 최종부도처리 될 것이다.
선우순 사장이 돈을 융통하려고 명동 바닥을 미친 듯이 헤맸다고 들었다. 해 줄 턱이 없지. 선네이션의 어음은 업자들 사이에서 진작부터 부도수표 취급되고 있었다.
“선네이션, 혹시 희타운 매장 리노베이션 맡았던 시공사 아닙니까?”
“맞습니다. 앞으로 공사에 그 회사가 필요해요. 지금 매장뿐만 아니라, 앞으로 매장 늘릴 때마다 신축이나 리노베이션이 줄줄 있을 겁니다. 시공사한테 엄청난 마진을 안겨 주면서 공사할 생각 없습니다. 작아도 실력 좋은 건설사를 하나 사서 돌릴 생각이었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호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신촌 그랜디스 유통 자리뿐 아니라 계속 확장해 나가려고 준비하는구나. 온 사회가 구제금융의 여파로 정신없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업 인수나 합병의 적기다. 역시 윤연희,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동안 희타운 일해 준 거 보면 실력이 나쁘지 않습니다. 연 매출, 수주액을 감안하면 규모가 큰 회사는 아닌데 시공 후 평가들은 꽤 좋더군요. 몇 번 적당한 가격으로 인수하려고 했는데 사장이 억지를 쓰더라고요. 그때 넘기기만 했어도 사채까지 가지는 않았을 텐데. 하여간 1차 부도 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내일 은행 마감 시간이 최종부도니까 오늘내일 중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겁니다.”
“사장님도 현재 자금이 빡빡하신 상황 아닙니까?”
“지금 이 상황이 아니면 원하는 값에 죽어도 못 살 겁니다. 처음 인수 제의한 가격의 반의 반값으로 부를 겁니다. 걸려 있는 것 죄다 처리하면 선 사장 손에 떨어지는 건 한 푼도 없겠지만 어쨌든 합병만 제대로 되면, 2년 내에 들인 자금 회수합니다. 잡아야 해요.”
호진은 말없이 강남역 테헤란로에서 말죽거리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물론 2년 후, 혹은 그보다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지금 건설사를 잡으면 대박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자금 상황으로 보면 목돈을 들여 건설사를 인수하는 것보다는 입찰 공고를 하고 시공사를 얼른 선정해 맡기는 게 안전했다. 지금 바로 공사 시작한다 해도, 돈이 나오기까지는 1년 넘는 시일이 소요된다. 분명 보고했는데. 어찌하려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아 봐야죠. 1년 반만 버티면 우리 회사는 한꺼번에 도약합니다. 불안정할 때가 기회예요.”
호진의 들리지 않는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 연희는 눈을 빛냈다. 사냥감을 앞둔 대호처럼 새까만 눈동자에서 인광이 튀었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가 보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엮일 거대한 유통망이. 그것을 움켜잡기 위해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올인인가.
이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두려웠다. 매 순간 벼랑에 서서 발을 딛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유동성 위기관리를 중시하는 호진에게는 버거운 방식이었다.
하지만 호진은 이의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장이고, 자신은 비서이며 시장을 선점한 경쟁업체의 간자(間者)이기도 했다. 아무리 앞길이 위험해 보인다 해도 그것을 경고할 의무나 그의 실패를 염려할 이유는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뒤에 앉아 있는 사내가 흥분한 기색으로 웃는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는 지금 노랗게 살기 어린 눈을 빛내는, 사냥을 앞둔 맹수였다. 온 신경이 그에게로 쏠렸다. 호진은 눈을 가늘게 하며 이마를 찡그렸다. 입 안에 고이는 침이 못 견디게 쓰게 느껴졌다.
***
날이 점점 쌀쌀해졌다. 벌써 해가 어스름하게 기울었다. 기형은 가끔 골목 모퉁이로 나가 아저씨들이 돌아갔는지 확인했다. 아직 있어, 아직도. 터덜터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 주저앉았다.
어제부터 내내 배가 고프다. 집에 밥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제 멸치통도 바닥을 드러냈다. 가 봐야 먹을 것이 있을 성싶지도 않다. 가서 뭐라도 사 먹을까?
오늘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어머니가 머리를 오랫동안 쓰다듬어 주고 주머니에 넣어 준 만 원짜리가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사 먹지 않았다. 엄마가 준 만 원짜리. 어쩐지 그 돈을 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눈 속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오늘 엄마 친척 집에 좀 갔다 올 거야. 오늘 못 들어올지도 몰라. 옷 잘 챙겨 입고 다녀. 추우면 내복 꼭 껴입고. 감기 걸릴 거 같으면 비타민 두 개씩 먹고 자고. 머리는 감고 잘 말려야 감기 안 든다.’
엄마는 마스카라가 덩어리진 눈을 깜박깜박하며 현관에서 오래 잔소리를 했다. 기형은 이상한 예감에 소름이 돋았지만 목이 꽉 메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재수 없는 말이란 입 밖으로 나오면 현실화되기 쉬운, 위험한 거라고 늘 말했다.
엄마, 나가지 마세요. 엄마. 제발.
언제라도 좋으니 꼭 돌아오기만 하세요, 엄마.
그래서 간절한 말은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그 말을 했을 때 나올 반응도 짐작이 되었다. 그녀가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말하든 그것은 결국 기형 자신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것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얼른 오세요.”
현관에 선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나갔을까? 내가 지레 겁을 먹은 걸까? 들어가면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있을지도 몰라. 내가 괜한 걱정을 했던 걸지도 몰라. 기형은 학교에서 내내 자기암시를 걸며 속을 졸였다. 학교가 끝나자 얼른 집에 가고 싶기도 했고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하루 사이에 부쩍 늘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기형은 선뜻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기형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험상한 사내들이 꼬마, 아빠 좀 만나 봐야 하니까 같이 가자, 하며 따라올 것이다. 벌써 몇 번 겪은 일이었다. 그 앞에 대고 싫어요, 하기는 너무 두려웠다.
저 아저씨들을 어떻게 뚫고 들어가야 할까? 엄마는 집에 있을까 없을까? 아빠는 화를 낼까 아니면 그저 잠을 자고 있을까? 겁나는 일투성이다.
기형은 골목 어귀에 쪼그리고 앉았다. 배가 고프고 점점 추워졌다. 아까는 햇볕이라도 따뜻했는데. 여기 오래 있을 수도 없고, 깜깜할 때까지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을 수도 없고. 추워질수록 자꾸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저씨들은 밤늦게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안다. 아무리 아니라고, 엄마가 집에 있을 거라고 속으로 외쳐 봐야, 어머니는 집에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 지도 꽤 되었지만 가로등이 없는 골목 어귀는 어두움이 짙었다. 이젠 너무 춥고 무서워서 어머니가 있건 없건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을 헤치고 집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누구라도 나 좀 도와주세요. 나 어떡해요.
만화에서 나오는 특수 제복의 사나이들은 세상살이가 힘든 어린이나 여자들이 부를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는데.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맨 자 돌림의 사나이들은 한결같이 떡대가 벌어지고 알통이 두둑했다. 하다못해 램프의 요정 지니마저 어깨 하나는 튼실하지 않았나.
8. 철거 현장 (4)
“그래요, 짜장면이 뭐가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의리! 사나이라면 의리! 충성! 애국심! 살신성인! 주인 의식!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선생님의 뜻을 이어받아 이제부터 호진 씨를 연희유통 사나이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전치 6주 나왔는데 그 정도 인심은 쓸 수 있지요. 나중에 몸 좀 좋아지면 사장님 빼고 사나이들까지 거하게 한잔합시다! 아, 사장님한테 보약 값이나 톡톡히 받아 챙기시고. 술값으로 개평도 좀 떼 두시고.”
그는 호진에게 ‘라이방(RayBan)’이라는 본때 나는 별명이 생겼다는 기쁜 소식을 알려 주었다.
철거가 시작되면서 현장에 현장 사무소와 연희유통 일반 사무실이 같이 차려졌다. 연희는 멍 자국이 조금 가시자마자 팔다리에 깁스를 두른 채 임시로 만든 컨테이너 사무실로 복귀했다.
깁스를 풀고도 그는 한참 동안 다리를 절었다. 애초부터 좋지 않던 왼쪽 다리가 발목까지 부러져, 덩치 큰 사내는 죽을상을 하고 끙끙거렸다. 오른손을 쓰는 잡다한 일에도 호진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는 도움을 청할 때마다 조금씩 머무적거렸다.
그러면서도 매일 철거 현장을 돌아다니며 진척 상황을 눈으로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렸다. 얼굴이 시커멓게 멍든, 멀리서 보면 판다곰 같은 목발 사나이와 검은 레이밴의 사나이 둘이서 ‘바바리 옷자락’을 휘날리며 현장을 쑤석대는 꼴은 퍽 볼만했다. 무쇠 팔 무쇠 다리, 일명 마징곰과 라이방은 협잡질에서도 비주얼에서도 시너지 효과가 좋은 파트너였다. 직원들은 낄낄거리며 대놓고 흉을 보았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주말 연휴가 끼어서 사무실은 한껏 들떴다. 퇴근 시간이 되자마자 사람들은 슬금슬금 눈치를 보고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빨리 건물 올려서 사장실을 만들어야지 퇴근마다 눈치 보여 죽겠다. 직원들의 얼굴은 불만스러웠다.
“다들 들어가세요. 연휴 잘 보내십시오. 화요일에 봅시다.”
연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직원들이 표정을 확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사장과 사이가 좋아도 오늘 같은 날까지 퇴근 시간을 잘라먹는 윗대가리란 그저 방자의 대상일 뿐이었다.
“이 실장은 잠시 남으세요.”
덩치 큰 사내는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리다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트렌치코트를 입었다. 덩치가 좋고 키가 몹시 큰 체형이라 트렌치코트를 입으면 중후하면서도 자연스러운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팔이 불편한지 어깨를 한참 들썩이자 호진은 가까이 가서 소매를 바로잡아 주고 얇은 목도리를 목에 걸어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렸다. 연희는 훅, 크게 숨을 몰아쉬며 한 걸음 물러섰다.
“사장님?”
“……아, 아닙니다.”
연희가 망설이는 동안 호진은 조용히 기다렸다. 전광석화, 속전속결, 빛의 속도라 불리는 사내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한참 꾸물거렸다. 시선을 아래로 약간 어긋나게 돌린 다음에야 낮은 목소리가 느직하게 흘러나왔다.
“그동안 고생했습니다.”
뭐야. 이 말을 하려고 남으라고 한 건가? 호진이 가볍게 웃는 순간 연희는 책상 밑에 숨겨 두었던 종이가방을 꺼냈다. 가방을 내밀어 놓고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호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손을 내밀어 받자 연희는 가타부타 없이 몸을 돌려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연휴 때 푹 쉬십시오, 이 실장. 먼저 갑니다.”
복도를 빠져나가는 발걸음 소리가 어쩐지 황급한 듯했다. 호진은 얼빠진 표정을 지우지도 못한 채 가방을 열었다.
“이게…….”
연한 보라색 스트라이프가 든 드레스 셔츠가 실크 타이와 함께 포장되어 있었다. 뜬금없이 이게 뭔가 싶던 호진은 문득 핏물이 들고 찢어져 못쓰게 된 셔츠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떠올렸다.
이거 참. 별걸 다 기억하고 있네.
카드가 한 장 끼워져 있었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던 거 압니다.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鍊熙.」
호진은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연희는 글씨를 느리게 쓰는 편이었다. 그것도 만년필로 한 자 한 자 정성껏 쓰느라 시간이 더 걸렸다. 하지만 그가 쓴 글자들은 한글이든 한문이든 한결같이 부드럽고 단아하여 글씨 자체가 예술이라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성도 빼놓고 이름만. 연희, 연희, 연희……. 그러고 보니 저 사람, 어감이 고운 이름을 갖고 있었다. 호진은 오랫동안 서서 카드를 들여다보았다.
“……왜…… 이렇게 글씨까지 예뻐.”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난방이 과해서였는지 이마에, 손바닥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 나왔다.
9. The Hunter (1)
“차라리 재미없는 학원이라도 돌아다닐 때가 좋았어.”
기형은 벽에 등을 기대고 쪼그리고 앉아 중얼거렸다. 지금은 학원비가 몇 달째 밀려 학원은 한 군데도 가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혀 있다.
집에 있는 건 그래도 운이 좋은 거다. 집 밖에는 기형이 ‘힘센 삼촌’이라 부르던 선네이션의 직원들이 살기등등한 얼굴로 몇 명씩 무리지어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잘못하면 집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깜깜해질 때까지 밖에서 빙빙 돌아다녀야 했다.
기형의 귀에 자주 들린 단어는 부도, 체불임금, 사채, 콩밥, IMF 따위의 알 수 없는 것들이었다. 기형이 어머니는 아빠 회사가 예전부터도 그렇게 튼튼하진 않았다 했다. 아들에게 아빠 회사에 빚이 많다고 설명해 주며 한탄하던 여자는 통장을 들여다보며 이를 갈았다.
기형의 큰형 기원을 위시한 배다른 형들은 애초부터 선네이션을 물려받지 않겠다고 했다. 형들은 기형의 어머니를 경멸하고 증오했고, 그 때문에 아버지와 자주 싸워 거의 인연을 끊고 살고 있었다.
눈치 빠른 기형은 형들의 폭풍 같은 감정을 진작부터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기형이 큰어머니라고 부르는 거제도 친어머니 곁을 지켰다. 기형은 형들이 아빠 회사가 깡통이라는 걸 알고서 그랬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안방에서 와장창, 요란하게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기형은 황급히 침대 속으로 들어가 이불을 뒤집어썼다. 독기 오른 걸걸한 목소리가 집 안을 울렸다.
“다른 집 여편네들은 땅 사고 아파트 사서 이럴 때 척척 잘도 내놓는다던데 당신은 뭐 없어? 똑똑한 여자들은 남편이 사업 어려울 때 돈 턱턱 벌어서 비상금 잘도 찔러 준다는데, 이건 어째 이래 새대가리야! 당신은 옷이나 보석밖에 안 샀나? 에이 썅! 개 같은 년! 내놔! 돈 모아 놓은 거 내놔!”
“무슨 떼돈을 안겨 줬다고 이 지랄이야? 이 손 안 치워?”
“이거 봐라? 어디서 감히 눈 새파랗게 뜨고 대들어? 눈깔에 힘 안 빼?”
기형은 귀를 틀어막았다. 이제 어머니는 고분고분 맞는 대신 늙은 아버지와 드세게 몸싸움을 했다. 사실 어머니의 앙칼진 대응은 아버지가 사업을 말아먹는다는 말이 자주 나오던 때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다. 아직 피부에 주름 하나 없는 어머니의 힘은 검버섯에 굵은 주름투성이가 된 아버지의 힘에 그다지 꿀리지 않았다. 왜 그동안 맞고 살았는지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전세가 역전되어 버렸다.
어머니는 최근 집을 자주 비웠다. 아침에 나갔다가 늦게 들어오는 일이 잦았다. 아버지는 보기만 하면 소리나 지르고, 예전에 사모님, 사모님 하며 허리를 90도로 숙이던 덩치 큰 직원들, 소장들, 돈을 떼인 거래처 사장들이 살기등등하게 몰려와 험한 소리를 해 대니 그럴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기형은 그런 식으로 어머니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이 썅년!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년이, 밥 안 해 놓고 싸질러 다니다 늦게 기어들어 온 주제에 어디서 눈 똑바로 뜨고 지랄이야?”
“돈이나 넣어 주고 소리 지르지? 돈 갖다 준 게 백 년 전이야!”
“지금 나만 이래? 대기업들 다 죽어 나가는 거 몰라? 실업자 거리로 다 쏟아져 나오는 거 안 보여? 따라지 계집년이 나 만나서 그동안 사모님 소리 들으면서 호강한 생각 안 해? 쌀말이나 걷어 먹는 거 고마워하지 않고 이년이!”
“당신 회사는 IMF 전부터 잘 안 굴러갔잖아! 그걸 모를 줄 알아? 사모님 좋아하시네! 늙어빠진 개새끼가 쥐어 패기나 했지 호사는 무슨 호사야? 내가 속았어, 속았어! 아주 이가 박박 갈려! 지금 우리 굶어 죽게 생겼어! 집에서 담배 좀 고만 펴! 숨 막혀 뒈지겠어!”
기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진땀을 흘렸다. 숨 막히게 더웠지만 등줄기로 돋은 소름은 사라지지 않았다. 어머니는 요새 아버지만큼이나 소리를 잘 질렀다. 원래 저런 성격이었는데 숨기고 참고 살았는지, 원래는 그렇지 않았는데 성격이 변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아무래도 좋았다. 제발 어떻게든 이 상황이 끝이 났으면 좋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최근 들어 싸움의 양상은 심각해졌다. 성질 급한 아버지가 곁에 놓인 것을 집어 던지면 어머니는 커다란 장식용 항아리나 쌓아 놓은 접시 더미를 번쩍 들어 집어 던졌고, 그럴 때마다 어마어마한 소리가 났다. 아버지가 주먹질을 할라치면 어머니는 골프채를 붕붕 휘둘렀다. 죽여 이 개새끼야. 마누라 패는 새끼, 돈도 안 주면 네깟 새끼 죽어도 아쉬울 거 없어. 이제 더 때리면 너 잘 때 목에 칼 꽂을 줄 알아.
기형은 싸움이 길어질 때마다 이불 속에서 덜덜 떨다가 배를 앓았다. 공포는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화장실 가기도 두려웠다. 마루에 나가면 두 사람이 싸우는 소리가 훨씬 생생하게 들렸다.
어떻게든 말리고 싶었지만 안방에는 들어갈 수 없었다. 용기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다치더라도 싸움을 말릴 수만 있으면 기형은 기꺼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른들의 싸움에서 아이가 끼어들어 해결할 수 있는 건 없었다. 다치지 않는 것이 최선이었다. 기형은 이내 자신의 역할을 받아들였다. 소리 나지 않게 박혀 있는 것, 정 위험할 것 같으면 밖으로 도망 나가서 집 안의 사금파리가 치워진 다음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배고파.
쌀값을 받지 못했다 악을 쓰는 어머니는 밥도 제대로 해 놓지 않았다. 대체 밥을 언제 해 줄까? 아니 해 주기는 할까? 접때처럼 밤새 싸우다가 말까? 차라리 밥 안 해 준다고 처음부터 말했으면 일찍 자기라도 하잖아.
사나이가 부엌에 들어가면 불알 떨어진다고 큰소리하던 아빠가 원망스러웠다. 밥하는 법이라도 배워 놓았으면 좋았을걸. 싸움이 끝나고 밥이 되길 기다리는 것은 숨 막히도록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가사도우미 순영 아줌마나 정원사 아저씨가 오지 않게 된 것도 벌써 오래전이었다. 기형은 아침을 거르기도 했고 저녁을 굶기도 했다. 휴일이 다가오는 것이 두려웠다. 학교에서 먹는 점심마저 못 먹게 될까 봐.
엄마 아버지가 저렇게 무섭게 싸우는데 밥 생각이 난다는 것이 너무 한심하고 슬펐지만 발동이 걸린 배고픔은 질겼다. 기형은 냉장고를 뒤져 멸치가 든 반찬통을 꺼냈다. 밥솥에는 찬밥이 반 공기쯤 남아 있었다. 모조리 품에 넣고 방에 들어와 문을 잠그고 손가락으로 집어 먹었다.
입이 짧고 밥 먹는 속도가 늦었던 소년은 조금씩 키가 자라는 중이었고 예전과 달리 음식마다 입에 달았다. 엄마가 예전에 많이 먹으라고 할 때 진작 먹어 둘걸. 세상 참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가 이럴 줄 알았나.
요새 나라가 발칵 뒤집혀서 멀쩡한 회사가 넘어가고 거리로 쫓겨나는 사람들이 많다고 들었다. 아버지도 나도 그 행렬에 들어간 걸까? 그 행렬이 길다 해서 비참함이 덜어지지는 않았다.
안방에서 무엇인가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들으며 기형은 이불을 뒤집어쓰고 차가운 밥과 멸치를 씹었다. 그렇게 매일 뭐가 깨져도 깨질 것은 끝도 없이 튀어나왔다. 배가 고픈 것도 같고, 아픈 것도 같았다. 목이 아픈 것도 같고, 눈이 아픈 것도 같았다. 그래도 밥과 멸치가 너무 맛있어서 기형은 괴로웠다.
“역삼동 뱅뱅 사거리 쪽으로 갑시다. 선네이션 건설사 선우순 사장 자택입니다.”
연희는 뒷좌석에 앉자마자 가방에 든 서류뭉치를 꺼내서 빠르게 훑었다. 확인은 이미 끝났다. 선네이션 건설사. 오늘 기업은행 강남점으로 돌아온 어음을 막지 못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1차 부도 소식이 알려질 것이고, 내일 영업시간까지 돈을 넣지 못하면 최종부도처리 될 것이다.
선우순 사장이 돈을 융통하려고 명동 바닥을 미친 듯이 헤맸다고 들었다. 해 줄 턱이 없지. 선네이션의 어음은 업자들 사이에서 진작부터 부도수표 취급되고 있었다.
“선네이션, 혹시 희타운 매장 리노베이션 맡았던 시공사 아닙니까?”
“맞습니다. 앞으로 공사에 그 회사가 필요해요. 지금 매장뿐만 아니라, 앞으로 매장 늘릴 때마다 신축이나 리노베이션이 줄줄 있을 겁니다. 시공사한테 엄청난 마진을 안겨 주면서 공사할 생각 없습니다. 작아도 실력 좋은 건설사를 하나 사서 돌릴 생각이었습니다.”
운전대를 잡은 호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지금 신촌 그랜디스 유통 자리뿐 아니라 계속 확장해 나가려고 준비하는구나. 온 사회가 구제금융의 여파로 정신없이 곤두박질하고 있는 지금이야말로 기업 인수나 합병의 적기다. 역시 윤연희,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그동안 희타운 일해 준 거 보면 실력이 나쁘지 않습니다. 연 매출, 수주액을 감안하면 규모가 큰 회사는 아닌데 시공 후 평가들은 꽤 좋더군요. 몇 번 적당한 가격으로 인수하려고 했는데 사장이 억지를 쓰더라고요. 그때 넘기기만 했어도 사채까지 가지는 않았을 텐데. 하여간 1차 부도 나기를 기다렸습니다. 내일 은행 마감 시간이 최종부도니까 오늘내일 중으로 일을 처리해야 할 겁니다.”
“사장님도 현재 자금이 빡빡하신 상황 아닙니까?”
“지금 이 상황이 아니면 원하는 값에 죽어도 못 살 겁니다. 처음 인수 제의한 가격의 반의 반값으로 부를 겁니다. 걸려 있는 것 죄다 처리하면 선 사장 손에 떨어지는 건 한 푼도 없겠지만 어쨌든 합병만 제대로 되면, 2년 내에 들인 자금 회수합니다. 잡아야 해요.”
호진은 말없이 강남역 테헤란로에서 말죽거리 방향으로 핸들을 꺾었다.
물론 2년 후, 혹은 그보다 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자면 지금 건설사를 잡으면 대박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자금 상황으로 보면 목돈을 들여 건설사를 인수하는 것보다는 입찰 공고를 하고 시공사를 얼른 선정해 맡기는 게 안전했다. 지금 바로 공사 시작한다 해도, 돈이 나오기까지는 1년 넘는 시일이 소요된다. 분명 보고했는데. 어찌하려는가.
“……어떻게든 살아남아 봐야죠. 1년 반만 버티면 우리 회사는 한꺼번에 도약합니다. 불안정할 때가 기회예요.”
호진의 들리지 않는 질문을 듣기라도 한 듯 연희는 눈을 빛냈다. 사냥감을 앞둔 대호처럼 새까만 눈동자에서 인광이 튀었다.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가 보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이름으로 엮일 거대한 유통망이. 그것을 움켜잡기 위해 숨이 턱에 차오를 때까지 밀어붙이겠다는 것이다. 죽을 때 죽더라도 올인인가.
이 사람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두려웠다. 매 순간 벼랑에 서서 발을 딛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유동성 위기관리를 중시하는 호진에게는 버거운 방식이었다.
하지만 호진은 이의를 말하지 않았다. 그는 사장이고, 자신은 비서이며 시장을 선점한 경쟁업체의 간자(間者)이기도 했다. 아무리 앞길이 위험해 보인다 해도 그것을 경고할 의무나 그의 실패를 염려할 이유는 없다. 아니, 없어야 한다.
뒤에 앉아 있는 사내가 흥분한 기색으로 웃는다. 이를 드러내고 웃는다. 그는 지금 노랗게 살기 어린 눈을 빛내는, 사냥을 앞둔 맹수였다. 온 신경이 그에게로 쏠렸다. 호진은 눈을 가늘게 하며 이마를 찡그렸다. 입 안에 고이는 침이 못 견디게 쓰게 느껴졌다.
날이 점점 쌀쌀해졌다. 벌써 해가 어스름하게 기울었다. 기형은 가끔 골목 모퉁이로 나가 아저씨들이 돌아갔는지 확인했다. 아직 있어, 아직도. 터덜터덜 있던 자리로 되돌아가 주저앉았다.
어제부터 내내 배가 고프다. 집에 밥이 있을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제 멸치통도 바닥을 드러냈다. 가 봐야 먹을 것이 있을 성싶지도 않다. 가서 뭐라도 사 먹을까?
오늘 아침 학교 가기 전에 어머니가 머리를 오랫동안 쓰다듬어 주고 주머니에 넣어 준 만 원짜리가 있긴 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사 먹지 않았다. 엄마가 준 만 원짜리. 어쩐지 그 돈을 써서는 안 될 것 같았다. 눈 속 깊은 곳이 욱신거렸다.
‘오늘 엄마 친척 집에 좀 갔다 올 거야. 오늘 못 들어올지도 몰라. 옷 잘 챙겨 입고 다녀. 추우면 내복 꼭 껴입고. 감기 걸릴 거 같으면 비타민 두 개씩 먹고 자고. 머리는 감고 잘 말려야 감기 안 든다.’
엄마는 마스카라가 덩어리진 눈을 깜박깜박하며 현관에서 오래 잔소리를 했다. 기형은 이상한 예감에 소름이 돋았지만 목이 꽉 메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재수 없는 말이란 입 밖으로 나오면 현실화되기 쉬운, 위험한 거라고 늘 말했다.
엄마, 나가지 마세요. 엄마. 제발.
언제라도 좋으니 꼭 돌아오기만 하세요, 엄마.
그래서 간절한 말은 입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할 수 있는 건 없었고, 그 말을 했을 때 나올 반응도 짐작이 되었다. 그녀가 거짓을 말하든 진실을 말하든 그것은 결국 기형 자신에게 더 큰 상처가 될 것이었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얼른 오세요.”
현관에 선 그녀는 대답하는 대신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나갔을까? 내가 지레 겁을 먹은 걸까? 들어가면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 있을지도 몰라. 내가 괜한 걱정을 했던 걸지도 몰라. 기형은 학교에서 내내 자기암시를 걸며 속을 졸였다. 학교가 끝나자 얼른 집에 가고 싶기도 했고 최대한 늦게 들어가고 싶기도 했다.
집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사람들이 하루 사이에 부쩍 늘었다. 날이 어두워졌는데도 그들은 돌아가지 않았다. 기형은 선뜻 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기형이 열쇠로 문을 열고 들어가면 험상한 사내들이 꼬마, 아빠 좀 만나 봐야 하니까 같이 가자, 하며 따라올 것이다. 벌써 몇 번 겪은 일이었다. 그 앞에 대고 싫어요, 하기는 너무 두려웠다.
저 아저씨들을 어떻게 뚫고 들어가야 할까? 엄마는 집에 있을까 없을까? 아빠는 화를 낼까 아니면 그저 잠을 자고 있을까? 겁나는 일투성이다.
기형은 골목 어귀에 쪼그리고 앉았다. 배가 고프고 점점 추워졌다. 아까는 햇볕이라도 따뜻했는데. 여기 오래 있을 수도 없고, 깜깜할 때까지 놀이터에서 혼자 놀고 있을 수도 없고. 추워질수록 자꾸 눈물이 나오려 했다.
아저씨들은 밤늦게까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냥 안다. 아무리 아니라고, 엄마가 집에 있을 거라고 속으로 외쳐 봐야, 어머니는 집에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 지도 꽤 되었지만 가로등이 없는 골목 어귀는 어두움이 짙었다. 이젠 너무 춥고 무서워서 어머니가 있건 없건 집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저들을 헤치고 집으로 들어갈 자신이 없었다.
누구라도 나 좀 도와주세요. 나 어떡해요.
만화에서 나오는 특수 제복의 사나이들은 세상살이가 힘든 어린이나 여자들이 부를 때마다 어디선가 나타나곤 했는데. 슈퍼맨, 배트맨, 스파이더맨. 맨 자 돌림의 사나이들은 한결같이 떡대가 벌어지고 알통이 두둑했다. 하다못해 램프의 요정 지니마저 어깨 하나는 튼실하지 않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