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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2화
8. 철거 현장 (2)
퇴거 작업이 시작되면서 연희유통은 비상 체제가 가동되었다. 호진을 위시한 직원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하루 종일 전화를 붙들고 상인들을 설득하거나 매장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다.
관련 법규에 의하면, 건물을 철거할 경우 계약 기간이 다 되지 않았더라도 보증금만 돌려주면 퇴거를 시킬 수 있었다. 권리금과 시설비에 대한 보상 의무는 건물주에게 없었다. 하지만 권리금을 잔뜩 들이고 그곳에 생계를 걸고 있는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기천만 원에 이르는 돈이 공중분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권리금과 시설비에 대한 전액 보상을 요구했다. 상가 연합회에서 견고하게 뭉친 그들은 포클레인이 들어와도 물러나지 않겠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연희는 직원들을 대동하고 설득이 되지 않는 매장마다 돌아다니며 매일매일 피 말리는 싸움을 벌였다. 욕설은 양반이고 멱살잡이도 드물지 않았다. 귀를 후비고 있는 매장 주인 앞에서 호진이 ‘상가 임대차보호법 10조의 7호, 목적 건물의 전부 또는 대부분 철거하거나 재건축하기 위하여 목적 건물의 점유를 회복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읊기 시작하면 주인들은 으레 멱살을 붙잡았다.
그래서 우리한테 죽으라는 거냐, 엉! 우리가 권리금을 얼마나 퍼들이고 들어왔는지 알아! 권리금은 둘째고 씨발! 바로 몇 년 전에 이거 설치하는 걸로도 돈을 얼마나 퍼부었다고! 일이백도 아니고 몇천씩 처 바른 건데, 그건 물어 주어야 할 거 아냐! 맨입으로 그냥 나가라는 게 말이 돼?
호진은 멱살이 잡혀도 흉하게 버르적대거나 주먹을 마주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풀에 지쳐 손을 풀 때까지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오히려 연희가 불끈 나서서 커다란 손으로 멱살 잡은 손가락을 부러뜨릴 듯이 잡아 떼었다.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법이 어떻다는 걸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협조해 주시면 계약 기간 만료 전에 미리 나가시는 것에 대한 위로금은 다소 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백 원 동전 한 푼 못 받으십니다.”
연희는 이를 드러내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덩치 큰 사내의 무게에 주춤한 그들은 뒤에서 욕을 하며 소금을 뿌렸다. 연희는 밖으로 나와 호진이 괜찮은가부터 확인했고, 호진은 차분한 낯으로 멱살이 잡혔던 부분을 털어 내고 매무시를 다듬었다. 정말로 괜찮은지 두세 번 거듭 확인하던 연희는 머리를 긁었다.
“대학 강단에 서 있어야 어울릴 사람한테 이런 험한 일을 시켜서 이거 참…….”
“괜찮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입에 발린 대답이 아니었다. 호진은 오히려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뻗치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신화를 만들어 왔구나. 한국 유통업계의 새로운 신화에 나도 조금은 동참하는 건가? 호진은 회사 직원들의 믿을 수 없는 충성도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큰형과의 계약 따위 없이, 내가 정말 이 사람 곁에서 일하기 위해 입사한 것이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은 헛웃음과 함께 이내 사라졌지만 그 후로도 몇 번 되돌아와 호진을 곤혹스럽게 했다.
아아. 피곤하다. 제대로 숙면을 취한 게 벌써 며칠 전이더라.
호진은 점심시간이 지난 후 해일처럼 밀려드는 졸음과 싸웠다. 그동안 연희의 호출은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았고, 호진에게 떨어진 업무 내용은 개별 부서와 과를 넘나들었다. 사생활을 접다시피 하고 연희의 뒤를 받치고 있으면서 불평 한 마디 없으니 그게 당연한 줄 아는 모양이다.
누구나 당신처럼 엄청난 체력과 뚝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의 끈을 붙잡으려던 호진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어찌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체력이 연희를 따르지 못하는 것은 의지로 버텨 볼 수 있지만 한낮에 졸음이 쏟아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춘곤의 계절이기도 했다. 상가 연합회와 싸움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다시피 한 호진이 의자에 고개를 기대고 움직임을 멈추면 연희는 주변을 조용히 시키고 그의 주위를 서성이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매장 철거를 위한 설득 작업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히 뭉친 상가 연합회 사람들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경찰을 부르는 게 수순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것이 많았다. 잘못해서 경찰과 충돌해 부상자라도 나오면 여론에서 앞뒤 잘라먹고 집중포화를 쏟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상황만큼은 절대 피하려다 보니, 달래고 꾀고 협박해 가며 서로 진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밤길 조심해라, 차로 들이받아 버리겠다는 말이 상인들에게서 무시로 튀어나왔다. 철거 강행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안 들어 본 직원이 없었다. 물론 연희와 호진이 가장 많이 들었다.
철야를 하고 새벽에야 퇴근을 하려고 나온 호진은 재규어의 앞 범퍼가 심하게 우그러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징징, 현기가 일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연희의 자동차 바퀴에는 못이 박혀 있었다. 따라 나온 연희는 주먹을 꾹 쥐더니 한참 만에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사 경비로 보상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일까지 겪게 해서.”
그전까지 눈썹 하나 까닥 않던 사내는 이튿날 당장 무인감시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하고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호진이 어느 상점에서 네놈 배때기를 회칼로 떠 버리겠다는 폭언을 들었다는 보고에, 연희는 얼굴을 굳힌 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책장 옆에 보이지 않게 놓여 있던 나무 막대를 집어 들었다.
호진은 어리둥절했다. 짙은 갈색의, 매우 완만한 만곡 형태의 막대기는 아무리 보아도 목검이었다. 사무실에 목검이 있었어? 호진이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사이 연희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이 실장님! 말려 주세요! 사장님 검도 5단이에요. 사람 죽어요!”
겁에 질린 김영미 주임의 작은 목소리에 호진은 정신을 차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호진은 황급히 뛰어나가 목검을 쥔 손을 잡아챘다.
“감히 누구한테…… 그따위 개 같은 말을. 반 죽여 놓겠어.”
호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 때문에 이렇게 격분한 건가? 조금만 늦었으면 폭력사건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사장님!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지금 사장님이 가시면 문제가 커집니다.”
“손 놓으세요. 비키십시오.”
“나중에 그 매장에 한 푼도 안 주면 그만 아닙니까.”
“이 실장, 화도 안 납니까? 어디서 감히 공갈 협박을 해!”
목검을 움켜쥔 사내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사람의 몸에서 살기가 훅훅 일어난다는 말을 호진은 난생처음 실감했다. 마음이 급했다.
“화 안 납니다. 정말입니다. 말로는 무슨 허세든 못 부리겠습니까. 정 가시려면 저부터 때려눕히고 가십시오.”
사장님, 제발, 하는 호진의 절박한 애걸에야 연희는 주먹을 풀고 고개를 조금 수그렸다. 가만히 올려다보는 사내와 시선이 얼크러졌다. 큼직하고 깊은 눈과 매섭게 가늘어진 눈의 기 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희가 먼저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다음부터 이 실장은 가지 마십시오. 제가 갑니다.”
연희가 낮은 목소리로 씹어뱉자 호진은 실쭉 미소했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요? 저를 너무 샌님처럼 보시는 것 아닙니까?”
“사무실에 있으라고 하면 그냥 계십시오.”
아하? 호진이 턱을 들어 올려 연희를 바라보았다.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이호진 씨!”
“말 안 듣는 직원이라고 자르시겠습니까?”
웃음을 머금은 눈이었다. 연희는 시선을 빗기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생긴 건 대나무처럼 호리호리 야리야리한 주제에 고집도 강단도 만만찮았다. 연희는 저놈의 야해 빠진 눈웃음만 보면 도무지 싸울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럼 저랑 다니십시다. 앞에 나서지 마십시오. 제 뒤에 숨어 계십시오.”
호진의 입에서 기어이 홍소가 터졌다.
“아, 사장님, 아하, 하하하, 하하! 어린애 키우십니까?”
“왜 웃으십니까. 호진 씨, 보세요. 왜 이러십니까.”
연희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인상을 빡빡 썼지만 호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웃었다.
아, 귀엽다. 이 사람. 덩치 크고 사나운, 유통업계의 신화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 사람. 곰같이 묵중하고, 느릿느릿 말하면서 번개처럼 공격하고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이 사람.
지금 나 때문에 목검을 들고 나왔단 말이지. 가서 복수다, 하면서 날 협박한 사람을 목검으로 때려잡으려고? 이거 당신답지 않은 결론인데. 자기 뒤에 숨어 있으라고? 나 이호진한테? 아아, 귀엽다. 정말 너무 귀엽다.
호진의 웃음이 그쳤다. 연희는 잔뜩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호진은 흠. 헛기침을 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한테 무예를 전수하시면 뒤에 숨기는 것보다는 좀 더 쓸 만해질 겁니다.”
이건 또 무슨 폭탄이야. 연희는 큰 소리로 껄껄 웃고 말았다.
***
“상가 철수 작업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일이 길어지고 있었다. 철거가 늦어지면 먼저 나가떨어질 쪽은 연희유통이었다. 23%로 뛰어오른 대출이자는 쉴 새 없이 목을 졸랐고 시간은 곧 돈이었다. 어떻게든 수를 내야만 했다.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연희는 호진에게 휴대용 캠코더를 내밀었다. 호진은 선뜻 받지 못했다. 상가 연합회의가 진행되는 회의장에서는 벌써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연희는 허리를 살짝 구부리고 호진의 귓가에 나직하게 말을 흘렸다. 긴장한 사내의 날숨이 귓속으로 훅 밀려들었다.
“오늘은 결판을 낼 참입니다. 이자 부담이 커서 더 끌다간 제가 죽습니다.”
“사장님, 꼭 이러셔야 합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영상이나 잘 찍으세요. 그리고 적당한 시간에 얼른 경찰 부르시고요.”
호진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윤연희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식 밖의 방법은 당황스럽다. 아무리 속전속결 밀어붙이는데 이력이 났어도 겁도 없이.
하지만 호진은 말을 밖으로 내지 않고 아랫입술을 가만히 씹었다. 윤연희식 설득은 결국 확신의 감염이 맞다. 호진은 간신히 속삭이듯 대답했다.
“증거 영상만 찍고 바로 경찰 부르겠습니다.”
“이 실장은 절대 끼어들지 마십시오.”
“…….”
“얼른 약속하세요, 이호진 실장!”
목소리가 우르릉 커졌다. 호진은 이를 지그시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천천히 상가 연합회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시끌시끌하던 회의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연희는 사람들을 헤치고 단상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몸을 사릴 때가 아니다. 백병전도 되지 못할 육탄전.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단판 승부를 볼 때가 된 것이다.
“당신들 요구는 위법이야! 알고도 끝까지 이러는 거야? 백날 모여 의논해 봐야 소용없어! 나도 경찰까지 부르기 싫어! 이쯤 하면 적당한 선에서 합의금 풀 수 있어! 떼쓰고 조른다고 줄 거면 벌써 돈줄 풀었어.”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뺏어 든 사내의 커다란 목소리가 창밖으로 징징 밀려 나왔다. 초장부터 반말지거리. 대놓고 시비조다. 호진의 이마에서 땀이 듣는다. 저 사람은 지금 모인 사람의 부아를 일부러 돋우는 거다. 단신으로 들어갔다는 건 날 잡아 패라고, 아주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거다. 호진의 입이 바짝 말랐다.
처음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삿대질을 하던 사람들이 분격해 와짝 일어났다. 군중심리란 지성과 도덕성의 하향 평준화라고 누가 그랬더라. 구스타프 르봉. 그 사람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패싸움에 자주 휘말려 보았을까?
머릿수를 믿었는지, 떼로 모여 있어 쉽게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것인지 마이크를 뺏긴 사회자부터 대뜸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연희는 멱살을 잡은 사내를 방어하려는 동작으로 교묘하게 밀어 냈고 그것은 바로 몸싸움으로 연결되었다.
“당신들 이따위로 계속해! 십 원 동전 한 푼도 못 줘!”
중과부적으로 밀리던 사내의 커다란 목소리가 천장을 쩡쩡 울렸다. 사람들은 건물주의 단호함에 대번에 난폭해졌다. 연희는 폭행과 방어 사이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온 정신을 집중했다. 쌍방 폭행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모인 사람들은 그것을 지각하지 못했다. 창 밖에서 몰래 촬영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허리를 구부리고 고꾸라진 사내의 얼굴로 주먹이 쏟아졌고 발길질이 숱하게 이어졌다.
호진이 약속을 어기고 들어온 것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연희가 단상 아래로 굴러떨어져 몸이 축 늘어졌을 때였다.
경찰에 신고는 했지만 교통이 혼잡한지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도, 나도 미쳤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저러다 저 사람 잘못되기라도 하면 문제가 커지는데. 평소의 냉정함이 오늘따라 모조리 사라진 느낌이었다. 문제를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초조하게 발을 굴러도 경찰은 도착하지 않았다.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그 시끄러운 소란 중에서도 억, 어억, 하는 연희의 신음이 선명하게 귀에 감겼다. 어떻게 그 소리만 귀에 정확하게 꽂히는지 모르겠다. 호진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저러다 저 인간이 죽으면 나도 무사히 벗어나진 못한다. 나는 그럼 살인 방조죄가 적용되는 건가?
미치겠군. 지금이라도 못 본 일로 하고 시치미를 떼고 자리를 피할까?
후계 검증 테스트, 그 알량한 짓 때문에 정보 몇 가닥 빼 보려고 입사했다가 기가 막힌 덤터기를 쓰게 생겼다. 아까라도 발을 빼야 했다. 안 하겠다고, 다른 사람 시키라고 해야 했어. 나답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고! 이호진!
아, 물론 변명의 여지는 있어. 난 하지 말라고 말렸어. 저 고집스러운 사람이 듣지 않은 거라고, 그래서 신고한 거라고 하면 되는 거야. 상황 증거 영상을 찍고 있다가 위험한 거 같아서 바로 신고한 거라고 증언하면 된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하면 되는 거야.
제기랄. 누가 그걸 믿어. 이렇게 될 걸 몰랐어? 작정하고 한 짓이잖아.
그는 신음하며 머리를 감쌌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윙윙거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필적 고의, 살인 방조. 혐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K마트는 둘째 치고 인생 전체가 비틀릴 것이다. 호진은 눈을 치뜨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가며 주먹에 힘이 와짝 들었다.
저 이성을 날려 버린 무리 속으로 나 혼자 들어가서 뭘 어떡하란 말인가. 저 안에서 폭행을 저지르고 있는 놈들이 무더기로 콩밥을 먹든 말든, 그따위 것은 안중에도 없다. 중요한 건 나한테 미칠 영향이다. 생각해라. 이호진. 생각해. 어떻게 해야 경찰에서 내 행동에 대한 당위를 받아들여 줄 것인가.
순간 안에서 다시 억, 하는 굵은 비명이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다. 왕왕대던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계산 집어치워. 내버려 두면 저 사람 이 자리에서 죽어.
생각이 닿는 순간 호진은 벌떡 일어났다. 캠코더를 창가에 올려놓고 커튼으로 덮은 후 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비켜요! 사람 죽어! 당장 안 비켜? 당신들 미쳤어?”
호진은 맞주먹질도 마다치 않으며 뭉쳐진 사람들을 파헤치고 들어갔다.
“이 씹새끼는 또 뭐야! 비서실장이라는 딸랑이 새끼 아냐!”
고함과 함께 공격이 분산되었다. 그 많은 사람 중 말리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 이는 순간 안경이 날아갔다. 멱살도 잡혀 단추가 튀어 나갔다. 그다음부터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호진은 악전고투하며 덩치 큰 사내를 감싸 안고 질질 끌어냈다. 끔찍하게 무거웠다. 끌려오는 사내의 한쪽 팔이 이상한 각도로 꺾인 채 꿈틀거렸다. 등 위로 무수한 통증이 작렬했다.
결국 호진은 널브러진 사내를 끌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위에 엎드려, 쏟아지는 발길질을 몸으로 막았다. 쓰러진 사람의 호흡은 거칠었다. 덩치가 커서 몸으로 덮어도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옆구리에 발길질이 꽂혔다. 어억! 호진의 신음에 늘어져 있던 사내의 팔이 크게 꿈틀거렸다. 호진은 끝까지 맨정신으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견뎠다.
열여덟 살, 아버지에게 한 시간 동안 거실에서 온몸이 부서지도록 얻어맞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아 고스란히 아팠다. 나이를 먹어도 통증이라는 감각은 참으로 성실했다.
쓰러진 사내의 꿈틀대던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윤연희, 이봐, 이러면 안 돼. 당신이 잘못되면, 내 인생도 날아가는 거야. 이러지 마.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호진이 구타를 견디며 그의 뺨에 얼굴을 대고 호흡을 확인하려 할 때 거짓말처럼 주먹질이 멎었다. 밖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경찰차의 경광등 불빛이 번쩍번쩍 산란하고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황급히 흩어졌다. 자기 매장으로 들어가서 시치미를 떼면 되는 줄 알겠지. 어림없다. 호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고함쳤다.
“구급차 불러요! 사람 죽겠습니다! 사장님!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사장님! 윤연희! 정신 좀! 사장님!”
핏물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이 뺨과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경찰이 신고를 접수하고 도착한 것은 연희가 회의장에 들어간 지 30분이 지나서였다. 그 사이 필요한 일은 모두 완료되었다.
경찰은 난장판이 된 회의장 구석에 구겨 박힌 사내 두 명을 병원으로 후송했다. 키가 몹시 큰 사내는 거의 의식이 없었고 팔다리가 덜렁덜렁 늘어졌다. 다른 사내는 눈물과 핏물로 뒤범벅이 된 채 정신을 잃은 사내의 뺨을 때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사장님!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이러시면 저는 어떡합니까! 사장님! 윤연희! 이봐! 정신 차려! 윤연희! 제발 눈 좀 떠! 제발!
연희는 퉁퉁 부은 눈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얼굴을 계속 치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게 누구지? 아, 이 실장이다. 목소리를 들으니 많이 놀란 모양이다. 잠깐만, 아까 신나게 두드려 맞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계속 감싸고 있었는데. 누구지? 경찰이었나? 생각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호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들들 떨린다. 윤연희! 정신 차려! 사장님! 제발! 저 보입니까!
아아,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으면 저 냉정한 사람이 덜덜 떠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 내 걱정을 하고 있나?
연희는 괜히 기분이 우쭐해져 히죽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괜찮습니다. 난 멀쩡해요, 이 실장.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희는 억지로라도 웃어 보이려 했지만 입술이 찢어졌는지 부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은 끝까지 떠지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을 안고 있는 건 이 실장이 확실했다. 얼굴 위로 뜨끈한 무엇인가가 자꾸 떨어졌다. 통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
“거기 어느 병원이야! 지금 상태가 어떻대? 이 실장은 대체 어디 있는 거고? 이봐요 김 주임!”
-과장님! 곽 과장님!
들차기로 유명한 김영미 주임은 거의 울고 있었다.
-사장님 의식이 없대요, 이 실장님도 같이 얻어터져서 응급실에 계세요. 흐어, 어, 어어어! 사장님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병진은 혼비백산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진 건 힘하고 배짱밖에 없는 이놈의 사장이 언젠가 사고를 칠 줄 알았다. 아무리 목이 졸려도 누울 자릴 보고 발을 뻗어야지 아주 건물 하나 올리는데 뒤지려고 작정을 하셨다.
8. 철거 현장 (2)
퇴거 작업이 시작되면서 연희유통은 비상 체제가 가동되었다. 호진을 위시한 직원들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하루 종일 전화를 붙들고 상인들을 설득하거나 매장을 일일이 찾아다녀야 했다.
관련 법규에 의하면, 건물을 철거할 경우 계약 기간이 다 되지 않았더라도 보증금만 돌려주면 퇴거를 시킬 수 있었다. 권리금과 시설비에 대한 보상 의무는 건물주에게 없었다. 하지만 권리금을 잔뜩 들이고 그곳에 생계를 걸고 있는 상인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기천만 원에 이르는 돈이 공중분해 되는 것이다.
그들은 권리금과 시설비에 대한 전액 보상을 요구했다. 상가 연합회에서 견고하게 뭉친 그들은 포클레인이 들어와도 물러나지 않겠다며 콧방귀를 뀌었다.
연희는 직원들을 대동하고 설득이 되지 않는 매장마다 돌아다니며 매일매일 피 말리는 싸움을 벌였다. 욕설은 양반이고 멱살잡이도 드물지 않았다. 귀를 후비고 있는 매장 주인 앞에서 호진이 ‘상가 임대차보호법 10조의 7호, 목적 건물의 전부 또는 대부분 철거하거나 재건축하기 위하여 목적 건물의 점유를 회복할 필요가 있는 경우…….’를 읊기 시작하면 주인들은 으레 멱살을 붙잡았다.
그래서 우리한테 죽으라는 거냐, 엉! 우리가 권리금을 얼마나 퍼들이고 들어왔는지 알아! 권리금은 둘째고 씨발! 바로 몇 년 전에 이거 설치하는 걸로도 돈을 얼마나 퍼부었다고! 일이백도 아니고 몇천씩 처 바른 건데, 그건 물어 주어야 할 거 아냐! 맨입으로 그냥 나가라는 게 말이 돼?
호진은 멱살이 잡혀도 흉하게 버르적대거나 주먹을 마주 들거나 하지는 않았다. 제풀에 지쳐 손을 풀 때까지 싸늘한 눈으로 내려다보기만 했다. 오히려 연희가 불끈 나서서 커다란 손으로 멱살 잡은 손가락을 부러뜨릴 듯이 잡아 떼었다.
“싸우러 온 게 아닙니다. 법이 어떻다는 걸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협조해 주시면 계약 기간 만료 전에 미리 나가시는 것에 대한 위로금은 다소 드릴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백 원 동전 한 푼 못 받으십니다.”
연희는 이를 드러내고 낮게 으르렁거렸다. 덩치 큰 사내의 무게에 주춤한 그들은 뒤에서 욕을 하며 소금을 뿌렸다. 연희는 밖으로 나와 호진이 괜찮은가부터 확인했고, 호진은 차분한 낯으로 멱살이 잡혔던 부분을 털어 내고 매무시를 다듬었다. 정말로 괜찮은지 두세 번 거듭 확인하던 연희는 머리를 긁었다.
“대학 강단에 서 있어야 어울릴 사람한테 이런 험한 일을 시켜서 이거 참…….”
“괜찮습니다. 힘들지 않습니다.”
입에 발린 대답이 아니었다. 호진은 오히려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뻗치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이 사람은 이런 식으로 신화를 만들어 왔구나. 한국 유통업계의 새로운 신화에 나도 조금은 동참하는 건가? 호진은 회사 직원들의 믿을 수 없는 충성도가 조금씩 이해되기 시작했다.
큰형과의 계약 따위 없이, 내가 정말 이 사람 곁에서 일하기 위해 입사한 것이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 텐데.
그 생각은 헛웃음과 함께 이내 사라졌지만 그 후로도 몇 번 되돌아와 호진을 곤혹스럽게 했다.
아아. 피곤하다. 제대로 숙면을 취한 게 벌써 며칠 전이더라.
호진은 점심시간이 지난 후 해일처럼 밀려드는 졸음과 싸웠다. 그동안 연희의 호출은 밤이건 낮이건 가리지 않았고, 호진에게 떨어진 업무 내용은 개별 부서와 과를 넘나들었다. 사생활을 접다시피 하고 연희의 뒤를 받치고 있으면서 불평 한 마디 없으니 그게 당연한 줄 아는 모양이다.
누구나 당신처럼 엄청난 체력과 뚝심을 갖고 있는 건 아니라고. 생각의 끈을 붙잡으려던 호진은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을 어찌해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체력이 연희를 따르지 못하는 것은 의지로 버텨 볼 수 있지만 한낮에 졸음이 쏟아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춘곤의 계절이기도 했다. 상가 연합회와 싸움을 준비하느라 밤을 새우다시피 한 호진이 의자에 고개를 기대고 움직임을 멈추면 연희는 주변을 조용히 시키고 그의 주위를 서성이며 난처한 얼굴을 했다.
매장 철거를 위한 설득 작업이 늘어지기 시작했다. 단단히 뭉친 상가 연합회 사람들의 기세는 만만치 않았다. 경찰을 부르는 게 수순이었지만 여러 가지로 걸리는 것이 많았다. 잘못해서 경찰과 충돌해 부상자라도 나오면 여론에서 앞뒤 잘라먹고 집중포화를 쏟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 상황만큼은 절대 피하려다 보니, 달래고 꾀고 협박해 가며 서로 진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전쟁이 따로 없었다. 밤길 조심해라, 차로 들이받아 버리겠다는 말이 상인들에게서 무시로 튀어나왔다. 철거 강행하면 죽여 버리겠다는 말을 안 들어 본 직원이 없었다. 물론 연희와 호진이 가장 많이 들었다.
철야를 하고 새벽에야 퇴근을 하려고 나온 호진은 재규어의 앞 범퍼가 심하게 우그러들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징징, 현기가 일었다.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주변을 둘러보니, 연희의 자동차 바퀴에는 못이 박혀 있었다. 따라 나온 연희는 주먹을 꾹 쥐더니 한참 만에야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사 경비로 보상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런 일까지 겪게 해서.”
그전까지 눈썹 하나 까닥 않던 사내는 이튿날 당장 무인감시카메라를 곳곳에 설치하고 사설 경비업체와 계약을 맺었다.
호진이 어느 상점에서 네놈 배때기를 회칼로 떠 버리겠다는 폭언을 들었다는 보고에, 연희는 얼굴을 굳힌 채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책장 옆에 보이지 않게 놓여 있던 나무 막대를 집어 들었다.
호진은 어리둥절했다. 짙은 갈색의, 매우 완만한 만곡 형태의 막대기는 아무리 보아도 목검이었다. 사무실에 목검이 있었어? 호진이 입을 벌리고 바라보는 사이 연희는 말없이 사무실을 나섰다.
“이 실장님! 말려 주세요! 사장님 검도 5단이에요. 사람 죽어요!”
겁에 질린 김영미 주임의 작은 목소리에 호진은 정신을 차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호진은 황급히 뛰어나가 목검을 쥔 손을 잡아챘다.
“감히 누구한테…… 그따위 개 같은 말을. 반 죽여 놓겠어.”
호진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나 때문에 이렇게 격분한 건가? 조금만 늦었으면 폭력사건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사장님! 전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지금 사장님이 가시면 문제가 커집니다.”
“손 놓으세요. 비키십시오.”
“나중에 그 매장에 한 푼도 안 주면 그만 아닙니까.”
“이 실장, 화도 안 납니까? 어디서 감히 공갈 협박을 해!”
목검을 움켜쥔 사내의 기세는 무시무시했다. 사람의 몸에서 살기가 훅훅 일어난다는 말을 호진은 난생처음 실감했다. 마음이 급했다.
“화 안 납니다. 정말입니다. 말로는 무슨 허세든 못 부리겠습니까. 정 가시려면 저부터 때려눕히고 가십시오.”
사장님, 제발, 하는 호진의 절박한 애걸에야 연희는 주먹을 풀고 고개를 조금 수그렸다. 가만히 올려다보는 사내와 시선이 얼크러졌다. 큼직하고 깊은 눈과 매섭게 가늘어진 눈의 기 싸움은 오래가지 못했다. 연희가 먼저 시선을 바닥으로 돌렸다.
“다음부터 이 실장은 가지 마십시오. 제가 갑니다.”
연희가 낮은 목소리로 씹어뱉자 호진은 실쭉 미소했다.
“겨우 그 정도 가지고요? 저를 너무 샌님처럼 보시는 것 아닙니까?”
“사무실에 있으라고 하면 그냥 계십시오.”
아하? 호진이 턱을 들어 올려 연희를 바라보았다.
“싫다면 어쩌시겠습니까?”
“이호진 씨!”
“말 안 듣는 직원이라고 자르시겠습니까?”
웃음을 머금은 눈이었다. 연희는 시선을 빗기더니 길게 한숨을 쉬었다. 생긴 건 대나무처럼 호리호리 야리야리한 주제에 고집도 강단도 만만찮았다. 연희는 저놈의 야해 빠진 눈웃음만 보면 도무지 싸울 기분이 들지 않았다.
“그럼 저랑 다니십시다. 앞에 나서지 마십시오. 제 뒤에 숨어 계십시오.”
호진의 입에서 기어이 홍소가 터졌다.
“아, 사장님, 아하, 하하하, 하하! 어린애 키우십니까?”
“왜 웃으십니까. 호진 씨, 보세요. 왜 이러십니까.”
연희가 미간에 주름을 잡고 인상을 빡빡 썼지만 호진은 사무실 문 앞에 서서 한참 동안 웃었다.
아, 귀엽다. 이 사람. 덩치 크고 사나운, 유통업계의 신화라고 불리기 시작한 이 사람. 곰같이 묵중하고, 느릿느릿 말하면서 번개처럼 공격하고 무지막지하게 밀어붙이는 이 사람.
지금 나 때문에 목검을 들고 나왔단 말이지. 가서 복수다, 하면서 날 협박한 사람을 목검으로 때려잡으려고? 이거 당신답지 않은 결론인데. 자기 뒤에 숨어 있으라고? 나 이호진한테? 아아, 귀엽다. 정말 너무 귀엽다.
호진의 웃음이 그쳤다. 연희는 잔뜩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호진은 흠. 헛기침을 하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저한테 무예를 전수하시면 뒤에 숨기는 것보다는 좀 더 쓸 만해질 겁니다.”
이건 또 무슨 폭탄이야. 연희는 큰 소리로 껄껄 웃고 말았다.
“상가 철수 작업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조금만 더 참으세요.”
일이 길어지고 있었다. 철거가 늦어지면 먼저 나가떨어질 쪽은 연희유통이었다. 23%로 뛰어오른 대출이자는 쉴 새 없이 목을 졸랐고 시간은 곧 돈이었다. 어떻게든 수를 내야만 했다.
“이거 말고는…… 방법이 없습니다.”
무덤덤한 표정으로 연희는 호진에게 휴대용 캠코더를 내밀었다. 호진은 선뜻 받지 못했다. 상가 연합회의가 진행되는 회의장에서는 벌써부터 시끄러운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연희는 허리를 살짝 구부리고 호진의 귓가에 나직하게 말을 흘렸다. 긴장한 사내의 날숨이 귓속으로 훅 밀려들었다.
“오늘은 결판을 낼 참입니다. 이자 부담이 커서 더 끌다간 제가 죽습니다.”
“사장님, 꼭 이러셔야 합니까? 너무 위험합니다.”
“영상이나 잘 찍으세요. 그리고 적당한 시간에 얼른 경찰 부르시고요.”
호진은 입술을 지그시 물었다. 윤연희라는 사람을 어느 정도 파악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상식 밖의 방법은 당황스럽다. 아무리 속전속결 밀어붙이는데 이력이 났어도 겁도 없이.
하지만 호진은 말을 밖으로 내지 않고 아랫입술을 가만히 씹었다. 윤연희식 설득은 결국 확신의 감염이 맞다. 호진은 간신히 속삭이듯 대답했다.
“증거 영상만 찍고 바로 경찰 부르겠습니다.”
“이 실장은 절대 끼어들지 마십시오.”
“…….”
“얼른 약속하세요, 이호진 실장!”
목소리가 우르릉 커졌다. 호진은 이를 지그시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그의 어깨를 툭툭 치고 천천히 상가 연합회 회의장 안으로 들어섰다.
시끌시끌하던 회의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연희는 사람들을 헤치고 단상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몸을 사릴 때가 아니다. 백병전도 되지 못할 육탄전. 하지만 이런 식으로라도, 단판 승부를 볼 때가 된 것이다.
“당신들 요구는 위법이야! 알고도 끝까지 이러는 거야? 백날 모여 의논해 봐야 소용없어! 나도 경찰까지 부르기 싫어! 이쯤 하면 적당한 선에서 합의금 풀 수 있어! 떼쓰고 조른다고 줄 거면 벌써 돈줄 풀었어.”
사회자에게 마이크를 뺏어 든 사내의 커다란 목소리가 창밖으로 징징 밀려 나왔다. 초장부터 반말지거리. 대놓고 시비조다. 호진의 이마에서 땀이 듣는다. 저 사람은 지금 모인 사람의 부아를 일부러 돋우는 거다. 단신으로 들어갔다는 건 날 잡아 패라고, 아주 머리를 들이밀고 있는 거다. 호진의 입이 바짝 말랐다.
처음부터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삿대질을 하던 사람들이 분격해 와짝 일어났다. 군중심리란 지성과 도덕성의 하향 평준화라고 누가 그랬더라. 구스타프 르봉. 그 사람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이런 패싸움에 자주 휘말려 보았을까?
머릿수를 믿었는지, 떼로 모여 있어 쉽게 이성의 끈을 놓아 버린 것인지 마이크를 뺏긴 사회자부터 대뜸 그의 멱살을 잡아챘다. 연희는 멱살을 잡은 사내를 방어하려는 동작으로 교묘하게 밀어 냈고 그것은 바로 몸싸움으로 연결되었다.
“당신들 이따위로 계속해! 십 원 동전 한 푼도 못 줘!”
중과부적으로 밀리던 사내의 커다란 목소리가 천장을 쩡쩡 울렸다. 사람들은 건물주의 단호함에 대번에 난폭해졌다. 연희는 폭행과 방어 사이의 경계를 넘지 않도록 온 정신을 집중했다. 쌍방 폭행이 되지 않으려면 그것이 가장 중요했다.
모인 사람들은 그것을 지각하지 못했다. 창 밖에서 몰래 촬영이 되고 있다는 사실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허리를 구부리고 고꾸라진 사내의 얼굴로 주먹이 쏟아졌고 발길질이 숱하게 이어졌다.
호진이 약속을 어기고 들어온 것은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연희가 단상 아래로 굴러떨어져 몸이 축 늘어졌을 때였다.
경찰에 신고는 했지만 교통이 혼잡한지 사이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도, 나도 미쳤어. 이게 대체 무슨 짓이지? 저러다 저 사람 잘못되기라도 하면 문제가 커지는데. 평소의 냉정함이 오늘따라 모조리 사라진 느낌이었다. 문제를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는 사람을 한 번도 보지 못했으니까.
초조하게 발을 굴러도 경찰은 도착하지 않았다. 입술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그 시끄러운 소란 중에서도 억, 어억, 하는 연희의 신음이 선명하게 귀에 감겼다. 어떻게 그 소리만 귀에 정확하게 꽂히는지 모르겠다. 호진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저러다 저 인간이 죽으면 나도 무사히 벗어나진 못한다. 나는 그럼 살인 방조죄가 적용되는 건가?
미치겠군. 지금이라도 못 본 일로 하고 시치미를 떼고 자리를 피할까?
후계 검증 테스트, 그 알량한 짓 때문에 정보 몇 가닥 빼 보려고 입사했다가 기가 막힌 덤터기를 쓰게 생겼다. 아까라도 발을 빼야 했다. 안 하겠다고, 다른 사람 시키라고 해야 했어. 나답지 않았다.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고! 이호진!
아, 물론 변명의 여지는 있어. 난 하지 말라고 말렸어. 저 고집스러운 사람이 듣지 않은 거라고, 그래서 신고한 거라고 하면 되는 거야. 상황 증거 영상을 찍고 있다가 위험한 거 같아서 바로 신고한 거라고 증언하면 된다. 이렇게 될 줄 몰랐다고 하면 되는 거야.
제기랄. 누가 그걸 믿어. 이렇게 될 걸 몰랐어? 작정하고 한 짓이잖아.
그는 신음하며 머리를 감쌌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윙윙거렸다. 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미필적 고의, 살인 방조. 혐의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이 잘못되면 K마트는 둘째 치고 인생 전체가 비틀릴 것이다. 호진은 눈을 치뜨고 생각했다. 머릿속이 맹렬하게 돌아가며 주먹에 힘이 와짝 들었다.
저 이성을 날려 버린 무리 속으로 나 혼자 들어가서 뭘 어떡하란 말인가. 저 안에서 폭행을 저지르고 있는 놈들이 무더기로 콩밥을 먹든 말든, 그따위 것은 안중에도 없다. 중요한 건 나한테 미칠 영향이다. 생각해라. 이호진. 생각해. 어떻게 해야 경찰에서 내 행동에 대한 당위를 받아들여 줄 것인가.
순간 안에서 다시 억, 하는 굵은 비명이 선명하게 귀에 들어왔다. 왕왕대던 머릿속이 말끔해졌다.
계산 집어치워. 내버려 두면 저 사람 이 자리에서 죽어.
생각이 닿는 순간 호진은 벌떡 일어났다. 캠코더를 창가에 올려놓고 커튼으로 덮은 후 문을 왈칵 열어젖혔다.
“비켜요! 사람 죽어! 당장 안 비켜? 당신들 미쳤어?”
호진은 맞주먹질도 마다치 않으며 뭉쳐진 사람들을 파헤치고 들어갔다.
“이 씹새끼는 또 뭐야! 비서실장이라는 딸랑이 새끼 아냐!”
고함과 함께 공격이 분산되었다. 그 많은 사람 중 말리는 사람 하나 없다는 게 신기하다면 신기했다. 얼굴로 주먹이 날아왔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 이는 순간 안경이 날아갔다. 멱살도 잡혀 단추가 튀어 나갔다. 그다음부터는 앞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호진은 악전고투하며 덩치 큰 사내를 감싸 안고 질질 끌어냈다. 끔찍하게 무거웠다. 끌려오는 사내의 한쪽 팔이 이상한 각도로 꺾인 채 꿈틀거렸다. 등 위로 무수한 통증이 작렬했다.
결국 호진은 널브러진 사내를 끌어내는 것을 포기하고 그의 위에 엎드려, 쏟아지는 발길질을 몸으로 막았다. 쓰러진 사람의 호흡은 거칠었다. 덩치가 커서 몸으로 덮어도 완전히 가려지지 않았다. 옆구리에 발길질이 꽂혔다. 어억! 호진의 신음에 늘어져 있던 사내의 팔이 크게 꿈틀거렸다. 호진은 끝까지 맨정신으로 주먹질과 발길질을 견뎠다.
열여덟 살, 아버지에게 한 시간 동안 거실에서 온몸이 부서지도록 얻어맞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끝까지 정신을 놓지 않아 고스란히 아팠다. 나이를 먹어도 통증이라는 감각은 참으로 성실했다.
쓰러진 사내의 꿈틀대던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 윤연희, 이봐, 이러면 안 돼. 당신이 잘못되면, 내 인생도 날아가는 거야. 이러지 마.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호진이 구타를 견디며 그의 뺨에 얼굴을 대고 호흡을 확인하려 할 때 거짓말처럼 주먹질이 멎었다. 밖에서 사이렌이 울리고 있었다.
경찰차의 경광등 불빛이 번쩍번쩍 산란하고 사람들이 올라오는 소리가 들리자 그들은 황급히 흩어졌다. 자기 매장으로 들어가서 시치미를 떼면 되는 줄 알겠지. 어림없다. 호진은 주먹을 꽉 움켜쥐고 고함쳤다.
“구급차 불러요! 사람 죽겠습니다! 사장님! 사장님! 정신 차리세요. 제기랄! 이럴 줄 알았으면! 사장님! 윤연희! 정신 좀! 사장님!”
핏물인지 무언지 알 수 없는 것이 뺨과 턱을 타고 줄줄 흘러내렸다.
경찰이 신고를 접수하고 도착한 것은 연희가 회의장에 들어간 지 30분이 지나서였다. 그 사이 필요한 일은 모두 완료되었다.
경찰은 난장판이 된 회의장 구석에 구겨 박힌 사내 두 명을 병원으로 후송했다. 키가 몹시 큰 사내는 거의 의식이 없었고 팔다리가 덜렁덜렁 늘어졌다. 다른 사내는 눈물과 핏물로 뒤범벅이 된 채 정신을 잃은 사내의 뺨을 때리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사장님! 제발 정신 차리십시오. 이러시면 저는 어떡합니까! 사장님! 윤연희! 이봐! 정신 차려! 윤연희! 제발 눈 좀 떠! 제발!
연희는 퉁퉁 부은 눈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옆에서 얼굴을 계속 치면서 내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게 누구지? 아, 이 실장이다. 목소리를 들으니 많이 놀란 모양이다. 잠깐만, 아까 신나게 두드려 맞고 있을 때 누군가가 나를 계속 감싸고 있었는데. 누구지? 경찰이었나? 생각이 끊어졌다 이어졌다 한다. 호진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들들 떨린다. 윤연희! 정신 차려! 사장님! 제발! 저 보입니까!
아아, 얼마나 놀라고 당황했으면 저 냉정한 사람이 덜덜 떠는 목소리를 내고 있지? 내 걱정을 하고 있나?
연희는 괜히 기분이 우쭐해져 히죽 웃었다. 아니 웃으려고 했다.
괜찮습니다. 난 멀쩡해요, 이 실장.
하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연희는 억지로라도 웃어 보이려 했지만 입술이 찢어졌는지 부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눈은 끝까지 떠지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을 안고 있는 건 이 실장이 확실했다. 얼굴 위로 뜨끈한 무엇인가가 자꾸 떨어졌다. 통증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거기 어느 병원이야! 지금 상태가 어떻대? 이 실장은 대체 어디 있는 거고? 이봐요 김 주임!”
-과장님! 곽 과장님!
들차기로 유명한 김영미 주임은 거의 울고 있었다.
-사장님 의식이 없대요, 이 실장님도 같이 얻어터져서 응급실에 계세요. 흐어, 어, 어어어! 사장님 돌아가시면 어떡해요!
병진은 혼비백산해서 병원으로 달려갔다. 가진 건 힘하고 배짱밖에 없는 이놈의 사장이 언젠가 사고를 칠 줄 알았다. 아무리 목이 졸려도 누울 자릴 보고 발을 뻗어야지 아주 건물 하나 올리는데 뒤지려고 작정을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