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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1화
7. 섹시 짜장면 (3)
호진이 인상을 쓰며 메뉴판을 노려보자 밖으로 튀어 나가던 곽병진 과장이 되돌아와 연희에게 투덜댔다.
“사장님! 대체 짜장면하고 무슨 웬수가 졌습니까? 질리지도 않으세요? 좀, 좀 다른 것도 개척해 보세요. 회사 이미지가 있지! 대체 회사 대표라는 분이 쏘샬 포지션이란 것도 없이, 어떻게 하루가 멀다 하고 짜장면입니까! 남들이 흉봅니다, 흉! 배 속이 시커멓게 변했을 겁니다!”
“곽 과장. 내 속이야 원래 올 블랙인 거 모르십니까?”
“거참 사장님이 짜장면을 시키시니까 저희는 더 좋은 거 시켜 먹지도 못하고 몰래 나가서 먹어야 하잖습니까! 저 케임브리지 출신의 똑똑한 이 실장마저 고뇌하는 게 안 보이십니까?”
대체 거기서 케임브리지가 왜 나오는 거야? 호진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는 사이 김영미 주임이 애교 있게 웃었다.
“사장님! 짜장면 오래 드시다가 배 나오면 어떡해요. 그거 완전 영양가 제로에 곱빼기는 1,000킬로칼로리가 넘는대요. 멋진 사나이의 배 나온 모습만큼 슬픈 일은 없어요.”
“운동 많이 합니다. 집에선 야채도 많이 먹습니다. 걱정 마세요.”
연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병진은 호진의 곁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호진 씨, 사장님하고 꼭 같이 먹어야 한다는 도의심 따윈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요. 냅둬 보니까, 배달 안 되면 사장님이 혼자 짜장면집 가셔서 잘만 드십니다. 그러니 집어치우고 같이 나가서 드십시다. 나중엔 오징어 먹물, 머리카락, 손발톱에 낀 꺼먼색 때만 봐도 쏠리는 날이 올 겁니다. 인생 뭐 있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아직은 괜찮습니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사장님하고 같이 짜장면 먹겠습니다.”
호진의 말에 병진은 낄낄 웃었다.
“호진 씨는 아직이네! 저희끼리는 연희유통의 진정한 싸나이가 되는 시기를, 중국집 쪽으로 오줌도 안 누는 때로 잡고 있거든요. 돌을 씹으며 참아 봤자 사장님 개과천선하기 전에 늙어 죽을 거라고! 아, 비서실장이라는 게 무슨 죄예요?”
병진은 불룩 나온 배를 한 손을 텅텅 쳐 보였다.
“내 배 좀 봐요. 벨트에 구멍 두 개 더 뚫었다고! 마누라가 밤에 이 배를 만지면서 보라돌이, 뚜비~ 노래를 하는데, 깜깜한데 그 노래 들으면 얼마나 식겁하는지 아십니까? 이게 다 초창기에 멋모르고 의리 찾다가 생긴 짜장면 배라고요! 나도 한때는 이 실장처럼 물찬제비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언제요! 물먹은 제비였지!”
김영미 주임이 혀를 쏙 내밀자 병진이 와르릉 목소리를 높였다.
“어허! 이 아가씨가 어디서 유언비어를 함부로 배포해요? 입사 초에는 나도 꼬맹이들한테 병진 형이라고 불렸다니까? 뭐 어쨌든, 이 실장이 아직은 괜찮다니 건투는 빌어 주겠는데, 내 장담하죠. 이 실장도 머지않았어요! 3년! 3년 겁니다!”
사람들 참, 무슨 악담을 그렇게 해. 연희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덩치 큰 사내의 태평한 얼굴을 보니 직원들이 사장의 식성에 대한 험담도 대놓고 종종 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사무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짜장면을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영국에서 베이커 스트리트에 사셨습니까? 별 게 다 궁금합니다.”
연희는 웃음을 거두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호진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 속에 적지 않은 사연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대답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짜장면이 제일 맛있어.’
각인 효과는 애착 형성기의 아기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가장 허기질 때 먹었던 음식은 몸의 세포에 평생 각인된다. 연희의 눈동자가 눈자위 위쪽에 한참 머물렀다.
자신이 평생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은 이틀을 내리 굶은 후 한밤중에 먹었던 불어터진 짜장면이었다. 열아홉 살. 한기 이는 겨울밤, 밖에서 몰아치는 삭풍. 온기 없는 차가운 방바닥. 자정이 넘어서 중국집에서 퇴근한 선배가 들고 온 양푼에 담긴 짜장면을,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큼 부푼 되바라진 계집애와 머리를 맞대고 허발하며 먹었다.
지독하게, 지독하게 맛있어.
혀와 위장에서 시작된 단순명료한 행복감이 온몸에 퍼져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연희는 그 기억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서투르게 웃기만 했다.
“면들이 자신의 정체를 까맣게 감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지 않습니까? 과거를 묻지 마세요, 라고 온몸으로 부르짖고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요.”
기상천외한 대답에 호진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농담입니다. 농담! 연희는 껄껄 웃었다. 신속배달 광고가 요란한 신촌반점에서 키가 껑충한 배달원이 사각 양철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신촌반점의 주력 메뉴라는 ‘옛날왕짜장’은 양이 많고 감칠맛이 있었다.
일찌감치 곱빼기 그릇을 비운 연희는 탁자 맞은편에 앉아 조심스럽게 면을 감아 드는 사내를 지켜보았다.
길고 검은 면이 수저에 얹혀 돌돌 말린 후 입 안으로 얌전하게 들어간다. 호진은 청소기로 빨아들이듯 후루룩, 면을 집어삼키는 적이 없었다. 음식은 한입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썰거나 수저에 올려놓고 먹었다. 입가나 옷에 묻히는 일 한번 없이 단정하다.
짜장면은 선 볼 때 피해야 할 음식 1순위라 했는데. 이것처럼 얌전하게 먹기 난해한 음식을 먹을 때도 입가에 검은 자국 하나 묻히는 일이 없었다. 사무실 정리 중일 때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중에 박스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함께 먹을 때도 많았는데 그래도 매끈하게 다려진 슈트는 음식 얼룩이나 구김 하나 없었다.
사실 이따위 싸구려 음식과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뻔히 보이는데, 내색 없이 매번 같은 걸 주문한다. 아마 내가 시키니까 같이 시키는 거겠지.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연희는 생각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어쩌면 저 사람이 짜장면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 깔끔쟁이가 자신에겐 어울리지도 않는 검고 긴 면을, 어디에건 묻히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게 먹는 모습이 묘하게 위태로워, 숨 막히는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짜장면 먹는 모습까지 섹시한 사람이 있다면 이 실장이 유일할걸.
연희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훅, 숨을 몰아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다 살다 별 미친 생각을. 연희는 쿵쿵, 자리로 되돌아가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랐다. 손이 흔들려 커피가 울컥, 컵 밖으로 튀어 나갔다. 호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짜장면에 집중했다. 연희는 고개를 반쯤 돌리고 내내 흘끔거렸다.
섹시해, 정말 섹시하다. 남자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젓가락을 든 손이, 손가락이 가지런하게 움직인다. 물 흐르듯 미끈하게, 소리도 없이.
젓가락에 요령껏 감긴 면들이 입 안으로 숨어들어 간다. 입술에는 검은 소스가 약간 남았다. 면을 씹느라 조금 둥글어진 뺨이 얌전하게 움직였다. 사이에 혀가 잠깐 나와 입술에 묻은 검은 소스를 핥았다. 살짝 내리깐 눈썹이 두어 번 깜박인다. 혀가 쓸고 지나간 붉은 입술에 윤기가 선명해졌다.
제기랄. 눈을, 눈을 뗄 수가 없어.
연희는 엎질러진 커피를 티슈로 닦다 말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목덜미를 문질렀다. 얼굴로 열기가 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연희를 바라보는 가늘고 긴 눈은 여전히 맑고 습했다.
“……시해서, 잠깐 보고 있…….”
책상에 걸터앉은 사장이 갑자기 입을 턱 벌린 채 말을 멈췄다. 뭔가 나와선 안 될 말이 튀어나온 듯, 그가 허둥허둥 남은 커피를 뚜껑에 따랐다. 이젠 커피가 밖으로 왈칵 쏟아졌다. 호진은 눈썹을 잠깐 꿈틀했지만 연희에게 되묻지는 않았다.
“아, 그게, 그게 말입니다. 이 실장.”
“예, 사장님.”
나간 말을 수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호진은 잘려나간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다. 그리고 사장은 호진이 짐작한 것을 눈치챘다. 다른 말로 덮을 수 없었다.
“짜장면이, 짜장면이 말입니다. 그, 그게.”
“예, 사장님.”
“섹시하다고.”
“……예?”
“거, 까, 까맣고, 늘씬하고, 탄력 있지 않습니까.”
말을 내놓은 사내의 얼굴이 수박 속처럼 벌겋게 달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고. 입술은 달싹이는데 말은 나오지 않고 진땀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애처로운 커피만 책상을 주르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호진은 연희와, 흘러 떨어지는 커피와, 젓가락에 감긴 짜장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섹시합니다.”
호진은 차분하게 대답한 후 짜장면을 다시 감아 들고 연희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짜장면이 다시 얌전하게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연희는 손수건을 움켜쥔 채 손등으로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손등에는 물기가 잔뜩 묻어 나왔다. 호진의 눈가와 입가가 실룩실룩 경련하는 것을, 연희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8. 철거 현장 (1)
호진이 월차를 냈던 하루, 연희는 하루 종일 좌불안석이었다. 내내 전화기를 열었다 닫았다 주먹을 움켰다 풀었다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에이, 가끔 일없이 시근거리다 한숨을 쉬기도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묻던 직원들도 저녁때쯤 되어 이상 증세의 원인을 눈치채고 히죽거렸다. 아무래도 ‘나 혼자도 잘해요.’ 과(科)였던 사장이 ‘만능 해결사 우리 이 실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것이 틀림없었다.
사무실에 남아 있던 김영미 주임은 사장의 아쉬움을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이 실장은 내일 와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결재란에 도장을 쾅쾅 찍어 대고 있던 손이 멎었다. 눈치 빠른 여직원의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사내가 툭, 내뱉었다.
“갑자기 이 실장 이야기는 왜요.”
그래 놓고는 이미 도장이 찍힌 서류들을 한참 뒤적이다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사무실이 왜 이리 덥습니까?”
사무실 사람들까지 눈치를 챌 정도였나? 하루 없다고 이렇게 안절부절못할 이유는 없는데. 월차 못 내게 할걸, 생각하던 연희는 큼직한 손을 꾹 쥐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빠졌나 보다. 당연하게 쓸 수 있는 월차를 왜 못 쓰게 해. 무슨 욕을 먹으려고.
그래도 하루 없다고 이렇게 한 손이 잘려 나간 것처럼 허전한 걸 보니 내가 엄청난 사람을 직원으로 뽑은 게 맞지, 응.
연희는 직원들 눈에 안 띄게 파티션 뒤에 고개를 처박고 얼굴을 구겼다가 벌쭉 웃었다가 다시 얼굴을 구기는 짓을 한참 되풀이했다.
사람을 다루어 보면, 시키는 일을 시키는 대로 잘하는 사람이 있고, 시키는 일조차 못하는 사람이 있고, 가끔 시킨 것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눈치 빠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시킨 일조차 한 번에 못 하고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연희는 시키는 대로만 해 줘도 충분히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호진은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연희는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자신하고 있었고, 호진을 처음 보는 순간 저 사람을 잡아야겠다는 감이 왔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붙잡아 놓고 그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과하다 싶을 만치 업무를 던져 주며 그를 시험했다. 비서실의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기획 업무부터, 경리과, 영업부, 인사 관리과, 정보 및 홍보팀과 법제 문제까지 아우르는 광범한 일을 떠넘겨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진은, 한마디로 그냥 속이 시원할 정도로 일을 잘 했다.
그는 우선 연희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인력, 비용 낭비를 막기 위해서는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시가 떨어지면 언제까지 어떤 순서로 진행할 것인지 그 자리에서 짧게 정리해서 연희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업무 장악력이 좋았고, 중간중간 연희에게 보내는 피드백은 빠르고 자세했다. 그리고 질릴 정도로 깐깐해서, 그동안 원만하게 대충대충 일을 굴리던 거래처 담당들이 가끔 진저리를 치며 연희에게 하소연을 했다.
타 부서와 업무 공조시 일 처리 방식도 손댈 곳 없이 야무졌다. 불협화음이 빚어질 땐 잘잘못과 책임 소재를 따지기에 앞서 어떤 방향으로 일을 틀어야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집중했다. 복지부동, 책임 공방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진행되던 일에서 발을 빼야 할 때는 신속하게 일을 멈추고 매몰비용보다 손해를 줄이는 게 우선이라고 단호하게 조언할 줄 알았다.
연희는 호진이 일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직원들과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업무 처리 패턴은 학벌이나 머리가 좋다는 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한동안 비서실장을 관찰하던 연희는 최근 들어서야 간신히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호진은 경영주의 패러다임을 갖고 있었다.
“……내가 그날 운이 좋았지.”
연희는 보온병의 커피를 후루룩 들이키며 히죽 웃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맞춘 것처럼 등장했단 말이야. 처음 봤을 때 찌르르 필이 왔다니까. 내 사람이다! 너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다! 잡아! 잡아! 하고.
연희에게는 눈앞에 있는 일만 해결하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닌, 전체적인 청사진을 보고 앞일을 해량할 수 있는 동료 같은 이가 절실했다. 그리고 겁도 없이 밀어붙이는 자신의 ‘일단 올인’ 스타일에 적당한 이유를 대어 가며 브레이크를 잡아 줄 사람, 꼼꼼하게 행정적인 기반을 다져 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계약할 때 업무 내용을 묻는 호진에게 연희는 일상적인 보조 업무라고 했었다.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지. 호진이 지금 와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따져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호진은 그것을 불평한 적도 없었다.
이런 사람이 나를 스토킹하다가 이력서를 내밀었다니. 거참.
……나는 완전히 봉을 잡은 거야.
직함을 주어 합당한 대우를 해 주는 게 나을까? 기획실을 만들면 실장으로 적임인데. 하지만 그러면 나와 항상 붙어 다니면서 의견을 교환할 비서를 잃어버리는 거고. 연희는 쯔으, 길게 혀를 찼다. 어찌한다? 연희는 굽슬거리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 올렸다.
조직 개편할 때 비서실 밑에 기획실이랑 인사 관리과, 법제팀, 경리과를 모조리 집어넣을까?
……이런 젠장할. 내가 미쳤나 보다.
연희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머리카락을 푹푹 헤집었다.
이튿날 일찌감치 출근한 호진을 보고서야 연희는 자신의 불안 증세가 종적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중증이 된 것 같은데. 연희는 노트북을 켜 놓고 안경을 벗어 눈가를 문지르는 사내를 몰래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한 그가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호진은 안경 벗은 맨얼굴을 보여 주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연희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장님?”
“아, 아닙니다. 그게.”
할 말이 없다. 연희는 다시 목덜미를 매만졌다. 젠장, 땀띠 나겠다.
“철거 작업 말입니다. 이제 시작이니까 각오해 두시라고.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언제든 뒤로 빠지십시오. 체면이나 고집이 통하는 현장이 아니니까 알아서 몸 사립니다. 알겠습니까?”
“사장님은 아직도 저를 너무 약골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호진은 싱긋 웃었다. 내가 당신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짐작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내가 지난 시간을 어떻게 굴러 왔는지 알면, 당신은 그런 말을 쉽게 하진 못할 거다.
신촌 그랜디스의 철거 작업을 필두로 한, 연희유통의 희마트(HeeMart) 신축 작업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
신촌 그랜디스 유통은 건축한 지 30년이 되어 가는 5층 건물이었다. 상가를 분양하지 않고 전부 임대했기 때문에 그 건물은 환갑이 된 김형식의 단독 소유였다. 덩치가 큰 것 치고 거래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자리한, 대지가 넓은 종합 상가였다. 그러나 워낙 건물이 낙후했기 때문에 매출은 지지부진했다.
IMF 전까지만 해도 워낙 땅값이 좋아 배짱을 튕기며 호가를 책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97년 겨울, 외환위기라는 된서리를 맞은 후, 공실률이 급격히 높아지고 대출이율이 22% 이상으로 치솟아 감당하기 버거워진 형식은 울며 겨자 먹기로 똥값에 건물을 다시 내놓았다. 장남의 사업체가 도산 위기를 맞는 바람에 당장 밀어 넣을 현금이 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던 중이라 건물은 쉽게 나가지 않았다. 대기업이건 명동 전주들이건 강남 큰손들이건 한결같이 몸을 사렸다.
이런 상황에 연희가 비밀리에 접촉해 구매 의사를 보이자 형식은 몹시 반가워했다. 어지간한 조건은 다 맞춰 주겠다고 운을 떼고 시작했다.
연희는 형식에게 ‘어차피 기존 건물 허물어지기 직전이라 고쳐 쓰지도 못한다, 나대지로 만든 후에 매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대지 위에 새로 12층 빌딩을 올려 할인점과 사옥으로 동시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형식은 난색을 표했다. 연희의 요구는 형식 자신이 상가의 상인들을 모조리 내보내고 건물을 밀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상가 연합회에서는 건물 매각 소문을 듣고 날을 바짝 세운 상태였다. 몇 해 전 재건축 여부를 묻는 상가 연합회에 형식은 ‘당분간 재건축은 없다.’라고 못을 박은 바 있었다. 상가는 그 말을 믿고 자체적으로 시설, 간판 등 외·내장을 새로 했었다.
철거가 확실시되면 입점 상가의 임차인들끼리 담합해 시설비와 권리금을 몽땅 내놓으라, 신축 후 재입주 우선권을 달라 악머구리 떼처럼 들러붙을 가능성이 높았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그들이 들어올 때 투자했던 권리금도 만만치 않았고, 상가 연합회는 목소리가 센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나이 먹은 형식은 귀찮고 험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상가 철수 작업이란 게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재건축 최대의 난관이 보상 문제라는 말이 있겠는가.
연희는 자신이 상가 퇴거와 철거까지 맡겠다는 조건으로 매입 금액을 차근차근 까 내렸다. 상가의 상인들을 퇴거시키는 데 드는 비용 및 철거비용, 철거에 예상되는 기간만큼의 기회비용을 다른 곳과 비교하여 계산했다. 상가 건물이 있는 상태로 매매했을 경우와 나대지로 매매했을 경우의 세금 차이를 꼼꼼하게 따져 매매가를 후려쳤다.
두 사람이 각기 고용한 회계사들이 들러붙어 오랫동안 설전을 벌였다. 형식은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매도가에 몇 번이나 판을 엎어 버리려 했으나 연희는 끈질겼다.
다른 곳에서 입질이 전혀 없는 것, 알고 있습니다. 외국 헤지펀드에서 여기저기 찔러본다는 소문 들으신 모양인데, 조건이 더 좋아질 것 같습니까? 걔들이야말로 후려치기 선수예요. 거미줄로 꽁꽁 감아 놓고 단물만 쪽 빼먹는 전문가들입니다. 김 사장님,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중도금 잔금 기간도 최대한 짧게 잡아 지불할 겁니다. 당신 손에 시끄럽고 귀찮은 일 넘기지 않겠습니다.
나이 들고 지친 사내는 젊고 패기 넘치는 장사꾼의 교묘한 밀고 당기기, 그리고 집요한 설득에 결국 손을 들었다.
어둡고 낡고 어정쩡한 5층짜리 대형 상가. 입구는 좁고 간판은 더럽고 통로의 계단에서는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화장실도 좁고 지저분하고 냄새가 심했다. 입지가 좋음에도 한산하고 볼 것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권리금과 시설비로 거금을 들인 매장 상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매각 소문이 돌자마자 연합회에서는 바짝 들고 일어났다. 한 푼이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해 그들은 회의 한 번에 똘똘 뭉쳤다. 철거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
7. 섹시 짜장면 (3)
호진이 인상을 쓰며 메뉴판을 노려보자 밖으로 튀어 나가던 곽병진 과장이 되돌아와 연희에게 투덜댔다.
“사장님! 대체 짜장면하고 무슨 웬수가 졌습니까? 질리지도 않으세요? 좀, 좀 다른 것도 개척해 보세요. 회사 이미지가 있지! 대체 회사 대표라는 분이 쏘샬 포지션이란 것도 없이, 어떻게 하루가 멀다 하고 짜장면입니까! 남들이 흉봅니다, 흉! 배 속이 시커멓게 변했을 겁니다!”
“곽 과장. 내 속이야 원래 올 블랙인 거 모르십니까?”
“거참 사장님이 짜장면을 시키시니까 저희는 더 좋은 거 시켜 먹지도 못하고 몰래 나가서 먹어야 하잖습니까! 저 케임브리지 출신의 똑똑한 이 실장마저 고뇌하는 게 안 보이십니까?”
대체 거기서 케임브리지가 왜 나오는 거야? 호진이 속으로 콧방귀를 뀌는 사이 김영미 주임이 애교 있게 웃었다.
“사장님! 짜장면 오래 드시다가 배 나오면 어떡해요. 그거 완전 영양가 제로에 곱빼기는 1,000킬로칼로리가 넘는대요. 멋진 사나이의 배 나온 모습만큼 슬픈 일은 없어요.”
“운동 많이 합니다. 집에선 야채도 많이 먹습니다. 걱정 마세요.”
연희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병진은 호진의 곁으로 다가와서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호진 씨, 사장님하고 꼭 같이 먹어야 한다는 도의심 따윈 인생에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아요. 냅둬 보니까, 배달 안 되면 사장님이 혼자 짜장면집 가셔서 잘만 드십니다. 그러니 집어치우고 같이 나가서 드십시다. 나중엔 오징어 먹물, 머리카락, 손발톱에 낀 꺼먼색 때만 봐도 쏠리는 날이 올 겁니다. 인생 뭐 있어요?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인데!”
“아직은 괜찮습니다. 오늘은 사무실에서 사장님하고 같이 짜장면 먹겠습니다.”
호진의 말에 병진은 낄낄 웃었다.
“호진 씨는 아직이네! 저희끼리는 연희유통의 진정한 싸나이가 되는 시기를, 중국집 쪽으로 오줌도 안 누는 때로 잡고 있거든요. 돌을 씹으며 참아 봤자 사장님 개과천선하기 전에 늙어 죽을 거라고! 아, 비서실장이라는 게 무슨 죄예요?”
병진은 불룩 나온 배를 한 손을 텅텅 쳐 보였다.
“내 배 좀 봐요. 벨트에 구멍 두 개 더 뚫었다고! 마누라가 밤에 이 배를 만지면서 보라돌이, 뚜비~ 노래를 하는데, 깜깜한데 그 노래 들으면 얼마나 식겁하는지 아십니까? 이게 다 초창기에 멋모르고 의리 찾다가 생긴 짜장면 배라고요! 나도 한때는 이 실장처럼 물찬제비였던 시절이 있었다고!”
“언제요! 물먹은 제비였지!”
김영미 주임이 혀를 쏙 내밀자 병진이 와르릉 목소리를 높였다.
“어허! 이 아가씨가 어디서 유언비어를 함부로 배포해요? 입사 초에는 나도 꼬맹이들한테 병진 형이라고 불렸다니까? 뭐 어쨌든, 이 실장이 아직은 괜찮다니 건투는 빌어 주겠는데, 내 장담하죠. 이 실장도 머지않았어요! 3년! 3년 겁니다!”
사람들 참, 무슨 악담을 그렇게 해. 연희의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다. 덩치 큰 사내의 태평한 얼굴을 보니 직원들이 사장의 식성에 대한 험담도 대놓고 종종 했던 모양이다. 사람들이 빠져나간 사무실은 이내 조용해졌다.
“짜장면을 왜 그렇게 좋아하십니까?”
“영국에서 베이커 스트리트에 사셨습니까? 별 게 다 궁금합니다.”
연희는 웃음을 거두고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호진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 속에 적지 않은 사연이 있는 것도 같았지만 대답은 끝까지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서 짜장면이 제일 맛있어.’
각인 효과는 애착 형성기의 아기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살면서 가장 허기질 때 먹었던 음식은 몸의 세포에 평생 각인된다. 연희의 눈동자가 눈자위 위쪽에 한참 머물렀다.
자신이 평생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맛있었던 것은 이틀을 내리 굶은 후 한밤중에 먹었던 불어터진 짜장면이었다. 열아홉 살. 한기 이는 겨울밤, 밖에서 몰아치는 삭풍. 온기 없는 차가운 방바닥. 자정이 넘어서 중국집에서 퇴근한 선배가 들고 온 양푼에 담긴 짜장면을,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큼 부푼 되바라진 계집애와 머리를 맞대고 허발하며 먹었다.
지독하게, 지독하게 맛있어.
혀와 위장에서 시작된 단순명료한 행복감이 온몸에 퍼져 선명하게 각인되었다. 하지만 연희는 그 기억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서투르게 웃기만 했다.
“면들이 자신의 정체를 까맣게 감추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가상하지 않습니까? 과거를 묻지 마세요, 라고 온몸으로 부르짖고 있는 게 마음에 들어서요.”
기상천외한 대답에 호진의 입이 약간 벌어졌다. 농담입니다. 농담! 연희는 껄껄 웃었다. 신속배달 광고가 요란한 신촌반점에서 키가 껑충한 배달원이 사각 양철 가방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섰다.
신촌반점의 주력 메뉴라는 ‘옛날왕짜장’은 양이 많고 감칠맛이 있었다.
일찌감치 곱빼기 그릇을 비운 연희는 탁자 맞은편에 앉아 조심스럽게 면을 감아 드는 사내를 지켜보았다.
길고 검은 면이 수저에 얹혀 돌돌 말린 후 입 안으로 얌전하게 들어간다. 호진은 청소기로 빨아들이듯 후루룩, 면을 집어삼키는 적이 없었다. 음식은 한입에 들어갈 정도로 작게 썰거나 수저에 올려놓고 먹었다. 입가나 옷에 묻히는 일 한번 없이 단정하다.
짜장면은 선 볼 때 피해야 할 음식 1순위라 했는데. 이것처럼 얌전하게 먹기 난해한 음식을 먹을 때도 입가에 검은 자국 하나 묻히는 일이 없었다. 사무실 정리 중일 때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중에 박스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함께 먹을 때도 많았는데 그래도 매끈하게 다려진 슈트는 음식 얼룩이나 구김 하나 없었다.
사실 이따위 싸구려 음식과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 좋아하지 않는 것도 뻔히 보이는데, 내색 없이 매번 같은 걸 주문한다. 아마 내가 시키니까 같이 시키는 거겠지. 꼭 그럴 필요는 없는데.
하지만 연희는 생각을 입에 담지 않았다. 어쩌면 저 사람이 짜장면 먹는 모습을 보는 것을 은근히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 깔끔쟁이가 자신에겐 어울리지도 않는 검고 긴 면을, 어디에건 묻히지 않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조심스럽게 먹는 모습이 묘하게 위태로워, 숨 막히는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짜장면 먹는 모습까지 섹시한 사람이 있다면 이 실장이 유일할걸.
연희는 순간적으로 떠오른 생각에 훅, 숨을 몰아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살다 살다 별 미친 생각을. 연희는 쿵쿵, 자리로 되돌아가 보온병에서 커피를 따랐다. 손이 흔들려 커피가 울컥, 컵 밖으로 튀어 나갔다. 호진은 고개도 돌리지 않고 짜장면에 집중했다. 연희는 고개를 반쯤 돌리고 내내 흘끔거렸다.
섹시해, 정말 섹시하다. 남자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젓가락을 든 손이, 손가락이 가지런하게 움직인다. 물 흐르듯 미끈하게, 소리도 없이.
젓가락에 요령껏 감긴 면들이 입 안으로 숨어들어 간다. 입술에는 검은 소스가 약간 남았다. 면을 씹느라 조금 둥글어진 뺨이 얌전하게 움직였다. 사이에 혀가 잠깐 나와 입술에 묻은 검은 소스를 핥았다. 살짝 내리깐 눈썹이 두어 번 깜박인다. 혀가 쓸고 지나간 붉은 입술에 윤기가 선명해졌다.
제기랄. 눈을, 눈을 뗄 수가 없어.
연희는 엎질러진 커피를 티슈로 닦다 말고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목덜미를 문질렀다. 얼굴로 열기가 올랐다.
“무슨 일이십니까?”
연희를 바라보는 가늘고 긴 눈은 여전히 맑고 습했다.
“……시해서, 잠깐 보고 있…….”
책상에 걸터앉은 사장이 갑자기 입을 턱 벌린 채 말을 멈췄다. 뭔가 나와선 안 될 말이 튀어나온 듯, 그가 허둥허둥 남은 커피를 뚜껑에 따랐다. 이젠 커피가 밖으로 왈칵 쏟아졌다. 호진은 눈썹을 잠깐 꿈틀했지만 연희에게 되묻지는 않았다.
“아, 그게, 그게 말입니다. 이 실장.”
“예, 사장님.”
나간 말을 수습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안다. 호진은 잘려나간 말이 무엇인지 짐작했다. 그리고 사장은 호진이 짐작한 것을 눈치챘다. 다른 말로 덮을 수 없었다.
“짜장면이, 짜장면이 말입니다. 그, 그게.”
“예, 사장님.”
“섹시하다고.”
“……예?”
“거, 까, 까맣고, 늘씬하고, 탄력 있지 않습니까.”
말을 내놓은 사내의 얼굴이 수박 속처럼 벌겋게 달았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니라고. 입술은 달싹이는데 말은 나오지 않고 진땀이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애처로운 커피만 책상을 주르르 흘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호진은 연희와, 흘러 떨어지는 커피와, 젓가락에 감긴 짜장면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그렇군요. 섹시합니다.”
호진은 차분하게 대답한 후 짜장면을 다시 감아 들고 연희를 향해 빙긋 웃어 보였다. 그의 손에 들린 짜장면이 다시 얌전하게 입 안으로 스며들었다. 연희는 손수건을 움켜쥔 채 손등으로 이마를 벅벅 문질렀다. 손등에는 물기가 잔뜩 묻어 나왔다. 호진의 눈가와 입가가 실룩실룩 경련하는 것을, 연희는 끝까지 눈치채지 못했다.
8. 철거 현장 (1)
호진이 월차를 냈던 하루, 연희는 하루 종일 좌불안석이었다. 내내 전화기를 열었다 닫았다 주먹을 움켰다 풀었다 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에에이, 가끔 일없이 시근거리다 한숨을 쉬기도 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묻던 직원들도 저녁때쯤 되어 이상 증세의 원인을 눈치채고 히죽거렸다. 아무래도 ‘나 혼자도 잘해요.’ 과(科)였던 사장이 ‘만능 해결사 우리 이 실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 것이 틀림없었다.
사무실에 남아 있던 김영미 주임은 사장의 아쉬움을 십분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장님. 이 실장은 내일 와요. 조금만 더 기다리세요.”
결재란에 도장을 쾅쾅 찍어 대고 있던 손이 멎었다. 눈치 빠른 여직원의 킬킬대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동안 대답이 없던 사내가 툭, 내뱉었다.
“갑자기 이 실장 이야기는 왜요.”
그래 놓고는 이미 도장이 찍힌 서류들을 한참 뒤적이다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사무실이 왜 이리 덥습니까?”
사무실 사람들까지 눈치를 챌 정도였나? 하루 없다고 이렇게 안절부절못할 이유는 없는데. 월차 못 내게 할걸, 생각하던 연희는 큼직한 손을 꾹 쥐고 눈썹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내가 정신이 빠졌나 보다. 당연하게 쓸 수 있는 월차를 왜 못 쓰게 해. 무슨 욕을 먹으려고.
그래도 하루 없다고 이렇게 한 손이 잘려 나간 것처럼 허전한 걸 보니 내가 엄청난 사람을 직원으로 뽑은 게 맞지, 응.
연희는 직원들 눈에 안 띄게 파티션 뒤에 고개를 처박고 얼굴을 구겼다가 벌쭉 웃었다가 다시 얼굴을 구기는 짓을 한참 되풀이했다.
사람을 다루어 보면, 시키는 일을 시키는 대로 잘하는 사람이 있고, 시키는 일조차 못하는 사람이 있고, 가끔 시킨 것보다 한 걸음 앞서가는 눈치 빠른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시킨 일조차 한 번에 못 하고 사건, 사고를 몰고 다니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연희는 시키는 대로만 해 줘도 충분히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호진은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연희는 자신이 사람 보는 눈이 좋다고 자신하고 있었고, 호진을 처음 보는 순간 저 사람을 잡아야겠다는 감이 왔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서 붙잡아 놓고 그의 능력을 파악하기 위해 과하다 싶을 만치 업무를 던져 주며 그를 시험했다. 비서실의 업무와 전혀 상관없는 기획 업무부터, 경리과, 영업부, 인사 관리과, 정보 및 홍보팀과 법제 문제까지 아우르는 광범한 일을 떠넘겨 보았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호진은, 한마디로 그냥 속이 시원할 정도로 일을 잘 했다.
그는 우선 연희가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인력, 비용 낭비를 막기 위해서는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지시가 떨어지면 언제까지 어떤 순서로 진행할 것인지 그 자리에서 짧게 정리해서 연희에게 넘겨주는 것으로 일을 시작했다.
그는 업무 장악력이 좋았고, 중간중간 연희에게 보내는 피드백은 빠르고 자세했다. 그리고 질릴 정도로 깐깐해서, 그동안 원만하게 대충대충 일을 굴리던 거래처 담당들이 가끔 진저리를 치며 연희에게 하소연을 했다.
타 부서와 업무 공조시 일 처리 방식도 손댈 곳 없이 야무졌다. 불협화음이 빚어질 땐 잘잘못과 책임 소재를 따지기에 앞서 어떤 방향으로 일을 틀어야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것인가에 집중했다. 복지부동, 책임 공방을 끔찍하게 싫어했다. 진행되던 일에서 발을 빼야 할 때는 신속하게 일을 멈추고 매몰비용보다 손해를 줄이는 게 우선이라고 단호하게 조언할 줄 알았다.
연희는 호진이 일을 다루는 방식이 다른 직원들과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업무 처리 패턴은 학벌이나 머리가 좋다는 것만으론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한동안 비서실장을 관찰하던 연희는 최근 들어서야 간신히 한 가지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호진은 경영주의 패러다임을 갖고 있었다.
“……내가 그날 운이 좋았지.”
연희는 보온병의 커피를 후루룩 들이키며 히죽 웃었다. 나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맞춘 것처럼 등장했단 말이야. 처음 봤을 때 찌르르 필이 왔다니까. 내 사람이다! 너한테 꼭 필요한 사람이다! 잡아! 잡아! 하고.
연희에게는 눈앞에 있는 일만 해결하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닌, 전체적인 청사진을 보고 앞일을 해량할 수 있는 동료 같은 이가 절실했다. 그리고 겁도 없이 밀어붙이는 자신의 ‘일단 올인’ 스타일에 적당한 이유를 대어 가며 브레이크를 잡아 줄 사람, 꼼꼼하게 행정적인 기반을 다져 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계약할 때 업무 내용을 묻는 호진에게 연희는 일상적인 보조 업무라고 했었다. 개가 들어도 웃을 일이지. 호진이 지금 와서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따져도 할 말이 없다. 하지만 호진은 그것을 불평한 적도 없었다.
이런 사람이 나를 스토킹하다가 이력서를 내밀었다니. 거참.
……나는 완전히 봉을 잡은 거야.
직함을 주어 합당한 대우를 해 주는 게 나을까? 기획실을 만들면 실장으로 적임인데. 하지만 그러면 나와 항상 붙어 다니면서 의견을 교환할 비서를 잃어버리는 거고. 연희는 쯔으, 길게 혀를 찼다. 어찌한다? 연희는 굽슬거리는 앞머리를 위로 쓸어 올렸다.
조직 개편할 때 비서실 밑에 기획실이랑 인사 관리과, 법제팀, 경리과를 모조리 집어넣을까?
……이런 젠장할. 내가 미쳤나 보다.
연희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머리카락을 푹푹 헤집었다.
이튿날 일찌감치 출근한 호진을 보고서야 연희는 자신의 불안 증세가 종적 없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중증이 된 것 같은데. 연희는 노트북을 켜 놓고 안경을 벗어 눈가를 문지르는 사내를 몰래 바라보았다. 시선을 의식한 그가 눈썹을 살짝 움직였다. 호진은 안경 벗은 맨얼굴을 보여 주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연희는 머쓱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장님?”
“아, 아닙니다. 그게.”
할 말이 없다. 연희는 다시 목덜미를 매만졌다. 젠장, 땀띠 나겠다.
“철거 작업 말입니다. 이제 시작이니까 각오해 두시라고. 분위기가 좋지 않으면 언제든 뒤로 빠지십시오. 체면이나 고집이 통하는 현장이 아니니까 알아서 몸 사립니다. 알겠습니까?”
“사장님은 아직도 저를 너무 약골로 보시는 것 같습니다.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호진은 싱긋 웃었다. 내가 당신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짐작 못 하는 바는 아니지만 내가 지난 시간을 어떻게 굴러 왔는지 알면, 당신은 그런 말을 쉽게 하진 못할 거다.
신촌 그랜디스의 철거 작업을 필두로 한, 연희유통의 희마트(HeeMart) 신축 작업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신촌 그랜디스 유통은 건축한 지 30년이 되어 가는 5층 건물이었다. 상가를 분양하지 않고 전부 임대했기 때문에 그 건물은 환갑이 된 김형식의 단독 소유였다. 덩치가 큰 것 치고 거래가 빠르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 자리한, 대지가 넓은 종합 상가였다. 그러나 워낙 건물이 낙후했기 때문에 매출은 지지부진했다.
IMF 전까지만 해도 워낙 땅값이 좋아 배짱을 튕기며 호가를 책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97년 겨울, 외환위기라는 된서리를 맞은 후, 공실률이 급격히 높아지고 대출이율이 22% 이상으로 치솟아 감당하기 버거워진 형식은 울며 겨자 먹기로 똥값에 건물을 다시 내놓았다. 장남의 사업체가 도산 위기를 맞는 바람에 당장 밀어 넣을 현금이 급하기도 했다.
하지만 부동산 가격이 폭락하던 중이라 건물은 쉽게 나가지 않았다. 대기업이건 명동 전주들이건 강남 큰손들이건 한결같이 몸을 사렸다.
이런 상황에 연희가 비밀리에 접촉해 구매 의사를 보이자 형식은 몹시 반가워했다. 어지간한 조건은 다 맞춰 주겠다고 운을 떼고 시작했다.
연희는 형식에게 ‘어차피 기존 건물 허물어지기 직전이라 고쳐 쓰지도 못한다, 나대지로 만든 후에 매도해 달라’고 요구했다. 나대지 위에 새로 12층 빌딩을 올려 할인점과 사옥으로 동시에 사용할 예정이었다. 형식은 난색을 표했다. 연희의 요구는 형식 자신이 상가의 상인들을 모조리 내보내고 건물을 밀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상가 연합회에서는 건물 매각 소문을 듣고 날을 바짝 세운 상태였다. 몇 해 전 재건축 여부를 묻는 상가 연합회에 형식은 ‘당분간 재건축은 없다.’라고 못을 박은 바 있었다. 상가는 그 말을 믿고 자체적으로 시설, 간판 등 외·내장을 새로 했었다.
철거가 확실시되면 입점 상가의 임차인들끼리 담합해 시설비와 권리금을 몽땅 내놓으라, 신축 후 재입주 우선권을 달라 악머구리 떼처럼 들러붙을 가능성이 높았다. 위치가 위치인지라 그들이 들어올 때 투자했던 권리금도 만만치 않았고, 상가 연합회는 목소리가 센 사람들이 우글우글했다.
나이 먹은 형식은 귀찮고 험한 일에 말려들고 싶지는 않았다. 상가 철수 작업이란 게 보통 골치 아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재건축 최대의 난관이 보상 문제라는 말이 있겠는가.
연희는 자신이 상가 퇴거와 철거까지 맡겠다는 조건으로 매입 금액을 차근차근 까 내렸다. 상가의 상인들을 퇴거시키는 데 드는 비용 및 철거비용, 철거에 예상되는 기간만큼의 기회비용을 다른 곳과 비교하여 계산했다. 상가 건물이 있는 상태로 매매했을 경우와 나대지로 매매했을 경우의 세금 차이를 꼼꼼하게 따져 매매가를 후려쳤다.
두 사람이 각기 고용한 회계사들이 들러붙어 오랫동안 설전을 벌였다. 형식은 뭉텅뭉텅 잘려 나가는 매도가에 몇 번이나 판을 엎어 버리려 했으나 연희는 끈질겼다.
다른 곳에서 입질이 전혀 없는 것, 알고 있습니다. 외국 헤지펀드에서 여기저기 찔러본다는 소문 들으신 모양인데, 조건이 더 좋아질 것 같습니까? 걔들이야말로 후려치기 선수예요. 거미줄로 꽁꽁 감아 놓고 단물만 쪽 빼먹는 전문가들입니다. 김 사장님, 아무 걱정 마십시오. 제가 다 알아서 조용히 처리하겠습니다. 중도금 잔금 기간도 최대한 짧게 잡아 지불할 겁니다. 당신 손에 시끄럽고 귀찮은 일 넘기지 않겠습니다.
나이 들고 지친 사내는 젊고 패기 넘치는 장사꾼의 교묘한 밀고 당기기, 그리고 집요한 설득에 결국 손을 들었다.
어둡고 낡고 어정쩡한 5층짜리 대형 상가. 입구는 좁고 간판은 더럽고 통로의 계단에서는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화장실도 좁고 지저분하고 냄새가 심했다. 입지가 좋음에도 한산하고 볼 것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권리금과 시설비로 거금을 들인 매장 상인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매각 소문이 돌자마자 연합회에서는 바짝 들고 일어났다. 한 푼이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해 그들은 회의 한 번에 똘똘 뭉쳤다. 철거 작업이 쉽지 않을 것은 당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