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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0화
7. 섹시 짜장면 (2)


호진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영업부나 인사 관리과, 자재과 핵심 멤버들과 마찬가지로 김영미 주임도 희타운 시절부터 저 ‘악덕 사장’과 함께 일했던 사람이다. 저 사람 스타일 알면서 따라와 놓고 불평은.
희타운 시절부터 연희와 함께 일했던 이들은 맡은 일에 대해서는 ‘토가 나올 정도로’ 확인, 또 확인하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 되게 훈련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의 스타일에 버티는 내공이 쌓였는지 근속 연수들도 상당했다. 한번 내 사람으로 거두면 뒤통수를 치지 않는 한 어떻게든 키워서 데리고 있는 편입니다. 결국 사람 사업이니까. 연희는 호진에게 그리 말했었다.
업무는 과중한 편이라 제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직원이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분위기만큼은 자유롭고 분방했다. 서로 격의 없이 별명을 불러 댔고 사장에게도 그다지 격식을 차리는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사장이 직원에게 예의를 차리는 편이었다. 나이 어린 여직원에게도 반말을 하는 법이 없었고, 질 낮은 농담 따위는 입 밖에 내지도 않았다. 윤연희란 사내의 개인적인 분위기는 묵직하고 진중했지만, 그가 만들어 내는 분위기는 소탈하고 실리적이었다.
하지만 요새 윤연희 사장은 과민했다. 일이 순적하게 돌아가지 않으면 직원들을 지금처럼 정신없이 다잡았다. 조금 있으면 각 상가와 개별 철거 협상이 진행될 거라 했는데 아마 그 때문일 거라고 호진은 추측했다.
호진 역시 신경이 곤두서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법제팀이 아직 별도로 없어서 호진이 그 문제를 전담하고 있었다. 상가별로 접촉하기 전에 변호사를 찾아다니며 관련 법 조항과 판례를 꼼꼼하게 체크해야 했는데, 그것이 예상보다 품이 많이 들었다. 정시 퇴근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대체 이래 놓고 어떻게 9시 출근 7시 퇴근이라고 광고를 냈는지 모르겠다.
서류 정리만 끝나면 야근 철야도 끝인 줄 알았더니.
큰 착각이었다. 연희는 호진에게 ‘일반적인 비서실 업무 분장’보다 훨씬 많은 것을 기대했다. 매일 취합되는 서류의 진위 검증과 기획안의 타당성까지 함께 판단해 주길 바랐다. 결재가 나간 건에 대해서는 진척 상황에 대해서 그림처럼 꿰고 있어야 했다. 예산안이 올라오면 어느 구석에서 쥐어짤, 아니, 비용을 줄일 수 있는지 의견을 말해 달라 했다.
비서가 아니고 문제 해결사를 원했던 모양이다. 호진이 납득하기 어려운 업무 분장이었으나, 연희는 나름의 확고한 기준과 방향이 있는 듯, 업무를 던져 놓을 때마다 당당하고 태연했다. 지금 처음이라 안 잡혀서 그렇습니다. 익숙해지면 뭐든 빨라집니다. 결론은, 일 안 끝났으면 그냥 날밤 새우라는 말이었다.
악덕 사장이 힘까지 좋으니 그것도 참 문제였다. 밤 12시 철야를 진두지휘하고도 다음날 새벽에 말짱한 얼굴로 출근해서 지각하는 직원들을 쪼아 대는 것이다. 호진은 목구멍까지 차오른 피로를 내색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직원들이 뒤에서 흉을 볼 때 돌쇠, 우루쇠, 마징곰 등 별스런 이름으로 씹는 건 이유가 있었다.
“지각은 습관입니다! 지금 타임 체크한 이 표,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결국 경리과 신입의 입술이 실룩실룩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다. 연희는 숨을 씩씩 몰아쉬며 잠시 말을 멈췄다. 저러다 저 여자가 울면 사장은 당황해서 울지 말라고 할까 아니면 뭐 잘했다고 우냐고 할까. 호진의 생각이 엉뚱한 쪽으로 흐르는 것을 눈치라도 챈 듯, 옆의 김 주임이 걱정스러운 낯으로 중얼거렸다.
“저거, 울면 안 되는데. 특히 수습 때는 사장 앞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 울지 말라고 첫날부터 얘기했는데 어떡하죠?”
사수인 김 주임이 조마조마하게 후임의 얼굴을 살폈다. 호진의 눈동자가 그녀 쪽으로 돌아가자 김 주임이 속닥였다.
“수습 때 자꾸 울면, 수습 통과 못 하고 잘려요.”
호진이 눈을 둥그렇게 떴다. 무슨 말입니까?
“우루쇠 사장이, 미안해서 그 아가씨 얼굴을 못 봐요. 자꾸 피하고 야단도 못 치고. 그러다 보면 일을 원하는 스타일로 못 시키니까 그냥 정직원 발령을 안 내요.”
뭐? 호진은 기가 막혀 김 주임을 빤히 응시했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비죽 내밀고 투덜거렸다.
“웃기는 데서 물렁팥죽이라니까요. 지금은 저러지만, 나중엔 미안해서 술을 사네, 밥을 사네 야단을 하실 거예요. 배불러 터질 때까지 먹어야 놓아줄 걸요? 차라리 웬수 같은 상가 연합회에서 전화나 하나 오면 좋겠다. 숨 좀 돌리게.”
소곤대는 김 주임의 말에 호진은 실소했다. 참 여러 구석에서 알 수 없는 모습이 튀어나온다. 호진은 직원을 다잡고 있는 덩치 큰 사내가 어쩐지 무르고 우스워 보여 곁눈으로 그를 훔쳐보았다.
호진의 눈길을 느낀 듯, 연희가 잠시 두리번두리번하다가 호진과 시선이 딱 마주쳤다. 순간 와릉와릉 쏟아지던 소리가 멎었다. 커다란 눈이 놀란 듯 껌벅껌벅했다. 호진은 멋쩍은 낯으로 살짝 미소한 후 시선을 피했다. 나도 웃음이 꽤 헤퍼졌어. 호진은 약간 당혹스러웠다.
연희는 수습 직원 나무라던 것을 갑자기 멈췄다. 사무실은 조용해졌다. 호진이 시선을 거둔 지 한참 지난 후에도 연희는 호진의 옆얼굴을 노려보듯 응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거북해진 호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이십니까, 사장님?”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연희는 자리에서 자세를 고쳐 앉고 주머니에서 수건을 꺼내 목덜미를 닦았다. 연희의 얼굴로 붉은빛이 은은히 올라온 것이 보였다. 이젠 이마까지 올라온 땀을 닦던 사내가 문득 고개를 돌리고 여전히 울 듯한 낯으로 서 있는 직원을 확인한 후 눈을 껌벅거렸다.
“음? 박연수 씨? 무슨 일……?”
“네? 사장님이…….”
“아, 이런, 깜박 잊……. 아닙니다. 그게, 그게 연수 씨. 내 할 말은 다 했는데.”
폭풍은 어이없게 종결되었다. 직원들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참느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보온병의 뚜껑에 커피를 따르는 사장의 모습에 차츰 친숙해졌다. 새벽에 책상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묵직한 매혹이었다면, 보온병 뚜껑에 든 커피는 궁상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에도 길이 들기 시작했다. 그가 항상 들고 다니는 저 1리터 들이 금속 보온병 안에는 집에서 직접 타 온 진한 커피가 들어 있었다.
그는 여직원에게 커피를 타 달라 하는 대신 저 병을 항상 들고 다니며 뚜껑에 커피를 따라 후후 불며 마셨다. 얻어 마셔 본 사람들 말에 의하면 혀가 절어 붙을 만치 달다고 했다. 당도 때문인지, 그는 마실 때마다 눈을 감고 빙긋 웃고는 했다. 선이 굵은 얼굴에서 나타나는 무방비한 표정은 일품이었다.
덩치만 저렇지 센스도 있고 감도 좋은 사람이다. 좋은 차나 갓 볶은 커피의 깊은 향과 맛을 제대로 알게 되면 단맛에만 혹하거나 하진 않을 텐데.
연희는 사람됨의 깊이에 비하면, 매너에서의 깊이는 부족해 보였다. 한정식보다는 시장통에서 순댓국밥을 퍼먹으며 더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스테이크와 와인의 마리아주도 맞출 줄 몰랐고, 샐러드 포크와 미트 포크를 구별하지 못해 서양식 레스토랑에 가는 것을 두려워했다. 호진이 홍차에 우유 넣는 것을 보고 먹을 것으로 장난하느냐, 말을 걸다가 나중에 얼굴이 시뻘게지기도 했다.
그런 걸로 그렇게 풀이 죽을 필요는 없는데. 호진은 별것 아닌 일에 필요 이상으로 창피해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 주어야 할지 몰라 애를 먹었다.
내면의 깊이가 있는 사람이니 조금만 배우면 금방 기품 있는 틀이 잡힐 것이다. 가끔은 홍차나 맛좋은 커피, 고급 와인 류를 즐기게 하면 어떨까. 저 사람한테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가. 호진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사장님. 커피 챙기기 귀찮지 않으십니까? 호텔 커피도 비싸 봐야 7,000원입니다.”
덩치 큰 사장이 소리 없이 웃었다. 자신만만하게 서랍을 열더니 부스럭부스럭한다. 한참 만에 들어 올린 굵고 두터운 손안에서 조그만 커피믹스가 달랑거렸다.
“보세요, 이 실장. 이거 개당 70원입니다. 원두커피 원가도 비슷합니다.”
호진의 입이 모르는 결에 벌어졌다. 수백억 돈이 오가는 할인점 건설을 진두지휘하는 사장의 입에서 나올 법한 말은 아니다. 두 번째로 나온 것은 녹차 티백이었다.
“녹차는 개당 50원입니다.”
“사장님, 너무 쫀쫀하세요!”
“맞습니다, 김 주임. 저 쫀쫀합니다.”
경리과 여직원의 타박에 연희가 껄껄 웃었다.
“그래도 다른 것도 아니고 유통하는 사람이, 원가와 판매가가 100배 차이 나는 걸 알고 맨정신으로 지갑 못 엽니다. 하루 7,000원씩 모아서 김영미 주임 야근수당 드립니다. 좋지 않습니까?”
옆에서 영업부 곽병진 과장이 술기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말을 받았다.
“그래도 사장님이 영미 씨 커피 타 달라고 안 하니 편하고 좋잖아요. 연희유통 사무실에서 꽃피는 남녀평등! 멋지지 않습니까?”
“멋지긴 개뿔이요! 그래서 제가 20리터 생수통 나르는 거 보고만 계시고요?”
“아니꼬우면 사장님 꼬드겨서 경리과 남자 직원 뽑든가요. 사장님만큼 떡대 좋은 사람으로 하나 뽑으면? 아님 이 실장님한테 부탁하시든가. 아, 식겁할 거 없습니다, 이 실장. 알통 생기고 좋지 뭘 그래요. 그 얼굴에, 그 능력에, 이두박, 삼두박, 식스팩까지 있으면 여자들이 줄줄 붙겠어요. 거 얼마나 좋아요. 아, 나는 왜 봐요? 난 연희유통 위해서 몸 바쳐 영업하다가 나이 서른일곱에 이 꼴이 된 거야! 나도 태어날 때부터 텔레토비였던 건 아니야!”
듣고 있던 연희가 콧바람을 식식대며 몸을 일으켰다. 뭔가 마음에 안 드는 말이 나온 모양이다.
“내가 생수통 나를 테니 거 사람 뽑잔 말 좀 하지 맙시다. 난 고정비 늘어나는 게 제일 무섭습니다. 그리고 엉뚱한 이 실장은 왜 끌어 붙입니까? 우리 이 실장이 그렇게 만만합니까?”
호진은 입술을 실룩하고 웃음을 참았다.
죽겠군. 우리 이 실장이라. 나는 사장한테 아주 총애를 받고 있는 모양이다.
고정비 핑계를 대고 있지만 사실은 그게 아닐 것이다. 그동안 호진의 이름이 직원들의 입에 장난스레 오르내릴 때면, 저 덩치 큰 사장은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반응했다.
“사장님 노약자 우대라서 물지게 안 돼요. 다리 신경통 어쩌시고? 파스 냄새 맡기 싫단 말이에요.”
신경통 소리에 덩치 큰 사장은 풀이 죽어 물러섰다. 나이 스물도 되기 전에 얻은 고질병이라 들었지만 어쩌다 그렇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생수통은 사장님 대신 제가 날라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연희의 시선이 호진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호진은 잠깐 망설였다. 사장과 비서 사이의 선은 호진에게 여전히 모호했다. 그에게 비서실장의 롤 모델은 강무영밖에 없었고, 그는 아버지나 형에게 감정도 없는 개처럼 복종했다.
하지만 저 사람에게는?
“커피 정도는 제가 매일 사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다른 데 가셔선 70원 커피 같은 말씀 마십시오.”
와하하핫, 앉아 있던 사내가 고개를 젖히고 크게 웃었다.
“이 실장, 그런 거 깊이 생각할 필요 없어요. 그냥 장사꾼이 푼돈 마진 따지던 버릇일 뿐입니다.”
“보통 사장님 정도 되시면 사회적 품위나 그런 거 챙기셔야 하지 않습니까?”
“어어! 모르는 말 마십시오. 할인점 오픈하면 말입니다. 내 이름 걸고 최저가 커피믹스 PL(Private Label―자사 브랜드)상품 만들 생각입니다.”
“네?”
“연희 커피믹스. 좋지 않습니까? 정말로 100개에 4,990원 커피믹스 만들까 하는데. 기존 커피믹스에 설탕을 세 배쯤 넣은 걸로 말입니다. 난 매일 그거 타 먹을 겁니다.”
“아우우! 혓바닥이 쩔어 붙을 거 같아요!”
김영미 주임의 쟁쟁대는 소리가 터져도 그는 아랑곳없다.
“확고한 소비자층이 있어요. 제 입맛에 맞추면 할아버지 할머니들한테 인기 최고일 겁니다. 매출 보장합니다. 하나에 50원도 아니고 49원입니다, 49원! 인생이 달콤해져요 연희 커피믹스, 하나 49원. 광고 카피도 그렇게 나갑시다. 좋지 않습니까?”
덩치 큰 사내가 껄껄 웃었다. 호진은 다시는 커피 이야기를 꺼내지 않기로 결심했다.

***


“지금 같은 불경기에, 은행 이율도 높은데 왜 이 일을 시작하셨습니까? 위험 요소가 너무 크지 않습니까?”
연희는 호진이 휴식 시간에 이것저것 잡다하게 묻는 것을 의심하는 대신 점점 익숙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조용한 줄로만 알았던 비서실장은 의외로 캐고 묻는 것이 많았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호기심이 많다고 했었나. 에디슨이 공부를 잘했던가. 3개월 만에 학교에서 쫓겨났던 게 에디슨인가 아인슈타인인가. 흘깃 곁눈으로 바라보면 호진은 여전히 잔잔한 호수처럼 앉아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
“이 실장이 이런 걸 물어보면 꼭 시험 보는 느낌이 듭니다.”
연희는 굵은 목소리로 웃었다.
“불경기에 시작해서 바닥을 다져야 호경기에 돈을 쓸어 담게 되잖습니까?”
“이 신촌 그랜디스를 택한 이유는 뭔가요?”
“돈이 되는 곳이니까요. 목이 참 좋습니다. 음, 입지라고 해야 하나요?”
연희는 의자에 비스듬히 걸터앉아 남은 커피를 입술에 댔다. 설탕이 가라앉았는지 끔찍하게 달았다.
“직접 답사해서 시장조사를 했습니다. 희타운이 신촌에 있었잖습니까? 그래서 이 바닥이 돈 들인 이상 뽑을 수 있는 상권이란 건 알고 있었어요. 그렇지만 대형 유통 쪽은 납품하고 끽해야 두어 군데 입점해 본 게 전부니, 위에서 굴리는 건 뭘 알아야 말이죠. 그래서 처음 시장조사 할 땐 주먹구구로 별짓을 다 했죠.”
“주먹구구요?”
“뭐, 거래처 직원들 인맥 총동원해서 매일 술 퍼먹이면서 정보 뜯어내고, 유동 인구 알아내려고 시간대 별로 서서 사람이 얼마나 지나다니는지 세어 보고, 어떤 물건들을 어떤 연령대에서 많이들 사 가는지 알아보려고 알바생 열 명, 스무 명씩 풀어 넣기도 했습니다. 시간별 매출액을 짐작이라도 해 보려고 저 옆 백화점 카운터 근처에 가서 눈치 보며 얼쩡대다가 몇 번 쫓겨나기도 했고요.”
맙소사. 나 같으면 상상도 하지 못할 방법이다. 나 같으면 대형 유통사 컨설턴트 면담 일정부터 잡았겠지. 비용이 든다 해도 그쪽 정보가 훨씬 전문적이고 효율적이니까. 호진은 얼빠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구멍가게도 아니고 대형 유통업체다. 어느 경영학 전문가도 저런 방법을 권하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결국 좋은 물건을 좋은 값으로 낚아챈 건 조건 좋은 대형 유통사 오너인 형이 아니라 저 사람이잖아.
스스로 아는 것이 없다고 여긴 사내는 관찰과 현장에서 얻는 정보를 귀하게 여겼고, 그것을 자신의 판단 토대로 삼았다. 더구나 그는 저평가된 물건을 골라내는 눈썰미와 상권에 대한 감이 기본적으로 좋은 것 같았다.
“제가 산 이 신촌 그랜디스 자리, 다니는 사람 보면, 백화점보단 좀 싼 물건이 들어올 곳이에요. 대학가지만 일단 멀지 않은 곳에 소형 평형 아파트 단지들이 있고, 유동 인구의 나이가 강남 쪽보다 낮은 편이기도 하고, 한 블록 옆에 백화점이 있기도 하니 후발업체가 백화점으로 경쟁할 위치는 아니에요. 그리고 확실히 현금은 할인점이 빨리 돕니다. 손익분기점이 훨씬 빠르잖습니까. 백화점의 손익분기가 대략 3년이라 하면, 음, 할인점은 그 반절이나 3분의 1 정도면 닿는 것 같더라고요.”
말을 하던 사내는 갑자기 말을 끊더니 헛기침을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내가…… 진짜 전문가 앞에서 별 웃기는 소릴 다 합니다. 그냥 돼지꿈 꿔서 돈 여기저기 땡겨서 샀습니다.”
호진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찌푸렸다. 그 어려운 상권 분석을 해내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도 모른다. 게다가 배움이 짧은 것을 정말 부끄럽게 여기는지, 자신이 아는 지식이나 견해를 다른 사람, 특히 호진 앞에서 말하기를 주저했다. 순간 호진은 잠깐 마음을 치고 지나가는 생소한 감정을 감지했다.
저렇게 큰 사업가의 재목이, 어울리지 않게 저런 열등감이라니.
안타까워.
호진의 생각이 이성을 역류하기 시작했다. 감추고 싶은 것이 많은 사내의 얼굴이 안쓰러웠다. 그가 감추고자 하는 것, 그의 숨겨진 이야기가 듣고 싶었다. 형과의 계약과 상관없이. 그냥 가만히 앉아 저 사람이 낮은 소리로 웅얼웅얼하면서, 사업이 아닌 윤연희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여 가며, 조용조용 맞장구를 쳐 가면서.
하지만 윤연희라는 개인에 대해 점점 자세히 알게 되면서 경고의 목소리도 점점 강하게 일기 시작했다. 안타깝다는 마음 따위가 속을 잠식하는 것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이성적이고 따라야 할 목소리는 형과의 계약과 관련된, 다른 것들을 알아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호진의 이성은 지금까지 이런 종류의 싸움에서 패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지금 내가 저 사람에게 캐내야 할 내용은 따로 있지 않은가. 호진은 조용히 입을 뗐다.
“이 자리에서 할인점 사업, 꼭 하실 겁니까?”
“할 겁니다.”
대답하는 목소리는 견고했다. 호진은 희미하게 웃었다. 설득은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는 설득당하지 않는다. 알면서도 호진은 천천히 시선을 움직였다.
“사장님. 할인점 사업은 이미 레드 오션으로 접어들기 시작했습니다. 후발 주자가 버티려면 거대 자본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혹시 다른 기업에서 재매각 협상이 들어온다면, 응하실 생각이 있으십니까?”
“절대, 절대, 절대 응하지 않을 겁니다.”
목소리가 단호해졌다. 호진은 고개를 돌려 의자에 앉아 있는 거대한 사내를 보았다. 앉아 있는 덩치 큰 사내의 온몸에서 힘이 뻗쳐오르고 있었다.
“어느 유통업체나 다 조그만 1호점으로 시작했습니다. 업계 1위인 K마트도, 맥도널드도, 웰마트도 다 그랬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내 매장은 이제 막 달리기 시작한 겁니다. 이 가격으로 이렇게 좋은 곳을 건질 수 있는 상황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겁니다. 어디서 어떤 조건을 걸더라도 응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이럴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답이 나올 것을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 그래. 이게 가장 그다운 반응이고 그에게 가장 어울리는 결론이지.
속으로 파도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처음엔 찰랑찰랑 작게 부딪치는 줄 알았는데 이젠 가끔 방파제를 넘는다. 이런 느낌은 질색인데. 내 감정이 나를 벗어나려고 찰랑대는 기분. 이 더러운 기분. 호진은 눈을 가늘게 좁히고 거대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연희는 시선을 맞받았다. 거대한 사내의 그림자는 자꾸자꾸 면적을 키워 넓은 사무실을 채웠다.

***


도대체 왜 짜장면이냐고 물으면 ‘맛이 좋아서’라고만 대답했다. 다른 직원들은 연희가 식사를 하자고 식당 메뉴를 꺼내면 냉큼 뺑소니를 쳤다.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호진은 주문도 하기 전부터 속이 메스꺼워지는 것 같았다.
연희의 연락처는 주변의 다섯 개 중국집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메뉴는 거의 짜장면 곱빼기였다. 직원들은 그것을 ‘짜개―짜장면 개근―’라고 불렀다.
호진은 처음에는 싫은 내색 하지 않고 같이 짜장면을 먹어 주다가 슬금슬금 같은 식당의 메뉴에서 몇 가지 다른 요리를 고르기 시작했다. 그래도 기름진 것은 피할 수 없었다. 그나마 요새는 시킬 만한 것도 밑천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른 식당에서 시킬 수도 없었다. 짜장면 한 그릇은 배달이 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