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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9화
6. 설득의 방법 (2)
“거, 아비규환이죠, 젠장. 그게 이사하다가 센터에서 서류 캐비닛을 한 번 엎는 바람에 몽땅 섞였어요. 내가 팥쥐 엄마라 일부러 서류 아홉 가마 섞어 놓고 나눠 놓으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다들 겁이 나서 아무도 덤비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더라고요. 어어, 직원들이 비서실장 뽑혔다고 하니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팥쥐 엄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어머니 같은 인간이 또 있었나 보다. 호진은 기가 막혀 웃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계약서나 대출, 은행 관련 서류는 따로 정리하시고, 그동안 각 부서에서 올라온 예산안하고 지출 결의서, 내역서도 한 부씩 카피해서 정리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외국에서 오는 문서들은 나한테 올리기 전에 이 실장이 번역해서 함께 올려 주시고.”
“예.”
“한 1, 2주 야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야근 수당은 별도로 지급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첫날부터 철야라. 어쩐지 어제 전화를 받을 때부터 저 사람 일시키는 방법이 만만찮을 것 같긴 했다. 호진은 받아든 작업복을 끝까지 갈아입지 않았다. 어제 설득이라는 미명하에 근거 없이 휘말렸던 것도 묘하게 자존심을 긁었다. 이젠 호락호락하게 윤연희식 설득에 넘어가지 않을걸.
연희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책을 덮은 후 옆으로 밀었다. 호진은 연희가 읽고 덮어 둔 책이 무엇인지 넘겨 보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중학교밖에 졸업 못 했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그가 가벼운 수필이나 성공 비결 따위의 처세 철학서를 읽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화의 수수께끼>
어제 잠깐 이야기했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 그의 문화인류학 3부작 중 첫 번째 책이었다. 편하게 볼 만한 수준의 책은 아닐 텐데. 하지만 책갈피가 끼워진 곳은 벌써 중간 지점이었다. 연희는 그의 시선을 의식한 듯 급하게 책을 치웠다. 하지만 호진의 끈질긴 시선에 한숨을 쉬었다.
“어제, 이 실장 이야기 듣고 궁금해서.”
“예?”
“어제 동호대교 위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천하 없는 후레자식이 모성에 대해 희한한 소리를 했다고. 뭐라 씨부렁댔는지 궁금해서 서점에 들렀어요. 그냥 궁금해서 산 겁니다. 궁금해서.”
연희는 쑥스러운 듯 큰 눈을 내리깔고 손을 휘저었다. 호진은 생각을 더듬었다. 한국어 번역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영국에서 읽었을 때도 문장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장사꾼이 책상에 걸터앉아 막 읽기에 적당한 책은 결코 아니었다.
“읽을 만하십니까?”
“……어어. 어제 새벽 1시까지 읽었어요. 음. 재밌습니다. 진짜 재밌어요. 오늘 가면서 남은 두 편을 전부 살 참입니다.”
호진은 보온병 뚜껑에 남은 커피를 한꺼번에 들이켜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교양 혹은 깊이는 사람의 직접적 필요와 거리가 먼 영역에서 형성된다. 예컨대 먹고사는 데 전혀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인문학적 소양 따위의 영역.
호진은 말없이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응시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만큼이나, 윤연희라는 사람의 속내도 쉽게 헤아리기 어려워 보였다.
저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호진이 문제의 계약서를 발견한 것은 문서를 정리하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때마침 같이 서류를 뒤적이며 무엇인가를 찾던 덩치 큰 사내가 아, 여기 있군, 하며 파일을 끄집어냈다.
“이건 매매 계약서나 은행 서류에 넣지 말고 따로 빼서 보관하세요. 잔금이 남은 거라. 잔금 날짜 이틀 전에 나한테 미리 알려 주시고.”
연희는 그것을 딱히 기밀서류로 분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서류를 받아든 호진의 등이 빳빳하게 긴장되었다.
이 계약서인가?
호진은 연희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을 가다듬으며 서류를 살폈다.
부동산 매매 계약서, 부동산의 표시, 긴 주소 뒤에 붙은 것은 분명 ‘신촌 그랜디스 유통’이다. 매도자 김형식, 매수자 윤연희, 틀림없었다. 매매 대금, 승계 융자금, 계약금, 1, 2차 중도금, 잔금, 줄줄이 붙여 놓은 특약사항. 급하게 내용을 훑던 호진의 이마로 힘줄이 돋았다.
제기랄. 중도금 날짜가…….
호진은 드러내고 이마를 구겼다. 연희는 보름 전 이미 김형식에게 2차 중도금을 납입했고, 현재 잔금 지불만 남아 있었다. 중도금까지 납입된 상태라면 김형식을 꼬여 계약을 엎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의미였다. 윤연희가 잔금을 영영 못 내거나 차액을 바라고 되판다면 모를까.
이럴 줄 알았으면 입사를 할 필요도 없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세하게 조사할수록 호진의 어깨에선 기운이 빠졌다. 재철의 예상과 달리 매입한 배후 세력은 외국계 그룹도 큰손도 아닌 듯했다. 연희가 끌어모은 자금은 제일 박병화 회장에게 받은 희타운 매각 대금과 부동산 처분, 그리고 그것을 외환위기 때 달러로 굴려 얻은 환차익, 미국계 C은행의 대출금과 추후 대출 예정 금액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것은 몹시 빠듯하긴 해도 매매 금액과 대충 아귀가 맞았다.
털어 봐야 나올 것도 없다.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캐물은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히 알 만했다. 신촌 그랜디스 유통 자리를 사는 데도 온갖 요령을 부려야 했고, 잔금까지는 간신히 맞출 수 있었으나 공사비는 아직도 충당할 여력이 없어 악전고투하는 상태라 했다.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미국계 공룡 기업 웰마트는커녕 한국의 큰손이나 명동 바닥의 돈줄 따위와도 관련이 없어 보였다. 입사 전부터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저 사람은 뒷배 없이 혼자 힘으로 이 큰 덩어리를 매입한 것이 맞았다.
맥이 빠진 호진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한참 동안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허탈해서 그런지 그동안 내내 새벽 출근에 야근으로 쌓인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설상가상으로 머리까지 망치로 두들겨 대는 것 같았다. 그는 보일락 말락 눈썹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싸쥐었다.
2, 30분이나 지났을까? 연희의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이 실장, 들어가세요.”
그제야 호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희의 굵은 눈썹이 찌푸려져 있다. 호진은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식후라 노곤해서……. 정신 차리겠습니다.”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식은땀 찔찔 흘리지 말고.”
그러고 보니 이마를 짚었던 손이 끈적했다. 사장의 목소리가 조금 더 사나워진 것도 같다. 부하 직원의 흩어진 꼴이 좋아 보일 턱이 없다. 호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저혈압이나 두통은 만성인데 며칠 피곤했다고, 계약서 때문에 기운이 빠졌다고 한심한 꼴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약 좀 먹고 바로 들어오겠습니다.”
“자꾸 똑같은 말시킵니까! 그렇게 아프면 참지 말고 조퇴하란 말입니다, 내 말은!”
노기 서린 고함에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호진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사람이 일부러 아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땡이를 치고 집에 먼저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내쫓기라도 할 기세였다. 호진은 말없이 짐을 챙겨 연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어두운 상가 건물은 계단마저 좁았다. 대체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 2, 30분 늘어져 있던 것이 그렇게 못마땅했나. 호진이 눈썹을 찡그리고 한 걸음씩 아래로 내려갈 때 뒤에서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가 따라왔다. 에이, 하는 분기 어린 소리도 들렸다.
호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급하게 따라오던 덩치 큰 사내가 계단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걷는 거, 괜찮습니까?”
“예.”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기우뚱기우뚱하면서! 집이 어딥니까?”
“방배동 서래…… 함지박 사거리 쪽……인데 무슨…….”
“거 운전할 수 있겠습니까? 데려다줄 테니 차 열쇠 주십시오.”
여전히 사납고 불퉁한 음성이었다. 호진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운전, 할 수 있습니다.”
연희의 이마에 주름이 한 겹 더 올랐다. 목소리의 노기는 숨이 죽었지만 그래도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연희의 고집스러운 기색에 호진은 재차 거절했다. 연희는 입술을 꾹 말아 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까지는 깨끗하게 나아서 오십시오.”
그가 몸을 돌이켜 다시 좁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에에이, 함지박 사거리가 뭐야, 이름이 함지박이. 투덜대는 소리와 쿠덩쿠덩, 거센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일부러 계단을 힘주어 밟으며 화풀이하는 건가?
내가 아파서 일을 못 시키게 된 게 그렇게 짜증스럽단 말이지.
호진은 입 끝을 비죽 틀어 올렸다. 그렇지. 사장과 부하 직원의 사이란 게 그런 거지.
밉보이든 말든 어차피 상관은 없겠지만, 저 사람에게 우스운 꼴을 보인 것 같아 입맛이 썼다.
***
-일이 곤란해졌구나. 신촌 상권에서는 이제 그 정도 덩어리를 같은 가격으로 구하지 못해.
재철은 수화기 너머에서 쓰게 웃었다. 호진 역시 기운 없게 피싯 웃었다.
“중도금까지 납입한 상태입니다. 김형식을 아무리 찔러야 윤연희한테 넘어간 걸 되돌리긴 늦었다는 말입니다. 김형식이 그동안 팔았는지 안 팔았는지 연막을 피웠던 건, 윤연희가 계약 자체를 비밀에 부쳐 달라고 특약조건으로 명시까지 해서 그랬던 겁니다. 윤연희가 걸어 놓은 특약사항이 자그마치 스물일곱 개나 되는데 그중 하나예요. 계약서를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중도금 납입 전에 우리 같은 대기업에서 낚아채는 걸 막으려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 장사꾼, 제일 박병화한테 희타운 매각할 때도 그렇더니 꽤 요령이 좋은가 보다. 허투루 일어선 게 아닌 모양이야. 자금 상황이 어떻지?
“다운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는 가정을 놓고 보면, 계약서에 명시된 남은 잔금까진 대출이 나올 모양입니다. 공사비는 은행들하고 대출액 조율 중이라는데 뒷돈이 상당히 달릴 것 같습니다.”
-겁도 없는 놈,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재매각 의사는? 설득이 될 만해 보이나?
“공사까지 감안하는 걸 보면 현 상태에서 재매각 의사는 없어 보입니다. 설득……이라면 벌써 윤연희 손으로 넘어간 걸 뺏어 오라는 건데 얼마나 무모한 요구인지 형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네가 결정할 일이다. 강요하지는 않는다. 필요하면 서포트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하염없이 기다리지는 않는다.
물론, 바로 빠져나오는 것도 네 선택이다, 재철은 무심하게 덧붙였다.
진통제를 먹어 두통은 가라앉았지만 골치 아픈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기밀을 빼돌리는 스파이 짓을 하는 것도, 되팔라고 설득을 하는 것도, 큰형의 지원을 받아 건물을 억지로 빼앗는 것도, 열여덟 살 때처럼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손에 달렸다.
호진은 그가 여전히 테스트를 하는 중이며, 형제들 역시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날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형과 누나들은 지금 연희유통에서 고노동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가련한 비서, 그것도 밑으로 직원 하나 없는 비서실장이 나라는 걸 알면 꽤 놀랄 것이다.
“계약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호진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형이 보낸 공증된 계약서는 지난주에 호진의 손으로 들어왔다. 레몬이 떠 있는 홍차가 느리게 식었다. 찻잔을 손톱으로 툭툭 건드렸다. 자주색 꽃문양과 금박 테두리가 화려한 로열 덜튼은 댕댕, 맑은 소리를 냈다.
호진은 수화기를 든 채 생각에 잠겼다. 배수의 진을 치고 하는 짓이다. 학교에 통보한 후 담당 교수의 격한 잔소리도 들었고, 영국에서부터 날아온 누구에게 따귀도 제대로 맞았다. 그랬으니 결과를 내어야 옳지 않겠나.
스물아홉, 속 편하게 딴짓할 여유가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경쟁이 치열한 나이이기도 했다. 한국의 인구분포를 보면 현재 나이 스물아홉에서 스물일곱까지가 인구수가 가장 많았다. 한국에서 승부를 보기로 마음먹었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그 인구를 경쟁자 삼아 살아야 한다. 기분대로 허튼짓을 했다간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주저앉게 될 것이다. 재철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렀다.
-물론 호진이 너도, 다른 누나나 형들이 했던 것처럼 작은 매장에 배치되어서 경력을 쌓아 올라가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호진은 재철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한숨을 쉬었다. 장기전을 바란 건 아닌데. 시간이 길어진다고 자신이 딱히 유리해질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길게 기다릴 생각이 없다.
재철이 말을 맺은 지 한참 만에 호진은 조용히 대화를 정리했다.
“그 사람에 대해 파악한 후 설득을 하든 강제로 잡아먹든 계획을 다시 잡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방법이 나오지 않으면, 그때 신촌점 자리를 포기하고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호진은 허리를 펴고 거실을 천천히 걸었다.
윤연희, 윤연희라.
자신의 직속상관이자 연희유통의 대표인 덩치 큰 사내는 꽤 흥미로웠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는 억센 기질은 보였지만 학벌이 낮은 시장통 장사꾼 출신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천박함은 없었다. 오히려 속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두 가지 상반된 표정이 공존하는 이였다. 빠름과 느림, 무름과 단단함,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눈빛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외부에는 자신의 정보를 철저히 차단한다 들었지만, 가끔 허술하게 속을 흘리기도 했다. 사업가 윤연희를 특징짓는 빠른 결단과 단호한 올인 스타일은 그의 자신감에서 기인한 듯도 하나, 한 겹 들추어 보니 다른 얼굴이 나타나기도 했다.
당신을 어떤 방법으로 파악하고 공략해야 그 덩어리가 우리 손으로 넘어오게 될까? 매몰 비용이랄 것도 없으니 언제든지 발 빼고 나가면 그만이긴 한데, 그렇게 하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많다.
만에 하나 재매각 의사가 있다면. 혹은 매각하도록 설득만 할 수 있다면.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
다음날 새벽에 출근했을 때 연희는 첫날과 비슷한 자세로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호진은 그의 손에 들린 책이 마빈 해리스의 3부작 중 마지막 책인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로 넘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문화의 수수께끼>, <식인과 제왕>은 벌써 끝냈구나.
호진이 보기에 연희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사람이었다. 저렇게 시간을 쪼개서 읽기도 쉽지 않을 텐데, 읽기도 편치 않은 책을 수월하게도 읽는다.
책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달리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몸은 괜찮습니까?”
“좋아졌습니다. 어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덩치 큰 사내는 한동안 호진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무겁게 끄덕였다.
“괜찮아 보여 다행입니다.”
덩치 큰 사내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서랍을 열고 작고 갈색이 나는 무언가를 꺼냈다. 쿵쿵, 발소리를 내며 다가와 호진의 책상 위에 그것을 올려놓는다. 힘을 주어 놓은 건지 따그락, 크고 맑은 소리가 났다.
“이거 드시고, 몸 관리 잘하시고, 이젠 아프지 마십시오.”
조그만 갈색 유리병에는 박카스 F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호진은 등을 돌리고 자리로 느릿하게 돌아가는 사내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게 뭡니까, 하는 말에 조금은 쑥스러운 듯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보면 모릅니까? 박카스죠.”
“그러니까, 이게 뭔지.”
“거 모릅니까? 한국인의 만병통치약?”
“네?”
호진은 뒤집어 약품성분을 살폈다. 자양강장제. 타우린 함유. 아무리 봐야 카페인이나 비타민이 들어 있는 설탕물 종류 같은데. 연희는 그가 약품성분을 일일이 뜯어보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더 퉁명한 소리를 냈다.
“이 실장. 그거 심장마비, 위경련, 신경통, 자궁암, 중풍, 치매, 대머리, 상사병, 발기부전, 전부 다 고치는 약입니다. 그냥 드세요.”
푸하! 호진의 입에서 폭소가 터졌다. 설득의 방법도 가지가지다. 호진은 손에 힘을 주어 만병통치약의 뚜껑을 열었다.
“제가, 속상하고 걱정되면 못 참고 화를 내는 안 좋은 버릇이 있어요.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어제 소리 질러서 미안합니다.”
눈도 마주하지 않고 덩치 큰 사내가 중얼거렸다. 호진은 그제야 연희의 태도가 납득이 되었다. 저 사람은 어제 그러니까, 자신이 일도 않고 늘어져서 짜증이 난 것이 아니라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속상했으며, 자신이 조퇴하고 가는 상황을 불쾌해했던 것이 아니고 걱정했던 것이었다.
아아. 그런 거였나. 호진은 연희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길게 웃어 보였다.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 호진의 표정을 훔쳐보던 사내의 얼굴이 스르르 녹는데, 그것이 너무 확연하게 보여 우스웠다.
대머리, 상사병에 발기부전까지 고친다는 만병통치약은 달큼 쌉쌀하면서도 산뜻한 맛이 나서 좋았다.
7. 섹시 짜장면 (1)
악덕 사장 같으니. 연희유통 직원들은 아침부터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책상에 박은 채 속으로 중얼거린다. 평소 화기애애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사장이 신입 사원 박연수 씨를 진창 쪼아 대고 있다. 그녀의 사수인 경리과 김영미 주임도 자리에서 눈치를 할끔할끔 보면서 좌불안석이었다. 엊저녁 결산 후 들어온 돈을, 입금 처리 안 하고 사무실 서랍에 놓아두고 퇴근을 했다는 것이다. 아침에라도 가서 얼른 처리하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가씨가 변죽 좋게 지각까지 했다.
출퇴근 체크기 앞에서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던 것은, 키가 193센티가 넘는 거인족 사장이었다.
“퇴근 시간 지나서, 너, 너무 늦게 마감이 되어서요. 서랍 잠그고는 갔어요. 액수도 얼마 안 되고.”
발발 떨리는 신입의 목소리에 꽈르릉, 고함이 다시 터졌다.
“뭐가 어째요? 봅시다, 박연수 씨. 나 보라니까요! 그깟 서랍은 내가 한 손으로 비틀어 당기기만 하면 찌그러져 나옵니다! 한번 해 봐요? 다들 연수 씨처럼 손목이 대꼬챙이 같은 줄 압니까!”
앳된 여직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덩치가 크고 위압감이 어마어마한 사내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야단을 치고 있으니 잔뜩 쪼그라들 만했다. 이제 적당히 하고 봐주세요. 같은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의 애타는 열망을 듣기라도 한 듯 연희는 헛기침을 쿵,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봐주기는커녕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였다.
“은행 찾아가는 길이 엄마 찾아 삼만 리 정도 됩니까! ATM 입금 기능 사용할 줄 모릅니까! 몰라요? 30만 원은 돈도 아닙니까! 월급 30만 원 까도 별거 아니라고 통 큰 소리 할 겁니까! 짜장면이 몇 그릇인지, 백반 몇 인분 나오는지 계산은 해 봤습니까! 나이도 젊은 사람이! 아직 수습 딱지도 안 뗐으면서! 간도 큽니다!”
나무랄 때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또 얼마나 열심히 끈덕지게 야단을 치는지 곁에서 듣고 있자니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래 놓고 지각을 해요? 지금 몇 시예요? 몇 십니까? 누가 화장 곱게 하고 오라 했습니까? 추리닝 입고 눈곱 달고 와도 뭐라 안 합니다. 찜찜한 게 있으면 얼른 와서 수습을 해 놓고, 확인을 해 놓아야 옳지 않습니까. 걱정도 안 됩니까? 차가 늦어요? 여기 누구 걸어오는 사람 있습니까? 방배동에서 출근하는 사람도 여기까지 7시에 옵니다, 7시! 근데 아현동에 사는 사람이 왜 9시 반에 와요? 더 빨리 오라는 것도 아닌데, 하다못해 제시간엔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으이, 악덕 사장! 또 시작이야. 좀생이! 이 실장님은 왜 이렇게 일찍 나오고 그러세요. 호진의 옆자리에 앉은 김영미 주임이 호진을 밉지 않게 흘겨보다가 입을 움죽거리며 머리를 움켜잡았다.
6. 설득의 방법 (2)
“거, 아비규환이죠, 젠장. 그게 이사하다가 센터에서 서류 캐비닛을 한 번 엎는 바람에 몽땅 섞였어요. 내가 팥쥐 엄마라 일부러 서류 아홉 가마 섞어 놓고 나눠 놓으라고 하는 거 아닙니다. 다들 겁이 나서 아무도 덤비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더라고요. 어어, 직원들이 비서실장 뽑혔다고 하니 어찌나 반가워하던지.”
팥쥐 엄마가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어머니 같은 인간이 또 있었나 보다. 호진은 기가 막혀 웃지도 못하고, 입을 다물지도 못했다.
“계약서나 대출, 은행 관련 서류는 따로 정리하시고, 그동안 각 부서에서 올라온 예산안하고 지출 결의서, 내역서도 한 부씩 카피해서 정리해 주셔야 합니다. 그리고 앞으로 외국에서 오는 문서들은 나한테 올리기 전에 이 실장이 번역해서 함께 올려 주시고.”
“예.”
“한 1, 2주 야근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야근 수당은 별도로 지급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첫날부터 철야라. 어쩐지 어제 전화를 받을 때부터 저 사람 일시키는 방법이 만만찮을 것 같긴 했다. 호진은 받아든 작업복을 끝까지 갈아입지 않았다. 어제 설득이라는 미명하에 근거 없이 휘말렸던 것도 묘하게 자존심을 긁었다. 이젠 호락호락하게 윤연희식 설득에 넘어가지 않을걸.
연희는 시간을 확인하더니 책을 덮은 후 옆으로 밀었다. 호진은 연희가 읽고 덮어 둔 책이 무엇인지 넘겨 보다가 움직임을 멈췄다. 눈이 가느스름해졌다. 중학교밖에 졸업 못 했다는 선입견 때문이었는지 그가 가벼운 수필이나 성공 비결 따위의 처세 철학서를 읽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문화의 수수께끼>
어제 잠깐 이야기했던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 그의 문화인류학 3부작 중 첫 번째 책이었다. 편하게 볼 만한 수준의 책은 아닐 텐데. 하지만 책갈피가 끼워진 곳은 벌써 중간 지점이었다. 연희는 그의 시선을 의식한 듯 급하게 책을 치웠다. 하지만 호진의 끈질긴 시선에 한숨을 쉬었다.
“어제, 이 실장 이야기 듣고 궁금해서.”
“예?”
“어제 동호대교 위에서 말하지 않았습니까. 어떤 천하 없는 후레자식이 모성에 대해 희한한 소리를 했다고. 뭐라 씨부렁댔는지 궁금해서 서점에 들렀어요. 그냥 궁금해서 산 겁니다. 궁금해서.”
연희는 쑥스러운 듯 큰 눈을 내리깔고 손을 휘저었다. 호진은 생각을 더듬었다. 한국어 번역 상태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영국에서 읽었을 때도 문장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장사꾼이 책상에 걸터앉아 막 읽기에 적당한 책은 결코 아니었다.
“읽을 만하십니까?”
“……어어. 어제 새벽 1시까지 읽었어요. 음. 재밌습니다. 진짜 재밌어요. 오늘 가면서 남은 두 편을 전부 살 참입니다.”
호진은 보온병 뚜껑에 남은 커피를 한꺼번에 들이켜는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사람의 교양 혹은 깊이는 사람의 직접적 필요와 거리가 먼 영역에서 형성된다. 예컨대 먹고사는 데 전혀 쓸모가 없어 보이는 인문학적 소양 따위의 영역.
호진은 말없이 맞은편에 앉은 사내를 응시했다.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만큼이나, 윤연희라는 사람의 속내도 쉽게 헤아리기 어려워 보였다.
저 사람에 대한 선입견을 조금 수정할 필요가 있겠다.
호진이 문제의 계약서를 발견한 것은 문서를 정리하기 시작한 지 열흘째 되는 날이었다. 때마침 같이 서류를 뒤적이며 무엇인가를 찾던 덩치 큰 사내가 아, 여기 있군, 하며 파일을 끄집어냈다.
“이건 매매 계약서나 은행 서류에 넣지 말고 따로 빼서 보관하세요. 잔금이 남은 거라. 잔금 날짜 이틀 전에 나한테 미리 알려 주시고.”
연희는 그것을 딱히 기밀서류로 분류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서류를 받아든 호진의 등이 빳빳하게 긴장되었다.
이 계약서인가?
호진은 연희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을 가다듬으며 서류를 살폈다.
부동산 매매 계약서, 부동산의 표시, 긴 주소 뒤에 붙은 것은 분명 ‘신촌 그랜디스 유통’이다. 매도자 김형식, 매수자 윤연희, 틀림없었다. 매매 대금, 승계 융자금, 계약금, 1, 2차 중도금, 잔금, 줄줄이 붙여 놓은 특약사항. 급하게 내용을 훑던 호진의 이마로 힘줄이 돋았다.
제기랄. 중도금 날짜가…….
호진은 드러내고 이마를 구겼다. 연희는 보름 전 이미 김형식에게 2차 중도금을 납입했고, 현재 잔금 지불만 남아 있었다. 중도금까지 납입된 상태라면 김형식을 꼬여 계약을 엎기에는 이미 늦었다는 의미였다. 윤연희가 잔금을 영영 못 내거나 차액을 바라고 되판다면 모를까.
이럴 줄 알았으면 입사를 할 필요도 없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세세하게 조사할수록 호진의 어깨에선 기운이 빠졌다. 재철의 예상과 달리 매입한 배후 세력은 외국계 그룹도 큰손도 아닌 듯했다. 연희가 끌어모은 자금은 제일 박병화 회장에게 받은 희타운 매각 대금과 부동산 처분, 그리고 그것을 외환위기 때 달러로 굴려 얻은 환차익, 미국계 C은행의 대출금과 추후 대출 예정 금액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그것은 몹시 빠듯하긴 해도 매매 금액과 대충 아귀가 맞았다.
털어 봐야 나올 것도 없다. 그에게 지나가는 말로 캐물은 몇 마디만으로도 충분히 알 만했다. 신촌 그랜디스 유통 자리를 사는 데도 온갖 요령을 부려야 했고, 잔금까지는 간신히 맞출 수 있었으나 공사비는 아직도 충당할 여력이 없어 악전고투하는 상태라 했다.
곧이곧대로 다 믿을 수는 없었지만 미국계 공룡 기업 웰마트는커녕 한국의 큰손이나 명동 바닥의 돈줄 따위와도 관련이 없어 보였다. 입사 전부터 상황은 종료되어 있었다. 놀랍게도 저 사람은 뒷배 없이 혼자 힘으로 이 큰 덩어리를 매입한 것이 맞았다.
맥이 빠진 호진은 점심 식사를 마친 후 한참 동안 의자에 늘어져 있었다. 허탈해서 그런지 그동안 내내 새벽 출근에 야근으로 쌓인 피로감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설상가상으로 머리까지 망치로 두들겨 대는 것 같았다. 그는 보일락 말락 눈썹을 찌푸리며 한 손으로 이마를 싸쥐었다.
2, 30분이나 지났을까? 연희의 낮은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이 실장, 들어가세요.”
그제야 호진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연희의 굵은 눈썹이 찌푸려져 있다. 호진은 고개를 수그렸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식후라 노곤해서……. 정신 차리겠습니다.”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식은땀 찔찔 흘리지 말고.”
그러고 보니 이마를 짚었던 손이 끈적했다. 사장의 목소리가 조금 더 사나워진 것도 같다. 부하 직원의 흩어진 꼴이 좋아 보일 턱이 없다. 호진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저혈압이나 두통은 만성인데 며칠 피곤했다고, 계약서 때문에 기운이 빠졌다고 한심한 꼴을 보였다.
“죄송합니다. 잠시 약 좀 먹고 바로 들어오겠습니다.”
“자꾸 똑같은 말시킵니까! 그렇게 아프면 참지 말고 조퇴하란 말입니다, 내 말은!”
노기 서린 고함에 사무실 안이 조용해졌다. 호진은 자리에서 일어선 채 눈을 느리게 깜박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화를 내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사람이 일부러 아픈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농땡이를 치고 집에 먼저 가겠다고 한 것도 아닌데.
하지만 한 마디라도 더 했다가는 내쫓기라도 할 기세였다. 호진은 말없이 짐을 챙겨 연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제대로 인사를 했는지도 알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어두운 상가 건물은 계단마저 좁았다. 대체 왜 저렇게 화를 내는 걸까. 2, 30분 늘어져 있던 것이 그렇게 못마땅했나. 호진이 눈썹을 찡그리고 한 걸음씩 아래로 내려갈 때 뒤에서 쿵쿵대는 발걸음 소리가 따라왔다. 에이, 하는 분기 어린 소리도 들렸다.
호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급하게 따라오던 덩치 큰 사내가 계단 위에서 걸음을 멈췄다.
“걷는 거, 괜찮습니까?”
“예.”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기우뚱기우뚱하면서! 집이 어딥니까?”
“방배동 서래…… 함지박 사거리 쪽……인데 무슨…….”
“거 운전할 수 있겠습니까? 데려다줄 테니 차 열쇠 주십시오.”
여전히 사납고 불퉁한 음성이었다. 호진은 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운전, 할 수 있습니다.”
연희의 이마에 주름이 한 겹 더 올랐다. 목소리의 노기는 숨이 죽었지만 그래도 아주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연희의 고집스러운 기색에 호진은 재차 거절했다. 연희는 입술을 꾹 말아 넣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까지는 깨끗하게 나아서 오십시오.”
그가 몸을 돌이켜 다시 좁은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에에이, 함지박 사거리가 뭐야, 이름이 함지박이. 투덜대는 소리와 쿠덩쿠덩, 거센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어린애도 아니고, 일부러 계단을 힘주어 밟으며 화풀이하는 건가?
내가 아파서 일을 못 시키게 된 게 그렇게 짜증스럽단 말이지.
호진은 입 끝을 비죽 틀어 올렸다. 그렇지. 사장과 부하 직원의 사이란 게 그런 거지.
밉보이든 말든 어차피 상관은 없겠지만, 저 사람에게 우스운 꼴을 보인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일이 곤란해졌구나. 신촌 상권에서는 이제 그 정도 덩어리를 같은 가격으로 구하지 못해.
재철은 수화기 너머에서 쓰게 웃었다. 호진 역시 기운 없게 피싯 웃었다.
“중도금까지 납입한 상태입니다. 김형식을 아무리 찔러야 윤연희한테 넘어간 걸 되돌리긴 늦었다는 말입니다. 김형식이 그동안 팔았는지 안 팔았는지 연막을 피웠던 건, 윤연희가 계약 자체를 비밀에 부쳐 달라고 특약조건으로 명시까지 해서 그랬던 겁니다. 윤연희가 걸어 놓은 특약사항이 자그마치 스물일곱 개나 되는데 그중 하나예요. 계약서를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중도금 납입 전에 우리 같은 대기업에서 낚아채는 걸 막으려고 그랬던 모양입니다.”
-그 장사꾼, 제일 박병화한테 희타운 매각할 때도 그렇더니 꽤 요령이 좋은가 보다. 허투루 일어선 게 아닌 모양이야. 자금 상황이 어떻지?
“다운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는 가정을 놓고 보면, 계약서에 명시된 남은 잔금까진 대출이 나올 모양입니다. 공사비는 은행들하고 대출액 조율 중이라는데 뒷돈이 상당히 달릴 것 같습니다.”
-겁도 없는 놈, 지금이 어느 때라고. 재매각 의사는? 설득이 될 만해 보이나?
“공사까지 감안하는 걸 보면 현 상태에서 재매각 의사는 없어 보입니다. 설득……이라면 벌써 윤연희 손으로 넘어간 걸 뺏어 오라는 건데 얼마나 무모한 요구인지 형님이 더 잘 아실 텐데요.”
-네가 결정할 일이다. 강요하지는 않는다. 필요하면 서포트도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하염없이 기다리지는 않는다.
물론, 바로 빠져나오는 것도 네 선택이다, 재철은 무심하게 덧붙였다.
진통제를 먹어 두통은 가라앉았지만 골치 아픈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제 어찌할 것인가. 기밀을 빼돌리는 스파이 짓을 하는 것도, 되팔라고 설득을 하는 것도, 큰형의 지원을 받아 건물을 억지로 빼앗는 것도, 열여덟 살 때처럼 깔끔하게 포기하는 것도 모두 자신의 손에 달렸다.
호진은 그가 여전히 테스트를 하는 중이며, 형제들 역시 자신을 예의주시하고 있으리라 생각했다. 날 못 잡아먹어 안달하는 형과 누나들은 지금 연희유통에서 고노동 저임금에 시달리고 있는 가련한 비서, 그것도 밑으로 직원 하나 없는 비서실장이 나라는 걸 알면 꽤 놀랄 것이다.
“계약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호진은 소파에 앉아 다리를 꼰 채 고저가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형이 보낸 공증된 계약서는 지난주에 호진의 손으로 들어왔다. 레몬이 떠 있는 홍차가 느리게 식었다. 찻잔을 손톱으로 툭툭 건드렸다. 자주색 꽃문양과 금박 테두리가 화려한 로열 덜튼은 댕댕, 맑은 소리를 냈다.
호진은 수화기를 든 채 생각에 잠겼다. 배수의 진을 치고 하는 짓이다. 학교에 통보한 후 담당 교수의 격한 잔소리도 들었고, 영국에서부터 날아온 누구에게 따귀도 제대로 맞았다. 그랬으니 결과를 내어야 옳지 않겠나.
스물아홉, 속 편하게 딴짓할 여유가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게다가 경쟁이 치열한 나이이기도 했다. 한국의 인구분포를 보면 현재 나이 스물아홉에서 스물일곱까지가 인구수가 가장 많았다. 한국에서 승부를 보기로 마음먹었으면 늙어 죽을 때까지 그 인구를 경쟁자 삼아 살아야 한다. 기분대로 허튼짓을 했다간 재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주저앉게 될 것이다. 재철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렀다.
-물론 호진이 너도, 다른 누나나 형들이 했던 것처럼 작은 매장에 배치되어서 경력을 쌓아 올라가는 방법을 택할 수도 있다.
호진은 재철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한숨을 쉬었다. 장기전을 바란 건 아닌데. 시간이 길어진다고 자신이 딱히 유리해질 것도 없었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길게 기다릴 생각이 없다.
재철이 말을 맺은 지 한참 만에 호진은 조용히 대화를 정리했다.
“그 사람에 대해 파악한 후 설득을 하든 강제로 잡아먹든 계획을 다시 잡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방법이 나오지 않으면, 그때 신촌점 자리를 포기하고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호진은 허리를 펴고 거실을 천천히 걸었다.
윤연희, 윤연희라.
자신의 직속상관이자 연희유통의 대표인 덩치 큰 사내는 꽤 흥미로웠다. 자수성가형 사업가에게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는 억센 기질은 보였지만 학벌이 낮은 시장통 장사꾼 출신이라는 선입견과 달리 천박함은 없었다. 오히려 속을 알 수 없는 깊이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두 가지 상반된 표정이 공존하는 이였다. 빠름과 느림, 무름과 단단함,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눈빛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다. 외부에는 자신의 정보를 철저히 차단한다 들었지만, 가끔 허술하게 속을 흘리기도 했다. 사업가 윤연희를 특징짓는 빠른 결단과 단호한 올인 스타일은 그의 자신감에서 기인한 듯도 하나, 한 겹 들추어 보니 다른 얼굴이 나타나기도 했다.
당신을 어떤 방법으로 파악하고 공략해야 그 덩어리가 우리 손으로 넘어오게 될까? 매몰 비용이랄 것도 없으니 언제든지 발 빼고 나가면 그만이긴 한데, 그렇게 하기에는 아까운 부분이 많다.
만에 하나 재매각 의사가 있다면. 혹은 매각하도록 설득만 할 수 있다면.
……장기전이 될지도 모르겠다.
다음날 새벽에 출근했을 때 연희는 첫날과 비슷한 자세로 책상에 걸터앉아 있었다. 호진은 그의 손에 들린 책이 마빈 해리스의 3부작 중 마지막 책인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로 넘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짧은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문화의 수수께끼>, <식인과 제왕>은 벌써 끝냈구나.
호진이 보기에 연희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쁜 사람이었다. 저렇게 시간을 쪼개서 읽기도 쉽지 않을 텐데, 읽기도 편치 않은 책을 수월하게도 읽는다.
책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던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달리 얼굴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몸은 괜찮습니까?”
“좋아졌습니다. 어제 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덩치 큰 사내는 한동안 호진의 얼굴을 뜯어보더니 무겁게 끄덕였다.
“괜찮아 보여 다행입니다.”
덩치 큰 사내는 잠시 머뭇머뭇하더니 서랍을 열고 작고 갈색이 나는 무언가를 꺼냈다. 쿵쿵, 발소리를 내며 다가와 호진의 책상 위에 그것을 올려놓는다. 힘을 주어 놓은 건지 따그락, 크고 맑은 소리가 났다.
“이거 드시고, 몸 관리 잘하시고, 이젠 아프지 마십시오.”
조그만 갈색 유리병에는 박카스 F라는 글자가 박혀 있었다. 호진은 등을 돌리고 자리로 느릿하게 돌아가는 사내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이게 뭡니까, 하는 말에 조금은 쑥스러운 듯 불퉁한 대답이 돌아왔다.
“보면 모릅니까? 박카스죠.”
“그러니까, 이게 뭔지.”
“거 모릅니까? 한국인의 만병통치약?”
“네?”
호진은 뒤집어 약품성분을 살폈다. 자양강장제. 타우린 함유. 아무리 봐야 카페인이나 비타민이 들어 있는 설탕물 종류 같은데. 연희는 그가 약품성분을 일일이 뜯어보고 있는 것을 보고 조금 더 퉁명한 소리를 냈다.
“이 실장. 그거 심장마비, 위경련, 신경통, 자궁암, 중풍, 치매, 대머리, 상사병, 발기부전, 전부 다 고치는 약입니다. 그냥 드세요.”
푸하! 호진의 입에서 폭소가 터졌다. 설득의 방법도 가지가지다. 호진은 손에 힘을 주어 만병통치약의 뚜껑을 열었다.
“제가, 속상하고 걱정되면 못 참고 화를 내는 안 좋은 버릇이 있어요. 고치려고 노력하는 중입니다. 어제 소리 질러서 미안합니다.”
눈도 마주하지 않고 덩치 큰 사내가 중얼거렸다. 호진은 그제야 연희의 태도가 납득이 되었다. 저 사람은 어제 그러니까, 자신이 일도 않고 늘어져서 짜증이 난 것이 아니라 몸이 안 좋아 보여서 속상했으며, 자신이 조퇴하고 가는 상황을 불쾌해했던 것이 아니고 걱정했던 것이었다.
아아. 그런 거였나. 호진은 연희가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길게 웃어 보였다.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돌려 호진의 표정을 훔쳐보던 사내의 얼굴이 스르르 녹는데, 그것이 너무 확연하게 보여 우스웠다.
대머리, 상사병에 발기부전까지 고친다는 만병통치약은 달큼 쌉쌀하면서도 산뜻한 맛이 나서 좋았다.
7. 섹시 짜장면 (1)
악덕 사장 같으니. 연희유통 직원들은 아침부터 입을 꾹 다물고 시선을 책상에 박은 채 속으로 중얼거린다. 평소 화기애애하던 사무실 분위기가 모조리 사라졌다.
사장이 신입 사원 박연수 씨를 진창 쪼아 대고 있다. 그녀의 사수인 경리과 김영미 주임도 자리에서 눈치를 할끔할끔 보면서 좌불안석이었다. 엊저녁 결산 후 들어온 돈을, 입금 처리 안 하고 사무실 서랍에 놓아두고 퇴근을 했다는 것이다. 아침에라도 가서 얼른 처리하고 왔으면 좋았을 텐데, 아가씨가 변죽 좋게 지각까지 했다.
출퇴근 체크기 앞에서 팔짱을 끼고 기다리고 있던 것은, 키가 193센티가 넘는 거인족 사장이었다.
“퇴근 시간 지나서, 너, 너무 늦게 마감이 되어서요. 서랍 잠그고는 갔어요. 액수도 얼마 안 되고.”
발발 떨리는 신입의 목소리에 꽈르릉, 고함이 다시 터졌다.
“뭐가 어째요? 봅시다, 박연수 씨. 나 보라니까요! 그깟 서랍은 내가 한 손으로 비틀어 당기기만 하면 찌그러져 나옵니다! 한번 해 봐요? 다들 연수 씨처럼 손목이 대꼬챙이 같은 줄 압니까!”
앳된 여직원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덩치가 크고 위압감이 어마어마한 사내가 혼신의 힘을 기울여 야단을 치고 있으니 잔뜩 쪼그라들 만했다. 이제 적당히 하고 봐주세요. 같은 사무실에 있는 직원들의 애타는 열망을 듣기라도 한 듯 연희는 헛기침을 쿵, 하고 잠시 말을 끊었다. 그러더니 봐주기는커녕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였다.
“은행 찾아가는 길이 엄마 찾아 삼만 리 정도 됩니까! ATM 입금 기능 사용할 줄 모릅니까! 몰라요? 30만 원은 돈도 아닙니까! 월급 30만 원 까도 별거 아니라고 통 큰 소리 할 겁니까! 짜장면이 몇 그릇인지, 백반 몇 인분 나오는지 계산은 해 봤습니까! 나이도 젊은 사람이! 아직 수습 딱지도 안 뗐으면서! 간도 큽니다!”
나무랄 때는 목소리가 어찌나 큰지, 또 얼마나 열심히 끈덕지게 야단을 치는지 곁에서 듣고 있자니 민망할 지경이었다.
“그래 놓고 지각을 해요? 지금 몇 시예요? 몇 십니까? 누가 화장 곱게 하고 오라 했습니까? 추리닝 입고 눈곱 달고 와도 뭐라 안 합니다. 찜찜한 게 있으면 얼른 와서 수습을 해 놓고, 확인을 해 놓아야 옳지 않습니까. 걱정도 안 됩니까? 차가 늦어요? 여기 누구 걸어오는 사람 있습니까? 방배동에서 출근하는 사람도 여기까지 7시에 옵니다, 7시! 근데 아현동에 사는 사람이 왜 9시 반에 와요? 더 빨리 오라는 것도 아닌데, 하다못해 제시간엔 와야 하는 거 아닙니까?”
으이, 악덕 사장! 또 시작이야. 좀생이! 이 실장님은 왜 이렇게 일찍 나오고 그러세요. 호진의 옆자리에 앉은 김영미 주임이 호진을 밉지 않게 흘겨보다가 입을 움죽거리며 머리를 움켜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