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샤인 Shine 8화
5. 두 갈래 길 (2)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다. 그들을 누르고 내 영토를 만들고 싶다. 이 나라의 유통업계를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 의외로 가까이 놓였다.
한국은 OECD 가입을 앞두고 있던, 호황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도 못한 채 처음 맛보는 단맛을 누리는 상태였다. 막 싹트기 시작한 대형 할인점 사업은 황금알이 굴러다니는 들판이었고 유통망과 현금 동원력이 월등한 K마트는 조건이 매우 좋았다.
이것은 잡기 힘든 기회다. 날개를 펴게 되려는가. 서러운 세월을 보상받을 찬스가 앞에 놓이는 것인가.
그동안 영국에서 쌓아 올린 성취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한쪽 길은 안정적이며 명예가 보장되어 있고, 한쪽 길은 맨몸으로 헤치고 나가야 할 정글이었다. 하지만 길 끝에 놓인 것은 어마어마했다. 호진은 흥분을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쪽으로 이력서를 내 보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호진은 한마디 덧붙였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금 하셨던 말씀, 공증이 된 계약서 형태로 한 장 부탁합니다.’
재철은 눈썹을 찡그렸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강 실장에게 이야기해 두지. 다만,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함구해라.
유일한 조문객은 망자에게 국화 한 송이 바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피우다 눌러 놓은 꽁초 두 개가 재떨이에 남아 있었다. 호진은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궁궁궁궁, 심장에서 대북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식사를 마칠 즈음 주변이 조용해졌다. 호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앞으로 마른 수건이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닦아라. 애들은 다 돌려보냈다.”
재철은 식탁에 마주 앉아 담배를 꺼냈다.
“내일부터 신촌 그랜디스에 바로 출근합니다.”
“허, 용하군. 그렇게 빨리?”
재철은 담배 연기를 옆으로 길게 뿜다가 잠시 밭은기침을 했다.
“분위기가 어떻던?”
“자기들 입으로는 연희유통이라고 합니다. 바지 사장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재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어떻던가, 하는 말에 호진은 대답을 한참 골라야 했다.
“생각보다 젊었습니다. 조사할 때 보니 저랑 나이가 같았습니다. 스물아홉.”
“그랬나? 젊은 사람이 재주가 좋은가…….”
“흥미가 갑니다. 연희유통 사장,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거 의외구나.”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친구로 곁에 두어도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허? 친구? 네가? 헛웃음을 치려던 재철은 쓸모라는 말이 나오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담배 연기가 뭉클 흩어졌다. 담배 연기를 질색하는 호진이지만 찡그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옆으로 물러앉았다.
“하긴, 네 사전에 제대로 된 친구라는 말이 있기는 했나? 케빈 윈저 맥스웰 정도라면 모를까. 이튼 후배라고 했든가? 케임브리지?”
호진의 이마에 실 같은 주름이 잡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 실장의 정보통에 찬사를 보내고 싶군요. 그런데 업데이트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방금 헤어졌거든요.”
호진은 아직도 붓기가 남은 뺨을 잠깐 쓸었다.
“헤어졌다고?”
“서로 필요해서 만났던 거니까요.”
재철은 얼굴을 찡그리고 동생이 홍차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생의 긴 속눈썹이 느리게 흔들리더니 깜박인다. 눈이 습해서 언제든 반들반들 빛나는 듯 보였지만 저것은 감정이 완벽히 증류된 습기다. 만약 여인이었으면 나라를 이울게 할 만한 색이라 하겠지만 동생의 기질은 보통의 사내 이상으로 과격했고 때로는 잔혹해 보일만큼 차가웠다.
늙은 승냥이라 불리던 아비가 이 아이에게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재철이 뱉는 담배 연기가 더욱 짙어졌다.
이 녀석을 시험해서 판단하는 일이 내 손으로 떨어졌다. 시간이 많지 않다. 다른 동생들은 설레발이 요란한 것에 비해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 경영인을 생각할 만큼 아주 개차반들도 아니어서 모든 것이 애매했다.
늙은 승냥이는 막내아들을 검증할 기회가 없었다. 말이 나갔던 대로 무난하고 조심스러운 맏아들 재철에게 자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강 실장이 승냥이에게 몇 마디 흘렸던 덕일 수도 있다. 그의 조력이 재철에게 가장 큰 지원이었고, 신중함과 공평무사함이 가장 큰 미덕이었다.
재철은 두 번의 결혼에 딸을 하나 두었을 뿐이고, 그나마 그 아이는 어릴 때 자폐 진단을 받았다. 설사 욕심이 있다손 쳐도, 열다섯 살 때부터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동딸에게 가업을 물리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영주 아가씨의 상태가 가산점이 된 것입니다. 회장님은 당신을 낙점하실 겁니다. 기회를 잡으십시오, 전무님.
자신의 우군이 되었던 무영은 그리 말했었다. 재철은 무영이 왜 자신을 밀었는지, 호진의 지분을 제니 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왜 방관했는지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무영에게서는, 정직한 대답은 나올 것이지만 진실한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강 실장은 재철의 능력을 전 회장만큼 인정하지 않았고, 재철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오랜 세월 공생 중이었다. 아비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속에 들러붙어 끈적거렸다.
‘넌 징검다리다. 네 분수를 알고 감정적으로 나대지 않으니 일단 너에게 맡긴다. 하지만 유통은 매 순간이 전쟁이다. 맹수가 필요하다.’
죽음을 앞둔 늙은 아비는 장남을 독대하며 헐떡거렸다. 가래 끓는 목소리가 그렁그렁했다. 재철은 그 말을 듣고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쓸 만한 동생이나 조카 하나 골라서 넘겨라. 싹이 있으면 쓸 만하게 키워.’
‘예, 아버지.’
‘쓸 만한 놈 없으면 차라리 전문 경영인을 찾아라.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해라. 날 새면 번쩍번쩍 변하는 시대에, 수성(守成)이 쉬운 줄 아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 거다. 무영이가 필요한 만큼 널 도와줄 거다.’
‘예, 아버지.’
‘적임자에게 넘겨주면 네 할 일 다 한 거다.’
늙은 승냥이는 장남을 독대한 후 일주일 만에 피와 가래를 한 됫박 토하고 요란하게 죽었다. 자식이든 들러붙었던 여자든 충성하던 직원이든 아무도 그의 병실에 들어서지 않았다. 다섯 자녀는 장례식장에서 유언장을 미리 보고 대판 싸움을 벌였다.
호진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비행기 티켓을 보내 주지 않았던 본가의 의중을 쉽게 파악했다. 잘라 내고 온 구씨 집안의 정글은 그가 낄 판이 아니었다. 게다가 왕복 비행기 값을 별도로 구할 방법도 없었다.
당시 호진은 학비와 책값, 기본 생활비 외에는 돈을 구할 방법도 여력도 없었다. 오리엔탈 푸드와 섹스, 학비와 의식주. 등가 교환을 전제로 케빈 맥스웰과 동거하던 중이었다. 섹스 중독자였던 망나니 작위 귀족과의 관계가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고, 케빈이 아무리 연인놀음을 했다 한들 본질은 물물교환과 다름없었다.
재철은 담배를 든 채 침묵하고 있었다. 다시 밭은기침 소리가 들렸다. 앉은 자리에서 두 대째다. 본가에는 항상 옅은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아비 때부터 쏟아져 나온 담배 연기는 오래된 고가구의 결마다 배어 담배 향을 쏟아 냈다. 호진은 한숨을 쉬었다.
“열여덟 살이었나……. 눈앞에 두 개의 길이 놓여 있었는데.”
쿨럭쿨럭. 재철의 밭은기침이 조금 깊어졌다.
“한적한 길로 가 보니 별 볼 일 없더군요.”
“로버트 프로스트?”
재철의 짧은 응대에 호진은 차분하게 웃었다. 재철은 가라앉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담배 연기가 시구 사이로 날카롭게 흩어졌다.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나는 한적한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노라
재철이 영시를 외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혈관에조차 물기 하나 없을 것 같은 사내는 한때 영문학도였다.
“형님, 선택하지 못했던 길이 다시 앞에 놓이는 것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행운이라 하지. 혹은…….”
재철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호진은 발을 건들건들 흔들었다. 이어질 것 같던 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호진은 하지만 뒷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가느다란 입술 선에 세미한 웃음이 실렸다.
“기회. 내 손에 달린 기회.”
손에 들어온 것을 놓치지 않는다. 첫 단추는 무사히 끼워졌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갈 순서가 되었다. 새로운 길이 급물살을 타며 열리기 시작했다. 정보가 필요하다. 일단 윤연희라는 사람의 눈에 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덩치 큰 사장은 호진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한번 봅시다, 윤연희 씨. 당신이 잡고 있는 것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K마트 앞으로 끌어오려면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한번 봅시다.
호진은 식어 버린 홍차를 들이켰다. 레몬즙이 너무 많이 우러나와 색이 고운 홍차는 떫고 시고 쓰게 변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뒤엉켜 복잡했다. 지근지근 습관적인 편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모든 걸 깨끗하게 잊고 잠들고 싶은 밤이었다.
재철이 방으로 들어간 후, 마루에 남아 있는 것은 강 실장뿐이었다.
“강 실장. 여자 한 명만 우리 집으로 보내세요.”
반백의 비서실장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호진의 아비 대에서부터 익숙한 일이었고, 섹스리스 부부로 사는 재철에게 여자 대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대를 이어 충성인 셈이다.
청량리 588번지 집창촌에서 아비 없이 자란 무영은 그쪽 바닥의 생리를 잘 알았고, 그 이유로 승냥이에게 발탁이 되기도 했었다. 호진이 요구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무영은 어색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떤 취향의 여자를 원하십니까?”
“가슴이 큰 여자는 천박해 보이니 싫고, 말이 많은 여자는 번잡해서 싫으니 그 선에서 알아서.”
머리와 손톱 발톱을 발갛게 물들인 여자가 자정이 되기 전에 초인종을 눌렀다. 입성과 분위기를 보아하니 싸구려 여자를 불러 준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스물이 갓 넘은 듯했는데, 적당히 볼만했고, 적당히 안을 만했다.
이름도 말도 필요 없는 관계란 편안했다. 이십 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질 일을 위해 품을 들일 이유가 없었고, 망각과 숙면에 관해서라면 호진은 섹스 이상의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 살을 부비고 살았던 사내 따위는 말끔하게 잊혀졌다. 오히려 뜨문뜨문 떠오르는 것은 면접 때 처음 만나 보았던, 그리고 내일부터 보게 될 사람이었다.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는 사내.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와, 자신을 향해 주먹을 흔들며 뒤에서 고함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직하고 진지해 보이는 모습이 토막토막, 정사 내내 굴러다녔다.
……당신이 나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 다행이긴 한데.
과연 일이 어찌 되려는가. 당신이 나의 도약에 계단이 되어 주겠는가.
호진은 여자의 납작한 가슴을 꽉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똑같이 허덕허덕 위로 치닫던 여자가 반쯤 풀린 눈으로 호진의 가슴을 더듬는다. 니플 피어스가 여자의 손톱에 걸렸다. 빌어먹을! 빼는 걸 잊었다. 민감한 살에 파묻혀 있는 금속은 케빈이 직접 박아 넣은 것이다. 따갑지는 않지만 거슬렸다.
그는 여자의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여자의 다리 사이에 몸을 박아 넣은 채, 그는 젖꼭지에서 작은 금속을 잡아 빼냈다. 여자의 시선이 그의 가슴과 노란 금속 조각 사이를 번갈아 오갔다. 여자가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끼워 놓은 게 더 섹시하고 좋은데요. 빼지 마세요.”
“닥쳐. 닥쳐. 닥……쳐.”
호진은 그것을 탁자에 집어 던지고 여자의 다리를 찢어져라 벌린 후 있는 힘껏 살덩이를 들이박았다.
‘내 거라는 표시가 한 군데는 있어야 하잖아. 남들에게 안 보이는 은밀한 곳에! 음. 불알에 문신을 해 줄까? 페니스 끝에다 하트 문신은? 하하, 피가 좀 많이 나려나? 아니 그보다 오줌 눌 때마다 좀 눈치 보이겠지? 그럼 엉덩이 그 사이, 양손으로 벌려야 보이는 그 안쪽에다 해 줄까?’
문신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었던 호진은 케빈의 유두에 박힌 피어스와 동일한 것을, 동일한 위치에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내가 직접 해 줄게!’
섹스 중독자의 눈에서 나른함이 사라졌다. 정사가 시작되기 전, 색기 넘치던 벽안의 파트너는 젖꼭지를 소독하는 대신 팥알만 한 살덩이가 엄지손톱만큼 부풀 때까지, 무려 30분이나 빨아댄 후, 천천히 길고 뾰족한 금속을 박아 넣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호진은 시트를 있는 힘껏 움켜쥐고 입에서 어떤 소리도 흘러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을 살피던 케빈은 침을 삼키며 손에 쥔 것을 더욱 천천히 돌려 박았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피가 실처럼 흘러 배꼽 아래까지 내려갔을 때, 호진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뾰족한 금속의 끝이 시뻘겋게 부은 살덩이 속을 일부러 헤집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치솟아 온몸이 퍼들퍼들 경련했다.
‘이 상태로 지금 무얼…….’
말이 끝나기도 전, 눈이 번들번들 변한 사내가 고통으로 덜덜 떨리는 그의 허벅지를 벌리고 사타구니를 집어삼켰다. 늘어진 살덩이는 의지와 상관없이 자극에 반응했다. 가슴이 움켜질 때마다 통증으로 몸서리를 치면서도 그는 사내가 만족할 때까지 사정하지 않고 버텨야 했다. 첫 번째 섹스 파트너와의 첫 번째 정사였다.
불필요한 과거의 요소들을 도려내고 나면 기억과 함께 존재했던 아픔도 사라진다. 호진은 케빈으로 인해 얻은 아픔을 더 이상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에게 익숙한 패턴이었다.
그는 아래에 누운 여자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으, 하으, 하아아! 사정감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생판 처음 보는 몸 파는 여자에게는 오히려 솔직한 얼굴을 보여 줄 수 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다.
헐떡이는 긴 한숨이 터졌다. 쟁쟁 신음하던 여자는 이미 꼭대기에 올랐는지 네 활개를 펴고 늘어졌다. 호진은 길게 버티는 대신 적당한 때에 끈적한 물을 내지른 후 옆으로 뒹굴었다. 땀 냄새와 향수 냄새가 섞여 그럴듯한 잔향을 만들었다.
헉, 헉, 허어. 허어. 호진은 신음 대신 거칠게 숨만 내쉬었다. 끙끙대는 여자가 그래도 끝까지 말이 없어 편안했고, 금속이 빠져나간 민감한 살덩이가 개운했다.
머리가 단순명료해진다. 피곤해. 이제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면 되는 거지. 덩치 큰 사내의 넓은 그림자가 자신의 위로 다시금 훅 덮이는 듯했다.
좋아. 이제 시작이지.
내일부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하나 알아봅시다. 윤연희 씨.
6. 설득의 방법 (1)
이른 시간에 출근한 호진을 맞은 것은 사무실 책상에 걸터앉아 책을 읽던 사내였다. 창문으로 비스듬하게 들어온 햇빛 덕분에 긴 그림자가 입구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커피 향이 느껴진다. 저 보온병 뚜껑에 담겨 있는 게 혹시 커피인가?
고개를 숙이고 행간에 집중하고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눈을 들더니 빙긋 웃는다. 투박하면서도 가식이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호진은 의외의 모습에 놀라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희의 아침 인사에 호진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이호진 씨. 음, 아니죠. 직함을 부르는 게 맞는데. 비서실장이니, 이 실장이라 하면 되겠군요.”
“실장은요. 아직 수습이고, 직원도 저 혼자고, 비서실도 없지 않습니까.”
호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자 연희의 목소리가 우르렁, 한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비서실장 있는 곳이 비서실 되는 거죠. 누가 물으면 45평짜리 비서실에서 일한다고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연희는 큼직한 눈을 둥글 굴리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나도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사장실이 45평이라고 자랑했단 말입니다.”
이건 또 무슨 논리인가. 호진의 입가가 실룩실룩 움직이는 것을 알아챈 연희는 푸허, 웃음을 터뜨렸다.
“정 맘에 안 차면 언제가 됐든 만들면 되는 거고. 설마 비서실 하나 만드는 데 100년 걸리겠습니까? 까짓 거 비서실 직원도 100명 뽑읍시다. 100명!”
너무 태연해서 뻔뻔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호진은 고개를 숙이고 짤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어제는 제냐, 오늘은 아르마니인가요? 마가 한 20? 구김이 좀 갈 텐데. 작업복 하나 드릴까요?”
의류 쪽 사업을 길게 했다더니 어느 계열 옷인지, 혼방률까지 잘도 알아차린다. 겉보기와 달리 눈짐작이 좋은 사람인 모양이다. 눈짐작뿐 아니라 옷 입는 감각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연희가 입고 온 무난한 싱글 투 버튼 슈트를 독특하게 만들어 준 것은 보색으로 톤다운해서 받쳐 입은 변형 스탠딩칼라 셔츠였다. 넥타이를 하지 않아도 점잖으면서 독특한 분위기가 났다.
연희가 호진에게 내민 손에 들린 것은 인디고 색의 작업용 점퍼였다. 가슴께에 ‘연희유통’이라는 노란색 글씨가 박혀 있었다.
“근무 중에 이걸 입어야 합니까?”
“물론 규칙은 아니지만 요새 보시다시피 노가다 시즌이라. 비싼 옷 입고 짐이라도 나를라치면 세탁, 수선비가 월급보다 많이 나올 텐데요. 이런 복장에 혹시 알레르기 있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연희가 호진의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씩 웃었다. 이호진 저 사람, 지금 눈썹이 아주 조금 꿈틀했다? 표정을 잘 감추는 것 같더니 이제는 조금 보이는 것도 같다. 연희는 그 작은 변화에서 친밀감을 느꼈다. 폼 안 나게 이런 거 입고 있기 싫다 이거지?
“그렇게 입고 있으면 겁나서 막일을 시킬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출 내역에 비서실장 양복 세탁비, 수선비 오십만 원, 백만 원씩 올려놓았다가 감사라도 떨어지면 어떡합니까?”
농담처럼 주워섬기며 연희는 무르게 웃었다. 억센 몸집을 가진 사내의 부드러운 웃음은 부조화한 것이 아니라 푸근해 보였다. 호진은 잠시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무장 해제되는 기분이었다. 불쾌한 건 아닌데, 느낌이 묘했다.
“그리고 어제 보셨다시피 저도 같이 입을 겁니다. 의리도 있고 하니 이 실장 혼자 입게 두진 않아요.”
“사장님. 거기서 의리가 왜 나옵니까? 그것도 설득입니까?”
“음. 설득 맞습니다. 학습 능력이 좋으십니다.”
연희가 커피를 마시며 소탈하게 웃었다. 논리와 별 상관없는, 공감과 확신의 전파에 기초한 설득. 하지만 우습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어쩌면 저 사내는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를 상대에게 동조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윤연희식 설득의 정체를 알 것도 같다. 호진은 어느덧 유쾌해졌다.
아직 어수선한 사무실을 보아하니 막일부터 제대로 하게 생겼다. 호진은 어제 강 실장에게 받은 비서실 일반 업무 분장에 대한 내용이 필요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짐 나르고 정리할 게 좀 많습니다. 나중에 여기 철거하면 집기 서류 다 빼야 하니까 리패킹이 수월하도록 염두에 두고 정리하세요. 지금 책상 위에 있는 기결 미결함부터 정리하면 됩니다. 최종결재까지 떨어지고 완결 오케이 사인된 건, 날짜별로 분류해서 파일에 정리한 다음, 박스에 넣어 주시면 됩니다. 진행 중인 건, 담당자한테 확인해서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파악해 두시면 됩니다. 아아, 그리고 저 대형 캐비닛 안의 서류.”
호진은 뒤를 돌아 캐비닛의 문을 열었다가 입을 벌렸다. 종이 한 뭉텅이가 기다렸다는 듯 호진의 머리 위로 우르르 쏟아졌다. 급하게 주워 들고 간추려 몸을 일으켜 보니, 캐비닛 안에는 온갖 서류들이 그야말로 중구난방 뒤섞여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쌓여 있었다. 덩치 큰 사내가 우물쭈물한다.
5. 두 갈래 길 (2)
그들 사이에 끼어들고 싶다. 그들을 누르고 내 영토를 만들고 싶다. 이 나라의 유통업계를 지배하는 사람이 되는 길이 의외로 가까이 놓였다.
한국은 OECD 가입을 앞두고 있던, 호황이라는 사실을 실감하지도 못한 채 처음 맛보는 단맛을 누리는 상태였다. 막 싹트기 시작한 대형 할인점 사업은 황금알이 굴러다니는 들판이었고 유통망과 현금 동원력이 월등한 K마트는 조건이 매우 좋았다.
이것은 잡기 힘든 기회다. 날개를 펴게 되려는가. 서러운 세월을 보상받을 찬스가 앞에 놓이는 것인가.
그동안 영국에서 쌓아 올린 성취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양립할 수 없을 것이다. 한쪽 길은 안정적이며 명예가 보장되어 있고, 한쪽 길은 맨몸으로 헤치고 나가야 할 정글이었다. 하지만 길 끝에 놓인 것은 어마어마했다. 호진은 흥분을 내색하지 않고 차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그쪽으로 이력서를 내 보겠습니다.’
잠시 망설이던 호진은 한마디 덧붙였다.
‘약속은 약속이니 지금 하셨던 말씀, 공증이 된 계약서 형태로 한 장 부탁합니다.’
재철은 눈썹을 찡그렸지만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강 실장에게 이야기해 두지. 다만,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함구해라.
유일한 조문객은 망자에게 국화 한 송이 바치지 않고 몸을 돌렸다. 피우다 눌러 놓은 꽁초 두 개가 재떨이에 남아 있었다. 호진은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궁궁궁궁, 심장에서 대북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식사를 마칠 즈음 주변이 조용해졌다. 호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자 앞으로 마른 수건이 눈앞으로 다가들었다.
“닦아라. 애들은 다 돌려보냈다.”
재철은 식탁에 마주 앉아 담배를 꺼냈다.
“내일부터 신촌 그랜디스에 바로 출근합니다.”
“허, 용하군. 그렇게 빨리?”
재철은 담배 연기를 옆으로 길게 뿜다가 잠시 밭은기침을 했다.
“분위기가 어떻던?”
“자기들 입으로는 연희유통이라고 합니다. 바지 사장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재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이라는 사람이 어떻던가, 하는 말에 호진은 대답을 한참 골라야 했다.
“생각보다 젊었습니다. 조사할 때 보니 저랑 나이가 같았습니다. 스물아홉.”
“그랬나? 젊은 사람이 재주가 좋은가…….”
“흥미가 갑니다. 연희유통 사장,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그거 의외구나.”
“이런 식으로 만나지 않았으면 친구로 곁에 두어도 쓸모 있을 것 같았습니다.”
허? 친구? 네가? 헛웃음을 치려던 재철은 쓸모라는 말이 나오자 ‘그러면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담배 연기가 뭉클 흩어졌다. 담배 연기를 질색하는 호진이지만 찡그리지 않고 조심스럽게 옆으로 물러앉았다.
“하긴, 네 사전에 제대로 된 친구라는 말이 있기는 했나? 케빈 윈저 맥스웰 정도라면 모를까. 이튼 후배라고 했든가? 케임브리지?”
호진의 이마에 실 같은 주름이 잡혔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강 실장의 정보통에 찬사를 보내고 싶군요. 그런데 업데이트가 필요할 때도 있는 법입니다. 방금 헤어졌거든요.”
호진은 아직도 붓기가 남은 뺨을 잠깐 쓸었다.
“헤어졌다고?”
“서로 필요해서 만났던 거니까요.”
재철은 얼굴을 찡그리고 동생이 홍차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 동생의 긴 속눈썹이 느리게 흔들리더니 깜박인다. 눈이 습해서 언제든 반들반들 빛나는 듯 보였지만 저것은 감정이 완벽히 증류된 습기다. 만약 여인이었으면 나라를 이울게 할 만한 색이라 하겠지만 동생의 기질은 보통의 사내 이상으로 과격했고 때로는 잔혹해 보일만큼 차가웠다.
늙은 승냥이라 불리던 아비가 이 아이에게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재철이 뱉는 담배 연기가 더욱 짙어졌다.
이 녀석을 시험해서 판단하는 일이 내 손으로 떨어졌다. 시간이 많지 않다. 다른 동생들은 설레발이 요란한 것에 비해 가시적인 성과를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전문 경영인을 생각할 만큼 아주 개차반들도 아니어서 모든 것이 애매했다.
늙은 승냥이는 막내아들을 검증할 기회가 없었다. 말이 나갔던 대로 무난하고 조심스러운 맏아들 재철에게 자리를 넘길 수밖에 없었다. 강 실장이 승냥이에게 몇 마디 흘렸던 덕일 수도 있다. 그의 조력이 재철에게 가장 큰 지원이었고, 신중함과 공평무사함이 가장 큰 미덕이었다.
재철은 두 번의 결혼에 딸을 하나 두었을 뿐이고, 그나마 그 아이는 어릴 때 자폐 진단을 받았다. 설사 욕심이 있다손 쳐도, 열다섯 살 때부터 시설에서 생활하고 있는 외동딸에게 가업을 물리겠다고 할 수는 없었다.
영주 아가씨의 상태가 가산점이 된 것입니다. 회장님은 당신을 낙점하실 겁니다. 기회를 잡으십시오, 전무님.
자신의 우군이 되었던 무영은 그리 말했었다. 재철은 무영이 왜 자신을 밀었는지, 호진의 지분을 제니 리가 움켜쥐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왜 방관했는지 묻지 않았다. 어차피 무영에게서는, 정직한 대답은 나올 것이지만 진실한 답은 나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강 실장은 재철의 능력을 전 회장만큼 인정하지 않았고, 재철은 그를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오랜 세월 공생 중이었다. 아비가 남긴 마지막 말이 귓속에 들러붙어 끈적거렸다.
‘넌 징검다리다. 네 분수를 알고 감정적으로 나대지 않으니 일단 너에게 맡긴다. 하지만 유통은 매 순간이 전쟁이다. 맹수가 필요하다.’
죽음을 앞둔 늙은 아비는 장남을 독대하며 헐떡거렸다. 가래 끓는 목소리가 그렁그렁했다. 재철은 그 말을 듣고도 얼굴을 찡그리지 않았다.
‘쓸 만한 동생이나 조카 하나 골라서 넘겨라. 싹이 있으면 쓸 만하게 키워.’
‘예, 아버지.’
‘쓸 만한 놈 없으면 차라리 전문 경영인을 찾아라. 지키는 것에 최선을 다해라. 날 새면 번쩍번쩍 변하는 시대에, 수성(守成)이 쉬운 줄 아나. 죽을힘을 다해야 할 거다. 무영이가 필요한 만큼 널 도와줄 거다.’
‘예, 아버지.’
‘적임자에게 넘겨주면 네 할 일 다 한 거다.’
늙은 승냥이는 장남을 독대한 후 일주일 만에 피와 가래를 한 됫박 토하고 요란하게 죽었다. 자식이든 들러붙었던 여자든 충성하던 직원이든 아무도 그의 병실에 들어서지 않았다. 다섯 자녀는 장례식장에서 유언장을 미리 보고 대판 싸움을 벌였다.
호진은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했다. 그는 비행기 티켓을 보내 주지 않았던 본가의 의중을 쉽게 파악했다. 잘라 내고 온 구씨 집안의 정글은 그가 낄 판이 아니었다. 게다가 왕복 비행기 값을 별도로 구할 방법도 없었다.
당시 호진은 학비와 책값, 기본 생활비 외에는 돈을 구할 방법도 여력도 없었다. 오리엔탈 푸드와 섹스, 학비와 의식주. 등가 교환을 전제로 케빈 맥스웰과 동거하던 중이었다. 섹스 중독자였던 망나니 작위 귀족과의 관계가 그리 녹록한 것은 아니었고, 케빈이 아무리 연인놀음을 했다 한들 본질은 물물교환과 다름없었다.
재철은 담배를 든 채 침묵하고 있었다. 다시 밭은기침 소리가 들렸다. 앉은 자리에서 두 대째다. 본가에는 항상 옅은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다. 아비 때부터 쏟아져 나온 담배 연기는 오래된 고가구의 결마다 배어 담배 향을 쏟아 냈다. 호진은 한숨을 쉬었다.
“열여덟 살이었나……. 눈앞에 두 개의 길이 놓여 있었는데.”
쿨럭쿨럭. 재철의 밭은기침이 조금 깊어졌다.
“한적한 길로 가 보니 별 볼 일 없더군요.”
“로버트 프로스트?”
재철의 짧은 응대에 호진은 차분하게 웃었다. 재철은 가라앉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담배 연기가 시구 사이로 날카롭게 흩어졌다.
I took the one less traveled by,
And that has made all the difference
나는 한적한 길을 택했고,
그것이 모든 것을 바꾸었노라
재철이 영시를 외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지는 않았다. 혈관에조차 물기 하나 없을 것 같은 사내는 한때 영문학도였다.
“형님, 선택하지 못했던 길이 다시 앞에 놓이는 것을 무엇이라 부릅니까?”
“행운이라 하지. 혹은…….”
재철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호진은 발을 건들건들 흔들었다. 이어질 것 같던 말은 이어지지 않는다. 호진은 하지만 뒷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가느다란 입술 선에 세미한 웃음이 실렸다.
“기회. 내 손에 달린 기회.”
손에 들어온 것을 놓치지 않는다. 첫 단추는 무사히 끼워졌다. 이제 다음 단계로 나갈 순서가 되었다. 새로운 길이 급물살을 타며 열리기 시작했다. 정보가 필요하다. 일단 윤연희라는 사람의 눈에 드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덩치 큰 사장은 호진이 마음에 든 눈치였다. 한번 봅시다, 윤연희 씨. 당신이 잡고 있는 것을 가장 적은 비용으로 K마트 앞으로 끌어오려면 어떤 방식으로 해야 하는지 한번 봅시다.
호진은 식어 버린 홍차를 들이켰다. 레몬즙이 너무 많이 우러나와 색이 고운 홍차는 떫고 시고 쓰게 변해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머리가 뒤엉켜 복잡했다. 지근지근 습관적인 편두통이 일기 시작했다. 모든 걸 깨끗하게 잊고 잠들고 싶은 밤이었다.
재철이 방으로 들어간 후, 마루에 남아 있는 것은 강 실장뿐이었다.
“강 실장. 여자 한 명만 우리 집으로 보내세요.”
반백의 비서실장은 놀라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호진의 아비 대에서부터 익숙한 일이었고, 섹스리스 부부로 사는 재철에게 여자 대주는 일도 종종 있었다. 여러 가지 의미로 대를 이어 충성인 셈이다.
청량리 588번지 집창촌에서 아비 없이 자란 무영은 그쪽 바닥의 생리를 잘 알았고, 그 이유로 승냥이에게 발탁이 되기도 했었다. 호진이 요구하는 것은 처음이지만 무영은 어색한 내색을 하지 않았다.
“어떤 취향의 여자를 원하십니까?”
“가슴이 큰 여자는 천박해 보이니 싫고, 말이 많은 여자는 번잡해서 싫으니 그 선에서 알아서.”
머리와 손톱 발톱을 발갛게 물들인 여자가 자정이 되기 전에 초인종을 눌렀다. 입성과 분위기를 보아하니 싸구려 여자를 불러 준 것 같지는 않았다. 여자는 스물이 갓 넘은 듯했는데, 적당히 볼만했고, 적당히 안을 만했다.
이름도 말도 필요 없는 관계란 편안했다. 이십 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질 일을 위해 품을 들일 이유가 없었고, 망각과 숙면에 관해서라면 호진은 섹스 이상의 방법을 알지 못했다.
얼마 전까지 살을 부비고 살았던 사내 따위는 말끔하게 잊혀졌다. 오히려 뜨문뜨문 떠오르는 것은 면접 때 처음 만나 보았던, 그리고 내일부터 보게 될 사람이었다.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 내는 사내. 속을 알 수 없는 새까만 눈동자와, 자신을 향해 주먹을 흔들며 뒤에서 고함치던 모습이 떠올랐다. 우직하고 진지해 보이는 모습이 토막토막, 정사 내내 굴러다녔다.
……당신이 나를 마음에 들어 했으니 다행이긴 한데.
과연 일이 어찌 되려는가. 당신이 나의 도약에 계단이 되어 주겠는가.
호진은 여자의 납작한 가슴을 꽉 움켜쥐고 몸을 떨었다. 똑같이 허덕허덕 위로 치닫던 여자가 반쯤 풀린 눈으로 호진의 가슴을 더듬는다. 니플 피어스가 여자의 손톱에 걸렸다. 빌어먹을! 빼는 걸 잊었다. 민감한 살에 파묻혀 있는 금속은 케빈이 직접 박아 넣은 것이다. 따갑지는 않지만 거슬렸다.
그는 여자의 손을 거칠게 떼어 냈다. 여자의 다리 사이에 몸을 박아 넣은 채, 그는 젖꼭지에서 작은 금속을 잡아 빼냈다. 여자의 시선이 그의 가슴과 노란 금속 조각 사이를 번갈아 오갔다. 여자가 목쉰 소리로 중얼거렸다.
“끼워 놓은 게 더 섹시하고 좋은데요. 빼지 마세요.”
“닥쳐. 닥쳐. 닥……쳐.”
호진은 그것을 탁자에 집어 던지고 여자의 다리를 찢어져라 벌린 후 있는 힘껏 살덩이를 들이박았다.
‘내 거라는 표시가 한 군데는 있어야 하잖아. 남들에게 안 보이는 은밀한 곳에! 음. 불알에 문신을 해 줄까? 페니스 끝에다 하트 문신은? 하하, 피가 좀 많이 나려나? 아니 그보다 오줌 눌 때마다 좀 눈치 보이겠지? 그럼 엉덩이 그 사이, 양손으로 벌려야 보이는 그 안쪽에다 해 줄까?’
문신만큼은 절대 피하고 싶었던 호진은 케빈의 유두에 박힌 피어스와 동일한 것을, 동일한 위치에 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내가 직접 해 줄게!’
섹스 중독자의 눈에서 나른함이 사라졌다. 정사가 시작되기 전, 색기 넘치던 벽안의 파트너는 젖꼭지를 소독하는 대신 팥알만 한 살덩이가 엄지손톱만큼 부풀 때까지, 무려 30분이나 빨아댄 후, 천천히 길고 뾰족한 금속을 박아 넣었다.
침대 헤드에 기대앉은 호진은 시트를 있는 힘껏 움켜쥐고 입에서 어떤 소리도 흘러나가지 않도록 이를 악물었다. 그의 얼굴을 살피던 케빈은 침을 삼키며 손에 쥔 것을 더욱 천천히 돌려 박았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을 정도로 아팠다. 피가 실처럼 흘러 배꼽 아래까지 내려갔을 때, 호진의 고개가 뒤로 꺾였다. 뾰족한 금속의 끝이 시뻘겋게 부은 살덩이 속을 일부러 헤집을 때마다 끔찍한 고통이 치솟아 온몸이 퍼들퍼들 경련했다.
‘이 상태로 지금 무얼…….’
말이 끝나기도 전, 눈이 번들번들 변한 사내가 고통으로 덜덜 떨리는 그의 허벅지를 벌리고 사타구니를 집어삼켰다. 늘어진 살덩이는 의지와 상관없이 자극에 반응했다. 가슴이 움켜질 때마다 통증으로 몸서리를 치면서도 그는 사내가 만족할 때까지 사정하지 않고 버텨야 했다. 첫 번째 섹스 파트너와의 첫 번째 정사였다.
불필요한 과거의 요소들을 도려내고 나면 기억과 함께 존재했던 아픔도 사라진다. 호진은 케빈으로 인해 얻은 아픔을 더 이상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다. 그에게 익숙한 패턴이었다.
그는 아래에 누운 여자의 벌어진 다리 사이에 정신을 집중했다. 하으, 하으, 하아아! 사정감이 턱밑까지 차오르자 얼굴이 한껏 일그러졌다. 생판 처음 보는 몸 파는 여자에게는 오히려 솔직한 얼굴을 보여 줄 수 있으니 그 또한 나쁘지 않다.
헐떡이는 긴 한숨이 터졌다. 쟁쟁 신음하던 여자는 이미 꼭대기에 올랐는지 네 활개를 펴고 늘어졌다. 호진은 길게 버티는 대신 적당한 때에 끈적한 물을 내지른 후 옆으로 뒹굴었다. 땀 냄새와 향수 냄새가 섞여 그럴듯한 잔향을 만들었다.
헉, 헉, 허어. 허어. 호진은 신음 대신 거칠게 숨만 내쉬었다. 끙끙대는 여자가 그래도 끝까지 말이 없어 편안했고, 금속이 빠져나간 민감한 살덩이가 개운했다.
머리가 단순명료해진다. 피곤해. 이제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내일 일어나서 일을 시작하면 되는 거지. 덩치 큰 사내의 넓은 그림자가 자신의 위로 다시금 훅 덮이는 듯했다.
좋아. 이제 시작이지.
내일부터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하나하나 알아봅시다. 윤연희 씨.
6. 설득의 방법 (1)
이른 시간에 출근한 호진을 맞은 것은 사무실 책상에 걸터앉아 책을 읽던 사내였다. 창문으로 비스듬하게 들어온 햇빛 덕분에 긴 그림자가 입구까지 드리워져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자 커피 향이 느껴진다. 저 보온병 뚜껑에 담겨 있는 게 혹시 커피인가?
고개를 숙이고 행간에 집중하고 있던 덩치 큰 사내가 눈을 들더니 빙긋 웃는다. 투박하면서도 가식이 보이지 않는 웃음이었다. 호진은 의외의 모습에 놀라 인사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좋은 아침입니다.”
연희의 아침 인사에 호진은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 예, 안녕하십니까, 사장님.”
“이호진 씨. 음, 아니죠. 직함을 부르는 게 맞는데. 비서실장이니, 이 실장이라 하면 되겠군요.”
“실장은요. 아직 수습이고, 직원도 저 혼자고, 비서실도 없지 않습니까.”
호진이 가볍게 웃으며 말을 받자 연희의 목소리가 우르렁, 한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비서실장 있는 곳이 비서실 되는 거죠. 누가 물으면 45평짜리 비서실에서 일한다고 하시면 됩니다. 알겠습니까?”
연희는 큼직한 눈을 둥글 굴리더니 당당하게 말했다.
“나도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사장실이 45평이라고 자랑했단 말입니다.”
이건 또 무슨 논리인가. 호진의 입가가 실룩실룩 움직이는 것을 알아챈 연희는 푸허, 웃음을 터뜨렸다.
“정 맘에 안 차면 언제가 됐든 만들면 되는 거고. 설마 비서실 하나 만드는 데 100년 걸리겠습니까? 까짓 거 비서실 직원도 100명 뽑읍시다. 100명!”
너무 태연해서 뻔뻔하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호진은 고개를 숙이고 짤막하게 웃었다.
“그나저나 어제는 제냐, 오늘은 아르마니인가요? 마가 한 20? 구김이 좀 갈 텐데. 작업복 하나 드릴까요?”
의류 쪽 사업을 길게 했다더니 어느 계열 옷인지, 혼방률까지 잘도 알아차린다. 겉보기와 달리 눈짐작이 좋은 사람인 모양이다. 눈짐작뿐 아니라 옷 입는 감각도 나쁘지 않은 듯했다. 연희가 입고 온 무난한 싱글 투 버튼 슈트를 독특하게 만들어 준 것은 보색으로 톤다운해서 받쳐 입은 변형 스탠딩칼라 셔츠였다. 넥타이를 하지 않아도 점잖으면서 독특한 분위기가 났다.
연희가 호진에게 내민 손에 들린 것은 인디고 색의 작업용 점퍼였다. 가슴께에 ‘연희유통’이라는 노란색 글씨가 박혀 있었다.
“근무 중에 이걸 입어야 합니까?”
“물론 규칙은 아니지만 요새 보시다시피 노가다 시즌이라. 비싼 옷 입고 짐이라도 나를라치면 세탁, 수선비가 월급보다 많이 나올 텐데요. 이런 복장에 혹시 알레르기 있으십니까?”
“……그건 아닙니다만.”
연희가 호진의 얼굴을 보며 소리 없이 씩 웃었다. 이호진 저 사람, 지금 눈썹이 아주 조금 꿈틀했다? 표정을 잘 감추는 것 같더니 이제는 조금 보이는 것도 같다. 연희는 그 작은 변화에서 친밀감을 느꼈다. 폼 안 나게 이런 거 입고 있기 싫다 이거지?
“그렇게 입고 있으면 겁나서 막일을 시킬 수가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지출 내역에 비서실장 양복 세탁비, 수선비 오십만 원, 백만 원씩 올려놓았다가 감사라도 떨어지면 어떡합니까?”
농담처럼 주워섬기며 연희는 무르게 웃었다. 억센 몸집을 가진 사내의 부드러운 웃음은 부조화한 것이 아니라 푸근해 보였다. 호진은 잠시 그의 웃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쩐지 무장 해제되는 기분이었다. 불쾌한 건 아닌데, 느낌이 묘했다.
“그리고 어제 보셨다시피 저도 같이 입을 겁니다. 의리도 있고 하니 이 실장 혼자 입게 두진 않아요.”
“사장님. 거기서 의리가 왜 나옵니까? 그것도 설득입니까?”
“음. 설득 맞습니다. 학습 능력이 좋으십니다.”
연희가 커피를 마시며 소탈하게 웃었다. 논리와 별 상관없는, 공감과 확신의 전파에 기초한 설득. 하지만 우습게도 설득력이 있었다. 어쩌면 저 사내는 자신의 감정이나 의지를 상대에게 동조하게 만드는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윤연희식 설득의 정체를 알 것도 같다. 호진은 어느덧 유쾌해졌다.
아직 어수선한 사무실을 보아하니 막일부터 제대로 하게 생겼다. 호진은 어제 강 실장에게 받은 비서실 일반 업무 분장에 대한 내용이 필요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짐 나르고 정리할 게 좀 많습니다. 나중에 여기 철거하면 집기 서류 다 빼야 하니까 리패킹이 수월하도록 염두에 두고 정리하세요. 지금 책상 위에 있는 기결 미결함부터 정리하면 됩니다. 최종결재까지 떨어지고 완결 오케이 사인된 건, 날짜별로 분류해서 파일에 정리한 다음, 박스에 넣어 주시면 됩니다. 진행 중인 건, 담당자한테 확인해서 어디까지 진행되었는지 파악해 두시면 됩니다. 아아, 그리고 저 대형 캐비닛 안의 서류.”
호진은 뒤를 돌아 캐비닛의 문을 열었다가 입을 벌렸다. 종이 한 뭉텅이가 기다렸다는 듯 호진의 머리 위로 우르르 쏟아졌다. 급하게 주워 들고 간추려 몸을 일으켜 보니, 캐비닛 안에는 온갖 서류들이 그야말로 중구난방 뒤섞여서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태로 쌓여 있었다. 덩치 큰 사내가 우물쭈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