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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7화
4. 재규어 인 더 정글 Jaguar in the Jungle (2)


지잉, 지잉, 지잉.
두 사람의 침묵을 깨뜨린 것은 호진의 주머니에서 진동하는 휴대 전화기였다. 대상을 알 수 없어 호진은 받을까 말까 망설였다. 혹시나 케빈이 전화한 것이면 받고 싶지 않았다. 한참 만에 전화를 받았을 때, 큼직한 목소리가 우렁우렁 튀어나왔다.
-아, 이호진 씨. 전화 받을 수 없습니까? 혹시 샤워하다 받았습니까?
나른하게 풀어진 근육에 긴장감이 되돌아왔다. 윤연희 사장? 호진은 몸을 일으켰다.
“아닙니다, 사장님.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내가 출근 시간 이야기했던가요?
“그건 아니지만, 채용 광고에 9시에서 7시로 되어 있어서 그 시간을 기준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아, 이런, 이런 실수를. 이야기한 줄 알았습니다…….
수화기 너머에서 덩치 큰 사내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건 영업부 기준으로 나간 광고라서 그리됐습니다. 비서실은 다릅니다.
호진은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었다. 혈압이 낮은 편인 호진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해야 할 일에 엄살을 부릴 생각은 없었다. 하물며 지금처럼 그의 곁에서 신임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러면 출근 시간이 몇 시입니까?”
-7시 30분입니다.
나더러 죽으라는 소리군. 그리고 퇴근이 7시? 하루 열두 시간 가까이 뛰어다니라는 말인가?
“어째서 비서실 근무시간이 다른 건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그야, 제가 그 시간부터 일을 하니까.
사장이란 사람은 근무시간이 늘어난다는 것을 통보하면서도 퍽 자신만만했다. 호진은 눈썹을 구긴 채 맞은편에 정물처럼 앉아 있는 강 실장을 바라보았다. 수행 비서란 말이지. 출근부터 퇴근까지 따라다니는 그림자. 저기 앉아 있는 강 실장 같은. 그러고 보니 호진이든 방배동 본가 사람들이든 강무영의 정확한 출퇴근 시간을 알지 못했다.
호진의 침묵이 길어지자 맞은편의 목소리가 한 톤 낮아졌다.
-음, 이호진 씨. 출근 시간이 너무 이릅니까?
“이르다고 하면 늦춰 주실 겁니까?”
-그럴 리가요.
대답이 몹시 당당하기도 하다. 수화기 너머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호진은 기가 막혀 하, 짤막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이른지는 왜 물으시는 겁니까? 그냥 통보하고 나와라, 하시면 될 일 아닙니까?”
잠깐 침묵이 이어졌다. 감히 직원 따위가 사장 말에 대거리를 한다고 화가 난 걸까? 호진은 이런 미묘한 상황에서 판단이 서지 않을 때마다 문화의 차이를 실감했다. 흠. 짧은 숨소리가 들렸다. 수화기 너머에서, 덩치 큰 사장은 분명 말을 고르고 있었다.
-설득을 위해서죠.
무슨? 호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눈썹을 찡그렸다.
-내가 그냥 7시 30분까지 나와라, 무작정 통보하면 예정 밖의 일에 이호진 씨는 기분이 몹시 나쁘겠죠. 그만두고 싶어질지도 모르고요. 안 그렇습니까?
“그야.”
-하지만 왜 그 시간까지 나와야 하는지 필요성을 설명하고, 그래서 이호진 씨가 납득하면 같은 시간에 나와도 억지로 기분 나쁘게 출근하는 기분은 들지 않겠죠. 출근 하루 이틀 하고 말 것도 아닌데. 그렇지 않습니까?
수화기 너머로 마음에 드는 신입 사원을 놓치지 않으려는 사장의 풋풋한 열심이 느껴졌다. 호진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하며 웃었다. 이런 대답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설득을 위해서라. 호진은 어느새 짜증이 걷혀 가는 것이 느껴졌다.
-설득이 됐습니까? 이제 내일부터 7시 반 출근하실 때 억울하거나 기분 나쁘거나 하시진 않겠지요?
“그렇군요. 다행히 납득이 되었습니다, 사장님.”
-그거 보십시오. 전화하기 잘하지 않았습니까.
수화기 너머에서 다시 껄껄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내일 봅시다, 오늘 힘들었을 텐데 편히 주무십시오, 하는 인사를 끝으로 사장이 먼저 전화를 끊었다.
……이런.
호진은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뭔가 잘못되었는데?
그 사람은 설득을 한답시고 전화를 해 놓고, 정작 설득을 한 건 아니다. 자기가 일찍 나오니까, 이 한마디를 설득이랍시고 한 건가? 그것 말고는 제대로 된 이유는 한 가지도 없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저절로 납득했노라는 말을 끌어냈고, 불만이 일지 않게 눙쳐 놓았다.
납득은 ‘논리적 인과에 따른 결과의 수용’이라고 여겨지지만 실상은 감정적인 동조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훨씬 많다. 다만 이성의 영역에서 논리를 끌어들여 짜 맞추는 방법으로 감정적 동조를 정당화할 뿐이다. 더구나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이 어떠하다고 입 밖으로 내는 순간 자신의 의지로 그 심리상태를 현실화하려는 경향이 있다. ‘납득했다’는 말을 이끌어 낸 것만으로도, 설득의 절반 이상 먹고 들어가는 것이다.
대체 지금 난 뭐에 휘말린 건가? 윤연희 그 사람은 의도하지도 자각하지도 않은 상태로 이야기를 했던 것 같은데. 아하, 하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뭐야……. 아주 재미있는 사람이잖아?”
계약에 걸린 것만 염두에 둔 스파이 짓이라 지루하고 힘들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재미있을 수도 있겠다. 조사할 때부터 흥미가 돋긴 했지만 윤연희 그 사람, 생각보다 훨씬 더 예상 밖의 얼굴을 보여 주고 있다.
아드레날린이 솟구쳤다. 몸에 긴장감이 돌자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들었다. 본가에선 여전히 신 여사가 요리를 할까? 생각해 보니 본가에 살 때 좋았던 것은 아침저녁으로 정갈하게 차려 나오던 칠첩, 구첩 한정식뿐이었던 것 같다. 해결할 일을 맺어 두고 내일을 맞는 게 좋겠지. 호진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집 나온 지 십 년이 넘었습니다. 한번 들러볼 때도 되긴 했어요.”
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문을 열자 무영은 그를 앞질러 자동차에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육식동물의 매끈한 엠블럼이 밤공기를 헤쳤다.
“본가로 갑시다.”



5. 두 갈래 길 (1)


“몇 년 만이지? 마지막으로 봤던 게 10년이 넘었나? 반반한 건 여전하구나.”
본가에 들어서자마자 송곳 같은 말이 날아왔다. 재선 누나? 큰형만 있는 줄 알고 걸음 한 것인데 배다른 형과 누나, 그네들의 아내와 남편들이 다글다글 모여 있었다.
……내가 올 것을 알고 모여 있었나?
하긴. 오래전 죽은 아비가 막내에게 K마트의 주식을 남겼다는 정보를 최근에야 알게 되었으니 기겁을 했겠지. 그렇다고 이리 개떼처럼 몰려들다니. 태연한 표정을 짓느라 애는 쓰는 모양이지만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꼴들을 보니 실소가 나왔다.
K마트가 최종 증자할 때 증자분이 대거 배당된 James H. Rhee, 주주 총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외국인 주주가 호진임을 알아차렸던 형제는 한 명도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제니 리의 죽음으로 유산이 공개되면서 방배동 본가에도 소식이 가 닿았던 것이다.
형제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기색이 역연(歷然)했다. 내쳐진 줄로만 알았던 동생에게 3%의 주식이 돌아갔다는 말은 후계 경쟁 구도에 호진이 합류했다는 의미로 읽혔다. 몇 해 동안 멈춰 있던 시간이 새로 흐르기 시작했다. 2라운드가 시작된 것이다.
장례를 잘 치렀느냐, 공부하느라 힘들었느냐 안부하는 형제는 없었다. 흘끔대는 눈초리, 가시 박힌 말이 가볍게 오갔다. 우리들 사이에 들어오지 마라, 은연중에 으름장을 놓으면서도 지분을 다른 형제에게 허투루 넘기지 말라고 암중 다짐을 받으려 했다.
호진이 저질렀던 짓에 대해 언급하는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 한때 호진을 썩은 고기 취급했던 그들은 뒤늦게 호진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리고 동생을 깎아내리기 위해 그때 일을 입 밖으로 내어 퍼뜨리기에는 그 흠이 치명적으로 컸다. 자신들에게 그 소문이 연결되는 것조차 치가 떨릴 만큼.
호진은 조용히 식탁에 앉아 앞에 차려진 저녁을 먹었다. 9시가 훨씬 넘어서 시장기가 심했다. 아침 칠첩, 저녁 구첩반상의 호사스러운 규칙은 여전했다.
“바로 먹을 떡에도 소를 박는다고, 혼자 먹는데 구첩반상을 옹글게 받아? 팔자 폈구나.”
다가와 마주 앉은 것은 맏누이 재선이었다.
“그나저나 알고 보니 받은 주식이 3%가 아니라 2.5%로 줄어들었다면서? 어쩌나, 임시 주총도 소집 못 하게 생겼네. 대신 30에이커짜리 농장에, 런던 첼시의 대저택에, 야생 피메일 밍크코트에, 22캐럿 다이아 반지에 서러브레드까지 물려받았다며? 좋겠구나. 엄마한테 고맙다고 말은 좀 했고? 아, 장례식 때 알았댔으니 못 했겠구나. 딱해서 어쩌니?”
마주 앉은 재선의 얼굴에 웃음기가 돌았다. 호진은 젓가락질을 하며 무심하게 답했다.
“1미터만 뒤로 가세요. 누님.”
재선이 의아한 듯 눈썹을 찡그렸다. 화장기 진한 중년의 누이는 주름을 솔직히 드러낸 칠순 노인보다 흉해 보였다.
“말할 때마다 입에서 썩는 내가 나서 입맛이 떨어져.”
“……뭐?”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돈푼깨나 쥐여 주셨다며? 그럼 치약이나 좋은 거 좀 사지 그랬어요. 아니면, 염산이라도 들이부으면 썩은 내가 안 날 수도 있는데. 혀가 깔끔하게 녹을 테니. 제가 좀 드릴까요?”
“이 개썅놈의 새끼가!”
재선이 벌떡 일어나는 것과 동시에 호진의 얼굴에 물벼락이 날아들었다. 호진은 천천히 그녀를 올려다보고 곁에 놓인 냅킨을 들어 얼굴을 닦았다. 주변이 죽은 듯 조용해졌다. 호진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고개를 들더니 깨끗한 이를 드러내며 천진하게 웃었다.
“누님은 누가 톡톡 건드리는 대로 참 잘도 휘말린단 말이에요. 여전히 홧김에 술김에 아무 계약서에나 멋들어지게 사인하고 그러죠? 1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이렇게 매력적이니 남편한테 사랑받겠어요.”
“야! 이 더러운 화냥 새끼가!”
“아, 내가 화냥년 새끼는 맞지. 그런데 누님 말 들으면 쌍문동 송 여사를 ‘정숙한’ ‘본처’로 착각하게 되잖아요.”
쌍문동 송 여사는 재선의 친모였고, 이곳에 모인 형제들 중 본처 소생은 하나도 없었다. 호진은 자신에게 향한 욕을 묘하게 틀어 재선 뿐 아니라 형제 전체에게 '화냥년 새끼'라는 똥벼락을 뒤집어씌운 것이다.
다들 질린 얼굴로 술렁거렸다. 깜박 잊고 있었다. 호진이 본가에 있을 때, 형제 중 나이가 가장 어렸지만 단 한 번도 물린 것을 더 크게 대갚음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재선이 기절할 것 같은 얼굴로 가슴을 콱콱 치는 동안 호진은 태연한 얼굴로 젓가락질을 했고, 결국 말없이 앉아 있던 큰형의 입에서 벼락 치는 소리가 터졌다.
“재선이 너 나와!”
호진은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입에 든 것을 씹었다. 으득으득, 무른 두부선을 이가 갈리도록 꾹꾹 씹었다.

호진의 명의로 된 주식을 겁 없이 날려 먹은 것은 그의 잘난 어미 제니 리였다. 호진이 이튼스쿨 기숙사에 박혀 있을 때, 제니 리는 미성년자의 보호자 명목으로 상속받은 주식을 관리했다. 그녀는 아들이 어미에게 아무것도 나눠주지 않으리란 것을 너무 잘 알았다.
강무영 실장은 제니 리의 망종 짓거리를 미리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그는 적극적으로 나서 상황을 바로잡는 대신 방치하는 쪽을 택했다.
당사자도 모르게 유통업계 블루칩 십만 주라. 간도 컸다. 그 정신 나간 인간은 그게 무슨 가치를 가진 건지도 모르고 얼씨구 좋다 하며 뭉텅 빼돌린 것이었다. 그리고 호진이 성인이 된 후에도 끝까지 숨겼다. 본가와도 어미와도 연을 끊고 남의 집을 전전하던 호진은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생각하면 억세게 운 좋은 여자다. 들켰으면 아들 손에 의해 감옥에 처박혔을 텐데 그 꼴은 안 당하고 죽었으니까.
10만 주를 확보하려면 받을 당시는 40~50억 정도면 되었지만 지금은 150~160억을 퍼부어야 한다. 어미가 남긴 유산 물목은 그녀의 머릿속에 뇌가 들어 있는지조차 의심하게 만들었다.
보석과 모피를 대체 어디에 쓰겠다고 하루가 멀다 하고 사들여. 영국은 어차피 장기 불황으로 굴러떨어졌으니 부동산에서 뭘 건지기는 글러 먹었는데 풀 한번 베어 본 적 없는 여자가 뭐에 쓰겠다고 농장을 사. 첼시 부동산 값은 거품이 있던 상태라 미친 듯 폭락하는 중이고, 스포츠카? 이건 정분났던 새서방 취향인가?
유산 내역이 포르셰, 벤츠, 재규어와 소더비, 티파니에서 사들인 보석에서 경마장에서 퇴역한 서러브레드 세 필에 이르자 호진은 손에 든 서류를 집어 던졌다. 승마 선생하고 다시 살고 있던 건 알고 있었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넓은 농장에서 둘이 사이좋게 말이라도 달리고 싶었나?
어려서부터 다른 사내를 끌어들이느라 아들을 내내 방치하여 이웃을 전전하게 하고, 가끔 이웃의 신고까지 받고도 아들을 귀찮은 짐짝 취급하던 인간이었다. 너만 아니었으면 다른 놈 하나 잡아 팔자가 폈을 텐데. 독설은 자장가처럼 익숙해졌다.
호진이 이튼으로 진학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능을 아까워한 교사의 강력한 추천과 이튼스쿨의 저소득층 자녀를 위한 특별 전형 덕분이었다. 호진이 이루어 낸 것 중에 어미의 도움이 들어 있던 것은 한 가지도 없었다. 그러더니 유종의 미를 멋지게 장식하셨다 이거지.
아들 재산으로 공주 놀음 하느라 낭비한 기회비용만 100억 이상. 그러면서 학비와 생활비로 고생하는 아들한테 입을 싹 닦고 있었다. 내가 학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며 공부할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어떤 짓까지 감내해야 했는지 당신은 아나? 케빈 윈저 맥스웰. 헤어졌던 섹스 파트너인지 연인인지를 떠올리며 호진은 다시 입에 든 것을 으득, 씹었다.
예상치 못한 지분이 반갑기는 했지만 형제들과 같이 출발하기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다른 형과 누나들은 이미 6%에 가까운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 들었다. 실적은 어찌 되었든 지점장으로서의 경험들도 한두 자락씩은 갖고 있었다.
강 실장도 대동하지 않고 몰래 장례식장을 찾은 큰형의 뜬금없는 요구가 아니었으면, 호진은 지금까지 거취를 고민하고 있었을 것이다.

장례식장, 망자의 관 앞에서 마주 앉은 형은 주름이 더 깊었다. 염색으로 지나치게 새까매진 머리카락은 반백이던 10년 전보다 더 거슬렸다. 워낙 터울이 많이 져 아비와 아들이라 불리기에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였다.
사이가 소원하긴 했지만 그나마 큰형은 관록 있는 사업가답게 감정 문제로 신경을 긁는 일이 드물었고, 다른 형제들보다는 상식적인 축에 들었다. 그 상식적인 사내가 새벽에 비밀리에 찾아와 거두절미 말을 꺼냈다.
‘신촌 그랜디스 유통이라고 아나?’
‘예?’
‘신촌 그랜디스 유통 말이다. 신촌 S백화점 한 블록 옆에 있는 물건. 전에 부도낸 태평양 데파트 김 회장 아들이 간신히 잡고 있는 건물 말야.’
호진은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말없이 큰형을 노려보았다. 검은 양복을 입고 담배를 물고 있는 형은 질 나쁜 농담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K마트 신촌 상권의 매장으로 눈독 들이고 있던 곳이다. 상가 연합회가 꽤 강성이고, 섣불리 호가를 책정했다간 괜히 값만 올려놓을까 봐 관망 중이었다. 브로커 정 여사 말대로라면 김형식이 내놓을 듯 말 듯 배짱을 튕기다가 IMF가 터졌다고 하더군. 개값이 돼서 다시 거둬들였다고 들었는데.’
‘그래서요?’
‘그런데 요새 낌새가 이상하다. 팔았다는 말은 없는데 어디서 낚아채려고 집적대는 거 같아. 거기 사무실에 사람이 바뀌면서 직원 몇몇하고, 영어 능통한 비서를 구한다고 들었다.’
‘형님?’
호진은 이마를 찌푸렸다. 이게 대체 무슨 종잡을 수 없는 말인가. 하지만 재철은 손을 저어 동생이 끼어드는 것을 막았다.
‘재주껏 파고들어 가서, 신촌 그랜디스 유통을 어느 그룹에서 낚아채려고 하는지부터 알아봐라. 매매 전이라면, 계약이 성사되지 못하게 막아. 소문만 무성하지 확실한 건 하나도 없어. 사람이 필요하면 붙여 주고, 비용이 필요하면 가용 범위 내에서 지원하겠다.’
호진은 눈을 가늘게 떴다.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요구지? 정보원이 필요한가? 나를 용역업체 직원쯤으로 생각하고 있는 건가? 지금까지 연락 한번 없다가?
아무리 찬밥 신세인 동생이라지만, 날 이런 식으로 취급할 순 없다. 기업 스파이 짓이라. 큰형도 다른 누나나 형들처럼 나를 망신 주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누워 침 뱉기가 될 일인데 그럴 리가.
호진은 케임브리지에서 학문적인 성취가 빠른 축이었다. 아직 심사를 남겨 둔 박사학위 논문, 문화 종교적 차이가 있는 집단 간의 소비자 의사 결정 변수에 대한 그의 연구와 데이터는 학과 교수들과 알 만한 다국적 기업 사이에서 상당한 관심사였다. 교수들은 그에게 모교에 남으라며 러브콜이 한창이었고 유럽의 몇몇 유통업체에서도 비밀리에 헤드헌터를 보내 입질을 한 적도 있었다. 강 실장이 그것을 보고하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 물건이 필요해. 일 좀 만들어 봐.’
되풀이되는 큰형의 상식 밖 요구는 집요하기까지 했다. 역시 그렇군. 호진의 가는 입이 비틀리는 것을 보고 재철은 덧붙였다.
‘웃음이 나오나? 난 지금 진지하게 말하는 거야.’
‘아, 하하. 예, 그러십니까? 그런데 왜 하필 저한테?’
‘한국에서 언제까지 빈둥댈 거야?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어.’
‘영국으로 돌아가든 한국에서 빈둥대든 무슨 상관입니까. 그리고 제가 형님께 공짜 점심을 청했던 기억은 없습니다만.’
호진은 팔짱을 꼈다. 매끄러운 턱이 위로 살짝 들렸다.
‘까놓고 말합시다. 형님, 검증 테스트가 필요합니까?’
‘건방진 놈.’
새로 담배를 붙여 문, 환갑이 되어 가는 사내의 이마 위로 주름이 돋았다.
‘좋다. 터놓고 말하는 게 쉽겠지. 난 아버지가 네게 지분을 남겼단 이야기를 듣고, 네게도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 정도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푸르르. 입 밖으로 담배 연기가 길게 쏟아졌다.
‘사실 난 너에게 큰 유감은 없어. 아랫도리를 사내놈한테 휘두르든 계집년한테 휘두르든 그런 건 내 알 바 아냐. 하지만 능력이 검증되지 못한 놈은 누구라도 쓰지 않아. 기회를 잡고 싶으면 능력을 보여, 이호진.’
‘…….’
‘테스트라고 생각하고 싶으면 편할 대로 해. 어딘지 모르겠지만 어쩌면 법정 공방 때문에 골머리 앓고 있는 미국계 웰마트나 프랑스계 아르푸 쪽일 수도 있어. 만만치 않을 거야.’
아르푸는 그럴 여력이 없을 거고. 거대 M&A 같은 방법으로 한 방에 전세역전을 노리는 웰마트 쪽에서 물밑 작업할까 조바심하는 건가?
솔직함이 오히려 듣기에 낫다. 같잖은 정이나 핏줄 따위를 운운했으면 퍽 우스웠을 것이다. 사적인 문제는 내 알 바 아니라고 일축하는 게 더 편했고, 지분 때문에 기회를 주는 거라고 털어 말해주는 게 더 든든했다.
말은 안 했지만 다른 계열사를 맡은 동생들의 능력이 변변찮아 사세가 자꾸 위축되는 것도 호진을 부른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특히 K마트에서 대규모로 출자해 런칭한 K푸드를 맡은 둘째 재선 누나는 아예 죽을 쑤고 있는 지경이라 들었다.
‘대가는?’
‘물어 오면 그 신촌점 자리부터 맡아서 해 보고, 수완이 검증되면 나머지 할인점 자리도 넘겨받게 될 거다.’
‘아하?’
재철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했다. 뺨이 훌쭉해지도록 담배를 빨아들였다. 호진은 눈에서 빛을 내며 몸을 일으켰다.
사람 마음이 참 간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모를 당할 때는 상종도 않으리라, 도려내고 잊었다 생각했건만 바늘 끝 같은 기회가 생기자마자 바로 다음 행보를 헤아리고 있다. 재철이 합리적이고 공평한 사람이라는 것도 운이라면 운이었다. 호진은 한참 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