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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6화
3. 청죽, 이호진 (3)
“대체, 대체 날 어떻게 보고 그따위 말을 합니까? 누가 멀쩡한 차 팔라고 했습니까?”
“……예?”
“다른 차로 바꾸면 가만 안 둡니다! 해고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해고한다고 했습니다! 월급 한 푼 안 주고 그냥 자른다고!”
아하? 호진의 눈이 커졌다. 이런, 이런! 사장이 저런 사람이었나? 아하, 하하하! 호진의 입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제가 희마트에 처음 입사했을 때 말입니다. ……무얼 믿고 그렇게 단번에 결정하신 겁니까?”
의외의 질문에도 연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덤덤하고 약간 느려진 목소리로 답했다.
“더웠어, 그래요, 더웠어요. 기억합니까?”
“…….”
“며칠 동안 사무실을 재배치하고 정리를 하고 있었어요. 머리가 곤두설 만큼 더웠는데 에어컨은 아직 작동되지 않았고. 그런데 당신을 보니,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덩치 큰 사내는 회상하며 큼직한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속눈썹이 가만가만 흔들렸다.
“대나무밭에 온 것 같았어요.”
“……네?”
“푸르고 물기 많은 청죽이 한 대 서 있었습니다. 감히 손대지 못할 만큼 푸르고 정갈하고 시원했어요.”
호진은 말을 멈추었다. 연희는 그와의 첫 번째 기억을 순결하다 할 정도로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었다.
“시원해서 좋았습니다. 대나무밭에서 바람을 맞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아니, 아니 그냥 좋았어요. ……좋았어요.”
대나무란 그리 안심할 만한 나무가 아닌 것을. 스스로를 세우는 고집에만 골몰하여, 아무것도 깃들지 못하게 하는 나무. 단 한 번의 칼질로도 세상에서 가장 흉포한 무기가 될 수 있는 나무. 텅 빈 배 속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차디찬 한기만 숨기고 있는 그런 나무. 그 한기를 시원하다고 느낀 것입니까.
“시원해서 좋았습니다. 대나무밭에서 바람을 맞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좋았어요.”
고장 나서 몇 번이고 튀어 오르는 LP 레코드처럼, 덩치 큰 사내는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
호진은 그날 저녁, 영국에서 자신을 찾아온 사내에게 작별을 고했다. 급작스럽긴 했지만,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은 시점부터 별리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연인이라 불러야 할지, 필요에 따른 섹스 파트너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상대였으니 작별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한국이라는 나라에 발을 디딘 케빈은 호진을 보자마자 열렬히 끌어안기부터 했다.
“허니, 마이 스윗 하트,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얼마나 힘들었어? 장례는 잘 마쳤고?”
호진의 이마가 잠시 구겨졌다. 이거 곤란한걸. 길게 관계를 잇자 하는 것은 달갑잖은데.
하지만 호진은 이내 미소를 되돌렸다. 케빈은 파트너 편력이 화려했으며, 만남과 헤어짐에 별 미련이 없던 사내였다. 게다가 대대로 작위를 가진 영국 토박이에, 어미는 방계이긴 해도 윈저 가문 사람이었다. 함부로 모국을 떠나 동양의 낯선 나라에 뿌리내리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귀국이 늦어 걱정했다며 얼굴을 부비던 벽안의 사내는 난데없는 이별 통보에 눈과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는 호진에게 몇 차례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하더니, 손을 들어 몇 차례 따귀를 올려붙였다. 호진은 퉁퉁 부은 뺨을 문지른 후, 눈물범벅이 된 사내에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조심해서 가, 케빈.”
몇 년간 살을 맞대며 지냈던 귀족 사내와의 이별은 어미의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건조했다. 눈자위에 물기가 많은 사내는 이별을 위해 그 물기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고, 다른 이의 눈물만 익숙하게 보아 왔던 부박한 귀공자는 짐을 막 풀어 놓은 스위트룸 화장실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얼굴이 뒤덮이도록 눈물을 쏟았다.
호진은 케빈을 위로하지도, 눈물을 닦아 주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액체를 더럽다 여겼고, 그중 가장 더럽고 가증한 것이 눈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호진은 울고 있는 사내를 그대로 놓아두고 몸을 돌렸다.
4. 재규어 인 더 정글 Jaguar in the Jungle (1)
“얼굴, 어디서 다치신 겁니까, 도련님?”
케빈에게 얻어맞은 뺨이 의외로 부은 모양이었다. 바로 얼음찜질을 하면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는데, 먼저 이 사내에게 보이기 싫은 꼴을 들켜버렸다. 호진은 수건을 꺼내 붉어진 뺨을 문질렀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K마트 대표이사 비서실의 강무영 실장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이라 통상업무를 대략 파악해 두어야 했는데, 비서실 기본 업무에 대해 물어볼 만한 사람으로는 강 실장 이상의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연희유통 사무실엔 선임자도, 인수인계해 줄 사람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키가 크고 바짝 마른 비서실장은 백발이 수다해진 것치고는 여전히 등뼈가 꼿꼿했다. 그는 젊었을 때나, 나이 먹었을 때나 지시하면 소리 없이, 번개같이 움직이곤 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강 실장. 좀 부딪혀서 부은 것뿐이니.”
그 말 한마디에 강무영 실장은 아무런 내색 없이 바로 화제를 돌렸다.
“좀 늦으셨군요. 대표이사님께서 도련님을 찾으시는데 지금이라도 본가로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녁 안 하셨으면 식사도 좀 하시고.”
“만나고 싶으면 형에게 직접 오라고 해요. 피곤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그래도 의논하실 내용이 꽤 있을 텐데 오늘 한 번만 들르시지요, 도련님.”
형이 있는 본가나, 호진의 집이나 모두 방배동 함지박 사거리를 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척에 집이 있다 해도 내왕이 잦을 이유는 없었다. 아, 하긴. 오늘은 보고할 내용이 있긴 하지.
호진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 재킷을 던져 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벗어 둔 겉옷의 어깨에는 하얀 가루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 실장이 소리 없이 따라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신촌 그랜디스, 아니 연희유통에 오늘 입사 결정됐습니다. 내일부터 바로 출근합니다. 밑에 직원 하나 없는 웃기는 비서실장입니다만.”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해내실 거라 믿었습니다.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살아 계실 때 막내 도련님에 대한 기대가 몹시 크셨습니다.”
비서실장은 고개를 꾸벅 수그렸다. 호진은 드러내고 냉소했다.
“늙은 승냥이가? 아하, 실수. 존경하는 아버님께서요? 겨우 그 쥐딱지만 한 회사에 들어간 것 가지고 말입니까? 하하, 강 실장님도 나이 드시니 좋네요. 백발도 멋지시고, 이렇게 농담도 잘하시고.”
나이 든 비서실장의 얼굴에 의례적인 미소가 나타났다. 그의 미소는 호진보다는 크고 선명했으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호진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리도 기대가 커서 나를 끝까지 입적시키지 않고 뒈지셨단 말이죠.”
“그거야 제니 리의 실수 때문에 노여워서 그러셨던 거지, 도련님을 홀대하신 건 아닙니다.”
호진의 어미, 반반하고 물기 많았던 전직 간호조무사는 남자 없이는 살지 못했다. 호진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유전자 검사를 받게 하는 수모를 겪게 한 것도 모자라, 아들의 승마 선생과 정분이 나서 도망질을 쳤다가 잡혀 오기까지 했다. 호진에 대한 기대는 그의 어미에 대한 분노로 덮여 버렸다. 호진은 끝까지 구씨 성을 받을 수 없었다.
호진은 강 실장의 응대에 차게 웃었다. 강 실장은 매사 자로 잰 듯 깍듯하고 일이나 언사에 실수가 없었지만, 호진의 어미를 작은 사모님이라 불러 준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제니 리의 실수라. 호진은 그 안에 든 비웃음과 무시의 뉘앙스를 잘 잡아냈다. 건방진 놈.
“실수는 무슨. 애초에 늙은 승냥이가 화냥기 있는 암컷을 후렸다 팽개친 게 사단이죠. 관리를 잘하든가, 놔주든가 했어야지. 여자 문제 전담하다 그 자리까지 올라가셨으니 실장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뭐 영감께서 흘레에 워낙 바쁘셔서 귀도 대가리도 먹통이었겠지만 그래도 월급 많이 받으시면서 그 값은 하셨어야죠.”
뒷덜미를 콱 물렸군. 모욕을 당한 강 실장은 눈가를 실룩이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발톱을 세워 살짝 긁으면, 저 우아한 육식 짐승은 반드시 이를 박았다.
망자가 된 전 K마트 회장 구형선이 아들을 제대로 보았던 건 맞다. 저 냉혹하고 품위 있는 짐승은…….
***
‘저건 재규어야.’
이튼스쿨 앞에서 열네 살 소년을 처음 만나 본 늙은 아비는 흡족해하며 곁의 비서에게 속을 흘렸다.
‘사뿐사뿐 소리도 내지 않고 다니다가, 뒤에서 단번에 목덜미를 잡아 뜯지. 보면 알아.’
아직 키가 크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서 있는 태는 기가 막히게 고혹적이었다. 하지만 늙은 아비의 마음에 든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미 닮아 반반한 태도 봐 줄 만하지만, 미동도 없는 싸느란 저 눈깔 좀 봐. 좋지 않나? 좋아, 아주 좋아.’
필요한 것을 위해 가진 것을 버리는 일은 소년에게 익숙한 듯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아비가 한국으로 데려가겠노라 했을 때도 소년은 무감한 어조로 단도직입했다.
‘제가 얻게 될 것과 잃게 될 것이 무엇입니까?’
얻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K마트, 잃어야 할 것은 어미를 비롯한 영국에서의 익숙한 삶. 형선 역시 거래 내역을 읊듯 간결하게 답했다.
생각에 잠긴 소년의 수그린 고개와 목의 선, 어깨의 흐름이 미끈하고 수려했다. 남자답지 않게 희고 습한 피부와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기억에 남았다. 이튼스쿨의 교복인 연미복의 긴 꼬리가 두어 번 펄럭였다. 호진은 고개를 들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무심하게 아비를 응시했다.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방배동 본가는 작은 정글이었다. 형선은 능력 있는 놈 하나만 낙점해 K마트를 넘기겠다고 공언해 둔 상태였다. 구형선의 본처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비서실 직원 강무영은 늙은 승냥이가 닥치는 대로 후린 여자들의 씨 중 ‘쓸 만해 보이는’ 것들을 낙점해 승냥이에게 추천했고 그들이 방배동 본가에 들었다. 조금이라도 무른 놈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고, 공격을 대갚는 대신 성인군자 흉내라도 냈다가는 그대로 팔다리가 뜯겨 나가는 곳이었다. 살기를 뿜는 경쟁자들은 호진까지 전부 여섯이었다.
제니 리의 스캔들로 인해 호진에 대한 처우는 강파르게 곤두박질했다. 배다른 형제들은 쾌재를 불렀다. 이런저런 험담이 아비의 귀에 폭포처럼 쏟아졌다. 감정이 마른 대신 계산이 빨랐던 소년은 일단 내색 없이 참았다. 소년은 인내를 무기로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집에서 기르는 셰퍼드보다 못한 상태로 열여덟 살까지 아비의 집에 얹혀 있던 호진은, 큰형 재철이 K마트를 맡게 될 거라는 말을 무영을 통해 듣게 되었다. 호진은 한국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무영 앞에서 드러내고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 헛고생을 시켰단 말이지? 그동안 똥개 훈련시켰나. 능지육시를 할 노인 같으니.’
‘도련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 인간이 내게 한 짓보다 심합니까? 그 인간은 나한테 약속한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영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불가하다 하셨습니다. 허락 없이는 출국이 불가능하실 겁니다.’
승냥이는 아무리 배가 불러도 잡아 온 짐승을 고이 보내 주는 법이 없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죽어 썩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왜, 내가 못 갈 것 같아서? 내가 간다고 하면 가는 겁니다.’
이를 갈던 열여덟 살 소년의 눈에서 인광이 튀었다. 무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호진이 학교 후배를 성폭행했다는 소식이 방배동에 급히 전해진 것은 일주일 후였다. 그것도 동성 후배였다. 여자 문제에는 한없이 관대하던 늙은 승냥이는 소식을 듣자마자 들고 있던 술잔을 놓쳤다. 무영은 입을 벌린 채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비에게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소년이 먼저 아비를 쳐 낸 것이었다.
***
“이창섭 씨, 월간 여성이라는 잡지사에 수습기자로 취직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근황을 알고 싶으시면…….”
“이창섭이 누굽니까?”
호진이 눈썹을 찡그리자 강 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느냐,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냐 따져 묻는 듯한 눈빛이다. 아아. 문득 떠오른 듯 호진이 빙긋 웃었다.
“그놈 이름이 창섭이었던가? 지금 알았습니다. 원래 이름도 모르는 애였어요.”
“그래도 첫정을 준 사람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첫정? 그놈이?”
“그전까지는 동정이신 줄 알았습니다. 애초에 동성애자도 아니셨고.”
하하하. 호진은 여전히 매끄럽게 웃으며 백발이 두둑하게 오른 사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표정은 나른했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성에로 더께가 져 있었다.
“강 실장님. 내 속에 들어가 봤어요? 그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용감하게 설레발을 치시면 제가 막 감동하잖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성질이 좀 지랄 같아서, 손발이 멋대로 움직이면 내 손이라도 도끼로 찍어 낼 거 같거든. 나 같은 사람은 파킨슨 병 같은 거 걸리면 참 곤란할 거예요. 그렇죠?”
찍어 낼 권한 따위 없는 자의 말이었으나 무영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고양잇과 맹수는 공격과 방어에 관한 한 헛된 동작이 없다. 극도로 예민하게 방어하거나 움직임이 신중해지는 것은, 공격 전조 증세 중 하나였다. 더 나갔다가는 제대로 물릴 수도 있다. 무영은 한 걸음 물러섬이 현명하다 판단했다.
***
물론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방법은 아니었다. 처음엔 공부를 집어치우고 망나니짓을 해서 아비에게 내쳐지는 방법을 써 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튼과 옥스브리지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적절한 방법도 아니었거니와 유용하지도 않았다. 누나들은 성적이 개판이었다고 들었지만 아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놓고 난봉질을 해 볼까?
글쎄. 어른이 채 되지 못했던 호진은 그때도 실소했다. 여자에게 집적대는 일에는 구형선 자신이 가장 관대했다. 아무 여자애 하나 만나서 애를 만들거나 하는 일로는 큰 파장이 되지도 않을 거였다. 잡아서 애 없애고 무마하고 말겠지.
이 집에서, 단번에 확실하게 내쳐지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동성 섹스 쪽에 흥미가 동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영국 퍼블릭 스쿨 기숙사의 은근한 남색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대신 호로 게이 새끼, 더러운 호모 새끼 따위, 아이들이 내뱉는 욕설에 박힌 짙은 혐오감이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며 쉬쉬하고, 숨기며 살려 하는 성적 취향. 효과가 어느 정도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파장이 큰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은 확실히 갖고 있었다.
아비에 대한 존경심이나 애정 따위는 한 낱도 존재하지 않던 소년의 틀어진 독기와 반항심, 그리고 기대를 접은 데 대한 허탈감이 냉철한 이성과 얽혔다. 틀어졌는지 바로잡혔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방송반 남자 후배와 성관계를 가졌다. 첫 번째 섹스라 특별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도 아니고 그리 만족할 만한 섹스도 아니었지만, 목적한 것을 이루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창섭? 10년이 지난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후배의 아비가 메인 일간지 사회부 기자라는 것과 놈이 속 무른 마마보이라는 것, 그리고 그 후배가 자신의 주위를 배회하며 어떻게든 관심을 받아보려고 발버둥했다는 것 말고는 그 녀석을 유혹할 만한 이유 따윈 없었다. 귀염상도 아니고 눈치 없는데다 비둔하기까지 했다.
유혹이란 것을 한 번도 해 보지는 않았지만 잘될 것이라는 느낌은 있었다. 호진은 자신의 눈에 물기가 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눈동자의 물기는 색(色)이라고도 했다. 길고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는 잘 벼려진 날붙이와 같은 차가움을 갖고 있었다. 냉(冷)과 색은 기묘했지만 제법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했을 때 얼굴이 벌게지던 후배는 섹스 한번 해 보지 않겠냐고 했을 때, 거부 의사를 말하지 않았다.
남자를 상대로 발기가 될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무난했다. 눈을 감은 채 비밀리에 돌아다니던 울긋불긋한 여자 사진들을 떠올렸다.
육체는 감정과 상관없이 반응했고, 콘돔을 쓰긴 했지만 사정할 때까지 더럽다는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살집이 푸짐한 엉덩이는 탄성이 없었고, 체취와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구멍을 더듬어 몸을 밀어 넣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호진은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짓씹었다.
사정은 자위할 때보다도 이르게 찾아왔다. 여자애들과 관계를 가지면 느낌이 좀 달랐을까? 그는 방송실 기자재가 쌓여 있는 어두운 창고에서 일을 끝내고 헐떡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후배는 바둑판 무늬 팬티에 다리를 끼워 넣다 말고 주저앉아 꺽꺽 울었다. 호진은 옷을 털고 말없이 나왔다. 우는 후배의 얼굴 위로 창고의 오래된 먼지가 후득 내려앉았다.
후배는 기대했던 대로 그날 부모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알렸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후배는 나중에야 선배가 억지로 강제한 것은 아니었다고 실토했다.
‘날 그렇게 혼자 팽개쳐 놓고 나가지만 않았어도 난 엄마에게 말도 안 했을 거고, 선배를 끝까지 좋아했을 거예요!’
호진은 후일 영국에서 이름도 모르는 후배의 말을 전해 듣고 차게 웃었다.
후배의 아버지는 호진이 재벌가 막내아들인 줄 알고 있었고, 돈의 위세를 믿고 자신의 아들에게 짐승 같은 짓을 했다며 격분했다. 그는 구형선을 몰락시킬 각오를 하고 사생결단으로 들러붙었다.
일이 그 지경으로 치닫는 동안 호진은 잠잠히 앉아 기다렸다. 폭풍이 일면 잠시 시달리면 그만이다. 호진은 모든 일이 어떤 기록도 남지 않고 무마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친 기색으로 돌아온 무영에게 무사히 무마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후에야 늙은 아비는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구나. 네 몫은 없다. 너처럼 더러운 놈은 내 핏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꺼져! 다신 내 눈앞에 얼씬대지 마라.’
늙은 승냥이는 몽둥이를 한 시간 동안 휘둘렀다.
‘미친놈, 비역질은 짐승도 하지 않는다. 어디 할 짓이 없어 그런 더러운 짓을 해? 계집을 후렸으면 차라리 깔끔하게 지나갔을 게다. 내 핏줄에 너같이 더러운 새끼는 없다. 너는 죽을 때까지 구씨 성을 못 받을 줄 알아라.’
호진은 몸을 둥글게 하고 매를 견디며 이를 물었다. 하, 아하하. 어차피 입적시킬 생각도 없었으면서 유세는. 비명 한 자락 내지르지 않는 막내아들에게 진저리를 치던 늙은 아비는 지쳐서야 몽둥이를 집어 던졌다.
누나와 형들은 구더기를 보는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거실에 걸레처럼 늘어져 있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큰형 재철이 잠깐 다가왔다가 소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잠자코 뒤로 물러섰다.
비역질이란 그가 생각한 이상으로 내쳐지는 효과가 확실했다. 지나치게 확실했다. 다음날부터 누나들은 호진의 몸이 닿으면 손을 털었고, 형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정이라도 한 듯 호진이 저지른 사고에 대해 함구했다. 계획대로 된 것도 같지만 좀 멀리 나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목적한 바는 이루어졌다. 그는 아비에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아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후에 아비는 무언가를 뒤늦게 짚은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호진에게 무언가 물을 듯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시커멓게 멍든 얼굴과 얼룩덜룩한 팔다리를 일부러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아들에게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선은 막내아들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다.
3. 청죽, 이호진 (3)
“대체, 대체 날 어떻게 보고 그따위 말을 합니까? 누가 멀쩡한 차 팔라고 했습니까?”
“……예?”
“다른 차로 바꾸면 가만 안 둡니다! 해고합니다! 아시겠습니까? 해고한다고 했습니다! 월급 한 푼 안 주고 그냥 자른다고!”
아하? 호진의 눈이 커졌다. 이런, 이런! 사장이 저런 사람이었나? 아하, 하하하! 호진의 입에서 처음으로 제대로 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가 희마트에 처음 입사했을 때 말입니다. ……무얼 믿고 그렇게 단번에 결정하신 겁니까?”
의외의 질문에도 연희는 당황하지 않았다. 덤덤하고 약간 느려진 목소리로 답했다.
“더웠어, 그래요, 더웠어요. 기억합니까?”
“…….”
“며칠 동안 사무실을 재배치하고 정리를 하고 있었어요. 머리가 곤두설 만큼 더웠는데 에어컨은 아직 작동되지 않았고. 그런데 당신을 보니, 갑자기 선선한 바람이 부는 것 같았습니다.”
덩치 큰 사내는 회상하며 큼직한 눈동자를 위로 향했다. 속눈썹이 가만가만 흔들렸다.
“대나무밭에 온 것 같았어요.”
“……네?”
“푸르고 물기 많은 청죽이 한 대 서 있었습니다. 감히 손대지 못할 만큼 푸르고 정갈하고 시원했어요.”
호진은 말을 멈추었다. 연희는 그와의 첫 번째 기억을 순결하다 할 정도로 아름답게 간직하고 있었다.
“시원해서 좋았습니다. 대나무밭에서 바람을 맞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아니, 아니 그냥 좋았어요. ……좋았어요.”
대나무란 그리 안심할 만한 나무가 아닌 것을. 스스로를 세우는 고집에만 골몰하여, 아무것도 깃들지 못하게 하는 나무. 단 한 번의 칼질로도 세상에서 가장 흉포한 무기가 될 수 있는 나무. 텅 빈 배 속에 아무것도 허락하지 않고, 오로지 차디찬 한기만 숨기고 있는 그런 나무. 그 한기를 시원하다고 느낀 것입니까.
“시원해서 좋았습니다. 대나무밭에서 바람을 맞는 것 같아서 좋았어요. ……좋았어요.”
고장 나서 몇 번이고 튀어 오르는 LP 레코드처럼, 덩치 큰 사내는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호진은 그날 저녁, 영국에서 자신을 찾아온 사내에게 작별을 고했다. 급작스럽긴 했지만, 영국으로 돌아갈 생각을 접은 시점부터 별리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었다.
연인이라 불러야 할지, 필요에 따른 섹스 파트너라 불러야 할지 애매한 상대였으니 작별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생전 처음 한국이라는 나라에 발을 디딘 케빈은 호진을 보자마자 열렬히 끌어안기부터 했다.
“허니, 마이 스윗 하트, 보고 싶었어, 정말 보고 싶었어. 얼마나 힘들었어? 장례는 잘 마쳤고?”
호진의 이마가 잠시 구겨졌다. 이거 곤란한걸. 길게 관계를 잇자 하는 것은 달갑잖은데.
하지만 호진은 이내 미소를 되돌렸다. 케빈은 파트너 편력이 화려했으며, 만남과 헤어짐에 별 미련이 없던 사내였다. 게다가 대대로 작위를 가진 영국 토박이에, 어미는 방계이긴 해도 윈저 가문 사람이었다. 함부로 모국을 떠나 동양의 낯선 나라에 뿌리내리겠다는 헛소리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귀국이 늦어 걱정했다며 얼굴을 부비던 벽안의 사내는 난데없는 이별 통보에 눈과 입을 커다랗게 벌렸다. 그는 호진에게 몇 차례 같은 말을 되풀이하게 하더니, 손을 들어 몇 차례 따귀를 올려붙였다. 호진은 퉁퉁 부은 뺨을 문지른 후, 눈물범벅이 된 사내에게 입을 맞추어 주었다.
“조심해서 가, 케빈.”
몇 년간 살을 맞대며 지냈던 귀족 사내와의 이별은 어미의 장례식과 마찬가지로 건조했다. 눈자위에 물기가 많은 사내는 이별을 위해 그 물기를 사용하는 일이 없었고, 다른 이의 눈물만 익숙하게 보아 왔던 부박한 귀공자는 짐을 막 풀어 놓은 스위트룸 화장실 앞에서 생전 처음으로 얼굴이 뒤덮이도록 눈물을 쏟았다.
호진은 케빈을 위로하지도, 눈물을 닦아 주지도 않았다. 그는 사람의 몸에서 나오는 모든 액체를 더럽다 여겼고, 그중 가장 더럽고 가증한 것이 눈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호진은 울고 있는 사내를 그대로 놓아두고 몸을 돌렸다.
4. 재규어 인 더 정글 Jaguar in the Jungle (1)
“얼굴, 어디서 다치신 겁니까, 도련님?”
케빈에게 얻어맞은 뺨이 의외로 부은 모양이었다. 바로 얼음찜질을 하면 가라앉을 거라 생각했는데, 먼저 이 사내에게 보이기 싫은 꼴을 들켜버렸다. 호진은 수건을 꺼내 붉어진 뺨을 문질렀다.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은 K마트 대표이사 비서실의 강무영 실장이었다. 당장 내일부터 출근이라 통상업무를 대략 파악해 두어야 했는데, 비서실 기본 업무에 대해 물어볼 만한 사람으로는 강 실장 이상의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았다. 연희유통 사무실엔 선임자도, 인수인계해 줄 사람도 전혀 없었던 것이다.
키가 크고 바짝 마른 비서실장은 백발이 수다해진 것치고는 여전히 등뼈가 꼿꼿했다. 그는 젊었을 때나, 나이 먹었을 때나 지시하면 소리 없이, 번개같이 움직이곤 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강 실장. 좀 부딪혀서 부은 것뿐이니.”
그 말 한마디에 강무영 실장은 아무런 내색 없이 바로 화제를 돌렸다.
“좀 늦으셨군요. 대표이사님께서 도련님을 찾으시는데 지금이라도 본가로 가시는 건 어떻겠습니까? 저녁 안 하셨으면 식사도 좀 하시고.”
“만나고 싶으면 형에게 직접 오라고 해요. 피곤한 사람 오라 가라 하지 말고.”
“그래도 의논하실 내용이 꽤 있을 텐데 오늘 한 번만 들르시지요, 도련님.”
형이 있는 본가나, 호진의 집이나 모두 방배동 함지박 사거리를 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척에 집이 있다 해도 내왕이 잦을 이유는 없었다. 아, 하긴. 오늘은 보고할 내용이 있긴 하지.
호진은 말없이 안으로 들어가 재킷을 던져 놓고 소파에 등을 기댔다. 벗어 둔 겉옷의 어깨에는 하얀 가루가 아직도 남아 있었다. 강 실장이 소리 없이 따라와 소파에 마주 앉았다.
“신촌 그랜디스, 아니 연희유통에 오늘 입사 결정됐습니다. 내일부터 바로 출근합니다. 밑에 직원 하나 없는 웃기는 비서실장입니다만.”
“축하드립니다, 도련님. 해내실 거라 믿었습니다. 돌아가신 회장님께서 살아 계실 때 막내 도련님에 대한 기대가 몹시 크셨습니다.”
비서실장은 고개를 꾸벅 수그렸다. 호진은 드러내고 냉소했다.
“늙은 승냥이가? 아하, 실수. 존경하는 아버님께서요? 겨우 그 쥐딱지만 한 회사에 들어간 것 가지고 말입니까? 하하, 강 실장님도 나이 드시니 좋네요. 백발도 멋지시고, 이렇게 농담도 잘하시고.”
나이 든 비서실장의 얼굴에 의례적인 미소가 나타났다. 그의 미소는 호진보다는 크고 선명했으나, 감정을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호진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래, 그리도 기대가 커서 나를 끝까지 입적시키지 않고 뒈지셨단 말이죠.”
“그거야 제니 리의 실수 때문에 노여워서 그러셨던 거지, 도련님을 홀대하신 건 아닙니다.”
호진의 어미, 반반하고 물기 많았던 전직 간호조무사는 남자 없이는 살지 못했다. 호진이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영문도 모른 채 유전자 검사를 받게 하는 수모를 겪게 한 것도 모자라, 아들의 승마 선생과 정분이 나서 도망질을 쳤다가 잡혀 오기까지 했다. 호진에 대한 기대는 그의 어미에 대한 분노로 덮여 버렸다. 호진은 끝까지 구씨 성을 받을 수 없었다.
호진은 강 실장의 응대에 차게 웃었다. 강 실장은 매사 자로 잰 듯 깍듯하고 일이나 언사에 실수가 없었지만, 호진의 어미를 작은 사모님이라 불러 준 적은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제니 리의 실수라. 호진은 그 안에 든 비웃음과 무시의 뉘앙스를 잘 잡아냈다. 건방진 놈.
“실수는 무슨. 애초에 늙은 승냥이가 화냥기 있는 암컷을 후렸다 팽개친 게 사단이죠. 관리를 잘하든가, 놔주든가 했어야지. 여자 문제 전담하다 그 자리까지 올라가셨으니 실장님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뭐 영감께서 흘레에 워낙 바쁘셔서 귀도 대가리도 먹통이었겠지만 그래도 월급 많이 받으시면서 그 값은 하셨어야죠.”
뒷덜미를 콱 물렸군. 모욕을 당한 강 실장은 눈가를 실룩이다 입을 다물었다. 자신이 발톱을 세워 살짝 긁으면, 저 우아한 육식 짐승은 반드시 이를 박았다.
망자가 된 전 K마트 회장 구형선이 아들을 제대로 보았던 건 맞다. 저 냉혹하고 품위 있는 짐승은…….
‘저건 재규어야.’
이튼스쿨 앞에서 열네 살 소년을 처음 만나 본 늙은 아비는 흡족해하며 곁의 비서에게 속을 흘렸다.
‘사뿐사뿐 소리도 내지 않고 다니다가, 뒤에서 단번에 목덜미를 잡아 뜯지. 보면 알아.’
아직 키가 크지 않은 소년이었지만 서 있는 태는 기가 막히게 고혹적이었다. 하지만 늙은 아비의 마음에 든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어미 닮아 반반한 태도 봐 줄 만하지만, 미동도 없는 싸느란 저 눈깔 좀 봐. 좋지 않나? 좋아, 아주 좋아.’
필요한 것을 위해 가진 것을 버리는 일은 소년에게 익숙한 듯 보였다. 생전 처음 보는 아비가 한국으로 데려가겠노라 했을 때도 소년은 무감한 어조로 단도직입했다.
‘제가 얻게 될 것과 잃게 될 것이 무엇입니까?’
얻게 될 가능성이 있는 것은 K마트, 잃어야 할 것은 어미를 비롯한 영국에서의 익숙한 삶. 형선 역시 거래 내역을 읊듯 간결하게 답했다.
생각에 잠긴 소년의 수그린 고개와 목의 선, 어깨의 흐름이 미끈하고 수려했다. 남자답지 않게 희고 습한 피부와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이 기억에 남았다. 이튼스쿨의 교복인 연미복의 긴 꼬리가 두어 번 펄럭였다. 호진은 고개를 들었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무심하게 아비를 응시했다.
‘한국으로 가겠습니다.’
방배동 본가는 작은 정글이었다. 형선은 능력 있는 놈 하나만 낙점해 K마트를 넘기겠다고 공언해 둔 상태였다. 구형선의 본처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비서실 직원 강무영은 늙은 승냥이가 닥치는 대로 후린 여자들의 씨 중 ‘쓸 만해 보이는’ 것들을 낙점해 승냥이에게 추천했고 그들이 방배동 본가에 들었다. 조금이라도 무른 놈들은 살아남을 수 없었고, 공격을 대갚는 대신 성인군자 흉내라도 냈다가는 그대로 팔다리가 뜯겨 나가는 곳이었다. 살기를 뿜는 경쟁자들은 호진까지 전부 여섯이었다.
제니 리의 스캔들로 인해 호진에 대한 처우는 강파르게 곤두박질했다. 배다른 형제들은 쾌재를 불렀다. 이런저런 험담이 아비의 귀에 폭포처럼 쏟아졌다. 감정이 마른 대신 계산이 빨랐던 소년은 일단 내색 없이 참았다. 소년은 인내를 무기로 원하는 것을 얻는 데 익숙했다.
하지만 집에서 기르는 셰퍼드보다 못한 상태로 열여덟 살까지 아비의 집에 얹혀 있던 호진은, 큰형 재철이 K마트를 맡게 될 거라는 말을 무영을 통해 듣게 되었다. 호진은 한국에 들어온 후 처음으로 무영 앞에서 드러내고 이를 갈았다.
‘지금까지 헛고생을 시켰단 말이지? 그동안 똥개 훈련시켰나. 능지육시를 할 노인 같으니.’
‘도련님! 말씀이 심하십니다.’
‘그 인간이 내게 한 짓보다 심합니까? 그 인간은 나한테 약속한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영국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회장님께서 불가하다 하셨습니다. 허락 없이는 출국이 불가능하실 겁니다.’
승냥이는 아무리 배가 불러도 잡아 온 짐승을 고이 보내 주는 법이 없다. 반항하지 못하도록, 죽어 썩을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왜, 내가 못 갈 것 같아서? 내가 간다고 하면 가는 겁니다.’
이를 갈던 열여덟 살 소년의 눈에서 인광이 튀었다. 무영은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했다.
호진이 학교 후배를 성폭행했다는 소식이 방배동에 급히 전해진 것은 일주일 후였다. 그것도 동성 후배였다. 여자 문제에는 한없이 관대하던 늙은 승냥이는 소식을 듣자마자 들고 있던 술잔을 놓쳤다. 무영은 입을 벌린 채 소리 없이 입술만 달싹거렸다.
아비에게 얻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던 소년이 먼저 아비를 쳐 낸 것이었다.
“이창섭 씨, 월간 여성이라는 잡지사에 수습기자로 취직했다고 들었습니다. 혹시 근황을 알고 싶으시면…….”
“이창섭이 누굽니까?”
호진이 눈썹을 찡그리자 강 실장은 입을 다물었다. 정말 기억하지 못하느냐, 아님 모르는 척하는 거냐 따져 묻는 듯한 눈빛이다. 아아. 문득 떠오른 듯 호진이 빙긋 웃었다.
“그놈 이름이 창섭이었던가? 지금 알았습니다. 원래 이름도 모르는 애였어요.”
“그래도 첫정을 준 사람 이름 정도는 기억하고 계실 줄 알았습니다.”
“첫정? 그놈이?”
“그전까지는 동정이신 줄 알았습니다. 애초에 동성애자도 아니셨고.”
하하하. 호진은 여전히 매끄럽게 웃으며 백발이 두둑하게 오른 사내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표정은 나른했지만 흘러나온 목소리는 성에로 더께가 져 있었다.
“강 실장님. 내 속에 들어가 봤어요? 그것도 아니면서 이렇게 용감하게 설레발을 치시면 제가 막 감동하잖아요.”
“죄송합니다.”
“제가 성질이 좀 지랄 같아서, 손발이 멋대로 움직이면 내 손이라도 도끼로 찍어 낼 거 같거든. 나 같은 사람은 파킨슨 병 같은 거 걸리면 참 곤란할 거예요. 그렇죠?”
찍어 낼 권한 따위 없는 자의 말이었으나 무영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고양잇과 맹수는 공격과 방어에 관한 한 헛된 동작이 없다. 극도로 예민하게 방어하거나 움직임이 신중해지는 것은, 공격 전조 증세 중 하나였다. 더 나갔다가는 제대로 물릴 수도 있다. 무영은 한 걸음 물러섬이 현명하다 판단했다.
물론 처음부터 염두에 두었던 방법은 아니었다. 처음엔 공부를 집어치우고 망나니짓을 해서 아비에게 내쳐지는 방법을 써 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튼과 옥스브리지 진학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적절한 방법도 아니었거니와 유용하지도 않았다. 누나들은 성적이 개판이었다고 들었지만 아비는 신경 쓰지 않았다.
대놓고 난봉질을 해 볼까?
글쎄. 어른이 채 되지 못했던 호진은 그때도 실소했다. 여자에게 집적대는 일에는 구형선 자신이 가장 관대했다. 아무 여자애 하나 만나서 애를 만들거나 하는 일로는 큰 파장이 되지도 않을 거였다. 잡아서 애 없애고 무마하고 말겠지.
이 집에서, 단번에 확실하게 내쳐지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
동성 섹스 쪽에 흥미가 동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영국 퍼블릭 스쿨 기숙사의 은근한 남색 분위기에 영향을 받은 것도 아니었다. 대신 호로 게이 새끼, 더러운 호모 새끼 따위, 아이들이 내뱉는 욕설에 박힌 짙은 혐오감이 그의 마음을 끌어당겼다.
사람들이 진저리를 치며 쉬쉬하고, 숨기며 살려 하는 성적 취향. 효과가 어느 정도 갈지는 모르겠지만 그것이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것보다 훨씬 파장이 큰 일이 될 거라는 생각은 확실히 갖고 있었다.
아비에 대한 존경심이나 애정 따위는 한 낱도 존재하지 않던 소년의 틀어진 독기와 반항심, 그리고 기대를 접은 데 대한 허탈감이 냉철한 이성과 얽혔다. 틀어졌는지 바로잡혔는지 알 수 없는 일이 의도대로 진행되었다.
방송반 남자 후배와 성관계를 가졌다. 첫 번째 섹스라 특별하다 생각하지도 않았다. 좋아하는 여자도 아니고 그리 만족할 만한 섹스도 아니었지만, 목적한 것을 이루었으니 아쉬울 것도 없었다.
이름이 뭐였더라. 이창섭? 10년이 지난 오늘에야 처음 알았다. 후배의 아비가 메인 일간지 사회부 기자라는 것과 놈이 속 무른 마마보이라는 것, 그리고 그 후배가 자신의 주위를 배회하며 어떻게든 관심을 받아보려고 발버둥했다는 것 말고는 그 녀석을 유혹할 만한 이유 따윈 없었다. 귀염상도 아니고 눈치 없는데다 비둔하기까지 했다.
유혹이란 것을 한 번도 해 보지는 않았지만 잘될 것이라는 느낌은 있었다. 호진은 자신의 눈에 물기가 짙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눈동자의 물기는 색(色)이라고도 했다. 길고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는 잘 벼려진 날붙이와 같은 차가움을 갖고 있었다. 냉(冷)과 색은 기묘했지만 제법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네가 나 좋아하는 거 알아, 했을 때 얼굴이 벌게지던 후배는 섹스 한번 해 보지 않겠냐고 했을 때, 거부 의사를 말하지 않았다.
남자를 상대로 발기가 될까 걱정하기도 했지만 의외로 무난했다. 눈을 감은 채 비밀리에 돌아다니던 울긋불긋한 여자 사진들을 떠올렸다.
육체는 감정과 상관없이 반응했고, 콘돔을 쓰긴 했지만 사정할 때까지 더럽다는 느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살집이 푸짐한 엉덩이는 탄성이 없었고, 체취와 역한 냄새가 진동하는 구멍을 더듬어 몸을 밀어 넣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힘들었다. 더러워, 더러워, 더러워. 호진은 아랫입술을 사정없이 짓씹었다.
사정은 자위할 때보다도 이르게 찾아왔다. 여자애들과 관계를 가지면 느낌이 좀 달랐을까? 그는 방송실 기자재가 쌓여 있는 어두운 창고에서 일을 끝내고 헐떡이며 그런 생각을 했다. 후배는 바둑판 무늬 팬티에 다리를 끼워 넣다 말고 주저앉아 꺽꺽 울었다. 호진은 옷을 털고 말없이 나왔다. 우는 후배의 얼굴 위로 창고의 오래된 먼지가 후득 내려앉았다.
후배는 기대했던 대로 그날 부모에게 성폭행당했다고 알렸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후배는 나중에야 선배가 억지로 강제한 것은 아니었다고 실토했다.
‘날 그렇게 혼자 팽개쳐 놓고 나가지만 않았어도 난 엄마에게 말도 안 했을 거고, 선배를 끝까지 좋아했을 거예요!’
호진은 후일 영국에서 이름도 모르는 후배의 말을 전해 듣고 차게 웃었다.
후배의 아버지는 호진이 재벌가 막내아들인 줄 알고 있었고, 돈의 위세를 믿고 자신의 아들에게 짐승 같은 짓을 했다며 격분했다. 그는 구형선을 몰락시킬 각오를 하고 사생결단으로 들러붙었다.
일이 그 지경으로 치닫는 동안 호진은 잠잠히 앉아 기다렸다. 폭풍이 일면 잠시 시달리면 그만이다. 호진은 모든 일이 어떤 기록도 남지 않고 무마될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지친 기색으로 돌아온 무영에게 무사히 무마되었다는 보고를 들은 후에야 늙은 아비는 몽둥이를 집어 들었다.
‘그 어미에 그 아들이구나. 네 몫은 없다. 너처럼 더러운 놈은 내 핏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곳으로 꺼져! 다신 내 눈앞에 얼씬대지 마라.’
늙은 승냥이는 몽둥이를 한 시간 동안 휘둘렀다.
‘미친놈, 비역질은 짐승도 하지 않는다. 어디 할 짓이 없어 그런 더러운 짓을 해? 계집을 후렸으면 차라리 깔끔하게 지나갔을 게다. 내 핏줄에 너같이 더러운 새끼는 없다. 너는 죽을 때까지 구씨 성을 못 받을 줄 알아라.’
호진은 몸을 둥글게 하고 매를 견디며 이를 물었다. 하, 아하하. 어차피 입적시킬 생각도 없었으면서 유세는. 비명 한 자락 내지르지 않는 막내아들에게 진저리를 치던 늙은 아비는 지쳐서야 몽둥이를 집어 던졌다.
누나와 형들은 구더기를 보는 얼굴로 지켜보기만 했다. 피투성이가 되어 거실에 걸레처럼 늘어져 있어도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큰형 재철이 잠깐 다가왔다가 소년의 웃는 얼굴을 보고 잠자코 뒤로 물러섰다.
비역질이란 그가 생각한 이상으로 내쳐지는 효과가 확실했다. 지나치게 확실했다. 다음날부터 누나들은 호진의 몸이 닿으면 손을 털었고, 형들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작정이라도 한 듯 호진이 저지른 사고에 대해 함구했다. 계획대로 된 것도 같지만 좀 멀리 나간 것도 같았다.
하지만 목적한 바는 이루어졌다. 그는 아비에게 다시 영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고, 아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후에 아비는 무언가를 뒤늦게 짚은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호진에게 무언가 물을 듯이 입술을 달싹였지만 시커멓게 멍든 얼굴과 얼룩덜룩한 팔다리를 일부러 드러내고 돌아다니는 아들에게 결국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형선은 막내아들을 다시 불러들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