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샤인 Shine 3화
2. I have a dream (1)


기형은 거제도로 내려가기 전, 열한 살 때까지 서현과 우루사 아저씨를 가끔 만났다. 엄마에게 들은 말로는 서현이 기형을 좋아한다더라 했다. 펄쩍 뛰었지만 아빠와 엄마는 재미있다는 듯 킬킬대고 웃기만 했다.
기형은 호불호가 분명한, 나름 소신 있는 어린이였고, 싫어하는 것이 얼굴에 고스란히 나타나는 성격이었다. 핑크 공주와 멸치 왕자 사이에는 태평양과 같은 간극이 있었다.
그래도 기형은 서현이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서현이 놀러 올 때는 우루사 아저씨도 함께 왔기 때문이었다. 아저씨 이름은 알고 있었지만 연희 아저씨, 연희 삼촌 하는 말은 잘 나오지 않았다. 기형이 열한 살이 될 때까지 그는 계속 우루사 아저씨였다.
서현이의 공주병은 증세가 심해 잘 낫지 않았다. 잘생긴 아빠를 전혀 닮지 않아 얼굴이 둥글고 코가 납작하고 눈이 작은, 까놓고 말해 못생긴 여자친구는 분홍색 레이스가 자글자글한 치마를 입거나 구슬 장식이 많은 머리띠를 했다. 정말 쪽팔리게 저런 옷을 자기 손으로 골랐을까 싶은 취향이었다.
저건 서현이의 취향일까 우루사 아저씨의 취향일까 궁금했지만 물어볼 순 없었다. 아저씨가 서현이를 저렇게 꾸미고 싶어 했다는 대답을 들을까 봐 겁이 났다.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닌 게, 서현이네 아빠는 옷 장사를 한다고 했고, 가게에서 여자 손님들한테 옷을 골라 주면 손님들이 아주 좋아한다고 했다. 요컨대 레이디의 취향을 잘 이해하는 아저씨인 것이다.
그래도 핑크 공주 스타일은 아닐 거야. 그럴 리는 없어. 중얼대는 기형의 등으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래, 그렇게 점잖고 멋진 아저씨가 저런 공주 옷을 고르고 그러지는 않을 거야. 기형이 아빠의 견해대로라면 남자가 여자 옷을 다루는 것 자체가 ‘꼬추가 떨어질’ 일인 것이다. 하물며 핑크라니! 핑크 공주라니!
“그래, 서현이 엄마 취향일지도 몰라!”
기형은 간신히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내고 한숨을 쉬었다. 핑크든 공주든 새침데기 레이디와의 만남은 여러모로 재수 없었지만 우루사 아저씨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참을 만했다.

서현이와 우루사 아저씨와 함께 롯데월드에 가는 날이었다. 기형은 일찍 일어났다. 일요일 아침 일찍 우루사 아저씨가 기형을 데리러 왔다. 서현의 부탁으로 며칠 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고 기형은 그동안 흥분해서 잠도 못 잘 지경이었다. 쪼그만 것들이 벌써! 기형의 아빠와 엄마는 전화를 받고 박장하며 승낙했다.
몇 주 전인가, 서현이가 아빠한테 롯데월드에 가고 싶다고 막 조른 적이 있었다. 매일 가고 싶다고 연간회원권을 사 달라고도 했다.
“난 거기서 모노레일하고, 배 타는 거 좋아해. 회전 바구니도 좋아. 키가 조금 더 크면 바이킹도 탈 거야. 넌 탈 수 있어?”
우루사 아저씨도 대답을 재촉하는 듯 기형을 빤히 쳐다보았다. 기형은 한 번도 가 보지 못했다. 머리를 긁으며 우물거렸다.
“가 보고 싶은데 아빠가 귀찮다고 안 가세요.”
아빠는 그런 곳에 가는 것이 귀찮고 힘들다고 했다. 거 빽빽이 바글대기나 하고 힘들기나 한걸. 임자나 애 데리고 갔다 오든가. 그러면 기형의 엄마는 관둬요 관둬, 하며 화를 냈고, 그때마다 아빠는 더 큰 소리로 화를 냈다. 패턴을 알고 있는 기형은 집에서 놀이공원에 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저씨는 눈을 끔벅하더니 부드럽게 웃었다.
“나중에 아저씨랑 서현이랑 같이 놀러 갈까?”
그때는 농담인 줄 알았다. 아빠 엄마가 하루 열 번도 더 뒤집는 그런 약속 같은 걸로 알았다.
기형은 현관에서 서현이의 손을 잡고 서 있는 사내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아저씨는 양복이 아닌 목이 깊게 파인 빨간 폴로셔츠와 어두운 파란색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목덜미 아래로 금색 목걸이가 늘어져 옷자락 사이에서 반짝거렸다.
나, 남자가 목걸이를 했어! 그런데도 멋지다!
기형은 현관에 서서 홀린 듯이 연희를 바라보았다. 새까맣고 커다란 눈이 부드러운 웃음을 담고 있었다.

“사람이 많아서 잃어버리기 쉬우니까, 아저씨 손 꼭 잡고 다녀야 한다.”
우루사 아저씨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뚜렷하게 들렸다. 기형은 아저씨가 자신이나 서현에게 이야기할 때는 항상 허리를 숙이거나 무릎을 접고 귓가에 대고 말을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손은 기형의 손이 다 들어갈 정도로 크고 따뜻했다. 아저씨는 손에 힘을 꾹꾹 주어 잡는 버릇이 있었다.
함께 모노레일을 타고, 풍선을 타고, 코브라 바구니를 탔다. 코브라 바구니를 함께 탄 아저씨는 커다란 손으로 가운데 핸들을 휙휙 돌렸다. 바구니는 엄청난 속도로 빙글빙글 돌았다. 서현이는 소리 지르고 울었지만 내려서는 말짱했고, 기형은 꽉꽉 참고 소리를 내지 않았지만 멀미를 했다.
기형은 늘어져서 30분 동안 업혀 다녔다. 등이 넓어서 편안했지만 이런 곳에 처음 와 보는데 멀미 따위를 해서 속상하고 미안했다. 오히려 우루사 아저씨가 엉덩이를 투덕이며 사과했다.
“아저씨가 괜히 세게 돌렸구나. 미안하다.”
“아니에요. 처음이라 그런 거예요. 그래도 재밌었어요.”
기형은 어질어질한 중에도 용케 대답했다.

“저거 곽 과장 아닌가?”
초콜릿 공장 앞 탁자에서 아이들과 아이스크림을 먹던 연희가 돌연 눈을 찡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형은 반색을 하며 뛰어오는 사람을 알아보았다. 가끔 우루사 아저씨가 회사 직원이라고 데리고 다니는 곽 과장 아저씨, 병진이 형이라고 불러 달라던 그 아저씨였다. 놀이동산과 어울리지 않게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있는 곽 과장 아저씨의 이마엔 땀이 번질번질했다.
“곽 과장? 무슨 일입니까? 나 오늘 비운다고 말했는데. 아니,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알고? 아, 그보다 이 넓은 곳에서 어떻게 찾은 겁니까?”
“아이고, 사장님 찾느라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 따님하고 롯데월드 가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유치원생들이 탈 수 있는 놀이기구 중심으로 찾으면 대충 뵐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세상에 웬 사람이 이리 많대요? 넓기는 또 환장하게 넓고. 매직 아일랜드 이 웬수 같은 건 또 뭐람. 어쨌든 사장님을 무사히 찾았으니 오늘의 땀과 눈물은 모두 잊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이렇게 헛소릴 할 때가 아닌데.”
“무슨 일입니까? 곽 과장이 예까지 직접 찾으러 올 정도면 급한 일인 것 같은데.”
“칭다오 공장에서 어제 들어온 물량에서 20% 이상 불량이 나왔습니다. 가을용 재킷 신상품 들어온 건데 버튼 컬러가 육안으로 차이가 날 정도로 다릅니다.”
“버튼 컬러가요?”
“카키색이란 게 실내에서 볼 때랑 햇빛으로 볼 때 차이가 꽤 심하고 컬러 폭도 다양하긴 하지만 그래도 색깔 샘플 확실히 보냈는데 마무리가 그 꼴로 되었습니다. 공장에서 뭐라는지 아십니까? 같은 카키 아니냐고 하더라고요.”
아저씨의 표정이 무섭게 변했다. 아저씨는 표정이 무서워지면 목소리가 낮고 느려졌다.
“중국 쪽 검수관을 현지인으로 바꾼 지 한 달 만에 사고가 터지는군요.”
“체인지하는 건 가능합니다. 일단 카키 버튼 재고가 있는 상태라서요. 검수 팀 최 실장이 길길이 뛰면서 지금 당장 돌려보낸다는 걸 멈춰 놓고 왔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돌려보내긴 지금 뭘 돌려보냅니까? 타이밍 놓치면 끝이란 거 잘 알면서 그러십니다. 평화 쪽으로 연락 넣어 주세요. 음, 단추 재봉만 해 줄 수 있는 곳이면 유림하고 민성 쪽이 좋겠군요”
“바로 받아 줄까요?”
“단추달이 미싱만 쓰면 되니까, 잘하면 받아 줄 겁니다. 작업 걸린 거 조금만 밀어내고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가야죠. 오늘 밤이나 내일 밤부터라도 우리 물건 좀 걸어 달라고, 직원들 야근 수당까지 얹어 주겠다고 해 주십시오.”
“사장님, 남는 게 없을 겁니다. 경리과에서 김영미 주임이 견적 뽑아 봤습니다.”
“돌려보내서 언제 물건 받습니까? 다른 곳에 가을 신상품 다 깔렸을 겁니다. 기껏 뽑아서 매대에 깔지도 못하고 덤핑으로 넘길 겁니까? 이 경우는 손해를 줄이는 게 이익입니다.”
“유림은 내일모레까지 하기휴가예요.”
“그럼 민성 쪽에 제가 컨택하겠습니다. 지금 물류하고 경리과 직원 모조리 동원해서 불량난 거 전부 따 내고 바로 공장 들어갈 수 있도록 준비해 둬요. 그리고 칭다오행 티켓 왕복으로 내일이나 모레 걸로, 나오는 대로 끊어 주십시오. 자를 놈들은 자르고 한번 뒤집어 놓고 와야겠군요.”
아저씨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형과 서현은 멀뚱멀뚱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지금 가야 해? 가지 마! 오늘은 나랑 놀아 준다고 했잖아!”
서현이는 고집이 센 편이었다. 그리고 잘 울었다. 집에서 놀 때도 아무 때나 고집을 부리고 우는 척도 많이 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이스크림을 들고 있는 서현의 눈에 바로 눈물이 어룽어룽했다.
와, 어떻게 슬프지도 않으면서 저렇게 딱 필요할 때 눈물이 나오지? 기형은 서현의 눈을 보며 새삼 감탄했다. 속으로 눈물아 나와라 얏, 하고 배꼽에 힘을 빡 주면 눈물이 쨀쨀 흐르는 걸까? 기형은 보일락 말락 눈썹을 찡그렸다. 서현의 입에서는 벌써 우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아저씨 입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서현이는 한숨 소릴 듣지 못했지만 기형은 제대로 들었다. 기형은 서현이를 잘 알고 있다. 서현이는 아빠가 일어난다고 하면 제대로 울음을 터뜨릴 거고, 일단 울었다 하면 똥구멍이 빠질 때까지 악을 쓰며 우는 아이였다. 곽 과장 아저씨는 사장님이 안 간다고 하면 얼굴을 꼬깃꼬깃 구길 것이었다.
기형은 물론 아저씨와 더 놀고 싶었지만 아저씨가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눈치챘다. 기형은 아이스크림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배를 움켜쥐었다.
“아저씨. 배가 이상해요.”
우루사 아저씨의 놀란 목소리가 바로 뒤따랐다.
“기형아, 선기형? 왜?”
“아까 멀미한 게 남았나 봐요. 토할 거 같아요.”
기형은 눈을 꼭 감았다. 서현이의 목소리가 급하게 튀어나왔다.
“여기서 토하지 마! 더러워!”
“언제부터 그랬니? 아저씨 좀 보렴. 손 좀 줘봐. 기형아, 선기형? 허리 펴고 숨 좀 편안히 쉬어 보렴. 괜찮니?”
이 목소리는 기형이 좋아하는 아저씨의 목소리다. 커다란 손이 기형의 이마를 짚고 손을 감싸 안고 꾹꾹 눌렀다.
사실 기형의 속은 아주 말짱했다. 생각 같아서는 아이스크림을 세 개는 더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놀이기구도 열 개 넘게 더 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깝긴 했다. 하지만 지금 서현이의 입을 막을 수 있는 건 자신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나 집에 갈래요. 토할 거 같아서 더 못 놀겠어요.”
“야! 선기형! 아직 못 탄 게 많은데 그러는 게 어딨어?”
“야, 윤서현, 그럼 내가 토하면 좋겠어? 나 토한다?”
기형은 억지로 죽어 가는 소리를 하며 서현을 협박했다. 깔끔쟁이 공주는 코를 와락 찡그리며 입을 다물었다.
“아저씨. 저 집에 갈래요, 지금 갈래요.”
칭얼대는 소리를 하며 고개를 드는 순간, 기형은 아저씨의 묘한 눈을 발견했다. 아저씨는 무슨 일엔지 꽤 놀란 표정을 지었다. 기형은 순간 우루사 아저씨가 자기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두 사람은 아주 잠깐 서로 멍청하게 눈을 껌벅껌벅했다. 우루사 아저씨의 눈은 정말 새까맣고 반들반들하구나. 아저씨의 큼직한 눈이 살짝 웃는 것처럼 보였다. 속을 들켰다는 부끄러움에 기형은 억지로 이마를 찡그리며 아픈 척했다. 아저씨의 눈웃음이 조금 더 커졌다.
“서현아. 기형이가 토할 것 같다니까 오늘은 그만 놀자. 나중에 아빠하고 기형이하고 또 오자.”

곽병진 과장이 연희의 차를 운전했다. 연희는 뒷좌석에 서현 대신 기형을 안고 탔다. 연희는 뒷좌석 옷걸이에 걸린 슈트를 당겨 기형의 얼굴에 햇볕이 닿지 않도록 막았다. 서현은 기형이 토한다는 말에 쉽게 항복하고 밖으로 나왔지만 앞좌석에서 계속 투덜거렸다. 하지만 꼬마 아가씨는 차에서 이내 잠들었고, 기형은 연희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가릉가릉 코를 골았다.
“저렇게 말짱한 얼굴로 토할 것 같다니. 맹랑한 꼬마로군요.”
곽 과장은 운전을 하며 조금 웃었다. 연희는 웃지 않고 기형의 머리를 느릿느릿 쓰다듬었다.
“재미있는 꼬마예요. 속이 아주 깊어요.”
기형은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커다란 손이 좋아서 눈을 더 꼭 감고 몸을 동그랗게 구부렸다. 원, 안 그래도 되는데.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기형의 동그랗게 말린 몸 위로 큼직한 양복이 훅 덮였다. 에어컨 바람이 세서 몸에 소름이 돋은 것을 본 걸까? 아저씨의 옷에서는 담배 냄새 대신 기분 좋은 향기가 났다. 향수 냄새인가? 아저씨는 향수 같은 걸 쓰는 걸까?
옷 속에서 아저씨의 크고 두툼한 손이 기형의 한 손을 꼭 잡았다. 잡은 손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손이었다.
기형은 한참 망설였다. 아저씨는 자신이 깨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자신도 아저씨가 그것을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저씨와는 가끔 그렇게, 그냥 알게 되는 것들이 있었다.
눈을 뜰 수는 없었다. 아저씨는 웃고 있을까? 웃고 있는 게 맞다. 이것도 그냥 아는 거다. 큰 손에 조금 더 힘이 꾹 들어가다가 살짝 풀린다. 너 깨어 있는 거 안다 요 녀석, 오늘 너한테 제대로 신세를 졌구나. 고맙다, 하는 말이었다. 기형의 손바닥으로 촉촉하게 땀이 배어 나왔다.

***


기형은 아빠가 우루사 아저씨를 욕하는 횟수가 줄어든 것이 반가웠다.
“재주가 메준 줄 알았더니, 매출이 좀 괜찮나 보네?”
“뭘 볼 게 있다고 줄줄이 가맹점들을 하겠다고 지랄이래? 거 돈푼이나 좀 만졌으려나?”
기형의 아빠는 말이 끝나면 벌레 씹은 얼굴을 했다. 그다음에는 으레 건설 쪽이 불경기다, 오오다가 없다, 하며 다른 사람들을 욕하는 소리가 따라 나왔다.
서현이는 만날 때마다 아빠 자랑을 했다.
“아빠가 이것도 사 줬다? 요것도 사 줬다? 내가 말하는 건 다 사줘.”
기형이 보기에 우루사 아저씨야말로 서현이의 공주병을 만들어 낸 주범이었다. 아빠 말만 들어 보면 우루사 아저씨는 맨날 은행 쫓아다니면서 구걸하는 못난이였지만 기형은 서현이가 언제나 부러웠다.
“서현아. 왜 엄마는 안 오셔?”
“난 일요일엔 아빠랑만 놀아.”
기형은 고개를 갸웃했다. 요일을 정해 놓고 아빠랑 노는 사람이 어딨어? 그러고 보니 이상한 것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우루사 아저씨의 집은 선릉역 근처, 기형의 집과 가까운 곳의 작은 오피스텔이라고 들었는데 서현이는 봉천동 쑥고개 쪽의 초등학교에 다닌다고 했다.
기형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을 뭉근하게 놔두는 성격이 못 되었다. 몇 번 물었을 때, 서현은 짜증을 내다가 입술을 잘강잘강 깨물었다.
“그럼, 너만 알고 있어. 절대 말하면 안 돼.”
서현이가 큰 비밀이라도 고백하듯 귀를 잡아끌고 속닥였을 때, 기형은 깜짝 놀랐다.
“왜?”
“그걸 내가 어떻게 아니? 묻지 마!”
서현이는 자존심 상한 얼굴을 했다.
어쩐지. 그랬구나. 신기하면서도 이상했다. 서현이가 속살거린 말이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엄마, 아빠 따로 살아. 옛날에 이혼했어. 아빠는 일요일에 날 만나러 와. 바빠서 중국 가 있을 때는 못 오구, 안 바쁜 일요일 날.
괜히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건 물어보면 안 되는 건데. 기형은 답답한 것을 놔두지는 못했지만, 이런 걸 캐묻는 건 무례하고 상대를 힘들게 하는 것이라 여겼다. 알았으면 안 물어봤을걸. 우물쭈물 미안하다고 하자 서현은 다시 새침한 얼굴로 돌아갔다.
기형은 그날 현관에 나가 아저씨에게 인사하며 그의 얼굴을 요리조리 살폈다. 기형의 눈에, 우루사 아저씨는 언제 만나든지 점잖은 신사였다. 아빠에게 눌리지 않을 정도로 힘도 셌지만, 아빠와는 달리 남을 욕하거나 물건을 던지거나 집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여자를 무시하는 말 따위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기형처럼 깨작깨작 밥을 먹어 욕까지 얻어먹는 일도 없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탤런트 형들처럼 얼굴이 쌀알만 한 미남은 아니지만 키도 크고 멋지고 사나이답다고 늘 생각했다.
서현이네 엄마는 저렇게 멋진 아저씨랑 결혼했으면서 왜 이혼했을까? 우리 엄마는 하나도 멋지지 않은 우리 아빠랑 헤어지지 않고 사는데. 아무래도 이상했지만 왜냐고 물어볼 순 없었다.
우루사 아저씨는 롯데월드에 다녀온 이후로 기형에게 각별히 신경을 써 주었다. 기형이 좋아할 만한 장난감과 과자도 잘 챙겨 왔고, 유행하는 신상이라며 멋진 옷과 가방도 선물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은근히 웃어 주거나 어깨를 투덕여 주었다. 그럴 때면 기형은 가슴이 벌렁거렸다.
기형의 증세는 조금씩 심해졌다. 우루사 아저씨를 자주 보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고, 쪽지시험 100점 맞으면 아빠 엄마보다 아저씨에게 먼저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큰 눈을 구부리고 멋들어지게 웃으면서 낮게 웅웅 울리는 목소리로 ‘잘했구나, 선기형.’ 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았다. 상상만 해도 몸이 배배 꼬였다.
문제는 쪽지 시험에서 100점 맞을 기회가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기형은 남들을 챙기다가 자신의 소지품을 흘리고 다니는 일이 잦았고, 시험에서도 써야 할 것들을 매번 흘렸다.

기형의 아빠가 우루사 아저씨 이야기를 하며 중간중간 헛기침을 흥흥, 섞게 된 것은 ‘희타운’이라는 아저씨의 가게인지 회사인지가 코스닥이란 곳에 ‘상장’이란 걸 한 후였다. 큰 공장을 사고 자본금이라는 돈도 많이 모았다고 말할 때도 비슷한 표정을 지었었다.
“새끼, 거 곰이 공 굴리는 재주는 있더라고, 딱 그 짝이네. 금싸라기 땅에 언제 그렇게 부동산을 사 놨대? 새끼, 맨날 은행가서 빌빌 애걸할 때는 언제고 돈을 언제 그렇게 모았대? 상장이라니, 웃기지도 않아서.”
기형은 상장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으나 아빠가 그 말을 할 때마다 기분이 퍽 좋지 않다는 것은 쉽게 알아차렸다.
“2주째 상한가라니, 대체 그 새파랗고 무식한 놈을 뭘 믿고 돈들을 퍼 들인대? 씨발.”
“아빠, 상장이 뭐예요?”
“시끄러워! 속 긁지 말고 국으로 자빠져 있어! 넌 공부도 안 해?”
애먼 고함만 터졌다. 하지만 궁금한 건 끝까지 궁금했다. 아빠가 욕하면서도 부러워하는 상장이란 게 뭘까?

“야 서현아, 너 상장이 뭔지 알아?”
“바보야, 상장이 아니고 상짱, 하고 읽는 거야.”
서현은 턱을 쳐들고 친절하게 발음을 잡아 주었다. 그려, 그려요. 기형은 고개를 돌리고 한숨을 쉬었다.
서현은 사업 이야기 따위는 아무것도 몰랐다. 아니, 관심이 없었다. 아빠가 신촌에서 희타운이라는 옷가게를 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이제 아저씨 매장은 신촌뿐 아니라 전국에 퍼져 있는데. 중국 공장이 하청 공장인지 직영 공장인지, 어느 도시에 있는지 따위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왜 아빠 공장이 어디 있는지도 궁금하지 않을까? 아저씨한테 물어보면 슬그머니 웃으며 얼굴을 가까이 붙이고 나직나직 이야기해 줄 텐데. 나한테 대답해 주는 것보다 훨씬 친절하게, 귀가 간지러울 정도로. 아저씨는 며칠 전, 기형이 묻는 말에 이미 그렇게 설명해 주었다.
“이번에 새로 연 가맹점 합하면 서른두 개야. 한 달 후면 33호점 오픈하고. 직영점은 네 개다. 다 서울에 있어. 공장은 칭다오에 있지. 거긴 섬유 공장이 많다. 한국하고 아주 가까워. 인천에서 바로 마주 보고 있는 곳이다.”
혹시 아저씨는 자랑하고 싶었던 걸까? 그래도 묻기 전에 자랑하는 건 창피하니까 누가 물어봐 주길 기다리고 있던 걸까? 기형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흔들었다. 그럴 리가. 아저씨처럼 멋지고 능력 있는 어른이 나 같은 어린이한테 자랑하고 싶어 할 리가. 그래도 아저씨의 표정을 보면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맞는 것만 같아 뒤통수가 근지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