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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2화
1. 하늘을 나는 멸치, 거대 우루사를 만나다 (2)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자신은 공사를 발주하는 사람이다. 아무리 돈깨나 주무르는 시공업체라 해도 클라이언트를 실망이네 어쩌네 하며 하대할 순 없다. 돈을 만져 본 늙은 사내의 오만이 불쾌했다. 게다가 현재 선네이션은 그렇게 큰소리를 칠 계제가 아닐 것이다. 연희는 뒤로 푹 기대어 팔짱을 꼈다.
“선 사장님이 절 어떻게 보시든 전 65만 원까지 떨어뜨리지 않으면 발주 못 합니다.”
늙은 사장은 벌건 얼굴을 우그리며 벌떡 일어났다.
“안 해! 이거 어디 와서 날로 먹으려고 들어! 이거 상종 못 할 사람이었어, 엉?”
“못 하시면 어쩔 수 없습니다. 귀찮긴 하지만 클라이언트의 스케일 따위 트집하지 않는 다른 시공사를 알아보겠습니다.”
“뭐, 뭐야?”
“사장님과 좋은 연을 맺으려 했는데 유감입니다. 만에 하나 마음이 바뀌시면 주말 전까지 연락 주십시오.”
연희는 덤덤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늙은 사장이 쌍욕을 삼키는 것이 뻔히 보인다. 그러시겠지. 선 사장은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수틀리면 누구건 더러운 말을 퍼붓는 게 고질인 사람이다. 하지만 지금 나한테 성질대로 해 대지는 못할 것이다.
조만간 그가 먼저 연락하게 될 것이다. 현재 선네이션은 수주 물량이 없어 장비와 기사들이 판판 놀고 있다. 늙고 비둔한 사내가 씨근대며 쾅, 방문을 닫고 들어갔을 때 연희는 무미한 얼굴로 서류를 챙겨 일어났다. 매 순간이 전쟁이다. 다른 곳에서 새로 가격 절충을 하려면 골이 터질 지경으로 따지고 싸워야 할 텐데. 머리가 지끈지끈했다.
겉으로 봐서는 발주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 같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었다. 업계에는 불문율처럼 통용되는 적정가라는 것이 있고, 그것보다 한참 적은 금액으로 원하는 결과를 뽑아내려면 오늘처럼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왕왕 일어났다. 물론 선 사장이 제시한 평당 시공가 100 정도면 그럭저럭 바가지 안 씌운 가격인 거 안다. 당신 회사 사정 빠듯한 것도 알고.
하지만 지금 당신 사정을 봐줄 때가 아니야. 비용을 어디서건 줄이지 않으면 내 목이 졸려 죽을 정도로 자금 압박이 심해.
그가 꼬리를 내리고 들어올 것이냐. 다른 쪽을 정말로 알아봐야 할 것이냐.
연희는 이를 꾹 물었다. 그는 자신의 감을 믿었다. 3일, 아니면 4일. 당신은 그 안에 내가 원하는 가격으로 항복하게 될 거다. 만약 선네이션과 계약이 성사된다 하면 저 늙은 사내의 속도 풀어 주어야 한다. 현장에 있는 사람들은 비위가 틀리면 자재를 불량하게 쓰거나 공기(工期)를 늦추거나 마감을 부실하게 하는 식으로 알게 모르게 ‘곤조’를 부리는 일도 잦다. 피곤하지만 감당해야 했다. 연희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아저씨, 화나셨어요?”
곁에서 자그마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방에 들어간 늙은 사내는 시근거리며 손에 든 담배를 재떨이에 짓눌러 으스러뜨렸다. 젊은 놈한테 기 싸움에서 밀린 끝이라 기분이 더러웠다.
느릿느릿 굼뜨게 생긴 놈이 가끔 번개같이 뒤통수를 친다. 오늘만 해도 틀림없이 계약서에 도장 찍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 지랄이다. 계약 직전까지 진행된 일을 아예 없던 일로 하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넙죽 들어주기도 분통이 터지고. 평당 65만원? 개새끼. 아주 작정하고 미친놈처럼 후려치는군그래. 카악, 목울대를 돋워 가래를 뱉어도 시원하지 않다.
몇 번 공사 문제로 마주한 윤연희는 겉보기와 많이 다른 사람이었다. 저렇게 답답하고 뒤떨어진 새끼가 무슨 옷 장사야 싶었는데 유행에 빠른 신촌 대학가 학생들이 저놈이 만든 브랜드의 옷에 환장한다니 참 웃기는 일이다.
사전 조사할 때까지는 복장 터질 정도로 신중하지만 결정할 때는 빠르고 과감했다. 결정된 이후는 뒤돌아보는 일이 밑천까지 털어 넣고 밀어붙인다. 일전에도 중국 공장을 사려고 살던 집하고 가진 건물까지 몽땅 쓸어 넣는 바람에 지금은 단칸 오피스텔에서 월세 살이 중이랬던가? 인정하긴 싫지만 승부사 기질이 있는 놈이 맞았다.
지금까지 거래해 온 게 있으니 우리와 일하는 게 훨씬 편하다는 것도 알 거고, 65만 원에 맞추려면 다른 곳에서는 훨씬 힘들게 설득해야 할 텐데 태연한 얼굴로 두말없이 일어서는 거 봐라. 뻔하다. 요새 우리 회사가 조금 골골한다는 소문을 들었나 본데 그렇다고 감히 이 선우순하고 힘겨루기를 하겠다 이거지?
“건방진 새끼……. 새파란 게 어딜 기어오르려고.”
늙은 대목 출신 사내는 새로운 담배를 꺼내 물고 질겅질겅 끝을 씹었다.

연희는 곁에서 공룡 인형을 든 채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년을 내려다보았다. 선 사장이나 그의 젊은 아내는 왜 아이에게 들어가라고 한마디 하지 않았을까. 그는 더 언짢아졌다.
“글쎄, 잘 모르겠구나. 아마 아빠가 더 화가 나신 것 같은데.”
“아빤 원래 화 잘 내셔요. 아저씨는 괜찮으세요?”
“아저씨 얼굴 보렴. 화 안 난 얼굴이잖니.”
연희는 속을 지그시 누르며 차분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의 딸이 이 아이와 동갑이었다. 그는 방어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화를 쏟아붓는 일을 가장 못난 짓이라 여겼다.
“……아저씨는 화난 걸 잘 참나 봐요.”
하회탈 같은 눈이 기묘하게 찌그러졌다. 꼬마의 입술이 실룩실룩하는 것을 보고서야 연희는 아이가 울기 직전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서둘러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아저씨 괜찮아. 정말 괜찮아.”
“아저씨 이제 여기 안 오세요? 공룡 인형 모아 놓은 게 많아요. 보여 드리고 싶은데.”
“걱정 마라, 아저씨는 조만간 다시 올 거다.”
너희 아빠는 얼마 안 가 백기를 들게 될 거니까. 그는 꼬마를 내려다보며 억지로 웃어 주었다. 꼬마는 반신반의하는 얼굴이었다. 아빠랑 그렇게 크게 싸웠는데? 연희는 꼬마의 표정 뒤에 얽힌 의아함을 이해했다.
“어른들도 너희처럼 싸우기도 하고 다시 화해하기도 한다. 괜찮아.”
꼬마는 감정을 잘 숨기지 못했다. 가는 눈에, 입꼬리에 안도의 기색이 서렸다. 연희는 편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다음에 올 때는 여자친구 하나 소개해 줄까? 아저씨한테 딸이 있다고 얘기했었지? 일곱 살이다. 너랑 동갑이야.”
“일곱 살이요? 예뻐요?”
꼬마는 안도하긴 했지만 여전히 애매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며 재우쳤다. 연희는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지갑 안에 있는 사진에는 노란 유치원 모자를 쓴 새침한 아이가 도도한 표정으로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있었다.
“세상에서 제일 예뻐. 몸매도 멋지고. 이름은 윤서현이다. 에리얼 공주보다 예쁘지 않니? 나중에 미스코리아, 미스 유니버스에 다 내보낼 거다.”
꼬마는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후우,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네요. 우루사 아저씨 닮아서 진짜 예뻐요. 아저씨는 딸이 예뻐서 정말 좋으시겠어요.”
연희는 멍청한 얼굴로 일곱 살 소년을 바라보았다. 딸은 자신과 그다지 닮지 않았다. 게다가 세계에서 제일 예쁘기는커녕 못난이 소리나 안 들으면 다행이겠다 싶을 정도라는 건 딸 바보인 연희도 알고 있었다. 기분이 좋은 것은 좋은 것이고, 꼬마의 속이 이해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다음에 오실 때 꼭 같이 오세요, 우루사 아저씨. 제가 걔한테 공룡 책이랑 인형이랑 보여 줄 거예요. 유치원에서 요리 배웠는데, 아저씨 오시면 만들어 드릴게요. 카나페 만들 줄 알아요. 아저씨 카나페 좋아하세요? 많이많이 만들어 놓을게요. 아저씨가 좋아하시는 거 있으면 말씀만 하세요. 엄마한테 배워서 다 해 놓을게요.”
그제야 연희는 아이가 자신의 딸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상한 것을 풀어 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런, 이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일곱 살 꼬마에게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다감한 배려였다.
아이를 이윽히 내려다보고 있노라니, 점점 속이 찡하고, 선 사장과 실랑이를 하느라 딱딱하게 굳었던 기분이 소르르 녹아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이런 아들을 두고 있다니, 선 사장도 복이 많네. 연희는 저도 모르게 싱긋 웃으며 아이의 머리를 한참 동안 쓰다듬었다.
“다음 주 안에 보게 될 거야. 아빠에겐 말하지 마라. 비밀이다, 하늘을 나는 멸치.”
연희는 한쪽 눈을 찡긋하며 속삭였다. 소년은 자신의 별명을 듣고 히죽 따라 웃었다.

주말에 선우순 사장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연희에게 전화했다. 할 수밖에 없었다. 공사 따 놓은 게 없었고 노느니 적게라도 버는 게 맞았다. 연희는 평당 67만 2천 원에 희타운 가맹점 인테리어 시공 계약을 맺었다. 그는 룸살롱에서 물 좋은 년 잡아 제대로 접대하겠다는 늙은 사장의 말에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아드님하고 약속한 게 있는데요. 제 딸을 소개해 주기로 했습니다. 시간 되시면 소개팅 자리나 만들어 주십시오.”
“이번 주 일요일에 오시오, 윤 사장. 마누라한테 맛난 걸로 한 상 차려 놓으라고 할 테니. 딸내미도 데리고 오시구려.”
젊은 놈이 그래도 애들까지 끌어들이며 요령 좋게 마무리를 내는군. 우순은 과장하여 크게 웃었다.

***


기형과 서현은 일곱 살 아이들답게 쉽게 친해졌다. 서현은 소심하진 않았지만 콧대가 높고 앙칼진 구석이 있었다. 서현이한테 남성우월주의자 행세하긴 만만찮을 텐데. 연희가 입술을 비죽하는 순간 덩치 작은 꼬마의 큼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 별명은 하늘을 나는 멸치야. 파닥파닥파닥, 이러고 하늘을 나는 멸치. 너는 별명이 뭐야?”
“그런 거 없어. 아! 가끔 아빠가 나한테 핑크 공주라고 해. 우리 분홍 공주님~ 그렇게 부른다?”
에에엑. 기형은 뒤를 돌아 혀를 내밀고 토하는 시늉을 하려다 연희와 눈이 마주쳤다. 당황한 소년이 얼른 손으로 입을 가리는 것을 보고 연희는 입술을 꾹 모으고 나직이 웃었다. 서현은 깔깔대며 덧붙였다.
“근데 너 정말 멸치 같아! 나보다도 키가 훨씬 작잖아! 일곱 살 맞아? 너 동생이지!”
“넌 키로 나이를 먹니? 그럼 너희 아빤 백 살 먹은 할아버지겠다!”
아이는 코를 찡그렸지만 화를 내는 대신 연희를 끌어 대며 위기를 넘겼다. 꼬마의 얼굴엔 ‘그래도 레이디니까 신사인 내가 참는다!’ 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연희는 기형의 재치 있는 대답과 표정이 마음에 들었고, 그가 잠시 뒤를 돌아보았을 때 엄지손가락을 살짝 들어 보이며 벙긋 웃어 주었다. 소년의 입이 벌쭉 벌어진다.
꼬마 신사는 공룡을 보여 준다며 레이디의 손을 잡아끌었다. 사람 사귀는 요령이 좋은 아이구나. 서현이는 기형이라는 아이에 비하면 훨씬 어리구나. 연희는 꼬마의 자그마한 몸이 달랑거리며 문 안쪽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사장님, 아드님이 참 속이 깊네요. 총명하고. 좋으시겠습니다.”
우순은 소파에 등을 푹 기대며 대소했다. 줄담배를 피우는 늙은 사내의 웃음소리는 걸걸했다.

아빠와 서현이 아빠는 왜 그렇게 다를까? 아빠가 너무 늙은 것이 창피해. 기형은 내내 그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일기에는 차마 쓰지 못했다. 입 밖으로 내지도 않았다. 혹시라도 그것을 읽었을 때 엄마, 아빠가 속상할 것을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 같은 아빠는 그런 일기를 보면 화를 낼지도 몰랐다.
기형은 하지만 아빠가 화를 내는 것보다 서운하게 생각할까 더 걱정이었다. 아빠든 엄마든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이 섭섭해하거나 슬퍼하는 것을 기형은 쉽게 알아차렸다. 그리고 견딜 수 없어 했다.
서현이의 아빠―우루사 아저씨는 참 멋있었다. 기형의 아빠는 좋을 때는 좋지만 무서울 때는 물건을 마구 집어 던졌다. 술을 많이 마시는 날이면 욕도 많이 했다. 집에서 담배를 너무 많이 피워서 나쁜 냄새가 났다.
우루사 아저씨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공룡의 이름도 많이 알고 있었고, 쥐라기와 백악기에 대해서 도표까지 그리며 자세히 설명도 해 주었다.
기형의 아빠나 엄마는 그런 걸 해 준 적이 없었다. 아빠는 쥐라기라는 말을 지랄기라는 말로 바꿔 들었다. 아빠는 그런 데서 아주 엽기적인 센스를 갖고 있었다. 서현이 아빠는 기형에게 새로 나온 공룡 도감도 건네주었다. 그림이 정교했고 책은 크고 두꺼웠다.
기형은 세상이란 딱 절반으로 나누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우루사 아저씨는 멋졌고, 아빠는 멋지지 않았다. 우루사 아저씨는 젊어 보였고, 아빠는 완전 할아버지였다. 우루사 아저씨가 동화 속 왕자에 가깝다면 못생기고 성질 나쁜 아빠는 아무래도 악당 쪽에 가까운 것만 같았다. 아빠가 악당에 가까운 것은 슬프지만 진실을 덮을 순 없다. 유명한 과학자도 말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게다가 우루사 아저씨는 무서운 아빠 앞에서 쩔쩔매는 대신 아빠 이상으로 무서운 얼굴을 할 수도 있었다. 아빠 앞에서도 겁먹지 않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집에 오는 선네이션 사무실 삼촌, 아저씨들은 항상 아빠 앞에서 절절맸다. 우루사 아저씨는 키도 엄청 크고 어깨도 권투선수처럼 딱 벌어졌으니 그럴 만도 했다. 생각할수록 근사했다.
하지만 기형의 엄마, 아빠는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스물다섯밖에 안 된 새파란 놈의 새끼가 같잖게 요령을 피워? 날 갖고 놀려고 해? 개새끼. 내가 하필 지금 오오다(order)가 없으니까 노느니 해 주는 거지, 평소 같으면 어림도 없어. 씨발, 막판에 엿이라도 확 먹여 줄라.”
기형은 몰래 얼굴을 찡그렸다. 아빠가 식사 시간마다 항상 저렇게 누군가를 욕하는 게 싫었다. 또 실제로 엿을 먹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누가 아빠에게 엿을 얻어먹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듣지 못했다. 그냥 나이가 젊거나, 돈이 적거나, 덩치가 작거나, 힘이 약해 보이거나, 여자라면 무조건 무시하고 습관처럼 저런 말을 했다.
“기형이하고 동갑인 딸이 있을 줄은 몰랐네? 총각으로 봤는데. 스물다섯이라 안 했어요?”
“맞아. 왜? 관심 있어?”
“별소릴 다 해요. 웃겨서 그렇지. 애를 그럼 몇 살에 낳은 거야?”
“산수 딱 못해? 싹수 노란 놈이었을 거야. 열여덟에 계집애 후려서 열아홉에 애 싸지른 거 아냐. 병신같이 일찍부터 애나 질질 싸질러 놨으니 인생 조진 거지. 아주 좆 된 거야. 그 새끼, 다른 사람 앞에선 가족 얘기 하지도 못한다고. 나도 우연히 들은 거라니까?”
기형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귀를 기울였다. 국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턱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그뿐인 줄 아나? 새끼 거 고등학교도 못 나왔다더라고. 중졸이야 중졸. 요즘 때가 어느 때라고 중졸이 꺼덕대고 내 앞에 와서 견적서 들이대고 지랄이야. 뭘 안다고 깝쳐, 깝치길. 국으로 자빠져 있잖구.”
기형은 아빠가 그를 욕하는 것이 속상했다. 밥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빠, 그치만 우루사 아저씨, 되게 똑똑해요. 공룡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옛날 빙하기랑 운석 얘기도 많이 알고…….”
“시끄럽다. 쪼끄만 게 뭘 안다고. 중학교 졸업밖에 못 했다니까! 부럽냐, 그게? 너도 그러면 노가다밖에 못 해! 아니지. 현장에선 너처럼 비리비리한 놈은 써 주지도 않아. 그러면 너 뭐해서 먹고 살래? 그럼 거지가 되는 거야. 거지 알아? 서울역 같은 데서 손 내밀고 한 푼 줍쇼, 그러는 사람들.”
“아유, 참! 애한테 별소릴 다 해요.”
“썅! 내가 말하면 입 좀 싸물고 있어! 야, 선기형, 너 말이다. 너도 학교 가서 공부 열심히 안 하고 그 새끼처럼 여자한테나 홀려 다니면, 인생 골로 가는 거야. 너도 그 아저씨처럼 중국 같은 데나 싸돌아다니면서 보따리로 물건 떼어 나를 거냐? 시장통에서 여자들 속옷 펼쳐 놓고 팔고 싶어? 불알 떼고 말지, 그게 사나이가 할 짓이냐, 엉!”
기형은 가만히 눈을 깜박였다. 무언가 아저씨를 위해 변명을 해 주고 싶은데 아빠의 기세가 너무 흉했다.
“넌 공부 제대로 해서 높은 자리 올라가야지. 판사도 되고 검사도 되고, 아니 돈 많이 버는 의사 같은 건 어떠냐?”
“…….”
“물론 애비가 돈 많으니까 그럴 일은 없겠지만. 아, 나중에 건축 같은 거 대학에서 배워서 아빠 회사 물려받을래? 형들이 요새 아빠한테 싸가지 없이 굴어서 지금 맘 같아선 회사 너 줄까 싶다. 흐흐흐, 복 받은 줄 알아라, 선기형. 아빠한테 효도해야지.”
엄마의 입 끝이 살풋 올라가는 것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았다. 아빠가 배다른 형들을 욕할 때마다 엄마는 저렇게 웃었다. 아빠는 다시 그릉그릉 하더니 길게 트림하고 식탁머리에서 담배를 피워 물었다. 입가심한 물을 그릇에 도로 쭉 뱉어 놓자 엄마가 눈썹을 확 찡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엄마도 이런 일로 싸운 적이 있다고 했다. 더러우니 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빠는 엄마 얼굴이 시커메지도록 때렸다고 했다. 반찬이 맛이 없어서 맞은 적이 있다고도 했다. 집에 있으면서 그런 것도 못하면 맞아야지. 여자란 그저 사나흘에 한 번씩 들이패 줘야 제구실을 하는 거야. 그때마다 엄마는 술만 마시면 저러지, 웬수 같은 술 때문이지, 하면서도 눈에 독을 품고 이를 꼭 물었다.
서현이 아빠는 식탁머리에서 담배를 피우지도 않았고, 술도 잘 안 마신다고 했다. 반찬 투정을 하지도 않았고, 숭늉으로 입가심해서 그릇에 쭉 뱉어 놓지도 않았다. 그리고 아빠가 모르는 공룡에 대한 것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옷가게를 하는 게 인생 조진 걸까? 여자 속옷 파는 게 사나이가 할 짓이 아닌 건가? 많이 배우지 못해도 똑똑한데, 그래도 인생 골로 간 걸까? 기형은 혼란스러웠다.
기형은 밤에 침대에 파묻혀 선물로 받은 도감을 펼쳤다. 기형의 부모님은 책을 항상 시리즈로 사 주었다. 동화책과 도감은 벽장에 많았지만 기형은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좋아하는 공룡에 대한 것이라면 문제가 달랐다. 갖고 있던 시리즈 중에서 공룡 관련 책은 세 권 있었는데, 글씨가 너무 커서 아주 어린애들이나 볼 만한 책이 하나, 설명은 자세한데 글씨가 너무 작은 책이 하나, 그림이 이상해서 코웃음이 나오는 책이 하나였다. 우루사 아저씨에게 받은 도감처럼 마음에 쏙 드는 책은 없었다.
윤서현은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도 우루사 아저씨가 엄청 좋아하니까 서현이와 즐겁게 놀아 주었고 예쁘다고도 말해 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서현이는 별로 예쁘지 않았다. 눈은 새우 눈깔만큼 작았고 코는 납작하고 얼굴은 둥그스름했다. 그런데도 예쁜 척을 많이 했다. 밥맛없는 공주병 환자였다.
하지만 윤서현 그 새침데기는 우루사 아저씨가 아빠잖아? 서현이 자랑하던 말이 떠올랐다. 우리 분홍 공주님. 공주니임. 그렇게 덩치가 크고 멋진 아저씨의 입에서 우리 분홍 공주님~ 같은 달콤한 말이 흘러나오다니. 생각할수록 배꼽이 간질거려 미칠 것 같았다.
어떤 표정으로 불러 줄까? 점잖게 웃는 표정일까? 아니야, 아저씨는 딸 바보가 분명했다. 입이 째져라 웃어 주면서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 아저씨가 내 아빠였다면 우리 멋진 멸치 왕자님~ 그렇게 다정하게 불러 주었을까?
상상하던 소년의 배꼽이 두 배로 간지러워졌다. 우리 멸치 왕자님. 왕자님. 아저씨의 낮은 목소리는 상상하면 할수록 온몸이 간지럽도록 좋았다.
일곱 살 먹은 소년은 침대에 누워서 푹, 한숨을 쉬었다. 서현이라는 새침데기가 부러웠다. 그 아저씨가 공주님~ 하며 불러 줄 그 못생기고 까칠한 여자애가 한없이 부러웠다.

정말이지 인생이란 불공평한 것이다. 일곱 살의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