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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1화
프롤로그
서른이 넘은 사람은 믿지 마라, 서른이 넘으면 죽어 버려.
기형이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열네 살 때였다. 소년은 이상하다기보다 그럴듯하다 생각했다.
아름다운 지구를 궁상과 추악으로 오염하는 것은, 무릎이 툭 튀어나온 냄새나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게 입구에서 토하면서 주정하는 아저씨, 남의 집 주차장 구석에 오줌을 누다 들켰을 때 오히려 상소리를 뱉던 고물상 할머니, 전철에서 자리 양보 안 한다고 씨발씨발 욕하던 할아버지, 힘없고 어리다는 것 말고는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에게 주먹으로, 혹은 입으로 화풀이를 하는 독기 오른 이들이었다.
식탁 머리에서 입 가신 물을 쪽 뱉어 놓던 나이 먹은 아빠, 없는 집 애들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을 수 있으니 아예 사귀지도 말라던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생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고도 당당한 이들, 존중받아 마땅한 이들의 삶을 소주 한잔 안줏거리로 사정없이 비웃던 사람들. ‘내가 왕년에’ 타령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 그들에게서 나는 노추의 냄새는 비리거나 구리거나 지렸다. 주름과 함께 곯아 가는 어른들은, 그렇다. 생각해 보니 한결같이 서른을 넘긴 사람들이었다.
열넷이라는 나이에는 회색 지대가 없었고, 서른 너머의 세계는 선명하게 악의 축이자 적대 세력이 되었다. 열네 살 소년들의 세상은 미와 추, 선과 악, 호와 불호, 시와 비로 칼날같이 재단되었다. 꿈이나 위대한 이상 같은 것들이 없는 세계는 악하다 비난받아 마땅했다.
먹거나 싸거나 다른 이를 갉는 일이 삶의 전부인 사람들을 소년은 비루하게 여겼다.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비굴한 자들은 항상 나이 먹은 어른들이었으며, 그들은 순수한 자들을 거리낌 없이 파훼했다. 그 나이들을 먹도록 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 똥이나 만드는 기계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
소년은 냉소가 헤프지 않고 오히려 다감했으되, 회색 지대가 없는 나이답게 신랄했다. 그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인생이란 것의 정체가 그렇게 누추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열네 살의 기형은 짐 모리슨을 듣기 시작했고 짐 모리슨이 스물일곱 나이에 죽은 것에 솔깃해졌다. 마약에 잠긴 죽음은 신성함을 갉아먹지 못했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스물일곱에 죽은 사람들을 추앙하던 히피들은 ‘서른이 넘으면 죽어 버려.’를 외쳤다고 했다.
서재에 앉아 짐 모리슨을 듣고 있던 아저씨는 그들이 기형의 엄마보다 훨씬 먼저 태어난 이들이라 알려 주었다. 나이 서른을 저주하던 낡고 오래된 말을 알려 준 것도 그였다. 늙은 문장들은 40년 가까운 시간을 돌아 열네 살 기형의 귀에 들어왔고, 여전히 참신하게 들렸다.
열네 살 소년에게 서른이란 너무 멀었고 그것은 이내 죽어도 아쉬울 것 없을 나이로 여겨졌다. 스무 살만으로도 충분했다. 스물아홉 이후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 정도까지 살면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고 후회 따위 남지 않을 듯했다. 열넷 소년에게 서른이라는 나이는 인생의 종착지만큼이나 멀었고 그만큼 끔찍했다.
기형이 첫사랑에 빠진 것도 열네 살 때였다. 내내 속병을 앓으면서, 그는 이 감정 역시 낡아 버린 자들에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엄마, 할아버지 같은 아빠, 할머니 같던 큰어머니, 주정뱅이 할아버지, 고물상 할머니들이 갖고 있기엔 그 감정은 너무 반짝반짝 빛났다.
그들도 사랑을 할까? 자신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들에게 있기는 했을까? 동화 속 공주와 왕자, 소설 속 연인들은 언제나 청춘이었다. 사랑은 스물아홉 살까지만 허락되는 것. 서른이 넘은 사람은 믿지 마라, 서른이 넘으면 죽어 버려. 인생의 가치는 스물아홉까지다.
하지만 짐 모리슨과 히피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서른이 넘으면 죽어 버려.’란 말을 알려 준 아저씨는 만 서른한 살이 되었고, 그늘 깊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문득 소년은 그 역시 한때는 열넷, 열여덟이었고, 스물다섯, 스물아홉을 거쳐 왔음을 깨달았다.
기형은 일곱 살에 만난 그를 우루사 아저씨라 불렀다. 그는 그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새까만 눈을 껌벅거리다가 눈치 없이 한 박자 늦게 웃었다. 그는 기형의 자자분한 수다에 짜증을 내는 대신 선 사장님, 막내 아드님이 총명한가 봅니다, 하며 기꺼이 미소했다.
약 광고에서 나오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우루사. 동화에 나오는 느리고 미련한 불곰. 코카콜라 광고에 나오는 북극곰. 모두 그와 닮았다. 그는 어깨가 넓었고 팔에 박힌 알통이 두둑했다. 눈도 코도 귀도 큼직했고 손발은 한결같이 두툼했다. 목소리조차 우렁우렁하고 낮았다. 밥도 엄청나게 많이 먹었고, 배가 부르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기분 좋게 웃었다. 곰 세 마리 동요가 나올 때, 기형은 눈동자가 먹빛처럼 새까만 사내를 떠올렸다. 느리고 둔하며 덜떨어진 아빠 곰은 동요 속에서 순하고 귀여웠다.
기형이 모르고 있던 사실은, 곰이란 본래 재빠르고 총명하며 사나운, 육식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점,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위험한 동물로 간주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1. 하늘을 나는 멸치, 거대 우루사를 만나다 (1)
“우루사 아저씨 오셨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연희는 마루를 가로질러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작고 마른 꼬마를 보며 한 박자 늦게 웃었다. 선네이션(SunNation) 건설사 사장에게 시공비 문제로 의논할 게 있다고 했더니, ‘그럼 점심이나 같이 합시다.’ 하며 연희를 역삼동 자택으로 초대한 참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사장 대신 일곱 살 먹은 아들이 먼저 뛰어나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체구가 작은 꼬마는 바지런하고 몸이 가붓했다.
이 꼬마는 지난번 연희를 처음 보았을 때 입을 멍하니 벌리며 올려다보더니 우루사 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곰을 닮았다는 건가? 꼬마를 상대로 눈썹을 찡그릴 수도 없고 하여 허허 웃고 말았다. 배시시 웃던 꼬마는 그다음부터 연희를 우루사 아저씨라 부르기 시작했다.
선우순 사장은 대목 출신으로 선네이션을 맨바닥에서 일으킨 사내였다. 젊은 시절엔 돈벌이가 지지부진했으나, 올림픽을 전후해 건설 붐이 일었을 때 돈을 수월찮이 만졌다. 선 사장은 술집에서 만난 젊은 여자를 마누라 자리로 들이기 위해 조강지처를 버렸고, 젊은 여자는 환갑이 되어 가는 우순에게 늦둥이를 안겼다고 했다.
선기형이라고 불리는 꼬마는 턱이 뾰족하고 입술이 얇았다. 워낙 체구가 작고 마른 데다, 얼굴마저 역삼각형이라 몸이 더욱 세약해 보였다.
“버릇없게, 우루사 아저씨가 뭐냐?”
늙은 사장은 뒤에서 아들을 야단치면서도 그릉그릉 웃었다.
“괜찮습니다, 선 사장님. 어렸을 때부터 곰 같단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늦되고 반응이 늦고 미련하다, 연희는 어렸을 때부터 곰 같다는 말 뒤에 숨은 악의를 잘 알아들었지만 눈치 있음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꼬마에게서는 일곱 살 소년들에게서 흔히 적나라해지는 악의가 없었고, 그래서 연희는 너그러이 웃을 수 있었다.
“아저씨, 기분 나쁘시면 공평하게 저를 멸치라고 부르셔도 돼요. 기분이 많이 나쁘시면 마른 멸치나 잔멸치라고 하셔도 되고요. 저는 별명이 멸치거든요. 정식 별명은 하늘을 나는 멸치인데 너무 길어서요.”
“음? 하늘을 나는 물고기는 날치 아닌가?”
“키가 너무 작아서 날치는 안 된대요. 멸치나 뱅어래요.”
“그런데 멸치가 왜 하늘을 날아야 할까?”
“가볍잖아요! 접때 엄마가 옥상에 쌀하고 멸치를 널어놨는데요, 바람이 훅 불어서요, 쌀은 돌돌 굴렀는데 멸치가 난간 사이로 탈출해서 하늘을 날았다고요. 정말 후루룩 날아서 잔디밭에 착륙했다니까요? 엄마가요, 너도 밥 안 먹고 더 빼빼 마르면 저렇게 하늘을 나는 멸치가 될 거라고 하셨어요.”
연희가 실소하는 사이 꼬마의 부연이 이어졌다.
“그래서요, 저는 멸치는 안 먹기로 했어요. 키 작은 것도 몸무게 가벼운 것도 서러운 물고기들을 한 숟가락에 30마리씩 먹어 버리면 얼마나 인생이, 아니 멸치 인생이 슬프겠어요. 멸치도 멸치로 태어나고 싶진 않았을 거라고요.”
“하하하, 멸치 먹기 싫은 것에 꽤 철학적인 이유를 갖다 대는구나.”
연희는 꼬마가 눈을 반짝거리며, 한숨까지 쉬어 가며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는 말이 많았고, 유쾌하기도 했고, 숨기는 것도 없었다. 누군가 말을 하면 들어 주는 것도 열심이었고 눈치 빠르게 도와주기도 잘했다. 다만 체구에 비해 목청이 좋아서 떠들기 시작하면 시끄러웠다.
선우순 사장이나 아이 어머니나 꼬마를 제지하지 않았다. 거 사내놈이 저리 말이 많아서야, 혀를 차면서도 늙은 사내는 늦둥이가 떠들어 대는 것이 그저 대견하고 장했다.
그의 젊고 예쁜 새 여자가 뒤에서 곱게 눈인사를 했다.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음식은 박순영이라는 가사 도우미의 솜씨였지만 그의 아내는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을 맞곤 했다. 늙은 사내는 날씬하고 예쁜 트로피 아내를 자랑하고 싶어서 거래처 사람들을 종종 집으로 초대한다 들었다. 순영의 손이 야물어서인지 음식마다 감칠맛이 났다. 연희는 밥을 두 공기 먹었고 미역국도 한 그릇 더 청했다.
“어머, 윤 사장님 복스럽게 드시네요. 우리 애는 어찌나 입이 짧은지. 얘. 기형아, 너 아저씨 드시는 거 보고 좀 배워, 응?”
“엄마! 멸치가 곰하고 똑같이 먹으면 쪼그만 멸치는 배 터져 죽어. 멸치는 밥풀 하나만 들어가도 뚱뚱배가 되는걸! 우루사 아저씨는 키도 10미터, 20미터에 몸무게도 천 킬로, 만 킬로그램쯤 될 텐데 나는 1미터 14센티에 16킬로그램이잖아요. 오늘 아침에도 쟀잖아요.”
연희는 밥을 먹다가 푸우, 웃었다.
“이봐, 꼬마. 아저씨는 공룡이 아닌데. 20미터에 만 킬로그램이라니. 브라키오사우루스(Brachiosaurus)도 아니고.”
순간 밥을 깨작대던 작은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와! 아저씨, 브라키오사우루스 아세요? 목이 길고, 꼬리도 엄청 긴 놈인데요, 하루에 나뭇잎을 두 트럭씩 먹었대요.”
연희는 흥분해서 말이 빨라진 꼬마를 보고 웃었다. 아이의 눈은 웃을 때 하회탈의 눈처럼 크게 굴곡을 그리며 구부러졌다. 주근깨가 조르르 얹힌 선이 가는 코와 얇은 입술과 하회탈 같은 눈은 유약하지만 부드럽고 선량한 느낌을 주었다. 아비와는 많이 다른 아들이구나, 연희는 꼬마를 잠시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yrannosaurus Rex)가 좋아요. 브라키오사우루스보다는 작지만 쥐라기하고, 백악기의 왕이랬어요.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바보예요. 덩치는 훨씬 크면서, 잎사귀만 먹고 살았잖아요. 엄마가요, 고기를 잘 먹어야 힘이 세지는 거랬어요. 그래서 티렉스가 힘이 센 건가 봐요.”
“아이가 공룡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책에 있는 걸 다 외고 있다니까요.”
젊은 엄마는 자랑스러워했고, 늙은 아비는 두터운 입술을 벌리고 걸걸 웃었다. 꼬마 놈은 밥 먹는 것을 집어치우고 공룡에 대해 줄줄 늘어놓았다.
“하지만 제일 좋은 건 랩터, 벨로시랩터(Velociraptor)예요. 덩치는 작아도 무시무시해요. 머리도 좋고요.”
“혹시 꼬마, 작년에 쥐라기 공원 봤니?”
“봤어요! 봤어요! 아저씨도 보셨어요? 전 엄마 졸라서 두 번이나 보러 갔어요! 아저씨도 보셨어요?”
“아저씨는 세 번 봤어. 아저씨한테 딸이 있거든. 그 아이도 공룡 좋아해.”
연희는 밥을 숟가락 위에 듬뿍 얹어 입에 들이밀었다.
“어! 정말이요? 여자가 공룡을 좋아해요? 고짓말이죠! 여자애들은 인어공주 같은 만화밖에 안 본다니까요?”
“아니야. 정말 공룡 좋아해.”
연희는 밥을 서둘러 삼키고 대답했다. 밥 먹는 것을 잊은 꼬마의 입이 재재거렸다.
“그럼 걔는 여자가 아닐 거예요. 공룡은 사나이들만 좋아하는 거잖아요. 아저씨, 밤에 몰래 들어가서 한번 조사해 보세요. 분명 남자일 거예요.”
와하하하! 연희는 크게 웃었다. 일곱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벌써부터 남녀 차별이 유별했다. 유감스럽게도 연희는 딸이라면 껌벅 죽는 보통 아버지인지라, 꼬마의 말이 괘씸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이봐, 꼬마 신사. 어떻게 확인하라는 거지? 지금 나한테 밤에 몰래 들어가서 숙녀의 옷이라도 벗겨 보라는 건가? 그런 파렴치한 짓이 어디 있어?”
“아차! 실수!”
기형의 얼굴이 금방 발갛게 달아올랐다. 옆에 있던 선우순 사장의 입이 웃음을 참느라 실룩실룩했다.
“아, 이런. 실수다! 죄송합니다!”
꼬마의 조그만 머리통이 아래로 폭 수그러들었다. 곱게 빗은 머리카락이 반질반질했다. 연희는 아예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었다.
“근데 걔는 무슨 공룡을 좋아해요? 티렉스요? 정말요? 아저씨는요? 벨로시랩터요? 와와! 왜 진작 얘기 안 하셨어요! 엄마! 우루사 아저씨도 벨로시랩터 좋아하신대!”
꼬마는 쉽게 흥분했고, 흥분하면 떠들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그리고 밥 먹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이거 아이 이야기 들어 주다가 시간 다 가겠는데? 게다가 오늘은 이렇게 화기애애한 용건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선우순 사장과 그의 아내는 아이가 공룡 모형을 들고 오겠다며 방으로 뛰어갈 때까지 연희를 식탁에 앉혀 두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 딴청이다, 늙은 너구리. 연희는 꼬마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툭, 집어 던졌다.
“가맹점 인테리어 평당 시공비 견적 건을 오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거 뭐가 그리 급해요?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수정과나 한잔 들어요. 마누라가 만든 건데 아주 시원하고 그만이야.”
연희의 재촉에도 늙은 사내는 반말을 섞어 가며 느물거렸다.
연희는 신촌에서 캐주얼 의류를 판매하는 매장을 가지고 있었다. 희타운(HeeTown)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건 매장이었다. 매장 규모는 작았지만 옷차림에 대한 남다른 센스와 막 부상하기 시작한 칭다오 섬유 단지 쪽 루트를 좋게 탄 덕에, 희타운은 신촌 대학가에서 명물로 자리 잡았다.
현재 희타운은 옷을 독특하게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대학생들에게 입소문이 나 매출이 수직상승하는 중이었다. 신촌 매장을 30평 규모로 확장할 때, 그리고 직영점 리노베이션 공사를 할 때 연희는 선우순 사장에게 시공을 맡겼었다.
매장을 확장한 후, 가맹점 모집이 시작되었다. 연희 역시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브랜드 런칭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금이 달랑달랑했다. 신촌에서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희타운은 신생 브랜드였다. 가맹비와 상호 사용료, 초도 물류비, 보증금 등의 비용 2,000만 원 외에도 인테리어 비용으로 평당 110만 원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맹점을 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초기비용이 막대한 것에 하나같이 분통을 터뜨렸다. 인테리어가 평당 110? 커피 전문점이라도 내요? 호텔 레스토랑 짓습니까? 점주들은 새파랗게 젊은 사장이 돈 긁을 궁리만 한다며 화증을 냈다. 초도 물류비와 보증금이야 반품 규정에 따라 회수가 가능한 금액이지만 인테리어 시공비는 결국 날아가는 돈이었다. 대폭 절감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연희는 선네이션 사에 시공을 맡길 듯 운을 띄워 놓았지만 요구하는 가격으로 계약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앓는 소리를 해도 건설사 사장들은 큰돈을 주무르며 부쩍부쩍 성장했다. 자유시장의 경쟁원리가 언제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공비는 업계의 암묵적 담합으로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선 사장이나 다른 인테리어 시공업체들이 제시한 금액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당 100만 원 안팎이었다. 값을 깎지 말고, 같은 값에 고급 마감재로 뽑아 달라고 하는 게 정답이라니까요! 업체 사장들의 말은 판에 박은 듯했다. 자재를 최고급으로 대 주겠다고 샘플까지 보내며 호언했던 선우순 사장이 거의 낙점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연희는 별도로 견적을 뽑으며 계약을 미루었다. 희타운 매장 직원은 을지로를 오가며 자재비 단가표와 견적서를 산더미처럼 뽑아 왔다. 연희는 평당 시공비를 60~70만 원 선으로 후려치기로 결심을 굳혔다.
“평당 시공비를 재조정해야겠습니다. 선 사장님.”
“뭐? 지금 와서 그게 무슨 말이요?”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며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순은 계약 파기라도 당한 것처럼 뒤통수 맞은 시늉을 했다. 늙은 너구리 같으니. 남는 게 없다고? 연희 역시 속을 말짱 숨긴 채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늙은 사내는 신경질을 누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선우순은 평생 현장을 지켜 온 억센 사내였지만, 맞은편에 앉은 덩치 큰 사내 역시 시장통 바닥에서 잔다리밟아 이 자리까지 올랐다. 앉은 모습부터 단단했다. 새파란 놈이 만만치 않다. 어떻게 기선을 제압해야 내가 판을 휘두를 수 있을까. 늙은 사내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말 다 끝난 거 아닌가, 윤 사장? 계약서만 작성하면 되는 거잖나! 이러면 안 되지!”
우순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와 주먹 사이에서 다부진 소리가 났다. 대목 출신 사내는 뜻대로 일이 안 풀리면 양철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편이었으나,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다분히 의도적이기도 했다.
“아직 계약 전입니다. 무슨 말을 끝냈단 말입니까?”
“가맹점 생길 때마다 지속적으로 준다고 해서 100까지 맞춰 준 거 아닌가.”
“선 사장님, 까놓고 말합시다. 다른 곳도 그 가격에 맞춰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낮춰 준 것도 아니면서 지금 생색내시는 겁니까?”
연희는 목소리를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흰자위가 허옇게 드러난 눈에서 험한 기운이 쏟아졌다. 주먹을 여전히 움켜쥐고 있던 늙은 사내가 일순 손의 힘을 풀고 물러앉았다.
“다른 데하고 도매금으로 묶지 말라고 하잖았어! 거 내가 얘기했잖나. 좋은 마감재로만 들어간다고. 얼마나 고급 자재인지 샘플 보여 주었잖아!”
“고급 마감재 얘기 나왔으니, 봅시다.”
연희는 가방을 열고 서류를 꺼냈다. 뒤이어 건축자재 도매상에서 받아 온 브로셔와 단가표, 그리고 선우순이 보낸 자재 샘플 사진과 견적 서류들이 줄줄 딸려 나왔다. 선우순의 이마가 확 구겨졌다.
***
고무로 된 공룡 모형을 들고 온 일곱 살 꼬마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우순의 목소리는 점점 성마르게 올라가며 읍소와 노호 사이를 종횡했고 연희의 목소리는 천장에서 크게 웅웅거렸다.
“이거 젊은 사람이 쫀쫀하게 왜 이러나? 내가 겨우 그거 100만 원에 맞춰 주면서 얼마나 남겨 먹는다고! 자재비 이달 말에 가격 뛴다고. 인건비도 반년 전에 오른 거 알잖아. 거의 본전치기라고. 나 윤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실망이네! 나이는 젊어도 스케일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 엉?”
연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선 사장은 연희보다 나이도 경력도 많고, 선네이션도 희타운보다 훨씬 큰 회사이긴 했다. 신축도 아닌 가맹점 인테리어 따위, 큰 건수가 아니란 것도 안다.
프롤로그
서른이 넘은 사람은 믿지 마라, 서른이 넘으면 죽어 버려.
기형이 그 말을 처음 들은 것은 열네 살 때였다. 소년은 이상하다기보다 그럴듯하다 생각했다.
아름다운 지구를 궁상과 추악으로 오염하는 것은, 무릎이 툭 튀어나온 냄새나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가게 입구에서 토하면서 주정하는 아저씨, 남의 집 주차장 구석에 오줌을 누다 들켰을 때 오히려 상소리를 뱉던 고물상 할머니, 전철에서 자리 양보 안 한다고 씨발씨발 욕하던 할아버지, 힘없고 어리다는 것 말고는 아무 죄도 없는 아이들에게 주먹으로, 혹은 입으로 화풀이를 하는 독기 오른 이들이었다.
식탁 머리에서 입 가신 물을 쪽 뱉어 놓던 나이 먹은 아빠, 없는 집 애들은 거머리처럼 달라붙을 수 있으니 아예 사귀지도 말라던 엄마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생 남의 눈에서 피눈물을 뽑고도 당당한 이들, 존중받아 마땅한 이들의 삶을 소주 한잔 안줏거리로 사정없이 비웃던 사람들. ‘내가 왕년에’ 타령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사람들. 그들에게서 나는 노추의 냄새는 비리거나 구리거나 지렸다. 주름과 함께 곯아 가는 어른들은, 그렇다. 생각해 보니 한결같이 서른을 넘긴 사람들이었다.
열넷이라는 나이에는 회색 지대가 없었고, 서른 너머의 세계는 선명하게 악의 축이자 적대 세력이 되었다. 열네 살 소년들의 세상은 미와 추, 선과 악, 호와 불호, 시와 비로 칼날같이 재단되었다. 꿈이나 위대한 이상 같은 것들이 없는 세계는 악하다 비난받아 마땅했다.
먹거나 싸거나 다른 이를 갉는 일이 삶의 전부인 사람들을 소년은 비루하게 여겼다. 약한 자에게 강하고 강한 자에게 비굴한 자들은 항상 나이 먹은 어른들이었으며, 그들은 순수한 자들을 거리낌 없이 파훼했다. 그 나이들을 먹도록 해 놓은 것이 하나도 없는, 똥이나 만드는 기계들. 저주받아 마땅한 사람들.
소년은 냉소가 헤프지 않고 오히려 다감했으되, 회색 지대가 없는 나이답게 신랄했다. 그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인생이란 것의 정체가 그렇게 누추한 것이 아니기를 간절히 소원했다.
열네 살의 기형은 짐 모리슨을 듣기 시작했고 짐 모리슨이 스물일곱 나이에 죽은 것에 솔깃해졌다. 마약에 잠긴 죽음은 신성함을 갉아먹지 못했다. 지미 헨드릭스, 제니스 조플린, 스물일곱에 죽은 사람들을 추앙하던 히피들은 ‘서른이 넘으면 죽어 버려.’를 외쳤다고 했다.
서재에 앉아 짐 모리슨을 듣고 있던 아저씨는 그들이 기형의 엄마보다 훨씬 먼저 태어난 이들이라 알려 주었다. 나이 서른을 저주하던 낡고 오래된 말을 알려 준 것도 그였다. 늙은 문장들은 40년 가까운 시간을 돌아 열네 살 기형의 귀에 들어왔고, 여전히 참신하게 들렸다.
열네 살 소년에게 서른이란 너무 멀었고 그것은 이내 죽어도 아쉬울 것 없을 나이로 여겨졌다. 스무 살만으로도 충분했다. 스물아홉 이후는 상상조차 되지 않았다. 그 정도까지 살면 하고 싶은 거 다 해 보고 후회 따위 남지 않을 듯했다. 열넷 소년에게 서른이라는 나이는 인생의 종착지만큼이나 멀었고 그만큼 끔찍했다.
기형이 첫사랑에 빠진 것도 열네 살 때였다. 내내 속병을 앓으면서, 그는 이 감정 역시 낡아 버린 자들에게 존재할 수 없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엄마, 할아버지 같은 아빠, 할머니 같던 큰어머니, 주정뱅이 할아버지, 고물상 할머니들이 갖고 있기엔 그 감정은 너무 반짝반짝 빛났다.
그들도 사랑을 할까? 자신할 수 없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그들에게 있기는 했을까? 동화 속 공주와 왕자, 소설 속 연인들은 언제나 청춘이었다. 사랑은 스물아홉 살까지만 허락되는 것. 서른이 넘은 사람은 믿지 마라, 서른이 넘으면 죽어 버려. 인생의 가치는 스물아홉까지다.
하지만 짐 모리슨과 히피들에 대해, 그리고 그들의 ‘서른이 넘으면 죽어 버려.’란 말을 알려 준 아저씨는 만 서른한 살이 되었고, 그늘 깊은 눈으로 소년을 바라보았다. 문득 소년은 그 역시 한때는 열넷, 열여덟이었고, 스물다섯, 스물아홉을 거쳐 왔음을 깨달았다.
기형은 일곱 살에 만난 그를 우루사 아저씨라 불렀다. 그는 그 말을 듣고도 화를 내지 않았다. 새까만 눈을 껌벅거리다가 눈치 없이 한 박자 늦게 웃었다. 그는 기형의 자자분한 수다에 짜증을 내는 대신 선 사장님, 막내 아드님이 총명한가 봅니다, 하며 기꺼이 미소했다.
약 광고에서 나오는,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우루사. 동화에 나오는 느리고 미련한 불곰. 코카콜라 광고에 나오는 북극곰. 모두 그와 닮았다. 그는 어깨가 넓었고 팔에 박힌 알통이 두둑했다. 눈도 코도 귀도 큼직했고 손발은 한결같이 두툼했다. 목소리조차 우렁우렁하고 낮았다. 밥도 엄청나게 많이 먹었고, 배가 부르면 의자에 등을 기대고 기분 좋게 웃었다. 곰 세 마리 동요가 나올 때, 기형은 눈동자가 먹빛처럼 새까만 사내를 떠올렸다. 느리고 둔하며 덜떨어진 아빠 곰은 동요 속에서 순하고 귀여웠다.
기형이 모르고 있던 사실은, 곰이란 본래 재빠르고 총명하며 사나운, 육식을 좋아하는 동물이라는 점,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가장 위험한 동물로 간주되기도 한다는 점이었다.
1. 하늘을 나는 멸치, 거대 우루사를 만나다 (1)
“우루사 아저씨 오셨다! 아저씨, 안녕하세요?”
연희는 마루를 가로질러 맹렬한 기세로 달려오는 작고 마른 꼬마를 보며 한 박자 늦게 웃었다. 선네이션(SunNation) 건설사 사장에게 시공비 문제로 의논할 게 있다고 했더니, ‘그럼 점심이나 같이 합시다.’ 하며 연희를 역삼동 자택으로 초대한 참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사장 대신 일곱 살 먹은 아들이 먼저 뛰어나와 고개를 꾸벅 숙인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체구가 작은 꼬마는 바지런하고 몸이 가붓했다.
이 꼬마는 지난번 연희를 처음 보았을 때 입을 멍하니 벌리며 올려다보더니 우루사 같아, 하고 중얼거렸다. 곰을 닮았다는 건가? 꼬마를 상대로 눈썹을 찡그릴 수도 없고 하여 허허 웃고 말았다. 배시시 웃던 꼬마는 그다음부터 연희를 우루사 아저씨라 부르기 시작했다.
선우순 사장은 대목 출신으로 선네이션을 맨바닥에서 일으킨 사내였다. 젊은 시절엔 돈벌이가 지지부진했으나, 올림픽을 전후해 건설 붐이 일었을 때 돈을 수월찮이 만졌다. 선 사장은 술집에서 만난 젊은 여자를 마누라 자리로 들이기 위해 조강지처를 버렸고, 젊은 여자는 환갑이 되어 가는 우순에게 늦둥이를 안겼다고 했다.
선기형이라고 불리는 꼬마는 턱이 뾰족하고 입술이 얇았다. 워낙 체구가 작고 마른 데다, 얼굴마저 역삼각형이라 몸이 더욱 세약해 보였다.
“버릇없게, 우루사 아저씨가 뭐냐?”
늙은 사장은 뒤에서 아들을 야단치면서도 그릉그릉 웃었다.
“괜찮습니다, 선 사장님. 어렸을 때부터 곰 같단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늦되고 반응이 늦고 미련하다, 연희는 어렸을 때부터 곰 같다는 말 뒤에 숨은 악의를 잘 알아들었지만 눈치 있음을 내색하지는 않았다. 꼬마에게서는 일곱 살 소년들에게서 흔히 적나라해지는 악의가 없었고, 그래서 연희는 너그러이 웃을 수 있었다.
“아저씨, 기분 나쁘시면 공평하게 저를 멸치라고 부르셔도 돼요. 기분이 많이 나쁘시면 마른 멸치나 잔멸치라고 하셔도 되고요. 저는 별명이 멸치거든요. 정식 별명은 하늘을 나는 멸치인데 너무 길어서요.”
“음? 하늘을 나는 물고기는 날치 아닌가?”
“키가 너무 작아서 날치는 안 된대요. 멸치나 뱅어래요.”
“그런데 멸치가 왜 하늘을 날아야 할까?”
“가볍잖아요! 접때 엄마가 옥상에 쌀하고 멸치를 널어놨는데요, 바람이 훅 불어서요, 쌀은 돌돌 굴렀는데 멸치가 난간 사이로 탈출해서 하늘을 날았다고요. 정말 후루룩 날아서 잔디밭에 착륙했다니까요? 엄마가요, 너도 밥 안 먹고 더 빼빼 마르면 저렇게 하늘을 나는 멸치가 될 거라고 하셨어요.”
연희가 실소하는 사이 꼬마의 부연이 이어졌다.
“그래서요, 저는 멸치는 안 먹기로 했어요. 키 작은 것도 몸무게 가벼운 것도 서러운 물고기들을 한 숟가락에 30마리씩 먹어 버리면 얼마나 인생이, 아니 멸치 인생이 슬프겠어요. 멸치도 멸치로 태어나고 싶진 않았을 거라고요.”
“하하하, 멸치 먹기 싫은 것에 꽤 철학적인 이유를 갖다 대는구나.”
연희는 꼬마가 눈을 반짝거리며, 한숨까지 쉬어 가며 열심히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는 말이 많았고, 유쾌하기도 했고, 숨기는 것도 없었다. 누군가 말을 하면 들어 주는 것도 열심이었고 눈치 빠르게 도와주기도 잘했다. 다만 체구에 비해 목청이 좋아서 떠들기 시작하면 시끄러웠다.
선우순 사장이나 아이 어머니나 꼬마를 제지하지 않았다. 거 사내놈이 저리 말이 많아서야, 혀를 차면서도 늙은 사내는 늦둥이가 떠들어 대는 것이 그저 대견하고 장했다.
그의 젊고 예쁜 새 여자가 뒤에서 곱게 눈인사를 했다. 식탁 위에 차려 놓은 음식은 박순영이라는 가사 도우미의 솜씨였지만 그의 아내는 앞치마를 두르고 손님을 맞곤 했다. 늙은 사내는 날씬하고 예쁜 트로피 아내를 자랑하고 싶어서 거래처 사람들을 종종 집으로 초대한다 들었다. 순영의 손이 야물어서인지 음식마다 감칠맛이 났다. 연희는 밥을 두 공기 먹었고 미역국도 한 그릇 더 청했다.
“어머, 윤 사장님 복스럽게 드시네요. 우리 애는 어찌나 입이 짧은지. 얘. 기형아, 너 아저씨 드시는 거 보고 좀 배워, 응?”
“엄마! 멸치가 곰하고 똑같이 먹으면 쪼그만 멸치는 배 터져 죽어. 멸치는 밥풀 하나만 들어가도 뚱뚱배가 되는걸! 우루사 아저씨는 키도 10미터, 20미터에 몸무게도 천 킬로, 만 킬로그램쯤 될 텐데 나는 1미터 14센티에 16킬로그램이잖아요. 오늘 아침에도 쟀잖아요.”
연희는 밥을 먹다가 푸우, 웃었다.
“이봐, 꼬마. 아저씨는 공룡이 아닌데. 20미터에 만 킬로그램이라니. 브라키오사우루스(Brachiosaurus)도 아니고.”
순간 밥을 깨작대던 작은 아이의 눈이 반짝거렸다.
“와! 아저씨, 브라키오사우루스 아세요? 목이 길고, 꼬리도 엄청 긴 놈인데요, 하루에 나뭇잎을 두 트럭씩 먹었대요.”
연희는 흥분해서 말이 빨라진 꼬마를 보고 웃었다. 아이의 눈은 웃을 때 하회탈의 눈처럼 크게 굴곡을 그리며 구부러졌다. 주근깨가 조르르 얹힌 선이 가는 코와 얇은 입술과 하회탈 같은 눈은 유약하지만 부드럽고 선량한 느낌을 주었다. 아비와는 많이 다른 아들이구나, 연희는 꼬마를 잠시 집중해서 바라보았다.
“난 티라노사우루스 렉스(Tyrannosaurus Rex)가 좋아요. 브라키오사우루스보다는 작지만 쥐라기하고, 백악기의 왕이랬어요. 브라키오사우루스는 바보예요. 덩치는 훨씬 크면서, 잎사귀만 먹고 살았잖아요. 엄마가요, 고기를 잘 먹어야 힘이 세지는 거랬어요. 그래서 티렉스가 힘이 센 건가 봐요.”
“아이가 공룡을 어찌나 좋아하는지 책에 있는 걸 다 외고 있다니까요.”
젊은 엄마는 자랑스러워했고, 늙은 아비는 두터운 입술을 벌리고 걸걸 웃었다. 꼬마 놈은 밥 먹는 것을 집어치우고 공룡에 대해 줄줄 늘어놓았다.
“하지만 제일 좋은 건 랩터, 벨로시랩터(Velociraptor)예요. 덩치는 작아도 무시무시해요. 머리도 좋고요.”
“혹시 꼬마, 작년에 쥐라기 공원 봤니?”
“봤어요! 봤어요! 아저씨도 보셨어요? 전 엄마 졸라서 두 번이나 보러 갔어요! 아저씨도 보셨어요?”
“아저씨는 세 번 봤어. 아저씨한테 딸이 있거든. 그 아이도 공룡 좋아해.”
연희는 밥을 숟가락 위에 듬뿍 얹어 입에 들이밀었다.
“어! 정말이요? 여자가 공룡을 좋아해요? 고짓말이죠! 여자애들은 인어공주 같은 만화밖에 안 본다니까요?”
“아니야. 정말 공룡 좋아해.”
연희는 밥을 서둘러 삼키고 대답했다. 밥 먹는 것을 잊은 꼬마의 입이 재재거렸다.
“그럼 걔는 여자가 아닐 거예요. 공룡은 사나이들만 좋아하는 거잖아요. 아저씨, 밤에 몰래 들어가서 한번 조사해 보세요. 분명 남자일 거예요.”
와하하하! 연희는 크게 웃었다. 일곱 살밖에 안 된 녀석이 벌써부터 남녀 차별이 유별했다. 유감스럽게도 연희는 딸이라면 껌벅 죽는 보통 아버지인지라, 꼬마의 말이 괘씸하기도 하고 우습기도 했다.
“이봐, 꼬마 신사. 어떻게 확인하라는 거지? 지금 나한테 밤에 몰래 들어가서 숙녀의 옷이라도 벗겨 보라는 건가? 그런 파렴치한 짓이 어디 있어?”
“아차! 실수!”
기형의 얼굴이 금방 발갛게 달아올랐다. 옆에 있던 선우순 사장의 입이 웃음을 참느라 실룩실룩했다.
“아, 이런. 실수다! 죄송합니다!”
꼬마의 조그만 머리통이 아래로 폭 수그러들었다. 곱게 빗은 머리카락이 반질반질했다. 연희는 아예 고개를 젖히고 껄껄 웃었다.
“근데 걔는 무슨 공룡을 좋아해요? 티렉스요? 정말요? 아저씨는요? 벨로시랩터요? 와와! 왜 진작 얘기 안 하셨어요! 엄마! 우루사 아저씨도 벨로시랩터 좋아하신대!”
꼬마는 쉽게 흥분했고, 흥분하면 떠들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그리고 밥 먹는 것을 까맣게 잊었다.
이거 아이 이야기 들어 주다가 시간 다 가겠는데? 게다가 오늘은 이렇게 화기애애한 용건으로 온 것이 아니었다. 선우순 사장과 그의 아내는 아이가 공룡 모형을 들고 오겠다며 방으로 뛰어갈 때까지 연희를 식탁에 앉혀 두었다. 일부러 모르는 척 딴청이다, 늙은 너구리. 연희는 꼬마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툭, 집어 던졌다.
“가맹점 인테리어 평당 시공비 견적 건을 오늘 마무리했으면 좋겠습니다.”
“거 뭐가 그리 급해요? 젊은 사람이라 그런가. 수정과나 한잔 들어요. 마누라가 만든 건데 아주 시원하고 그만이야.”
연희의 재촉에도 늙은 사내는 반말을 섞어 가며 느물거렸다.
연희는 신촌에서 캐주얼 의류를 판매하는 매장을 가지고 있었다. 희타운(HeeTown)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건 매장이었다. 매장 규모는 작았지만 옷차림에 대한 남다른 센스와 막 부상하기 시작한 칭다오 섬유 단지 쪽 루트를 좋게 탄 덕에, 희타운은 신촌 대학가에서 명물로 자리 잡았다.
현재 희타운은 옷을 독특하게 입고 다니기를 좋아하는 대학생들에게 입소문이 나 매출이 수직상승하는 중이었다. 신촌 매장을 30평 규모로 확장할 때, 그리고 직영점 리노베이션 공사를 할 때 연희는 선우순 사장에게 시공을 맡겼었다.
매장을 확장한 후, 가맹점 모집이 시작되었다. 연희 역시 맨주먹으로 사업을 시작했고 브랜드 런칭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본금이 달랑달랑했다. 신촌에서 유명세를 타긴 했지만 희타운은 신생 브랜드였다. 가맹비와 상호 사용료, 초도 물류비, 보증금 등의 비용 2,000만 원 외에도 인테리어 비용으로 평당 110만 원을 요구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가맹점을 내고 싶어 하는 이들은 초기비용이 막대한 것에 하나같이 분통을 터뜨렸다. 인테리어가 평당 110? 커피 전문점이라도 내요? 호텔 레스토랑 짓습니까? 점주들은 새파랗게 젊은 사장이 돈 긁을 궁리만 한다며 화증을 냈다. 초도 물류비와 보증금이야 반품 규정에 따라 회수가 가능한 금액이지만 인테리어 시공비는 결국 날아가는 돈이었다. 대폭 절감하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이었다.
연희는 선네이션 사에 시공을 맡길 듯 운을 띄워 놓았지만 요구하는 가격으로 계약할 생각은 없었다. 아무리 앓는 소리를 해도 건설사 사장들은 큰돈을 주무르며 부쩍부쩍 성장했다. 자유시장의 경쟁원리가 언제나 통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시공비는 업계의 암묵적 담합으로 높게 책정되어 있었다.
선 사장이나 다른 인테리어 시공업체들이 제시한 금액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평당 100만 원 안팎이었다. 값을 깎지 말고, 같은 값에 고급 마감재로 뽑아 달라고 하는 게 정답이라니까요! 업체 사장들의 말은 판에 박은 듯했다. 자재를 최고급으로 대 주겠다고 샘플까지 보내며 호언했던 선우순 사장이 거의 낙점이 된 상태였다.
하지만 연희는 별도로 견적을 뽑으며 계약을 미루었다. 희타운 매장 직원은 을지로를 오가며 자재비 단가표와 견적서를 산더미처럼 뽑아 왔다. 연희는 평당 시공비를 60~70만 원 선으로 후려치기로 결심을 굳혔다.
“평당 시공비를 재조정해야겠습니다. 선 사장님.”
“뭐? 지금 와서 그게 무슨 말이요?”
응접실로 자리를 옮기며 언성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우순은 계약 파기라도 당한 것처럼 뒤통수 맞은 시늉을 했다. 늙은 너구리 같으니. 남는 게 없다고? 연희 역시 속을 말짱 숨긴 채 눈을 치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늙은 사내는 신경질을 누르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선우순은 평생 현장을 지켜 온 억센 사내였지만, 맞은편에 앉은 덩치 큰 사내 역시 시장통 바닥에서 잔다리밟아 이 자리까지 올랐다. 앉은 모습부터 단단했다. 새파란 놈이 만만치 않다. 어떻게 기선을 제압해야 내가 판을 휘두를 수 있을까. 늙은 사내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말 다 끝난 거 아닌가, 윤 사장? 계약서만 작성하면 되는 거잖나! 이러면 안 되지!”
우순의 주먹이 탁자를 내리쳤다. 탁자와 주먹 사이에서 다부진 소리가 났다. 대목 출신 사내는 뜻대로 일이 안 풀리면 양철 냄비처럼 쉽게 달아오르는 편이었으나, 이렇게 흥분한 모습은 다분히 의도적이기도 했다.
“아직 계약 전입니다. 무슨 말을 끝냈단 말입니까?”
“가맹점 생길 때마다 지속적으로 준다고 해서 100까지 맞춰 준 거 아닌가.”
“선 사장님, 까놓고 말합시다. 다른 곳도 그 가격에 맞춰 줄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낮춰 준 것도 아니면서 지금 생색내시는 겁니까?”
연희는 목소리를 낮추고 으르렁거렸다. 흰자위가 허옇게 드러난 눈에서 험한 기운이 쏟아졌다. 주먹을 여전히 움켜쥐고 있던 늙은 사내가 일순 손의 힘을 풀고 물러앉았다.
“다른 데하고 도매금으로 묶지 말라고 하잖았어! 거 내가 얘기했잖나. 좋은 마감재로만 들어간다고. 얼마나 고급 자재인지 샘플 보여 주었잖아!”
“고급 마감재 얘기 나왔으니, 봅시다.”
연희는 가방을 열고 서류를 꺼냈다. 뒤이어 건축자재 도매상에서 받아 온 브로셔와 단가표, 그리고 선우순이 보낸 자재 샘플 사진과 견적 서류들이 줄줄 딸려 나왔다. 선우순의 이마가 확 구겨졌다.
고무로 된 공룡 모형을 들고 온 일곱 살 꼬마는 옆에서 안절부절못했다. 우순의 목소리는 점점 성마르게 올라가며 읍소와 노호 사이를 종횡했고 연희의 목소리는 천장에서 크게 웅웅거렸다.
“이거 젊은 사람이 쫀쫀하게 왜 이러나? 내가 겨우 그거 100만 원에 맞춰 주면서 얼마나 남겨 먹는다고! 자재비 이달 말에 가격 뛴다고. 인건비도 반년 전에 오른 거 알잖아. 거의 본전치기라고. 나 윤 사장 그렇게 안 봤는데 정말 실망이네! 나이는 젊어도 스케일이 있는 사람인 줄 알았어. 엉?”
연희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선 사장은 연희보다 나이도 경력도 많고, 선네이션도 희타운보다 훨씬 큰 회사이긴 했다. 신축도 아닌 가맹점 인테리어 따위, 큰 건수가 아니란 것도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