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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인 Shine 4화
2. I have a dream (2)
서현이는 그런 거 아빠한테 물어보지 않는다. 딸이면서. 하긴, 서현이 머릿속은 온통 핑크 드레스와 예쁜 공책, 자물쇠 달린 일기장, 세일러문 마술봉 같은 걸로 꽉 차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칭다오 같은 처음 들어 보는 도시나 계속 바뀌는 숫자 따위가 들어갈 틈이 없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 서현이는 세일러문 마술봉을 좋아하면서도 그걸 돈 주고 샀다는 건 조금 창피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형은 자신이 새로 알게 된 것을 굳이 서현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샘이 나서 심술을 조금 부리는 거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말해 주기 싫었다. 서현이도 모르는, 아저씨와 나만의 비밀이었으니까.
“아저씨, 상장이 뭐예요?”
기형은 결국 아빠가 없는 틈을 타 우루사 아저씨에게 조용히 물었다. 우루사 아저씨의 먹처럼 새까만 눈이 다시 묘해졌다.
“그게 왜 궁금할까, 선기형?”
“아빠가 안 가르쳐 주세요. 아저씨가 상장을 받았다고 했나? 하여간 그랬는데요.”
“상장을 받은 게 아니고 했다고 한단다.”
우루사 아저씨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슬그머니 웃었다.
“아저씨가 사업을 하고 있잖니.”
“네.”
“사업을 크게 하면 돈을 훨씬 많이 벌 수 있는데, 방법을 아는데, 돈이 없어.”
“네. 그러면 은행에서 빌리는 거잖아요. 이자를 내고요.”
“하하. 별걸 다 아는구나. 꼬마가.”
연희는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기꺼이 웃었다.
“그 방법 말고, 내 사업에 돈을 대 주겠다는 사람을 찾는 거야. 돈 벌어서 이익이 남으면 나눠 드릴게, 우리 회사의 주식을 사 주세요, 그러는 거지. 주식이라는 건…… 그래, 돈 대신 사용하는 종이 딱지 같은 거야. 그걸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진짜 돈을 받고 팔아. 물론 자본금에 따른 한도는 정해져 있지만. 자, 그러면 계산해 보자. 천 원짜리를 백만 장 정도 만들어서 팔면 얼마가 될까?”
기형은 급하게 손가락을 꼽았다.
“……음, 100만, 1,000만, 1억, 10억, 네. 10억 원이요.”
“큰 숫자 계산을 잘하는구나. 그렇지. 은행하고 달리 이자 같은 거 낼 필요가 없는 자금이 된 거야. 그렇게 돈을 모아서 사업을 크게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딱지를 사 준 사람한테 이익을 나눠 주는 거야. 딱지를 많이 산 사람한테는 많이 주고. 조금 산 사람에게는 조금 주고. 그걸 배당금이라고 해.”
“배당금이요.”
“회사에 따라 딱지가 인기가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하겠지? 자, 그럼 생각해 보자. 어떤 회사 딱지가 인기가 많을까?”
“돈을 잘 버는 회사일수록 배당금도 많을 테니까 딱지 인기가 많겠네요?”
“똑똑하구나, 선기형.”
우루사 아저씨는 기형의 마른 어깨를 톡톡 쳤다.
“인기가 많으니까 사람들이 돈을 더 주고서라도 사려고 하겠지? 그럼 그 회사의 딱지는 값이 오르는 거야. 인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값은 자꾸 비싸지는 거고. 그런 걸 주식 값이 오른다고 하지.”
“그럼 돈을 못 버는 회사의 딱지는요?”
“다들 뒤도 안 돌아보고 팔아 버리지. 가지고 있을수록 손해니까. 그런 딱지들은 자꾸자꾸 싸구려가 되다가 나중엔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거든.”
“그럼 아저씨 가게가 상장했다는 게 아저씨가 돈 모으는 딱지를 팔기 시작했다는 건가요?”
“대충 얘기하면 그렇단다.”
갑자기 기형의 머리로 번득, 빛이 터졌다. 그렇지!
“그럼 저 같은 어린이도 회사를 만들어서 딱지를 팔 수 있어요?”
“사람들이 믿고 사겠니?”
연희는 부드럽지만 진지한 어조로 되물었다. 기형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안 살 거 같아요.”
“왜 그럴까?”
“……제가 만든 건, 애들이 만든 거라고 안 믿어 줄 거 같아요.”
“그래. 어른이란 자기가 해 놓은 일에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을 말한단다. 회사도 마찬가지지. 회사 딱지를 만들어 놓았으면, 당연히 책임지고 이익을 내 주려 노력할 책임이 있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딱지를 살 때, 책임질 수 있는 회사가 그 딱지를 만들었는가를 자세히 따진단다. 네가 듣기엔 섭섭하겠지만, 어린이들에겐 아직 그런 능력과 책임을 기대할 수 없지.”
연희는 기형이 알아들을 만한 속도로, 쉬운 말만 골라 가며 설명했다. 서현은 가까이 왔다가 흥미가 없는 듯 방으로 조르르 내뺐다. 기형은 따라가지 않고 덩치 큰 사내의 설명에 집중했다.
“그럼 저 말고 아빠한테 딱지 만들어서 팔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빠는 어른이고 회사도 있으니까요.”
기형의 말에 연희는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 웃었다. 뭔가 난처한 듯한 표정이었다.
“너희 아빠도 원하시긴 한다만, 상장, 음……. 딱지를 만들어 파는 일은 많이 까다롭단다. 파는 시장에서 쉽게 허락 안 해 주거든. 당연하잖니. 믿고 살 수 있어야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서 딱지를 살 테니까. 아저씨가 상장한 코스닥이라는 시장은 상장 요건이, 아니, 딱지를 팔도록 허락해 주는 조건이 진짜 시장보다는 쉬운 편이지만.”
연희는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기형이네 아빠 회사는 그래도 조건이 되지 않는단다. 어…… 물론 아빠도 아셔. 그래도 기형아, 아빠한테는.”
그가 난처한 듯 큰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기형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말 안 해요. 히히. 그냥 궁금해서 여쭤 봤어요.”
기형은 새까맣고 짙은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기형은 그가 이럴 때 어떤 눈으로 웃어 주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사나이끼리 무언가 통한 듯한 눈을 하고 눈을 끔적이며 웃어 주곤 했다.
“아저씨는 그럼 계속 옷가게를 하실 건가요?”
기형의 아빠는 우루사 아저씨가 보따리 속옷 장사, 눈곱만 한 가게에서 애새끼들 옷이나 판다고 인생 좆 됐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옷 장사도 선네이션 회사에 꿀릴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슬금슬금 저었다.
“꼬마, 이건 기업 비밀인데 말이다.”
“네? 기업 비밀이요?”
“사나이 비밀은 지켜야 하는데 말이다.”
“네. 저 말 안 하기로 약속한 건 잘 지켜요.”
마른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저씨는 조만간 희타운을 좋은 값에 팔고, 더 큰 걸 해볼 생각이란다. 아저씨 꿈이야.”
그때 기형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아저씨는 스물일곱이었다. 기형은 어른들도 꿈을 꾼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커서 뭐가 될래요, 뭘 할래요, 하는 꿈은 어른들한테는 없는 줄 알았다. ‘어른들도 꿈이 있어요?’ 하는 말이 톡 튀어 나가려는 것을 꼭 참았다. 그건 무례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꿈이 뭔데요?”
“……어어. 그건 진짜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아저씨 꿈이 무엇인진 나중에 보게 될 거야.”
“말 안 할게요, 아저씨. 알려 주세요, 궁금해요.”
“사나이의 꿈을 함부로 알려 하다니. 괘씸한걸? 그럼 네 꿈도 아저씨한테 알려 주어야 공평하지 않겠니?”
장난인지 진담인지 아저씨의 얼굴이 애매하게 변했다. 어라. 아저씨가 평소와 달리 쉽게 얘기를 안 해 주신다? 기형은 긴장했다. 이런 제기랄. 꿈이 있으면 냉큼 알려 주고 듣고 싶은데 꿈같은 게 없었다. 아니, 하루에 다섯 번씩 바뀌는 장래희망 따위는 아저씨가 말해 주려고 하는 꿈하고는 공평하게 거래가 될 무게가 아닌 것 같았다.
없어요, 아직 잘 모르는데. 소년은 우물거렸다.
“그래도 아저씨, 저도 꿈이 생기면 아저씨한테 제일 먼저 알려 줄 테니까…….”
사람을 결속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동의 적을 갖는 것이고, 그다음은 비밀을 공유하는 것. 연희는 망설이다가 허리를 구부렸다. 속 깊고 헤아림이 뛰어난 꼬마에게 농담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조그맣게 낮춘 목소리가 기형의 귓가에서 나풀거렸다. 작지만 진지한 음성이었다. 기형은 눈을 깜박거렸다. 기형은 그게 아저씨의 진심임을 알았다. 곰처럼 커다란 몸집에, 낮은 목소리와 새까만 눈과 엄청나게 큰 손을 가지고 있는 우루사 아저씨,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친절하고 능력 있는, 사나이다운 사나이는 말을 해 놓고도 조금 부끄러워했다.
어른들도 그런 걸 말할 때는 창피해하는구나. 신기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분명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말했다. 그는 기형을 예전부터 사나이로 대우해 주었다. 이것은 정말 아저씨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서현이도 모르고 아저씨네 회사 사람들도 모를 그런 비밀. 기형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자랑스럽고 뿌듯해졌다. 아저씨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가 희타운을 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 큰 꿈이 있으니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끼던 것을 내놓거나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목표를 가지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나이가 얼마나 멋진지 기형은 처음 깨달았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나도 아저씨처럼, 어른이 되어도 그런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대통령도 별 다섯 대장도 연예인도 공룡 박사도 다 필요 없다.
비밀은 지켜요, 아저씨. 아저씨 꿈이 이루어질 때까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아저씨 꿈이 이루어지도록 매일 소원을 빌게요. 기형이 비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눈을 잔뜩 구부리고 소리 없이 웃어 주었다. 기형의 입도 저절로 벌쭉 벌어졌다. 언제부터인지 아저씨가 웃을 때면 기형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난 우루사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좋아. 정말 좋아.
같은 남자지만, 완전 반할 거 같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앞뒤가 없고 불분명했다. 아주 옛날에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속으로 작은 씨가 하나 떨어졌던 게 분명했다. 그동안 속이 간질간질하다 싶었는데 요즘 싹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저씨를 존경하는 걸까? 본받고 싶은 걸까?
정확한 감정은 알 수 없었지만 존경이라는 말은 그중 납득이 가능한 단어였다. 동경과 애정과 존경 사이에 어슷하게 걸려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알기에 아홉 살은 지나치게 어렸다.
***
기형이 아빠를 통해 희타운과 중국 칭다오 공장이 의류 쪽 대기업인 제일그룹에 매각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기형이 3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젊은 놈이 독해. 몇 달 전에 제일 박병화 회장한테 꼭대기 값으루다 처불러서 거의 다 받았다더군. 재무구조가 보기보다 탄탄했다고? 똥 싸고 앉았네. 허구한 날 은행에 가서 빌빌대던 새끼가.”
기형의 아빠는 식탁머리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며 한숨을 쉬었다.
희타운을 팔았구나. 기형은 놀라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다. 아저씨의 꿈이 무엇인진 나중에 보게 될 거야. 다 큰 어른이 갖고 있는 꿈, 아저씨가 속삭이던 말이 다시 귓가에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네가 어른이 되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게 된다면…….’
‘…….’
‘넌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내가 경영하는 거대한 유통센터를 보게 될 거야. 내 이름으로 온 세계를 덮어 버리겠어.’
정말 시작하는구나. 소년의 그의 질주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몸에 있는 솜털이 곤두서도록 흥분되었다. 생각 하나가 꼬리를 물기 시작하더니 긴 가닥을 만들었다.
열 살은 꿈꾸기 쉬운 나이인가 보다. 작은 머릿속에 꿈이라는 것이 어스름하니 윤곽을 드러냈다.
나도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렇게 멋진 사나이가 돼서, 아저씨가 꿈을 이루는 모습을 옆에서 빠짐없이 지켜보고 박수해 주고, 함께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저씨가 힘들어할 때마다 옆에서 칼을 뽑아 들고 턱 나서서 지켜 주는 기사가 되고 싶다.
소년은 머리를 움켜쥐고 짤짤 흔들었다. 대체 그게 가능이나 한 거야? 이따위 꿈은 아저씨한테는 죽어도 말 못 할 거야.
기형은 말없이 꾸역꾸역 밥을 퍼먹었다. 밥그릇을 비우며 짧게 소원을 빌었다. 아저씨의 꿈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내 눈으로 우루사 아저씨의 이름이 걸린 유통센터를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기왕이면 아저씨 옆자리에 서서 함께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생각이 끊어진다.
왜 나는 아직 열 살이야! 왜!
부아가 치밀었다. 소년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얼른 스무 살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3. 청죽, 이호진 (1)
호진을 처음 보았을 때, 연희는 대나무 숲에서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청죽을 떠올렸다. 이호진은 키가 큰 편이었으며 꽤 마르기도 했다.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간 가는 눈꼬리에는 총기가 들었고 물기를 머금은 눈자위는 맑고 정갈했다. 팔다리와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고, 군살이나 옹이가 없었다. 희고 깨끗하며 담백하고 서늘했다.
호진은 이력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공사 중인 사무실을 찾아 들어왔다. 희타운을 막 매각하고 철거 직전의 신촌 그랜디스 유통 건물을 어렵게 사들인 연희는 영어회화 능통한 비서를 구하고 있었다. 연희의 영어 실력은 더듬거리며 날씨 이야기나 간신히 할 정도였지만 외국 바이어들을 만날 일은 점점 늘고 있었고, 주거래은행 역시 미국계였다. 그러잖아도 연희는 자신의 배움이 짧은 것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 사람은 뭔가 잘못 알고 찾아왔나 보다. 연희는 호진을 보고 고개를 기우뚱했다. 세련된 입성과 귀태가 흐르는 분위기도 그랬지만 이력서에 기재된 내용도 어마어마했다.
“케임브리지에서 경영학 전공, 동 대학 MBA 과정인 저지 비즈니스 스쿨(Cambridge Judge Business School)에서 수석, 박사 과정 수료……. 맞습니까?”
“예. 논문 심사를 남겨 놓고 잠시 귀국한 상태입니다.”
연희는 얼떨떨했다. 얼마나 공부를 지독하게 했기에 세계 MBA 랭킹 10위권에 속한다는 저지 비즈니스 스쿨에서 수석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들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겠다. 교수 자리로 스카우트되거나 대기업에서 헤드헌팅 될 만한 사람이 왜 이렇게 초라한 곳에 이력서를 내밀었을까?
“가능성 있는 곳에서 처음부터 함께 크고 싶습니다.”
피부가 깨끗한 사내는 이를 보일락 말락 드러내며 모양 좋게 웃었다.
연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입 발린 소리도 유분수다. 가능성이고 나발이고, 아무 볼 것 없는 신촌의 낡은 유통센터에서 비서직을 구하고 있을 뿐인데. 급여도 대기업 신입 사원 수준에 훨씬 못 미치고 근무 조건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저지 스쿨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람이, 게다가 제냐 같은 명품 슈트로 몸을 휘감고 와서 이런 곳에서 막일이나 잡무를 하겠다고 지원을 해?
호진은 그의 의심을 짐작한 듯 웃음을 거둬들이고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희타운을 키우신 윤연희 사장님 아니십니까?”
연희의 손에서 흔들리던 만년필이 딱 멈췄다.
어떻게 알았을까? 희타운의 성장 스토리가 가끔 기사화되면서 개인적인 인터뷰 요청이 몇 번 들어오긴 했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는데. 하다못해 사진 촬영조차 허락한 적이 없었다.
연희는 회사 자체에 대한 취재라면 적극 협조했고, 언론의 관심을 PR의 기회로 활용해 매출 신장의 호기로 삼았지만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가 노출되는 것만큼은 극도로 피해 왔다. 학력에 대한 열등감과 자랑할 것 없는 개인사가 그를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사진을 보고 아는 사람이 뒤에서 이러니저러니 떠드는 것도 싫었다. 입지전적 자수성가? 연희는 기자들의 입발림을 믿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쓴다고 해 봐야, 잘해야 중학교밖에 못 나온 사장의 성공 스토리 따위,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줄 나부랭이로 마무리할 것이 뻔했으니까.
연희가 자리에 앉은 채 눈을 치뜨자 서 있던 사내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웃음은 보기 좋았으나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고 입가에 머무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희타운 신촌 본점에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매장 내셔서 직접 판매도 하고 물건 해 오고 그러실 때요. 단골은 아니었지만 몇 번 옷을 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성장세가 대단해서 그동안 가끔 스토킹 좀 했습니다. 귀국하고 알아보니 상장까지 하셨고, 좋은 가격에 매각하셨다고 하더군요.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신지 궁금해서 수소문해 봤습니다.”
아아. 연희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눈을 껌벅였다. 그런 거였나. 호진이라는 사내가 싱긋 웃었다.
“현장에서 뛰고 싶어 배웠던 겁니다. 윤연희 사장님처럼 배울 게 많은 분 밑에서 일할 기회를 꼭 잡고 싶었습니다. 유통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시는 일에 저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
윤연희, 그를 대범하고 거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지금 세대에는 쉽지 않은, 밑바닥부터 치고 오른 자수성가형 경영주였다. 전란이 끝난 직후의 도덕 부재의 시기, 혹은 모든 것이 엉성한 6, 70년대에 회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반짝하고 특수를 누렸던 스포츠 사업체도, 눈먼 돈이 덩치 크게 오가는 건설업계도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유통업이다. 쫀쫀하고 물 더러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대범하고 끈덕지고 무자비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호진이 처음 만난 젊은 사장에게선 옅은 향수 냄새와 더불어 땀 냄새, 희미한 파스 냄새가 났다. 몹시 더운 날이었고, 사무실에선 에어컨 대신 선풍기만 몇 대가 덜덜대며 돌아가고 있었다.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넥타이는 아래로 헐겁게 풀렸고 단추를 하나 풀어 둔 와이셔츠도 땀에 젖어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제가 신촌 그랜디스, 아니 연희유통 대푭니다. 면접 보러 오신 이호진 씨 맞습니까?”
호진이 사무실에 들어가 사장을 찾았을 때, 사무실에서 짐을 나르고 있던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너무 거대한 사람이라 호진은 얼빠진 얼굴로 한참 올려다보았다. 자신도 작은 키가 아닌데 시선을 올려야 했다. 선이 굵은 얼굴에서 속이 보이지 않는 눈이 호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새까만 눈은 우물처럼 짙게 깊었다.
덩치 큰 사장은 호진의 이력서를 보고 눈썹을 꿈틀, 찡그렸다.
“저희는 영어 회화 능통한 사람을 구하는 거지, 교수님을 초빙하는 게 아닙니다만.”
사실 영어 회화 능통한 비서를 구한다고 했지만 비서라기에도 애매한 자리였다. 첫눈에 보아도 업무 시간의 절반은 몸으로 뛰어야 할 분위기였다.
인사 담당자들은 필요 이상의 고학력자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학력이 지나치게 높은 구직자들은 레벨이 낮은 직장을 쉽게 그만두기 때문에. 저 사내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다. 의심을 풀고 이곳에 발을 붙이려면 말 한 마디도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이다. 호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신촌 그랜디스 유통을 어느 그룹에서 낚아채려고 하는지부터 알아봐라……. 소문만 무성하지 확실한 건 하나도 없어.’
큰형의 말이 귓바퀴에 남아 붕붕 떠돌았다.
‘형님, 검증 테스트가 필요합니까?’
건방진 놈, 하던 큰형의 얼굴엔 노여움이 없었다.
‘기회를 잡고 싶으면 능력을 보여. 이호진.’
형과의 계약에 걸린 것은 거대했다. 집안의 미운 오리 새끼에게 간신히 돌아온 실낱의 기회. 호진은 그것을 잡기로 결정했고, 그러자면 이곳에 반드시 취직해야 했다.
잡지 못할 목표는 깨끗하게 도려내 흔적마저 지우고, 달성 가능한 목표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손에 넣는다. 선택과 집중. 군더더기 없는 효율성. 호진이 만들어 낸 삶의 방식은 매끄럽고 간결한 것이었다.
2. I have a dream (2)
서현이는 그런 거 아빠한테 물어보지 않는다. 딸이면서. 하긴, 서현이 머릿속은 온통 핑크 드레스와 예쁜 공책, 자물쇠 달린 일기장, 세일러문 마술봉 같은 걸로 꽉 차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칭다오 같은 처음 들어 보는 도시나 계속 바뀌는 숫자 따위가 들어갈 틈이 없을 거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요즘 서현이는 세일러문 마술봉을 좋아하면서도 그걸 돈 주고 샀다는 건 조금 창피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기형은 자신이 새로 알게 된 것을 굳이 서현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샘이 나서 심술을 조금 부리는 거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냥 말해 주기 싫었다. 서현이도 모르는, 아저씨와 나만의 비밀이었으니까.
“아저씨, 상장이 뭐예요?”
기형은 결국 아빠가 없는 틈을 타 우루사 아저씨에게 조용히 물었다. 우루사 아저씨의 먹처럼 새까만 눈이 다시 묘해졌다.
“그게 왜 궁금할까, 선기형?”
“아빠가 안 가르쳐 주세요. 아저씨가 상장을 받았다고 했나? 하여간 그랬는데요.”
“상장을 받은 게 아니고 했다고 한단다.”
우루사 아저씨는 낮고 깊은 목소리로 슬그머니 웃었다.
“아저씨가 사업을 하고 있잖니.”
“네.”
“사업을 크게 하면 돈을 훨씬 많이 벌 수 있는데, 방법을 아는데, 돈이 없어.”
“네. 그러면 은행에서 빌리는 거잖아요. 이자를 내고요.”
“하하. 별걸 다 아는구나. 꼬마가.”
연희는 놀란 얼굴을 하면서도 기꺼이 웃었다.
“그 방법 말고, 내 사업에 돈을 대 주겠다는 사람을 찾는 거야. 돈 벌어서 이익이 남으면 나눠 드릴게, 우리 회사의 주식을 사 주세요, 그러는 거지. 주식이라는 건…… 그래, 돈 대신 사용하는 종이 딱지 같은 거야. 그걸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진짜 돈을 받고 팔아. 물론 자본금에 따른 한도는 정해져 있지만. 자, 그러면 계산해 보자. 천 원짜리를 백만 장 정도 만들어서 팔면 얼마가 될까?”
기형은 급하게 손가락을 꼽았다.
“……음, 100만, 1,000만, 1억, 10억, 네. 10억 원이요.”
“큰 숫자 계산을 잘하는구나. 그렇지. 은행하고 달리 이자 같은 거 낼 필요가 없는 자금이 된 거야. 그렇게 돈을 모아서 사업을 크게 하고, 돈을 많이 벌어서 딱지를 사 준 사람한테 이익을 나눠 주는 거야. 딱지를 많이 산 사람한테는 많이 주고. 조금 산 사람에게는 조금 주고. 그걸 배당금이라고 해.”
“배당금이요.”
“회사에 따라 딱지가 인기가 많기도 하고 없기도 하겠지? 자, 그럼 생각해 보자. 어떤 회사 딱지가 인기가 많을까?”
“돈을 잘 버는 회사일수록 배당금도 많을 테니까 딱지 인기가 많겠네요?”
“똑똑하구나, 선기형.”
우루사 아저씨는 기형의 마른 어깨를 톡톡 쳤다.
“인기가 많으니까 사람들이 돈을 더 주고서라도 사려고 하겠지? 그럼 그 회사의 딱지는 값이 오르는 거야. 인기가 많으면 많을수록 값은 자꾸 비싸지는 거고. 그런 걸 주식 값이 오른다고 하지.”
“그럼 돈을 못 버는 회사의 딱지는요?”
“다들 뒤도 안 돌아보고 팔아 버리지. 가지고 있을수록 손해니까. 그런 딱지들은 자꾸자꾸 싸구려가 되다가 나중엔 휴지 조각이 될 수도 있거든.”
“그럼 아저씨 가게가 상장했다는 게 아저씨가 돈 모으는 딱지를 팔기 시작했다는 건가요?”
“대충 얘기하면 그렇단다.”
갑자기 기형의 머리로 번득, 빛이 터졌다. 그렇지!
“그럼 저 같은 어린이도 회사를 만들어서 딱지를 팔 수 있어요?”
“사람들이 믿고 사겠니?”
연희는 부드럽지만 진지한 어조로 되물었다. 기형은 금세 시무룩해졌다.
“안 살 거 같아요.”
“왜 그럴까?”
“……제가 만든 건, 애들이 만든 거라고 안 믿어 줄 거 같아요.”
“그래. 어른이란 자기가 해 놓은 일에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사람을 말한단다. 회사도 마찬가지지. 회사 딱지를 만들어 놓았으면, 당연히 책임지고 이익을 내 주려 노력할 책임이 있는 거야. 그래서 사람들은 딱지를 살 때, 책임질 수 있는 회사가 그 딱지를 만들었는가를 자세히 따진단다. 네가 듣기엔 섭섭하겠지만, 어린이들에겐 아직 그런 능력과 책임을 기대할 수 없지.”
연희는 기형이 알아들을 만한 속도로, 쉬운 말만 골라 가며 설명했다. 서현은 가까이 왔다가 흥미가 없는 듯 방으로 조르르 내뺐다. 기형은 따라가지 않고 덩치 큰 사내의 설명에 집중했다.
“그럼 저 말고 아빠한테 딱지 만들어서 팔라고 하면 어떨까요? 아빠는 어른이고 회사도 있으니까요.”
기형의 말에 연희는 얼굴을 조금 찡그리고 웃었다. 뭔가 난처한 듯한 표정이었다.
“너희 아빠도 원하시긴 한다만, 상장, 음……. 딱지를 만들어 파는 일은 많이 까다롭단다. 파는 시장에서 쉽게 허락 안 해 주거든. 당연하잖니. 믿고 살 수 있어야 사람들이 많이 몰려들어서 딱지를 살 테니까. 아저씨가 상장한 코스닥이라는 시장은 상장 요건이, 아니, 딱지를 팔도록 허락해 주는 조건이 진짜 시장보다는 쉬운 편이지만.”
연희는 말을 할 듯 말 듯 망설이다가 덧붙였다.
“기형이네 아빠 회사는 그래도 조건이 되지 않는단다. 어…… 물론 아빠도 아셔. 그래도 기형아, 아빠한테는.”
그가 난처한 듯 큰 손으로 턱을 매만졌다. 기형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말 안 해요. 히히. 그냥 궁금해서 여쭤 봤어요.”
기형은 새까맣고 짙은 눈을 바라보며 웃었다. 기형은 그가 이럴 때 어떤 눈으로 웃어 주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사나이끼리 무언가 통한 듯한 눈을 하고 눈을 끔적이며 웃어 주곤 했다.
“아저씨는 그럼 계속 옷가게를 하실 건가요?”
기형의 아빠는 우루사 아저씨가 보따리 속옷 장사, 눈곱만 한 가게에서 애새끼들 옷이나 판다고 인생 좆 됐다고 했지만, 지금 보니 옷 장사도 선네이션 회사에 꿀릴 것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아저씨는 고개를 슬금슬금 저었다.
“꼬마, 이건 기업 비밀인데 말이다.”
“네? 기업 비밀이요?”
“사나이 비밀은 지켜야 하는데 말이다.”
“네. 저 말 안 하기로 약속한 건 잘 지켜요.”
마른 목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아저씨는 조만간 희타운을 좋은 값에 팔고, 더 큰 걸 해볼 생각이란다. 아저씨 꿈이야.”
그때 기형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아저씨는 스물일곱이었다. 기형은 어른들도 꿈을 꾼다는 사실에 놀랐다. 나는 커서 뭐가 될래요, 뭘 할래요, 하는 꿈은 어른들한테는 없는 줄 알았다. ‘어른들도 꿈이 있어요?’ 하는 말이 톡 튀어 나가려는 것을 꼭 참았다. 그건 무례한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저씨 꿈이 뭔데요?”
“……어어. 그건 진짜 비밀인데.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아저씨 꿈이 무엇인진 나중에 보게 될 거야.”
“말 안 할게요, 아저씨. 알려 주세요, 궁금해요.”
“사나이의 꿈을 함부로 알려 하다니. 괘씸한걸? 그럼 네 꿈도 아저씨한테 알려 주어야 공평하지 않겠니?”
장난인지 진담인지 아저씨의 얼굴이 애매하게 변했다. 어라. 아저씨가 평소와 달리 쉽게 얘기를 안 해 주신다? 기형은 긴장했다. 이런 제기랄. 꿈이 있으면 냉큼 알려 주고 듣고 싶은데 꿈같은 게 없었다. 아니, 하루에 다섯 번씩 바뀌는 장래희망 따위는 아저씨가 말해 주려고 하는 꿈하고는 공평하게 거래가 될 무게가 아닌 것 같았다.
없어요, 아직 잘 모르는데. 소년은 우물거렸다.
“그래도 아저씨, 저도 꿈이 생기면 아저씨한테 제일 먼저 알려 줄 테니까…….”
사람을 결속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공동의 적을 갖는 것이고, 그다음은 비밀을 공유하는 것. 연희는 망설이다가 허리를 구부렸다. 속 깊고 헤아림이 뛰어난 꼬마에게 농담을 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소년은 고개를 들어 올리고 침을 삼키며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
조그맣게 낮춘 목소리가 기형의 귓가에서 나풀거렸다. 작지만 진지한 음성이었다. 기형은 눈을 깜박거렸다. 기형은 그게 아저씨의 진심임을 알았다. 곰처럼 커다란 몸집에, 낮은 목소리와 새까만 눈과 엄청나게 큰 손을 가지고 있는 우루사 아저씨, 세상에서 가장 멋지고 친절하고 능력 있는, 사나이다운 사나이는 말을 해 놓고도 조금 부끄러워했다.
어른들도 그런 걸 말할 때는 창피해하는구나. 신기했다. 하지만 아저씨는 분명 사나이 대 사나이로 말했다. 그는 기형을 예전부터 사나이로 대우해 주었다. 이것은 정말 아저씨와 나만 알고 있는 비밀이다. 서현이도 모르고 아저씨네 회사 사람들도 모를 그런 비밀. 기형은 조심스러우면서도 자랑스럽고 뿌듯해졌다. 아저씨와 좀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그가 희타운을 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도 했지만 이야기를 들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더 큰 꿈이 있으니까.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끼던 것을 내놓거나 양보해야 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목표를 가지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사나이가 얼마나 멋진지 기형은 처음 깨달았다. 듣기만 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었다. 나도 아저씨처럼, 어른이 되어도 그런 꿈을 꿀 수 있으면 좋겠다. 대통령도 별 다섯 대장도 연예인도 공룡 박사도 다 필요 없다.
비밀은 지켜요, 아저씨. 아저씨 꿈이 이루어질 때까진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요. 아저씨 꿈이 이루어지도록 매일 소원을 빌게요. 기형이 비장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연희는 눈을 잔뜩 구부리고 소리 없이 웃어 주었다. 기형의 입도 저절로 벌쭉 벌어졌다. 언제부터인지 아저씨가 웃을 때면 기형은 가슴이 터질 것처럼 부풀었다.
난 우루사 아저씨가 세상에서 제일 멋지고 좋아. 정말 좋아.
같은 남자지만, 완전 반할 거 같아.
불현듯 떠오른 생각은 앞뒤가 없고 불분명했다. 아주 옛날에 아저씨를 처음 만났을 때, 마음속으로 작은 씨가 하나 떨어졌던 게 분명했다. 그동안 속이 간질간질하다 싶었는데 요즘 싹이 나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저씨를 존경하는 걸까? 본받고 싶은 걸까?
정확한 감정은 알 수 없었지만 존경이라는 말은 그중 납득이 가능한 단어였다. 동경과 애정과 존경 사이에 어슷하게 걸려 있는 감정의 정체를 알기에 아홉 살은 지나치게 어렸다.
기형이 아빠를 통해 희타운과 중국 칭다오 공장이 의류 쪽 대기업인 제일그룹에 매각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기형이 3학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있던 때였다.
“젊은 놈이 독해. 몇 달 전에 제일 박병화 회장한테 꼭대기 값으루다 처불러서 거의 다 받았다더군. 재무구조가 보기보다 탄탄했다고? 똥 싸고 앉았네. 허구한 날 은행에 가서 빌빌대던 새끼가.”
기형의 아빠는 식탁머리에 앉아 담배를 뻑뻑 피우며 한숨을 쉬었다.
희타운을 팔았구나. 기형은 놀라지도, 섭섭하지도 않았다. 아저씨의 꿈이 무엇인진 나중에 보게 될 거야. 다 큰 어른이 갖고 있는 꿈, 아저씨가 속삭이던 말이 다시 귓가에 나풀나풀 날아다녔다.
‘네가 어른이 되어서 전 세계를 돌아다니게 된다면…….’
‘…….’
‘넌 발길 닿는 모든 곳에서 내가 경영하는 거대한 유통센터를 보게 될 거야. 내 이름으로 온 세계를 덮어 버리겠어.’
정말 시작하는구나. 소년의 그의 질주가 시작되었음을 알아차렸다. 몸에 있는 솜털이 곤두서도록 흥분되었다. 생각 하나가 꼬리를 물기 시작하더니 긴 가닥을 만들었다.
열 살은 꿈꾸기 쉬운 나이인가 보다. 작은 머릿속에 꿈이라는 것이 어스름하니 윤곽을 드러냈다.
나도 아저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그렇게 멋진 사나이가 돼서, 아저씨가 꿈을 이루는 모습을 옆에서 빠짐없이 지켜보고 박수해 주고, 함께 이루도록 도와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아저씨가 힘들어할 때마다 옆에서 칼을 뽑아 들고 턱 나서서 지켜 주는 기사가 되고 싶다.
소년은 머리를 움켜쥐고 짤짤 흔들었다. 대체 그게 가능이나 한 거야? 이따위 꿈은 아저씨한테는 죽어도 말 못 할 거야.
기형은 말없이 꾸역꾸역 밥을 퍼먹었다. 밥그릇을 비우며 짧게 소원을 빌었다. 아저씨의 꿈이 이루어지게 해 주세요. 내가 커서 어른이 되면,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내 눈으로 우루사 아저씨의 이름이 걸린 유통센터를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기왕이면 아저씨 옆자리에 서서 함께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생각이 끊어진다.
왜 나는 아직 열 살이야! 왜!
부아가 치밀었다. 소년은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진지하게, 얼른 스무 살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3. 청죽, 이호진 (1)
호진을 처음 보았을 때, 연희는 대나무 숲에서 시원한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 청죽을 떠올렸다. 이호진은 키가 큰 편이었으며 꽤 마르기도 했다. 끄트머리가 살짝 올라간 가는 눈꼬리에는 총기가 들었고 물기를 머금은 눈자위는 맑고 정갈했다. 팔다리와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고, 군살이나 옹이가 없었다. 희고 깨끗하며 담백하고 서늘했다.
호진은 이력서를 들고 두리번거리며 공사 중인 사무실을 찾아 들어왔다. 희타운을 막 매각하고 철거 직전의 신촌 그랜디스 유통 건물을 어렵게 사들인 연희는 영어회화 능통한 비서를 구하고 있었다. 연희의 영어 실력은 더듬거리며 날씨 이야기나 간신히 할 정도였지만 외국 바이어들을 만날 일은 점점 늘고 있었고, 주거래은행 역시 미국계였다. 그러잖아도 연희는 자신의 배움이 짧은 것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이 사람은 뭔가 잘못 알고 찾아왔나 보다. 연희는 호진을 보고 고개를 기우뚱했다. 세련된 입성과 귀태가 흐르는 분위기도 그랬지만 이력서에 기재된 내용도 어마어마했다.
“케임브리지에서 경영학 전공, 동 대학 MBA 과정인 저지 비즈니스 스쿨(Cambridge Judge Business School)에서 수석, 박사 과정 수료……. 맞습니까?”
“예. 논문 심사를 남겨 놓고 잠시 귀국한 상태입니다.”
연희는 얼떨떨했다. 얼마나 공부를 지독하게 했기에 세계 MBA 랭킹 10위권에 속한다는 저지 비즈니스 스쿨에서 수석을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곳에 들어올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아주 잘 알겠다. 교수 자리로 스카우트되거나 대기업에서 헤드헌팅 될 만한 사람이 왜 이렇게 초라한 곳에 이력서를 내밀었을까?
“가능성 있는 곳에서 처음부터 함께 크고 싶습니다.”
피부가 깨끗한 사내는 이를 보일락 말락 드러내며 모양 좋게 웃었다.
연희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얼굴을 살폈다. 입 발린 소리도 유분수다. 가능성이고 나발이고, 아무 볼 것 없는 신촌의 낡은 유통센터에서 비서직을 구하고 있을 뿐인데. 급여도 대기업 신입 사원 수준에 훨씬 못 미치고 근무 조건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저지 스쿨 수석 졸업생이라는 사람이, 게다가 제냐 같은 명품 슈트로 몸을 휘감고 와서 이런 곳에서 막일이나 잡무를 하겠다고 지원을 해?
호진은 그의 의심을 짐작한 듯 웃음을 거둬들이고 차분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희타운을 키우신 윤연희 사장님 아니십니까?”
연희의 손에서 흔들리던 만년필이 딱 멈췄다.
어떻게 알았을까? 희타운의 성장 스토리가 가끔 기사화되면서 개인적인 인터뷰 요청이 몇 번 들어오긴 했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는데. 하다못해 사진 촬영조차 허락한 적이 없었다.
연희는 회사 자체에 대한 취재라면 적극 협조했고, 언론의 관심을 PR의 기회로 활용해 매출 신장의 호기로 삼았지만 자신의 사적인 이야기가 노출되는 것만큼은 극도로 피해 왔다. 학력에 대한 열등감과 자랑할 것 없는 개인사가 그를 방어적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사진을 보고 아는 사람이 뒤에서 이러니저러니 떠드는 것도 싫었다. 입지전적 자수성가? 연희는 기자들의 입발림을 믿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쓴다고 해 봐야, 잘해야 중학교밖에 못 나온 사장의 성공 스토리 따위, 호기심을 자극하는 글줄 나부랭이로 마무리할 것이 뻔했으니까.
연희가 자리에 앉은 채 눈을 치뜨자 서 있던 사내는 담담하게 미소 지었다. 그의 웃음은 보기 좋았으나 거의 눈에 띄지 않을 정도였고 입가에 머무는 시간이 매우 짧았다.
“희타운 신촌 본점에서 뵌 적이 있었습니다. 처음 매장 내셔서 직접 판매도 하고 물건 해 오고 그러실 때요. 단골은 아니었지만 몇 번 옷을 사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성장세가 대단해서 그동안 가끔 스토킹 좀 했습니다. 귀국하고 알아보니 상장까지 하셨고, 좋은 가격에 매각하셨다고 하더군요. 무슨 계획을 갖고 계신지 궁금해서 수소문해 봤습니다.”
아아. 연희는 놀란 기색을 감추고 눈을 껌벅였다. 그런 거였나. 호진이라는 사내가 싱긋 웃었다.
“현장에서 뛰고 싶어 배웠던 겁니다. 윤연희 사장님처럼 배울 게 많은 분 밑에서 일할 기회를 꼭 잡고 싶었습니다. 유통업계에 지각변동을 일으키시는 일에 저도 동참하고 싶습니다.”
윤연희, 그를 대범하고 거친 사람일 거라 생각했다. 지금 세대에는 쉽지 않은, 밑바닥부터 치고 오른 자수성가형 경영주였다. 전란이 끝난 직후의 도덕 부재의 시기, 혹은 모든 것이 엉성한 6, 70년대에 회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었다. 반짝하고 특수를 누렸던 스포츠 사업체도, 눈먼 돈이 덩치 크게 오가는 건설업계도 아니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유통업이다. 쫀쫀하고 물 더러운 바닥에서 성공하려면 대범하고 끈덕지고 무자비했을 것이라 짐작했다.
호진이 처음 만난 젊은 사장에게선 옅은 향수 냄새와 더불어 땀 냄새, 희미한 파스 냄새가 났다. 몹시 더운 날이었고, 사무실에선 에어컨 대신 선풍기만 몇 대가 덜덜대며 돌아가고 있었다. 굽슬거리는 머리카락은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넥타이는 아래로 헐겁게 풀렸고 단추를 하나 풀어 둔 와이셔츠도 땀에 젖어 몸에 들러붙어 있었다.
“제가 신촌 그랜디스, 아니 연희유통 대푭니다. 면접 보러 오신 이호진 씨 맞습니까?”
호진이 사무실에 들어가 사장을 찾았을 때, 사무실에서 짐을 나르고 있던 거대한 몸집의 사내가 자신을 소개하며 악수를 청했다. 너무 거대한 사람이라 호진은 얼빠진 얼굴로 한참 올려다보았다. 자신도 작은 키가 아닌데 시선을 올려야 했다. 선이 굵은 얼굴에서 속이 보이지 않는 눈이 호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새까만 눈은 우물처럼 짙게 깊었다.
덩치 큰 사장은 호진의 이력서를 보고 눈썹을 꿈틀, 찡그렸다.
“저희는 영어 회화 능통한 사람을 구하는 거지, 교수님을 초빙하는 게 아닙니다만.”
사실 영어 회화 능통한 비서를 구한다고 했지만 비서라기에도 애매한 자리였다. 첫눈에 보아도 업무 시간의 절반은 몸으로 뛰어야 할 분위기였다.
인사 담당자들은 필요 이상의 고학력자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학력이 지나치게 높은 구직자들은 레벨이 낮은 직장을 쉽게 그만두기 때문에. 저 사내도 그것을 의심하고 있다. 의심을 풀고 이곳에 발을 붙이려면 말 한 마디도 신중하게 골라야 할 것이다. 호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신촌 그랜디스 유통을 어느 그룹에서 낚아채려고 하는지부터 알아봐라……. 소문만 무성하지 확실한 건 하나도 없어.’
큰형의 말이 귓바퀴에 남아 붕붕 떠돌았다.
‘형님, 검증 테스트가 필요합니까?’
건방진 놈, 하던 큰형의 얼굴엔 노여움이 없었다.
‘기회를 잡고 싶으면 능력을 보여. 이호진.’
형과의 계약에 걸린 것은 거대했다. 집안의 미운 오리 새끼에게 간신히 돌아온 실낱의 기회. 호진은 그것을 잡기로 결정했고, 그러자면 이곳에 반드시 취직해야 했다.
잡지 못할 목표는 깨끗하게 도려내 흔적마저 지우고, 달성 가능한 목표는 모든 에너지를 모아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 손에 넣는다. 선택과 집중. 군더더기 없는 효율성. 호진이 만들어 낸 삶의 방식은 매끄럽고 간결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