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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24화)


9장 전쟁(2)


“이쪽입니다, 서두르세요!”
라이리즈는 가벼운 몸놀림으로 손쉽게 산을 올랐다. 얼마나 민첩한지, 만약 에릴과 내가 아니었다면 진작 전장에 도착하고도 남았을 것 같았다.
“헉, 헉.”
이를 악물고 뒤따라갔지만, 역시 사흘 동안 굶어서인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라이리즈는 아무래도 안 되겠다 생각했는지 내게 다가와 어깨를 부축했다.
“…감사합니다.”
“됐습니다. 그보다 아까 했던 말이 거짓이 아니기만을 바랍니다.”
라이리즈는 힐끗 나를 돌아보더니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그래도… 제 말, 믿어주시는군요.”
“지금도 제가 잘한 짓인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 말은 진심인지 그는 불안한 얼굴로 나를 잠시 바라보곤 다시 산을 올랐다.
라이리즈로선 정말 커다란 결정이었을 것이다. 나를 풀어준 순간, 엘프 부족의 죄인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는 나를 믿어주었다. 부족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알았어요! 어째서 현호 님이 다른 자들과 어디가 다른지! 그 눈빛! 그 눈빛이 달라요!”

다른 자들과 다르게 내 눈빛을 보면 그냥 믿음이 간다는, 허무맹랑한 에릴의 말이 기억났다. 그 말이 과연 허언만은 아닌 듯 그 당시에도 라이리즈는 한참이나 내 눈동자를 바라보다 단칼에 내 몸에 묶여 있던 줄을 끊어주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투성이지만, 당신을 따르는 인어와 꽃의 요정, 그리고 올곧은 당신의 눈에 제 목숨을 걸어보겠습니다.”

에릴과 레플리아, 그리고 내 눈을 믿어보겠다는 라이리즈의 목소리엔 단호한 결의가 담겨 있었다. 왠지 그때만 생각하면 숙연해진다. 이자는 진심으로 엘프 부족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기에.
“크오오오오오오!”
“닥터는 어디 있나!”
“이 엘프 놈들! 닥터를 납치한 대가를 받아라!”
“크억! 으아아아아악!”
저 멀리서 사나운 함성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라이리즈도 들은 것인지 잔뜩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시작된 모양입니다! 어서 가죠!”
내 어깨를 두르고 있던 라이리즈 팔에 힘이 들어갔다. 에릴도 무서워진 것인지 내 옆에 바짝 붙어 선 채로 옷자락을 꼭 붙잡았다.
사실 나도 에릴만큼이나 무섭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안심시키기 위해 아닌 척 그녀를 다독였다. 실제로 의사 생활 하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경계를 자주 접하다 보니 마음을 진정시키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그렇게 냉정함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다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그건 너무도 큰 착각에 불과했다.
어찌어찌 언덕을 올라가 숲 언덕 아래,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평원을 내려다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으니까.
언덕 위에 올라서는 순간, 훅, 뜨겁고 짙은 혈향이 내 몸을 덮쳤다. 뒤늦게 전장이 눈에 들어왔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머리가 바닥을 굴러다녔다. 사방에는 오크와 엘프들의 시체가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고, 그 사이에서 다리 잘린 엘프가 괴로움에 몸부림쳤으며, 등에 서너 발의 화살이 박힌 채로 처절히 울부짖는 오크도 보였다.
대부분은 광기에 물들어 서로를 죽이기 위해 오로지 베고 또 베었다.
저들이 내가 알던 오크가 맞는 건가?
그 아름답던 엘프들이 맞는 건가?
온몸에 소름이 돋아 머리칼이 삐죽삐죽 솟았다.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느낀 것인지, 다한증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순식간에 옷이 땀으로 젖어 들어갔고, 오한증이 일어난 사람처럼 몸이 쉴 새 없이 떨려왔다.
“흐아악!”
그때, 누군가가 내 어깨를 툭, 건드려 나도 모르게 괴상망측한 비명을 내질렀다.
“괘, 괜찮으십니까? 얼굴색이 매우 좋지 않아 보입니다.”
오히려 내 과한 반응에 안부를 물으려던 라이리즈가 더 당황했다.
“으읏…….”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에 난 신음을 삼키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뒤늦게 역한 피 냄새 탓에 헛구역질이 나왔다. 구역질이 눈물샘을 자극한 것인지, 아니면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는 눈물이 눈가에 그렁그렁 맺혔다. 이게 현실인가? 이것이 전쟁이라는 건가?
처음 해부학 실습을 진행할 때도 오금이 저린 적은 있지만, 적어도 이런 무력감은 느끼지 않았다. 그래, 이런 기분… 느낄 수 있을 리가 없지. 적어도 그땐 생명의 위협은 받지 않았으니까.
수십, 수백 번 사람의 몸속을 들여다보며 이런 일은 익숙할 거라고 생각했건만, 단순히 사람의 몸을 해부하는 것과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전쟁을 보는 건 십 단위와 천 단위만큼의 차이가 났다.
“크윽! 하아, 하아.”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거센 숨을 토해냈다.
전쟁이 어떠한 것인지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본 전쟁은 내 상식을 깡그리 무너트리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솔직히 인정한다. 그래, 무섭다. 오금이 저리다. 지금 당장 발을 돌려 도망가고 싶을 정도로 두렵다.
처음 오크에게 납치돼 적진 한복판에서도 잘 대처해 살아났기에 이번에도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실상 그때는 지금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마자 이런 꼴이라니!
이런 내가 전쟁을 막는다고?
자만했다. 나 자신을 너무도 자만했다.
“용사 님…….”
“현호 님…….”
레플리아와 에릴이 조심스레 나를 불렀다.
젠장, 이제 알겠어? 나는 너희가 말하는 용사나 영웅 같은 게 아냐. 무서우면 이렇게 벌벌 떨고, 목숨을 위협 받으면 살려 달라고 애원하며, 목에 칼을 들이밀면 오줌이나 지리는, 형편없는 사람에 불과하다고! 그런 내가, 이렇게 보잘것없는 내가! 저들을 구원할 수 있을 리가 없잖아!
내 진짜 모습을 본 에릴은 어떤 눈을 하고 있을까? 레플리아는? 라이리즈는? 분명 잔뜩 실망한 얼굴을 하고 있겠…….
순간, 내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굳이 올려다보지 않아도 그게 누구인지 알 수 있다. 이런 바보 같은 나인데도 너는, 너는…….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악에 받친 소리를 내지르며 일어났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형편없어졌을 얼굴을 소매로 대충 문지르곤, 아직도 떨고 있는 무릎을 주먹으로 퍽퍽, 내리쳤다.
화가 난다. 나 자신에게 너무도 화가 난다. 사람을 살리겠다고 했던 다짐은 다 어디 팔아 치웠느냐! 이럴 거면 어째서 필사적으로 살아남았느냐! 이제 다시는 내 눈앞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어가는 모습을 보지 않겠다고 했지 않느냐! 그런데 대체 왜 병신같이 너보다도 약한 여자한테 위로나 받고 있는 거냐아아!
결단해라, 강현호!
결의를 다져!

넌… 의사다!

“현호 님!”
“용사 님!”
달렸다. 에릴과 레플리아의 당황한 외침도 저버리고, 라이리즈의 손까지 뿌리치고 내달렸다. 오래지 않아 한창 대치 중인 전장에 도달했다. 몇몇 엘프와 오크가 내 모습을 발견한 것인지 무척 당황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무시하고 계속 달렸다.
가장 앞에서 험악한 얼굴로 나를 막아선 엘프를 밀쳤다. 때론 오크를 밀치고, 서로 무기를 맞댄 채 한창 대치 중인 두 종족 사이를 빠져나가기도 했다. 때론 널브러져 있던 시체 더미에 뒹굴기도 했고, 누군지 모를 피를 뒤집어쓰기도 했지만… 난 멈추지 않았다.
화살이 귓가를 스쳐 지나가기도 했고, 서슬 퍼런 칼이 내 머리칼을 자르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오크가 나를 알아보고 보호해 주는 느낌이 들었지만, 고맙다는 인사도 못한 채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 나갔다.
“그만 멈춰어어어어어어어!”
그렇게 나는 오크 대족장과 엘프 대족장이 마주한 전장 중심부에 다다를 수 있었다.
아주 잠시지만 일순간 싸움이 멈췄다. 지팡이를 휘두르며 싸우던 오크 대족장도, 우렁차게 포효하며 엘프들을 때려눕히던 탕카도, 양손에 검을 하나씩 들고 춤추듯 휘두르던 엘프 대족장도 일순간 나를 돌아볼 정도였다.
“다, 닥터?”
“닥터! 살아 있었구나!”
“우하하하하! 살았다! 닥터, 죽지 않았다! 탕카, 여기 있다! 닥터, 구하러 왔다!”
근처에 있던 몇몇 오크가 나를 알아보곤 눈을 크게 떴다. 그중에는 오크 대족장의 아들인 탕카도 있었는데, 역시 이들은 나를 구하기 위해 온 건지 눈에 띄게 좋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다리가 후들후들 떨린다. 심장도 터질 것처럼 가쁘다. 뒤늦게 공포가 몰려와 입까지 덜덜 떨린다.
나 자신에게 격분해 반 정도 미쳐 앞만 보고 뛰었다. 이 행동이 바보 같은 것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목숨이 열 개라도 모자란 행동이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도 나는 뛰었다.
나에게 있어선 이것이 가장 빠르게 상황을 종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