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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23화)
9장 전쟁(1)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아버님. 저희는 좀 더 이성적으로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어요.”
“라이리즈!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어째서죠? 활도 못 다루는 반쪽짜리 엘프라서 그런가요?”
“너……!”
라이리즈라 불린 남성 엘프는 강하게 밀어붙이는가 싶더니, 세계수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를 보십시오. 고대부터 의심이 많아 쉽게 믿음을 주지 않기로 유명한 꽃의 요정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시점부터 이미 모두가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현명한 숲의 조율자라 불리는 저희의 모습을 버리고, 어찌 흉포한 오크들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하십니까?”
그자의 말이 사실인지 세계수 나무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모든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여 호응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핍박하던 흰머리 엘프도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이만 갈 뿐이었다.
“아무래도 서로 간에 깊은 오해가 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이것으로 화가 풀리진 않겠으나,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뒤돌아 내게 깊이 사과하는 라이리즈. 난 그제야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외모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름답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목소리, 몸매 모두 남성인데 그 외모만큼은 여성이라 해도 좋을 만큼…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이 정도라면 여성이라 해도 믿겠어. 아니, 정말 그냥 중저음의 여성이 아닐까?
내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라이리즈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자 내 어깨에 올라타 있던 요정이 귓가에 속삭였다.
“용사님이 비록 남색에 취미가 있어도 저는 괜찮아요.”
“쿨럭! 쿨럭!”
아무래도 남자가 맞는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 일단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가 나타난 것임엔 틀림없다. 이자라면 지금 상황을 답해주지 않을까?
“라이리즈 씨라고… 하셨죠? 어째서 저희를 잡아왔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네, 설명해 드리죠.”
“라이리즈!”
“아버님, 흑마술사에게 꽃의 요정이 신뢰를 줄 리 없다는 거, 아버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 저희가 뭔가 착각한 게…….”
“하나 저 인간이 나타난 이후로 고작 2년이다! 고작 2년 만에 오크가 얼마나 세를 불렸는지 아느냐! 이건 오크 사회에 있어서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분명 저 인간이 흑마술을 사용해 오크를 지배하고 관리해 온 게 틀림없어!”
“그건 추측일 뿐입니다. 저희는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상황을 지켜봐? 오크 무리가 이곳을 침범할 땐 이미 늦다! 아니면 라이리즈, 네가 때론 동족마저 잡아먹는다는 흉악한 것들과 직접 면담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더냐?”
“그건…….”
“자, 잠깐…만요! 뭐라…고요? 제가 오크를 지배하고… 있다고요?”
너무도 황당한 말에 끼어들고 말았다.
대체 지금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오크를 지배해 관리하고 있었다고?
“모른 척해도 소용없다! 우리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더냐! 2년 전, 그렇게나 잦은 마찰을 빚어오던 오크들이 갑자기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 이상함을 느꼈지. 숨죽이며 몰래 세력을 불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치밀함이 네놈의 실수다!”
난 충격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야.
내가 오크들을 도와 엘프 영역을 침범하지 않게 된 게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킨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들의 말이 딱히 틀린다고 볼 수도 없었다. 내가 일조해 오크들의 세력을 불린 건 사실이니까.
오크들의 저주라 할 수 있던 홍역을 치료한 것이 아마도 가장 클 것이다. 확실히 2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어린 오크들이 전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으니까.
오크의 성장기는 고작 5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엘프들이 저토록 오크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마도 쥐처럼 불어나는 오크의 번식력에 당황했겠지.
고작 백 명 남짓한 엘프 부족에게 있어 몇 천 단위인 오크 부족은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을 거라 생각하니, 그 원인인 나를 제거하려 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건 정말 내가 선의로 행한 일들이 다른 이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다는 말밖에 되지 않잖아.
“거 보아라! 정곡을 찔려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저 좌절한 표정을 보고도 착각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라이리즈!”
“…정말 그러한 것입니까?”
라이리즈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난 다급히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족장님! 큰일입니다! 오크가! 오크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뭣이라!”
그때, 한 엘프가 헐레벌떡 달려와 다급히 소리 질렀다. 그 말에 세계수 나무 위에 있던 모든 엘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결국 2년 만에 일이 터지는 건가! 수는! 수는 어찌 되느냐!”
“처, 천이 넘습니다! 각기 무기를 들고 이쪽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어서 대비를!”
천? 천이 넘는 오크 무리가 이쪽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이럴 수가! 결국 신중함이 화를 불렀구나! 들어라, 경이로운 숲의 자손들이여! 흉악한 오크들에게 세계수가 더럽혀져서는 아니 된다! 모두 활을 들어라!”
“우오오오오오오오!”
“이 일이 끝나면 저 인간을 즉결 처분할 것이다! 그전에 이자를 풀어주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라도 용서치 않겠다! 명심하거라! 라이리즈, 너도 마찬가지다!”
“아버님!”
“가자! 추악한 오크들에게 숲의 위대함을 보여주자!”
“이 섬의 주인은 우리 엘프다!”
“흉악한 것들을 이 섬에서 몰아내자!”
“와아아아아아!”
“숲이여, 영원하라!”
엄청난 함성과 함께 수많은 엘프들이 전부 동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라이리즈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엘프들을 바라보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엘프들을 뒤쫓아야 하나, 여기 남아 있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혼란스럽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오크들이 여기까지 몰려온 걸까? 저들이 엘프 영역을 침범할 이유는 전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혹시나 싶지만, 어쩌면 그들은 나를 구하러 온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을 막을 수 없다. 단단히 오해한 엘프들이 나를 적대하고 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현호 님.”
절망에 잠겨 땅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옆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돌아보니 에릴이 활짝 웃고 있었다.
“현호 님은 오크들을 구해준 걸 후회하시나요?”
“뭐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레플리아가 에릴 옆에서 날고 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어깨에서 사라졌나 했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레플리아와 입맞춤해 지금 상황을 전부 전해 들은 건가?
내 추측이 맞는지 에릴은 미안하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죄송해요. 현호 님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여서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그건 무슨 의미로 질문한 거야?”
“말 그대로예요. 오크를 구해준 걸 후회하시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내 즉답에 에릴은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현호 님은 그런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저들에게 있어선…….”
“그럼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이번엔 현호 님은 오크들을 구해주지 않을 건가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역시 생각할 것도 없다.
“그래도 난 오크를 구할 거야. 나는…….”
“닥터니까요.”
에릴은 내가 할 뒷말을 가로채며 웃었다.
난 둔기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나로선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답이었잖아.
“전에 그러셨죠? 생명에 옳고 그르거나 작고 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 그 말이 너무 와 닿았어요. 인어인 저도,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오크도, 이 작은 요정도,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는 엘프도 전부 같은 생명이라고 말씀해 준 것과 같으니까요. 그런 현호 님이기에, 저는 현호 님을 믿을 수 있어요.”
“에릴…….”
“저는 현호 님 덕분에 구원 받았어요. 현호 님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죠. 그러니 제게 있어 현호 님은 영웅이에요.”
“에릴, 나는 영웅 같은 게…….”
에릴은 한사코 고개를 젓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무척이나 깊게 느껴졌다.
“구해준다는 의미는 단순히 목숨을 고쳐 주는 걸로 끝이 아니라고 하셨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현호 님이기에 저는 믿어요. 저에게 그랬듯이 모두를 구원해 줄 거란 걸.”
에릴의 마지막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책임이라……. 모두를 구원해 준다라…….
나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되지 못해, 에릴.
나는 요정이 말하는 용사나 인어가 말하는 영웅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의료 기술을 배웠을 뿐이지, 사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찌 이들은 하나같이 나를 신뢰한단 말인가. 대체 나란 녀석이 뭐라고.
너무 부담스러워 헛웃음이 다 나왔지만, 그래도 덕분에 용기가 솟아났다.
“에릴, 전에 내 눈빛이 다른 자들과 다르다고 했던 말… 기억해?”
“네? 갑자기 그건 무슨…….”
“지금이 그 말을 시험할 기회 같거든.”
난 씨익, 한 번 웃어주곤 급히 무기를 챙겨 들고 막 동쪽으로 달려 나가려는 라이리즈를 돌아보았다.
“잠깐만요. 하아, 하아. 내 말을 들어줘요.”
난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라이리즈를 불러 세웠다.
9장 전쟁(1)
“처음부터 잘못되었습니다, 아버님. 저희는 좀 더 이성적으로 현명하게 대처해야 했어요.”
“라이리즈! 네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어째서죠? 활도 못 다루는 반쪽짜리 엘프라서 그런가요?”
“너……!”
라이리즈라 불린 남성 엘프는 강하게 밀어붙이는가 싶더니, 세계수 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를 보십시오. 고대부터 의심이 많아 쉽게 믿음을 주지 않기로 유명한 꽃의 요정에게 신뢰를 받고 있는 시점부터 이미 모두가 상황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현명한 숲의 조율자라 불리는 저희의 모습을 버리고, 어찌 흉포한 오크들과 같은 길을 걸으려 하십니까?”
그자의 말이 사실인지 세계수 나무 위에서 이를 지켜보던 모든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여 호응하기 시작했다. 우리를 핍박하던 흰머리 엘프도 분위기를 느낀 것인지 뭐라 말하지 못하고 이만 갈 뿐이었다.
“아무래도 서로 간에 깊은 오해가 있던 것 같습니다. 비록 이것으로 화가 풀리진 않겠으나,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뒤돌아 내게 깊이 사과하는 라이리즈. 난 그제야 제대로 얼굴을 볼 수 있었는데, 외모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름답다. 다른 수식어가 필요할까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목소리, 몸매 모두 남성인데 그 외모만큼은 여성이라 해도 좋을 만큼… 무섭도록 아름다웠다.
이 정도라면 여성이라 해도 믿겠어. 아니, 정말 그냥 중저음의 여성이 아닐까?
내가 의심 가득한 얼굴로 라이리즈의 가슴팍을 내려다보자 내 어깨에 올라타 있던 요정이 귓가에 속삭였다.
“용사님이 비록 남색에 취미가 있어도 저는 괜찮아요.”
“쿨럭! 쿨럭!”
아무래도 남자가 맞는 모양이다.
어쨌든 지금 일단 말이 통할 것 같은 상대가 나타난 것임엔 틀림없다. 이자라면 지금 상황을 답해주지 않을까?
“라이리즈 씨라고… 하셨죠? 어째서 저희를 잡아왔는지… 설명해 줄 수 있나요?”
“네, 설명해 드리죠.”
“라이리즈!”
“아버님, 흑마술사에게 꽃의 요정이 신뢰를 줄 리 없다는 거, 아버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이건 저희가 뭔가 착각한 게…….”
“하나 저 인간이 나타난 이후로 고작 2년이다! 고작 2년 만에 오크가 얼마나 세를 불렸는지 아느냐! 이건 오크 사회에 있어서 결코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 분명 저 인간이 흑마술을 사용해 오크를 지배하고 관리해 온 게 틀림없어!”
“그건 추측일 뿐입니다. 저희는 좀 더 상황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상황을 지켜봐? 오크 무리가 이곳을 침범할 땐 이미 늦다! 아니면 라이리즈, 네가 때론 동족마저 잡아먹는다는 흉악한 것들과 직접 면담이라도 해볼 생각이었더냐?”
“그건…….”
“자, 잠깐…만요! 뭐라…고요? 제가 오크를 지배하고… 있다고요?”
너무도 황당한 말에 끼어들고 말았다.
대체 지금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단 말인가. 내가 오크를 지배해 관리하고 있었다고?
“모른 척해도 소용없다! 우리가 그런 것도 모를 줄 알았더냐! 2년 전, 그렇게나 잦은 마찰을 빚어오던 오크들이 갑자기 영역을 침범하지 않아 이상함을 느꼈지. 숨죽이며 몰래 세력을 불릴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그 치밀함이 네놈의 실수다!”
난 충격에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야.
내가 오크들을 도와 엘프 영역을 침범하지 않게 된 게 오히려 불안을 증폭시킨 계기가 된 모양이었다.
생각해 보면 이들의 말이 딱히 틀린다고 볼 수도 없었다. 내가 일조해 오크들의 세력을 불린 건 사실이니까.
오크들의 저주라 할 수 있던 홍역을 치료한 것이 아마도 가장 클 것이다. 확실히 2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어린 오크들이 전부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으니까.
오크의 성장기는 고작 5년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엘프들이 저토록 오크를 경계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아마도 쥐처럼 불어나는 오크의 번식력에 당황했겠지.
고작 백 명 남짓한 엘프 부족에게 있어 몇 천 단위인 오크 부족은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왔을 거라 생각하니, 그 원인인 나를 제거하려 한 것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건 정말 내가 선의로 행한 일들이 다른 이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왔다는 말밖에 되지 않잖아.
“거 보아라! 정곡을 찔려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을! 저 좌절한 표정을 보고도 착각이라 말할 수 있겠느냐, 라이리즈!”
“…정말 그러한 것입니까?”
라이리즈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내게 물었다. 난 다급히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대족장님! 큰일입니다! 오크가! 오크 무리가 나타났습니다!”
“뭣이라!”
그때, 한 엘프가 헐레벌떡 달려와 다급히 소리 질렀다. 그 말에 세계수 나무 위에 있던 모든 엘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결국 2년 만에 일이 터지는 건가! 수는! 수는 어찌 되느냐!”
“처, 천이 넘습니다! 각기 무기를 들고 이쪽으로 진격하고 있습니다! 어서 대비를!”
천? 천이 넘는 오크 무리가 이쪽으로 진격하고 있다고?
“이럴 수가! 결국 신중함이 화를 불렀구나! 들어라, 경이로운 숲의 자손들이여! 흉악한 오크들에게 세계수가 더럽혀져서는 아니 된다! 모두 활을 들어라!”
“우오오오오오오오!”
“이 일이 끝나면 저 인간을 즉결 처분할 것이다! 그전에 이자를 풀어주는 자가 있다면 그 누구라도 용서치 않겠다! 명심하거라! 라이리즈, 너도 마찬가지다!”
“아버님!”
“가자! 추악한 오크들에게 숲의 위대함을 보여주자!”
“이 섬의 주인은 우리 엘프다!”
“흉악한 것들을 이 섬에서 몰아내자!”
“와아아아아아!”
“숲이여, 영원하라!”
엄청난 함성과 함께 수많은 엘프들이 전부 동쪽으로 몰려가기 시작했다. 라이리즈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와 엘프들을 바라보며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엘프들을 뒤쫓아야 하나, 여기 남아 있어야 하나 고민하는 것 같았다.
혼란스럽기는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오크들이 여기까지 몰려온 걸까? 저들이 엘프 영역을 침범할 이유는 전혀 없는 데도 불구하고. 그렇다면 혹시나 싶지만, 어쩌면 그들은 나를 구하러 온 게 아닐까?
그렇다면 전쟁을 막을 수 없다. 단단히 오해한 엘프들이 나를 적대하고 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제 아무것도…….
“현호 님.”
절망에 잠겨 땅만 바라보고 있던 그때, 옆에서 상냥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돌아보니 에릴이 활짝 웃고 있었다.
“현호 님은 오크들을 구해준 걸 후회하시나요?”
“뭐라고?”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가 멍하니 바라보다 뒤늦게 레플리아가 에릴 옆에서 날고 있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느 순간부터 내 어깨에서 사라졌나 했더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레플리아와 입맞춤해 지금 상황을 전부 전해 들은 건가?
내 추측이 맞는지 에릴은 미안하다는 듯이 다시 웃었다.
“죄송해요. 현호 님의 표정이 너무 어두워 보여서 참을 수 없었어요.”
“…그랬구나. 그런데 그건 무슨 의미로 질문한 거야?”
“말 그대로예요. 오크를 구해준 걸 후회하시나요?”
“그럴 리가 없잖아.”
내 즉답에 에릴은 다시 한 번 미소 지었다.
“역시 그럴 거라 생각했어요. 현호 님은 그런 분이시니까요.”
“하지만 저들에게 있어선…….”
“그럼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이번엔 현호 님은 오크들을 구해주지 않을 건가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만약 과거로 돌아간다면? 역시 생각할 것도 없다.
“그래도 난 오크를 구할 거야. 나는…….”
“닥터니까요.”
에릴은 내가 할 뒷말을 가로채며 웃었다.
난 둔기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그렇구나. 나로선 고민할 필요도 없는 답이었잖아.
“전에 그러셨죠? 생명에 옳고 그르거나 작고 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전 그 말이 너무 와 닿았어요. 인어인 저도, 괴물이라고 생각했던 오크도, 이 작은 요정도, 여전히 말이 통하지 않는 엘프도 전부 같은 생명이라고 말씀해 준 것과 같으니까요. 그런 현호 님이기에, 저는 현호 님을 믿을 수 있어요.”
“에릴…….”
“저는 현호 님 덕분에 구원 받았어요. 현호 님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죠. 그러니 제게 있어 현호 님은 영웅이에요.”
“에릴, 나는 영웅 같은 게…….”
에릴은 한사코 고개를 젓더니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쩐지 그녀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무척이나 깊게 느껴졌다.
“구해준다는 의미는 단순히 목숨을 고쳐 주는 걸로 끝이 아니라고 하셨죠?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셨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는 현호 님이기에 저는 믿어요. 저에게 그랬듯이 모두를 구원해 줄 거란 걸.”
에릴의 마지막 말에 숨이 턱 막혔다.
책임이라……. 모두를 구원해 준다라…….
나는 그렇게 대단한 인물이 되지 못해, 에릴.
나는 요정이 말하는 용사나 인어가 말하는 영웅 같은 게 아니다. 그저 의료 기술을 배웠을 뿐이지, 사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나약한 인간에 불과하다. 그런데 어찌 이들은 하나같이 나를 신뢰한단 말인가. 대체 나란 녀석이 뭐라고.
너무 부담스러워 헛웃음이 다 나왔지만, 그래도 덕분에 용기가 솟아났다.
“에릴, 전에 내 눈빛이 다른 자들과 다르다고 했던 말… 기억해?”
“네? 갑자기 그건 무슨…….”
“지금이 그 말을 시험할 기회 같거든.”
난 씨익, 한 번 웃어주곤 급히 무기를 챙겨 들고 막 동쪽으로 달려 나가려는 라이리즈를 돌아보았다.
“잠깐만요. 하아, 하아. 내 말을 들어줘요.”
난 더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라이리즈를 불러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