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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22화)
8장 엘프(3)
“세계수라는 나무예요. 저들은 세계수의 힘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요정에 가까운 종족이에요. 엘프가 있는 곳엔 언제나 세계수가 존재하며, 세계수가 없으면 엘프도 살아갈 수 없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에릴에 말대로 엘프는 저 나무에서 생활하는지 나뭇가지엔 새둥지가 연상되는 집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거대한 나무가 세계수고… 저들은 요정…이라고?”
그때, 엘프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우릴 내려다보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많아야 백 명? 남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했지만, 이상하게도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하나같이 외모가 아름다웠다. 아까 나를 끌고 왔던 남성 둘도 외모가 무척 뛰어났던 걸로 보면, 저런 외모가 저들에겐 평범한 측에 속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어째서 저들이 방어적 성향으로 서쪽 지역을 지키려 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오크에 비해 몹시 적은 수, 그리고 세계수가 없으면 살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던 거다.
“잠깐, 그렇다면 더… 이상하잖아. 어째서 저들은 오크 영역을 침범해… 우릴 납치한 거지?”
“저도 그게 쭉 의문이었어요. 제가 알기론 엘프는 매우 현명하고 이성적인 종족이라고 들었어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코지할 자들이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그건… 잘못된 얘기 같은데?”
얼핏 보기에도 마치 원수라도 대하는 것처럼 적대감이 가득해 보인 터라 현명하고 이성적인 종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가 살려면 에릴, 네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까…….”
“알아요. 엘프와 입맞춤하면 되는 거죠? 기회가 된다면 노력해 볼게요. 하지만 현호 님, 더는 무리하지 마세요.”
이미 무리할 기력도 없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대화가 통한다 해도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저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도 적었으니까. 그래도 정말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작은 희망이라도 찾아보겠는데…….
“제기…랄,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가.”
절망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불과 50m쯤 떨어진 거리에서 마치 처형식이라도 거행하려는 것처럼 두 명의 엘프가 에릴과 나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
다급한 마음에 소리 질렀지만, 우릴 향해 화살을 겨눈 두 엘프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순 없어!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을 순 없단 말이다!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쳐 봤지만, 줄은 단단히 묶여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에릴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젠장, 방법이…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사이 우리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는 두 사수 사이로 한 인물이 나타났다. 다른 엘프들과 다르게 머리가 흰색인 남성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지위가 높은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자는 마치 명령하듯 살짝 손을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두 사수의 시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정말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는 거냐!
“이, 이럴 순 없어! 제발, 으아아아아악!”
흰머리 엘프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느껴져야 할 통증이 찾아오지 않았다. 혹시 빗나간 걸까?
“요, 요정아!”
용기를 쥐어짜 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놀랍게도 가슴 폭에 숨어 있던 요정이 내 앞으로 튀어나와 두 팔 벌려 막아주고 있었다. 엘프들도 깜짝 놀란 것인지 차마 화살을 날리지 못한 것 같았다.
“현호 님, 그 요정은 설마…….”
“으, 으응. 우리가 구해줬던 그 요정이야. 우연히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것보다 뭔가 분위기가 돌변하고 있어.”
요정이 등장한 순간, 흰머리 엘프를 포함해 세계수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모든 엘프들까지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요정은 꿋꿋이 내 앞을 막아선 채로 뭐라 외치고 있었다. 나에겐 그저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요정은 저들과 대화를 나누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요정족은 같은 바람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내 생각이 적중한 듯 흰머리 엘프도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요정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둘이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인상까지 써가며 소통하고 있는데, 어찌 대화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에릴과 난 숨죽여 상황을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타협점을 찾은 것인지 흰머리 엘프가 손을 뒤로 휘저어 두 사수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서, 설마 우리 산… 건가?
에릴과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릴 역시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사이 흰머리 엘프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다시 한차례 요정과 대화하더니 내 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그는 나에게 뭐라 말했다. 하나 바람 소리 같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멀뚱멀뚱 바라만 보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어, 어?”
손가락을 튕기자 내 주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봄바람같이 따뜻한 바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하는 그때.
“이제 내 목소리가 들리나, 인간이여.”
들리지 않아야 할 엘프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무슨! 드, 들려. 아니, 이게 대체…….”
“놀랄 것 없다. 그저 바람의 정령의 도움을 구했을 뿐이니.”
“바람의… 정령?”
“됐다. 별로 인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 본론만 말하겠다. 정말 네가 저 요정을 구해주었나?”
차가운 푸른 눈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다. 놀라운 일들이 가득한지라 머리가 따라가질 못해 정신이 없지만 이건 단순한 질문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신중히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사이 요정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니까요! 이분은 절대로 나쁜 인간이 아니에요!”
“시끄럽다. 난 저 인간에게 물었다.”
“우, 우와! 요정의 목소리도 들리잖아?”
“응? 혹시 제 목소리도 들리나요? 와아! 안 그래도 많이 답답했는데! 와하하!”
요정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내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깔깔거렸다.
뭐, 뭐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감정의 기복이 너무 큰 거 아냐?
“아참,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지!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분은요, 끔찍한 오크들한테서 저를 구해줬어요! ‘이 녀석들! 감히 고귀한 요정님에게 무슨 짓이더냐! 당장 내놓거라!’ 하며 근엄한 얼굴로 손을 내미니, 그 흉포하기 짝이 없는 오크가 글쎄, 설설 기는 고블린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저를 놓아주었다니까요! 그것뿐인 줄 아세요? 그 괴팍하기 짝이 없는 오크에게 온몸을 유린당해 쓰러졌는데, 놀랍게도 손짓 한 번에 죽어가던 저를 살려줬어요! 그땐 얼마나 놀라웠던지! 이것이 바로 기적! 저분은 전설 속의 용사님이 틀림없다니까요! 그렇죠? 제 말이 맞죠, 용사님?”
…제대로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니, 그전에 뭔가 엄청나게 부풀린 듯한 내용도 많은 것 같습니다만…….
“저 말이 사실인가?”
난 그저 쓰게 웃었다.
“아이 참, 사실이라니까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용사님은 저를 무려 두 번이나 구해줬어요! 질척거리는 오크 독에 당해 꼼짝도 할 수 없던 저를 찬란하기 그지없는 손으로 성수를 뿌려 정화해 줬을 땐 정말이지… 아아, 내가 평생 따라다닐 용사님을 드디어 찾았구나 하고…….”
“그만! 그마안! 닥쳐라!”
어째서일까? 흰머리 남성 엘프가 저리 짜증내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간다.
사실 저 요정… 엄청나게 말 많은 애였구나…….
“장난과 허황만을 입에 담고 사는 요정의 말 따위 믿지 못하겠다! 네가 우리와 같은 요정족이 아니었다면 이미 단칼에 베어버렸을 것이다!”
흰머리 엘프가 잔뜩 화난 얼굴로 엄포를 놓자 요정은 무서웠는지 어깨를 좁히며 은근슬쩍 내 머리 뒤로 숨었다. 그럼에도 내 귓가에 ‘옹고집만 가득한 얼음땡이 엘프 할아범’ 하고 소곤거리는 걸 보니, 정말 당찬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이여, 다시 묻겠다! 정말 저 요정을 구해주었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되묻는 질문. 난 잠시 눈을 감고 고심하다 옆에 있는 요정을 돌아보았다.
“요정아, 이름이… 뭐야?”
“네? 저요? 아, 그렇죠! 이름! 저희 서로 이름도 몰랐네요? 레플리아, 제 이름은 레플리아예요! 용사님!”
“하아, 하아. 레플리아,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내 이름은… 강현호. 용사 같은 게 아냐.”
“인간! 지금 내 물음을 무시……!”
“그럼 이제… 답하죠.”
흰머리 엘프의 말을 잘라 버리며 말했다. 덕분에 그는 인상을 팍 찌푸렸는데, 뭐라 따지지 못해 화를 삭이는 느낌이었다.
“구해주었느냐…고요? 하아, 하아. 저는 오히려 반대로 레플리아에게 구원 받았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독방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을 때… 레플리아가 없었더라면, 아까 화살이 언제 쏘아질지 모를 위협 속에서 내 앞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지도 못했겠죠. 하아, 하아. 아까 말씀 들어보니 레플리아가 당신들과 같은 요정족이라고… 하셨죠? 정말 놀랍더군요. 어떻게 당신들과 레플리아가 같은 종족일 수가… 있죠? 장난과 허황만을 입에 담고 사는 레플리아가 다짜고짜 무고한 사람을 끌고 와 살해하려는 당신들보다… 더 요정 같은데 말이죠. 하아, 하아. 그래서 구해주었느냐…고요? 이제 제게 있어서 레플리아는 무척 소중한 은인입니다. 앞으로도 제 능력이 닿는다면, 인연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기필코 구할 겁니다. 하아, 하아. 이제 답이 되셨습니까?”
“…….”
“…….”
에릴을 포함해 레플리아까지 멍하니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 지금 나는 상당히 화났다. 어째서 에릴과 내가 죄인인 양 묶여서 심문받아야 하는 거지?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개 숙이며 상대의 표정을 살펴야 하지?
웃기지 마라. 죽든 살든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
“이, 이, 인간 놈이 감히……!”
엘프를 싸잡아 비꼬았다는 걸 알아챈 것인지, 흰머리 엘프는 이마에 힘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괜히 지뢰를 건든 게 아닌가 하고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시작한 거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힘껏 비웃어주었다.
“처형식을 다시 속행한다! 지금 당장 저 인간을 죽여……!”
“이제 그만하세요. 역시 이런 방식은 저희답지 않아요.”
역시 화를 불렀나 하고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 내 앞을 막아섰다.
향긋한 백합꽃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동시에 빛에 반사되는 흰 머리칼이 내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내게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칼 사이로 뾰족한 귀가 보였기에 그자 역시 엘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8장 엘프(3)
“세계수라는 나무예요. 저들은 세계수의 힘을 근간으로 살아가는, 요정에 가까운 종족이에요. 엘프가 있는 곳엔 언제나 세계수가 존재하며, 세계수가 없으면 엘프도 살아갈 수 없다고 들은 적이 있어요.”
에릴에 말대로 엘프는 저 나무에서 생활하는지 나뭇가지엔 새둥지가 연상되는 집들이 빼곡히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거대한 나무가 세계수고… 저들은 요정…이라고?”
그때, 엘프들이 나뭇가지 위에서 우릴 내려다보는 걸 뒤늦게 알아챘다. 수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많아야 백 명? 남녀,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다양했지만, 이상하게도 노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것뿐만 아니라 놀라울 정도로 하나같이 외모가 아름다웠다. 아까 나를 끌고 왔던 남성 둘도 외모가 무척 뛰어났던 걸로 보면, 저런 외모가 저들에겐 평범한 측에 속하는 것 같았다.
이제야 어째서 저들이 방어적 성향으로 서쪽 지역을 지키려 했던 건지 알 수 있었다. 오크에 비해 몹시 적은 수, 그리고 세계수가 없으면 살 수 없기에 어쩔 수 없던 거다.
“잠깐, 그렇다면 더… 이상하잖아. 어째서 저들은 오크 영역을 침범해… 우릴 납치한 거지?”
“저도 그게 쭉 의문이었어요. 제가 알기론 엘프는 매우 현명하고 이성적인 종족이라고 들었어요. 이렇게 막무가내로 해코지할 자들이 아니에요.”
“내가 보기엔 그건… 잘못된 얘기 같은데?”
얼핏 보기에도 마치 원수라도 대하는 것처럼 적대감이 가득해 보인 터라 현명하고 이성적인 종족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어쨌거나 우리가 살려면 에릴, 네 도움이 필요해. 그러니까…….”
“알아요. 엘프와 입맞춤하면 되는 거죠? 기회가 된다면 노력해 볼게요. 하지만 현호 님, 더는 무리하지 마세요.”
이미 무리할 기력도 없지만, 일단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은 대화가 통한다 해도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저들에 대한 정보가 너무도 적었으니까. 그래도 정말 대화를 나눌 수만 있다면 작은 희망이라도 찾아보겠는데…….
“제기…랄,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는 건가.”
절망적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불과 50m쯤 떨어진 거리에서 마치 처형식이라도 거행하려는 것처럼 두 명의 엘프가 에릴과 나를 향해 화살을 겨누었기 때문이다.
“잠깐만 기다려!”
다급한 마음에 소리 질렀지만, 우릴 향해 화살을 겨눈 두 엘프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이럴 순 없어!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로 죽을 순 없단 말이다!
온 힘을 다해 몸부림쳐 봤지만, 줄은 단단히 묶여 있어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에릴도 걱정 가득한 얼굴로 나를 돌아보고 있었다.
젠장, 방법이… 뭔가 방법이 없을까?
그사이 우리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는 두 사수 사이로 한 인물이 나타났다. 다른 엘프들과 다르게 머리가 흰색인 남성이었는데, 한눈에 봐도 지위가 높은 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자는 마치 명령하듯 살짝 손을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두 사수의 시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설마 정말 이대로 아무것도 못하고 당하는 거냐!
“이, 이럴 순 없어! 제발, 으아아아아악!”
흰머리 엘프의 손이 떨어지는 순간, 나도 모르게 고개를 틀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느껴져야 할 통증이 찾아오지 않았다. 혹시 빗나간 걸까?
“요, 요정아!”
용기를 쥐어짜 내 질끈 감고 있던 눈을 뜨니 놀랍게도 가슴 폭에 숨어 있던 요정이 내 앞으로 튀어나와 두 팔 벌려 막아주고 있었다. 엘프들도 깜짝 놀란 것인지 차마 화살을 날리지 못한 것 같았다.
“현호 님, 그 요정은 설마…….”
“으, 으응. 우리가 구해줬던 그 요정이야. 우연히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그것보다 뭔가 분위기가 돌변하고 있어.”
요정이 등장한 순간, 흰머리 엘프를 포함해 세계수 나무 위에서 지켜보고 있던 모든 엘프들까지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는데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요정은 꿋꿋이 내 앞을 막아선 채로 뭐라 외치고 있었다. 나에겐 그저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지만, 요정은 저들과 대화를 나누려는 것으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요정족은 같은 바람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그랬지? 그렇다면!
내 생각이 적중한 듯 흰머리 엘프도 바람 같은 소리를 내며 요정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절대 착각이 아니었다. 둘이 싸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인상까지 써가며 소통하고 있는데, 어찌 대화하는 게 아니라 할 수 있겠는가.
에릴과 난 숨죽여 상황을 지켜봤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타협점을 찾은 것인지 흰머리 엘프가 손을 뒤로 휘저어 두 사수의 공격을 멈추게 했다.
서, 설마 우리 산… 건가?
에릴과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에릴 역시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사이 흰머리 엘프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다시 한차례 요정과 대화하더니 내 앞까지 다가와 멈췄다.
그는 나에게 뭐라 말했다. 하나 바람 소리 같은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 멀뚱멀뚱 바라만 보자 그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갑자기 손가락을 튕겼다.
“어, 어?”
손가락을 튕기자 내 주위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봄바람같이 따뜻한 바람이었다. 이게 무슨 일인지 생각하는 그때.
“이제 내 목소리가 들리나, 인간이여.”
들리지 않아야 할 엘프의 말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뭐, 무슨! 드, 들려. 아니, 이게 대체…….”
“놀랄 것 없다. 그저 바람의 정령의 도움을 구했을 뿐이니.”
“바람의… 정령?”
“됐다. 별로 인간과 말을 섞고 싶지 않으니 본론만 말하겠다. 정말 네가 저 요정을 구해주었나?”
차가운 푸른 눈만큼이나 싸늘한 목소리다. 놀라운 일들이 가득한지라 머리가 따라가질 못해 정신이 없지만 이건 단순한 질문이 아니란 것을 깨닫고 신중히 말을 고르고 있는데, 그사이 요정이 끼어들었다.
“그렇다니까요! 이분은 절대로 나쁜 인간이 아니에요!”
“시끄럽다. 난 저 인간에게 물었다.”
“우, 우와! 요정의 목소리도 들리잖아?”
“응? 혹시 제 목소리도 들리나요? 와아! 안 그래도 많이 답답했는데! 와하하!”
요정은 뭐가 그리 좋은지 내 주위를 날아다니면서 깔깔거렸다.
뭐, 뭐지? 조금 전까지만 해도 걱정 가득한 얼굴이었는데… 감정의 기복이 너무 큰 거 아냐?
“아참, 내 정신 좀 봐! 이럴 때가 아니지! 아까도 말했다시피 이분은요, 끔찍한 오크들한테서 저를 구해줬어요! ‘이 녀석들! 감히 고귀한 요정님에게 무슨 짓이더냐! 당장 내놓거라!’ 하며 근엄한 얼굴로 손을 내미니, 그 흉포하기 짝이 없는 오크가 글쎄, 설설 기는 고블린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저를 놓아주었다니까요! 그것뿐인 줄 아세요? 그 괴팍하기 짝이 없는 오크에게 온몸을 유린당해 쓰러졌는데, 놀랍게도 손짓 한 번에 죽어가던 저를 살려줬어요! 그땐 얼마나 놀라웠던지! 이것이 바로 기적! 저분은 전설 속의 용사님이 틀림없다니까요! 그렇죠? 제 말이 맞죠, 용사님?”
…제대로 많은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만. 아니, 그전에 뭔가 엄청나게 부풀린 듯한 내용도 많은 것 같습니다만…….
“저 말이 사실인가?”
난 그저 쓰게 웃었다.
“아이 참, 사실이라니까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용사님은 저를 무려 두 번이나 구해줬어요! 질척거리는 오크 독에 당해 꼼짝도 할 수 없던 저를 찬란하기 그지없는 손으로 성수를 뿌려 정화해 줬을 땐 정말이지… 아아, 내가 평생 따라다닐 용사님을 드디어 찾았구나 하고…….”
“그만! 그마안! 닥쳐라!”
어째서일까? 흰머리 남성 엘프가 저리 짜증내는 게 조금은 이해가 간다.
사실 저 요정… 엄청나게 말 많은 애였구나…….
“장난과 허황만을 입에 담고 사는 요정의 말 따위 믿지 못하겠다! 네가 우리와 같은 요정족이 아니었다면 이미 단칼에 베어버렸을 것이다!”
흰머리 엘프가 잔뜩 화난 얼굴로 엄포를 놓자 요정은 무서웠는지 어깨를 좁히며 은근슬쩍 내 머리 뒤로 숨었다. 그럼에도 내 귓가에 ‘옹고집만 가득한 얼음땡이 엘프 할아범’ 하고 소곤거리는 걸 보니, 정말 당찬 성격이 아닐 수 없었다.
“인간이여, 다시 묻겠다! 정말 저 요정을 구해주었나?”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되묻는 질문. 난 잠시 눈을 감고 고심하다 옆에 있는 요정을 돌아보았다.
“요정아, 이름이… 뭐야?”
“네? 저요? 아, 그렇죠! 이름! 저희 서로 이름도 몰랐네요? 레플리아, 제 이름은 레플리아예요! 용사님!”
“하아, 하아. 레플리아, 아름다운 이름이구나. 내 이름은… 강현호. 용사 같은 게 아냐.”
“인간! 지금 내 물음을 무시……!”
“그럼 이제… 답하죠.”
흰머리 엘프의 말을 잘라 버리며 말했다. 덕분에 그는 인상을 팍 찌푸렸는데, 뭐라 따지지 못해 화를 삭이는 느낌이었다.
“구해주었느냐…고요? 하아, 하아. 저는 오히려 반대로 레플리아에게 구원 받았습니다. 만약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독방에서 사흘 동안 갇혀 있을 때… 레플리아가 없었더라면, 아까 화살이 언제 쏘아질지 모를 위협 속에서 내 앞을 막아서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제정신으로 말하고 있지도 못했겠죠. 하아, 하아. 아까 말씀 들어보니 레플리아가 당신들과 같은 요정족이라고… 하셨죠? 정말 놀랍더군요. 어떻게 당신들과 레플리아가 같은 종족일 수가… 있죠? 장난과 허황만을 입에 담고 사는 레플리아가 다짜고짜 무고한 사람을 끌고 와 살해하려는 당신들보다… 더 요정 같은데 말이죠. 하아, 하아. 그래서 구해주었느냐…고요? 이제 제게 있어서 레플리아는 무척 소중한 은인입니다. 앞으로도 제 능력이 닿는다면, 인연이 끊어지지 않는다면… 기필코 구할 겁니다. 하아, 하아. 이제 답이 되셨습니까?”
“…….”
“…….”
에릴을 포함해 레플리아까지 멍하니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래, 지금 나는 상당히 화났다. 어째서 에릴과 내가 죄인인 양 묶여서 심문받아야 하는 거지? 대체 우리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고개 숙이며 상대의 표정을 살펴야 하지?
웃기지 마라. 죽든 살든 하고 싶은 말은 해야겠다.
“이, 이, 인간 놈이 감히……!”
엘프를 싸잡아 비꼬았다는 걸 알아챈 것인지, 흰머리 엘프는 이마에 힘줄이 불거져 나올 정도로 화를 내기 시작했다. 괜히 지뢰를 건든 게 아닌가 하고 후회도 들었지만, 이미 시작한 거 끝까지 해보자는 마음으로 힘껏 비웃어주었다.
“처형식을 다시 속행한다! 지금 당장 저 인간을 죽여……!”
“이제 그만하세요. 역시 이런 방식은 저희답지 않아요.”
역시 화를 불렀나 하고 인상을 찌푸리던 그때, 누군가가 나타나 내 앞을 막아섰다.
향긋한 백합꽃 향기가 코끝을 스쳤다. 동시에 빛에 반사되는 흰 머리칼이 내 눈가를 스쳐 지나갔다. 내게는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머리칼 사이로 뾰족한 귀가 보였기에 그자 역시 엘프라는 걸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