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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21화)
8장 엘프(2)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문이 닫힌 순간, 빛이 완전히 차단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지금 내가 갇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조차 안 되는 지경이다.
“하아, 하아.”
어둡고 밀폐된 공간 속에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 있으려니 극도로 공포가 몰려와 숨이 가빠졌다.
“아윽!”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가 대보니 피가 흥건하다. 제길, 지금 당장 꿰매지 않으면 상처가 곪을 거야. 하지만 소독할 약도, 꿰맬 의료 도구도…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내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사위가 어둡다.
어쩔 수 없이 치료를 포기한 나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벽 끝까지 기어가 등을 기댄 채 웅크려 앉았다.
전신에 소름이 끼친다. 쉴 새 없이 몸이 떨린다. 어깨에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에릴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나는 이대로 죽는 걸까? 이렇게 허무하게? 이제 조금 적응되었나 싶었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이런 곳에서 죽는 거야? 살려줘.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부탁이야! 누가 제발 나 좀 구해줘!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공포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때, 눈앞으로 작은 빛이 보였다. 신기할 정도로 은은한, 마치 반딧불을 보는 것 같은 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너, 넌… 요…정?”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요정은 내 주위를 한 바퀴 선회하더니, 다시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내 가슴팍 안으로 숨어들었던 것이 뒤늦게 기억났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야.
대체 이 조그만 녀석이 뭐라고… 지금 이 자리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지 놀랍도록 떨림이 사그라졌다.
“하하, 하하하… 나 때문에 괜히 너까지 잡혀왔구… 으윽!”
요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어깨 통증에 괴로워하자 요정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상처 난 어깨 쪽으로 다가왔다.
“으윽, 하아, 하아.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나을… 뭐하는… 거야?”
요정은 내 어깨 상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뜬금없이 상처 부위를 향해 날개를 털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에 봤던, 빛나는 요정의 가루가 흩뿌려져 상처에 스며들었는데… 그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무, 무슨… 이건……!”
처음엔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다. 요정의 빛이 있지만 그럼에도 주위는 어둑어둑했기 때문에 눈이 침침해 잘못 본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마치 세포가 급속도로 증식해 자연스럽게 찢어진 곳을 뒤덮는 느낌이랄까? 덕분에 새살이 덧씌워진 자국이 남았는데, 누가 이걸 단 몇 분 만에 나은 상처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요정의 가루는… 이런 효능이 있던 거야?”
그러고 보니 전에 에릴이 했던 말이 얼핏 기억났다. 요정의 가루는 빛나는 것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뭔가 더 있다고.
그게 바로 치유 능력이었던 거야!
통증도 사그라졌다. 그래도 살짝 움직여 보니 아직 근육 통증이 남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요정의 가루는 피부에만 듣는, 연고 같은 효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상당히 깊은 상처였는데 한순간에 아물 정도의 치유 능력이라니. 이 정도라면 어느 연고 업체도 따라올 수 없는 효능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의료계의 혁명이 아닐까?
“고맙다… 정말 고마워…….”
난 혹시라도 도망갈세라 손으로 빛을 끌어안듯 요정을 살며시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요정은 내 유일한 희망이 되어주었다.
“하아, 하아.”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독방에 갇혀 있으려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투아에 장식된 날카로운 뼈로 벽에 줄을 그어가며 시간을 가늠했지만, 그것도 이젠 몸에 힘이 없어 관뒀다.
방구석엔 내가 싼 오물이 썩어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렇게 되도록 엘프는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이대로 굶겨 죽이려는 걸까?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있으려니 어릴 때 의사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던 일부터 한국대학에 입학해 의예과, 의학과를 거쳐 고달픈 인턴 생활들, 그 후 흉부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해 레지던트를 거쳐 본격적인 전문의로서… 신의라 추앙 받던 일들까지 전부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처음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지만, 밀폐된 어두운 공간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삶의 의지가 약해졌다.
“그래도… 하아, 하아. 네가 아니었다면… 이만큼도 견디지… 못했을 거야…….”
내 손바닥 위에서 고이 잠을 청하고 있는 요정을 내려다보았다. 은은히 빛나는 빛이 나에게 정말 커다란 희망이 되어주었다는 걸 이 작은 요정은 알까?
“하아, 하아. 빌어…먹을.”
끈질기게 버티고 또 버텼건만, 결국 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나.
정말 화가 난다. 영문도 모른 채 죽는 게 너무도 억울하다. 어째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들이 나를 이리 대한단 말인가!
온 힘을 쥐어짜 엉금엉금 자물쇠가 채워진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힘없는 팔로 문을 두드렸다. 나를 봐달라고, 제발 이 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며.
“제발, 열어…달라고!”
지금쯤 오크들은 어찌하고 있을까? 에릴은 또 어떤 상황일까?
나와 달리 그녀는 곁에 요정도 없다. 얼마나 외로울까? 또 얼마나 무서울까? 처음 갇혔던 날 밤새도록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아 부르짖진 않았을까? 아직도 홀로 공포에 떨며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설마… 이미 포기해 버린 건…….
철컥.
소름 끼치는 상상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던 그때, 갑자기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벽 같은 문이 아무런 마찰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린 것이다.
나는 멍청하게 문 앞에 서 있는 두 뾰족 귀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그 둘은 처음 나를 가둔 자들이었다.
“컥!”
그들은 내가 문을 두드렸다는 것에 화난 것인지, 우측에 있던 남성이 발끝으로 내 명치를 후려쳤다. 순간, 숨이 턱 막혀 바닥을 굴렀다. 여태껏 먹은 게 없어 애꿎은 위액만 토했다.
“너… 이…….”
뭐라 욕이라도 쏟아붓고 싶었지만, 꽉 막힌 신음만 새어 나왔다.
머리가 어지럽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뾰족 귀 남성 둘은 그런 나를 한동안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이내 각 좌우에서 내 양손을 잡고 독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들에게 내 몸 상태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것인지, 몸이 바닥에 질질 끌리든 말든 말 그대로 가축처럼 끌고 가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겨났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다행이라 여겼다. 솔직히 내 발로 걸어가는 게 더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크윽.”
얼마나 끌려갔을까,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온 건지 강렬한 태양이 눈을 찔렀다. 그렇게나 바라던 빛이건만 고개를 숙여 빛을 피하기 바쁘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요정은 기분 좋은 걸까? 가운 주머니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혀, 현호 님!”
한창 빛을 피하고 있는 그때, 귓가로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가까스로 눈을 떠 앞을 보았다.
“에…릴!”
경악스럽게도 에릴은 십자가 모양의 나무 기둥에 예수처럼 묶여 있었다.
어찌 여자를 이리 대할 수가! 저들은 인정이란 것도 없단 말인가!
하지만 에릴은 오히려 자신보다도 내가 더 걱정스러운지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어, 어쩜 이럴 수가! 당신들, 뭐하는 짓이야!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흐어엉! 얼굴이 그게 뭐예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건가요? 저들이 그토록 현호 님을, 현호 님을! 이 짐승만도 못한 자들!”
에릴이 이토록 화내는 건 처음 봤다. 근 2년을 항상 붙어 다니다시피 했는데, 정말 저토록 격정하는 건 처음 본다.
나를 끌고 온 뾰족 귀 남성 둘은 그런 에릴의 말이 안 들리는지 들은 체도 안 하고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나무 기둥에 나를 묶곤 자리를 떠났다.
“에릴… 진정해. 나는…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저는 현호 님이 그런 줄도 모르고, 저만… 저만!”
에릴은 발버둥 치며 괴로워했다. 묶여 있는 줄에 쓸려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그녀는 격분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탈출하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저만… 저만 편안하게……!”
에릴은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도록 울었다. 그렇게나 우는 모습도 처음 본다. 그나저나 에릴은 조금 편한 대우를 받았던 건가? 나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천만다행이다.
“이제… 그만. 에릴, 뚝.”
“히끅, 히끅.”
이제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인어는 코를 훌쩍거리며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모습까지도 귀여웠다.
“하아, 하아. 나를 위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보다 다시없을 이 기회를 잡는 게 우선인 것… 같아. 내 말… 이해하지?”
에릴은 여전히 울음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그런 에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미소 짓곤 말했다.
“우리가 잡혀 온 지 얼마나… 지났지?”
“히끅, 사흘이에요.”
사흘인가……. 일주일 이상 지난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하아, 하아. 그럼 혹시… 저들이 우리를 어찌하려는 건지… 에릴은 알아?”
혹시나 하고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에릴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바람의 언어는 듣지 못해서 사정은 몰라요.”
“바람의… 언어? 잠깐. 그거, 전에 요정족만이 사용한다는 언어라고 하지 않았어?”
“네. 엘프는 요정족이니까요.”
“뭐라고?”
내가 놀라자 에릴은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엘프는 숲의 조율자, 또는 조화의 요정이라 불리는 종족이에요. 저기를 보세요.”
에릴이 턱짓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나무라고?”
아까 내가 빠져나온 동굴 입구를 뒤덮고 있는 저 나무는 정말 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
8장 엘프(2)
아는 게 하나도 없어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문이 닫힌 순간, 빛이 완전히 차단돼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 지금 내가 갇혀 있는 이곳이 어디인지 파악조차 안 되는 지경이다.
“하아, 하아.”
어둡고 밀폐된 공간 속에 아무것도 모른 채 혼자 있으려니 극도로 공포가 몰려와 숨이 가빠졌다.
“아윽!”
상처 부위에 손을 가져가 대보니 피가 흥건하다. 제길, 지금 당장 꿰매지 않으면 상처가 곪을 거야. 하지만 소독할 약도, 꿰맬 의료 도구도…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내 몸 하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사위가 어둡다.
어쩔 수 없이 치료를 포기한 나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어 벽 끝까지 기어가 등을 기댄 채 웅크려 앉았다.
전신에 소름이 끼친다. 쉴 새 없이 몸이 떨린다. 어깨에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통증이 심해 눈물까지 그렁그렁 맺혔다.
에릴은 지금 어찌 되었을까? 나는 이대로 죽는 걸까? 이렇게 허무하게? 이제 조금 적응되었나 싶었는데, 아무것도 못하고 이런 곳에서 죽는 거야? 살려줘. 나는 아직 죽고 싶지 않아. 부탁이야! 누가 제발 나 좀 구해줘!
이가 딱딱 부딪칠 정도로 공포를 주체하지 못하던 그때, 눈앞으로 작은 빛이 보였다. 신기할 정도로 은은한, 마치 반딧불을 보는 것 같은 빛이 나를 사로잡았다.
“너, 넌… 요…정?”
내가 멍하니 중얼거리자 요정은 내 주위를 한 바퀴 선회하더니, 다시 눈앞으로 다가왔다.
그러고 보니 이 녀석, 내 가슴팍 안으로 숨어들었던 것이 뒤늦게 기억났다. 그랬구나, 그랬던 거야.
대체 이 조그만 녀석이 뭐라고… 지금 이 자리에 혼자가 아니라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지 놀랍도록 떨림이 사그라졌다.
“하하, 하하하… 나 때문에 괜히 너까지 잡혀왔구… 으윽!”
요정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려다 어깨 통증에 괴로워하자 요정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더니 상처 난 어깨 쪽으로 다가왔다.
“으윽, 하아, 하아. 괜찮아. 시간이 지나면 나을… 뭐하는… 거야?”
요정은 내 어깨 상처를 유심히 바라보더니 뜬금없이 상처 부위를 향해 날개를 털기 시작했다. 그러자 전에 봤던, 빛나는 요정의 가루가 흩뿌려져 상처에 스며들었는데… 그 순간, 나는 경악하고 말았다.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한 것이다.
“무, 무슨… 이건……!”
처음엔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다. 요정의 빛이 있지만 그럼에도 주위는 어둑어둑했기 때문에 눈이 침침해 잘못 본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정말 상처가 아물어가고 있었다.
마치 세포가 급속도로 증식해 자연스럽게 찢어진 곳을 뒤덮는 느낌이랄까? 덕분에 새살이 덧씌워진 자국이 남았는데, 누가 이걸 단 몇 분 만에 나은 상처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보면 볼수록 신기하기 그지없는 모습이었다.
“요정의 가루는… 이런 효능이 있던 거야?”
그러고 보니 전에 에릴이 했던 말이 얼핏 기억났다. 요정의 가루는 빛나는 것뿐만 아니라 그밖에도 뭔가 더 있다고.
그게 바로 치유 능력이었던 거야!
통증도 사그라졌다. 그래도 살짝 움직여 보니 아직 근육 통증이 남아 있었는데, 아무래도 요정의 가루는 피부에만 듣는, 연고 같은 효능이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렇지, 상당히 깊은 상처였는데 한순간에 아물 정도의 치유 능력이라니. 이 정도라면 어느 연고 업체도 따라올 수 없는 효능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의료계의 혁명이 아닐까?
“고맙다… 정말 고마워…….”
난 혹시라도 도망갈세라 손으로 빛을 끌어안듯 요정을 살며시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그렇게 요정은 내 유일한 희망이 되어주었다.
“하아, 하아.”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독방에 갇혀 있으려니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자고 일어날 때마다 투아에 장식된 날카로운 뼈로 벽에 줄을 그어가며 시간을 가늠했지만, 그것도 이젠 몸에 힘이 없어 관뒀다.
방구석엔 내가 싼 오물이 썩어 지독한 냄새가 진동했다. 이렇게 되도록 엘프는 음식은커녕 물 한 모금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그들은 나를 이대로 굶겨 죽이려는 걸까?
차가운 돌바닥에 누워 있으려니 어릴 때 의사가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공부했던 일부터 한국대학에 입학해 의예과, 의학과를 거쳐 고달픈 인턴 생활들, 그 후 흉부외과를 전공으로 선택해 레지던트를 거쳐 본격적인 전문의로서… 신의라 추앙 받던 일들까지 전부 하나하나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처음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마음을 다잡았지만, 밀폐된 어두운 공간은 내 마음을 뒤흔들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삶의 의지가 약해졌다.
“그래도… 하아, 하아. 네가 아니었다면… 이만큼도 견디지… 못했을 거야…….”
내 손바닥 위에서 고이 잠을 청하고 있는 요정을 내려다보았다. 은은히 빛나는 빛이 나에게 정말 커다란 희망이 되어주었다는 걸 이 작은 요정은 알까?
“하아, 하아. 빌어…먹을.”
끈질기게 버티고 또 버텼건만, 결국 저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구나.
정말 화가 난다. 영문도 모른 채 죽는 게 너무도 억울하다. 어째서! 내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저들이 나를 이리 대한단 말인가!
온 힘을 쥐어짜 엉금엉금 자물쇠가 채워진 문으로 다가갔다. 그러곤 힘없는 팔로 문을 두드렸다. 나를 봐달라고, 제발 이 문을 열어달라고… 간절히 애원하며.
“제발, 열어…달라고!”
지금쯤 오크들은 어찌하고 있을까? 에릴은 또 어떤 상황일까?
나와 달리 그녀는 곁에 요정도 없다. 얼마나 외로울까? 또 얼마나 무서울까? 처음 갇혔던 날 밤새도록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아 부르짖진 않았을까? 아직도 홀로 공포에 떨며 울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설마… 이미 포기해 버린 건…….
철컥.
소름 끼치는 상상에 몸이 부들부들 떨려오던 그때, 갑자기 굳건히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벽 같은 문이 아무런 마찰 소리도 없이 스르륵 열린 것이다.
나는 멍청하게 문 앞에 서 있는 두 뾰족 귀 남성을 올려다보았다. 그 둘은 처음 나를 가둔 자들이었다.
“컥!”
그들은 내가 문을 두드렸다는 것에 화난 것인지, 우측에 있던 남성이 발끝으로 내 명치를 후려쳤다. 순간, 숨이 턱 막혀 바닥을 굴렀다. 여태껏 먹은 게 없어 애꿎은 위액만 토했다.
“너… 이…….”
뭐라 욕이라도 쏟아붓고 싶었지만, 꽉 막힌 신음만 새어 나왔다.
머리가 어지럽다. 정신이 혼미해져서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
뾰족 귀 남성 둘은 그런 나를 한동안 비웃음 가득한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이내 각 좌우에서 내 양손을 잡고 독방 밖으로 끌고 나갔다.
그들에게 내 몸 상태는 전혀 고려 대상이 아닌 것인지, 몸이 바닥에 질질 끌리든 말든 말 그대로 가축처럼 끌고 가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생겨났다. 하지만 오히려 나는 다행이라 여겼다. 솔직히 내 발로 걸어가는 게 더 힘들 지경이었으니까.
“크윽.”
얼마나 끌려갔을까, 어두운 동굴 밖으로 나온 건지 강렬한 태양이 눈을 찔렀다. 그렇게나 바라던 빛이건만 고개를 숙여 빛을 피하기 바쁘니,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도 요정은 기분 좋은 걸까? 가운 주머니 안에서 꿈틀거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혀, 현호 님!”
한창 빛을 피하고 있는 그때, 귓가로 너무도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가까스로 눈을 떠 앞을 보았다.
“에…릴!”
경악스럽게도 에릴은 십자가 모양의 나무 기둥에 예수처럼 묶여 있었다.
어찌 여자를 이리 대할 수가! 저들은 인정이란 것도 없단 말인가!
하지만 에릴은 오히려 자신보다도 내가 더 걱정스러운지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기 시작했다.
“어, 어쩜 이럴 수가! 당신들, 뭐하는 짓이야! 당장 그 손 놓지 못해! 흐어엉! 얼굴이 그게 뭐예요!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건가요? 저들이 그토록 현호 님을, 현호 님을! 이 짐승만도 못한 자들!”
에릴이 이토록 화내는 건 처음 봤다. 근 2년을 항상 붙어 다니다시피 했는데, 정말 저토록 격정하는 건 처음 본다.
나를 끌고 온 뾰족 귀 남성 둘은 그런 에릴의 말이 안 들리는지 들은 체도 안 하고 옆에 있는 또 하나의 나무 기둥에 나를 묶곤 자리를 떠났다.
“에릴… 진정해. 나는… 괜찮아.”
“뭐가 괜찮아요! 저는 현호 님이 그런 줄도 모르고, 저만… 저만!”
에릴은 발버둥 치며 괴로워했다. 묶여 있는 줄에 쓸려 피가 배어 나오는 것도 모를 정도로 그녀는 격분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이럴 줄 알았다면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탈출하는 건데! 그것도 모르고 저만… 저만 편안하게……!”
에릴은 얼굴이 엉망진창이 되도록 울었다. 그렇게나 우는 모습도 처음 본다. 그나저나 에릴은 조금 편한 대우를 받았던 건가? 나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천만다행이다.
“이제… 그만. 에릴, 뚝.”
“히끅, 히끅.”
이제 남이라고 할 수 없는 이 인어는 코를 훌쩍거리며 가까스로 울음을 참는 모습까지도 귀여웠다.
“하아, 하아. 나를 위해주는 건 고마운데… 그보다 다시없을 이 기회를 잡는 게 우선인 것… 같아. 내 말… 이해하지?”
에릴은 여전히 울음을 참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난 그런 에릴에게 고마움의 표시로 미소 짓곤 말했다.
“우리가 잡혀 온 지 얼마나… 지났지?”
“히끅, 사흘이에요.”
사흘인가……. 일주일 이상 지난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얼마 지나지 않았구나.
“하아, 하아. 그럼 혹시… 저들이 우리를 어찌하려는 건지… 에릴은 알아?”
혹시나 하고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에릴은 고개를 저었다.
“저도 바람의 언어는 듣지 못해서 사정은 몰라요.”
“바람의… 언어? 잠깐. 그거, 전에 요정족만이 사용한다는 언어라고 하지 않았어?”
“네. 엘프는 요정족이니까요.”
“뭐라고?”
내가 놀라자 에릴은 차분히 설명해 주었다.
“엘프는 숲의 조율자, 또는 조화의 요정이라 불리는 종족이에요. 저기를 보세요.”
에릴이 턱짓으로 정면을 가리켰다. 나는 그제야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큰 나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저게… 나무라고?”
아까 내가 빠져나온 동굴 입구를 뒤덮고 있는 저 나무는 정말 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