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이세계 닥터 1권(25화)
9장 전쟁(3)
“인간! 어찌 여기에! 설마!”
뒤늦게 냉정함을 되찾은 엘프 대족장이 험악한 눈초리로 내가 내려온 언덕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라이리즈와 에릴이 나를 뒤따라 허겁지겁 내려오고 있었다.
“라이리즈, 네가… 네가 결국!”
상황을 파악한 엘프 대족장이 격분했다.
“우하하하! 동료들아, 본다! 저 분노한 엘프 놈의 얼굴을! 통쾌하다! 통쾌해!”
“역시 닥터를 납치한 건 엘프 놈들이었다! 지금이다! 긍지 높은 동료들아! 엘프 놈들을 때려눕힌다!”
“워어어어어어어어!”
“기, 기다려라! 닥터가 다친다! 우선 닥터를 구하라!”
내가 죽지 않았다는 기쁨과 적을 향한 분노가 겹쳐지며 오크들이 더 흉포하게 포효했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은 오크 대족장만이 상황을 파악하고 재빨리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만약 그대로 다시 전투가 벌어졌더라면 엘프와 오크 중간에 위치한 나는… 필시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처럼 전쟁의 겁화 속에 묻혀 버렸겠지.
“이런! 이대로 인간을 놓쳐선 안 된다! 형제자매들이여! 저 흑마법사를 죽여라!”
“기다려! 잠시 싸움을 멈추고 내 말 좀… 제기랄!”
내 목소리가 함성에 묻혀 버렸다. 몇몇 엘프는 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시하는 느낌이었다.
전쟁의 열기는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힌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방법이 없을까?
문득 목에 걸고 있는 투아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이라면 오크를 막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이 공격을 멈춰줄까? 오히려 투아를 쓰면 일방적으로 오크만 당하는 게 아닐까?
“닥터, 구한다! 엘프 놈들의 화살 막는다! 으아악!”
그사이 엘프들이 나를 향해 무자비하게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당황한 오크들이 직접 몸을 던져 나를 화살의 위협으로부터 막아주었다.
순식간에 내 주위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빼곡히 박혔고, 몇몇 방패를 든 오크가 내 앞에서 쓰러졌다. 투박한 나무 방패로는 화살을 전부 막을 수 없어 온몸이 꿰뚫린 것이다.
“닥터… 산다. 쿨럭, 쿨럭. 나 은혜… 갚는…….”
심장에 박힌 화살을 손으로 잡은 채 연신 피를 토하던 오크는 마지막 말조차 다 끝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자는 한때 자신 집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하자고 나에게 청하던 오크였다. 그 옆에 온몸이 꿰뚫린 채 죽은 오크는 덕분에 작물이 잘 자랐다며 내 품에 감자를 한 아름 안겨주던, 순박한 어린 오크였다.
“닥터! 물러난다! 막을 수 없… 크아악!”
“도망간다! 우리가 막는다! 어서 도망간다!”
“창을 던진다! 엘프 놈들을 죽인다!”
오크들도 창을 던져 반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은 유효했는지 투박한 창에 몸이 꿰뚫려 죽는 엘프를 볼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 눈앞에선 방패를 든 오크들이 속속 죽어 나갔다. 이대로는 나를 지켜줄 수 없다고 판단한 걸까? 몇몇 오크가 내 가슴을 떠밀었지만, 빗발치는 화살 세례를 무사히 뚫고 도망간다는 건 너무도 요원한 일이었기에 그들도 자신 없어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어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웃으며 함께 생활하던 오크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지혜와 조화의 종족이라는 엘프들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쓰러져 갔다.
이런 모습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어찌 이리도 무력하단 말인가.
“아버님! 싸움을 멈추십시오!”
빗발치는 화살 세례가 일순간 멈췄다. 놀랍게도 한달음에 달려온 라이리즈가 내 앞을 막아선 것이다.
“라, 라이리즈, 네놈! 당장 비키지 못할까!”
격노한 엘프 대족장이 소리 질렀지만, 라이리즈는 단검으로 뒤늦게 날아온 화살을 쳐내며 외쳤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조금만 이자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싸움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습……!”
“엘프 놈, 죽인다!”
라이리즈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내 앞에서 방패를 들고 있던 오크가 어디서 주워 든 건지 단검을 꺼내 라이리즈의 등을 찔러갔다.
난 저 오크가 엘프어를 알아듣지 못해 라이리즈를 적으로 오해했다는 걸 알아챘는데, 그 생각보다도 발이 먼저 움직였다.
푹!
“으윽!”
아슬아슬하게 몸을 던져 라이리즈를 지켰다. 등에서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오크도 한순간 힘을 푼 것인지 깊게 박힌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괘, 괜찮습니까!”
“어, 어째서! 닥터, 왜 내 앞을 막은 건가!”
놀란 라이리즈가 다급히 나를 부축했다. 단검을 찌른 오크는 무척 당황한 것인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저게 무슨…….”
“라이리즈 님을… 구했어?”
내가 라이리즈를 구한 모습을 본 엘프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엘프 대족장의 눈은 너무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감각적으로 깨달았다.
이거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분위기를 뒤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라이…리즈, 엘프를 막아서요. 전 오크를… 크윽, 막아설게요.”
“네?”
“어서요!”
피를 토하듯 외쳤다. 라이리즈는 허겁지겁 엘프들을 향해 양팔을 벌려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리즈와 등을 맞댄 채 양팔을 벌려 오크들을 막아섰다.
“……!”
“……!”
그렇게 엘프의 적인 내가 오크를, 오크의 적인 라이리즈가 엘프를 막아서자 오크와 엘프들에게서 묘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노리던 게 이것이었군요…….”
뒤늦게 라이리즈도 알아챈 것인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엘프를 막은 라이리즈, 그리고 오크를 막은 내 행동이 먹혀 들어간 것인지, 그 누구도 선뜻 손을 쓰지 못했다. 정말 라이리즈가 아니었다면 이 빌어먹을 잔혹한 전투의 분위기를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현호 님!”
“용사 님!”
그사이 뒤늦게 내게 다가온 에릴과 레플리아를 볼 수 있었다.
에릴은 내게 다가오자마자 다짜고짜 껴안았다. 순간, 등에서 격통이 느껴져 인상을 찌푸리자 눈물 젖은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레플리아도 내 등에 상처를 알아채곤 사색이 된 얼굴로 요정의 가루를 뿌려주었다.
“으윽! 고맙다, 레플리아.”
“용사 님,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무슨 성난 코뿔소처럼 마구 돌진해 간 모습을 볼 땐 정말……. 그래도 전설에 나오는 거룩한 모습이라 조금 멋져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쳐선 다 소용 없는 짓이라고요! 제가 없었으면 어찌 됐겠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저도 전설에 나오는 성녀의 모습 같지 않아요? 용사와 그를 보좌해 주는 성녀. 무척 맘에 드는…….”
이런 위험 속을 뚫고 들어와 상처를 치료해 준 레플리아에겐 정말 고마웠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기에 차분히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 무시하기로 했다.
“모두 잠시만 전투를 멈추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모두 오해입니다. 두 종족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요.”
나는 지금이 적기라고 느껴 차분히 오크어로 말을 시작했다. 엘프들은 내가 오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놀랐는지 살짝 웅성거렸지만, 그 정령인지 뭔지 모를 힘 덕에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난 오크들을 구해준 일부터 2년 동안의 생활 등 처음부터 끝까지 엘프들에게 설명했고, 오크들에겐 저들이 무슨 마음으로 나를 납치했으며 어떠한 기분으로 2년 동안 생활했는지를 알려주었다.
두 종족은 내 말이 진행되는 매 순간순간 어떨 땐 탄성을, 어떨 땐 의심스러운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 라이리즈와 내가 보여주는 행동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믿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자는 오크를 조종하던 게 아니라 오크에게 은혜를 입혀 함께 살고 있었을 뿐이라는 건가?”
“네, 아버님. 전부 오해입니다. 오크가 우리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것도 단지 저들의 식량이 풍족해져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엘프 대족장은 어느 정도 설득되었는지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엘프들로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 말을 믿기 이전에 어쨌거나 오크들의 수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며, 위협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지금 화해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다시 쳐들어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저들로선 휴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설득에 응하는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겨우 백 명 남짓한 적은 인원으로 시작한 전쟁이기에 최후의 최후까지 간다면, 결국 오크에게 멸족당할 운명일 테니까.
이제 거의 다 왔다. 오크는 나를 구하러 왔을 뿐이니까 이대로 엘프만 잘 물러나 준다면…….
“우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 순간, 웃었다. 엘프 대족장이 아니라 반대편 오크 대족장이.
“그게 무슨 말인가, 닥터여! 저들이 우리를 오해한 것도 사실이며, 우리가 닥터를 구하러 온 것도 사실이다! 하나 대지를 보라! 이미 우리 부족은 피를 많이 흘렸다! 피는 피로 갚는다! 어째서 이 싸움을 막으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닥터여! 우리의 투지를 막을 수는 없다! 떠나간 동포들의 한을 적의 피로 씻으리라!”
“워어어어어어어어!”
“흥! 바람의 정령으로 오크 족장의 말을 엿들었던 게 다행이로군. 그래, 좋다! 오늘 누가 이 섬의 주인이 될지 결정하자꾸나! 형제자매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우와아아아아아!”
다시 전쟁의 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혀 설득이 통하지 않았다.
젠장, 멈추지 않는다. 이미 피를 너무 흘려 오히려 오크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역시 이것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내가 고심하며 목에 걸린 투아를 잡아 들자 오크 대족장이 다시 웃었다.
“그래. 우리를 멈추고 싶다면… 닥터, 투아를 들고 명령해라!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돌아가라면 돌아갈 것이다! 다신 싸우지 말라 명령한다면, 닥터가 살아 있는 동안 엘프와 얼굴도 마주하지 않겠다! 하나 지금 흘린 피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닥터가 죽어 투아의 효력이 사라지는 순간, 우린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엘프가 멸종할 그날까지, 긍지로서 복수의 전진을!”
“복수의 전진을!”
“복수의 전진을!”
모든 오크가 복창하듯 복수를 외쳐 댔다. 대족장은 나를 보며 똑바로 말하고 있었다. 진정 자신들을 막고 싶으면 투아를 쓰라고. 차라리 투아를 써 이 자리에서 자신들 전부 죽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복수를 막을 수 없다고…….
난 화가 나기보다도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째서 이들은 복수라는 단어만 부르짖고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에도 자신들의 동료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들은 동료의 피를 다른 자의 피로만 갚으려고 한단 말인가.
그래, 투아를 사용해 달라면 사용해 주겠어. 그것만이 자신들의 복수를 꺾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딴 투아, 얼마든지 사용해 주겠다고!
난 투아를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 투아를 알아본 모든 오크들이 나를 주시했다.
“원한다면 사용하죠. 사용해 드린다고요! 복수만을 원하는, 빌어먹게 긍지 높은 당신들에게 투아를 걸고 명령합니다!”
난 잠시 입을 멈추고 들고 있던 투아를 오크 대족장에게 던졌다.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
<2권에서 계속>
9장 전쟁(3)
“인간! 어찌 여기에! 설마!”
뒤늦게 냉정함을 되찾은 엘프 대족장이 험악한 눈초리로 내가 내려온 언덕을 돌아보았다. 그곳에서는 라이리즈와 에릴이 나를 뒤따라 허겁지겁 내려오고 있었다.
“라이리즈, 네가… 네가 결국!”
상황을 파악한 엘프 대족장이 격분했다.
“우하하하! 동료들아, 본다! 저 분노한 엘프 놈의 얼굴을! 통쾌하다! 통쾌해!”
“역시 닥터를 납치한 건 엘프 놈들이었다! 지금이다! 긍지 높은 동료들아! 엘프 놈들을 때려눕힌다!”
“워어어어어어어어!”
“기, 기다려라! 닥터가 다친다! 우선 닥터를 구하라!”
내가 죽지 않았다는 기쁨과 적을 향한 분노가 겹쳐지며 오크들이 더 흉포하게 포효했지만, 냉정함을 잃지 않은 오크 대족장만이 상황을 파악하고 재빨리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만약 그대로 다시 전투가 벌어졌더라면 엘프와 오크 중간에 위치한 나는… 필시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처럼 전쟁의 겁화 속에 묻혀 버렸겠지.
“이런! 이대로 인간을 놓쳐선 안 된다! 형제자매들이여! 저 흑마법사를 죽여라!”
“기다려! 잠시 싸움을 멈추고 내 말 좀… 제기랄!”
내 목소리가 함성에 묻혀 버렸다. 몇몇 엘프는 내 목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무시하는 느낌이었다.
전쟁의 열기는 쉽사리 꺼지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흥분과 분노를 가라앉힌다는 것 자체가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슨 방법이, 방법이 없을까?
문득 목에 걸고 있는 투아를 내려다보았다. 이것이라면 오크를 막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이 공격을 멈춰줄까? 오히려 투아를 쓰면 일방적으로 오크만 당하는 게 아닐까?
“닥터, 구한다! 엘프 놈들의 화살 막는다! 으아악!”
그사이 엘프들이 나를 향해 무자비하게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당황한 오크들이 직접 몸을 던져 나를 화살의 위협으로부터 막아주었다.
순식간에 내 주위엔 고슴도치처럼 화살이 빼곡히 박혔고, 몇몇 방패를 든 오크가 내 앞에서 쓰러졌다. 투박한 나무 방패로는 화살을 전부 막을 수 없어 온몸이 꿰뚫린 것이다.
“닥터… 산다. 쿨럭, 쿨럭. 나 은혜… 갚는…….”
심장에 박힌 화살을 손으로 잡은 채 연신 피를 토하던 오크는 마지막 말조차 다 끝내지 못하고 쓰러졌다. 이자는 한때 자신 집에 들러 저녁 식사를 하자고 나에게 청하던 오크였다. 그 옆에 온몸이 꿰뚫린 채 죽은 오크는 덕분에 작물이 잘 자랐다며 내 품에 감자를 한 아름 안겨주던, 순박한 어린 오크였다.
“닥터! 물러난다! 막을 수 없… 크아악!”
“도망간다! 우리가 막는다! 어서 도망간다!”
“창을 던진다! 엘프 놈들을 죽인다!”
오크들도 창을 던져 반격하기 시작했다. 공격은 유효했는지 투박한 창에 몸이 꿰뚫려 죽는 엘프를 볼 수 있었다.
그 와중에도 내 눈앞에선 방패를 든 오크들이 속속 죽어 나갔다. 이대로는 나를 지켜줄 수 없다고 판단한 걸까? 몇몇 오크가 내 가슴을 떠밀었지만, 빗발치는 화살 세례를 무사히 뚫고 도망간다는 건 너무도 요원한 일이었기에 그들도 자신 없어 하는 얼굴이었다.
나는 참을 수 없는 슬픔에 목이 메어왔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웃으며 함께 생활하던 오크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지혜와 조화의 종족이라는 엘프들은 그 아름다운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쓰러져 갔다.
이런 모습을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니. 어찌 이리도 무력하단 말인가.
“아버님! 싸움을 멈추십시오!”
빗발치는 화살 세례가 일순간 멈췄다. 놀랍게도 한달음에 달려온 라이리즈가 내 앞을 막아선 것이다.
“라, 라이리즈, 네놈! 당장 비키지 못할까!”
격노한 엘프 대족장이 소리 질렀지만, 라이리즈는 단검으로 뒤늦게 날아온 화살을 쳐내며 외쳤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조금만 이자의 말을 들어주십시오! 싸움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습……!”
“엘프 놈, 죽인다!”
라이리즈의 말이 전부 끝나기도 전에 내 앞에서 방패를 들고 있던 오크가 어디서 주워 든 건지 단검을 꺼내 라이리즈의 등을 찔러갔다.
난 저 오크가 엘프어를 알아듣지 못해 라이리즈를 적으로 오해했다는 걸 알아챘는데, 그 생각보다도 발이 먼저 움직였다.
푹!
“으윽!”
아슬아슬하게 몸을 던져 라이리즈를 지켰다. 등에서 뜨거운 감촉이 느껴졌지만, 다행히 오크도 한순간 힘을 푼 것인지 깊게 박힌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괘, 괜찮습니까!”
“어, 어째서! 닥터, 왜 내 앞을 막은 건가!”
놀란 라이리즈가 다급히 나를 부축했다. 단검을 찌른 오크는 무척 당황한 것인지 어찌할 줄 몰라 했다.
“저게 무슨…….”
“라이리즈 님을… 구했어?”
내가 라이리즈를 구한 모습을 본 엘프들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특히 엘프 대족장의 눈은 너무도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순간, 감각적으로 깨달았다.
이거다! 어쩌면 이것이 전쟁의 분위기를 뒤바꿀 수 있을지도 몰라!
“라이…리즈, 엘프를 막아서요. 전 오크를… 크윽, 막아설게요.”
“네?”
“어서요!”
피를 토하듯 외쳤다. 라이리즈는 허겁지겁 엘프들을 향해 양팔을 벌려 내 앞을 막아섰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라이리즈와 등을 맞댄 채 양팔을 벌려 오크들을 막아섰다.
“……!”
“……!”
그렇게 엘프의 적인 내가 오크를, 오크의 적인 라이리즈가 엘프를 막아서자 오크와 엘프들에게서 묘한 분위기가 흘러나왔다.
“당신이 노리던 게 이것이었군요…….”
뒤늦게 라이리즈도 알아챈 것인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엘프를 막은 라이리즈, 그리고 오크를 막은 내 행동이 먹혀 들어간 것인지, 그 누구도 선뜻 손을 쓰지 못했다. 정말 라이리즈가 아니었다면 이 빌어먹을 잔혹한 전투의 분위기를 바꾸지 못했을 것이다.
“현호 님!”
“용사 님!”
그사이 뒤늦게 내게 다가온 에릴과 레플리아를 볼 수 있었다.
에릴은 내게 다가오자마자 다짜고짜 껴안았다. 순간, 등에서 격통이 느껴져 인상을 찌푸리자 눈물 젖은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제야 레플리아도 내 등에 상처를 알아채곤 사색이 된 얼굴로 요정의 가루를 뿌려주었다.
“으윽! 고맙다, 레플리아.”
“용사 님, 제가 얼마나 놀랐는지 아세요? 무슨 성난 코뿔소처럼 마구 돌진해 간 모습을 볼 땐 정말……. 그래도 전설에 나오는 거룩한 모습이라 조금 멋져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다쳐선 다 소용 없는 짓이라고요! 제가 없었으면 어찌 됐겠어요? 그런데 가만 생각해 보니 저도 전설에 나오는 성녀의 모습 같지 않아요? 용사와 그를 보좌해 주는 성녀. 무척 맘에 드는…….”
이런 위험 속을 뚫고 들어와 상처를 치료해 준 레플리아에겐 정말 고마웠지만, 지금 당장은 시간이 없기에 차분히 들어줄 수 없을 것 같아 무시하기로 했다.
“모두 잠시만 전투를 멈추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모두 오해입니다. 두 종족이 싸울 필요가 없다고요.”
나는 지금이 적기라고 느껴 차분히 오크어로 말을 시작했다. 엘프들은 내가 오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놀랐는지 살짝 웅성거렸지만, 그 정령인지 뭔지 모를 힘 덕에 내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난 오크들을 구해준 일부터 2년 동안의 생활 등 처음부터 끝까지 엘프들에게 설명했고, 오크들에겐 저들이 무슨 마음으로 나를 납치했으며 어떠한 기분으로 2년 동안 생활했는지를 알려주었다.
두 종족은 내 말이 진행되는 매 순간순간 어떨 땐 탄성을, 어떨 땐 의심스러운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금 라이리즈와 내가 보여주는 행동이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믿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이자는 오크를 조종하던 게 아니라 오크에게 은혜를 입혀 함께 살고 있었을 뿐이라는 건가?”
“네, 아버님. 전부 오해입니다. 오크가 우리 영역을 침범하지 않은 것도 단지 저들의 식량이 풍족해져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엘프 대족장은 어느 정도 설득되었는지 고심하는 모습이었다.
사실 엘프들로선 말이 안 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내 말을 믿기 이전에 어쨌거나 오크들의 수가 증가한 것은 사실이며, 위협이 사라진 것도 아니었으니까. 지금 화해한다 하더라도 언젠가 다시 쳐들어오지 말란 법도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저들로선 휴전 협상을 하는 것처럼 설득에 응하는 수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다. 겨우 백 명 남짓한 적은 인원으로 시작한 전쟁이기에 최후의 최후까지 간다면, 결국 오크에게 멸족당할 운명일 테니까.
이제 거의 다 왔다. 오크는 나를 구하러 왔을 뿐이니까 이대로 엘프만 잘 물러나 준다면…….
“우하하, 하하하하하하하!”
그 순간, 웃었다. 엘프 대족장이 아니라 반대편 오크 대족장이.
“그게 무슨 말인가, 닥터여! 저들이 우리를 오해한 것도 사실이며, 우리가 닥터를 구하러 온 것도 사실이다! 하나 대지를 보라! 이미 우리 부족은 피를 많이 흘렸다! 피는 피로 갚는다! 어째서 이 싸움을 막으려는 건지 알 수 없지만… 닥터여! 우리의 투지를 막을 수는 없다! 떠나간 동포들의 한을 적의 피로 씻으리라!”
“워어어어어어어어!”
“흥! 바람의 정령으로 오크 족장의 말을 엿들었던 게 다행이로군. 그래, 좋다! 오늘 누가 이 섬의 주인이 될지 결정하자꾸나! 형제자매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우와아아아아아!”
다시 전쟁의 열기가 무럭무럭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전혀 설득이 통하지 않았다.
젠장, 멈추지 않는다. 이미 피를 너무 흘려 오히려 오크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역시 이것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는 건가.
내가 고심하며 목에 걸린 투아를 잡아 들자 오크 대족장이 다시 웃었다.
“그래. 우리를 멈추고 싶다면… 닥터, 투아를 들고 명령해라! 죽으라면 죽을 것이고, 돌아가라면 돌아갈 것이다! 다신 싸우지 말라 명령한다면, 닥터가 살아 있는 동안 엘프와 얼굴도 마주하지 않겠다! 하나 지금 흘린 피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 닥터가 죽어 투아의 효력이 사라지는 순간, 우린 앞으로 전진할 것이다! 엘프가 멸종할 그날까지, 긍지로서 복수의 전진을!”
“복수의 전진을!”
“복수의 전진을!”
모든 오크가 복창하듯 복수를 외쳐 댔다. 대족장은 나를 보며 똑바로 말하고 있었다. 진정 자신들을 막고 싶으면 투아를 쓰라고. 차라리 투아를 써 이 자리에서 자신들 전부 죽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복수를 막을 수 없다고…….
난 화가 나기보다도 이들이 불쌍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어째서 이들은 복수라는 단어만 부르짖고 있단 말인가. 지금 당장에도 자신들의 동료가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로워하고 있는데. 어째서 이들은 동료의 피를 다른 자의 피로만 갚으려고 한단 말인가.
그래, 투아를 사용해 달라면 사용해 주겠어. 그것만이 자신들의 복수를 꺾을 수 있다고 말한다면… 이딴 투아, 얼마든지 사용해 주겠다고!
난 투아를 꺼내 높이 들어 올렸다. 투아를 알아본 모든 오크들이 나를 주시했다.
“원한다면 사용하죠. 사용해 드린다고요! 복수만을 원하는, 빌어먹게 긍지 높은 당신들에게 투아를 걸고 명령합니다!”
난 잠시 입을 멈추고 들고 있던 투아를 오크 대족장에게 던졌다.
“그 입 좀 다물어 주세요!”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