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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9화)


7장 요정(3)


“저기에서 나는 소리인 것 같아요.”
에릴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엔 몇 달 전, 과실주를 담가놓은 돌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분명히 입고 다니던 셔츠로 입구를 단단히 봉해놓았을 터인데, 확실히 의심이 될 만큼 반쯤 벗겨져 있었다.
“저기엔 뭐가 들어 있나요?”
“과실을 담가놨었어. 에탄올을 만들려고 했거든.”
“에탄…올?”
에탄올. 각종 알코올음료 속에 함유되어 있어 주정(酒精)이라고도 하고, 또는 에틸알코올이라고도 한다. 보통 알코올이라고 하면 이 에탄올을 가리킨다.
에탄올은 단백질을 응고시키는 성질을 가지고 있으므로 살균 작용이 매우 뛰어나다. 만약 이걸 만들면 수술할 시에 다른 세균 감염에 노출될 일도 적어지고 살균하는 것도 무척 편해지리라는 생각에 만드는 중이었다.
“알코올이라고도 해. 먹는 게 아니라 소독용으로 사용하려는 거야. 아마 말해도 이해하기 힘들 테니 그건 나중에 다시 설명해 줄게. 그보다 무슨 벌레가 꼬인 거라면 무척 곤란한데.”
달콤한 향에 이끌려 벌레가 꼬인 거라면 몇 달간 노력했던 일들이 전부 무산되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다급히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고는 숨이 멎을 정도로 놀라 하마터면 항아리를 뒤엎을 뻔했다.
“우와악! 이게 뭐야!”
“무, 무슨 일인데요?”
“사람이, 안에 사람이!”
사람이다. 정말 과실주 안에는 손바닥만 한 사람이 술에 절어 있었다.
“사람요?”
내가 질린 얼굴로 물러나자 에릴이 의아해하며 항아리 안을 들여다보았다.
“이건… 요정이에요.”
“요…정?”
에릴이 집게손가락으로 술통에 빠져 있는 요정을 꺼내며 말했다.
바비 인형이라고 생각될 만큼 작은 몸, 잠자리 같은 투명한 날개. 확실히 에릴의 말대로 사람이라 생각했던 그것은 영화 피터 팬에서나 볼 수 있던 요정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다.
하아, 더는 놀랄 일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직도 이 세계는 신비한 것으로 가득한 것 같다.
히끅! 히끅!
요정은 아직 살아 있는 건지 손발을 휘저으며 연신 몸을 떨어 댔다. 이거… 가만 보니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다. 저 희한한 소리도 설마 딸꾹질이었던 건가?
“요정은 꽃가루와 과일을 먹는다고 들었어요. 아무래도 과일 향에 이끌려온 게 아닐까요?”
“그래도 그렇지… 술에 절어 취한 요정이라니.”
요정이 무슨 풍뎅이나 벌 같은 곤충도 아니고……. 뭐랄까, 아름다운 동화 속 환상이 깡그리 무너지는 느낌이라 기분이 참 묘하다.
“어쩐지 조금 신기하네요. 요정은 정말 보기 어렵다던데.”
“에릴도 처음 봐?”
“네. 저도 듣기만 했지, 보는 건 처음이에요. 애초에 대부분 바닷속에서만 생활하니 그런 걸 수도 있지만.”
에릴이 부끄럽다는 듯이 혀를 삐죽 내밀었다. 이럴 땐 뭐랄까, 심장이 쿵! 내려앉는 느낌이다.
뭐지? 협심증이라도 일어난 건가?
“정말 여긴 놀라운 것만 가득하네. 이러다 설마 거인도 만나는 거 아닌지 몰라. 하하하!”
“자이언트 족이 왜요?”
“미안, 내가 생각해도 이건 말이 안… 엉?”
“네?”
우린 서로 바보같이 되물었다.
설마… 있는 거냐?
“생각했던 것보다 여기는 무서운 세상일지도 모르겠는걸…….”
그 무엇이든 상상 이상이라 현기증이 날 판이다. 정말 여기선 내 상식 따윈 개에게나 줘야 할 것 같다.
벌써 이곳에서 생활한 지 2년. 자그마치 2년이 넘었건만, 아직도 놀라운 것들이 한가득이다. 특히나 놀란 것은…….
“응? 하시고 싶은 말이라도 있나요?”
“…아니.”
나도 모르게 에릴을 빤히 쳐다봤던 모양이다.
겉보기엔 나보다도 어린, 이제 갓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이 인어는 사실 125살이 넘는 할머니란 사실을 누가 알까? ‘보이지 않는 벽이 생긴 건 100년 전이에요! 제가 스물다섯 살 생일 때 여기 갇혔으니까 똑똑히 기억해요!’란 말을 들었을 땐 이 감옥 같은 섬의 제약이 100년 전부터 시작되었다는 놀람보다도 그런 사실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에릴에게 더 놀랐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아직 어린 편이라고 말할 정도였으니, 말 다했지 않은가.
아무래도 인어는 코끼리거북을 월등히 뛰어넘는 수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젠 요정이라니. 자, 자이언트라니.
“그런데 현호 님, 이 요정 어쩌죠?”
“아, 그래. 그 요정이… 있었지.”
여전히 취해 해롱해롱하는 요정을 보고 있으려니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다.
“이 녀석, 대화는 통할까?”
“모든 요정족은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는 바람의 언어를 사용한다고 들었어요. 같은 요정족이 아니면 아마 대화는 어렵지 않을까요?”
“에릴이 요정과 입맞춤하는 건 어때?”
“그건…….”
어쩐지 에릴의 표정이 어둡다.
“뭐, 어차피 당장 중요한 건 아니니 상관없으려나?”
무언가 이상해 대충 넘어가 주니 에릴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 이거, 인어의 입맞춤에는 커다란 비밀이 있는 게 아닐까? 한 번 날 잡고 진지하게 물어봐야겠는걸.
“어? 깨어났나 봐요!”
내가 고심하는 사이, 정신을 차린 건지 요정이 연신 고개를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다 곧 나와 에릴을 발견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벌 떨기 시작했다. 에릴의 말대로 요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표정만 봐도 어떠한 기분인지 알 수 있었다.
“이 녀석, 많이 무섭나 보네. 에릴, 장막 좀 걷어주겠어?”
“보내게요?”
“응. 날아갈 수나 있으려나? 자, 가라. 다음엔 술통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고.”
내 말을 듣기는 한 걸까? 요정은 에릴이 장막을 걷기 무섭게, 부리나케 밖으로 빠져나가 버렸다.
“하하하! 성급한 녀석이네. 어? 그런데 에릴, 네 손에서 빛이 나.”
“이거 요정의 가루예요.”
“요정의 가루?”
“네. 요정의 날개엔 나방처럼 가루가 묻어 있는데, 신기하게 빛이 난다고 들었어요. 그밖에도 뭔가 더 있었는데… 기억이 안 나네요.”
“그래? 흐음…….”
마치 반딧불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밤늦은 시간이라 움막 중앙에 작은 모닥불 빛에만 의지하고 있어 움막 안은 조금 어두웠는데, 그 요정은 몸 자체에서 빛이라도 나는 것처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그게 저 요정의 가루 때문이었구나.
“그런데 에릴, 밤이 깊었는데 어쩌려고? 여기서 자고 갈 거야?”
“네, 그럴 건데요? 불편한가요?”
“언제는 여긴 약초 냄새가 심하다며? 바닷속이 훨씬 자기 편하다고 하지 않았어?”
“그,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어, 어쨌든 오늘은 여기서 잘 거예요.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에릴은 마치 화라도 난 것처럼 급히 뒤돌아 누워버렸다.
갑자기 왜 저러지?
인어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다음 날 아침, 요정과의 헤프닝은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닥터! 탕카, 요정 잡았다! 운 좋다! 오늘 아침은 맛난 거 먹는다!”
“우왁! 자, 자, 자, 잠깐만! 먹지 마! 우와악! 입에 넣지 마! 제발 씹지 마아아아!”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가볍게 몸을 풀던 나는 탕카의 입속으로 쏙 들어간 요정을 구하기 위해 과격하게 탕카의 턱을 잡아야만 했다.
“읍, 우읍! 퉤! 이건 탕카 거다! 닥터, 먹지 마라!”
“안 먹었어! 절대로 안 먹었어! 그보다 이걸 진짜 먹을 셈이냐!”
“이거, 맛난 거다. 달콤하다. 빼앗지 마라.”
침을 질질 흘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탕카는 죽어도 요정을 넘겨주지 않을 것 같았다.
난 하는 수 없이 투아를 꺼내 들었다.
“그럼 이거랑 교환하는 조건으로…….”
“쿠악! 탕카, 투아 받았다는 거 알면 아버지한테 죽는다! 미안하다! 용서해 준다! 요정, 닥터 거다!”
탕카는 투아를 꺼내기 무섭게 자신의 타액이 잔뜩 묻은 요정을 넘겨주며 벌벌 떨었다. 내가 뭐라 하면 무릎 꿇고 엉엉 울기라도 할 기세다.
…이거, 생각보다 투아란 거 효용성이 있을지도?
요정은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도망도 못 가고 그저 내 손바닥 위에서 오들오들 떨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내가 조금만 늦게 왔어도 으적으적 씹어 먹혔을 테니까. 우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런데 이 요정, 어디서 발견했어?”
“움막 주위 서성이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낚아챘다. 그거 진짜 맛난 음식이다.”
“주위를 서성이고 있었다고? 하아…….”
어제 도망간 줄 알았는데 아직 떠나지 않았던 걸까?
아무래도 과실주 맛에 단단히 중독된 모양이었다.
“우응, 현호 님, 무슨 일이세요? 어라? 그건… 어제 봤던 그 요정? 그런데… 상태가 왜 저래요?”
그사이 소란 탓에 깬 것인지 눈 비비며 일어난 에릴이 움막 밖으로 나왔다가 타액에 흠뻑 젖어 축 늘어진 요정을 보곤 눈썹을 찌푸렸다.
난 두 손가락으로 요정의 날개만 집어 든 채로 어색하게 웃었다. 일단 냇가에서 몸부터 씻기는 게 순서인 것 같았다.

“이제 좀 깨끗해졌네.”
작은 바위에 요정을 앉혀놓고 손바닥으로 물을 받아 몇 번 머리에 끼얹어 질척거리는 타액을 씻어줬다. 덕분에 요정은 본의 아니게 비 맞은 생쥐 꼴이 되었는데, 신기하게도 부르르 몸을 터니 물기가 전부 사라져 버렸다.
“우와, 신기하네. 옷이 방수성인가?”
옷이라고 해야 할까? 요정은 속이 살짝 비치는 원피스 비슷한 걸 입고 있었는데, 언뜻 보면 그냥 꽃송이같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옷뿐만이 아니라 그밖에 다른 부분도 신비로웠다. 크루아상처럼 둥글게 말아 올려 늘어트린 붉은 머리카락이라든지, 나방같이 큼지막한 검은 눈동자라든지, 이마에 나 있는 작은 더듬이까지도. 특히 등 뒤에 달린 투명한 날개에서 옅은 빛 가루가 흩날리고 있었는데, 마치 별 가루를 흩뿌리는 것 같아 아름다웠다.
그런데… 이 녀석, 어딘가 아파 보이는데.
충분히 도망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위 위에 앉아 고통을 호소하고 있었다. 비록 아파하는 소리는 듣지 못했지만, 요정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알 수 있었다.
“잠깐, 이건…….”
난 좀 더 세밀히 요정을 관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