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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8화)
7장 요정(2)
오크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오크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갖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투지와 용기를 긍지로 삼고 있으며, 싸우다 죽는 것을 무엇보다도 행복한 죽음이라 여기는 종족이다. 그렇기에 다른 자들이 그런 모습을 광포하다고 오해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흉포함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기생충을 예방하기 시작하자 그런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기생충이란 존재가 저들의 광포함을 더 증폭시켰던 게 아니었나 싶다.
어쨌거나 2년이 지난 지금은 이들도 순박한 시골 청년들이 다 됐다. 지금처럼 호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변한 것이다.
겨우겨우 오크들을 뿌리친 난, 감회에 젖은 눈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오크 마을을 둘러보며 길을 걸었다.
지금의 오크 마을은 2년 전과 너무도 다르게 변했다. 거리도 깨끗해졌고, 곳곳엔 내가 추천한 작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채집과 사냥만을 일삼던 그들이 내 의견을 받아들여 밭을 일구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사냥―채집 사회를 지나 농경 사회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봐야 자연산 돼지감자나 머위 같은, 공들여 가꿀 필요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매우 대단한 발전이었다.
그 후부터 이들에게도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종족과도 영역 싸움을 자주 벌였다던데,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다고 오크 장로가 농담으로 말할 정도였다.
이 모든 일들이 나로 인해 바뀐 것이라는 사실에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정말 많이 바뀌었네요. 지금 이곳을 보면 오크 시체가 바닥에 널려 있던 곳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럴 만하지. 나도 그땐 굉장히 충격 받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깨끗하게 바뀌었지. 이 모습을 보면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어.”
“그게 뭔데요?”
“이들도 사람과 다를 것 없는 사회성 동물이라는 것.”
에릴조차 괴물이라고 부르는 흉포한 오크지만, 그들만의 문화가 있으며 사회가 있다. 다른 문명을 설파하면 이득이 되는 것을 취할 줄 아는 머리가 있고,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간다.
만약 나같이 생각이 깨인 이가 진작 오크들에게 문화 설파를 시도했더라면, 몬스터와 다를 바 없는 괴물이라 불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있어. 오크의 번식력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
사람과 달리 오크의 성장기는 고작 5년에 불과하다. 나조차도 2년 전에 구해준 어린 오크가 지금은 부쩍 자라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아직은 사냥할 몬스터도 많고 내가 알려준 농경으로 식량이 풍족하다 여기고 있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부족하게 될 거야. 전에 오크 장로님에게 듣기론 섬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가로질러 가는 데 불과 2,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했어. 산악 지대를 가로질러가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그다지 섬이 크다고도 할 수 없거든? 섬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문제될 건 없겠지만, 보이지 않는 막 때문에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이니 모든 건 이 좁은 섬 안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이런 식으로 가면 100년 후엔 오크뿐만 아니라 이 섬에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이 식량문제로 죽어나기 시작할 거야. 한마디로 선의로 행했던 이 행동들이 훗날 더 큰 문제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이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해.”
“너무 말씀이 어려워서 저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100년 뒤의 일까지 현호 님이 걱정할 필요가 있나요?”
“구해준다는 의미는 단순히 목숨을 고쳐 주는 걸로 끝이 아냐. 그리고 어쨌든 이 모든 계기는 오크의 고질병을 해결하고 문화를 바꾼 내게 있으니까 책임을 져야지.”
“으음, 책임…인가요? 가끔 현호 님은 무척 어려운 말씀을 하세요.”
“그런가? 뭐, 남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오크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 되도록 오크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어.”
내가 말하는 ‘사람답게’란 의미를 에릴은 모를 것이다. 그녀는 현실에서의 사람이 어찌 살아가는지 모를 테니까.
“닥터! 찾았다! 아버지가 부른다! 지금 오크 장로 전부 모였다! 어서 와라!”
그때,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와 말을 전하는 한 오크. 저 오크의 이름은 탕카라고 하는데, 이 오크 부족 대족장의 아들이며 과거 에릴과 입맞춤했던 오크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족장이 날 찾는다고?
에릴과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대족장이 날 찾는 것은 어제오늘 일만이 아니었기에 순순히 탕카의 뒤를 따랐다.
대족장이 거주하는 움막은 항상 드나들던 곳이라 대수롭지 않게 들어갔는데, 오늘따라 움막 안의 분위기가 매우 무거워 보였다.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던 것 같은데, 일순간 대화가 끊어지고 수십 명의 장로가 모두 나를 돌아봐 어쩐지 부담감도 느껴졌다.
“오, 닥터. 이제 왔는가.”
그런 무거운 정적을 깬 건 대족장이었다.
대족장은 백색 곰 가죽을 걸친 채로 여전히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많이 늙어 쇠약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대족장의 나이는 67세. 오크의 평균 수명이 고작 50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면 이미 대족장은 장수하고도 남은 나이라 할 수 있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탕카에게 들었습니다만… 어쩐지 시기를 잘못 맞춘 것 같네요.”
“아닐세. 마침 잘되었군.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네. 내 의견에 반대할 자는 없는가?”
“불만 없다.”
“없다.”
“나도 대족장을 따른다.”
“그럼 모두 동의한다는 걸로 알겠네. 그럼 닥터는 내 앞으로 와주게나.”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는 대족장.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됐지만, 일단 거스르지 않고 그의 말을 따랐다.
내가 대족장 앞에 서자 그는 뜬금없이 목에 걸고 있던, 짐승 이빨이 엮어진 목걸이를 벗어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우리 백색 곰 부족의 은인인 닥터를 영원한 벗으로 인정하며, 그 증표로 백색 곰 부족의 ‘투아’를 주는 바이다.”
“…네?”
“투아란 각 오크 부족이 가지고 있는 긍지의 증표이며, 그 부족의 자긍심이다. 누구든 투아를 가지고 있는 자에겐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며,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 한 번, 벗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언제든 투아를 들고 외쳐라. 우리 백색 곰 부족은 그대와 함께하리라.”
“아, 아니, 잠깐만요. 이게 대체 무슨… 잠시만요! 그게 다 무슨 말입니까! 잘 모르겠지만, 저 목걸이에 담긴 의미가 큰 것 같은데, 저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 이런 걸 받을 만큼 대단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평소처럼 사냥해 온 음식이나 재배한 것들을 나눠 주십시오. 이런 건 너무 부담…….”
“받아라. 내 손자도 닥터 덕분에 살았다. 그 투아엔 내 긍지도 담겨 있다.”
“이제 배곯으며 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래서 내 긍지도 담았다.”
“받아라. 받지 않을 거면 이 자리에서 내 머리를 뚫어라.”
사방에서 보채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몇은 무섭게도 창까지 들어 자신의 머리를 겨누기까지 했다.
이들이 진심을 담아 저 투아란 목걸이를 내게 주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닥터, 받아라. 이 탕카도 긍지를 담았다. 탕카뿐만 아니라 우리 부족 모든 오크의 긍지도 담겨 있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 그때, 움막 입구에 쳐져 있는 장막이 들춰지며 탕카가 들어왔다. 덕분에 대체 언제 모여든 것인지 움막 밖에 수많은 오크가 몰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받아라. 거절하는 건 모든 오크 일족의 긍지를 저버리는 짓이며, 믿음을 배반하는 행위다. 그래도 거절하겠는가?”
노렸다는 듯이 대족장이 미소 지으며 다시 권했다. 정말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난 어쩔 수 없이 투아를 건네받았다.
“우와! 그게 오크 부족의 긍지라는 투아인가요?”
거주지로 돌아온 내가 바닥에 투아를 내려놓은 채 한동안 전전긍긍하고 있자, 소식을 들은 것인지 늦은 밤임에도 에릴이 나를 찾아왔다.
난 대답할 힘도 없어 피곤하게 고개만 주억거렸다.
“보기엔 그냥… 뼈 목걸인데요?”
“백색 곰의 이빨로 만든 것이래. 우리가 볼 땐 별거 없지만, 오크들은 투아라는 걸 알아본다는 거 같아.”
이 섬에는 백색 곰 부족밖에 없지만, 섬 바깥의 여러 오크 부족들도 대대로 투아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투아의 존재 가치는 그야말로 오크들에게 있어선 신물이나 다름없다고 대족장은 말했다.
“하아, 어쨌거나 이런 부담스러운 걸 어째서 내게 준 거람?”
“왜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연하다고? 소식 들은 거 맞아? 이 목걸이를 들고 전부 자살하라고 명령하면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목걸이라고.”
“그런 명령은 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해?”
“그럼 문제될 거 없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이게…….”
나는 말하다 말고 에릴을 돌아보았다.
이 순진한 인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하도 사람과 비슷해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람과 다른 종족이라는 걸.
“어쩐지 현호 님 이상해요. 목숨을 구원 받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저들은 투아를 주는 게 은혜를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겠죠. 제 말이 틀린 건가요?”
“…아니, 맞아. 도덕적인 관념에서 보면… 에릴, 네 말이 맞겠지. 하지만… 아니, 됐다.”
굳이 에릴에게 이런 얘기를 해야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난 뒷말을 아꼈다.
모두가 이렇게 순수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안타깝게도 사람으로선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이들과 다르게 사람은 의심이 많다. 타인을 질투하는 경향도 심하며, 욕심도 무척 많다. 만약 욕심 많은 사람이 이 투아의 존재를 알아챈다면 어찌 되겠는가. 훔치려 할 수도 있고, 심하면 나를 죽이고 가로채려 할 수도 있다.
그 이전에 내가 욕심 많은 사람이라면, 이 목걸이를 이용해 얼마든지 악행에 사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사람들은 한 번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절대로 이런 물건에 긍지를 담아 타인에게 쉽게 목숨을 맡기지 않는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어쨌거나 이미 받아버린 걸 어찌하겠는가. 어차피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없으니 우호의 증표로 소중히 가지고 다니는 수밖에.
“하아, 정말 이거, 애물단지가 따로 없네.”
“키득!”
“왜 웃어?”
“역시 현호 님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또 그 얘기야? 유별난 사람 취급하는 표현은 관둬주라.”
“네? 전 칭찬하는 건데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말을 하는 것도 좀 관둬주고.”
내가 다 부끄러워 시선을 피했다.
히끅!
“응? 에릴,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소리요? 아뇨? 아무것도 못 들었…….”
히끅! 히끅!
이번엔 확실히 들었는지 에릴도 눈을 크게 뜬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7장 요정(2)
오크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지금까지 다른 이들이 오크에 대해 많은 오해를 갖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들은 투지와 용기를 긍지로 삼고 있으며, 싸우다 죽는 것을 무엇보다도 행복한 죽음이라 여기는 종족이다. 그렇기에 다른 자들이 그런 모습을 광포하다고 오해했던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흉포함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기생충을 예방하기 시작하자 그런 모습도 점차 사라져 가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기생충이란 존재가 저들의 광포함을 더 증폭시켰던 게 아니었나 싶다.
어쨌거나 2년이 지난 지금은 이들도 순박한 시골 청년들이 다 됐다. 지금처럼 호의가 부담스러울 정도로 변한 것이다.
겨우겨우 오크들을 뿌리친 난, 감회에 젖은 눈으로 완전히 바뀌어 버린 오크 마을을 둘러보며 길을 걸었다.
지금의 오크 마을은 2년 전과 너무도 다르게 변했다. 거리도 깨끗해졌고, 곳곳엔 내가 추천한 작물을 재배하기도 했다. 채집과 사냥만을 일삼던 그들이 내 의견을 받아들여 밭을 일구기 시작한 것이다. 그야말로 사냥―채집 사회를 지나 농경 사회로 진화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래봐야 자연산 돼지감자나 머위 같은, 공들여 가꿀 필요가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매우 대단한 발전이었다.
그 후부터 이들에게도 식량 부족 현상이 일어나지 않게 되었다. 내가 오기 전에는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다른 종족과도 영역 싸움을 자주 벌였다던데, 이젠 옛말이 되어버렸다고 오크 장로가 농담으로 말할 정도였다.
이 모든 일들이 나로 인해 바뀐 것이라는 사실에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정말 많이 바뀌었네요. 지금 이곳을 보면 오크 시체가 바닥에 널려 있던 곳이라는 게 믿어지지가 않아요.”
“그럴 만하지. 나도 그땐 굉장히 충격 받았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깨끗하게 바뀌었지. 이 모습을 보면 중요한 사실을 하나 알 수 있어.”
“그게 뭔데요?”
“이들도 사람과 다를 것 없는 사회성 동물이라는 것.”
에릴조차 괴물이라고 부르는 흉포한 오크지만, 그들만의 문화가 있으며 사회가 있다. 다른 문명을 설파하면 이득이 되는 것을 취할 줄 아는 머리가 있고, 이렇게 좋은 방향으로 바꾸어 나간다.
만약 나같이 생각이 깨인 이가 진작 오크들에게 문화 설파를 시도했더라면, 몬스터와 다를 바 없는 괴물이라 불리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걱정되는 것도 있어. 오크의 번식력이 상상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
사람과 달리 오크의 성장기는 고작 5년에 불과하다. 나조차도 2년 전에 구해준 어린 오크가 지금은 부쩍 자라 위에서 날 내려다보는데,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아직은 사냥할 몬스터도 많고 내가 알려준 농경으로 식량이 풍족하다 여기고 있지만, 그것도 머지않아 부족하게 될 거야. 전에 오크 장로님에게 듣기론 섬 끝에서 반대쪽 끝까지 가로질러 가는 데 불과 2, 3일이면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했어. 산악 지대를 가로질러가는 것까지 고려한다면 그다지 섬이 크다고도 할 수 없거든? 섬 밖으로 나갈 수만 있다면 문제될 건 없겠지만, 보이지 않는 막 때문에 바다에서 구할 수 있는 식량도 얻을 수 없는 상황이니 모든 건 이 좁은 섬 안에서 충당할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이런 식으로 가면 100년 후엔 오크뿐만 아니라 이 섬에 살아가는 모든 생물들이 식량문제로 죽어나기 시작할 거야. 한마디로 선의로 행했던 이 행동들이 훗날 더 큰 문제를 초래할지도 모른다는 거지. 되도록 빠른 시일 내에 이를 타개할 방법이 필요해.”
“너무 말씀이 어려워서 저는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그런데 100년 뒤의 일까지 현호 님이 걱정할 필요가 있나요?”
“구해준다는 의미는 단순히 목숨을 고쳐 주는 걸로 끝이 아냐. 그리고 어쨌든 이 모든 계기는 오크의 고질병을 해결하고 문화를 바꾼 내게 있으니까 책임을 져야지.”
“으음, 책임…인가요? 가끔 현호 님은 무척 어려운 말씀을 하세요.”
“그런가? 뭐, 남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이곳에서 오크들과 함께 살아가기로 마음먹었으니 되도록 오크들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어.”
내가 말하는 ‘사람답게’란 의미를 에릴은 모를 것이다. 그녀는 현실에서의 사람이 어찌 살아가는지 모를 테니까.
“닥터! 찾았다! 아버지가 부른다! 지금 오크 장로 전부 모였다! 어서 와라!”
그때, 저 멀리서 헐레벌떡 달려와 말을 전하는 한 오크. 저 오크의 이름은 탕카라고 하는데, 이 오크 부족 대족장의 아들이며 과거 에릴과 입맞춤했던 오크이기도 하다.
그런데 대족장이 날 찾는다고?
에릴과 나는 의문이 들었지만, 대족장이 날 찾는 것은 어제오늘 일만이 아니었기에 순순히 탕카의 뒤를 따랐다.
대족장이 거주하는 움막은 항상 드나들던 곳이라 대수롭지 않게 들어갔는데, 오늘따라 움막 안의 분위기가 매우 무거워 보였다. 뭔가 얘기를 나누고 있던 것 같은데, 일순간 대화가 끊어지고 수십 명의 장로가 모두 나를 돌아봐 어쩐지 부담감도 느껴졌다.
“오, 닥터. 이제 왔는가.”
그런 무거운 정적을 깬 건 대족장이었다.
대족장은 백색 곰 가죽을 걸친 채로 여전히 커다란 덩치를 자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그가 많이 늙어 쇠약해져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 대족장의 나이는 67세. 오크의 평균 수명이 고작 50년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면 이미 대족장은 장수하고도 남은 나이라 할 수 있었다.
“저를 찾으셨다고 탕카에게 들었습니다만… 어쩐지 시기를 잘못 맞춘 것 같네요.”
“아닐세. 마침 잘되었군. 마지막으로 다시 묻겠네. 내 의견에 반대할 자는 없는가?”
“불만 없다.”
“없다.”
“나도 대족장을 따른다.”
“그럼 모두 동의한다는 걸로 알겠네. 그럼 닥터는 내 앞으로 와주게나.”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부르는 대족장.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됐지만, 일단 거스르지 않고 그의 말을 따랐다.
내가 대족장 앞에 서자 그는 뜬금없이 목에 걸고 있던, 짐승 이빨이 엮어진 목걸이를 벗어 앞으로 내밀며 말했다.
“우리 백색 곰 부족의 은인인 닥터를 영원한 벗으로 인정하며, 그 증표로 백색 곰 부족의 ‘투아’를 주는 바이다.”
“…네?”
“투아란 각 오크 부족이 가지고 있는 긍지의 증표이며, 그 부족의 자긍심이다. 누구든 투아를 가지고 있는 자에겐 약속을 저버리지 않으며,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단 한 번, 벗을 위해 싸울 것을 약속한다. 언제든 투아를 들고 외쳐라. 우리 백색 곰 부족은 그대와 함께하리라.”
“아, 아니, 잠깐만요. 이게 대체 무슨… 잠시만요! 그게 다 무슨 말입니까! 잘 모르겠지만, 저 목걸이에 담긴 의미가 큰 것 같은데, 저는 의사로서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지, 이런 걸 받을 만큼 대단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차라리 평소처럼 사냥해 온 음식이나 재배한 것들을 나눠 주십시오. 이런 건 너무 부담…….”
“받아라. 내 손자도 닥터 덕분에 살았다. 그 투아엔 내 긍지도 담겨 있다.”
“이제 배곯으며 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그래서 내 긍지도 담았다.”
“받아라. 받지 않을 거면 이 자리에서 내 머리를 뚫어라.”
사방에서 보채는 소리가 들려왔다. 몇몇은 무섭게도 창까지 들어 자신의 머리를 겨누기까지 했다.
이들이 진심을 담아 저 투아란 목걸이를 내게 주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닥터, 받아라. 이 탕카도 긍지를 담았다. 탕카뿐만 아니라 우리 부족 모든 오크의 긍지도 담겨 있다.”
내가 망설이고 있는 그때, 움막 입구에 쳐져 있는 장막이 들춰지며 탕카가 들어왔다. 덕분에 대체 언제 모여든 것인지 움막 밖에 수많은 오크가 몰려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받아라. 거절하는 건 모든 오크 일족의 긍지를 저버리는 짓이며, 믿음을 배반하는 행위다. 그래도 거절하겠는가?”
노렸다는 듯이 대족장이 미소 지으며 다시 권했다. 정말 능구렁이가 따로 없다.
난 어쩔 수 없이 투아를 건네받았다.
“우와! 그게 오크 부족의 긍지라는 투아인가요?”
거주지로 돌아온 내가 바닥에 투아를 내려놓은 채 한동안 전전긍긍하고 있자, 소식을 들은 것인지 늦은 밤임에도 에릴이 나를 찾아왔다.
난 대답할 힘도 없어 피곤하게 고개만 주억거렸다.
“보기엔 그냥… 뼈 목걸인데요?”
“백색 곰의 이빨로 만든 것이래. 우리가 볼 땐 별거 없지만, 오크들은 투아라는 걸 알아본다는 거 같아.”
이 섬에는 백색 곰 부족밖에 없지만, 섬 바깥의 여러 오크 부족들도 대대로 투아를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기에 투아의 존재 가치는 그야말로 오크들에게 있어선 신물이나 다름없다고 대족장은 말했다.
“하아, 어쨌거나 이런 부담스러운 걸 어째서 내게 준 거람?”
“왜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당연하다고? 소식 들은 거 맞아? 이 목걸이를 들고 전부 자살하라고 명령하면 따라야 하는, 절대적인 목걸이라고.”
“그런 명령은 하지 않을 거잖아요.”
“그야 당연하지. 내가 왜 그런 미친 짓을 해?”
“그럼 문제될 거 없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이게…….”
나는 말하다 말고 에릴을 돌아보았다.
이 순진한 인어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눈을 끔뻑이고 있었다. 그제야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하도 사람과 비슷해 착각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사람과 다른 종족이라는 걸.
“어쩐지 현호 님 이상해요. 목숨을 구원 받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해야 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 저들은 투아를 주는 게 은혜를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겠죠. 제 말이 틀린 건가요?”
“…아니, 맞아. 도덕적인 관념에서 보면… 에릴, 네 말이 맞겠지. 하지만… 아니, 됐다.”
굳이 에릴에게 이런 얘기를 해야 할 필요 없다고 생각해 난 뒷말을 아꼈다.
모두가 이렇게 순수하면 얼마나 좋겠느냐마는, 안타깝게도 사람으로선 그럴 수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이들과 다르게 사람은 의심이 많다. 타인을 질투하는 경향도 심하며, 욕심도 무척 많다. 만약 욕심 많은 사람이 이 투아의 존재를 알아챈다면 어찌 되겠는가. 훔치려 할 수도 있고, 심하면 나를 죽이고 가로채려 할 수도 있다.
그 이전에 내가 욕심 많은 사람이라면, 이 목걸이를 이용해 얼마든지 악행에 사용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사람들은 한 번 은혜를 입었다고 해서 절대로 이런 물건에 긍지를 담아 타인에게 쉽게 목숨을 맡기지 않는다.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에.
어쨌거나 이미 받아버린 걸 어찌하겠는가. 어차피 이 섬을 빠져나갈 수 없으니 우호의 증표로 소중히 가지고 다니는 수밖에.
“하아, 정말 이거, 애물단지가 따로 없네.”
“키득!”
“왜 웃어?”
“역시 현호 님은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또 그 얘기야? 유별난 사람 취급하는 표현은 관둬주라.”
“네? 전 칭찬하는 건데요?”
“…아무렇지도 않게 부끄러운 말을 하는 것도 좀 관둬주고.”
내가 다 부끄러워 시선을 피했다.
히끅!
“응? 에릴, 방금 무슨 소리 못 들었어?”
“소리요? 아뇨? 아무것도 못 들었…….”
히끅! 히끅!
이번엔 확실히 들었는지 에릴도 눈을 크게 뜬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