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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7화)
7장 요정(1)
“오, 이것 좀 봐. 여기서도 서식하는구나.”
“현호 님, 그게 뭔가요?”
“도깨비풀이라고 하는 거야.”
“도깨비…풀?”
도깨비풀을 한 움큼 쥐고 뽑아 보여주자 에릴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도깨비풀이란 국화과의 한해살이풀로, 한국에선 산과 들, 어느 곳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풀이었다. 바늘 모양 열매에 가시가 거꾸로 붙어 있어 가을철에 산기슭을 헤집고 다니면 옷에 잔뜩 달라붙는 게 특징인데, 설마 이런 곳에서 발견할 줄이야. 이번엔 수확이 좀 있네.
“설마… 그것도 먹는 건가요?”
몇 번 약초를 달여 사용하는 것을 본 에릴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이게 얼마나 좋은 약촌데. 이것을 햇볕에 말린 후 달여 마시면 해열 작용이 있기 때문에 열을 내리기 좋아.”
“벌써 홍역이 사라진 지 6개월이 넘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곤 볼 수 없어. 뭐, 그밖에도 해독 효능이 있어 독사에 물린 상처에도 잘 듣거든. 여러모로 가지고 있어서 나쁠 건 없지.”
금덩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조심스레 약초를 챙기자 어째선지 에릴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현호 님 집은 쓴 냄새만 가득한데 앞으로 얼마나 더 심해질지 생각하니……. 휴~”
“하하하!”
에릴은 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약초 냄새가 익숙하지 않은지 코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웃은 것이다.
2년 전부터 아는 약초를 찾아 조금씩 모아왔는데, 이젠 정말 쓴 냄새만 날 정도로 약초 방처럼 변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 한의학을 공부했던 게 정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벌써 2년인가.
2년 전, 이 섬에 떨어져 갖은 고생을 했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별의별 괴물들을 다 만나고 마지막엔 굶어 죽기 직전에 에릴에게 구원 받아 생명을 연장했던 일들이.
그 후, 오크들에게 붙잡혔을 때는 이젠 정말 끝이구나 싶었는데…….
“잘 들어주세요. 홍역은 기침, 가래, 고열을 일으킵니다. 특히 가장 무서운 게 고열인데, 최대한 열을 내리게 하려면 물로 적신 나무 섬유로 이렇게 머리와 겨드랑이 밑을 꼼꼼히 닦아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으론 이 움막 안에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응? 습도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으음, 그러니까 막 비가 온 뒤의 공기 상태와 비슷하다고 말해줘.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물이 끓고 있는 돌솥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말해주고. 어째서냐고? 이렇게 습도가 유지돼야 환자가 가래를 뱉기 쉬워지거든.”
죽기 살기로 오크들을 설득해 홍역을 치료할 당시의 일이 생각났다.
홍역은 특별한 치료법이 없기에 합병증을 일으키지 않게끔 적절한 대증요법이 매우 중요했다. 환자가 한두 명뿐이라면 번거롭게 설명하지 않고 나 혼자 다 처리했겠지만, 홍역을 앓고 있는 어린 오크가 어림잡아도 서른이 넘었기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오크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나는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어린 오크를 열심히 간호했다. 설사 변을 닦아주고, 가래를 뱉기 쉽도록 옆으로 눕혀주었으며, 발진이 난 몸 곳곳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처음엔 기이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는지 구경하던 오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내 정성을 이해하곤 저마다 내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홍역과의 싸움은 결코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홍역을 앓은 환자가 치료되었다 하더라도 바이러스는 어딘가에 남아 다른 환자를 만드니까. 그렇기에 홍역을 완전히 퇴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청결한 환경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난 홍역 환자를 치료하는 동시에 마을 곳곳에 대충 버린 오물들을 전부 땅에 묻도록 지시했다. 그러고는 홍역을 앓다 죽은 오크들의 시체 더미를 전부 불태워 매장하도록 했다. 그밖에도 이들에게 씻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했다.
그리고 기생충 감염도 무시하지 못할 일이기에 고기를 무조건 익혀 먹는 것과 발에 난 상처로 기생충 감염이 되지 않게 신발 또한 만들어 신게 했다.
물론 처음엔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자신들의 문화를 인간의 문화로 바꾸지 말라고 성내는 오크도 있었다. 하지만 밤새 쉬지 않고 홍역 환자를 돌보는 필사적인 모습에 그런 반발심은 점차 사라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홍역과의 전쟁을 선포하길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새 오크 마을에 내 집이 마련되었다. 하나둘, 사냥해 온 짐승 일부를 나눠 주는 오크가 생겨났다. 어떤 오크는 완쾌한 어린 오크와 함께 인사를 하러 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알게 모르게 나와 에릴은 오크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응? 뭐, 뭐예요? 왜 그렇게 보세요?”
당시 일을 생각하다 에릴을 너무 빤히 바라본 모양이다.
난 할 말이 없어 씩 웃으며 얼버무렸는데, 어째선지 에릴은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런데 그거 기억나세요? 이곳에 처음 잡혀 왔던 때.”
“응? 아아, 그럼. 어찌 잊을 수 있겠어. 그땐 참, 곤란한 일이 많았지.”
“저도 오크들에게 잡혀 왔을 땐 이젠 정말 끝이구나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들과 함께 살게 될 줄이야. 지금도 놀랍기만 해요.”
“나야말로. 여기서 이렇게 약초나 캐고 다닐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게 말이에요.”
약간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에 메고 있던 망태기를 흔들자 에릴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말 이렇게 살아가게 될지 그 누가 알았을까.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정말 앞이 깜깜할 지경이었는데, 그것도 2년이 넘어가니 이젠 현실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멀게 느껴질 지경이다.
“현호 님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안 드세요?”
“고향?”
“그… 있잖아요. 2년 전에는 뗏목이란 것을 만들 정도로 그렇게나 이 섬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땐 그랬지.”
내가 쓰게 웃자 에릴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금은… 어떤가요?”
“알잖아,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거. 아, 혹시 에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진 거야?”
내 물음에 에릴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그저 단지 현호 님이 걱정돼서요. 누구든 고향과 오래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지는 법이잖아요. 현호 님은 사람이 그립진 않으세요?”
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지금은 매우 옅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당장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돌아간다’를 선택할진 모르겠다.
우선 에릴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인어다. 이곳이면 몰라도 현실에서는… 괴물 취급당하겠지. 어쩌면 생체 실험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와 떨어져 나 혼자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이제 와 에릴과 헤어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다음으로 이 세계의 의료 수준이 최악이라는 것 때문이다.
2년 동안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감기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만약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오크는 평생 홍역에 고통 받았을 것이고, 에릴은 그 흔한 맹장으로 죽었을 것이다.
현실에선 내가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이곳은 나라는 존재가 꼭 필요했다. 어찌 보면 오만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2년 동안 생활해 보며 그렇게 느꼈다.
“운명을 붙잡아 또 하나의 기회를 열었으니, 자신의 신념을 믿고 길을 개척하라.”
지금 생각해 보면 신은 이곳의 열악한 상황 탓에 나를 여기에 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 인생은 차에 치인 순간 끝났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 나에게 또 하나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나 다름없다.
이런 나라는 존재가 이곳에서 도움이 된다면, 모두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이곳에선 나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어. 아직 홍역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도 없고. 지금 이곳에 내가 없으면 그들은 다시 고통 받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들은 저희를 잡아먹으려 했었잖아요. 그렇게까지 희생할 필요가 있나요?”
난 웃으며 에릴의 머리를 헝클었다.
“희생이란 표현은 좋지 않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고요?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요.”
머리를 헝클자 쑥스러운지 어깨를 잔뜩 좁히면서도 에릴은 끝까지 제 할 말을 다했다.
난 어쩔 수 없이 부끄럽지만 내 신념에 관해 설명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어릴 때 두 번 다시 누가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어. 지금도 나는 그 신념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야. 물론 그들이 우리를 해하려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찌 보면 그들도 살기 위해 한 행동이기도 해. 과거에 내가 살기 위해 에릴, 네가 구해다 준 물고기를 산 채로 먹었던 것과 다를 바 없지. 그러니 그들을 탓할 순 없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오크잖아요.”
“그 맹세는 단지 같은 사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야. 나는 있잖아, 생명에 옳고 그르거나 작고 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만약 내가 오크를 괴물로 취급했다면, 애초에 에릴, 너도 구하지 않았을 거야. 이제 이해했니?”
“…….”
에릴은 어째선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현호 님은 무언가 달라요.”
“다르다고? 뭐가?”
“2년 전 죽을 뻔한 저를 구해주신 것도 그렇고, 이렇게 약초에 대해 해박하신 것도 그렇고, 게다가 저나 오크를 대하는 것도. 으음, 뭐랄까…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겠어요.”
“그게 뭔데?”
“저와 오크는 현호 님에게 구원 받았다는 거요.”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에릴은 혀를 내밀며 웃었다.
“전 항상 현호 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함께 길을 걸으며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현호 님이 아니었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뭐야, 쑥스럽게.”
“농담이 아니라고요. 아, 다 왔어요!”
에릴이 손가락으로 언덕 위를 가리켰다. 둘이서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사이, 어느덧 우리는 오크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닥터다! 닥터 왔다!”
“정말이다! 닥터 왔다! 반갑다! 어서 와라!”
멀리서 나와 에릴을 발견한 것인지, 수많은 오크가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저 오크어를 알아듣기 위해 정말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만약 에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저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오크어는 생각보다 발음이 센 편이라 처음엔 따라 하기조차 버거웠지만, 이젠 나도 오크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나저나 저 닥터라는 말은 좀 어떻게 안 되나?
한때 저들이 나를 대해 묻기에 의사라 말했는데, 발음하기 무척 어려워하는 듯 보여 예전에도 종종 쓰였던 닥터란 호칭을 알려주었더니 이젠 그게 내 이름인 양 닥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선 외과 의사란 개념이 없을 테니 의사와 차별되게끔 닥터란 호칭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했지만, 뭔가 호칭을 이름처럼 불리니 과거 대학 병원에서 신의라 불렸던 게 생각나 자꾸만 쓴웃음이 지어진다는 걸 저들은 알까?
“닥터, 기다렸다! 어제는 덕분에 애 많이 나았다. 고맙다.”
“아, 타타루의 어머님이시죠? 감기는 많이 나았나요? 아, 잘됐어요. 방금 숲에서 약초를 캐 왔거든요? 도깨비풀이라고 하는데, 이걸 말려서 달여 먹으면 열을 내리는 데 좋을 거예요. 가져가세요.”
“감사한다. 이건 어제 잡은 노루 뒷다리다. 가장 맛 좋다. 보답한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닥터! 닥터! 우리 마당, 작물 엄청나게 나왔다! 돼지감자 엄청나게 많다! 준다, 받아라!”
“닥터! 저번 채집 때 먹는 버섯 많이 배웠다. 오늘 많이 채집했다. 이거 먹어라.”
“닥터가 만들어준 음식 맛있다. 오늘은 우리 식구와 저녁 먹는다. 재료 많이 준비했다.”
“비켜라! 오늘은 이 마탕카 집에 올 거다!”
“자, 잠깐만요. 이렇게 많이 다 못 가져갑니다! 우왁! 잡아끌지 마세요! 알았다니까요! 이따 저녁에 두 분 집에 전부 들르면 되잖아요!”
나를 중심으로 수많은 오크가 몰려들었다. 덕분에 정신이 없는데, 이젠 이런 일이 일상이 된 지 오래라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푸훗, 현호 님은 여전히 인기가 많네요?”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지 않으련?”
괜히 에릴이 얄밉다.
7장 요정(1)
“오, 이것 좀 봐. 여기서도 서식하는구나.”
“현호 님, 그게 뭔가요?”
“도깨비풀이라고 하는 거야.”
“도깨비…풀?”
도깨비풀을 한 움큼 쥐고 뽑아 보여주자 에릴은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도깨비풀이란 국화과의 한해살이풀로, 한국에선 산과 들, 어느 곳에서든 흔히 볼 수 있는 풀이었다. 바늘 모양 열매에 가시가 거꾸로 붙어 있어 가을철에 산기슭을 헤집고 다니면 옷에 잔뜩 달라붙는 게 특징인데, 설마 이런 곳에서 발견할 줄이야. 이번엔 수확이 좀 있네.
“설마… 그것도 먹는 건가요?”
몇 번 약초를 달여 사용하는 것을 본 에릴이 질린 얼굴로 물었다.
“이게 얼마나 좋은 약촌데. 이것을 햇볕에 말린 후 달여 마시면 해열 작용이 있기 때문에 열을 내리기 좋아.”
“벌써 홍역이 사라진 지 6개월이 넘었잖아요.”
“그야 그렇지만, 완전히 사라졌다곤 볼 수 없어. 뭐, 그밖에도 해독 효능이 있어 독사에 물린 상처에도 잘 듣거든. 여러모로 가지고 있어서 나쁠 건 없지.”
금덩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조심스레 약초를 챙기자 어째선지 에릴이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안 그래도 현호 님 집은 쓴 냄새만 가득한데 앞으로 얼마나 더 심해질지 생각하니……. 휴~”
“하하하!”
에릴은 내 집에 들어올 때마다 약초 냄새가 익숙하지 않은지 코를 막으며 괴로워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기에 웃은 것이다.
2년 전부터 아는 약초를 찾아 조금씩 모아왔는데, 이젠 정말 쓴 냄새만 날 정도로 약초 방처럼 변해 버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과거 한의학을 공부했던 게 정말 큰 도움이 된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벌써 2년인가.
2년 전, 이 섬에 떨어져 갖은 고생을 했던 일들이 문득 떠올랐다. 별의별 괴물들을 다 만나고 마지막엔 굶어 죽기 직전에 에릴에게 구원 받아 생명을 연장했던 일들이.
그 후, 오크들에게 붙잡혔을 때는 이젠 정말 끝이구나 싶었는데…….
“잘 들어주세요. 홍역은 기침, 가래, 고열을 일으킵니다. 특히 가장 무서운 게 고열인데, 최대한 열을 내리게 하려면 물로 적신 나무 섬유로 이렇게 머리와 겨드랑이 밑을 꼼꼼히 닦아주어야 합니다. 그다음으론 이 움막 안에 적당한 습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응? 습도가 무슨 말인지 모른다고? 으음, 그러니까 막 비가 온 뒤의 공기 상태와 비슷하다고 말해줘.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 물이 끓고 있는 돌솥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도 말해주고. 어째서냐고? 이렇게 습도가 유지돼야 환자가 가래를 뱉기 쉬워지거든.”
죽기 살기로 오크들을 설득해 홍역을 치료할 당시의 일이 생각났다.
홍역은 특별한 치료법이 없기에 합병증을 일으키지 않게끔 적절한 대증요법이 매우 중요했다. 환자가 한두 명뿐이라면 번거롭게 설명하지 않고 나 혼자 다 처리했겠지만, 홍역을 앓고 있는 어린 오크가 어림잡아도 서른이 넘었기에 어쩔 수 없이 모든 오크들에게 설명해야 했다.
나는 설명을 이어가면서도 어린 오크를 열심히 간호했다. 설사 변을 닦아주고, 가래를 뱉기 쉽도록 옆으로 눕혀주었으며, 발진이 난 몸 곳곳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처음엔 기이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는지 구경하던 오크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내 정성을 이해하곤 저마다 내 행동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홍역과의 싸움은 결코 단기간에 끝나지 않는다. 홍역을 앓은 환자가 치료되었다 하더라도 바이러스는 어딘가에 남아 다른 환자를 만드니까. 그렇기에 홍역을 완전히 퇴치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청결한 환경이 우선시되어야 했다.
난 홍역 환자를 치료하는 동시에 마을 곳곳에 대충 버린 오물들을 전부 땅에 묻도록 지시했다. 그러고는 홍역을 앓다 죽은 오크들의 시체 더미를 전부 불태워 매장하도록 했다. 그밖에도 이들에게 씻는 행위가 얼마나 중요한지 설파했다.
그리고 기생충 감염도 무시하지 못할 일이기에 고기를 무조건 익혀 먹는 것과 발에 난 상처로 기생충 감염이 되지 않게 신발 또한 만들어 신게 했다.
물론 처음엔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자신들의 문화를 인간의 문화로 바꾸지 말라고 성내는 오크도 있었다. 하지만 밤새 쉬지 않고 홍역 환자를 돌보는 필사적인 모습에 그런 반발심은 점차 사라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홍역과의 전쟁을 선포하길 한 달쯤 지났을까. 어느새 오크 마을에 내 집이 마련되었다. 하나둘, 사냥해 온 짐승 일부를 나눠 주는 오크가 생겨났다. 어떤 오크는 완쾌한 어린 오크와 함께 인사를 하러 오기도 했다.
그야말로 알게 모르게 나와 에릴은 오크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 것이다.
“응? 뭐, 뭐예요? 왜 그렇게 보세요?”
당시 일을 생각하다 에릴을 너무 빤히 바라본 모양이다.
난 할 말이 없어 씩 웃으며 얼버무렸는데, 어째선지 에릴은 얼굴을 붉혔다.
“그, 그런데 그거 기억나세요? 이곳에 처음 잡혀 왔던 때.”
“응? 아아, 그럼. 어찌 잊을 수 있겠어. 그땐 참, 곤란한 일이 많았지.”
“저도 오크들에게 잡혀 왔을 땐 이젠 정말 끝이구나 생각했었는데, 설마 그들과 함께 살게 될 줄이야. 지금도 놀랍기만 해요.”
“나야말로. 여기서 이렇게 약초나 캐고 다닐 줄 누가 알았을까.”
“그러게 말이에요.”
약간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에 메고 있던 망태기를 흔들자 에릴은 키득거리며 웃었다.
정말 이렇게 살아가게 될지 그 누가 알았을까.
처음 이곳에 떨어졌을 때만 해도 정말 앞이 깜깜할 지경이었는데, 그것도 2년이 넘어가니 이젠 현실에서의 생활이 오히려 멀게 느껴질 지경이다.
“현호 님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안 드세요?”
“고향?”
“그… 있잖아요. 2년 전에는 뗏목이란 것을 만들 정도로 그렇게나 이 섬을 빠져나가고 싶어 하셨잖아요.”
“…그땐 그랬지.”
내가 쓰게 웃자 에릴은 조심스럽게 내 눈치를 보며 말했다.
“지금은… 어떤가요?”
“알잖아, 이곳에서 살아가기로 마음먹은 거. 아, 혹시 에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진 거야?”
내 물음에 에릴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붕붕 저었다.
“저는 아무래도 좋아요. 그저 단지 현호 님이 걱정돼서요. 누구든 고향과 오래 떨어져 있으면 그리워지는 법이잖아요. 현호 님은 사람이 그립진 않으세요?”
난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지금은 매우 옅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사람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지금 당장 돌아갈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내가 ‘돌아간다’를 선택할진 모르겠다.
우선 에릴이 마음에 걸렸다. 그녀는 인어다. 이곳이면 몰라도 현실에서는… 괴물 취급당하겠지. 어쩌면 생체 실험에 끌려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와 떨어져 나 혼자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건데… 이제 와 에릴과 헤어진다는 건 상상할 수도 없다.
다음으로 이 세계의 의료 수준이 최악이라는 것 때문이다.
2년 동안 지내며 알게 된 사실인데, 이곳은 어처구니없게도 간단한 감기만으로도 죽을 수 있는 곳이었다. 만약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오크는 평생 홍역에 고통 받았을 것이고, 에릴은 그 흔한 맹장으로 죽었을 것이다.
현실에선 내가 없어도 상관이 없지만, 이곳은 나라는 존재가 꼭 필요했다. 어찌 보면 오만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2년 동안 생활해 보며 그렇게 느꼈다.
“운명을 붙잡아 또 하나의 기회를 열었으니, 자신의 신념을 믿고 길을 개척하라.”
지금 생각해 보면 신은 이곳의 열악한 상황 탓에 나를 여기에 보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내 인생은 차에 치인 순간 끝났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 나에게 또 하나의 기회가 주어진 셈이나 다름없다.
이런 나라는 존재가 이곳에서 도움이 된다면, 모두 나를 필요로 한다면…….
기꺼이 나는 이곳에서 살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이곳에선 나를 필요로 하는 자들이 있어. 아직 홍역이 완전히 끝났다고 볼 수도 없고. 지금 이곳에 내가 없으면 그들은 다시 고통 받을지도 몰라.”
“하지만 그들은 저희를 잡아먹으려 했었잖아요. 그렇게까지 희생할 필요가 있나요?”
난 웃으며 에릴의 머리를 헝클었다.
“희생이란 표현은 좋지 않아.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뿐이야.”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는 것이라고요? 저는 잘 이해가 안 돼요.”
머리를 헝클자 쑥스러운지 어깨를 잔뜩 좁히면서도 에릴은 끝까지 제 할 말을 다했다.
난 어쩔 수 없이 부끄럽지만 내 신념에 관해 설명해 주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어릴 때 두 번 다시 누가 죽어가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맹세했었어. 지금도 나는 그 신념대로 행동하고 있을 뿐이야. 물론 그들이 우리를 해하려 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건 어찌 보면 그들도 살기 위해 한 행동이기도 해. 과거에 내가 살기 위해 에릴, 네가 구해다 준 물고기를 산 채로 먹었던 것과 다를 바 없지. 그러니 그들을 탓할 순 없어.”
“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오크잖아요.”
“그 맹세는 단지 같은 사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야. 나는 있잖아, 생명에 옳고 그르거나 작고 큰 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만약 내가 오크를 괴물로 취급했다면, 애초에 에릴, 너도 구하지 않았을 거야. 이제 이해했니?”
“…….”
에릴은 어째선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현호 님은 무언가 달라요.”
“다르다고? 뭐가?”
“2년 전 죽을 뻔한 저를 구해주신 것도 그렇고, 이렇게 약초에 대해 해박하신 것도 그렇고, 게다가 저나 오크를 대하는 것도. 으음, 뭐랄까… 잘 설명하지 못하겠지만, 이것 하나만은 알겠어요.”
“그게 뭔데?”
“저와 오크는 현호 님에게 구원 받았다는 거요.”
내가 눈을 끔뻑거리자 에릴은 혀를 내밀며 웃었다.
“전 항상 현호 님께 감사하고 있어요. 지금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것도, 함께 길을 걸으며 얘기할 수 있게 된 것도 현호 님이 아니었으면 할 수 없는 것들이니까요.”
“뭐야, 쑥스럽게.”
“농담이 아니라고요. 아, 다 왔어요!”
에릴이 손가락으로 언덕 위를 가리켰다. 둘이서 두런두런 얘기 나누는 사이, 어느덧 우리는 오크 마을에 도착한 것이다.
“닥터다! 닥터 왔다!”
“정말이다! 닥터 왔다! 반갑다! 어서 와라!”
멀리서 나와 에릴을 발견한 것인지, 수많은 오크가 손을 흔들며 반겨주었다.
저 오크어를 알아듣기 위해 정말 꽤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 만약 에릴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직도 저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다.
오크어는 생각보다 발음이 센 편이라 처음엔 따라 하기조차 버거웠지만, 이젠 나도 오크와 비슷하게 말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그나저나 저 닥터라는 말은 좀 어떻게 안 되나?
한때 저들이 나를 대해 묻기에 의사라 말했는데, 발음하기 무척 어려워하는 듯 보여 예전에도 종종 쓰였던 닥터란 호칭을 알려주었더니 이젠 그게 내 이름인 양 닥터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차피 이 세계에선 외과 의사란 개념이 없을 테니 의사와 차별되게끔 닥터란 호칭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했지만, 뭔가 호칭을 이름처럼 불리니 과거 대학 병원에서 신의라 불렸던 게 생각나 자꾸만 쓴웃음이 지어진다는 걸 저들은 알까?
“닥터, 기다렸다! 어제는 덕분에 애 많이 나았다. 고맙다.”
“아, 타타루의 어머님이시죠? 감기는 많이 나았나요? 아, 잘됐어요. 방금 숲에서 약초를 캐 왔거든요? 도깨비풀이라고 하는데, 이걸 말려서 달여 먹으면 열을 내리는 데 좋을 거예요. 가져가세요.”
“감사한다. 이건 어제 잡은 노루 뒷다리다. 가장 맛 좋다. 보답한다.”
“아니, 뭘 이런 걸 다…….”
“닥터! 닥터! 우리 마당, 작물 엄청나게 나왔다! 돼지감자 엄청나게 많다! 준다, 받아라!”
“닥터! 저번 채집 때 먹는 버섯 많이 배웠다. 오늘 많이 채집했다. 이거 먹어라.”
“닥터가 만들어준 음식 맛있다. 오늘은 우리 식구와 저녁 먹는다. 재료 많이 준비했다.”
“비켜라! 오늘은 이 마탕카 집에 올 거다!”
“자, 잠깐만요. 이렇게 많이 다 못 가져갑니다! 우왁! 잡아끌지 마세요! 알았다니까요! 이따 저녁에 두 분 집에 전부 들르면 되잖아요!”
나를 중심으로 수많은 오크가 몰려들었다. 덕분에 정신이 없는데, 이젠 이런 일이 일상이 된 지 오래라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푸훗, 현호 님은 여전히 인기가 많네요?”
“그러지 말고 좀 도와주지 않으련?”
괜히 에릴이 얄밉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