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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6화)


6장 에릴


제가 어릴 적 어느 날이었어요. 언제나 평온하기 그지없는 한가로운 바닷속에서 그날도 제가 가장 좋아하는 소라게 씨와 함께 놀고 있었는데, 그날은 다른 인어 친구들에게 무척 특별한 말을 듣게 되었어요.
“혹시 그 얘기 알고 있니? 우리 인어들의 입맞춤은 무척 특별하대.”
“특별?”
“응! 서로 말이 안 통하는 상대와 입맞춤하면… 글쎄, 대화가 통한대!”
“정말? 우와아아!”
얼떨결에 들었지만, 정말 놀라운 일이었어요. 그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같이 놀고 있는 소라게 씨하고도 대화할 수 있다는 거 아니겠어요?
“어마마마! 어마마마!”
저는 소라게 씨를 안아 들고 어마마마가 있는 산호초 밭으로 향했어요. 그곳은 무지갯빛 산호초가 가득한 곳인데, 그걸 가꾸시는 게 취미인 분이라 그곳에 계시리라 생각했죠.
역시나 제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요.
“에릴? 어서 오렴. 그런데 무슨 그리 바삐…….”
“있잖아요! 있잖아요! 아까 애들이 그러는데, 인어는 상대와 입을 맞추면 대화가 통한대요! 정말이에요? 정말이에요? 그럼 소라게 씨와도 입 맞추면 대화할 수 있나요? 그래요? 그래요?”
제 반짝반짝 눈빛이 무척 부담스러웠는지 어마마마는 무척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네요. 많이 당황하셨던 건지 가꾸고 있던 산호도 분질러 버렸어요.
이건 나중에 어마마마를 곤란하게 했다고 아바마마한테 혼날 거 같아요…….
“으음, 에릴. 일단 진정하고 그 소라게 씨 놓아주겠니?”
“왜요?”
“아니, 그러니까… 아! 에릴! 저기 보렴! 빛나는 해파리 씨 지나가네?”
“어? 어디요! 앗!”
잠깐 한눈판 사이 어마마마가 제 소라게 씨를 빼앗았어요. 그러면서 어째선지 안도의 한숨을 내쉬네요.
…설마 어마마마도 제 소라게 씨를 탐냈던 걸까요?
제가 울상을 짓자 어마마마는 무척 당황하시기 시작했어요.
“에, 에릴, 울지 마렴. 돌려줄게. 당장 돌려줄 테니까 성급히 소라게 씨와 입맞춤하지 않겠다고 먼저 약속해 주겠니?”
“히끅, 흐윽.”
눈물을 참으면서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자 어마마마는 정말 제 소라게 씨를 돌려주었어요. 애초에 이럴 거면 왜 빼앗았던 걸까요?
“됐지? 그럼 친구와 무슨 얘길 했는지 자세히 들려주지 않겠니?”
그제야 언제나 보던 상냥한 어마마마로 되돌아왔어요. 전 자랑하듯 손까지 흔들며 아까 들었던 얘길 신나게 설명해 주었죠. 어마마마는 제 얘길 전부 듣곤 이마를 짚었어요.
“그 아이들도 성급하게 다른 부모의 얘길 엿들었던 것 같구나. 아직 너희에겐 이른데……. 후우, 에릴, 엄마 말 명심하고 잘 들으렴. 그 친구들 말대로 인어의 입맞춤은 말이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를 나눌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단다.”
“정말요? 진짜예요? 그럼 정말 소라게 씨하고도……!”
“단, 그것엔 정말 큰 대가가 필요하단다.”
“대가…요?”
어마마마가 섬뜩한 얼굴로 얘길 하셔서 살짝 무서워졌어요.
“그래. 자신의 영혼을 소모하는, 정말 무서운 대가지.”
“영혼요? 그게 뭐예요?”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래, 마음. 한 번 입 맞출 때마다 에릴의 마음을 소모해 가는 거야.”
“그,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그건 우리 에릴도 잘 알고 있을 거야. 인어의 마지막이 어떤지.”
네. 어마마마 말대로 그건 저도 알고 있어요. 저희 할머니도 그랬고, 다른 장로님이 돌아가실 때마다 보아왔던 것이니까요.
인어의 마지막은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거품이 되어 사라져요.
“그, 그럼 소라게 씨하고 입 맞추면 저도 물거품이 돼요?”
제가 두려움에 떨며 말하니 어마마마는 그런 제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심시켜 주네요.
“한두 번 정도로 거품이 되진 않는단다. 그렇다고 마구 남용해선 안 되겠지?”
“하, 하지만 거품이 되잖아요! 죽잖아요!”
“에릴, 무서워 마렴. 그렇기에 인어의 입맞춤이란 매우 고결하고 아름다운 행위란다. 잘 생각해 보렴, 엄마가 항상 누구와 입맞춤하지.”
“그야 아바마마… 앗! 그럼 어마마마는!”
“그래. 엄마에게 있어서 에릴의 아버진 영혼을 내주어도 좋을 만큼 소중한 이란다. 그러니까 인어의 입맞춤은 상대를 내 평생 반려자로 인정한다는 약속의 증표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러니 에릴, 너도 훗날에 소중한 이를 위해 소라게 씨에게 할 입맞춤은 아껴두지 않겠니?”
놀라워요. 그런 비밀이 있었군요. 그런데…….
“반려자가 뭐예요?”
“후훗, 언젠가 알게 될 거야.”
어마마마는 그저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어요. 그땐 왜 그 단어를 몰랐을까요. 제가 다 부끄럽네요.

오랜만에 어릴 적 꿈을 꿔 기분이 좋아요. 마치 과거를 여행하고 온 듯한 느낌이에요. 벌써 이 섬에 갇혀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를 못 본 지도 100년이 넘었네요. 두 분은 여전히 잘 계실까요?
“으윽!”
잠시 꿈속의 여운을 음미하며 감상에 젖어 있는데 등에서 엄청난 통증이 밀려와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제야 지금 제 상태를 인지할 수 있었죠.
분명 저는 수많은 오크 무리 앞에서 지쳐 쓰러졌었어요. 이제 더는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간신히 눈을 뜨니 놀랍게도 제 옆에 영웅님이 잠들어 계셨어요. 대체 언제부터 여기 계셨던 걸까요?
영웅님의 얼굴이 매우 해쓱해 보여요. 마치 폭풍우가 왔던 날의 모습과 비슷하네요. 가여우신 분. 저는 이분의 고충을 이해해요. 저 역시 100년이나 가족을 보지 못했으니까요.
저는 조금 안쓰러운 눈길로 영웅님을 바라보다 슬쩍 등을 만져 봤어요. 오돌토돌하게 꿰매져 있는 촉감이 느껴지네요. 배에 있는 상처와 다르지 않아요. 역시 이번에도 저는 영웅님에게 구원 받은 거네요.
문득 영웅님을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나네요. 그날은 무척이나 배가 아팠었어요. 며칠 전부터 배가 아프긴 했지만, 그날만큼 아픈 건 처음이었죠. 이제 다 틀렸다고, 이대로 쓰러져 상어의 먹이가 될 거라고 생각하며 쓰러진 날이었어요.
그때, 누군가가 저를 물 밖으로 끄집어냈어요. 처음엔 나를 노리는 산짐승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곧 다르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죠. 네. 그날 영웅님을 처음 보게 되었어요.
흩날리는 흰색 옷을 입고 있던 영웅님의 처음 모습은 마치 어마마마가 말해주었던 천사의 모습과 매우 흡사했어요. 어째선지 온몸이 진흙 범벅이라 타락 천사에 더 어울렸지만요. 후훗.
그분은 제 모습을 보곤 무척이나 놀란 얼굴을 하셨었어요. 아마도 저를 같은 인간이라 착각해 구해주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도 어쩔 수 없는 일이란 걸 알고 쓰게 웃었었죠. 그런데 그 후, 정말 놀라고 말았어요.
영웅님이 다시 돌아왔거든요.
당시의 놀람을 말하자면, 인어의 입맞춤에 대해 알게 되었던 날과 비슷한 정도라고 할까요? 정말 그 정도로 놀랐었어요.
어마마마에게 듣기로 인간이란 다른 종족을 노예로 부리며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괴팍한 집단이라고 들었었어요. 하지만 영웅님은 전혀 달랐죠. 그건 저를 구하기 위해 필사적인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어요.
그래도 제 배를 째 손을 집어넣었을 땐… 죄송하지만, 원망하기도 했답니다. 한순간 영웅님을 믿지 못하고 저주했었답니다. 이, 이 사실은 죽을 때까지 비밀로 간직할 거예요. 절대로요!
어, 어쨌든 그렇게 저는 구원 받았어요. 한평생 갚아도 모자랄 은혜를 입었어요. 그래서 이상하게 생긴 나무를 타고 바다로 나가려는 영웅님을 구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입맞춤했던 당시에도 절대로 원망하지 않았었죠. 오크와 입맞춤해 달라고 부탁할 때도 거절하지 않았었죠. 이미 제 목숨은 영웅님이 구해준 목숨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에 또 은혜를 입고 말았네요.
어째선지 아까부터 자꾸 눈물 나오네요. 왜 이렇게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인지 모르겠어요.
“으음, 에릴… 응? 에릴? 에릴! 정신이 들어?”
작게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던 걸까요? 잠꼬대하던 영웅님이 다급히 일어나 제 상태를 살펴보네요.
전 힘없이 웃어 보였어요. 죄송하지만, 지금 말 한마디 할 기운도 없……!
순간, 입 밖으로 비명을 지를 뻔했어요. 그, 그도 그럴 게… 영웅님이 절 안을 줄 꿈에도 생각 못했으니까요! 어, 어쩌죠? 저, 어쩌면 좋죠?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한동안 어찌할 줄 몰라 팔만 바동거리는 그때, 울먹이며 말하는 영웅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어요. 전 그제야 영웅님이 절 얼마나 걱정해 주었는지 잘 알 수 있었죠.
미안한 마음에 영웅님의 머리를 쓰다듬어 봐요. 전에 영웅님이 제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 뭔가 따뜻해서 기분이 좋았거든요. 영웅님도 저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으면 해요.
어마마마의 당부도 잊고 벌써 두 명과 입맞춤해 버렸지만, 저는 후회하지 않아요. 앞으로도 이분을 위해서라면 몇 번이라도 입맞춤할 거예요. 그래서 물거품이 되어 사라진다 하여도 영웅님을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저에게 있어서 영웅님은 두 번이나 저를 구원해 주신 천사니까요.
지금 저에게 있어 영웅님은 가장 소중한 분이세요.
그러고 보니 그때 소중한 이를 위해 입맞춤은 아껴두라 하셨던 어마마마의 말씀이 기억나네요. 으음, 그밖에 뭐라고 하셨더라? 아, 그래. 입맞춤은 상대를 내 평생 반려자로 인정한다는… 약속의 증표…….
“얼굴이 뜨거워! 젠장! 열이 올라간 건가! 에릴! 기다려! 해열 작용하는 약초가 어딘가 분명 있을 거야!”
“아, 아니요오오……. 그게 아니에요오오…….”
부끄러워 자꾸만 말이 늘어져요. 하, 하지만 어쩌라고요. 갑자기 생각난 건데!
저… 이미 두 명이랑 입맞춤했지만, 여, 영웅님이 그래도 처, 처음이었어요. 저에게 있어 소중한 분이기도 하고……. 그럼 어마마마, 이, 이거, 야, 약속의 증표…라고 해도 되…나요?
“왜 그래?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말해봐! 할 수 있는 건 다 해줄게!”
…아무래도 이 사실도 평생 비밀로 간직해야겠어요. 죄송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