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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5화)
5장 홍역(4)
심장이 뛰고 있지 않아 피가 튀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린아이의 몸을 가른다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만약 배를 가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손이 덜덜 떨렸겠지.
내 괴기스러운 행동에 여성 오크들이 흥분하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피부가 찌릿할 정도로 엄청난 살기가 전해져 온다. 만약 장로가 여성 오크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내 몸은 갈기갈기 찢겨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난 조금만 삐끗해도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잠시 식은땀을 닦고 거칠게 아이 배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행동으로 이제 남성오크들까지 분개했지만, 곧 모두의 얼굴은 기겁, 그 자체로 변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 내 손에는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1m 남짓의 광절열두조충(Diphyllobothriumlatum)이 들려 있었으니까.
설마 이것뿐일까. 그밖에도 위장에서는 이리저리 얽혀 있는 수십 마리의 회충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기생충들을 꺼내 바닥에 내던지니 오크들은 저마다 뒷걸음쳤다. 몇 명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직 꿈틀거리는 회충 덩어리를 보다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다른 곳을 뒤져 보면 인체에 해가 되는 다른 기생충도 더 찾을 수 있을 테지만, 저들의 표정을 보니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난 배 속에 있던 손을 꺼냈다.
홍역 병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다. 현미경이 아니고서야 어찌 확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눈에 보일 만큼 확실히 확인 가능한 것이 이 죽은 어린 오크 시체 몸속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생충이다.
사람을 종숙주로 삼는 대부분의 조충,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등은 어찌 보면 인체에 크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기생충들이다. 식량만 제공된다면 그저 더불어 살아갈 뿐이니까. 그렇기에 옛날엔 죽을 때까지도 모르는 경우가 빈번할 정도였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스파르가눔(Sparganum)이나 말라리아 원충과 같이 사람을 중간숙주로 삼는 기생충들이다.
이런 기생충 중 몇몇은 뇌 기능에 이상을 줘 어지럼증이 생기게 하거나 예민해지게 만들기도 한다. 아까 줄에 묶여 있을 당시, 오크가 흥분하면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포악해진다는 에릴의 말을 듣고 기생충 감염이 의심 갔다.
생각해 보면 오크와 처음 만났을 때도 거미를 생째로 으적 씹어 먹었었다. 그렇다면 대부분 생식을 한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어쨌거나 홍역과 전혀 무관한 기생충을 왜 보여주었는가. 그 답은 지금 저들이 경악하고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무지한 자들을 믿게 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눈에 확실히 보이는 증거뿐이다. 물론 홍역 자체를 가지고 증거를 보여주는 건 무리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기생충인 것이다.
역시나 기생충을 보곤 홍역 병균이라 오해한 자들이 뭐라 장로에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밖의 오크들도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마조마했지만, 난 저들이 답을 내릴 수 있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장로의 답변이 들려왔다.
“하아, 하아. 성공…이에요. 병을… 치료해 주는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지 묻…….”
“좋아! 성공이… 에, 에릴!”
작전은 성공했다.
그리고 동시에 에릴이 정신을 잃었다.
“에릴! 정신 차려! 젠장! 쇼크인가!”
다급히 뛰어가 에릴을 안았다. 창백한 얼굴, 의식 소실. 역시 출혈성 쇼크(외상으로 인한 대량 출혈)? 아니, 그렇게 피를 흘리진 않았어. 어쩌면 아까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때 척추를 다쳐 신경성 쇼크(척추 손상)를 일으켰을지도 몰라. 잠깐만, 그런 식이라면 저체액성 쇼크(탈수)나 패혈성 쇼크(감염성 패혈증)도 의심해야 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상처 부위를 통한 미생물 감염으로 염증이 생겨 패혈성 쇼크를 일으켰다면 지금 내가 가진 의료 도구로는 치료할 수 없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니 더더욱 등에 꽂힌 나무창에 눈이 갔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놓는 건 의사로서 좋은 습관이지만, 지금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정신 차리자. 지금 에릴을 살릴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우선 맥박이 뛰고 있는지, 숨을 쉬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작고 약하지만 맥박은 뛰고 있다. 숨 역시도 약하지만 쉬고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할 정도까진 아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어!
난 되도록 척추가 다치지 않게 에릴을 안아 그늘로 데려가며 외쳤다.
“가방을! 내 가방을 줘!”
오크들은 에릴이 쓰러지자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내 외침을 듣고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저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할 뿐이었다.
젠장,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저 오크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얼마나 걸릴까? 또 의료 도구가 든 가방을 가지러 해변까지 가야 한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 의료 도구를 소독하고 수술을 시작하는 준비 과정까진 또 얼마나 걸릴까!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신음하는 에릴인데, 버틸 수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처참하리만치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던 그때.
언제 다가온 건지 내 앞에 선 장로가 지팡이를 에릴에게 내밀며 뭐라 중얼거렸다.
“이, 이게 뭐야?”
그러자 몹시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지팡이에서 붉은빛이 뿜어지더니, 창백했던 에릴의 안색이 급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기엔 그냥 평범한 나무 지팡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붉은빛이라니!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현상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기적은 거짓이 아닌지, 붉은빛을 쐬자 어느 정도 호흡도 안정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정말 기적인가?
정말 그건 기적이 맞는지 구경하던 모든 오크가 장로를 향해 엎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신을 직접 접견한 신도들처럼.
내가 말문이 막혀 혼란스러워하자 장로는 몹시 피곤한 얼굴(어쩐지 그래 보였다)로 나에게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곤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에릴의 안색이 다시 변해갔다. 뭔가 알 수 없는 기적으로 조금 체력을 회복했지만, 원인을 해결하지 못해 다시 쇼크 증상을 보인 것이다. 장로도 눈치챈 것인지 아까 사용한 붉은빛을 다시 사용했지만, 이전처럼 안색이 눈에 띄게 돌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장로는 다시 고개를 젓곤 기어코 지팡이를 회수했다. 난 그의 행동과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 그는 에릴의 치료를 포기한 것이다.
“자, 잠깐 기다려!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게 아니잖아! 어쩌면 그 힘으로 에릴을… 제기랄!”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기적에 기대려 하는 나라는 인간이 한심스러웠다. 나는 의사다. 의사가 환자를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기적이나 바라고 있다니!
그럴 거면 의사 면허 따위 불태워 버려!
물을 끓이고 있는 돌솥 단지로 달렸다. 그러고는 그곳에 내 셔츠를 벗어 던져 넣었다. 내 행동에 수많은 오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사이 나무 작대기 하나를 가져와 휘휘 젖곤 물에 삶아진 셔츠를 꺼내 또 다른 솥단지에 다시 투척했다. 이걸로 살균한 면은 확보했다. 이제 면이 삶아지는 사이 해변까지 달려가 가방을 가져와 보는 수밖에 없…….
한 시간이 걸리든 두 시간이 걸리든 해변까지 뛰어가리라 결심하던 그때,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던 움막 지붕에서 내 눈에 익숙한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그 움막집만이 특이하게도 지붕 꼭대기에 나뭇잎을 이용해 부채처럼 만든 무언가가 장식으로 걸려 있었다. 저들은 그저 신기한 것이라며 달아놓았겠지만, 나는 저게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야 모를 리가 있겠는가. 바로 내가 일주일이나 걸려 만든 뗏목 돛대인데!
그 움막집으로 달렸다. 뗏목 돛대가 있다는 건 저들이 내 물품들을 회수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즉, 어쩌면 저기 어딘가 의료 도구가 든 가방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있어! 있었어!”
그 움막집 안에서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그밖에도 죽통 잔, 뗏목 파편과 노, 몇몇 급조해 만든 그릇도 함께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난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 가방을 얼싸안고 움막을 나왔다. 내 뒤를 따라왔던 건지 움막 밖에는 수많은 오크가 몰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나를 막지 않았다.
나는 에릴에게 도착하기 무섭게 가방을 열어 의료 도구를 점검해 살균이 필요한 물품들을 전부 돌솥 안에 집어넣었다. 곳곳에 물을 끓이고 있던 돌솥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었을 텐데,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오크들은 여전히 신기한 동물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가 주사기를 꺼내 마취제를 담고 에릴의 등에 국소마취를 시작하자 기겁해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독특한 마취 향 때문에 놀란 것일지도 모른다. 저들이 국소마취에 대해 알 리가 없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지금 에릴은 당장은 의식이 없지만 심한 고통을 느끼면 몸부림을 칠 가능성이 있기에 마취를 감행했다. 하나 이 침윤마취는 마취 시간도 짧고, 근육 깊숙한 곳이 다쳐 수술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완벽한 통증 차단도 어렵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소독한 의료 도구와 살균한 면을 가져왔다. 이로써 일단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갖췄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수혈액도 없다. 홍역 병균이 만연히 퍼져 있을 정도로 환경도 최악이다. 보통 이 정도라면 수술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모든 의사가 말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금 내가 치료하려는 건 사람이 아니라 인어니까.
지금 나는 맹장 수술 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움직일 수 있던 인어의 재생력과 상처가 난 상태로도 바닷속에서 생활할 수 있던 면역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결과를 따지기 이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죽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단 백배 나을 테니까!
“후우, 수술 개시.”
나는 먼저 등에 박힌 나무창을 뽑았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오크가 기겁해 웅성거렸다.
가장 우려한 건 나무창을 뽑는 순간 선홍색 피가 뿜어져 나오는 거였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흉배 동맥과 늑간 동맥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나는 살균한 셔츠로 흘러나온 피를 빠르게 닦고 안쪽을 살펴봤다.
광배근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손상된 것 같다. 보통이라면 이 정도는 근육이 살이 될 뿐,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수영을 해야 하는 인어에겐 치명적이다.
“여기를 잡아줘! 그래!”
호승심이 강한 것인지, 가까이 다가온 두 오크에게 각각 좌우로 상처를 벌리게끔 유도하고 빠르게 광배근 신경과 혈관을 봉합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정교하다. 정신을 집중해서인지 이마에 땀이 찼다. 하지만 눈에 들어가지 않게 닦아줄 간호사는 없기에 무시하기로 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거의 무아지경 속에서 수술하는, 묘한 기분이다. 지금 내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상.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던 오크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정말 모든 오크가 입을 다문 것 같았다. 아까 뒤돌아 떠났던 장로도 언제 다시 다가온 것인지 손을 놀리고 있는 나를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신경과 혈관을 연결한 나는 빠르게 피부를 봉합해 나갔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0분. 이 모습을 선배가 보았다면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볼까. 경악? 존경? 그것도 아니면 괴물 취급?
아마도 지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오크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
“부탁이다, 살아다오.”
수술을 마친 난 잠들어 있는 에릴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염원했다.
5장 홍역(4)
심장이 뛰고 있지 않아 피가 튀거나 하진 않았지만, 어린아이의 몸을 가른다는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만약 배를 가르는 일이 익숙하지 않았더라면 손이 덜덜 떨렸겠지.
내 괴기스러운 행동에 여성 오크들이 흥분하며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피부가 찌릿할 정도로 엄청난 살기가 전해져 온다. 만약 장로가 여성 오크들의 행동을 제지하지 않았더라면 이미 내 몸은 갈기갈기 찢겨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난 조금만 삐끗해도 살해당할지 모른다는 긴장감 속에서 잠시 식은땀을 닦고 거칠게 아이 배 속에 손을 집어넣었다. 그 행동으로 이제 남성오크들까지 분개했지만, 곧 모두의 얼굴은 기겁, 그 자체로 변했다.
그럴 수밖에. 지금 내 손에는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1m 남짓의 광절열두조충(Diphyllobothriumlatum)이 들려 있었으니까.
설마 이것뿐일까. 그밖에도 위장에서는 이리저리 얽혀 있는 수십 마리의 회충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기생충들을 꺼내 바닥에 내던지니 오크들은 저마다 뒷걸음쳤다. 몇 명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아직 꿈틀거리는 회충 덩어리를 보다 바닥에 주저앉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다른 곳을 뒤져 보면 인체에 해가 되는 다른 기생충도 더 찾을 수 있을 테지만, 저들의 표정을 보니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에 난 배 속에 있던 손을 꺼냈다.
홍역 병균은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다. 현미경이 아니고서야 어찌 확인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눈에 보일 만큼 확실히 확인 가능한 것이 이 죽은 어린 오크 시체 몸속에 있었다.
그것은 바로 기생충이다.
사람을 종숙주로 삼는 대부분의 조충, 회충, 요충, 십이지장충 등은 어찌 보면 인체에 크게 피해를 주지 않는 기생충들이다. 식량만 제공된다면 그저 더불어 살아갈 뿐이니까. 그렇기에 옛날엔 죽을 때까지도 모르는 경우가 빈번할 정도였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건 스파르가눔(Sparganum)이나 말라리아 원충과 같이 사람을 중간숙주로 삼는 기생충들이다.
이런 기생충 중 몇몇은 뇌 기능에 이상을 줘 어지럼증이 생기게 하거나 예민해지게 만들기도 한다. 아까 줄에 묶여 있을 당시, 오크가 흥분하면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포악해진다는 에릴의 말을 듣고 기생충 감염이 의심 갔다.
생각해 보면 오크와 처음 만났을 때도 거미를 생째로 으적 씹어 먹었었다. 그렇다면 대부분 생식을 한다는 뜻일 테고, 그렇다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라 판단했다.
어쨌거나 홍역과 전혀 무관한 기생충을 왜 보여주었는가. 그 답은 지금 저들이 경악하고 있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지 않겠는가.
무지한 자들을 믿게 하는 방법은 오로지 하나, 눈에 확실히 보이는 증거뿐이다. 물론 홍역 자체를 가지고 증거를 보여주는 건 무리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이 기생충인 것이다.
역시나 기생충을 보곤 홍역 병균이라 오해한 자들이 뭐라 장로에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그밖의 오크들도 눈에 띄게 당황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조마조마했지만, 난 저들이 답을 내릴 수 있도록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장로의 답변이 들려왔다.
“하아, 하아. 성공…이에요. 병을… 치료해 주는 대…가…로 무엇을 바라는지 묻…….”
“좋아! 성공이… 에, 에릴!”
작전은 성공했다.
그리고 동시에 에릴이 정신을 잃었다.
“에릴! 정신 차려! 젠장! 쇼크인가!”
다급히 뛰어가 에릴을 안았다. 창백한 얼굴, 의식 소실. 역시 출혈성 쇼크(외상으로 인한 대량 출혈)? 아니, 그렇게 피를 흘리진 않았어. 어쩌면 아까 바닥에 내동댕이쳐질 때 척추를 다쳐 신경성 쇼크(척추 손상)를 일으켰을지도 몰라. 잠깐만, 그런 식이라면 저체액성 쇼크(탈수)나 패혈성 쇼크(감염성 패혈증)도 의심해야 하잖아!
다른 건 몰라도 상처 부위를 통한 미생물 감염으로 염증이 생겨 패혈성 쇼크를 일으켰다면 지금 내가 가진 의료 도구로는 치료할 수 없다.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니 더더욱 등에 꽂힌 나무창에 눈이 갔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 놓는 건 의사로서 좋은 습관이지만, 지금은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정신 차리자. 지금 에릴을 살릴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어!
우선 맥박이 뛰고 있는지, 숨을 쉬고 있는지를 확인했다. 작고 약하지만 맥박은 뛰고 있다. 숨 역시도 약하지만 쉬고 있었다. 심폐소생술을 할 정도까진 아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어!
난 되도록 척추가 다치지 않게 에릴을 안아 그늘로 데려가며 외쳤다.
“가방을! 내 가방을 줘!”
오크들은 에릴이 쓰러지자 서로 수군거리고 있었는데, 내 외침을 듣고 화들짝 놀란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저 신기한 표정으로 나를 주시할 뿐이었다.
젠장, 전혀 말이 통하지 않아!
저 오크들을 이해시키기 위해 얼마나 걸릴까? 또 의료 도구가 든 가방을 가지러 해변까지 가야 한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그 의료 도구를 소독하고 수술을 시작하는 준비 과정까진 또 얼마나 걸릴까!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것처럼 신음하는 에릴인데, 버틸 수 있을 턱이 없지 않은가!
처참하리만치 좌절감이 몰려왔다. 그러던 그때.
언제 다가온 건지 내 앞에 선 장로가 지팡이를 에릴에게 내밀며 뭐라 중얼거렸다.
“이, 이게 뭐야?”
그러자 몹시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지팡이에서 붉은빛이 뿜어지더니, 창백했던 에릴의 안색이 급속도로 좋아지기 시작한 것이다. 보기엔 그냥 평범한 나무 지팡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붉은빛이라니!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현상에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지금 일어난 기적은 거짓이 아닌지, 붉은빛을 쐬자 어느 정도 호흡도 안정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정말 기적인가?
정말 그건 기적이 맞는지 구경하던 모든 오크가 장로를 향해 엎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신을 직접 접견한 신도들처럼.
내가 말문이 막혀 혼란스러워하자 장로는 몹시 피곤한 얼굴(어쩐지 그래 보였다)로 나에게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아차리곤 안타깝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에릴의 안색이 다시 변해갔다. 뭔가 알 수 없는 기적으로 조금 체력을 회복했지만, 원인을 해결하지 못해 다시 쇼크 증상을 보인 것이다. 장로도 눈치챈 것인지 아까 사용한 붉은빛을 다시 사용했지만, 이전처럼 안색이 눈에 띄게 돌아오거나 하진 않았다.
장로는 다시 고개를 젓곤 기어코 지팡이를 회수했다. 난 그의 행동과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그래, 그는 에릴의 치료를 포기한 것이다.
“자, 잠깐 기다려! 그렇게 쉽게 포기할 게 아니잖아! 어쩌면 그 힘으로 에릴을… 제기랄!”
과학적으로 증명되지 않는 기적에 기대려 하는 나라는 인간이 한심스러웠다. 나는 의사다. 의사가 환자를 눈앞에 두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기적이나 바라고 있다니!
그럴 거면 의사 면허 따위 불태워 버려!
물을 끓이고 있는 돌솥 단지로 달렸다. 그러고는 그곳에 내 셔츠를 벗어 던져 넣었다. 내 행동에 수많은 오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사이 나무 작대기 하나를 가져와 휘휘 젖곤 물에 삶아진 셔츠를 꺼내 또 다른 솥단지에 다시 투척했다. 이걸로 살균한 면은 확보했다. 이제 면이 삶아지는 사이 해변까지 달려가 가방을 가져와 보는 수밖에 없…….
한 시간이 걸리든 두 시간이 걸리든 해변까지 뛰어가리라 결심하던 그때, 조금 떨어진 거리에 있던 움막 지붕에서 내 눈에 익숙한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그 움막집만이 특이하게도 지붕 꼭대기에 나뭇잎을 이용해 부채처럼 만든 무언가가 장식으로 걸려 있었다. 저들은 그저 신기한 것이라며 달아놓았겠지만, 나는 저게 무슨 용도로 만든 것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야 모를 리가 있겠는가. 바로 내가 일주일이나 걸려 만든 뗏목 돛대인데!
그 움막집으로 달렸다. 뗏목 돛대가 있다는 건 저들이 내 물품들을 회수했다는 뜻일 것이다. 그렇다면 즉, 어쩌면 저기 어딘가 의료 도구가 든 가방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 추측은 맞아떨어졌다.
“있어! 있었어!”
그 움막집 안에서 가방을 찾을 수 있었다. 그밖에도 죽통 잔, 뗏목 파편과 노, 몇몇 급조해 만든 그릇도 함께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난 마치 신줏단지 모시듯 가방을 얼싸안고 움막을 나왔다. 내 뒤를 따라왔던 건지 움막 밖에는 수많은 오크가 몰려 있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들은 나를 막지 않았다.
나는 에릴에게 도착하기 무섭게 가방을 열어 의료 도구를 점검해 살균이 필요한 물품들을 전부 돌솥 안에 집어넣었다. 곳곳에 물을 끓이고 있던 돌솥이 없었더라면 그만큼 시간이 지체되었을 텐데,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오크들은 여전히 신기한 동물 보듯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가 주사기를 꺼내 마취제를 담고 에릴의 등에 국소마취를 시작하자 기겁해 물러나기 시작했다. 아니, 어쩌면 독특한 마취 향 때문에 놀란 것일지도 모른다. 저들이 국소마취에 대해 알 리가 없으니 당연한 반응일지도.
지금 에릴은 당장은 의식이 없지만 심한 고통을 느끼면 몸부림을 칠 가능성이 있기에 마취를 감행했다. 하나 이 침윤마취는 마취 시간도 짧고, 근육 깊숙한 곳이 다쳐 수술해야 할 상황이 온다면 완벽한 통증 차단도 어렵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이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소독한 의료 도구와 살균한 면을 가져왔다. 이로써 일단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준비는 갖췄다.
하지만 지금 이곳엔 수혈액도 없다. 홍역 병균이 만연히 퍼져 있을 정도로 환경도 최악이다. 보통 이 정도라면 수술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모든 의사가 말했겠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지금 내가 치료하려는 건 사람이 아니라 인어니까.
지금 나는 맹장 수술 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움직일 수 있던 인어의 재생력과 상처가 난 상태로도 바닷속에서 생활할 수 있던 면역력을 믿어보기로 했다. 무엇보다 결과를 따지기 이전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죽는 걸 가만히 지켜보는 것보단 백배 나을 테니까!
“후우, 수술 개시.”
나는 먼저 등에 박힌 나무창을 뽑았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오크가 기겁해 웅성거렸다.
가장 우려한 건 나무창을 뽑는 순간 선홍색 피가 뿜어져 나오는 거였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다. 그렇다면 흉배 동맥과 늑간 동맥은 건드리지 않았다는 것.
나는 살균한 셔츠로 흘러나온 피를 빠르게 닦고 안쪽을 살펴봤다.
광배근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아무래도 신경이 손상된 것 같다. 보통이라면 이 정도는 근육이 살이 될 뿐, 살아가는 데 큰 문제는 없지만, 수영을 해야 하는 인어에겐 치명적이다.
“여기를 잡아줘! 그래!”
호승심이 강한 것인지, 가까이 다가온 두 오크에게 각각 좌우로 상처를 벌리게끔 유도하고 빠르게 광배근 신경과 혈관을 봉합하기 시작했다. 속도는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르고 정교하다. 정신을 집중해서인지 이마에 땀이 찼다. 하지만 눈에 들어가지 않게 닦아줄 간호사는 없기에 무시하기로 했다.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거의 무아지경 속에서 수술하는, 묘한 기분이다. 지금 내 컨디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최상.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어느 순간부터는 소란스럽게 웅성거리던 오크의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아니, 정말 모든 오크가 입을 다문 것 같았다. 아까 뒤돌아 떠났던 장로도 언제 다시 다가온 것인지 손을 놀리고 있는 나를 경악한 얼굴로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그사이 신경과 혈관을 연결한 나는 빠르게 피부를 봉합해 나갔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20분. 이 모습을 선배가 보았다면 어떤 얼굴로 나를 바라볼까. 경악? 존경? 그것도 아니면 괴물 취급?
아마도 지금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오크들의 표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겠지.
“부탁이다, 살아다오.”
수술을 마친 난 잠들어 있는 에릴을 바라보며 진심을 담아 염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