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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4화)
5장 홍역(3)
“므쉬?”
“므쉬.”
“후르하. 에간하.”
“후르하, 후르하.”
열심히 곤봉을 다듬고 있던 몇몇 남성 오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억양으로 봐선 우리의 상태를 물어본 것 같았다.
난 긴장한 얼굴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여기 어딘가에 우두머리가 있을 거다. 나이가 많거나 힘이 세 보이는 그런 우두머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크들의 수가 워낙 많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성별만 간신히 구별될 뿐이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오크들은 우락부락했으니까.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우리는 어디인가로 다시 이동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잘못하면 정말 식량 창고까지 가게 될 기세다. 에릴도 초조한지 자꾸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제길, 나도 알고 있다고.
좀 더 집중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느 구석진 자리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나뭇더미? 어두운 음영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심한 악취와 심각할 정도로 파리가 날렸으니까. 그럼 썩은 음식물을 버려놓은 건가? 저렇게 위생이 좋지 않으니 홍역이 끊이질 않는 거…….
난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아니다. 저건 음식물이 아니야. 저건……!
“우웁!”
“쿠르하?”
나도 모르게 나온 헛구역질을 들은 것인지, 오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빌어먹을, 너희가 인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거 전부 취소다! 저런 짓, 저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다니! 그런 행위가 용납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찌 구역질을 참을 수 있겠는가. 산처럼 쌓여 있는 괴물들의 동족, 오크들의 시체를 보게 됐는데!
어느 여성 오크 한 마리가 아이 오크를 안고 쓰레기 더미 같은 곳으로 다가갈 때만 해도 정말이지 설마 싶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그 어린아이를 쓰레기 더미 속으로 던지는 게 아닌가. 마치 음식물 버리듯 당연하게!
그제야 난 쓰레기 더미라고만 생각했던 것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병들고 썩어 문드러진 피부에 구더기가 들끓는, 어린 오크들의 산인 것을.
“젠장! 그만 됐어! 여기로 충분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들킨 이상 죽은 척할 이유도 없어졌기에 오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돌도끼를 가로채며 급히 뛰어내렸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주위에 있던 오크들이 화들짝 놀라 핏발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쿠르하! 쿠르하!”
“무후하! 무크라!”
“쉬스쉬스 쿠라하!”
동료를 부른 건지, 순식간에 수많은 오크가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질 만큼, 정말 아찔할 정도의 수였다.
난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곤 크게 외쳤다.
“에릴! 지금이야!”
내가 외치는 순간, 에릴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을 메고 있던 오크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했다. 오크의 입술이 워낙 두터워 아랫입술에 살짝 입맞춤하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오크는 당황했는지 저도 모르게 에릴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악!”
“에, 에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 다급히 뛰어가려 했는데, 그전에 에릴이 손을 들어 내 행동을 제지했다.
“으윽… 하아, 하아. 괜찮…아요. 오크들이 흥분하니… 현호 님은… 움직이지 마세요.”
에릴은 몹시 지친 목소리로 내게 말하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을 떨어트린 오크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오크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하나 다른 오크는 에릴의 목소리를 못 들은 건지 입맞춤을 당한 오크를 제외하곤 전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릴은 오크를 이해시키기 위해 사정을 설명하는 것인지 계속 입을 뻐끔거렸고, 엉덩방아 찧은 오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다른 오크들에 뭐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저희 얘기를 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이제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통역… 으윽!”
“에, 에릴, 정말 괜찮아?”
에릴은 가슴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리가 없다. 겉보기에도 혈색이 파리해졌으니까. 빌어먹을, 시간이 촉박해. 망설이고 있을 틈이 없잖아!
“최대한 빨리 끝낼게! 통역해 줘! 모두 들어라! 지금 너희가 믿고 있는 전사의 의식은 전부 거짓이다! 신의 시험? 어린 오크들이 겪고 있는 건 그런 거창한 게 아냐!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죄 없는 어린 오크들을 언제까지 죽일 셈이냐!”
에릴이 필사적으로 내 말을 전달해 주는 건지, 오크 마을 전체가 술렁거렸다.
“하아, 하아. 그럼 그게… 신의 시험이 아니면 뭐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요.”
“병이야! 전염병이라고 말해줘!”
“전달…했어요. 하지만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에요. 어쩌죠?”
“에릴, 힘들겠지만 다시 전달해 줘. 후우, 나를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저기를 봐! 이미 저 산더미처럼 어린 오크들을 쌓아놓고도 아직 모자란 거냐? 지금 당장 우리를 먹어버리는 건 쉽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너흰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병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할 거다! 어차피 지금 죽이나 나중에 죽이나 상관없잖아! 잠깐만이라도 믿어줄 순 없겠어?”
어린 오크들의 시체 더미를 가리킨 것이 주효했는지 여성 오크들이 눈에 띄게 술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남성 오크들은 여전히 이를 세우며 당장에라도 내게 나무창을 던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트, 틀렸어요. 인간의 말은 믿지… 못하겠대요. 지금 당장 우리를… 조각내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현호 님, 아무래도 설득은 무리…….”
“아니야, 잘하고 있어. 좋아, 왔다.”
“오다…뇨?”
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슬쩍 앞을 가리켰다. 그제야 에릴도 본 건지 눈을 크게 떴다.
백색 곰 가죽을 둘러쓴 오크. 보통 오크보다 1.5배 정도 큰 덩치를 자랑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지 다른 오크에 비해 주름살도 많고, 걸음도 힘겨운지 지팡이에 의지해 다가오고 있었다.
우두머리라기보단 장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현호 님… 이럴 거라 예상하고… 있던 건가요?”
“그래, 어디나 집단생활은 비슷하거든.”
집단생활하는 동물은 언제나 중요한 일에 대해선 우두머리의 판단에 맡긴다. 그러니 조각내 삶아 먹을 거라 으르렁거려도 지금껏 우리를 포위한 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던 것이리라.
저들에게 있어서 한 끼 식사거리가 오크어로 대화를 시도한 것 자체부터가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이미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할 권한을 넘어섰건만, 내가 신의 시험은 얼토당토않은 거짓이라고 대뜸 내질렀으니 당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물론 그 예상은 적중했고.
그래도 생각보다 노린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금만 어긋나 어느 오크 한 마리가 흥분해 달려들었다면… 그것만으로 끝이었을 테니까.
일부러 의연한 척 연기하고 있지만, 지금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제부턴 말 한마디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다. 이런 기분… 고난도 수술할 때가 생각난다.
그렇게 긴장하는 사이,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장로 오크. 그러자 놀랍게도 그토록 두텁던 오크들의 벽이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그 장관에 나도 모르게 다시 침을 삼켰다.
장로 오크는 내 앞에 다가오자마자 오크들과 뭐라 얘기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에릴과 말이 통하는 오크에게 뭐라 명령했다. 그러면 그 오크는 에릴에게 전달, 에릴은 다시 나에게 전달했다.
“우리가 신의 시험이라 알고 있던 전사의 의식을… 하아, 하아… 그대는 전염병이라 했다. 그 말이 맞는지… 묻고 있어요.”
난 통역할 것 없이 장로 오크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장로 오크는 다시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것이 병이냐고… 묻고 있어요.”
에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는 장로인 것 같다. 후우, 그럼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신의 시험이란 접촉 또는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무서운 병균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홍역이라 부르는데, 이 병균에 감염되면 처음 3~5일간 발열과 함께 기침, 콧물이 나게 되고, 그 후에 당신들도 잘 아는 붉은색 반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 빨리 대처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바로 저렇게요!”
난 다시 산더미처럼 쌓인 어린 오크 시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체력이 좋거나 의지가 강한 어린 오크는 별다른 치료 없이도 운 좋으면 살 수 있겠죠. 홍역은 한 번 겪고 나면 몸에 면역력이 생겨 다신 같은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신의 시험이라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무지하게 신에게만 빌며 의지할 셈입니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통 받았으면 충분하건만, 훗날에 태어날 모든 어린 오크까지도 당신들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할 셈입니까? 대처만 잘한다면 얼마든지 무찌를 수 있는 병을요! 지금도 한시가 급합니다! 이 순간에도 어린 오크들이 고통 받고 있어요! 믿어만 주신다면 제가 고쳐 드리겠습니다! 저, 의사 강현호가!”
에릴은 내 말을 통역하다 억눌렀던 마음이 터진 것인지 눈물을 흘렸다. 주위의 몇몇 오크들도 에릴의 열변에 감정이 동했는지 사납던 눈초리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장로 오크는 통역을 듣는 내내 눈을 감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말이 전부 끝나고, 모든 오크가 장로를 돌아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조상 대대로 선조의… 가르침이 있었다. 인간은 거짓만을 입에 달고 사니 결코 믿지… 말아야 할 종족이라고. 혹시나 하고 얘길 들어봤지만… 여, 역시 선조의 말씀이 하나 틀린 것 없구나! 그, 그게 무슨! 혀, 현호 님, 으윽, 하아, 하아… 저들은 지금 당장 그 병균이란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모, 목을 잘라 버린… 꺅!”
한 오크가 우악스럽게 에릴의 머리칼을 잡아 올렸다. 다른 오크들도 늘어트려 놓았던 무기들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삭막해졌다. 그렇게나 열심히 설명했건만,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반응이리라. 저들에게 있어서 홍역이니, 전염병이니, 병균이니 하는 단어들 전부가 생소할 테니까. 어느 누가 믿어주겠는가.
역시 전부 내가 생각했던 대로다.
“증거라면 있어!”
나를 억압하려는 오크들을 뿌리치고 달렸다. 내가 도망가는 줄 알고 수많은 오크가 뒤쫓아왔는데, 난데없이 어린 오크들의 시체 더미 앞에 서자 당황해하며 쫓는 걸 멈췄다.
“다가오지 마! 하아, 하아… 에릴, 마지막이야! 힘들겠지만 이것만 통역해 줘! 너희도 잘 아는, 신의 시험으로 인해 죽은 어린 오크들의 시체가 여기 있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가 신의 시험이 사실 병균에 의한 병이란 증거를 보여주겠다!”
난 시체 중에 아까 한 여성 오크가 버린 아이를 감싸 안으며 외쳤다. 몸은 차갑게 식었지만, 역시 상태는 가장 괜찮아 보인다.
후우, 미안하다, 아이야!
돌도끼로 무참히 죽은 아이의 배를 갈랐다.
5장 홍역(3)
“므쉬?”
“므쉬.”
“후르하. 에간하.”
“후르하, 후르하.”
열심히 곤봉을 다듬고 있던 몇몇 남성 오크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대화는 알아들을 수 없지만, 억양으로 봐선 우리의 상태를 물어본 것 같았다.
난 긴장한 얼굴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여기 어딘가에 우두머리가 있을 거다. 나이가 많거나 힘이 세 보이는 그런 우두머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크들의 수가 워낙 많아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성별만 간신히 구별될 뿐이지, 다 거기서 거기인 것처럼 오크들은 우락부락했으니까.
결국 별다른 소득 없이 우리는 어디인가로 다시 이동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잘못하면 정말 식량 창고까지 가게 될 기세다. 에릴도 초조한지 자꾸 나를 돌아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제길, 나도 알고 있다고.
좀 더 집중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느 구석진 자리 한쪽에 산처럼 쌓여 있는 무언가를 보았다. 나뭇더미? 어두운 음영에 가려져 잘 보이진 않지만, 그건 아닌 것 같다. 심한 악취와 심각할 정도로 파리가 날렸으니까. 그럼 썩은 음식물을 버려놓은 건가? 저렇게 위생이 좋지 않으니 홍역이 끊이질 않는 거…….
난 거기까지 생각하다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다. 아니다. 저건 음식물이 아니야. 저건……!
“우웁!”
“쿠르하?”
나도 모르게 나온 헛구역질을 들은 것인지, 오크가 의아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빌어먹을, 너희가 인간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거 전부 취소다! 저런 짓, 저런 짓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행하다니! 그런 행위가 용납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찌 구역질을 참을 수 있겠는가. 산처럼 쌓여 있는 괴물들의 동족, 오크들의 시체를 보게 됐는데!
어느 여성 오크 한 마리가 아이 오크를 안고 쓰레기 더미 같은 곳으로 다가갈 때만 해도 정말이지 설마 싶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 잡는다고 했던가. 그 어린아이를 쓰레기 더미 속으로 던지는 게 아닌가. 마치 음식물 버리듯 당연하게!
그제야 난 쓰레기 더미라고만 생각했던 것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병들고 썩어 문드러진 피부에 구더기가 들끓는, 어린 오크들의 산인 것을.
“젠장! 그만 됐어! 여기로 충분해!”
내가 살아 있다는 걸 들킨 이상 죽은 척할 이유도 없어졌기에 오크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돌도끼를 가로채며 급히 뛰어내렸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주위에 있던 오크들이 화들짝 놀라 핏발을 세우며 으르렁거렸다.
“쿠르하! 쿠르하!”
“무후하! 무크라!”
“쉬스쉬스 쿠라하!”
동료를 부른 건지, 순식간에 수많은 오크가 나를 포위하기 시작했다. 일순간에 빠져나갈 구멍이 사라질 만큼, 정말 아찔할 정도의 수였다.
난 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곤 크게 외쳤다.
“에릴! 지금이야!”
내가 외치는 순간, 에릴은 온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키더니 자신을 메고 있던 오크에게 기습적으로 키스했다. 오크의 입술이 워낙 두터워 아랫입술에 살짝 입맞춤하는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오크는 당황했는지 저도 모르게 에릴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아악!”
“에, 에릴!”
떨어지는 소리가 크게 들려 다급히 뛰어가려 했는데, 그전에 에릴이 손을 들어 내 행동을 제지했다.
“으윽… 하아, 하아. 괜찮…아요. 오크들이 흥분하니… 현호 님은… 움직이지 마세요.”
에릴은 몹시 지친 목소리로 내게 말하더니, 이내 시선을 돌려 자신을 떨어트린 오크를 향해 입을 뻐끔거렸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오크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엉덩방아를 찧을 정도로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하나 다른 오크는 에릴의 목소리를 못 들은 건지 입맞춤을 당한 오크를 제외하곤 전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릴은 오크를 이해시키기 위해 사정을 설명하는 것인지 계속 입을 뻐끔거렸고, 엉덩방아 찧은 오크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다른 오크들에 뭐라 설명하기 시작했다.
“하아, 하아. 저희 얘기를 들어달라고… 부탁했어요. 이제 말씀하셔도… 돼요. 제가 통역… 으윽!”
“에, 에릴, 정말 괜찮아?”
에릴은 가슴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을 리가 없다. 겉보기에도 혈색이 파리해졌으니까. 빌어먹을, 시간이 촉박해. 망설이고 있을 틈이 없잖아!
“최대한 빨리 끝낼게! 통역해 줘! 모두 들어라! 지금 너희가 믿고 있는 전사의 의식은 전부 거짓이다! 신의 시험? 어린 오크들이 겪고 있는 건 그런 거창한 게 아냐! 그런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죄 없는 어린 오크들을 언제까지 죽일 셈이냐!”
에릴이 필사적으로 내 말을 전달해 주는 건지, 오크 마을 전체가 술렁거렸다.
“하아, 하아. 그럼 그게… 신의 시험이 아니면 뭐냐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어요.”
“병이야! 전염병이라고 말해줘!”
“전달…했어요. 하지만 전혀 믿는 눈치가 아니에요. 어쩌죠?”
“에릴, 힘들겠지만 다시 전달해 줘. 후우, 나를 믿든 믿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저기를 봐! 이미 저 산더미처럼 어린 오크들을 쌓아놓고도 아직 모자란 거냐? 지금 당장 우리를 먹어버리는 건 쉽겠지. 하지만 그랬다간 너흰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병에 시달리며 살아가야 할 거다! 어차피 지금 죽이나 나중에 죽이나 상관없잖아! 잠깐만이라도 믿어줄 순 없겠어?”
어린 오크들의 시체 더미를 가리킨 것이 주효했는지 여성 오크들이 눈에 띄게 술렁거리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남성 오크들은 여전히 이를 세우며 당장에라도 내게 나무창을 던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트, 틀렸어요. 인간의 말은 믿지… 못하겠대요. 지금 당장 우리를… 조각내 먹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현호 님, 아무래도 설득은 무리…….”
“아니야, 잘하고 있어. 좋아, 왔다.”
“오다…뇨?”
난 잔뜩 긴장한 얼굴로 슬쩍 앞을 가리켰다. 그제야 에릴도 본 건지 눈을 크게 떴다.
백색 곰 가죽을 둘러쓴 오크. 보통 오크보다 1.5배 정도 큰 덩치를 자랑하고 있는데, 생각보다 나이가 많은지 다른 오크에 비해 주름살도 많고, 걸음도 힘겨운지 지팡이에 의지해 다가오고 있었다.
우두머리라기보단 장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었다.
“현호 님… 이럴 거라 예상하고… 있던 건가요?”
“그래, 어디나 집단생활은 비슷하거든.”
집단생활하는 동물은 언제나 중요한 일에 대해선 우두머리의 판단에 맡긴다. 그러니 조각내 삶아 먹을 거라 으르렁거려도 지금껏 우리를 포위한 채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던 것이리라.
저들에게 있어서 한 끼 식사거리가 오크어로 대화를 시도한 것 자체부터가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이미 자신들이 알아서 처리할 권한을 넘어섰건만, 내가 신의 시험은 얼토당토않은 거짓이라고 대뜸 내질렀으니 당연히 이렇게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판단했다.
물론 그 예상은 적중했고.
그래도 생각보다 노린 것이 잘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었다. 조금만 어긋나 어느 오크 한 마리가 흥분해 달려들었다면… 그것만으로 끝이었을 테니까.
일부러 의연한 척 연기하고 있지만, 지금 내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이제부턴 말 한마디 잘못하면 돌이킬 수 없다. 이런 기분… 고난도 수술할 때가 생각난다.
그렇게 긴장하는 사이,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장로 오크. 그러자 놀랍게도 그토록 두텁던 오크들의 벽이 모세의 기적처럼 좌우로 갈라졌다. 그 장관에 나도 모르게 다시 침을 삼켰다.
장로 오크는 내 앞에 다가오자마자 오크들과 뭐라 얘기 나누는가 싶더니, 이내 에릴과 말이 통하는 오크에게 뭐라 명령했다. 그러면 그 오크는 에릴에게 전달, 에릴은 다시 나에게 전달했다.
“우리가 신의 시험이라 알고 있던 전사의 의식을… 하아, 하아… 그대는 전염병이라 했다. 그 말이 맞는지… 묻고 있어요.”
난 통역할 것 없이 장로 오크를 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장로 오크는 다시 뭐라 말하기 시작했다.
“어째서 그것이 병이냐고… 묻고 있어요.”
에릴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가 통하는 장로인 것 같다. 후우, 그럼 지금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난 잠시 마음을 가다듬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신의 시험이란 접촉 또는 호흡기를 통해 전염되는 무서운 병균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홍역이라 부르는데, 이 병균에 감염되면 처음 3~5일간 발열과 함께 기침, 콧물이 나게 되고, 그 후에 당신들도 잘 아는 붉은색 반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때 빨리 대처하지 못하면 죽습니다. 바로 저렇게요!”
난 다시 산더미처럼 쌓인 어린 오크 시체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체력이 좋거나 의지가 강한 어린 오크는 별다른 치료 없이도 운 좋으면 살 수 있겠죠. 홍역은 한 번 겪고 나면 몸에 면역력이 생겨 다신 같은 병에 걸리지 않기 때문에 충분히 신의 시험이라 오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제까지 무지하게 신에게만 빌며 의지할 셈입니까! 과거부터 지금까지 고통 받았으면 충분하건만, 훗날에 태어날 모든 어린 오크까지도 당신들과 같은 고통을 겪게 할 셈입니까? 대처만 잘한다면 얼마든지 무찌를 수 있는 병을요! 지금도 한시가 급합니다! 이 순간에도 어린 오크들이 고통 받고 있어요! 믿어만 주신다면 제가 고쳐 드리겠습니다! 저, 의사 강현호가!”
에릴은 내 말을 통역하다 억눌렀던 마음이 터진 것인지 눈물을 흘렸다. 주위의 몇몇 오크들도 에릴의 열변에 감정이 동했는지 사납던 눈초리가 조금 누그러진 것을 볼 수 있었다.
장로 오크는 통역을 듣는 내내 눈을 감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내 말이 전부 끝나고, 모든 오크가 장로를 돌아보고 나서야 그는 비로소 입을 열었다.
“조상 대대로 선조의… 가르침이 있었다. 인간은 거짓만을 입에 달고 사니 결코 믿지… 말아야 할 종족이라고. 혹시나 하고 얘길 들어봤지만… 여, 역시 선조의 말씀이 하나 틀린 것 없구나! 그, 그게 무슨! 혀, 현호 님, 으윽, 하아, 하아… 저들은 지금 당장 그 병균이란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모, 목을 잘라 버린… 꺅!”
한 오크가 우악스럽게 에릴의 머리칼을 잡아 올렸다. 다른 오크들도 늘어트려 놓았던 무기들을 들어 올렸다. 갑자기 분위기가 삭막해졌다. 그렇게나 열심히 설명했건만, 전혀 통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이게 당연한 반응이리라. 저들에게 있어서 홍역이니, 전염병이니, 병균이니 하는 단어들 전부가 생소할 테니까. 어느 누가 믿어주겠는가.
역시 전부 내가 생각했던 대로다.
“증거라면 있어!”
나를 억압하려는 오크들을 뿌리치고 달렸다. 내가 도망가는 줄 알고 수많은 오크가 뒤쫓아왔는데, 난데없이 어린 오크들의 시체 더미 앞에 서자 당황해하며 쫓는 걸 멈췄다.
“다가오지 마! 하아, 하아… 에릴, 마지막이야! 힘들겠지만 이것만 통역해 줘! 너희도 잘 아는, 신의 시험으로 인해 죽은 어린 오크들의 시체가 여기 있다! 지금부터 나는 너희가 신의 시험이 사실 병균에 의한 병이란 증거를 보여주겠다!”
난 시체 중에 아까 한 여성 오크가 버린 아이를 감싸 안으며 외쳤다. 몸은 차갑게 식었지만, 역시 상태는 가장 괜찮아 보인다.
후우, 미안하다, 아이야!
돌도끼로 무참히 죽은 아이의 배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