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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3화)
5장 홍역(2)
“운명을 붙잡아 또 하나의 기회를 열었으니, 자신의 신념을 믿고 길을 개척하라.”
그 말뜻… 결국, 그런 의미였나.
경악할 만한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혹시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제 그런 희망은 버려야겠지만.
“현호… 님?”
“아니야, 계속해 줘.”
혼란스러운 마음을 접고 다시 에릴의 말을 경청했다. 에릴은 내 표정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성실히 계속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유아기에서 성인이 되는 기간이… 5년에 불과해요. 하아, 하아……. 게다가 엄청난 번식력을… 가지고 있죠. 만약 전사의 의식이 없었다면… 기름진 평지를 지배한 건… 인간이 아니라 그들이었을 거예요.”
“전사의 의식? 그게 뭐지?”
내 물음에 에릴은 한동안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풀이하자면…….
전사의 의식이란 유아기에서 성인이 되는 5년 이내로 꼭 찾아오게 되는 신의 시험이라고 했다. 이 시험에 들어서면 온몸에 반점이 생기며 일주일 정도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데, 그동안 신에게 선택 받지 못하면 그 오크는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험을 넘어서면 진정한 전사가 된다고 하여 전사의 의식이라 부른다고 했다.
“만약 신의 시험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 오크는… 현호… 님?”
내가 눈을 감은 채 깊게 고심하자 의아했는지 에릴이 나를 불렀다.
온몸의 반점. 일주일 동안의 신의 시험. 시험을 통과하면 진정한 전사. 잠깐, 이건…….
“혹시 말이야, 그 반점이라는 게 붉은색을 띠지 않아?”
“…네? 그걸 어찌…….”
“그럼 혹시 전사의 시험을 통과한 뒤에도 붉은 반점이 오랫동안 딱지가 되어 남아 있거나 해?”
“아뇨……. 하아, 하아. 시험에 통과한 이후, 그 반점은… 깨끗하게 사라진다고… 들었어요.”
그럼 수두나 천연두는 확실히 아니다.
“에릴, 이제 안정을 취해. 내 물음에 꼭 대답할 필요 없어. 이제 말하지 말고 내 말이 맞는지 고개만 끄덕여 줘. 그 전사의 의식을 한 번 치른 오크는 두 번 다시 같은 시험이 찾아오지 않을 거야. 맞지? 그리고 아까 붉은 반점이 생긴다고만 했는데, 그와 동시에 발열이 생기며 눈이 충혈되고 눈물 또는 콧물을 흘린다든가 재채기와 기침, 가래가 나오는 증상도 있을 거야. 맞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인 에릴은 매우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전부…….”
답은 나왔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병은 단 하나, 홍역이다.
아까 에릴이 알려준 설명에 의하면, 그 신의 시험이란 오크에게만 해당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의문점은 ‘사람도 걸릴 수 있는 병이건만 어째서 오크들에게만 발병하는가’이다. 어쩌면 이곳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홍역 바이러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증상은 홍역과 매우 흡사해. 그렇다면 그들에게만 발현하는 변종 바이러스인가?
어쨌거나 전사의 시험이라 칭할 정도로 오크 사회에선 홍역이 감기처럼 만연해 있는 병이다. 겉보기에도 사람보다 튼튼한 몸을 하고 있던 것을 보면 홍역을 달고 살아도 번식이 가능할 정도로 꽤 터프한 집단이라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홍역을 감기 취급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홍역은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 중 하나이다. 잠복기는 10~21일이며 감기와 비슷한 증상으로 시작되는데, 그렇다고 감기 취급하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이 병은 전구기, 발진기, 회복기, 총 세 가지 단계로 나뉜다. 전구기는 발병한 지 3~4일간을 말하는데, 발열과 신체 곳곳에 염증을 일으키며 결막염 증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 뒤, 발진기에서 비로소 붉은 반점이 생겨나 귀 뒤, 목, 얼굴로부터 시작해 마침내 온몸에 퍼지게 된다. 바로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망하게 되는 원인은 엄밀히 말해 홍역 때문이 아니다. 홍역으로 인한 폐렴이나 뇌염 등 다른 합병증 때문에 사망하게 되는 것이지, 홍역 자체는 발진기가 끝나면 서서히 회복기에 들어서 일주일 뒤면 평상시 열로 돌아가게 되고 발진도 차차 퇴색하며 사라진다. 이 단계까지 합병증만 없다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이 병을 전사의 의식이라 부르는 거겠지.
어찌 됐든 답은 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이걸 어찌 이용하느냐인데…….
내가 아는 이 병의 정체를 오크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무리다. 뚜렷한 치료 방법이 있다면 우리 목숨과 교환 조건으로 교섭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홍역 바이러스는 특별한 항바이러스제가 없다. 그저 대증요법만이 있을 뿐. 그런 상황에서 그건 신의 시험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파한들 씨나 먹히겠는가.
“젠장, 한시가 급한데.”
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해시키기엔 시간이 너무도 오래 걸린다. 지금 당장 에릴을 치료해야 하는 나로선 너무도 시간이 부족하다. 제길, 뭔가 바로 원인을 알려줘 경각심을 심어주는 방법이 없을…….
“잠깐. 그래! 어쩌면, 그거라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갑자기 소리 지르자 에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본다. 난 그런 에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에릴, 어쩌면 우리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게… 정말이에요?”
그녀는 이미 포기하고 있던 걸까?
몹시 놀라는 에릴을 향해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해. 바로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한테 했던 입맞춤으로 오크와도 대화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네? 그건… 네, 가능은 해요. 하지만…….”
“하지만?”
내가 의아해하며 되묻자 에릴은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아뇨……. 알겠어요. 해볼…게요.”
“잠깐, 뭔가 문제가 있는 거 같은…….”
“아니에요……. 문제없어요.”
에릴은 그것에 대해 더는 묻지 말라는 것처럼 한사코 고개를 젓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뭔가 예감이 이상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넘어가기로 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작전을 설명할게. 그러니까 나는…….”
그로부터 내가 생각한 작전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에릴의 표정이 변화무쌍해졌다. 그럴 수밖에. 내가 생각했지만 나도 미친 짓이라고 여겨질 정도니까. 하지만 해야 한다. 아니, 해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작전을 실행하게 되었다.
“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최대한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목이 쉬어버려도 좋을 만큼 필사적으로. 그렇게 한 5분쯤 지르고 나서 숨죽인 채 상황을 살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빙고. 그들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이족 보행 괴물, 오크라는 몬스터일 거다.
“왔다. 그럼 시작한다.”
“저, 정말… 하실 셈…이에요?”
에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이미 기척이 지척까지 느껴졌기에 뭐라 말하지 못하고 죽은 척 연기에 들어갔다.
“쿠르하, 쿠르하.”
“비쿠흐하?”
수풀을 헤치며 등장한 오크들. 지금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어 직접 눈으로 보진 못하지만, 발걸음 소리와 대화 소리를 들으니 두 명인 것 같았다.
오크들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사이 나는 남몰래 혀끝을 깨물어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연출을 해 보였다.
“에칸다!”
“쿠쉬, 쿠쉬!”
녀석들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본 건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다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제 내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겠지.
저들이 동공에 빛을 비쳐 수축하는지를 살펴 뇌사에 이른 것인지 어떤지, 맥박을 짚어 맥이 뛰는지 안 뛰는지를 살펴볼 정도로 지능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저 숨을 쉬는지 아닌지, 또는 심장이 뛰는지 아닌지 정도만 알아보겠지. 지금 당장 심장은 묶여 있는 새끼줄 때문에 살펴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난 눈에 띄지 않게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후, 숨을 참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차분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한 30쯤 셌을까, 나를 살펴보는 기척이 느꼈다.
강현호, 참아라! 긴장하지 마! 마음을 가라앉혀!
심장이 빨리 뛰면 폐 속에 남아 있는 공기를 빨리 소모한다. 지금까지 호흡 정지 잠수에서 내 최고 기록은 2분 15초. 하나 이 상태라면 1분도 버티기 힘들기에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점점 숨이 가빠온다. 생각이 많아 산소가 뇌로 소비된 걸까? 고작 숫자를 센 지 50밖에 안 됐는데도 미친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몸이 들썩거리려는 걸 억누르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정도로.
크윽! 이제 충분하잖아? 그만 살펴보라고!
“므쉬.”
“므쉬?”
“므쉬.”
“후르하. 에간하.”
“후르하, 후르하.”
더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 나를 동여매고 있던 줄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돼, 됐어! 성공이야!
줄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나를 잡아챈 오크는 번쩍 들어 올리더니 어깨에 들쳐 멨다. 비로소 완전히 속였다고 생각한 나는 슬쩍 곁눈질로 옆을 돌아보았다.
나처럼 에릴 역시 또 한 마리의 오크가 어깨에 들쳐 메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때, 에릴은 등에서 상당한 고통을 느낀 것인지 인상을 찌푸렸는데, 다행히도 오크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비로소 저들은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해 식품 저장고로 이동시키는 것이리라. 여기까지는 작전대로다. 아, 물론 식품 저장고에 처박혀 썩은 시체들과 인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작전은 오크들이 머무는 마을로 들어가는 것. 진짜 작전은 그 뒤부터 시작이다.
그렇게 짐짝처럼 어깨에 매달린 지 얼마나 흘렀을까. 내 귀에도 확연히 들려오는 수많은 오크의 목소리. 도착했다는 것을 직감해 슬쩍 곁눈질로 옆을 보니 에릴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린 서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도착한 오크들의 마을. 내가 가장 처음 보게 된 것은 나무와 각종 마른풀을 엮어 만든 움막집이었다. 보기엔 평범한 움막집이지만 곳곳을 짐승 뼈로 장식해 어딘지 모르게 우악스럽고 강인해 보이는 느낌이 묻어나 저들에게 퍽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마을로 들어서니 비로소 수많은 오크를 볼 수 있었다.
하, 이게 몇이야? 정말 엄청난 수다.
난 죽은 척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지만, 대충 세어봐도 족히 100명은 넘어 보인다. 입구에서 봤을 때 마을도 상당히 커 보였는데, 여기 없는 오크와 집 안에 있는 오크들까지 헤아린다면… 상상도 못할 수였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작은 무리나 집단 단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부족… 아니, 민족 단위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근육질이 다분한 남성 오크들은 옹기종기 모여 나무창을 다듬거나 저들끼리 떠들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이라 추정되는 오크들은 불을 때거나 돌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정말 사람과 모습만 다르지 생활은 별반 차이 날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많은 오크 한가운데서 도박을 걸어야 한다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마음 약해질 수 없었다. 이제 퇴로는 없으니까.
5장 홍역(2)
“운명을 붙잡아 또 하나의 기회를 열었으니, 자신의 신념을 믿고 길을 개척하라.”
그 말뜻… 결국, 그런 의미였나.
경악할 만한 사실에 헛웃음이 나왔다. 혹시나 다시 병원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지 않았더라면 거짓말일 것이다. 이제 그런 희망은 버려야겠지만.
“현호… 님?”
“아니야, 계속해 줘.”
혼란스러운 마음을 접고 다시 에릴의 말을 경청했다. 에릴은 내 표정을 보고 의아해했지만, 성실히 계속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유아기에서 성인이 되는 기간이… 5년에 불과해요. 하아, 하아……. 게다가 엄청난 번식력을… 가지고 있죠. 만약 전사의 의식이 없었다면… 기름진 평지를 지배한 건… 인간이 아니라 그들이었을 거예요.”
“전사의 의식? 그게 뭐지?”
내 물음에 에릴은 한동안 숨을 고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그 말을 풀이하자면…….
전사의 의식이란 유아기에서 성인이 되는 5년 이내로 꼭 찾아오게 되는 신의 시험이라고 했다. 이 시험에 들어서면 온몸에 반점이 생기며 일주일 정도 일어나지 못하게 되는데, 그동안 신에게 선택 받지 못하면 그 오크는 성인이 되지 못하고 죽게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험을 넘어서면 진정한 전사가 된다고 하여 전사의 의식이라 부른다고 했다.
“만약 신의 시험이 없었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을 거예요……. 그러니 오크는… 현호… 님?”
내가 눈을 감은 채 깊게 고심하자 의아했는지 에릴이 나를 불렀다.
온몸의 반점. 일주일 동안의 신의 시험. 시험을 통과하면 진정한 전사. 잠깐, 이건…….
“혹시 말이야, 그 반점이라는 게 붉은색을 띠지 않아?”
“…네? 그걸 어찌…….”
“그럼 혹시 전사의 시험을 통과한 뒤에도 붉은 반점이 오랫동안 딱지가 되어 남아 있거나 해?”
“아뇨……. 하아, 하아. 시험에 통과한 이후, 그 반점은… 깨끗하게 사라진다고… 들었어요.”
그럼 수두나 천연두는 확실히 아니다.
“에릴, 이제 안정을 취해. 내 물음에 꼭 대답할 필요 없어. 이제 말하지 말고 내 말이 맞는지 고개만 끄덕여 줘. 그 전사의 의식을 한 번 치른 오크는 두 번 다시 같은 시험이 찾아오지 않을 거야. 맞지? 그리고 아까 붉은 반점이 생긴다고만 했는데, 그와 동시에 발열이 생기며 눈이 충혈되고 눈물 또는 콧물을 흘린다든가 재채기와 기침, 가래가 나오는 증상도 있을 거야. 맞지?”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인 에릴은 매우 놀란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걸 어떻게 전부…….”
답은 나왔다. 내가 예상할 수 있는 병은 단 하나, 홍역이다.
아까 에릴이 알려준 설명에 의하면, 그 신의 시험이란 오크에게만 해당하는 것 같았다. 그럼 의문점은 ‘사람도 걸릴 수 있는 병이건만 어째서 오크들에게만 발병하는가’이다. 어쩌면 이곳은 다른 세계이기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기본적인 홍역 바이러스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증상은 홍역과 매우 흡사해. 그렇다면 그들에게만 발현하는 변종 바이러스인가?
어쨌거나 전사의 시험이라 칭할 정도로 오크 사회에선 홍역이 감기처럼 만연해 있는 병이다. 겉보기에도 사람보다 튼튼한 몸을 하고 있던 것을 보면 홍역을 달고 살아도 번식이 가능할 정도로 꽤 터프한 집단이라는 건데…….
거기까지 생각하다 기가 막혀 헛웃음이 나왔다. 홍역을 감기 취급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홍역은 바이러스에 의한 전염병 중 하나이다. 잠복기는 10~21일이며 감기와 비슷한 증상으로 시작되는데, 그렇다고 감기 취급하다간 큰코다치는 수가 있다.
이 병은 전구기, 발진기, 회복기, 총 세 가지 단계로 나뉜다. 전구기는 발병한 지 3~4일간을 말하는데, 발열과 신체 곳곳에 염증을 일으키며 결막염 증상이 일어나게 된다.
그 뒤, 발진기에서 비로소 붉은 반점이 생겨나 귀 뒤, 목, 얼굴로부터 시작해 마침내 온몸에 퍼지게 된다. 바로 이때가 가장 위험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이 사망하게 되는 원인은 엄밀히 말해 홍역 때문이 아니다. 홍역으로 인한 폐렴이나 뇌염 등 다른 합병증 때문에 사망하게 되는 것이지, 홍역 자체는 발진기가 끝나면 서서히 회복기에 들어서 일주일 뒤면 평상시 열로 돌아가게 되고 발진도 차차 퇴색하며 사라진다. 이 단계까지 합병증만 없다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저들은 이 병을 전사의 의식이라 부르는 거겠지.
어찌 됐든 답은 나왔다. 그렇다면 이제 이걸 어찌 이용하느냐인데…….
내가 아는 이 병의 정체를 오크들에게 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무리다. 뚜렷한 치료 방법이 있다면 우리 목숨과 교환 조건으로 교섭할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홍역 바이러스는 특별한 항바이러스제가 없다. 그저 대증요법만이 있을 뿐. 그런 상황에서 그건 신의 시험이 아니라고 아무리 설파한들 씨나 먹히겠는가.
“젠장, 한시가 급한데.”
병의 원인을 분석하고 이해시키기엔 시간이 너무도 오래 걸린다. 지금 당장 에릴을 치료해야 하는 나로선 너무도 시간이 부족하다. 제길, 뭔가 바로 원인을 알려줘 경각심을 심어주는 방법이 없을…….
“잠깐. 그래! 어쩌면, 그거라면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몰라!”
내가 갑자기 소리 지르자 에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본다. 난 그런 에릴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에릴, 어쩌면 우리 살 수 있을지도 몰라.”
“그게… 정말이에요?”
그녀는 이미 포기하고 있던 걸까?
몹시 놀라는 에릴을 향해 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하지만 그러기 위해선 한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해. 바로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말인데, 혹시 나한테 했던 입맞춤으로 오크와도 대화할 수 있게 해줄 수 있어?”
“네? 그건… 네, 가능은 해요. 하지만…….”
“하지만?”
내가 의아해하며 되묻자 에릴은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다.
뭔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건가?
“아뇨……. 알겠어요. 해볼…게요.”
“잠깐, 뭔가 문제가 있는 거 같은…….”
“아니에요……. 문제없어요.”
에릴은 그것에 대해 더는 묻지 말라는 것처럼 한사코 고개를 젓더니 입을 다물어 버렸다. 뭔가 예감이 이상했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넘어가기로 했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작전을 설명할게. 그러니까 나는…….”
그로부터 내가 생각한 작전을 찬찬히 설명해 주었다. 내 설명이 이어질수록 에릴의 표정이 변화무쌍해졌다. 그럴 수밖에. 내가 생각했지만 나도 미친 짓이라고 여겨질 정도니까. 하지만 해야 한다. 아니, 해내야 한다.
그렇게 우리는 살아남기 위한 최후의 작전을 실행하게 되었다.
“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악! 아아아아아아악!”
최대한 목청껏 비명을 질렀다. 목이 쉬어버려도 좋을 만큼 필사적으로. 그렇게 한 5분쯤 지르고 나서 숨죽인 채 상황을 살폈다.
한 10분쯤 지났을까, 수풀을 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빙고. 그들은 분명 내가 알고 있는 이족 보행 괴물, 오크라는 몬스터일 거다.
“왔다. 그럼 시작한다.”
“저, 정말… 하실 셈…이에요?”
에릴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본다. 하지만 이미 기척이 지척까지 느껴졌기에 뭐라 말하지 못하고 죽은 척 연기에 들어갔다.
“쿠르하, 쿠르하.”
“비쿠흐하?”
수풀을 헤치며 등장한 오크들. 지금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어 직접 눈으로 보진 못하지만, 발걸음 소리와 대화 소리를 들으니 두 명인 것 같았다.
오크들이 점점 가까워져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사이 나는 남몰래 혀끝을 깨물어 입에서 피가 흘러나오는 연출을 해 보였다.
“에칸다!”
“쿠쉬, 쿠쉬!”
녀석들은 입에서 흘러나오는 피를 본 건지 조금 당황한 기색으로 다시 대화를 주고받았다. 이제 내 상태가 조금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겠지.
저들이 동공에 빛을 비쳐 수축하는지를 살펴 뇌사에 이른 것인지 어떤지, 맥박을 짚어 맥이 뛰는지 안 뛰는지를 살펴볼 정도로 지능이 있다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그저 숨을 쉬는지 아닌지, 또는 심장이 뛰는지 아닌지 정도만 알아보겠지. 지금 당장 심장은 묶여 있는 새끼줄 때문에 살펴볼 수 없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단 하나.
난 눈에 띄지 않게 공기를 깊게 들이마신 후, 숨을 참았다. 그러고는 속으로 차분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한 30쯤 셌을까, 나를 살펴보는 기척이 느꼈다.
강현호, 참아라! 긴장하지 마! 마음을 가라앉혀!
심장이 빨리 뛰면 폐 속에 남아 있는 공기를 빨리 소모한다. 지금까지 호흡 정지 잠수에서 내 최고 기록은 2분 15초. 하나 이 상태라면 1분도 버티기 힘들기에 최대한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점점 숨이 가빠온다. 생각이 많아 산소가 뇌로 소비된 걸까? 고작 숫자를 센 지 50밖에 안 됐는데도 미친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몸이 들썩거리려는 걸 억누르는 데 온 힘을 쏟아야 할 정도로.
크윽! 이제 충분하잖아? 그만 살펴보라고!
“므쉬.”
“므쉬?”
“므쉬.”
“후르하. 에간하.”
“후르하, 후르하.”
더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 포기해야 하나 싶은 순간, 나를 동여매고 있던 줄이 느슨해지는 걸 느꼈다.
돼, 됐어! 성공이야!
줄이 풀려 앞으로 고꾸라지려는 나를 잡아챈 오크는 번쩍 들어 올리더니 어깨에 들쳐 멨다. 비로소 완전히 속였다고 생각한 나는 슬쩍 곁눈질로 옆을 돌아보았다.
나처럼 에릴 역시 또 한 마리의 오크가 어깨에 들쳐 메는 걸 볼 수 있었다. 그때, 에릴은 등에서 상당한 고통을 느낀 것인지 인상을 찌푸렸는데, 다행히도 오크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비로소 저들은 우리가 죽었다고 생각해 식품 저장고로 이동시키는 것이리라. 여기까지는 작전대로다. 아, 물론 식품 저장고에 처박혀 썩은 시체들과 인사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내 작전은 오크들이 머무는 마을로 들어가는 것. 진짜 작전은 그 뒤부터 시작이다.
그렇게 짐짝처럼 어깨에 매달린 지 얼마나 흘렀을까. 내 귀에도 확연히 들려오는 수많은 오크의 목소리. 도착했다는 것을 직감해 슬쩍 곁눈질로 옆을 보니 에릴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우린 서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드디어 도착한 오크들의 마을. 내가 가장 처음 보게 된 것은 나무와 각종 마른풀을 엮어 만든 움막집이었다. 보기엔 평범한 움막집이지만 곳곳을 짐승 뼈로 장식해 어딘지 모르게 우악스럽고 강인해 보이는 느낌이 묻어나 저들에게 퍽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후, 마을로 들어서니 비로소 수많은 오크를 볼 수 있었다.
하, 이게 몇이야? 정말 엄청난 수다.
난 죽은 척하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오크들을 바라보았다. 한눈에 다 들어오지도 않지만, 대충 세어봐도 족히 100명은 넘어 보인다. 입구에서 봤을 때 마을도 상당히 커 보였는데, 여기 없는 오크와 집 안에 있는 오크들까지 헤아린다면… 상상도 못할 수였다.
이건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작은 무리나 집단 단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이미 부족… 아니, 민족 단위라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찬찬히 살펴보니 근육질이 다분한 남성 오크들은 옹기종기 모여 나무창을 다듬거나 저들끼리 떠들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여성이라 추정되는 오크들은 불을 때거나 돌솥에 물을 끓이고 있었는데, 그런 모습을 보니 정말 사람과 모습만 다르지 생활은 별반 차이 날 게 없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어쨌거나 이렇게 많은 오크 한가운데서 도박을 걸어야 한다니…….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마음 약해질 수 없었다. 이제 퇴로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