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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2화)
5장 홍역(1)
매캐한 연기와 기름 냄새, 그리고 수많은 신음. 다중 추돌 사고로 인해 고속도로에 펼쳐진 참상은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참혹했다.
어린아이는 울고 또 울었다. 유리를 박살 낸 채 운전석 밖으로 튀어 나가 널브러져 있는 아빠와 자동차에 하반신이 깔려 빠져나오지 못하는 엄마 곁에서.
엄마는 서글픈 얼굴로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았다. 하반신이 차에 깔려 쇼크 증상으로 혈색이 새파랗게 질렸음에도. 오로지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보호 본능 때문일까.
“사랑한다.”
그 말을 끝으로 엄마는 눈을 감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 힘차게 안아주던 팔이 실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엄마를 구하기 위해 차를 밀었다. 날카로운 부분에 손이 찢어져도 밀고 또 밀었다. 그러다 뒤늦게 뒤집힌 차 앞에서 신음을 내는 아빠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조막만 한 손으로 아빠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래도 움직여지지 않자 그 작은 키로 무거운 짐을 지듯 아빠를 등에 업었다.
아이의 몸은 순식간에 아빠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마를 타고 땀과 피가 섞여 턱으로 떨어졌다. 힘에 부쳐 엎어지고 또 엎어져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 지역을 빠져나와 구급차가 있는 곳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아빠도 숨을 쉬지 않았다.
울면서 눈을 떴다. 어릴 적부터 트라우마처럼 항상 보아오던 꿈이다. 그래도 이 꿈을 꾸지 않게 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 다시 꾸게 될 줄이야.
꿈속의 여운을 느끼다 퍼뜩 정신 차렸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무슨 일을 당한……!
“으윽!”
정신이 드니 머리로 통증이 몰려왔다.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 그때 나는 운명을 저주하며 괴물들에게 달려갔지. 그리고… 달려가던 도중 앞에 있던 괴물에게 머리를 얻어맞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난 아직 살아 있는 건가?
“크윽.”
머리의 통증과 함께 팔 언저리가 저렸다. 그제야 내 몸이 나무와 함께 새끼줄로 꽁꽁 묶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무 섬유로 만든 새끼줄인가? 이런 것까지 만들 수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 괴물들은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응? 에, 에릴! 괜찮아? 어이! 정신 차려봐!”
뒤늦게 내 옆에 엎드려 있는 에릴을 발견해 소리 질렀다. 그녀는 여전히 등에 나무창이 꽂혀 있는 상태로 처량하게 쓰러져 있었다. 상처가 심해 도망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냥 대충 놓아둔 건가? 아니면 이미…….
“에릴! 대답해! 어서! 에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불렀다.
젠장, 정말 늦은 거냐!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린 거냐고!
“…이럴 거면 뗏목을 타고 갈 때 그냥 차라리 내버려 두지그랬어.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릴 거면 그냥, 그냥 날 애초에 도와주지 말지그랬어! 나 같은 놈은… 네가 고마워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삼켰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서글프게 웃던 에릴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는 마치 내게 ‘지금까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어요’라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롭다.
“내 말… 듣고 있냐아아아! 에리이이이일!”
눈물 젖은 얼굴로 절규하듯 외쳤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에릴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에, 에릴! 살아 있어! 하하! 아직 살아 있다고! 에릴! 죽지 마! 정신 차려!”
“현…호… 님…….”
“정신이 들어? 날 알아보겠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에게 있어… 현호 님은… 영…웅…….”
“더는 말하지 마! 그냥 그대로 있어! 무리하지 마!”
목소리에 힘이 없고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어 보이지만, 내 말을 들은 것을 보니 적어도 정신은 온전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난 거지? 아무리 나무창이 상처를 틀어막고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됐다면 피부 괴사가 시작될 터였다. 아니, 그 이전에 만약 폐나 여타 내장이 찔렸다면?
“아냐. 만약 내장을 찔렸다면 입을 통해 혈액이 역류했을 거야. 우선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에릴, 이제부터 말하지 말고 내가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여 줘. 혹시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쉬기가 괴로워?”
에릴은 엎드린 채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몸속에 피가 차올라 혈액이 심장을 압박하는 심탐포나데(심막강 내출혈) 증상은 없다. 숨쉬기가 괴로운 것도 아니면 개방성 기흉(흉벽에 뚫린 구멍으로 공기가 들어가 숨쉬기 어려운 상태)이나 폐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럼 혹시 복통이 있거나 가슴 쪽에 통증은 없어?”
에릴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늑골이 부러졌거나 여타 장기에 손상이 간 것도 아니다. 어, 어쩌면 나무창은 보기와 다르게 깊게 박힌 게 아닐지도 몰라. 그래, 그다지 뾰족하지 않은 나무창이었고, 그마저도 등에 있는 광배근이 충격을 완화해 주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나무창은 광배근을 관통해 늑골 가까이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위험한 건 흉배 동맥과 늑간 동맥에 상처가 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 뽑는 순간 대출혈이 예상되지만, 빠르게 상처 부위를 찾아 지혈만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에릴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릴, 마음 단단히 먹고 내 말 잘 들어. 절대로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 내 말 알아듣겠어? 무리하다 등에 나무창이 뽑히기라도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 그러니까 절대로 무리하면 안 돼. 알겠어?”
에릴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가 급하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정말 가망이 없어.
혹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어 힘껏 몸을 뒤틀어봤지만, 내 몸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젠장, 가방이라도 있었다면 메스를 꺼내 줄을 끊을 수 있었을 텐데.
“하아, 하아, 제가… 도와…….”
“뭐하는 거야!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모습을 보고 있던 건지 에릴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 해 난 버럭 호통쳤다. 내 호통에 놀란 것인지 에릴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도로 뉘었다.
“…화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에릴, 지금은 네 몸만 걱정해. 나보다도 네가 더 위험하니까.”
“하지만…….”
“나는 말이다, 내 눈앞에서 누가 죽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그럴 바엔 내가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절대로 나보다 먼저 죽지 마라. 내가 기필코 구해줄 테니.”
“현호… 님.”
에릴은 내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기필코 구하리라. 두 번 다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난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강현호, 정신 차리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어차피 지금 당장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그렇다면 최대한 정보를 모아두는 게 좋아.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우거진 나무들로 가득하다.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걸까? 어째서 덩그러니 이곳에 남겨졌을까? 만약 우릴 식량으로 취급했다면 그 해변에서 죽인 뒤, 그들 주거지에 있는 음식물 보관 창고에 처박혀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무언가 급한 볼일이 생겨 잠시 내버려 두고 떠났다? 가능성은 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괴물이 훔쳐 갈 가능성도 있는데 식량을 지키는 자도 남겨두지 않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잠깐만 이건 어쩌면…….
“예비 식량인가? 이미 이곳이 그 이족 보행 괴물들의 영역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지금 당장 식량에 부족함이 없다면 우리를 예비 식량 취급해 이곳에서 사육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 여긴 목장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나와 에릴이 살 방법은 단 하나.
괴물들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
“날 풀어줘! 이딴 걸로 날 잡아둘 수 있을 거 같으냐! 당장 이거 풀지 못해!”
대뜸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깜짝 놀란 에릴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계속 소리 질렀다.
무리를 지어 사냥에 나서고 식량을 확보하며 목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이 있다는 건 분명 저들이 사회성 동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집도 있을 테고, 나무 섬유로 만든 새끼줄을 보아 저들만에 생활양식이 있을 거며, 그렇다면 우두머리도 있겠지.
우리가 살기 위해선 그 우두머리와 담판을 짓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현…호 님. 오크를 흥분시키면… 안 돼요…….”
“넌 말하지 말래도 자꾸… 뭐? 오크? 잠깐. 에릴, 너 그들에 대해 알아?”
내가 반문하자 오히려 에릴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세요?”
내가 더 이상한 사람인 양 되묻는 모양새다. 나도 당황스러워 멍하니 고개를 젓자 에릴은 몇 번 눈을 끔뻑거리더니 다시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뭔가 특이한 분이시라고 생각은 했지만……. 하아, 하아.”
“에, 에릴! 괜찮아? 그냥 말하지 말고 쉬어! 너는 안정을 취해야……!”
내가 급히 말리려 했지만, 그전에 에릴이 크게 고개를 저어 내 입을 막았다.
“정보가… 하아, 하아, 필요할… 거예요. 지쳐서 한 번만 설명할게요. 오크, 그들은…….”
그로부터 지친 에릴의 목소리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항상 기분이 나빠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는데, 흥분하면 동족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이 살해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성격이 매우 포악하고 잔인한 편이라 절대로 흥분시키면 안 된다고 했다.
난 거기서 조금 의문이 들었다.
항상 기분이 나빠? 흥분하면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포악해진다고?
그건 마치 내가 알고 있는 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에릴의 말을 계속 들었다.
오크란 주로 숲에서 생활하는 사회성 몬스터(이 몬스터란 단어는 내가 아는 괴물이란 단어와 매우 흡사했다)라고 했다. 주로 약탈과 사냥을 생업으로 삼아 살아가기 때문에 특히 인간들과 잦은 다툼이 있고, 몇 번쯤 전쟁도 벌어졌다고 했다.
나는 거기서 입을 떡 벌렸다. 사람과 잦은 부딪침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어느 언론 매체에서도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까. 그럼 대체 뭐지? 세계에 아직도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건가? 암암리에 국가에서 감춰왔다고? 그럼 이 섬 자체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에서 만든 감옥?
너무 심한 억측이다. 모순점이 너무도 많아.
번듯한 목선을 만들 정도의 문명이라면 내가 모르는 과거도 아니다. 그렇다는 건 결국…….
이곳은…… 전혀 다른 세계인 거다.
5장 홍역(1)
매캐한 연기와 기름 냄새, 그리고 수많은 신음. 다중 추돌 사고로 인해 고속도로에 펼쳐진 참상은 어린아이가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참혹했다.
어린아이는 울고 또 울었다. 유리를 박살 낸 채 운전석 밖으로 튀어 나가 널브러져 있는 아빠와 자동차에 하반신이 깔려 빠져나오지 못하는 엄마 곁에서.
엄마는 서글픈 얼굴로 울고 있는 아이를 안았다. 하반신이 차에 깔려 쇼크 증상으로 혈색이 새파랗게 질렸음에도. 오로지 자식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일까, 아니면 보호 본능 때문일까.
“사랑한다.”
그 말을 끝으로 엄마는 눈을 감았다. 숨을 쉬지 않았다. 힘차게 안아주던 팔이 실 끊어진 목각 인형처럼 바닥에 널브러졌다.
아이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엄마를 구하기 위해 차를 밀었다. 날카로운 부분에 손이 찢어져도 밀고 또 밀었다. 그러다 뒤늦게 뒤집힌 차 앞에서 신음을 내는 아빠를 발견하고 그곳으로 달려갔다.
아이는 조막만 한 손으로 아빠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래도 움직여지지 않자 그 작은 키로 무거운 짐을 지듯 아빠를 등에 업었다.
아이의 몸은 순식간에 아빠의 피로 붉게 물들었다. 이마를 타고 땀과 피가 섞여 턱으로 떨어졌다. 힘에 부쳐 엎어지고 또 엎어져도 아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고 지역을 빠져나와 구급차가 있는 곳에 도착할 즈음엔 이미 아빠도 숨을 쉬지 않았다.
울면서 눈을 떴다. 어릴 적부터 트라우마처럼 항상 보아오던 꿈이다. 그래도 이 꿈을 꾸지 않게 된 지 벌써 10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 다시 꾸게 될 줄이야.
꿈속의 여운을 느끼다 퍼뜩 정신 차렸다.
여기는 어디지? 나는 무슨 일을 당한……!
“으윽!”
정신이 드니 머리로 통증이 몰려왔다. 덕분에 잊고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래, 그때 나는 운명을 저주하며 괴물들에게 달려갔지. 그리고… 달려가던 도중 앞에 있던 괴물에게 머리를 얻어맞아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난 아직 살아 있는 건가?
“크윽.”
머리의 통증과 함께 팔 언저리가 저렸다. 그제야 내 몸이 나무와 함께 새끼줄로 꽁꽁 묶여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무 섬유로 만든 새끼줄인가? 이런 것까지 만들 수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그 괴물들은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응? 에, 에릴! 괜찮아? 어이! 정신 차려봐!”
뒤늦게 내 옆에 엎드려 있는 에릴을 발견해 소리 질렀다. 그녀는 여전히 등에 나무창이 꽂혀 있는 상태로 처량하게 쓰러져 있었다. 상처가 심해 도망갈 거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냥 대충 놓아둔 건가? 아니면 이미…….
“에릴! 대답해! 어서! 에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불렀다.
젠장, 정말 늦은 거냐!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린 거냐고!
“…이럴 거면 뗏목을 타고 갈 때 그냥 차라리 내버려 두지그랬어. 그렇게 허무하게 가버릴 거면 그냥, 그냥 날 애초에 도와주지 말지그랬어! 나 같은 놈은… 네가 고마워할 정도로 대단한 사람이 아니란 말이다……. 빌어먹을, 제기랄…….”
입술을 깨문 채 눈물을 삼켰다. 자꾸만 머릿속에서 서글프게 웃던 에릴의 미소가 떠오른다. 그 미소는 마치 내게 ‘지금까지 함께 있어줘서 고마웠어요’라고 작별 인사를 하는 것 같아 가슴이 찢어질 듯 괴롭다.
“내 말… 듣고 있냐아아아! 에리이이이일!”
눈물 젖은 얼굴로 절규하듯 외쳤다. 그런데 바로 그때.
에릴의 손가락이 움찔거렸다.
“에, 에릴! 살아 있어! 하하! 아직 살아 있다고! 에릴! 죽지 마! 정신 차려!”
“현…호… 님…….”
“정신이 들어? 날 알아보겠어?”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에게 있어… 현호 님은… 영…웅…….”
“더는 말하지 마! 그냥 그대로 있어! 무리하지 마!”
목소리에 힘이 없고 몸을 일으킬 기운도 없어 보이지만, 내 말을 들은 것을 보니 적어도 정신은 온전한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가 기절한 지 얼마나 지난 거지? 아무리 나무창이 상처를 틀어막고 있다 하더라도 시간이 오래됐다면 피부 괴사가 시작될 터였다. 아니, 그 이전에 만약 폐나 여타 내장이 찔렸다면?
“아냐. 만약 내장을 찔렸다면 입을 통해 혈액이 역류했을 거야. 우선 최악의 상황은 아니다. 에릴, 이제부터 말하지 말고 내가 묻는 말에 고개만 끄덕여 줘. 혹시 가슴이 답답하거나 숨쉬기가 괴로워?”
에릴은 엎드린 채로 살짝 고개를 저었다.
몸속에 피가 차올라 혈액이 심장을 압박하는 심탐포나데(심막강 내출혈) 증상은 없다. 숨쉬기가 괴로운 것도 아니면 개방성 기흉(흉벽에 뚫린 구멍으로 공기가 들어가 숨쉬기 어려운 상태)이나 폐에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럼 혹시 복통이 있거나 가슴 쪽에 통증은 없어?”
에릴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늑골이 부러졌거나 여타 장기에 손상이 간 것도 아니다. 어, 어쩌면 나무창은 보기와 다르게 깊게 박힌 게 아닐지도 몰라. 그래, 그다지 뾰족하지 않은 나무창이었고, 그마저도 등에 있는 광배근이 충격을 완화해 주었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내 예상이 맞는다면 나무창은 광배근을 관통해 늑골 가까이 파고들었다. 그렇다면 위험한 건 흉배 동맥과 늑간 동맥에 상처가 났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뿐. 뽑는 순간 대출혈이 예상되지만, 빠르게 상처 부위를 찾아 지혈만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에릴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릴, 마음 단단히 먹고 내 말 잘 들어. 절대로 무리하게 움직이지 마. 내 말 알아듣겠어? 무리하다 등에 나무창이 뽑히기라도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어. 그러니까 절대로 무리하면 안 돼. 알겠어?”
에릴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시가 급하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정말 가망이 없어.
혹시 빠져나갈 수 있을까 싶어 힘껏 몸을 뒤틀어봤지만, 내 몸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젠장, 가방이라도 있었다면 메스를 꺼내 줄을 끊을 수 있었을 텐데.
“하아, 하아, 제가… 도와…….”
“뭐하는 거야! 무리하지 말라고 했잖아!”
내 모습을 보고 있던 건지 에릴이 갑자기 몸을 일으키려 해 난 버럭 호통쳤다. 내 호통에 놀란 것인지 에릴은 반쯤 일으켰던 몸을 도로 뉘었다.
“…화내서 미안하다. 하지만 에릴, 지금은 네 몸만 걱정해. 나보다도 네가 더 위험하니까.”
“하지만…….”
“나는 말이다, 내 눈앞에서 누가 죽는 게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 그럴 바엔 내가 죽는 게 낫다 싶을 정도로. 그러니까 절대로 나보다 먼저 죽지 마라. 내가 기필코 구해줄 테니.”
“현호… 님.”
에릴은 내 마음을 이해한 것인지 더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 기필코 구하리라. 두 번 다신 어머니와 아버지처럼 죽게 내버려 두지 않으리라.
난 잠시 눈을 감고 머릿속을 정리했다.
강현호, 정신 차리자.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살 수 있다고 하지 않았더냐. 어차피 지금 당장 여기서 벗어날 방법은 없어. 그렇다면 최대한 정보를 모아두는 게 좋아.
우선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이 우거진 나무들로 가득하다. 숲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걸까? 어째서 덩그러니 이곳에 남겨졌을까? 만약 우릴 식량으로 취급했다면 그 해변에서 죽인 뒤, 그들 주거지에 있는 음식물 보관 창고에 처박혀야 정상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무언가 급한 볼일이 생겨 잠시 내버려 두고 떠났다? 가능성은 있지만, 그래도 이해할 수 없다. 다른 괴물이 훔쳐 갈 가능성도 있는데 식량을 지키는 자도 남겨두지 않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아니, 잠깐만 이건 어쩌면…….
“예비 식량인가? 이미 이곳이 그 이족 보행 괴물들의 영역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은 있어.”
지금 당장 식량에 부족함이 없다면 우리를 예비 식량 취급해 이곳에서 사육하려는 것일 수도 있다. 그래, 여긴 목장이었던 거야. 그렇다면 나와 에릴이 살 방법은 단 하나.
괴물들을 똑바로 마주하는 것.
“날 풀어줘! 이딴 걸로 날 잡아둘 수 있을 거 같으냐! 당장 이거 풀지 못해!”
대뜸 고래고래 소리 지르자 깜짝 놀란 에릴이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난 계속 소리 질렀다.
무리를 지어 사냥에 나서고 식량을 확보하며 목축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지능이 있다는 건 분명 저들이 사회성 동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집도 있을 테고, 나무 섬유로 만든 새끼줄을 보아 저들만에 생활양식이 있을 거며, 그렇다면 우두머리도 있겠지.
우리가 살기 위해선 그 우두머리와 담판을 짓는 것. 그것 하나뿐이다.
“현…호 님. 오크를 흥분시키면… 안 돼요…….”
“넌 말하지 말래도 자꾸… 뭐? 오크? 잠깐. 에릴, 너 그들에 대해 알아?”
내가 반문하자 오히려 에릴이 나를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혹시… 모르…세요?”
내가 더 이상한 사람인 양 되묻는 모양새다. 나도 당황스러워 멍하니 고개를 젓자 에릴은 몇 번 눈을 끔뻑거리더니 다시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처음부터… 뭔가 특이한 분이시라고 생각은 했지만……. 하아, 하아.”
“에, 에릴! 괜찮아? 그냥 말하지 말고 쉬어! 너는 안정을 취해야……!”
내가 급히 말리려 했지만, 그전에 에릴이 크게 고개를 저어 내 입을 막았다.
“정보가… 하아, 하아, 필요할… 거예요. 지쳐서 한 번만 설명할게요. 오크, 그들은…….”
그로부터 지친 에릴의 목소리는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그들은 항상 기분이 나빠 인상을 찌푸리고 다니는데, 흥분하면 동족이든 아군이든 상관없이 살해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로 성격이 매우 포악하고 잔인한 편이라 절대로 흥분시키면 안 된다고 했다.
난 거기서 조금 의문이 들었다.
항상 기분이 나빠? 흥분하면 이성이 마비될 정도로 포악해진다고?
그건 마치 내가 알고 있는 병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일단 에릴의 말을 계속 들었다.
오크란 주로 숲에서 생활하는 사회성 몬스터(이 몬스터란 단어는 내가 아는 괴물이란 단어와 매우 흡사했다)라고 했다. 주로 약탈과 사냥을 생업으로 삼아 살아가기 때문에 특히 인간들과 잦은 다툼이 있고, 몇 번쯤 전쟁도 벌어졌다고 했다.
나는 거기서 입을 떡 벌렸다. 사람과 잦은 부딪침이라니. 그럴 리가 없다. 어느 언론 매체에서도 그런 소리는 듣지 못했으니까. 그럼 대체 뭐지? 세계에 아직도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다는 건가? 암암리에 국가에서 감춰왔다고? 그럼 이 섬 자체도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국가에서 만든 감옥?
너무 심한 억측이다. 모순점이 너무도 많아.
번듯한 목선을 만들 정도의 문명이라면 내가 모르는 과거도 아니다. 그렇다는 건 결국…….
이곳은…… 전혀 다른 세계인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