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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11화)


4장 감옥 같은 섬(2)


“저기요, 괜찮아요?”
나를 해변까지 끌고 나온 인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본다. 하지만 난 대답할 기운도 없어 멍하니 하늘만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 섬 전체가 저 벽으로 가로막혀 있는… 거야?”
“…네. 그래서 저 역시 이 섬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었어요.”
“…그랬구나, 그런 거였어. 하하하, 하하하하, 하하하하… 흐으윽! 빌어먹을, 제기랄…….”
목선은 이 섬의 존재를 모르거나 그냥 지나가던 길이라 다가오지 않은 게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벽의 존재를 알고 있기에 더는 다가오지 못했던 거지.
팔로 눈을 가린 채 끅끅, 소리 내며 울었다. 이곳은 정녕 감옥이다. 아니, 지옥이다. 그야말로 구제할 길이 없는 생지옥. 내가 생전에 무슨 죄를 그렇게 지었다고 신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내려주었단 말인가.
절망적이다. 나는 이곳을 빠져나갈 수 없다. 어쩌면 정말 영원히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 이렇게까지 필사적으로 살아야 할 이유가 있는 걸까?
“……!”
절망 속에서 담지 말아야 할 감정을 느끼는 순간, 내 머릴 쓰다듬는 손길이 느껴졌다. 깜짝 놀라 눈을 가리던 팔을 떼니 인어가 다급히 손을 거둔다.
“아, 죄송해요. 기분 나빴어요?”
“그러고 보니… 내 말… 알아들을 수 있는 거야?”
인어는 조심스러운 얼굴로 살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처음부터 내 말도 다 알아들었으면서 말하지 못하는 척 연기했던 거냐?”
이번엔 좌우로 붕붕 젓는다.
“오해예요. 처음엔 저 역시 알아듣지 못했어요.”
“그럼 지금은 어째서?”
“그건…….”
인어는 몹시 망설이는 얼굴로 입을 오물거리다 부끄럽다는 듯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아, 아까… 그 일 때문이에요…….”
“그… 일?”
피곤한 목소리로 되묻자 인어의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 일이라니, 대체 무슨 일……!
절망적인 상황 탓에 잊고 있던 일이 기억났다. 그래, 그 일. 인어하고 그 일이라면 그것밖에 없지 않은가.
이성이 급속도로 돌아오며 부끄러운 감정이 솟아났다. 지금 내 얼굴도 붉어져 있을까?
“설마… 그때 그 키스?”
역시나 정답이었는지 인어는 귀까지 빨개져 버렸다. 물론 나도 부끄럽긴 하다만, 그건 말이 안 되잖아!
“이해가 안 돼! 그러니까 입맞춤만으로 서로 대화가 통하게 됐다고? 그게 무슨 마법 같은…….”
“저도 잘 모르겠지만, 어째선지 저희 종족은 상대와 입을 맞추면 서로의 목소리가 연결돼요. 평소에는 아무도 저희 목소리를 듣지 못하죠. 그래서 저기… 그땐 너무도 다급해서… 죄송해요.”
“목소리가 연결돼? 그러니까… 초음파로 서로 대화하는 돌고래, 뭐, 그런 비슷한 경우라는 말인가?”
인어는 초음파라는 단어에서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일단 맞췄다는 듯이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내가 말해놓고도 기가 막히네.
요새 하도 판타지 같은 일을 빈번히 겪다 보니 현실 감각이 무뎌진 것인지, 농담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하긴, 지금 눈앞에 있는 인어 자체부터가 환상 같은 일인데.
“아, 모르겠다! 안 그래도 지금 혼란스러워 죽겠는데! 아니, 그런 방법이 있었으면 진작 사용하지, 왜 지금까지 가만히 있었어?”
“그건… 죄송해요.”
인어는 뭐라 말할 듯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할 말이 있는 것 같은데 감추는 분위기다.
캐물어볼까? 아주 잠깐 고민하다 관두기로 했다. 지금 당장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픈데 그런 걸 물어 무엇하겠는가.
“그나저나, 빌어먹을 무인도 같은 감옥이라니. 제기랄! 그럼 나보고 이제 어쩌라고!”
바다로 향하는 길은 막혔다. 그럼 이제 남은 길은 두 가지. 위험을 무릅쓰고 숲으로 들어가느냐, 아니면 죽을 때까지 해변에 정착해 살아가느냐다. 둘 다… 희망은 없어 보인다.
인어는 안타까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저 인어… 아직 이름도 모르잖아.
“이름이 뭐야?”
“저요?”
“그래. 지금까지 대화가 안 통해 너라고 말했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부를 순 없잖아. 아니면 혹시 없거나…….”
인어는 고개를 붕붕 젓더니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에릴, 에릴이에요.”
“에릴…인가. 그래, 에릴. 에릴은 이곳이 어딘지 알아?”
“이곳요?”
에릴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혹시나 싶어 한국이나 섬나라인 일본, 더 포괄적으로 미국과 지구까지 언급해 봤지만, 전부 모르는 눈치였다. 역시 이곳은 백악기 시대에 버금가는 과거이거나, 어쩌면 완전히 다른 세계일지도 모른다고 직감했다.
이참에 여러 가지 궁금한 것들을 물어볼까 하다 관두기로 했다. 그런 건 나중에 차차 물어보면 되는 것이고, 지금 당장은 앞으로 어찌할지가 문제였으니까.
“에릴은 앞으로 어찌할 거지?”
“어찌…하다뇨?”
정말 모르겠다는 듯이 고개를 갸웃거린다.
역시나 저 행동은 조금 귀엽다.
“평생 나하고 살 거 아니잖아. 너도 가족이 있고 동료가 있지 않아?”
뭔가 잘못 건드린 것인지 내 물음에 어깨를 축 늘어트리는 에릴.
이런, 정말 폭탄을 건드린 건가.
“아, 미안. 굳이 말할 필요는…….”
“저 벽 너머… 그 너머에 있어요. 지금은… 만날 수 없어요.”
“…….”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가, 에릴도…….
“나와 같은… 처지구나.”
풀썩, 뒤로 누웠다. 바닷가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파도가 발끝을 치고 있지만, 지금은 이대로가 더 편했다.
“강현호.”
“네?”
“강현호. 내 이름이라고.”
조금 부끄러워져 시선을 피해 버렸다.
“네, 현호 님.”
한참 후에 울먹거리면서도 기쁜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참에 말해두겠는데, 그 허리띠처럼 묶은 가운은 입으라고 줬던 거다.”
“네?”
“사람에겐 알몸으로 다니는 것 자체가 몹시 부끄러운 행위라고.”
그제야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에릴은 한동안 자신의 알몸을 내려다보더니, 잔뜩 붉어진 얼굴로 주섬주섬 가운을 입기 시작했다.
“어쩐지… 현호 님은 왜 몸을 가리고 있나 했어요오오…….”
귀엽게 말을 늘어트리며 챙겨 입는 모습이 몹시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정말이지, 누구 때문에 절망할 틈도 없구만.”
“기분은 좀 나아졌나요?”
“덕분에. 여전히 막막하긴 하지만… 뭐, 계속 궁상맞게 누워 있을 순 없는 노릇이니, 일단은 오늘 밤에 먹을 것부터 구하고 생각해 보자.”
끙차, 한껏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뭔가 희망은 완전히 사라졌지만, 에릴 덕에 기분은 많이 나아졌다. 그래, 아직 모든 걸 포기하기엔 이르다. 어쨌거나 에릴과 말도 통하게 됐으니 뭔가 또 다른 희망이 보이지 않겠는가.
“저… 현호 님.”
“응?”
오늘은 조개를 구해 먹어볼까 싶어 해변을 탐색하던 도중, 에릴이 부르는 목소리에 뒤돌아보았다. 내가 돌아보자 그녀는 어설프게 미소 지었다.
“만약 말이 통하게 된다면…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어요.”
“전하고 싶은 말? 뭔데?”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하는 통에 나도 수색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에릴은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것인지 매우 뜸 들이는 듯하더니,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전에 구해주셨던 거, 진심으로 고맙습니…….”
갑자기 에릴의 몸이 들썩이며 그녀의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렸다.
“에…릴?”
의아해 묻자 그녀는 동공 풀린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며 울 듯한 얼굴로 한 번 미소 짓고는…….
털썩, 그대로 모랫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에, 에릴. 에릴!”
모래를 박차고 엎어지듯 달려가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제야 볼 수 있었다. 그녀의 등 뒤로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는 나무창을.
등에서 피가 흐른다. 그녀에게 준 내 가운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어간다. 더불어 내 머릿속도 붉게 혼란으로 물들어갔다.
정신없는 와중에 그녀의 등 뒤로 삐져나와 있는 나무창을 보았다. 저 투박한 나무창. 나는 알고 있다. 그래,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저건…….
“쿠쉬쿠쉬, 쿠라하!”
“에시바흐하! 에간하!”
이족 보행 괴물들이 사용하는 무기다.
미친 듯이 심장이 뛰었다. 저 괴물들이 어째서 여기에? 한 달 동안 해변엔 모습도 비치지 않던 녀석들이 왜! 갑자기 어째서!
순간, 난파된 뗏목이 생각났다.
그래, 그때 너무 소란이 컸던 거야. 내가, 내가 저들을 불러낸 거였어.
미친 듯이 후회가 몰려왔다. 내가 뗏목을 만들지만 않았더라면! 성급히 판단만 하지 않았더라면!
“쿠라하! 쿠라하!”
저 멀리 해변을 따라 대충 보아도 열 마리가 넘어 보이는 이족 보행 괴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도망은… 무리다.
난 절망적인 기분으로 다시 에릴을 돌아보았다.
창이 상처 부위를 막고 있어 피는 심하게 흐르지 않았지만, 저걸 뽑는 순간 큰 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여긴 수혈할 장비도, 혈액도 없다. 나로서는 살릴 방법이 없다는 뜻.
그야말로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애꿎은 모랫바닥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대체 지금까지 무엇 때문에 노력했더란 말인가. 대체 무엇 때문에 필사적으로 살아왔단 말인가! 이렇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운명이었다면, 왜 에릴이란 인어를 만났단 말인가!
“빌어먹을… 이딴 게 운명이냐! 이딴 인생을 겪게 하려고 나를 여기로 보냈냐! 이 개자식아아아아아!”
하늘을 향해 소리친 나는 해변까지 밀려온 나무 파편을 하나 주워 든 채 괴물들이 있는 곳으로 달려 나갔다. 이 세상을 저주하듯, 나를 여기로 보낸 신을 저주하듯.
또다시 눈앞에 죽어가는 사람을 구해내지 못한 채 지켜봐야 하는 내 운명을 저주하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