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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9화)


3장 은혜(2)


다시 산 채로 생선을 씹어 먹었다. 아침처럼 똑같이 조금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전히 부족했지만,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것인지 몸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대체… 누구지?”
배 속에 무언가 차고 나서야 이성을 되찾을 수 있던 나는 뒤늦게 생선을 가져다 놓은 누군가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생선이 저 혼자 펄떡거리며 여기까지 왔을 리는 만무하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를 위해 생선을 가져다 놓았다는 말인데…….
“누군지 모르겠지만… 정말 감사…합니다.”
허공에 대해 누군지 모를 은인에게 감사를 보냈다. 남들이 보기엔 고작 생선 두 마리에 불과할 뿐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생선 두 마리는 황금 두 덩어리와도 견줄 수 없는 값어치가 있었다. 정말 그 정도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렇게 감사함을 표하며 살았다는 마음으로 다시 잠을 청하는데, 다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래, 그 우렁 각시 같은 일은 그걸로 끝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 날, 그다음 날, 또 그다음 날도 내가 일어나면 허공에서 솟아나기라도 한 것처럼 눈앞에 생선이 하나 놓여 있었다. 생선의 종류는 전부 제각각이지만,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처럼 보란 듯이 눈앞에 놓여 있었다.
그렇게 나흘을 보내니 어느 정도 내 몸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이젠 스스로 걸어 나가 음식을 구할 수 있을 정도로 체력이 회복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생선은 날마다 꾸준히 내 눈앞에 놓여 있었다. 정말 이런 우렁 각시가 세상에 또 있을까?
처음엔 모른 척 넘어가 주는 게 도리가 아닐까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날마다 반복되니 아무래도 사람으로서 도리가 아니라 판단되어 은인이 누구인지 알아내기로 작정했다.
파도 소리만 울리는 고요한 새벽. 옆으로 누운 채 온 신경을 귀에 집중하고 있는 그때, 작은 인기척이 들려왔다.
나타났다!
신경을 잔뜩 곤두세우고 은인이 가까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은인은 매우 신중한 타입인지, 좀체 굴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상황을 살펴보는 듯했다. 끈질기게 자는 척하며 버티니 30분쯤 지날 때 드디어 조심스레 굴 안으로 들어오는 낌새가 느껴졌다.
그래,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지금이다!
머리맡에 생선이라 여겨지는 무언가가 놓인다고 생각한 순간, 벌떡 일어나 상대의 팔을 낚아챘다.
그리고 나는 정말 기겁할 정도로 놀라고 말았다.
“다, 당신은?”
달빛에 살짝 반사되는 에메랄드 빛 눈동자. 허리까지 내려오는 칠흑의 머리. 그리고 복부에 나 있는 수술 자국. 어두워 정확히 보이진 않지만, 확실했다. 이자는 분명!
“인어…가 아니라 사람? 윽!”
‘일주일 전 내가 구해줬던 인어다!’라고 생각한 순간, 멀쩡한 사람의 두 다리로 서 있는 걸 뒤늦게 눈치채고는 사고가 정지됐다. 덕분에 손에 힘이 풀렸던 걸까? 그 인어 같은 여성은 내 팔을 뿌리치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잠깐만! 기다려!”
재빨리 뒤쫓았다. 하지만 너무 어두워 도저히 따라갈 수 없자 다급한 마음에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놀랍게도 상대가 움찔하더니 멈추는 게 아니겠는가. 어두워서 잘 보이진 않지만, 저쪽도 상황을 살피는 듯 보여 기회는 지금밖에 없다는 생각에 크게 외쳤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 단지 고맙다는 말을 전하고 싶었을 뿐이야! 그러니까, 나는… 크윽! 덕분에 살았다! 목숨을 구해준 거… 정말 고맙다!”
90도로 허리 숙여 고마움을 표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고작 그것뿐이지만, 진심을 담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꼭 이 말을 전하고 싶기도 했고.
한동안 조용히 파도 소리만 귓가에 들려왔다. 슬쩍 고개를 들어 살펴보니 여전히 은인은 제자리에 선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내가 완전히 고개를 들자 휙 뒤돌아서 바다로 뛰어가기 시작했다.
그 후, 나는 정말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은인이 바닷속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사람의 두 다리가 물고기 꼬리로 변했던 것이다.
“뭐, 뭐야? 내가… 잘못 봤나?”
하도 놀라워 두 눈을 비비고 다시 밤바다를 주시했다. 하지만 이미 바닷속으로 완전히 몸을 감춘 듯 파도만 출렁거릴 뿐이었다.
달빛에 반사된 어두운 음영이었던지라 내가 착각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사람이 밤바다에 몸을 던지는 것도 이상하지 않은가.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야. 그 은인은 내가 구해줬던 인어가 분명해.”
여기 온 뒤로 살다 살다 신기한 경험은 다 해보는 기분이었다.

그 일이 있은 후부턴 내 눈앞에 생선이 놓이는 경우는 없었다. 아무래도 은혜를 갚기 위해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너무 놀라게 했나?
괜히 미안했지만, 지금 내 코도 석 자이기에 그 인어에 대해 신경 쓸 틈이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더 보낼 즈음일까? 다리도 완쾌했고, 이런 생활도 많이 익숙해져 이번엔 나무를 조각해 그릇을 만들었다. 그런데 문득 시선이 느껴져 무심코 바다를 돌아보았다가 우연히 다시 그 인어를 볼 수 있었다.
대략 50m쯤 떨어진 거리였는데, 얼굴만 빼꼼히 내민 채 나를 주시하던 인어는 눈이 마주치자 바로 물속으로 사라졌다. 모른 척 다시 나무를 조각하며 실눈으로 바다를 돌아보니 역시나 인어는 다시 나를 살펴보고 있었다.
이걸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그래, 동물로 치자면… 부끄럼 많은 고양이를 마주한 느낌일까?
하여튼 악의는 없어 보이니…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면 지는 거다.
그렇게 이틀이 더 지났다. 이곳에 온 지도 보름이 넘어가니 머리는 푸석하고 턱수염도 까끌까끌하며 흰 가운은 여러 군데 해져 잘 때 이불용으로만 사용할 뿐, 입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몸도 매일 진흙을 치덕치덕 바른 채 생활하니 본래 내 피부가 살색인지도 헷갈릴 정도였다.
지금 내 모습에서 과거 의사 강현호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된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 헛짓하면서 보낸 것은 아니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이 보름 동안 필사적으로 생존하며 이곳이 대략 어떤 곳인지 파악할 수 있었으니까.
이곳은 처음 생각했던 그대로 사람은 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대신 이족 보행 괴물과 그밖에도 생전 처음 보는 생물들이 한가득이라는 것. 살아 움직이는 나무와 버섯, 뿔 달린 토끼와 개구리, 그리고 곤충을 잡아먹는, 사람만 한 식충식물을 마주했을 땐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내가 이 세상 모든 생물을 다 알고 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이런 것들이 실존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었다. 이곳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섬. 그야말로 판타지 섬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면 이곳은 내가 아는 지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는 석기시대 이전의 과거로 온 것일지도 모르고. 답을 확정할 순 없지만, 어쨌든 내가 살던 현실이 아니라는 것만은 유추해 낼 수 있었다.
그밖에도 이 무인도가 생각했던 것보다 어마어마한 크기라는 것을 알아냈다. 제주도, 어쩌면 그 이상 정도의 크기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죽음을 무릅쓰고 절벽 위로 올라가 알아낸 일이었다.
섬의 크기가 워낙 큰지라 어쩌면 사람이 사는 마을도 있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봤지만,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숲을 빠져나가 찾는 건 목숨이 백 개라도 모자랄 일이기에 포기했다.
그래도 그런 좌절스러운 사실들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정도로 큰 수확이 하나 있었다.
바로 배를 발견한 것이다.
까마득한 거리라 확실하진 않다. 하지만 난 분명히 배라고 생각했다. 처음엔 미친 듯이 소리도 질러보고 다급히 불도 피워 연기를 내는 등 별별 짓을 다 시도해도 배는 곧 사라져 버렸지만, 그것이 ‘사람이 타고 있는’ 배라는 게 중요했다.
그 후, 난 결심했다, 이 위험하기 짝이 없는 섬에서 탈출하기로.
사람을 만나면 이곳이 어디인지, 지금 내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알 수 있다. 그것만으로도 막막하게 생활하던 지루한 일상에 희망을 품을 수 있었다.
작전은 뗏목을 타고 나가 지나가던 배가 나를 볼 수 있도록 근접하는 방법이었다. 물론 매우 무모한 일이다. 만약 지나가던 배를 찾지 못하거나, 찾는다 하여도 정작 배가 나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바다 한가운데서 말라 죽을 테니까. 그럼에도 난 뗏목을 만들기로 결심했다. 여기서 근근이 연명하다 괴물들에게 잡아먹혀 죽는 것보단 뗏목에서 굶어 죽는 게 훨씬 나으니까.
그로부터 난 뗏목 만들기 작업에 착수했다.
사람이 탈 만한 큰 나무를 구해 해변까지 가져오는 것도, 그 나무들을 엮을 덩굴을 구하는 것도 전부 어마어마하게 큰일이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때론 이족 보행 괴물을 만나 죽은 듯이 풀숲에 누워 심장을 졸이던 적도, 식충식물의 줄기를 덩굴인 줄 알고 힘차게 뽑았다가 그대로 먹혀 죽을 뻔한 적도 있었지만, 역시 포기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아낼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기에.
“좋아, 이 정도면 그럭저럭 된 건가?”
난 흐뭇한 눈으로 어설프지만 모양은 그럴싸한 사각 뗏목을 바라보았다. 아직 뗏목을 저을 노도, 바람을 탈 돛도 없지만, 적어도 뼈대는 완성했다고 볼 수 있었다.
여기까지 만드는 데 무려 한 달이 걸렸다. 처음엔 적어도 일주일이면 완성할 줄 알았는데, 괴물들을 피해가며 몰래몰래 만든 터라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이다.
“반쯤 완성된 건가? 그럼 이제 노하고 돛을 만들 차례이긴 한데…….”
난 혼자 중얼거리다 슬쩍 곁눈질로 옆을 돌아보았다. 그러곤 다급히 고개를 휘저었다.
“신경 쓰지 말자. 무시해라, 무시. 그럼 이제 돛을 어떻게 만들지 고민을…….”
무시하자고 다짐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옆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그도 그럴 게, 어찌 신경 쓰이지 않겠는가. 불과 10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완전 나체의 인어가 말똥말똥 나를 바라보고 있는걸.
이 한 달 동안 가장 많이 변화한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아마 저 인어가 아닐까 생각한다.
처음엔 대략 50m 거리. 그땐 나와 눈을 마주치기만 해도 도망가기 일쑤였건만, 일주일쯤 지나자 50m가 30m로, 또 일주일이 지나자 20m로, 이젠 불과 10m 거리까지 다가왔다. 게다가 서로 눈이 마주쳐도 도망치지 않고 슬쩍 내 눈만 피할 뿐이었다.
그래도 내가 다가가려 하면 연신 뒤로 물러나는 통에 아직 대화 한 번 해보지 못한 상태였지만.
지금 인어는 인어답지 않게 멀쩡히 두 다리로 바위 위에 쪼그려 앉은 채 양손으로 턱까지 괴고선 연신 뗏목을 구경하고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가 뻥튀기 기계를 구경하는 듯한 모습이랄까?
대체 인어의 신체 구조가 어찌 이루어져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물속에선 물고기 꼬리, 물 밖에선 사람의 다리로 자유자재 변형이 가능한 것 같았다. 대체 변신 로봇도 아니고… 신기하기 그지없다.
덕분에 쪼그려 앉은 인어의 다리 사이로 자꾸 시선이 가고 만다. 중요한 부분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지만, 그게 더 관능적으로 느껴지는 바람에 내 아랫도리가 자꾸 흥분했다.
그래, 지금 나는 은인이자 사람도 아닌 인어에게 욕정을 품어 절제가 안 되고 있다. 하지만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겉으로 보기엔 인어가 아니라 그냥 여인이다. 그것도 연예인 뺨칠 정도로 아름다운!
아무리 나라도 남자다. 한 달 넘게 여자를 안아보긴커녕 여자의 얼굴도 못 보고 살아왔는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연신 뗏목을 구경하고 있던 인어는 내 뜨거운 시선을 느낀 것인지 나를 돌아봤다가 흠칫 놀란다.
노, 놀랄 정도로 내 표정이 짐승 같았나?
“저기… 있잖아.”
보다 못한 내가 말을 건네자 인어는 잔뜩 긴장한 듯 어깨를 좁히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용하게 도망가거나 하진 않았다. 그야말로 비둘기 같은 행동 자세다.
“구경하는 건 뭐 아무래도 좋은데… 그 나체는 가려주지 않겠어? 나도 남자라 자꾸 신경 쓰여서 작업이 안 되거든? 하아, 대화가 통했으면 좋겠건만, 답답해 미치겠네. 자, 이거라도 입고 좀 가려봐. 제발 부탁이다.”
난 옆에 벗어두었던 가운을 집어 인어에게 던졌다. 내 갑작스러운 행동에 화들짝 놀란 인어가 황급히 뒷걸음쳤는데, 이내 위협적인 행동이 아니라는 걸 알아차리곤 의아한 얼굴로 발밑에 떨어진 흰 가운을 바라보았다.
“입으라고, 이렇게.”
내가 가운을 입는 척 몸짓을 취해 보였지만, 인어는 고개만 갸웃할 뿐이었다. 그러다 개처럼 엎드려 킁킁, 냄새를 맡아보더니, 활짝 웃으며 가운을 꼭 껴안았다. 순간, 너무 귀여워 심장이 쿵! 내려앉았지만,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아니, 그거 선물이 아니라 입으라고 준 건… 하아, 나도 모르겠다. 알아서 해라.”
가운을 꼭 껴안은 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이젠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해 버렸다. 정말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기분이네.
그로부터 인어는 내 가운을 허리에 묶고 다녔다. 그건 허리띠가 아니라 옷이라고 백번 설명해 줘도 모르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