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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닥터 1권(7화)
2장 충수염(맹장)(2)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지만, 도드라지게 보이는 상반신과 하반신의 경계선, 빛의 방향에 따라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영롱한 비늘과 매끈한 지느러미까지. 그건 물고기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저건 영화 촬영을 위해 제작한 옷을 입은 게 아니야. 진짜다. 진짜 인어야!
어느 나라 민화에서 인어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단지 그게 아니더라도 하반신만 보니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꿀꺽.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만약 이미 죽은 것이라면… 머, 먹어도 괜찮지 않을…….
꿈틀.
“흐아악!”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인어가 갑자기 움직이자 괴상한 비명이 다시 튀어나와 버렸다. 더불어 세 걸음 더 뒤로 물러나 머리털이 잔뜩 곤두선 채로 인어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인어는 정말 힘겨운 듯 꿈틀대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로소 난 그 인어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볼 수 있었는데, 어찌나 투명하고 아름다운지 순간 넋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풀썩.
인어는 그렇게 잠시 날 올려다보곤 무너지듯 다시 쓰러졌다. 익사(인어가 익사한다는 것도 웃기지만)하진 않은 것 같은데, 기운이 없어 보인다.
조금 자세히 보니 인어의 손이 배를 향하고 있었다. 피도 흐르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도 자상은 없다. 그렇다면 내장에 이상이 있는 건가?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지만, 내 발은 지면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인어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저런 걸 어떻게 한단 말이냐.
“도, 돌아가자. 그래, 그냥 못 본 거야. 없던 일이야.”
휙 뒤돌아 도망치듯 걸어갔다.
그래, 차라리 그냥 이대로 놔둔 뒤에 밤에 다시 찾아와 보자. 그리고 하반신만 조금 얻어서 먹으면…….
거기까지 생각하다 문득 충격을 받아 입을 쩍 벌렸다.
나,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냐?
먹다니. 먹겠다니. 이대로 죽어가는 걸 버려두고 밤에 찾아와 먹겠다니! 이런 미친놈! 며칠 굶더니 머리까지 이상해진 거냐! 정신 차려라, 강현호! 넌 의사다!
다시 뒤돌아봤다. 인어는 하복부의 고통이 상당한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신 차리자. 아무리 처량한 신세라지만, 난 의사다. 누군가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못 본 체할 수 있겠어.
누구든 내 눈앞에서 죽는 꼴은 다신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인어를 내버려 둔 채 내 은신처로 달렸다. 물론 도망가기 위해서 달린 게 아니다. 가방을 들고 오기 위함이었다.
“헉, 헉.”
아픈 다리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달렸더니 숨이 꽤 거칠어졌다. 하지만 지금 나보다도 더 급한 건 인어다. 지금 내 상태 따위를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봐! 정신 차려! 괜찮아?”
가방을 들고 와 다시 안부를 물으니 인어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어의 얼굴이 몹시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왜 저러지?
인어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한동안 나를 올려다보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마치 붕어처럼.
너무 아파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건가?
내가 의아해하자 인어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 쓰러졌다.
난 우선 인어를 자세히 살폈다. 얼굴색도 안 좋고, 호흡도 상당히 거칠다. 이마를 만져 보니 열도 상당히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매우 나쁜 것 같다.
“미안해. 배 좀 만질게.”
내 손이 인어의 배를 향하자 살짝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지만, 상당히 지쳤는지 조금도 반항하지 못했다.
“혹시 여기가 아픈 건가?”
여러 군데를 살펴보다 우하복부를 살짝 누르자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리는 인어.
젠장, 이거 충수염이다. 디펜스(근성 방어. 통증을 방지하기 위해 근육이 딱딱해지는 현상)도 상당히 강해. 어쩌면 이미 충수의 고름이 복강 내에 흘러나와 복막염까지 진행되었을지도 몰라.
만약 그 정도까지 사태가 진전되었다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겐 복강을 세척할 생리식염수도 없으니까.
물론 생리식염수를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선 소금의 농도를 구할 수도, 그 흔한 물조차 구하기 어렵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좋겠지만, 중요한 건 그밖에도 애로 사항이 몇 가지나 더 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바이탈(바이탈 사인을 말함. 혈압, 심박 수, 호흡수 등 인간의 생명 상태를 나타내는 총칭)을 체크해 줄 간호사도, 기기도 없고, 여긴 위생 상태도 상당히 나빠. 이대로 수술을 진행했다간 다른 감염증을 일으킬 우려가 상당히 큰데, 어쩌지?”
손톱을 깨물며 고민하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내려다봤더니 언제부턴가 인어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다시 봐도 투명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말 보석 같다고나 할까?
인어는 그런 아름다운 눈동자로 지그시 나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내게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젠장! 돌아버리겠군! 잘 들어! 지금 당신이 복통을 호소하는 이유는 맹장 끝에 달린 충양돌기(충수랑 같은 말)에 염증이 생겨 그런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나는… 제기랄! 알아듣지도 못할 인어한테 무슨 설명을 하는 거야! 어쨌든 지금부터 난 충양돌기를 제거하는 수술에 들어갈 거야. 알겠어?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배를 째겠다고!”
인어는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 건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허락의 표시든 지쳐서 쓰러진 것이든 이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이 인어는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할 테니까.
우선 바닷가에 들어가 진흙으로 엉망이 돼 있는 내 몸을 세척했다. 그런 뒤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운을 벗어 바닥에 깔고 그 위로 인어를 눕혔다. 이것으로 수술대는 완성. 선배가 이걸 보면 미쳤느냐고 멱살을 잡아 올렸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이다. 그래도 국소마취제, 메스, 봉합용 침과 실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다음으로 불을 피우고는 담수가 담긴 죽통 잔 안에 온갖 의료 기기를 넣고 소독하기 시작했다. 오늘 마실 소중한 식수지만, 생명을 구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가방에서 마취제를 찾아 성분을 확인했다. 다행히 프로카인(Procaine) 성분이다.
마취제의 일종인 프로카인은 다른 말로 노보카인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마취제는 요추마취에도 사용될 수 있으므로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옆으로 누워 둥글게 몸을 말아주겠어?”
주사기에 마취제를 담으며 말했지만, 인어는 그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낑낑거리며 인어를 옆으로 누이고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척추가 벌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처음엔 황당한 행위에 인어도 놀라 저항하는 낌새를 보였지만, 심한 복통 덕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우, 수술 개시. 마취에 들어간다.”
수술용 장갑을 착용하고 습관적으로 수술 개시라 중얼거리며 주삿바늘을 척추 사이에 꽂아 넣었다.
요추마취는 척추마취법 중 가장 흔히 쓰이는 마취다. 자세히는 척추 사이의 경막하강(硬膜下腔) 속에 마취제를 주입해 신경전도로(神經傳導路)를 차단하여 그 이하의 지배 구역에 신경마비를 일으키는 전도 마취법이다. 배꼽 밑부터 하반신 전체에 마취가 퍼지기 때문에 맹장 수술을 진행할 때 적격이다. 인어의 신경이 과연 사람과 같을까가 문제였지만, 지금은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취제를 놓은 후, 속으로 시간을 세었다.
좋아, 10분. 약효가 퍼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이제 아프지 않지?”
슬쩍 우하복부를 만지며 인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좋아, 크게 아파하지 않는다. 돌처럼 딱딱했던 근육의 디펜스도 사라졌다. 인어도 자신의 상태를 보곤 크게 놀라 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겠지. 하복부부터 하반신 전체의 감각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약액은 주입 후 5~10분이면 마취가 시작되고, 30분에서 두 시간 정도 지속된다. 30분만 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지금 당장 수술을 시작해야 한다.
“놀라지 마. 절대로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의지 가득한 눈으로 인어를 내려다보며 메스를 들었다. 내 손에 날카로운 물건이 들려 있는 걸 본 인어가 애처로운 눈을 했지만, 이내 포기한 듯 감아버렸다.
나도 잠시 눈을 감고 다시 심호흡했다.
지금까지 맹장 수술은 수백 번도 더 집도해 봤다. 이딴 수술은 나에겐 10분이면 충분해. 긴장하지 마라. 단숨에 끝낸다!
망설임 없이 메스를 인어의 복부로 가져가 사복근을 주행 방향으로 복직근(사람의 복벽 좌우에 나란히 상하로 뻗어 있는 한 쌍의 근육)을 따라 절개했다.
천만다행이랄까, 충수의 고름이 터져 복강 내로 퍼지진 않았다. 만약 퍼졌다면 충수를 제거해도 소생 확률이 없었을 텐데, 극악의 상황은 면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인어는 푸들푸들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절개해 배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뭐라 설명해 안심시켜 주고 싶었지만, 난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내겐 마스크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입안에는 수많은 병균이 서식하고 있다. 만약 이게 침을 통해 빠져나와 감염된다면 정말 골치 아파지기에 절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후우, 어쨌거나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더 놀랄 짓을 할 거니까 조금만 참아라!
수술용 장갑을 낀 채로 그녀의 배 속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그녀의 눈이 더욱 커졌다.
난 손가락의 신경을 집중해 배 속을 헤집었다. 나로선 이럴 수밖에 없었다. 여긴 복부를 열어 고정할 만한 개창기도 없기에 그저 내 손의 감각만을 믿고 충수를 찾아 끄집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가 집도한 환자들의 충수 위치를 떠올렸다. 전부 제각각 위치는 조금씩 달랐지만, 맹장의 선로만 어느 정도 기억하면 얼추 찾아낼 수 있다.
그래, 이 선로라면 직장 사이에 분명… 찾았다!
고름 져 잔뜩 부푼 충수를 배 밖으로 살짝 끄집어냈다. 그 모습에 인어도 몹시 놀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것을 빠르게 절개한 뒤, 익숙한 손놀림으로 봉합하고 붕대로 친친 감았다. 여기까지 소요 시간은 고작 8분.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내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후우, 수술… 종료.”
몹시 지친 얼굴로 옆에 주저앉았다. 인어는 붕대로 감겨 있는 복부와 그 옆에 놓인 고름 진 충수를 번갈아 보다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다시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뻐끔뻐끔 입술을 움직인다.
대체 뭐지? 이젠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아프진 않을 텐데. 설마 성대에도 문제가 생긴 건가?
인어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포기하곤 다시 드러누웠다. 그래, 역시 지쳤겠지. 금방이라도 파열할 것 같은 충수였으니까. 며칠간 상당히 괴로웠을 거야.
난 걱정스러운 얼굴로 인어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수술은 성공했지만 이런 곳에 계속 누워 있다간 다른 감염증을 불러일으킬 확률이 높아진다. 지금 당장 ICU(중환자실)에서 안정을 취해야겠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어려우니 원.
어쩔 수 없이 인어를 안고 새롭게 찾은 내 은신처로 이동했다. 새롭다기보단 그저 사람 한 명 들어갈 만한 굴에 불과했지만, 이곳이라면 비교적 춥지 않으니 안정을 취하기엔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잘 곳에 인어를 눕히고 나니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하참, 내가 인어를 치료하는 날이 올 줄이야.”
처음엔 상황이 급박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전부 끝나고 보니 기가 막혔다. 인어다. 사람이 아닌 인어를 치료했다. 이걸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알고 보니 인어도 사람의 몸과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라고 말하는 순간, 미친놈 취급당할 게 뻔하겠지.
인어는 이제 완전히 잠에 빠진 것인지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보니 정말 미인이다. 저 물고기 하반신만 아니었다면 꽤 내 스타일이었을지도.
저 인어는 이곳에 대해 알고 있을까? 대화만 할 수 있다면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봤을 텐데…….
꾸벅꾸벅 자꾸만 고개가 떨어진다. 눈꺼풀도 상당히 무겁다. 이런 공복으로 정신을 집중해 지친 걸까?
어느새 날도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아직 물고기 한 마리도 낚지 못했는데… 여기서 잠들면 정말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걱정거리가 태산이었지만, 결국 난 모든 걸 포기하고 쓰러지듯 인어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2장 충수염(맹장)(2)
마구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몸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지만, 도드라지게 보이는 상반신과 하반신의 경계선, 빛의 방향에 따라 무지갯빛으로 빛나는 영롱한 비늘과 매끈한 지느러미까지. 그건 물고기의 모습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저건 영화 촬영을 위해 제작한 옷을 입은 게 아니야. 진짜다. 진짜 인어야!
어느 나라 민화에서 인어 고기를 먹으면 불로장생한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났다. 단지 그게 아니더라도 하반신만 보니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꿀꺽. 순간,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만약 이미 죽은 것이라면… 머, 먹어도 괜찮지 않을…….
꿈틀.
“흐아악!”
죽은 줄로만 알았던 인어가 갑자기 움직이자 괴상한 비명이 다시 튀어나와 버렸다. 더불어 세 걸음 더 뒤로 물러나 머리털이 잔뜩 곤두선 채로 인어의 상태를 지켜보았다.
인어는 정말 힘겨운 듯 꿈틀대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로소 난 그 인어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를 볼 수 있었는데, 어찌나 투명하고 아름다운지 순간 넋 놓고 바라볼 정도였다.
풀썩.
인어는 그렇게 잠시 날 올려다보곤 무너지듯 다시 쓰러졌다. 익사(인어가 익사한다는 것도 웃기지만)하진 않은 것 같은데, 기운이 없어 보인다.
조금 자세히 보니 인어의 손이 배를 향하고 있었다. 피도 흐르지 않고, 겉으로 보기에도 자상은 없다. 그렇다면 내장에 이상이 있는 건가?
자세히 살펴봐야 하겠지만, 내 발은 지면에 붙은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무려… 인어다. 사람이 아니라 괴물이라고. 저런 걸 어떻게 한단 말이냐.
“도, 돌아가자. 그래, 그냥 못 본 거야. 없던 일이야.”
휙 뒤돌아 도망치듯 걸어갔다.
그래, 차라리 그냥 이대로 놔둔 뒤에 밤에 다시 찾아와 보자. 그리고 하반신만 조금 얻어서 먹으면…….
거기까지 생각하다 문득 충격을 받아 입을 쩍 벌렸다.
나, 나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던 거냐?
먹다니. 먹겠다니. 이대로 죽어가는 걸 버려두고 밤에 찾아와 먹겠다니! 이런 미친놈! 며칠 굶더니 머리까지 이상해진 거냐! 정신 차려라, 강현호! 넌 의사다!
다시 뒤돌아봤다. 인어는 하복부의 고통이 상당한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신 차리자. 아무리 처량한 신세라지만, 난 의사다. 누군가 눈앞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어찌 못 본 체할 수 있겠어.
누구든 내 눈앞에서 죽는 꼴은 다신 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인어를 내버려 둔 채 내 은신처로 달렸다. 물론 도망가기 위해서 달린 게 아니다. 가방을 들고 오기 위함이었다.
“헉, 헉.”
아픈 다리에도 불구하고 쉴 새 없이 달렸더니 숨이 꽤 거칠어졌다. 하지만 지금 나보다도 더 급한 건 인어다. 지금 내 상태 따위를 생각할 시간이 어디 있겠는가.
“이봐! 정신 차려! 괜찮아?”
가방을 들고 와 다시 안부를 물으니 인어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인어의 얼굴이 몹시 놀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지금 처음 본 것도 아니면서 왜 저러지?
인어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한동안 나를 올려다보더니 입을 뻐끔거렸다. 마치 붕어처럼.
너무 아파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는 건가?
내가 의아해하자 인어는 인상을 살짝 찌푸리더니 다시 쓰러졌다.
난 우선 인어를 자세히 살폈다. 얼굴색도 안 좋고, 호흡도 상당히 거칠다. 이마를 만져 보니 열도 상당히 높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상황이 매우 나쁜 것 같다.
“미안해. 배 좀 만질게.”
내 손이 인어의 배를 향하자 살짝 거부하는 몸짓을 보였지만, 상당히 지쳤는지 조금도 반항하지 못했다.
“혹시 여기가 아픈 건가?”
여러 군데를 살펴보다 우하복부를 살짝 누르자 눈에 띄게 인상을 찌푸리는 인어.
젠장, 이거 충수염이다. 디펜스(근성 방어. 통증을 방지하기 위해 근육이 딱딱해지는 현상)도 상당히 강해. 어쩌면 이미 충수의 고름이 복강 내에 흘러나와 복막염까지 진행되었을지도 몰라.
만약 그 정도까지 사태가 진전되었다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내겐 복강을 세척할 생리식염수도 없으니까.
물론 생리식염수를 만드는 방법은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선 소금의 농도를 구할 수도, 그 흔한 물조차 구하기 어렵다. 단지 그것뿐이라면 좋겠지만, 중요한 건 그밖에도 애로 사항이 몇 가지나 더 있다는 것이다.
“빌어먹을, 바이탈(바이탈 사인을 말함. 혈압, 심박 수, 호흡수 등 인간의 생명 상태를 나타내는 총칭)을 체크해 줄 간호사도, 기기도 없고, 여긴 위생 상태도 상당히 나빠. 이대로 수술을 진행했다간 다른 감염증을 일으킬 우려가 상당히 큰데, 어쩌지?”
손톱을 깨물며 고민하다 문득 시선이 느껴져 내려다봤더니 언제부턴가 인어가 나를 다시 올려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다시 봐도 투명한 에메랄드 빛 눈동자는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정말 보석 같다고나 할까?
인어는 그런 아름다운 눈동자로 지그시 나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내게 무얼 말하고 싶은 걸까?
“젠장! 돌아버리겠군! 잘 들어! 지금 당신이 복통을 호소하는 이유는 맹장 끝에 달린 충양돌기(충수랑 같은 말)에 염증이 생겨 그런 거야. 그러니까 지금부터 나는… 제기랄! 알아듣지도 못할 인어한테 무슨 설명을 하는 거야! 어쨌든 지금부터 난 충양돌기를 제거하는 수술에 들어갈 거야. 알겠어?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배를 째겠다고!”
인어는 알아들은 것인지 아닌 건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다 슬며시 눈을 감았다. 허락의 표시든 지쳐서 쓰러진 것이든 이젠 상관없다. 지금 당장 수술하지 않으면 이 인어는 절대로 구원 받지 못할 테니까.
우선 바닷가에 들어가 진흙으로 엉망이 돼 있는 내 몸을 세척했다. 그런 뒤 바닷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겨 가운을 벗어 바닥에 깔고 그 위로 인어를 눕혔다. 이것으로 수술대는 완성. 선배가 이걸 보면 미쳤느냐고 멱살을 잡아 올렸겠지만, 지금으로선 이것이 최선이다. 그래도 국소마취제, 메스, 봉합용 침과 실이 있다는 게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어쨌거나 다음으로 불을 피우고는 담수가 담긴 죽통 잔 안에 온갖 의료 기기를 넣고 소독하기 시작했다. 오늘 마실 소중한 식수지만, 생명을 구하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가방에서 마취제를 찾아 성분을 확인했다. 다행히 프로카인(Procaine) 성분이다.
마취제의 일종인 프로카인은 다른 말로 노보카인이라고도 불리는데, 이 마취제는 요추마취에도 사용될 수 있으므로 정말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옆으로 누워 둥글게 몸을 말아주겠어?”
주사기에 마취제를 담으며 말했지만, 인어는 그저 멀뚱멀뚱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역시 알아듣지 못하는 건가?
하는 수 없이 내가 직접 낑낑거리며 인어를 옆으로 누이고 태아처럼 몸을 둥글게 말아 척추가 벌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처음엔 황당한 행위에 인어도 놀라 저항하는 낌새를 보였지만, 심한 복통 덕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후우, 수술 개시. 마취에 들어간다.”
수술용 장갑을 착용하고 습관적으로 수술 개시라 중얼거리며 주삿바늘을 척추 사이에 꽂아 넣었다.
요추마취는 척추마취법 중 가장 흔히 쓰이는 마취다. 자세히는 척추 사이의 경막하강(硬膜下腔) 속에 마취제를 주입해 신경전도로(神經傳導路)를 차단하여 그 이하의 지배 구역에 신경마비를 일으키는 전도 마취법이다. 배꼽 밑부터 하반신 전체에 마취가 퍼지기 때문에 맹장 수술을 진행할 때 적격이다. 인어의 신경이 과연 사람과 같을까가 문제였지만, 지금은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취제를 놓은 후, 속으로 시간을 세었다.
좋아, 10분. 약효가 퍼지기 충분한 시간이다.
“이제 아프지 않지?”
슬쩍 우하복부를 만지며 인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좋아, 크게 아파하지 않는다. 돌처럼 딱딱했던 근육의 디펜스도 사라졌다. 인어도 자신의 상태를 보곤 크게 놀라 하는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겠지. 하복부부터 하반신 전체의 감각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약액은 주입 후 5~10분이면 마취가 시작되고, 30분에서 두 시간 정도 지속된다. 30분만 되도 어느 정도 여유가 있지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지금 당장 수술을 시작해야 한다.
“놀라지 마. 절대로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지 않을 테니까.”
의지 가득한 눈으로 인어를 내려다보며 메스를 들었다. 내 손에 날카로운 물건이 들려 있는 걸 본 인어가 애처로운 눈을 했지만, 이내 포기한 듯 감아버렸다.
나도 잠시 눈을 감고 다시 심호흡했다.
지금까지 맹장 수술은 수백 번도 더 집도해 봤다. 이딴 수술은 나에겐 10분이면 충분해. 긴장하지 마라. 단숨에 끝낸다!
망설임 없이 메스를 인어의 복부로 가져가 사복근을 주행 방향으로 복직근(사람의 복벽 좌우에 나란히 상하로 뻗어 있는 한 쌍의 근육)을 따라 절개했다.
천만다행이랄까, 충수의 고름이 터져 복강 내로 퍼지진 않았다. 만약 퍼졌다면 충수를 제거해도 소생 확률이 없었을 텐데, 극악의 상황은 면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인어는 푸들푸들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의 몸을 절개해 배 안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뭐라 설명해 안심시켜 주고 싶었지만, 난 입을 열 수 없었다. 지금 내겐 마스크가 없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입안에는 수많은 병균이 서식하고 있다. 만약 이게 침을 통해 빠져나와 감염된다면 정말 골치 아파지기에 절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후우, 어쨌거나 정말 미안하지만, 지금부터 더 놀랄 짓을 할 거니까 조금만 참아라!
수술용 장갑을 낀 채로 그녀의 배 속에 손을 푹 집어넣었다. 그 기괴한 모습에 그녀의 눈이 더욱 커졌다.
난 손가락의 신경을 집중해 배 속을 헤집었다. 나로선 이럴 수밖에 없었다. 여긴 복부를 열어 고정할 만한 개창기도 없기에 그저 내 손의 감각만을 믿고 충수를 찾아 끄집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내가 집도한 환자들의 충수 위치를 떠올렸다. 전부 제각각 위치는 조금씩 달랐지만, 맹장의 선로만 어느 정도 기억하면 얼추 찾아낼 수 있다.
그래, 이 선로라면 직장 사이에 분명… 찾았다!
고름 져 잔뜩 부푼 충수를 배 밖으로 살짝 끄집어냈다. 그 모습에 인어도 몹시 놀라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그것을 빠르게 절개한 뒤, 익숙한 손놀림으로 봉합하고 붕대로 친친 감았다. 여기까지 소요 시간은 고작 8분. 10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이지만, 내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후우, 수술… 종료.”
몹시 지친 얼굴로 옆에 주저앉았다. 인어는 붕대로 감겨 있는 복부와 그 옆에 놓인 고름 진 충수를 번갈아 보다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다시 무언가 말하고 싶은지 뻐끔뻐끔 입술을 움직인다.
대체 뭐지? 이젠 말이 안 나올 정도로 아프진 않을 텐데. 설마 성대에도 문제가 생긴 건가?
인어는 몇 번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포기하곤 다시 드러누웠다. 그래, 역시 지쳤겠지. 금방이라도 파열할 것 같은 충수였으니까. 며칠간 상당히 괴로웠을 거야.
난 걱정스러운 얼굴로 인어를 내려다보았다. 비록 수술은 성공했지만 이런 곳에 계속 누워 있다간 다른 감염증을 불러일으킬 확률이 높아진다. 지금 당장 ICU(중환자실)에서 안정을 취해야겠지만 아쉽게도 상황이 어려우니 원.
어쩔 수 없이 인어를 안고 새롭게 찾은 내 은신처로 이동했다. 새롭다기보단 그저 사람 한 명 들어갈 만한 굴에 불과했지만, 이곳이라면 비교적 춥지 않으니 안정을 취하기엔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내가 잘 곳에 인어를 눕히고 나니 뭔가 감회가 새로웠다.
“하참, 내가 인어를 치료하는 날이 올 줄이야.”
처음엔 상황이 급박해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지만, 전부 끝나고 보니 기가 막혔다. 인어다. 사람이 아닌 인어를 치료했다. 이걸 누구에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알고 보니 인어도 사람의 몸과 별반 다르지 않더라고요’라고 말하는 순간, 미친놈 취급당할 게 뻔하겠지.
인어는 이제 완전히 잠에 빠진 것인지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보니 정말 미인이다. 저 물고기 하반신만 아니었다면 꽤 내 스타일이었을지도.
저 인어는 이곳에 대해 알고 있을까? 대화만 할 수 있다면 여기가 어디인지 물어봤을 텐데…….
꾸벅꾸벅 자꾸만 고개가 떨어진다. 눈꺼풀도 상당히 무겁다. 이런 공복으로 정신을 집중해 지친 걸까?
어느새 날도 어둑어둑해지고 있었다. 아직 물고기 한 마리도 낚지 못했는데… 여기서 잠들면 정말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걱정거리가 태산이었지만, 결국 난 모든 걸 포기하고 쓰러지듯 인어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